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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1 독립정신의 뿌리

 천안에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가르치고 있던 여교사 임영신은 어느 날 행상 차림의 독립운동 연락원으로부터 전문을 전달 받는다. 이승만 박사의 지령문을 필사한 메시지였다. 전단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윌슨 대통령이 세계평화를 위한 14개 조문을 선언, 그중에 하나가 민족자결권인데 이를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한민족의 분명한 의사표시가 국제적으로 속히 알려져야만 한다. 윌슨 대통령이 반드시 우리를 도울 것이다.” 이때 용기를 얻은 임영신은 본격적인 투쟁에 나섰다. 그녀는 다음 해인 1919년 3·1운동 때 전주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승당 임영신 ‘나의 40년 투쟁사’에서)  
 
인촌 김성수는 “3·1 운동은 이승만이 기획하고 연출했다”는 증언을 했다. 3·1운동이 선언한 자유독립국 청사진은 3·1운동으로부터 2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써낸 옥중저서 ‘독립정신’에 대한민국 건국 설계도로 구체화되어 있다. 이 책은 미국에서 출판되자마자 총독부가 판금시켰지만 안 읽으면 낙오자가 될 정도여서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필독서가 됐다.  
 
3·1 운동은 독립선언서에 명기된 것처럼 자유와 평화의 기독교 정신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이승만의 국가 건국운동의 출발점이 됐고 세계 최초의 비폭력 3·1투쟁 정신을 탄생시킨 역사적 사건이 됐다.  
 
모든 투쟁에는 리더가 핵심이다. 3·1독립운동은 이승만이 기획하고 불을 지른 항일 투쟁이다. 이승만의 스승이요 그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한 윌슨(프린스턴 대학교 총장 역임)의 자결론이 나온 직후부터 이승만은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한국의 동지들에게 구국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워싱턴에서 재미동포들과 구국운동을 하고 있던 이승만이 보내온 밀서의 내용은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해 한민족의 노예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미국 동지들이 구국운동을 추진하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다급해진 이승만의 재촉이었다.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기당 현상윤 세 사람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절박감을 느끼고 행동에 박차를 가했다. 이들은 조직이 살아있는 종교인들을 움직여아 한다는 이승만의 밀서를 이행하기로 결단을 내린다. 천도교 손병희 선생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의 팔다리 역할을 하는 보성학교 교장 최린을 동원했다. 우리도 나서야 된다고 생각들은 하면서도 망서리고 있던 그들 가슴에 이승만의 밀서는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종교조직을 활용한다는 이승만의 의도는 적중했다.
 
죽음을 각오한 삼천만 동포들이 일시에 활화산 분출처럼 전국 방방곳곳에서 들고 일어났다. 생명을 아낌없이 던지며 일어난 3·1 운동, 그 자랑스러운 역사가 103주년을 맞는다. 우리 한인사회도 좌파, 우파, 진보, 보수 따지지 말고 하나로 뭉쳐 자유 대한민국의 위상을 국제 무대에 우뚝 세워야 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구호를 되돌아보며 다시 한번 3·1정신을 후손들에게 전해야 한다. 단결, 희생, 자유의 정신을 새롭게 꽃 피울 때다.

최학량 / 이승만건국대통령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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