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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라도, 가장 헌신적인 반려 견주 전국 1위

 개들이 가장 충성스러운 인간의 동반자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미국인들의 반려견 사랑이 유난하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최근 포브스 어드바이저(Forbes Advisor)의 조사에 따르면, 견주들은 그들의 개를 위해 직업적, 재정적, 개인적인 희생을 기꺼이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콜로라도의 견주들이 자신의 반려견에게 가장 헌신적인 것으로 조사돼 관심을 끌고 있다. 한마디로 콜로라도 주민들의 개 사랑이 미국에서도 ‘최고’라는 의미다. 이는 포브스 어드바이저가 미전역 1만명의 견주들을 대상으로 7가지 주요 지표에 걸쳐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어느 주의 견주들이 가장 헌신적인지에 대해 순위를 매긴 결과다. 콜로라도는 100점 만점에 100점을 받아 가장 헌신적인 견주 전국 순위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이번 조사에서 콜로라도의 견주들은 개들을 위해 아파트에서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할 의사가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19.5%로 50개주 가운데 두 번째로 높았다. 또한 콜로라도 견주의 7%는 반려견을 위해 재택근무를 선택하거나 반려견 친화적인 회사로 아예 직장을 옮겼다. 이 비율은 매사추세츠, 오하이오주와 함께 공동 3위를 기록했다. 전국에서 6번째로 높은 비율인 응답자의 11%는 원격근무가 가능하거나 반려견 친화적인 회사라서 마음에 들지 않은 직장이지만 참고 다니고 있다고 답했다. 이밖에도 콜로라도의 견주들의 43.5%는 개를 키우는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더 빠듯한 예산으로 살고 있다고 응답함으로써 아칸소, 미시시피주와 함께 전국에서 4번째로 그 비율이 높았다. 콜로라도에 이어 가장 헌신적인 견주 전국 2위는 94.41점을 획득한 버지니아주였고 이어 조지아주가 3위(92.45점), 앨래스카주 4위(91.99점), 네바다주 5위(87.92점), 텍사스주 6위(81.42점), 아칸사·워싱턴주 공동 7위(80.97점), 델라웨어주 9위(71.15점), 오레곤주가 10위(70.69점)에 각각 랭크됐다. 반면, 꼴찌는 펜실베니아주로 0점이었으며 몬태나주가 49위(1.06점), 메인주 48위(1.96점), 미조리주 47위(8.96점), 미시간주가 46위(9.06점)를 기록해 최하위권 5개주에 이름을 올렸다. 이밖에 주별 순위를 살표보면, 캘리포니아주가 13위(66.31점), 뉴욕주 15위(62.39점), 일리노이주 17위(59.82점), 뉴멕시코주 20위(54.83점), 유타주 24위(44.86점), 캔사스주 38위(25.68점), 와이오밍주 39위(25.63점), 네브라스카주는 45위(10.12점)를 기록했다.  이은혜 기자콜로라도 헌신 콜로라도 주민들 전국 순위 전국 2위

2023-03-22

"한인 용기와 헌신 미국 번영에 일조"

조 바이든 대통령이 한인 이민 119주년을 맞아 ‘미주 한인의 날’ 축하 서한을 보냈다.     바이든 대통령은 “1903년 오늘 한국 이민자들이 하와이에 도착해 위대한 미국 역사의 새 장을 열었고 그날부터 이들은 미국의 성장과 힘, 번영에 일조했다”고 밝혔다.     이어 “한인들은 미국 정신의 가치를 구현했으며 이민자들의 용기와 헌신을 상기시킨다”면서 “미국의 문화를 풍부하게 했고 지식과 기술로 사회 모든 분야에서 기여했다”고 치켜세웠다.   그러면서 한인들이 한미동맹 강화에도 힘을 보탰다고도 했다. 1903년 1월 13일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려고 배에 오른 한인 102명이 하와이에 도착한 날이다.   공화당 소속의 미셸 박 스틸(48지구)과 영 김(39지구) 연방하원의원은 이날 ‘미주 한인의 날’ 결의안을 공동 발의했다. 역시 한인 의원들인 앤디 김(민주·뉴저지 3지구), 매릴린 스트릭랜드(민주·워싱턴 10지구)를 비롯해 총 78명 의원이 이번 결의안 발의에 초당적으로 동참했다.     지난 12일 연방 하원의원으로서 처음으로 본회의에서 미주 한인의 날 기념사를 연설한 박 스틸 의원은 “모든 한인이 나처럼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미국에 왔다. 이번 초당적 결의안을 이끈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밝혔다. 영 김 의원은 “미주 한인의 날은 미국 내 한인들의 영향력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날”이라며 “이민자이자 최초의 한인 여성 연방 하원의원 중 한 명으로서 미주 한인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원용석 기자미국 한인 한인 용기 헌신 번영 미주 한인

2022-01-13

"군인들의 삶과 헌신 기억"

  귀넷 카운티는 지난 11일 오전 로렌스빌에 있는 귀넷정의행정센터에서 2021 베테랑스 데이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귀넷 카운티에 거주하는 참전용사들과 귀넷 행정위원회 커미셔너들, 로날드 L. 존슨 장군 등이 참석했다. 미동남부베트남전쟁참전유공자회(회장 조영준)도 협회 설립 후 처음 참석했다.   커크랜드 카덴 제1지구 커미셔너, 재스퍼 왓킨스 제3지구 커미셔너, 말린 포스크 제4지구 커미셔너는 베테랑의 삶과 헌신을 기억하자고 밝혔다. 포스크 커미셔너는 "한인 참전용사들이 베테랑스 데이 기념 행사에 처음 참석해준 데 고마움을 전한다"면서 "참전용사들은 자유와 평화 그리고 안전을 위해 힘썼고 우리는 그들의 희생에 예를 표하고 다양한 방법을 통해 고마움을 전하자"고 말했다.       기조연설자로 나선 로날드 L. 존슨 장군(Major General)은 "이 위대한 국가(미국)를 건설하는 데 모든 군인들이 큰 역할을 했다"면서 "베테랑스 데이는 모든 군인을 기억하는 날"이라고 밝혔다. 이어 "자유는 결코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는 걸 잊지 말고, 우리는 이 자유의 땅에서 계속해서 횃불을 들고 참전 용사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조영준 회장은 행사를 마친 후 "협회 창립 후 귀넷 카운티 행사에 처음 참석한 뜻깊은 날"이라며 "앞으로도 매년 참석해 함께 마음을 나눌 것"이라고 전했다.    배은나 기자군인 헌신 헌신 기억 제4지구 커미셔너 제1지구 커미셔너

2021-11-11

"초기 이민자들의 감동적 삶 뭉클"…UC리버사이드 장태한 교수

"부모 누구나 자녀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녀의 삶이 낯선 이 땅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공하는 인생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자아의식이 없으면 정체성 확립이 어렵고 힘든 인생으로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미주 한인들 각자 역사의식이 필요한 겁니다." UC리버사이드 장태한(사진) 교수가 역사의식을 제대로 키울 수 있는, 미주 한인들의 필독서를 하나 더 출간했다. 최근 고려대학교 출판문화원에서 펴낸 '외로운 여정' 한국어판이다. 원래 이책은 원로 저널리스트 이경원씨와 김익창, 그레이스 김씨의 'Lonesome Journey'의 번역이다. 장 교수는 "20세기 초 미국에 도착한 한인 이민 선조들은 기구하리만큼 험난한 삶을 살았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며 "그들의 하와이, 쿠바, 멕시코 유카탄에 이르는 긴 여정을 우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경원씨의 이 책을 통해서 21세기를 사는 우리 한인들에게 들려주는 그들의 메시지는 강렬하다"고 말했다. 이경원씨의 이민선조 스토리 프로젝트는 대략 80여 명이 취재.작성돼 있지만 책으로는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이다. 이씨가 영어로 작성한 내용을 장 교수가 30여 명만 선별, 원문의 취지와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게 번역했다. 장 교수는 "모두 의미있는 삶을 산 훌륭한 선배들이었지만 한권의 책으로 만들기 위해서 추릴 수밖에 없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며 "스토리텔링과 의미가 특별한 분들만 우선 번역했다"고 설명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분만 뽑아달라는 우문에는 모든 이민선조들의 삶은 모두 감동이라며 "경제적으로 어렵고, 정치적으로 취약하고 인종차별까지 받는 상황에서 꿋꿋하게 고난을 헤쳐 넘은 선조들의 얘기는 자칫 무기력하게 쉬운 것만 원하는 현대 미주 한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미래 한인사회의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는 '길잡이' 역할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외로운 여정'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안헬렌 여사를 비롯한 초기 이민시기의 여자 전사 8명, 유카탄 노예해방의 주인공 황사용, 서재필, 비행학교를 설립한 김종림 등이 수록된 망명가 5명, 이민선조의 자랑스런 2세들인 안 필립, 이새미 등 5명, 인종차별 타파, 이민자를 위해 앞장섰던 3명의 위대한 딸들, 자원입대해 미국의 전쟁영웅이 된 김영옥을 비롯한 한인 3명 등이 수록돼 있다. 장 교수는 "'외로운 여정'은 1970년대부터 시작돼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라며 "번역 초고부터 편집, 출판까지는 대략 1년 반이 걸렸다. 하지만 100년 넘게 이어온 이민 선조들의 삶의 스토리를 읽는 동안 경험한 감동들은 결코 외롭지 않은 뭔가가 있다. 독자들도 같은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책은 한인 타운 일부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고 미주 중앙일보를 독자를 위해 조만간 연재된다. 한편 영어권 독자들을 위해 이 책의 원본격인 'Lonesome Journey'의 단행본 출판작업도 진행중이다. 글.사진=장병희 기자

2016-07-04

김기환 총영사 "한인 이민사 박물관 지원"

30일 김기환 뉴욕총영사가 부임 후 약 1년 만에 처음으로 뉴욕한인회관을 방문했다. 김 총영사는 이날 회관을 방문해 "지난해 4월 7일 부임 후 가장 먼저 방문하고 싶었던 곳이 이곳이었는데 여러 문제로 인해 오늘에야 방문할 수 있게 됐다"며 "그동안 한인회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법원의 훌륭한 결정과 역대회장단협의회의 수고로 한인회 정상화가 이뤄져서 다행"이라고 밝혔다. 이어 "김민선 회장은 남은 임기 1년동안 두 배로 더 열심히 활동할 것이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김 총영사는 한인회가 추진중인 한인 이민사 박물관 건립 사업에 대해 논의했다. 박물관 건립 사업 지원 요청에 대해 김 총영사는 "한인회가 구체적인 사업 제안서를 제출하면 이를 본부에 보내 검토되도록 노력하겠다"며 "큰 규모의 지원은 힘들겠지만 적극 협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올해 지원 요청은 어려울 것 같고 다음 회계연도에 지원 요청하는 것이 시기적으로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에 따르면 박물관 건립 예산은 총 100만 달러. 기금 모금 행사를 통해 단계적으로 건립 작업에 착수할 예정으로 첫 30만 달러 모금 시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할 계획이다. 김 회장은 "박물관 이름은 'Museum of Korean American Heritage(MOKAH)'를 한글로 발음한 '목화'로 고려중이며 사무실을 제외한 모든 한인회 공간을 박물관으로 바꿀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조은 기자 lee.joeun@koreadaily.com

2016-03-30

쿠바 한인 이민사 소개

매달 열리는 한인 교양 강좌 프로그램인 UW 북소리 행사에서는 19일 오후 1시 30분 UW Gowen Hall에서 쿠바 특집으로 한인 2세, 마르따 림 김(한국명: 임은희)씨를 초청, 쿠바의 한인 이민사를 소개했다. 임은희 씨는 쿠바의 한인 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로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훈장, 메달, 표창장을 받은 임천택씨 따님으로 하바나 대학을 졸업, 마탄사스 종합대 교수, 철학부장을 역임했으며 지난 2000년에는 남편 라울 루이즈씨와 함께 Coreanos en Cuba를 저술했고 번역판, '쿠바의 한국인들'을 출간했다고 소개했다 . 한인 4세 루이즈 이즈끼에르도 김씨에 의해 제작된 쿠바의 한인 이민사를 다룬 다큐멘터리인 'Dessarraigo' (뿌리찾기)가 강의 전 상연되었는데 2015년 라틴 아메리카 필름 페스티벌에서 영아티스트 필름 제작자 상을 수상한 20분짜리 작품이다. 임은희씨에 따르면 1033명의 한국인이 농업 이민으로 인천항을 떠나 1905년 4월 15일 1030명이 멕시코 메리나, 유카탄 반도에 도착했다. 부를 이루겠다는 꿈으로 멕시코에 4년 계약으로 도착했지만 4년 후에는 새로운 일자리를 못찾고 거처도 없이 언어, 문화, 전통을 모르는 곳에 남겨지게 됐다. 이로써 아메리카 드림은 악몽으로 변했고 한인들은 멕시코 여러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그 후 1921년, 일본인과 독일인 2명이 멕시코로 찾아와 쿠바를 소개해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쿠바의 사탕수수 밭으로 이주하게 됐다. 약 300명이 1921년 3월 25일 멕시코에서 쿠바에 도착해 사탕수수밭, 설탕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으나 일부 가족들은 낯선 나라에서 일자리, 거처할 곳없이 작은 마을에서 흩어져 살게 됐다. 1950년 '마딴사스'에 도착, 에네껜을 수확, 추수하면서 정착해나가고 일을 잘하는 한국인들은 관리일을 하기 시작했다. '엘볼로'에서는 쿠바에서 최초로 한인회인 대한 국민회를 설립, 한국의 문화, 노래, 음식, 전통 절기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국으로부터 지역적, 문화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고 멕시칸과 결혼하면서 동화되기 시작했으며 경제, 환경적 요건으로 한국적인 것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1940년 노동 국유화로 시민권자에게 일자리 우선권을 주고 1959년 혁명이후 변화로 일자리 평등, 동등화가 추진되었다. 한편, 에네껜 농장이 팔림으로 한국인이 이주하게 되고 연결 고리가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가족들도 흩어지게 됨으로써 정체성을 잃기 시작했다. 1959년생 이후는 정체성 개념이 없어졌는데 현재 한인 인구는 약1060명이다. 그러나 1995년, 없어졌던 한인회가 재설립되고 한국인들이 유대 고리를 회복하면서 정체성을 회복하기 시작했으며, 교회시설, 학교를 세우고 선생님을 보내줘서 한국 역사와 말, 글을 가르쳤다. 언어란 문화의 핵심이며 정체성을 만드는 핵심이다. 현 한인회는 그때 한인회의 정신을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메세지를 전했다. (임은희(왼쪽5번째)씨가 참가자 들과 함께 하고 있다. (이실비아 기자 이실비아 기자

2016-03-21

"사랑하니까 기억하죠, 40년 전 날씨·유니폼 색깔까지"

"1973년 11월 3일인가 13일인가로 기억하는데요. 74 서독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지역 최종예선 호주와의 2차전이 서울운동장에서 열렸어요. 시드니에서 1차전을 0-0으로 비기고 서울에서 우리가 먼저 두 골을 넣었어요. 그런데 호주한테 어이없이 두 골을 먹어 2-2로 비겼죠." "11월 10일입니다. 그날은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데다가 우박까지 내리는 어수선한 분위기였어요. 고재욱의 두 번째 골은 호주 수비수 다리를 두 번 퉁기고 굴절돼 들어갔죠." "제3국인 홍콩에서 최종전을 갖게 됐는데, 그게 11월 13일이네요. 우리 골키퍼 이세연이 군청색 상하의를 입고 나왔는데, 주심이 자신의 옷 색깔과 비슷하다며 갈아입으라고 했죠. 경기장 안에서 선수들이 빙 둘러서 인의 장막을 치고, 그 안에서 이세연이 옷을 갈아입었어요. 왠지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것 같아 불길했는데 결국 1-0으로 졌죠. 골을 넣은 선수가 스코틀랜드에서 뛰고 있었는데…" "짐 매케이 선숩니다. 30m 중거리슛을 때렸는데 그게 골키퍼 오른쪽 상단으로 빨려들어갔고, 그걸로 20년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우리 꿈도 날아갔습니다." 지난주 서울 강남의 한 레스토랑. 중년의 두 남자가 열띤 '토크 배틀'을 벌이고 있다. 40년도 더 지난 일들을 지난 밤에 본 듯 생생하게 묘사한다. 장규홍(51)채널인 대표와 장원재(49) 전 숭실대 교수다. 두 장씨는 스포츠계의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다. 이들은 축구 뿐만 아니라 야구·농구·복싱 등 각 종목의 기록과 데이터, 인물, 중요 경기 상황 등을 녹음기를 틀어 놓은 듯 재현할 수 있다. 화제는 야구로 넘어갔다. "잠깐 반짝 하고 사라진 고교야구 팀이 꽤 있죠. 대광고, 배문고, 대구대건고, 상문고, 명지고, 오산고…." "명지고에는 정삼흠이 다녔죠. 부산공고도 야구를 꽤 했어요. 김명성 감독, 황성록, OB 감독대행 한 이재우…." "황성록은 75년 아시아야구선수권 때 이해창과 함께 센터필더를 봤죠." "그때 클린업 트리오가 3번 김봉연, 4번 김우열, 5번 윤동균이죠." "1번 이해창, 2번 배대웅, 6번 강병철, 7번 김재박, 8번 우용득, 9번 투수 이선희 또는 김호중." 난형난제다. 장원재씨가 중계방송을 하듯 당시 상황을 속사포처럼 토해 내면, 장규홍씨는 사람 이름과 데이터를 가래떡 뽑아내듯 술술 풀어놓는다. 인터넷 생방송을 하면 대박 날 아이템이다. 스포츠 외 문화·예술에도 관심 요즘은 궁금한 게 있으면 인터넷 포털이 뭐든 알려준다(물론 틀린 내용이나 출처가 불분명한 것도 많다.) 그 전에는 친구들끼리 호프집에서 옛날 경기 스코어나 득점자 얘기 하다가 의견이 갈리면 "내기하자"며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바쁜 야근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두 사람은 그 정도 차원이 아니다. 그렇다고 특정 분야에 집착하는 '오타쿠' 계열도 아니다. 장 대표는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를 받은 뒤 iTV·SBS CNBC 등에서 사회부·정치부 기자로 일한 언론인 출신이다. 고려대 국문과를 나온 장원재씨는 영국에서 연극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숭실대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어떻게 스포츠 쪽 만물박사가 됐을까. 두 사람의 대답은 똑같았다. "스포츠를 좋아하니까. 좋아하면 관심을 갖게 되고, 관심이 깊으면 뇌리에 오래 남게 되니까." 어릴 적 아버지 손 잡고 서울운동장으로 축구·야구 보러 가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는 장 박사. "결정적인 장면들은 TV에서 반복해서 틀어주잖아요. 그걸 오래 보면 언제든 자동 재생을 할 수 있게 돼요. 스포츠는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거잖아요. 그래서 스포츠는 돈 버는 것과 상관 없이 인생을 풍성하게 해 주죠." 그는 해박한 축구 지식 덕에 팔자에 없는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 장 대표의 부친은 빙상 선수 출신인 장명희 아시아빙상연맹 회장이다. "아버지 영향으로 스포츠에 관심을 갖게 됐죠. 아는 게 많으니 친구들이 이것저것 물어봐요. 헷갈리는 건 자료를 찾아 확인하고, 이러다 보니 기억이 더 선명해지더라고요." 영상 분야에 관심이 많은 그는 영상 한국야구 인물사를 제작하고 있다. 가칭 '열전 고교야구 시대.' 한 시대를 풍미한 고교야구 스타 출신을 한 명씩 인터뷰 해 기록을 남기고, 생생한 에피소드를 담아내는 작업이다. 선린상고 편을 끝냈고, 군산상고 편을 찍고 있다. 선린상고 편에서는 배성서·김우열·유남호·윤석환·박노준·김건우 등 21명을 인터뷰했다. 두 사람의 기록에 대한 집착은 스포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장 대표는 각 분야 셀레브리티의 이면을 파헤친 『공감 소통 공유: 싸이에서 박근혜까지』라는 책을 냈다. 그는 한국 정치사의 숨겨진 얘기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장 박사는 배우론(論)을 담은 『배우란 누구인가』를 최근 출간했다. 그는 인터넷 방송인 '배우고 나누는 배나TV' 대표도 맡고 있다. 정치·사회·문화·경제 등 각 분야에서 지식과 교양을 전해주는 방송이다. 최근 누적 조회수 400만을 돌파했다. "필름 보존하기보다 다시 찍어" 두 사람의 만남은 한·일 월드컵이 열린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iTV 기자였던 장 대표는 장 박사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에 진출한 북한 경기를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장 박사가 영국 유학 당시 수소문해 사들인 것이었다. 당시 장 기자는 장 박사의 집에까지 찾아가 잉글랜드 월드컵 북한의 전 경기 장면을 확인했다. 기록의 힘은 강하고, 데이터의 가치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하지만 고도성장 과정에서 우리는 이를 무시해왔다. 장 대표는 "한국 스포츠의 결정적인 장면을 담은 자료 중 사라진 게 많아요. 80년대까지만 해도 방송사에서 영상 필름을 보존하는 사람보다 그 필름을 다시 돌려 새로운 걸 찍는 사람을 더 인정해 줬거든요. 최동원의 경남고 시절 다이내믹한 투구 장면이 '대한 늬우스'에 잠깐 나오는데 그것도 1루측에서 찍은 것이죠"라며 안타까워했다. 장 박사가 말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기록을 우리는 충무공의 난중일기, 서애 류성용의 징비록 정도에서만 확인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일본에는 배 타고 조선으로 건너오는 왜병들이 남긴 메모까지 보존돼 있어요. 선상에서 포르투갈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는 장면까지 나옵니다. 임진왜란때 조선의 도공이 어디 출신이고 어디로 가서 일했는지도 다 기록돼 있어요." 기록과 데이터를 잘 보존하면 그 자체로 상품과 콘텐트가 된다는 게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런 점에서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옛 서울운동장)을 얘기할 때 둘의 표정은 어두웠다. 없앨 만한 이유가 있다면 없앨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 대책 없이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창고에 잠자고 있던 많은 자료들이 쓰레기장으로 갔다.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영 행사가 열렸고, 펠레와 에우제비오가 묘기를 보여줬고, 고교야구의 열기가 터져나온 곳이다. 건물이 없어지면 건물이 갖고 있는 역사를 재구성하기 어렵다. 장 박사는 동대문운동장에 얽힌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야구장 3루측과 축구장 본부석 오른쪽이 1m 정도 간격으로 붙어 있어요. 축구 빅이벤트가 열리는 날이면 사람들이 야구장으로 들어와 축구장으로 넘어갑니다. 사다리 아저씨가 500원씩 받고 사다리를 놔 주거든요. 내려다보면 아찔하지만 다들 그리로 건너다녔지요." "원로들 옛날 기억 잘 못할 땐 안타까워" 저녁 메뉴를 시켜 놓고 '스포츠 메모리 배틀' 제2라운드를 시작했다. 장 박사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어렸을 때 우상은 역시 이회택이었죠.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우리 편이 밀린다 싶으면 이회택은 수비 가담은 하지 않고 하프라인에서 짝다리 짚고 인상만 박박 쓰고 있었어요. 스타킹도 항상 발목까지 내려오게 신고. 반항아 스타일이었지만 축구만은 정말 잘했죠." 장 대표는 "스포츠 원로들이 자신들의 플레이나 쌓은 기록에 대해 의외로 기억을 잘 못해서 안타까울 때가 많았어요. 김인식 감독님도 모교인 배문고를 오래 맡았는데 성적이 잘 나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그 얘기를 자세히 해 드리면 그제야 '맞아 맞아, 그때 그랬어'하시죠"라고 말했다. 장 박사가 말을 받았다. "77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때 미들스버러 원더러스라고 영국 팀이 왔어요. 한국이 5-1로 이겼는데, 차범근 선수가 유니폼 하의 안에 입는 흰색 언더팬티 고무줄이 끊어진 거예요. 한동안 허리춤을 잡고 뛰던 차범근이 안 되겠는지 아예 벗어버리고 노팬티로 경기를 마쳤죠. 나중에 차붐에게 물어봤는데 기억을 못한다고 하데요." 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펠레 얘기가 나오자 배틀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장 박사가 열을 올렸다. "지금도 월드컵 사상 최고의 장면으로 기억해요. 펠레와 우루과이 골키퍼 사이로 스루패스가 왔는데 펠레가 공을 안 건드리고 슬쩍 건너뛴 뒤 골키퍼 뒤로 돌아가 슈팅을 했죠. 골대를 살짝 벗어났는데, 그게 들어갔다면…" 장 대표가 점잖게 말했다. "근데 당시 우루과이 골키퍼가 누군지 기억하시는지?" 허를 찔린 장 박사가 멈칫 하는 사이 장 대표가 말했다. "마주르키위치. 러시아계 선수죠." 점입가경이다. 주문한 해물 스파게티만 퉁퉁 불고 있었다. 정영재 스포츠 선임기자

2016-02-08

"미주 한인 이민사 큰 그림을 담았죠"

소설가 박경숙(사진)씨가 장편소설 '바람의 노래'(문이당)를 출간했다. 2013년 소설집 '빛나는 눈물'로 통영문학상을 받은 이민 작가의 또 하나 진솔한 이민 스토리다. 다양한 작품을 통해 이민자 생의 쓰고 단 열매를 다룬 그는 이번 소설집에선 뿌리를 보여주려 한다. 이민 100여 년 전 하와이로 떠났던 이민 1세대를 주인공으로 이들이 고향을 떠나 이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된 사연과 힘겹게 정착해 나가는 과정, 이를 통해 한인 이민의 역사가 그려진 거대한 그림을 그는 페이지마다 가득 담았다. '본질과 현상' 발행인인 소설가 현길언씨는 서평을 통해 "가난한 나라의 백성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안고 하와이 이민을 결정한 그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역사를 이 작품을 통해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며 미주 이민사를 소설로 정리해 보고 싶은 작가의 소망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고 호평한다. 소설의 배경은 구한말. 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하급 군인의 유복자 이갑진이 제물포항의 부두 노동자로 일하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배를 타고 하와이로 떠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곳에서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고된 삶을 보내던 이갑진은 결혼 적령기를 넘겨 한인교회를 통해 신붓감으로 퇴기의 딸 김수향을 만나 결혼한다. 그리고 미국에서의 한인 이민의 역사는 이들의 질풍노도 같은 삶처럼 힘들고 어렵게, 그러나 탄탄하게 뿌리를 내리며 흘러 내려온다. "미국에 이민와 떠도는 듯한 삶을 살면서 그래도 희망을 가졌던 것은 이민 역사를 소설로 써보겠다는 야망때문이었다. 이번 소설을 쓰기 위해 하와이를 포함, 이곳 저곳에서 자료 조사를 하는 동안 매우 많은 것을 배우며 느꼈다. 이민의 흔적이, 우리 선조들의 족적이 훌륭하고 가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매우 값진 경험이었다. 이번 책 출간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박경숙씨는 '바람의 노래'가 한국 출판사에 의해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출간되었지만 사실 미국의 한인 이민자 마음에 닿는 작품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민생활이 힘들 때마다 이민사를 쓰려고 미국에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자위로 마음을 추스렸다"는 작가는 이번 책으로 만족하지 않고 계속 그 꿈을 마음에서 놓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1992년 미국에 온 박경숙씨는 2005년 '안개의 칼날'로 가산문학상, 2007년 '약방집 예배당'으로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최우수상 수상, 2011년 단편 '돌아오지 않는 친구'로 두만강문학상을 수상했다. 박경숙씨는 현재 미주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으로 활동 중이다. ▶문의: pksooklucina@naver.com 유이나 기자

2015-05-12

"40년 전 한국서 헤어진 쌍둥이를 찾습니다"

“1971년 참전 용사인 앨렌 토마스가 한국 공항에서 그의 쌍둥이 아이에게 작별 인사를 할 때 토마스는 그것이 아이들에게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NBC방송이 5일 40년 전 헤어진 쌍둥이 아이를 찾고 있는 토마스의 딱한 사연을 소개하며 내 건 헤드라인이다. NBC뉴스에 따르면 18세 때 군대에 자원 입대한 토마스는 한국으로 파병됐고, 이 때 한국에서 한 여성을 만나 1967년 쌍둥이 제임스와 샌디아를 낳았다. 결혼 후 온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오려던 그의 꿈은 서류 상의 문제로 결국 무산됐다. 미국에 혼자 돌아온 그는 1971년 한 달 간 한국을 방문해 아이들을 만났고 그것이 마지막이 됐다. 토마스는 아내와 함께 미국에 돌아오길 원했지만 아내는 거부했고, 결국 아이들도 데려올 수 없었다. 아이 엄마와 연락마저 끊긴 후 토마스는 1973년 재혼했고 두 아이를 입양했다. 이듬해 쌍둥이 엄마가 아이 양육권을 포기한다며 데려가길 원했지만 토마스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데려올 수 없었다. 아이들을 데려올 수 있는 형편이 됐을 때는 이미 늦은 때였다. 후에 토마스는 그의 쌍둥이 아이들이 미국인에 의해 입양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토마스는 본격적으로 언론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그의 아이들을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는 “쌍둥이가 나를 보고싶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는 존중한다”며 “그저 아이들이 잘 지내고 있는 지를 알고 싶을 뿐이다. 나는 단 한번도 내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서승재 기자 seo.seungjae@koreadaily.com

2015-05-05

주류사회 주역, 새 이민사 쓴다

올해는 뉴욕중앙일보가 동포사회의 길잡이 역할을 다짐하며 이 땅에 첫 발을 디딘 지 40년이 되는 해다. 아울러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은 광복 70주년이자 한국인의 미국 이민 물꼬를 튼 '이민.국적법(the Immigration and Nationality Act)' 제정 50주년이기도 하다. 본지는 이 뜻깊은 해를 맞아 한인사회와 미국 주류사회의 주역으로 떠오른 1.5세와 2세 한인들의 현주소를 진단해 보고자 한다. 공식적인 한인의 미국 이민사는 1902년 인천 제물포항에서 갤릭호를 타고 출발한 한인 102명이 일본을 거쳐 이듬해 1월 13일 하와이 호눌룰루항에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후 한인 이민은 소수의 유학생 등 매우 예외적인 경우로 한정됐고 1946~50년 사이 총 한인 이민자가 107명에 그치는 등 64년까지 공식 집계된 한인 이민자는 1만4884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가족초청 제도를 도입하는 등 미국 이민 시스템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 온 이민.국적법이 65년 제정됨으로써 한인의 미국 이민은 급격히 증가해 각 지역 한인사회도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65년 2165명이었던 연간 한인 이민자는 71년 1만4297명으로 1만 명을 돌파했으며 76년부터 90년까지는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한인이 매년 3만 명을 넘었다. 90년대 이후 미국 이민 한인이 다소 줄어들기는 했지만 1세와 1.5세 한인의 결혼과 출산 등으로 최근 센서스국이 발표한 2011~2013년 아메리칸커뮤니티서베이(ACS) 추정치에서는 최소 176만여 명의 한인이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또 한국 외교부가 발간한 2014년 외교백서에는 2012년 말 현재 170만여 명의 시민권자.영주권자를 포함해 약 210만 명의 한인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토안보부가 18만~20만 명 정도로 추산하는 한인 불법체류자까지 포함하면 최대 230만 명의 한인이 미국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미국 한인 인구가 급증한 만큼 40여 년간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나 어릴 적 부모를 따라 온 1.5세 인구도 크게 늘어났으며 한인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미국에서 출생한 2세만을 놓고 보더라도 90년 센서스에서 27.4%를 차지했던 한인 2세의 비율이 2000년 센서스에서 30.1% 2011~2013년 ACS 추정치에서는 38.6%로 커지고 있다. 1.5세를 명확히 규정하는 기준이 없어 통계상으로 그 규모를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외국 출생 한인의 65.2%가 가족이민이 대세였던 2000년 이전에 이민왔고 2000~2009년 이민자 26.2%까지 합칠 경우 91.4%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1.5세가 차지하는 비중도 전체 한인의 30%는 넘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통계 자료를 감안하면 지금 미국 한인사회는 세 명 중 두 명이 1.5.2세인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이들 차세대가 갖고 있는 의식구조나 정체성 등 특성에 따라 향후 미국 한인사회의 모습이 결정될 전망이다. 박기수 기자 kspark206@koreadaily.com

2015-01-01

[열린광장]'이철수 사건'의 이민사적 교훈

이철수씨가 비교적 젊은 나이인 62세로 일생을 마감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그는 이민자로서 온갖 어려움을 겪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으며 석방 후 불우한 생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1990년 이후 미국에 이민 오신 분들에게 이철수라는 이름은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와 80년대 초 이철수는 한인사회는 물론 아시안아메리칸 민권운동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1964년 12살 때 홀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왔다. 영어가 미숙하고 문화 차이로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며 방황하던 그는 1973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갱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대낮에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어이없게 한인 이철수가 용의자로 체포된 것이다. 이철수는 변호사의 제대로 된 변호도 받지 못하고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을 관광하던 백인들의 증언만으로 살인죄를 선고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1977년 감옥에서 백인 나치주의자이며 백인 우월주의자인 모리슨 니드햄은 칼로 이철수를 죽이려고 덤볐다. 순간적으로 칼을 빼았고 몸싸움 중 상대방을 찔렀다. 분명 정당방위였으나 오히려 특수살인죄가 적용되어 사형수 신세가 되었다. 당시 새크라멘토 유니온지 신문기자였던 이경원씨는 우연히 이 사건 일지를 보게 되었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파헤치기 시작했다. 끈질긴 취재로 이철수에게 억울한 살인죄가 적용됐다는 것을 믿게 된 이경원 기자는 이 사건을 세상에 알렸고 일본계와 중국계 필리핀계 그리고 한국계 2세들을 중심으로 이철수 구명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구명위원회 결성은 획기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아시안아메리칸 2세들이 단합하여 아시안아메리칸 민권운동을 전개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아시아계 2세들은 이철수씨 사건은 단순히 한인으로서 당한 피해가 아닌 아시안으로서 인종차별을 당했다는 공감대를 형성했고 구명위원회를 조직하여 구명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1982년 9월 3일 이철수씨는 차이나타운 사건의 무죄를 선고받았고 그 다음해에 백인우월주의자 살인기도 혐의도 벗게 되어 드디어 감옥에서 석방되는 기쁨을 후원자들과 함께 누렸다. 아시안아메리칸 민권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이철수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불우한 삶과 구명운동이 남긴 교훈을 2세들에게 전해야 한다. 또한 제2의 이철수가 나오지 않도록 한인사회는 준비하고 대비해야 할 것이다.

2014-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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