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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초혜 시인 ‘그리움 뿌리에 보듬고’ 출간

“귀한 민족시, 겨레 시를 모아서 시조집에 수록해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초혜(사진) 시인이 첫 시조집 ‘그리움 뿌리에 보듬고(시산맥·사진)’를 출간했다.     첫 시집 ‘창밖엔 치자꽃이’에 이어 11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시집 ‘시간의 바람결’에 이은 세 번째 출간이다.     올해 84세로 팔순이 훌쩍 넘은 이 시인은 “두 번째 시집 출간 이후 12~13년 동안의 삶이 담겨있다”며 “캘리포니아에서 어언 반백 년의 삶과 신앙생활을 시조 문학으로 표현했다”고 밝혔다.     ‘그리움 뿌리에 보듬고’에는 1부 봄, 2부 여름, 3부 가을, 4부 겨울 등 총 4부에 81편의 시조 작품이 수록됐다.     유심시조아카데미 홍성란 박사는 “미국으로 건너간 지 45년, 적지 않은 텍스트에서 시인이 통과한 신고의 시간이 보인다”며 “단독 시조집을 내지 않은 만큼 다작은 아니지만 이초혜 시인 시조의 진폭은 크다”고 평했다.     이화여자대학교 재학 시절 시조부에서 이태극 교수로부터 시조를 배운 이 작가는 방언, 시조, 향가, 민요, 전설 등을 수집하며 시조를 연구했다. 졸업 후 동아일보 기자를 역임하고 1979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1996년 ‘문학세계’로 시등단을 한 후 ‘창밖엔 치자꽃이’, ‘시간의 바람결’ 등 시집을 출간했다. ‘해외동포창작문학상’, ‘미주PEN문학상’, ‘한미문학상’, ‘영매상’ 등을 수상했다.     미국방외국어대학(D.L.L.) 한국어 교수, 남가주한국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며 미주지역에서 2세 한국어 교육과 한국어 알리기에도 평생 힘썼다.  이은영 기자그리움 시인 그리움 뿌리 시인 시조 유심시조아카데미 홍성란

2024-04-07

[김상진 기자의 포토 르포] LA의 보름달

  추석(9월29일)이 다가옵니다. 독자님들께 꽉 찬 보름달을 선물합니다.     사진은 ‘캐논 EOS 5D Mark4’ 바디에 400mm  렌즈로 찍은 LA상공의 보름달입니다. 사람 눈에는 보름달이 노랗게 보이지만 기계인 카메라의 렌즈로 보면 회색으로 보입니다.   추석은 이민자에게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미국에서는 보름달을 ‘풀문(Full moon)’ 또는 ‘블루 문(Blue moon)’이라고 합니다. 보름달은 매달 두 번씩 모습을 드러냅니다. 블루 문은 두 번째로 뜬 달을 일컫는 말입니다. 달의 색깔과는 무관합니다.     미국에서 추석에 보는 블루 문은 우리 정서의 보름달과는 사뭇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보름달은 우수와 고독, 슬픔을 상징합니다.     반면, 이민자의 기억 속 추석 보름달은 블루 문이 아닌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지만, 이민생활 가운데 명절은 그저 기억 속의 추억으로 박제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민자에게 미국의 보름달은 추억, 그리움, 아련함입니다.     고국은 미국보다 하루가 빠릅니다. 달 역시 고국보다 하루 늦게 LA 하늘에 뜹니다. 다음 주 금요일은 추석입니다.  그날 저녁 LA하늘에 걸린 보름달은 두 개로 보일지 모릅니다. 고향보다 하루 늦게 뜨는 보름달은 고국의 부모, 형제, 친구들의 얼굴을 담아서 하늘에 뜰 것입니다.     추석을 추억하며 눈물이 흐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젖은 눈에 보름달은 두 개로 보일 수도 있겠지요. 하나는 추억을 품은 달, 또 하나는 힘겨운 이민자의 고달픈 삶을 품은 달 말입니다.   독자 여러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으시길 바랍니다. 상진 사진부장 kim.sangjin@koreadaily.com김상진 기자의 포토 르포 보름달 추석 보름달 추억 그리움 반면 이민자

2023-09-22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보고 싶은 사람

보고 싶운 사람을 만나러 로즈힐 세미터리로 간다. 옆에 계실 때에도 돌아서면 서글프고 아련했던 사람. 내 유년의 시절을 사랑으로 보듬어주신 사람. 용기 잃지 말라고 환한 미소를 지어주셨고, 따뜻한 손길을 아낌없이 표현하셨던 사람. 그 사랑으로 자라고 그 보살핌으로 작은 꽃들을 피울 수 있었던 지난 시간들. 이젠 이방인의 땅에 뿌려져 끝도 없는 넓은 가슴이 되었다. 꽃이 피는 뒤란의 오후는 그런 당신의 품같이 포근하고 아련했다.     청초한 꽃대 하얀 부추꽃 / 다소곳이 피어난 정갈한 과꽃 / 손 모아 기도하는 달맞이 꽃 / 당신 모습을 닮았네요 // 낮은 잔디를 쓸어주고 / 돌에 새겨진 이름 석자 서글퍼 / 붉은 장미, 안개꽃 내려 놓고 / 돌아 오는 길 // 석양 향해 걷고 있는 나를 / 마중하러 비가 내린다 / 꽃이 지는 뒤란의 오후 / 부디 그곳에서 평안하시라     햇빛 쨍한 날에 비가 내려요 / 잠시 생각이 지나갔을 뿐인데 / 올려다보니 당신이 있네요 // 홀로 남아 지난 일 떠 올리면 무엇 하겠어요 / 엎드리는 8월 호수가 서글퍼요 / 물새가 낮게 물결 위를 날아요 / 파도 속삭임에 마음 빼았겼어요 / 무엇 하나요 해 지는데 // 석양이 내려앉은 보랏빛 하늘가로 / 하나 둘 부서지는 물살의 구애 / 몇 일 찬비가 내리고 바람도 심한데 // 홀로 남아 지난 날 떠 올리면 무엇 하나요 / 뱃길 비추는 따뜻한 불빛 / 당신 잠깐 머물렀던 시간 내내 / 물결도 그리움마냥 출렁이는데 / 무엇 하나요 별 뜨는데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삶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말은 내가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아픔을 견디고 평안할거란 생각이 든다. 그 마음에는 오해와 갈등의 어려운 시간을 오랫동안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을 변화시켜 축복으로 바꾸어내는 신통이 있기 때문이다. 4자녀를 가진 청상과부였던 내 어머니의 삶이 그랬다. 죽음 후에 승리가 찾아 온다는 아이러니한 말이 성경에 쓰여 있다. 이미 죽었으니 그 후의 삶에 승리가 찾아온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혹이 따라 오는 것은 당연하다. 죽음을 끝으로만 여기지 말고 죽음으로 연결 되어진 과정의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감사가 있고 소망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면 그 죽음은 죽음을 넘어서는 승리의 또 다른 삶으로 연결 되어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묘 앞에서 나는 늘 ‘고난이 축복이었고, 죽음 후 승리가 그곳에 있다’라는 역전의 삶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시간의 개념이 바뀌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시간은 상대적으로 길게도 혹은 짧게도 느껴질 수 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고통이 축복일 수 있고, 죽음이 승리일 수 있다는 말이다.     내 안으로 충실해질 때 사람도 꽃을 피운다. 내 어머니가 그러셨다. 이름도 없고 존재도 없었지만 어머니란 모습으로 충실해졌을 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올곧은 꽃대를 내밀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겠는가? 사람의 향기가 나야 사람인 게다. 그 향기는 오랫동안 멀리 퍼져 살아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신다.     비 오는 오후, 느슨해진 시간 / 뒤란에 비 내린다 / 마른 마음 적시고 / 산 등성이 그림자 몰고 오는 / 안간힘의 그리움이 희미한 잔상으로 기억 된다면 / 이별은 홀연해야겠지 / 숨겨둔 말 울림되 퍼지기 전 // 죽어야 사는 세상에 비 내린다 / 뽑힌 뿌리 하나 떠내려 갔던 / 한때, 무지개를 꿈꾸었던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물결도 그리움 로즈힐 세미터리 보랏빛 하늘가

2023-09-11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리움의 변주

작은 풀꽃 되어 언덕에 누웠습니다. 하늘이 바로 내 얼굴로 내려와 눈 속에 구름을 그려줍니다. 이리저리 뒤척여도 같은 세상, 걱정 없는 청명한 세상입니다. 누구라도 함께 누우면 친구가 되고 서로의 이야기가 들려올 듯 합니다. 하루를 지낸 이야기, 속상했던 이야기, 행복했던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동안 하늘은 여러번 얼굴을 바꿉니다. 옅은 푸른색에서 청색으로, 지금은 깊은 푸르른 블루입니다. 누군가가 마음에 담겨 노을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마음을 지긋이 누르는 아픔이 찿아드는 밤입니다.     그리움의 변주   꽃이 필 때 하늘이 온다 / 높은 하늘이 낮은 세상으로 내려 / 얼굴을 부빈다 / 꽃이 필 때 물결이 설레인다 / 잔잔한 물결이 설레임으로 다가와 / 어깨에 기댄다 / 꽃이 필 때 한 얼굴이 온다 / 낯익은 한 얼굴이 홍조 띄고 / 옳은 걸음으로 온다 / 꽃이 필 때 하나의 설레임 / 하나의 그리움 / 또 하나의 세상이 온다 // 꽃이 질 때 이별 하나 운다 / 꽃이 질 때 풀꽃보다 고운 그대가 운다 / 바람처럼 그대는 어깨를 떨며 고개 숙인다 / 노을 아래 언덕에 / 꽃보다 그리운 그대가 묻힌다     심지도 않은 소나무가 뒤란에 두 그루나 잘 자라고 있습니다. 4~5 년 전 죽은 소나무를 잘라주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작은 소나무 싹이 바로 옆자리에서 무럭무럭 그 키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이젠 내 키를 훌쩍 넘는 큰 소나무로 자랐습니다. 죽은 소나무가 자기를 사랑해주고 솔향기를 좋아했던 한 친구에게 남겨준 선물이라 생각됩니다. 쭉쭉 자라나는 소나무를 대견스레 바라보는 일은 이제 나의 기쁨입니다. 또 한 소나무는 이제 내 어깨만큼 자랐는데 이것 역시 스스로 그 씨가 어디론가에서 날아 데크 맞은편 정원에 뿌리를 내리고 무섭게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자라납니다. 성장을 멈췄다면 그건 생명이 끊어진 상태나, 이제 제 몫을 다 했거나, 병들어 곧 생명이 끊어질 위기에 놓인 경우가 될 것입니다.     시간이 멈춘 뒤란의 새벽은 황홀입니다. 발자국 소리가 지나가는 곳마다 꽃들이 눈을 뜹니다. 잎사귀마다 기지개를 폅니다. 머리 속은 온통 노랑, 분홍, 퍼플입니다. 바람이 불면 당신의 향기가 온 몸으로 부딪혀옵니다. 지금 이곳의 시간은 읽을 수 없습니다. 모든 감각이 살아나는 태고의 정원 같기도 하고, 꽃 이름도 생소한 곳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메아리의 울림 같기도 한, 미래의 어느 한날 같습니다. 나는 손을 흔드는 당신을 기다린다는 즐거움도 잊은 채 하늘로 치솟은 전나무를 돌아 언덕으로 마주한 샛길을 오르고 있습니다. 당신과의 첫만남. 북촌의 생소한 거리를 지나가며 막무가내로 만났던, 그리움의 변주 같은, 물방울 속에 담겨 튀어 오르던 언어. 이제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를 네게로 이어줄 알 수 없는 긴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북촌의 저녁과 시카고 뒤란의 새벽. 14시간의 느리고 빠른 간극을 넘어 기대와 잔잔한 감흥으로 이어질 작은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 길로부터 다가오는 아침을 천천히 당신의 향기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곳 뒤란과 언덕은 여전히 생명으로 충만합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리움 동안 하늘 발자국 소리 데크 맞은편

2023-07-10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아름답고 슬픈 만남을 위하여

아들이 집에 온다. 집 근처로 출장 오게 돼 잠시 들린단다. 연인을 만나는 것처럼 가슴이 벌렁거린다. 달력에 동그라미 치며 기다렸다. 샌디에이고에 사는 아들은 애들이 어리고 직항 비행기가 없어 한동안 다니러 오지 못했다. 대신 딸네 가족이 사는 뉴저지에서 온 가족이 뭉치거나 우리가 샌디에이고로 가서 상봉을 했다.     새 집 지어 이사온 뒤 첫 방문이라서 잘 보이려고(?) 부지런을 떤다. 닦은 바닥 또 닦고 귀한 손님 맞듯 깔끔을 떤다. 나이 들면 사는 게 허접해지기 쉽다. ‘노티나는 모습’ 보고 아들이 아파할까 봐 단도리를 한다. 나이가 들어도, 죽어서라도 아이들 가슴 속에 봄이면 피어나는 목숨줄 끈질긴 찔레꽃 향기로 남고 싶다.     회의 끝난 뒤 저녁에 들린다는데 ‘뭘 해주나’ ‘무슨 말을 하나’ 며칠 동안 혼자 싱글거리며 별의별 궁리를 한다. ‘저녁은 뭘로?’ 물었더니 어릴 적 좋아하던 식당에서 케리아웃 해서 먹는다나. 반 평생 가까이 살아도 미국은 타향, 동성로 따로국밥을 내가 그리워하듯 아들은 어릴 적 입에 밴 그리운 고향맛을 찿는다.   지금 출발한다는 문자 받고 황새처럼 목 길게 빼고 길목을 지켜본다. 기다림은 행복한 고통이다. 짜릿한 환희 속에 헤어질 시간의 아픔이 가슴을 짓누른다. 사는 날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설렘과 아픔, 그리움의 언덕을 헤매야 하나.     늦둥이로 태어나 개구쟁이로 철없던 막내가 우람한 체구로 와락 껴안는다. 내 품속을 파고들며 옹알이 하던 아들 품에 안긴다. 왠지 슬픔이 목젖까지 차오른다. 둥지 떠난 파랑새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름답고 슬픈 만남과 이별이 있을 뿐이다.   나는 울보다. 좋아도 울고 슬퍼도 울고 기뻐도 눈물 흘린다. 떠나간 계절이 안스러워 눈물 찔끔거리고 잊지 않고 돌아오는 계절이 고마워 운다.     내 유년은 물안개 속에 아롱거린다. 내가 두 살 때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는 울보인 딸을 강인하기 키우려고 정성을 다했다. 당신 등에 지워진 생의 업보를 감당하는 것이 딸의 앞날을 무탈하고 행복하게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타작마당에 팔 다리 묶인 볏짚들은 마른 얼굴로 겨울을 맞는다. ‘훠어이 훠어이’ 타작이 끝난 마당에 삼만이 아재가 참새떼나 까치를 쫒는 시늉을 할 동안 가마솥 뚜껑에 배추전 무우전 부치는 옥이언니의 양볼은 복숭아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멍석에 떨어진 쌀은 그대로 두어라”라고 말씀하신다. 추수할 곡식이 없는 가난한 아낙들은 앞치마에 낱알을 주어 담았다. 어머니는 ‘뿌린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를 믿었다.     우리집 크고 둥근 밥상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배고픈 사람, 끼니가 없는 사람은 누구던 밥상에 낄 수 있었다. 저녁거리가 없는 사람은 굴뚝에 연기 나는 집 앞에 서성이면 끼니를 해결 할 수 있는 시절이였다.     만남은 짧고 이별의 기다림은 길다. 번개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오래 지켜본다. 문득 혼자라는 생각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남편도 자식도 친구도 재물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목숨 조차도 잠시 육신에 묶어둔 꽃잎이 아니던가.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내 몸에서 싹이 돋아 세상을 덮고도 남을 기쁨을 주는 내 아들아, 우리의 만남과 헤어짐이 환희고 슬픔이라 해도, 대대손손 꿋꿋이 자라 뿌리 내릴 그 땅에서 행복해라. 잘 살아라.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가을 추수가 아픔 그리움 아재가 참새떼

2023-02-28

[살며 생각하며] 편지, 그 영원한 그리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청마 유치환의 ‘행복’이라는 시다. 참다운 행복이 무엇인가를 생각게 하는 시다. 우리가 아끼고 사랑했던 것들, 우리를 푸근하게 감싸주던 것들, 우리 마음을 훈훈하게 데워주던 것들이 알게 모르게 사라져가고 있다. 초가집들이 사라졌다. 가을 양광에 늙은 박 덩굴을 무료히 머리에 이고 있는 우리의 노모 같은 초가집은 산업화의 회오리에 밀려 어느새 그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밤하늘의 총총한 별들을 바라보는 것을 단념해야 하고, 봄 노고지리, 가을 메뚜기를 시골에서조차 만나기 어렵게 됐다. 해질 무렵 시골 농가의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밥 짓는 연기는 옛 추억 속에 잠겨버렸고, 우직한 소달구지의 정겨움은 버릇없는 트럭으로 대체되었다. 우리 어머니들의 알뜰함이 담겨있던 대나무로 짠 시장바구니는 어느새 일회용 비닐봉지가 그 구실을 대신하고, 때도 철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과일과 푸성귀는 원두막과 콩서리에 얽힌 그리움을 앗아가 버렸다. 또 이메일과 스마트폰의 보급은 편지 쓰는 즐거움과 편지 받는 반가움을 부질없는 일로 만들었다.     시간을 아끼는 현대인은 이제 편지 따위는 하릴없는 사람이나 끄적거리는 것으로 치부한다. 정보화시대의 철학자 맥루한은 열렬한 전화예찬론자이다. 활자문화에서 자라난 구세대들은 전화를 싫어하지만, 전파시대에 출생신고를 낸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애완동물처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화는 그의 이론을 듣고 있으면 애정만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방식과 일반적인 행동까지도 바꾸어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활자문화 속에서 자라난 구세대는 고립적인 개인주의에 그 특징이 있지만, 정보화시대에 사는 현대인은 높은 참여성이 있다고 맥루한은 주장한다. 그리고 전화야말로 현대인에게 그러한 성격을 부여한 챔피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화는 참여성이 강한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스마트폰을 현대의 메시아로 보든, 혹은 독신자가 샤워를 할 때마다 울리는 현대의 악마로 보든, 그것은 분명 현대인의 관계를 횡적으로 확대시켜주고 있다는 것이다.     편지는 말하자면 글자는 우리에게 영원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감정도 사상도 문자로 얘기할 때는 그것이 수백 년 수천 년의 먼 훗날까지 남으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화는 축지법처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공간을 소멸시킨다. 그 대신 시간을 정복할 수는 없다. 옆으로만 번지게 하고 시간에 그 종적(縱的)인 관계를 생각하지 않게 한다.     현대인은 하루살이처럼 살아간다. ‘오늘만!’, ‘오늘만!’ 이렇게 외치면서 그들은 전파의 가벼운 날개를 타고 시간의 강하를 따라간다. 편지의 깊고 그윽한 맛을 잃어가고 있다. 편지란 흩어진 가족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친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감싸주는 위로자다. 편지를 쓰는 사람이나 받아보는 사람 모두가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해준다. 편지에는 화려한 문체나 깊은 지식, 물 샐 틈 없는 논리가 없어도 좋다.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백시킨 진실만을 드러내주면 된다. 이러한 편지는 말로만 주고받거나 분위기로만 맺어진 사랑과 정을 더욱 깊게 해준다.     여름방학 때 멀리 있는 친구로부터 받는 한 장의 편지, 그 편지의 어느 구석엔가 호박잎 같은 냄새가 나는 것을 읽고 또 읽으면서 모닥불처럼 피어오르는 행복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훈련소에 입영한 아들로부터 배달된 첫 편지를 받아들고 땀이 배어있는 사연을 읽고 또 읽으면서 기뻐 눈물 흘리는 엄마의 마음… 편지 이외의 통신수단이 대중화되지 못했던 시절만 하더라도 우편배달부를 기다리는 마음은 그리움 그 자체였고, 편지를 쓴다는 행위도 즐거움 그 자체였다. 어버이가 자녀를 외지로 떠나보낼 때나 친지들을 만났다 헤어질 때면 ‘편지를 하라’는 정감어린 말이 오갈 정도였지 않은가.     그러나 전화가 대중화되면서 편지는 서서히 빛이 바래기 시작, 푸대접받아 뒷전으로 물러나 앉고 말았다. 더구나 이메일, 스마트폰이 개선장군처럼 등장하면서부터 편지라는 존재는 점점 더 고전으로 묻혀지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의 생활 주변에서 사랑과 정을 담은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가뭄에 콩 나는 것과 다름없게 되어버렸다. 요즘 아이들은 편지를 쓰지 않는다. 서울이나 외국에 유학 간 아들에게서 행여 소식이 올까 하고 까치 울음소리를 상서로운 조짐으로 반기던 우리 어머니들의 ‘기다리는 마음’을 아이들은 모른다. 그래서 편지는 아련한 향수다. 그리움이다. 사라져가는 것은 정겹고 아름다운 것뿐이다. 그 사라져간 자리에는 이메일, 스마트폰과 이른바 ‘능률적인 인생’이 버티고 서 있다. 이렇게 해서 편지의 시대는, 문자의 시대는 지나간다. 러브레터의 시대가 가고 그 대신 스마트폰의 벨 소리가, 카카오톡의 요상한 신호음이 귀를 두드린다.     정글의 약자였던 인간은 소셜 애니멀의 지혜로 야생의 위협과 싸우며 문명을 이룩했다. 문명은 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라는 꼭짓점에서 초연결의 정점을 찍었지만, 동시에 우리는 서로를 감각하던 민감한 협응의 촉수를 잃어버렸다. 너무 쉽게 우정을 거래하고, 물건을 사는 ‘소비 네트워크 서비스’라는 동굴 안에서, 우리는 점점 더 무력해졌다. 외로움이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세상이다. 외로움의 동굴에서 서로를 구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다정함이다. 강해지려면 다정해져야 한다. 다정해지려면 부드러워져야 한다. 부드러워지기 위해 우리는 더 필사적으로 서로를 ‘감각’해야 한다.  재난 현장에 고립돼도 다가오는 인간의 기척이 우리를 살게 한다. 살며 생각하며 그리움 편지 편지 이외 편지 따위 이메일 스마트폰

2021-12-28

[살며 생각하며] 가슴은 클수록 좋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가지를 흔든다. 우수수 잎사귀들이 비처럼 내린다. 가슴이 철렁한다. 가을은 좀처럼 나에게 틈을 주지 않는다. 나무들은 언제나 이때 즈음이면 이별을 고한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지만, 나약한 우리 인간들은 정서를 이야기한다. 푸른 하늘 아래를 서성거리며 시를 읊기도 하고 종종 어둑해지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눈시울도 적신다. 마음이 생겨서 그런 것이다. 쓸쓸함, 그리움, 슬픔, 그런 마음들이 가슴으로 들어온다.     며칠 전 꿈을 꾸었다. 기억나는 것이 신기하다. 내가 사람들을 몇 모아 놓고 시에 대해 이야기 했다. 시란 생각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 마음을 건드려야 글이 나온다고 했다. 시도 못 쓰는 내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나? 참 알 수 없는 것이 내 마음이다.     살면서 세상일에 집중하다 보면 마음이 작아진다. 마음을 담아두는 가슴도 쭈그러진다. 나는 종종 용서란 말을 한다.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는 어려운 숙제이다. 미워 죽겠는데 용서하라니 미칠 노릇이다. 주기도문을 바치다가 문득 주위의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면 결코 신에게서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모순투성이인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을 꺼린다. 인간답게 사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생각과 말과 행위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생각과 말은 그럴듯해도 올곧은 마음이 없으면 아무 쓸 데가 없다.    선한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마음에 온통 탐욕만 담아두면 가슴은 좁아진다. 나의 가슴은 신성한 곳이다. 그런 좋은 곳에 온통 욕심과 분노와 이기심과 자만으로 가득한 마음을 담아둘 수는 없다. 노래 부르다가도 눈물 흘리고 바람 부는 대로 흩어져버리는 낙엽을 보고도 울컥하는 마음이 차라리 났다. 세상 모든 것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미국 인디언(American Indian)의 마음은 참 아름답다. 그런 마음을 지닐 수 있는 것도 축복이다. 기독교 신앙을 앞세워 개척정신을 부르짖으며 인디언들을 무차별 학살한 초기 이민자들의 마음은 고귀하였을까? 교리를 가르치며 신을 믿으라 한 그들에게 한 족장의 추장은 말한다. “우리 땅을 빼앗고 우리의 형제자매를 죽이고, 우리를 핍박하는 것을 허락한 신을 믿으라니요. 저희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우리의 형제이고 고귀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치는 저의 신을 믿겠습니다.”     사랑도 마음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분노하고 강요하며 상대방을 바꾸려 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별을 헤아리며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 어린아이들을 아끼는 하는 마음. 남을 배려하는 마음. 그런 마음들을 가슴에 담아 두었으면 좋겠다. 나의 좁은 가슴을 넓히려면 스스로 변해야 한다. 필요 없는 걱정. 끊임없는 욕심들은 다 꺼내 버리고 강한 의지로 나의 나약함과 게으름을 이겨내야겠다. 노력 없이 어찌 스스로 바꿀 수 있겠는가? 새해가 오기 전 미리 마음을 다져야 한다. 사람이면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했던가? 그 행복을 위해서 가슴을 크게 만드는 것은 나의 앞으로 목표이다. 세상의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되 생각이 가슴으로 내려 마음을 건드리는 시인의 마음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거듭 말하지만 가슴은 클수록 좋다. 여성 폄하의 뜻으로 말한 것이 결코 아님을 눈치챘을 것으로 믿는다. 고성순 / 수필가살며 생각하며 가슴 기독교 신앙 초기 이민자들 그리움 슬픔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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