여성 독립유공자 652명 중 55명이 미주서 활동
이역만리서 조국의 독립 꿈꿔
여성 한계 넘어 각 분야서 두각
자녀 민족교육에도 열정 보여
이들은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며 여러 활동에 동참했던 수많은 1세대 여성을 대표한다. 당시 모든 한인 여성은 한마음 한뜻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미국에서 자녀의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일제강점기 한인 이민선조 1세대 여성들은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LA, 필라델피아 등 미 전역에서 여성단체를 만들고 1945년 8월 15일 광복 순간까지 조국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들은 광복 후에도 조국이 어려울 때마다 구호품 지원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일제강점기 한인 여성들은 남편의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역할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들은 미주 각 지역에서 부인회를 결성하고, 연합단체인 '대한여자애국단’을 조직해 여성 주도 독립운동 체계를 구축했다. 남편과 대등한 위치에서 독립운동에 나섰고, 피땀어린 노동의 대가로 얻은 귀한 돈을 40년 넘도록 독립자금으로 보탰다. 한인 차세대 정체성 함양을 위한 뿌리교육의 기틀도 120년 전부터 다졌다. 한인 1세대 여성들의 삶을 대변한 주요 독립유공자를 짚어봤다.
※자료: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미주독립유공자 전집 애국지사의 꿈 민병용 저
3불씩 모아 4만6천불 독립자금 지원
2020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된 강혜원 선생은 평남 평양 사람이다. 1905년 5월 남동생 강영승(후일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등 가족과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민한 한인 이민선조 1세대다.
1912년 본토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김성권(후일 흥사단 이사장)과 결혼했다.
이후 강혜원 선생은 중가주 다뉴바로 이주했다. 이곳 포도농장에서 일하던 강 선생은 올케 강원신을 비롯, 한성선, 한영숙, 한신애, 김경애 등과 1919년 3월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조직했다. 같은 해 8월 2일 새크라멘토, LA, 샌프란시스코, 윌로우스 부인회 대표들과 여성단체 통합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을 창립했다.
초대 총단장 겸 총부 위원으로 1920년 2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통해 독립운동자금 500달러를 임시정부에 전달, 꾸준하게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당시 단원들은 매달 3달러 단비를 임시정부에 송금, 임시정부와 민족운동단체에 총 4만6298달러를 후원했다.
1930년 LA로 이주해 대한여자애국단, 흥사단, 대한인국민회를 후원, 한인 자녀 민족교육 등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강 선생의 가족 5명 또한 건국훈장에 추서됐다.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에 앞장서
2021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된 심영신 선생은 황해도 송화 사람이다. 이민선조 1세대로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심 선생은 1913년 4월 19일 하와이에서 황마리아 등과 함께 여성운동단체인 대한인부인회(大韓人婦人會)를 결성했다. 2세 자녀 한국어교육 장려, 일제용품 구매 거부운동, 교회와 사회단체 후원, 재난동포 구제를 주요 활동으로 삼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조국독립운동 지원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심 선생은 하와이 각 지방의 부녀대표자를 소집해 부녀공동대회를 개최 독립운동 후원을 결의했다.
심 선생은 1920년대 말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재정부족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자 하와이 한인 동포사회에 이 사실을 알리고 모금에 나섰다. 1941년 4월에는 하와이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 대한부인구제회 대표로 참석했다. 임시정부 후원과 대미외교 및 선전사업에 앞장섰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필라 회의서 식민통치 부당성 고발
김노디 선생은 황해도 곡산 사람이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하와이에 이민했다. 사탕수수 노동자였던 부모 헌신으로 오하이오주 오벌린대학에 입학했다.
재학생이던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대표자회의(First Korean Congress)’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김 선생은 한국 여성들이 일제 식민 통치하에 겪는 고난, 해방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 대해 연설했다.
1919년 10월부터는 매주 1~2차례 또는 3~4차례 미국 각지를 돌았고, 미국사회에 한국의 사정을 알리고 일제의 반인도적인 행위를 고발했다.
김 선생은 1921년 3월 1일 오벌린대학 3·1독립선언 축하 연설, 6월 1일 오벌린 한인구제회 지회를 조직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1923~1935년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여학생 감독, 1930년 9월부터 교감, 1935년 교장으로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1926~1945년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에서 활동하며 독립자금 모금 및 독립자금 납부에 앞장섰다. 해방 후에는 한국으로 들어가 1953년 11월 24일 외자구매처장에 임명됐고, 1955년 8월까지 재직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한인사회 단합과 국권 회복운동 주도
평안남도 강서 사람인 이혜련 선생은 1902년 9월 3일 도산 안창호와 결혼했다. 결혼 직후 도산과 미국에 이민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산을 도와 ‘공립협회’를 결성해 한인사회 단합과 국권회복운동을 주도했다. 공립협회는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통합해 ‘대한인국민회’를 창설,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이 됐다.
이 선생은 도산의 독립운동을 전폭 지원했고, 대한인국민회를 위한 ‘의연금, 국민의무금, 특별의연금’ 등 독립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으로 도산이 중국으로 떠난 뒤, 이 선생은 LA에서 ‘부인친애회’를 조직해 독립의연금 모금에 솔선수범했다. 1919년 5월 18일 중가주 다뉴바에서 열린 부인회 통합 대한여자애국단 창설 당시 LA대표로 참석했다. 1938년 3월 10일 도산 순국 후에도 여자애국단을 통한 항일전에 매진했다. 해방 후에도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 LA한인사회 발전에 온 힘을 기울였다. 2008년 건군훈장 애족장 추서.
독립운동 단체 조직에 주도적 역할
서재필 워싱턴 회의 참가경비 모금
한성선 선생은 1919~1945년 중가주 다뉴바에서 신한부인회 대표, 대한여자애국단 총부위원·총단장 등으로 활동하며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강원신, 강혜원 등과 한인부녀자회를 이끌고 한인 자녀 민족교육에도 앞장섰다.
1919년 11월 중가주리들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 휴전기념일 행사 준비위원으로 선정됐고, 워싱턴회의에 참여할 서재필의 경비를 모금해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로 송금했다. 1921년 11월 25일 다뉴바에서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했다. 이후 딜라노로 이주한 뒤1931~1932년 3·1절 기념식 참여 등 1918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자금을 지원하였다.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한인 자녀 민족교육 실시에 매진
박원신 선생은 평안남도 평양 사람이다. 1904년 강영승(후일 대한인국민회 총회장)과 결혼 뒤, 1905년 5월 남편 가족과 함께 하와이에 이민했다. 사탕수수 농장 일을 하다 시누이 강혜원과 중가주 다뉴마로 이주해 시간당 15센트 노임을 받고 남편 학업을 뒷바라지했다. 동시에 강혜원과 여성독립운동에 나섰다.
1919년 3월 2일 다뉴바 지방에서 신한부인회를 결성해 회장에 선출됐다. 같은 해 미주 내 부인회를 통합한 대한여자애국단 창설에 나서 제3대 총단장을 역임했다. 이후 미주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 민족독립운동, 한인 자녀 대상 민족교육, 일본상품 불매운동에도 앞장섰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 독려
양제현 선생은 1917, 1919년 새크라멘토부인회 회장, 1929~1930년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 1925년, 1928년, 1941~1942년, 1944년 대한여자애국단 샌프란시스코지부 단장, 1931~1932년, 1934~1938년, 1940년, 1942년,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처럼 양 선생은 1917~1945년까지 독립자금 모금 등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20년 3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3·1절 기념식에서 ‘여자의 일생’이란 제목으로 독립군을 따라 생을 마칠 것을 연설했다.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차세대 교육 위해 학교 시설 건립
■임메불(1884.07~1987.12)
평안남도 평양 사람인 임메불 선생은 1909년부터 1945년까지 LA에서 부인친애회 대표, 대한여자애국단 LA지부 단장, LA여자청년회구제원, 대한인국민회 LA지방회 구제위원,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1942~1945년)으로 활동하며 조국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나서고 활동을 지원했다.
임 선생은 1929년 12월~1930년 1월 한인 자녀 국어교육을 위한 교육기관 설립 준비 기성위원으로도 참여했다. 1930년 3월 여자애국단 LA지부단장 때는 조선여자대학 설립 건축비 모금운동도 벌였다.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도 지원했다.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대한부인회 조직해 동포 구제
■황마리아(1865~1937.08)
평안남도 평양 사람인 황마리아 선생은 ‘자녀 교육’을 위해 1905년 5월 장남 강영승, 강영승의 처 강원신, 차남 강영옥, 장녀 강혜원을 데리고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민했다.
황 선생은 1913년 4월 호놀룰루에서 한인 자녀 국어교육에 앞장섰다. 일본상품 배척, 동포 구제를 목적으로 한 대한부인회도 조직했다. 1914년 부인회 재무로 서간도 재난동포에게 구제금 300달러를 송금하는 등 6년간 한국과 중국 재난동포 구제사업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부인회를 독립운동자금 모금, 재난동포 구제를 위한 대한부인구제회로 통합했다. 1930년부터 1937년 별세 때까지 임시정부 독립자금 지원, 김구에게 군자금 100달러 지원, 한인협회 조직, 한인교회 사업 등에 헌신했다.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신문 통해 독립사상 고취 전력
■차(임)인재(1895.04~1971.04)
차인재 선생은 1920년 6월 경기도 수원군수원면삼일학교 교사로 근무 중 박선태 등이 조직한 구국민단에 참여해 ‘독립신문과 대한민보’ 등 독립사상에 관한 기사 배포 활동을 했다.
1920년 미국 이민 후 1924년 대한인국민회 맥스웰지방회 학무원으로 한인 자녀 국어교실도 운영했다. 1933년 대한여자애국단 LA지부 부단장, 1936년 여자청년회 서기로 활동했다. 1941~1945년 사이 대한인국민회 LA지방회와 여자애국단 LA지부 회장으로 활동했다.
차 선생은 1922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한국광복군에 후원금 지원
■전그레이스(1882.06~1948.07)
전그레이스 선생은 1914년부터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활동을 시작으로 1945년까지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 기간 독립금, 조선여자대학 설립 기부금, 군자금 등의 명목으로 30차례 이상 독립자금을 냈다.
전 선생은 샌프란시스코 부인회 활동, 대한여자애국단 활동을 하며 독립운동 지원을 독려했다. 1934년 LA로 이주 후 이듬해 여자애국단 LA지부 단장이 됐다. 1940년 딜라노로 이주한 뒤에는 현지 지부도 결성해 단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한국광복군 후원금 모금에 앞장섰다.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건국훈장(建國勳章,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기를 공고히 함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5등급으로 1등급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 Republic of Korea Medal), 2등급 대통령장(大統領章, Presidential Medal), 3등급 독립장(獨立章, Independence Medal), 4등급 애국장(愛國章, Patriotic Medal), 5등급 애족장(愛族章, National Medal)이다.
김형재 기자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