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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조국, 타국에서 피땀흘렸던 그들의 기록

[광복절 기획] 숨겨진 미주 한인 독립운동사
2) 마침내 그날이 오기까지,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기

뉴욕한인교회서 독립운동 논의
3·1운동 이후 필라·뉴욕 등서
전세계에 대한민국 독립 의지 피력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자유대회 참석자들의 행진 모습.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자유대회 참석자들의 행진 모습.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았다. 
빼앗긴 들에도 결국 봄은 찾아왔고, 7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그날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피, 땀, 눈물이 흘렀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일제의 핍박을 고스란히 느끼며 앞장서 싸웠다면, 그 뒤에는 먼 미국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한인들이 있었다. 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었지만 독립을 향한 염원만큼은 더없이 간절했다. 머나먼 타지에서 미주의 한인들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미주의 독립투사들. 오늘은 그들의 행적을 조명하고자 한다.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거점지, 뉴욕한인교회


맨해튼 115스트리트에는 당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싶었던 미주 한인들의 염원이 가득 담긴 공간이 있다. 바로 한인들의 독립운동 거점지로 사용됐던 뉴욕한인교회다. 1921년 3월 2일 맨해튼 웨스트 43스트리트에 위치한 타운홀에서 서재필 박사를 필두로 열린 3·1독립만세운동 대회 개최를 계기로, 미주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될 뉴욕한인교회가 탄생했다. 뉴욕은 미주 다른 지역에 비해 한인들이 많지 않았지만, 국제사회에 한인의 독립의지를 알리는 주요 도시였기에 이승만·서재필·안창호 등 뉴욕한인교회의 문턱을 넘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라를 잃고 해외살이를 하는 동포들은 이곳에 모여 서로의 향수를 달래고 독립정신을 북돋아주며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살구 농장에서 생긴 일
 
1910년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를 시작한 일본은 해외에 사는 한인들까지도 지배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그 야심은 1913년 6월 뉴욕의 살구농장에서 드러났다. 당시 살구 따는 일을 하러 갔던 100여명의 한인들은 그곳에서 주민들의 배척을 받았다. 당시 미국, 특히 뉴욕에서는 배일사상(일본인 배척 사상)이 팽배했는데, 미국인들이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착각해서 생긴 불상사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 영사는 한인들을 찾아가 미국정부와 교섭해 배상금을 받아주겠다고 제안했고, 이에 한인들은 분노하며 해외 한인들까지 지배하려는 일본의 야망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한인국민회’에 통보했다.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 조국 독립을 목적으로 결성된 당시 유일한 해외 한인단체였다. 대한인국민회는 일본의 음모에 대해 미국 국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항의했고, 이에 국무부는 “한인은 일인이 아니며, 이제부터 재미한인과 관련된 일은 일본 정부를 통하지 않고 대한인국민회와 직접 교섭할 것이다”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는 미국 사회에 한국이 일본의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뉴욕에서는 ▶18명의 한인들이 규합해 결성된 민간외교 독립운동단체 ‘신한회’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안창호의 ‘흥사단’과 이승만의 ‘동지회’ 뉴욕지부 ▶여성독립운동단체 ‘근화회’ 등의 단체들이 생겨났고, 이를 중심으로 활발한 독립운동이 이뤄졌다.  
 
뉴욕 한인들이 매년 3.1운동 기념식을 진행하며 한국의 상황에 대해 알렸던 맨해튼 43스트리트의 타운홀.

뉴욕 한인들이 매년 3.1운동 기념식을 진행하며 한국의 상황에 대해 알렸던 맨해튼 43스트리트의 타운홀.

◆한국을 넘어, 전세계에 독립 염원을 외치다
 
1919년 3월 1일 한국에서는 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였던 서재필 박사는 “3·1운동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한라산을 넘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까지 들렸다”는 말을 남겼다. 이에 미주의 한인들도 전세계에 독립 염원 목소리를 전하기 시작했다. 1919년 4월 14일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한인들은 서재필 박사의 주도하에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해 일제의 폭압적 식민 지배를 폭로하고, 한인의 자유 독립 의지를 담은 결의문과 호소문을 미국 정부와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다. 뉴욕에서는 매년 3·1운동 기념식을 진행했는데, 1921년 3월 2일 맨해튼 타운홀에서 개최된 제2주년 기념식에는 100여명의 한인들과 1200여명의 친한파 미국인들이 비를 뚫고 참석해 한국의 독립 의지를 과시했다.  
 
 

1945년 8월 15일, 뉴욕에 울려퍼진 뜨거운 함성

 
피 같은 돈 모아 상해임시정부로
3·1운동 후 10년간 18만불 전달  
조국 독립 위해 미군 자원하기도
  
(1) 1926년 뉴욕 흥사단(안창호가 창설한 독립운동 단체) 연차총회 기념사진. (2)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미국과 일본 사이 태평양전쟁에 자원입대한 뉴욕의 한인들.

(1) 1926년 뉴욕 흥사단(안창호가 창설한 독립운동 단체) 연차총회 기념사진. (2)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미국과 일본 사이 태평양전쟁에 자원입대한 뉴욕의 한인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인들의 모금 운동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미주 한인들은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승만은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미국과 유럽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선전하며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추진했다.  
 
나라를 뺏기고 타지에서 생활하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한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 같은 돈을 내놨다. 기록에 따르면 미주 한인들은 3·1운동 이후 10년 동안 약 18만 달러라는 거액의 현금을 상해임시정부에 바쳤다. 10년 넘게 뉴욕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쫓아온 뉴욕한인교회 장철우 전 담임목사는 “당시 뉴욕 한인들의 유일한 소원은 조국에 돌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노동해서 번 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고 전했다.  
 
◆이승만의 뉴욕 도착
 
1932년 3월호 〈Korean Student Bulletin〉(3·1운동에 자극을 받아 조직된 북미유학생총회가 미국에서 발간한 영문잡지) 1면에는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이 컬럼비아대학에서 뉴욕 한인들과 찍은 사진이 실렸다. 이승만이 뉴욕에 온 것은 미국 NBC방송의 초청을 받아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한 라디오 연설을 하기 위해서였다. 연설에 대한 소식이 보도되자 이승만은 위협 전화를 여러 차례 받았다. 당시 뉴욕시경(NYPD) 커미셔너가 이승만의 신변을 염려한 나머지 형사 2명을 파견해 이승만을 보호할 정도였다. 2분 남짓한 연설이었지만, 그 효과는 엄청났다. 이승만은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래 자행해 온 갖가지 불법행위를 밝혔다. 〈K.S.B〉는 “연설이 끝나자마자 미 전역으로부터 방송국으로 온 축하편지가 홍수를 이룰 만큼 쇄도했다”고 보도했다. 이후에도 이 박사는 뉴욕에 머물며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국제연맹의 규약 16조에 있는 대로 경제적인 보이콧을 할 것”을 역설했다. 
 
(3) 1932년 뉴욕에 도착한 이승만 박사가 컬럼비아대 광장에서 한인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4) 1918년 12월 이승만이 출국 허가증을 받지 못한 것을 걱정해 안창호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대한인국민회의 민찬호.정한경이 뉴욕의 소약국동맹회의에 참석한 것을 알리고 있다. 현재 뉴욕한인교회에 전시.

(3) 1932년 뉴욕에 도착한 이승만 박사가 컬럼비아대 광장에서 한인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4) 1918년 12월 이승만이 출국 허가증을 받지 못한 것을 걱정해 안창호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대한인국민회의 민찬호.정한경이 뉴욕의 소약국동맹회의에 참석한 것을 알리고 있다. 현재 뉴욕한인교회에 전시.

◆실낱같은 희망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과 일본 사이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주 한인들은 처음으로 독립에 대한 가능성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실낱같은 희망이 보이자 한인들은 1942년 2월 워싱턴에서 ‘한인자유궐기대회’를 열고 미국 정부가 한국의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과, 유엔가입을 도와줄 것 등 5개항이 담긴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승만은 이때 연설을 통해 “일본이 미국의 적인 이상 한인들이 미국을 도와 적을 무찔러야 한다”고 호소했으나, 미주의 한인들은 이미 이전에 미국을 지원하는 뜻으로 6만 달러에 달하는 방위채권을 샀다. 젊은 한인들은 자원해서 미군에 지원했으며, 캘리포니아에서는 총 110명으로 구성된 한국인 예비부대가 창설되기도 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대동단결한 여성들
 
정치 문제는 남성에게 일임하는 것이 상례였던 시대였지만, 뉴욕의 여성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과감히 나섰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뉴욕의 여성들은 ‘미주동부대한부인회’를 창설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주말마다 한복을 입고 뉴욕의 중심지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모금운동을 했고, 그 돈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후원하기도 하고, 뉴욕 지역에서 미군으로 출전한 한국 청년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마침내 그날
 
1945년 8월 15일, 뉴욕에서도 뜨거운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뉴욕한인교회 60년사에는 “마침내 그날이 오자 뉴욕시는 사방에서 울리는 종소리로 종일 요란했다”고 기록돼 있다. 평화의 날이 왔음을 고하는 우렁찬 승리의 노래는 뉴욕 시민들의 고막을 울렸다.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광복절 79주년을 맞아 뉴욕중앙일보는 1920~1950년대 뉴욕한인교회 교인명부를 통해서 동부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명단을 확보했다. 머나먼 미국 땅에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피땀 흘렸던 이들의 이야기를 뉴욕한인교회 60·70년사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가나다 순)  
 
김경(상해임시정부에 재정 보조)  
 
김도연(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YMCA에 모여 독립선언 논의)
 
김마리아(뉴욕에서 한인 여성독립운동단체 ‘근화회’ 조직. 악랄한 일본 식민정책 미국에 알림)  
 
김준성(뉴욕한인교회 목사로 일하며 한국 광복군, 임시정부 후원에 큰 역할)  
 
김헌식(1905년 을사조약 이후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체류하며 독립운동)
 
김형린(뉴욕 조국광복사업추진회 회장)  
 
박용만(한인 대표해 뉴욕 소약국동맹회의 참석한 독립운동가)
 
박인덕(1919년 3·1운동시 학생들 선동. 미국 돌며 3·1운동 관련 강연)
 
배민수(‘국민회’라는 단체 만들어 독립운동하다가 체포)
 
신성구(1910년대 김헌식과 함께 독립운동)  
 
송종익(도산 안창호와 가까운 관계로 독립운동 물질적으로 협조)  
 
윤병구(이승만과 뉴욕 오이스터베이 별장에서 휴양 중이던 루스벨트대통령 찾아가 청원서 제출)  
 
윤헬렌(1921년 뉴욕 타운홀대회 참가해 외국인들에게 한국 실정 전달)  
 
이봉수(1919년 만주에서 독립운동)
 
이병두(서재필 박사 도와 미주의 학생운동, 독립운동 주도)  
 
이승만(1919년부터 광복 때까지 구미위원부 위원장.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  
 
이원익(1919년 상해임시정부 요원)  
 
임창영(뉴욕 한인들을 규합해 일본영사관 앞에 나가 항의 시위)  
 
임초(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회의에서 일본 국민에게 보내는 결의안을 작성한 3인 중 하나. 뉴욕 흥사단의 주요 인물)
 
정애경(3·1운동 당시 한국에서 독립운동 하다가 상해로 탈출. 뉴욕한인교회 부인회 회장)  
 
조병옥(수양동우회사건으로 안창호와 투옥. 흥사단 주요 인물)
 
한승인(수양동우회사건으로 안창호, 조병옥과 투옥.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의 한인학살 모면 후 일본의 만행 폭로)
 
허정(일제강점기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 미국에서 독립운동하던 이승만 보좌)  
 
천세헌(시카고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며 많은 돈을 상해임시정부에 전달)
 

윤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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