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편지, 그 영원한 그리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청마 유치환의 ‘행복’이라는 시다. 참다운 행복이 무엇인가를 생각게 하는 시다. 우리가 아끼고 사랑했던 것들, 우리를 푸근하게 감싸주던 것들, 우리 마음을 훈훈하게 데워주던 것들이 알게 모르게 사라져가고 있다. 초가집들이 사라졌다. 가을 양광에 늙은 박 덩굴을 무료히 머리에 이고 있는 우리의 노모 같은 초가집은 산업화의 회오리에 밀려 어느새 그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밤하늘의 총총한 별들을 바라보는 것을 단념해야 하고, 봄 노고지리, 가을 메뚜기를 시골에서조차 만나기 어렵게 됐다. 해질 무렵 시골 농가의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밥 짓는 연기는 옛 추억 속에 잠겨버렸고, 우직한 소달구지의 정겨움은 버릇없는 트럭으로 대체되었다. 우리 어머니들의 알뜰함이 담겨있던 대나무로 짠 시장바구니는 어느새 일회용 비닐봉지가 그 구실을 대신하고, 때도 철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과일과 푸성귀는 원두막과 콩서리에 얽힌 그리움을 앗아가 버렸다. 또 이메일과 스마트폰의 보급은 편지 쓰는 즐거움과 편지 받는 반가움을 부질없는 일로 만들었다. 시간을 아끼는 현대인은 이제 편지 따위는 하릴없는 사람이나 끄적거리는 것으로 치부한다. 정보화시대의 철학자 맥루한은 열렬한 전화예찬론자이다. 활자문화에서 자라난 구세대들은 전화를 싫어하지만, 전파시대에 출생신고를 낸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애완동물처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화는 그의 이론을 듣고 있으면 애정만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방식과 일반적인 행동까지도 바꾸어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활자문화 속에서 자라난 구세대는 고립적인 개인주의에 그 특징이 있지만, 정보화시대에 사는 현대인은 높은 참여성이 있다고 맥루한은 주장한다. 그리고 전화야말로 현대인에게 그러한 성격을 부여한 챔피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화는 참여성이 강한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스마트폰을 현대의 메시아로 보든, 혹은 독신자가 샤워를 할 때마다 울리는 현대의 악마로 보든, 그것은 분명 현대인의 관계를 횡적으로 확대시켜주고 있다는 것이다. 편지는 말하자면 글자는 우리에게 영원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감정도 사상도 문자로 얘기할 때는 그것이 수백 년 수천 년의 먼 훗날까지 남으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화는 축지법처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공간을 소멸시킨다. 그 대신 시간을 정복할 수는 없다. 옆으로만 번지게 하고 시간에 그 종적(縱的)인 관계를 생각하지 않게 한다. 현대인은 하루살이처럼 살아간다. ‘오늘만!’, ‘오늘만!’ 이렇게 외치면서 그들은 전파의 가벼운 날개를 타고 시간의 강하를 따라간다. 편지의 깊고 그윽한 맛을 잃어가고 있다. 편지란 흩어진 가족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친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감싸주는 위로자다. 편지를 쓰는 사람이나 받아보는 사람 모두가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해준다. 편지에는 화려한 문체나 깊은 지식, 물 샐 틈 없는 논리가 없어도 좋다.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백시킨 진실만을 드러내주면 된다. 이러한 편지는 말로만 주고받거나 분위기로만 맺어진 사랑과 정을 더욱 깊게 해준다. 여름방학 때 멀리 있는 친구로부터 받는 한 장의 편지, 그 편지의 어느 구석엔가 호박잎 같은 냄새가 나는 것을 읽고 또 읽으면서 모닥불처럼 피어오르는 행복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훈련소에 입영한 아들로부터 배달된 첫 편지를 받아들고 땀이 배어있는 사연을 읽고 또 읽으면서 기뻐 눈물 흘리는 엄마의 마음… 편지 이외의 통신수단이 대중화되지 못했던 시절만 하더라도 우편배달부를 기다리는 마음은 그리움 그 자체였고, 편지를 쓴다는 행위도 즐거움 그 자체였다. 어버이가 자녀를 외지로 떠나보낼 때나 친지들을 만났다 헤어질 때면 ‘편지를 하라’는 정감어린 말이 오갈 정도였지 않은가. 그러나 전화가 대중화되면서 편지는 서서히 빛이 바래기 시작, 푸대접받아 뒷전으로 물러나 앉고 말았다. 더구나 이메일, 스마트폰이 개선장군처럼 등장하면서부터 편지라는 존재는 점점 더 고전으로 묻혀지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의 생활 주변에서 사랑과 정을 담은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가뭄에 콩 나는 것과 다름없게 되어버렸다. 요즘 아이들은 편지를 쓰지 않는다. 서울이나 외국에 유학 간 아들에게서 행여 소식이 올까 하고 까치 울음소리를 상서로운 조짐으로 반기던 우리 어머니들의 ‘기다리는 마음’을 아이들은 모른다. 그래서 편지는 아련한 향수다. 그리움이다. 사라져가는 것은 정겹고 아름다운 것뿐이다. 그 사라져간 자리에는 이메일, 스마트폰과 이른바 ‘능률적인 인생’이 버티고 서 있다. 이렇게 해서 편지의 시대는, 문자의 시대는 지나간다. 러브레터의 시대가 가고 그 대신 스마트폰의 벨 소리가, 카카오톡의 요상한 신호음이 귀를 두드린다. 정글의 약자였던 인간은 소셜 애니멀의 지혜로 야생의 위협과 싸우며 문명을 이룩했다. 문명은 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라는 꼭짓점에서 초연결의 정점을 찍었지만, 동시에 우리는 서로를 감각하던 민감한 협응의 촉수를 잃어버렸다. 너무 쉽게 우정을 거래하고, 물건을 사는 ‘소비 네트워크 서비스’라는 동굴 안에서, 우리는 점점 더 무력해졌다. 외로움이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세상이다. 외로움의 동굴에서 서로를 구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다정함이다. 강해지려면 다정해져야 한다. 다정해지려면 부드러워져야 한다. 부드러워지기 위해 우리는 더 필사적으로 서로를 ‘감각’해야 한다. 재난 현장에 고립돼도 다가오는 인간의 기척이 우리를 살게 한다. 살며 생각하며 그리움 편지 편지 이외 편지 따위 이메일 스마트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