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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 YMCA 개관, 박수만 치기 어렵다

  축하 이면엔 착잡함이 배어있었다.    27일 코리아타운 YMCA 센터(433 S. Vermont Ave) 개관식에 참석한 스티브 강 KYCC 디렉터는 진심 어리게 손뼉을 치면서도 연신 “아쉽다”고 했다.   새롭게 지어진 건물이다. 세련되고 깨끗한 외관이다. 강 디렉터가 씁쓸할 수밖에 없는 건 8년 전 일 때문이다. 이날 버몬트 길에 개관한 YMCA 센터 건물은 원래 ‘LA한인타운 커뮤니티 센터’가 될 뻔했다.   이면에는 그 당시 구심점 없고 동력이 부족한 한인 사회의 단면이 담겨있다.   지난 2016년 8월 9일이었다. LA 카운티수퍼바이저위원회는 해당 부지에 한인 사회가 주축이 된 커뮤니티 센터(1만2500스퀘어 피트) 건립안을 정식 채택했다.   당시 카운티 정부가 추진하던 버몬트 선상 4~6가 재개발 프로젝트(버몬트코리도)에 한인타운 커뮤니티센터 건립안이 정식으로 포함된 것이다. 〈본지 2016년 8월10일자 A-1면〉   역사적인 날이었다. 한인타운 한복판에 커뮤니티 센터를 건립해달라는 한인사회의 끈질긴 요청이 결국 카운티 정부를 움직인 셈이다. 당시 LA한인타운을 관할했던 마크 리들리-토마스 수퍼바이저도 한인 사회를 위한 센터 건립을 지지했었다.   당시 한인타운 커뮤니티센터 건립 추진에는 ‘코리아타운아트&레크리에이션커뮤니티센터(이하 K-ARC)’라는 단체가 중심에 있었다. KYCC를 비롯한 한미연합회, 한인가정상담소, LA한인회, LA상공회의소, 재미한인자원봉사자회(PAVA), 페이스(FACE) 등 10개 한인 단체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다 갖추고 있었다. 부지도, 건립 비용도 정부가 지원키로 했다. 심지어 운영 자금도 있었다. 윌셔와 버몬트에 대형 주상복합 건물을 짓던 개발사(JH스나이더)로부터 2011년에 기부받은 100만 달러였다. 힘을 모아 짓기만 하면 됐다.   한인들을 위한 커뮤니티 센터가 사실상 무산된 건 ‘우리끼리’ 대표 단체를 정하지 못한 게 결정적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인 단체 한 관계자는 “당시 정부 측에서 우리에게 조건을 하나 내걸었는데 K-ARC에서 커뮤니티센터를 운영할 ‘대표 단체’를 정해달라는 것”이라며 “그런데 K-ARC 내부적으로 대표 단체 선정을 두고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서 결국 흐지부지 됐다”고 말했다.   당시 LA카운티수퍼바이저위원회는 한인사회가 대표 단체를 제대로 정하지 못하자 결국 YMCA를 커뮤니티센터 운영 및 서비스프로그램 제공 업체로 선정했다.   본래 한인 사회에서는 커뮤니티센터를 스포츠 등을 비롯한 예술, 문화 시설과 프로그램이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또, 한인타운 주민 누구나 언제든지 찾아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로 만들고자 했다.   반면, YMCA는 스포츠, 피트니스 등의 서비스 위주로 운영된다. 회원제여서 저렴하지만 회비를 내야한다.   버스는 이미 지나갔다. YMCA가 운영을 맡기로 하면서 한인 사회의 아이디어는 다시 숙원으로 남았다.    강 디렉터는 이날 “YMCA 건물이 들어서게 된 건 정말 축하할 일인데, 한편으로는 씁쓸하다”며 “당시 한인들이 풀뿌리운동 등을 통해 공청회까지 참여해가며 얻어낸 건데 센터가 무산된 건 한인 사회에 아쉽고 또 아쉬운 일”이라고 말했다.   K-ARC의 한인 단체들은 지금도 분기별로 모임을 갖고 있다. 당시 쓰지 못한 100만 달러가 아직도 계좌에 그대로 있다.    8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건 없다. 변한 게 있다면 한인타운 커뮤니티 센터가 돼야 했을 건물에 지금 ‘YMCA’ 간판이 달려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한인들은 건물 간판이 바뀐 사정도 잘 모른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한인타운 커뮤니티센터 LA 로스앤젤레스 LA한인타운 YMCA 스티브 강 장열 미주중앙일보 KYCC 마크 리들리 토마스 코리아타운 수퍼바이저위원회 풀뿌리 운동 한인사회 숙원 버몬트코리도

2024-02-27

한인타운 관할 전 시의원 부패 혐의 3년6개월 실형

부패 비리 혐의로 유죄 평결을 받은 마크 리들리-토머스(68·이하 MRT.사진) 전 LA시의원에게 3년 6개월 형이 선고됐다.   연방법원은 28일 오전 USC 대학에 10만 달러의 뇌물을 제공해 학교 측이 자신의 아들에게 각종 혜택을 제공토록 한 것 등 총 7개의 혐의에 대해 유죄 평결이 내려진 MRT에게 “커뮤니티 전체가 피해자가 됐다”며 장기간의 연방교도소 구금형을 선고했다.   데일 피셔 판사는 이날 선고 재판에서 “MRT는 매우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으며 책임을 지거나 반성하는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중형 사유를 밝혔다. MRT에게는 구금형 복역 이후에도 3년 동안의 보호관찰, 3만 달러의 벌금형이 함께 내려졌다.   형사 재판 내내 증언대에 서지 않았던 MRT는 선고 직후 자신의 아들을 통해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가족과 지지자들에게 내가 뭔가 비행을 저질렀다는 것으로 비춰져 죄송하다”며 “내가 한 행동과 조치들은 잘못된 조언에 근거한 것이지만 불법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항변했다.   애초 유죄 평결이후 검찰 측은 법정에 6년 형을 요구했으며, 변호인 측은 2~3년의 가택 연금형을 요청한 바 있다. MRT는 11월 13일까지 교도소에 입소해야 한다.   한편 주의회와 LA카운티 수퍼바이저, LA 시의원을 지낸 MRT는 남가주의 오랜 흑인 정객으로 사우스 LA에 지지기반을 두고 32년 동안 승승장구했다. 그가 시의원직을 사퇴하면서 후임으로 흑인 여성인 헤더 허트가 10지구 의원직에 임명되면서 한인사회에서는 시의회가 선거없이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다며 반발하기도 했다.  최인성 기자 ichoi@koreadaily.com리들리 토마스 리들리 토마스 마크 리들리 연방교도소 구금형

2023-08-28

민주화운동과 여성편력, 삶은 얼마나 무거울까

체코 망명 작가 밀란 쿤데라가 1984년 발표한 베스트셀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을 필립 카프만 감독이 1988년 영화화했다. 체코인들이 소련의 프라하 침공과 탄압에 맞서 투쟁을 벌이는 시대에서 한 남자와 두 여자가 벌이는 애정 행각을 주소재로 추출해내 서로의 사랑 방식과 삶의 유형을 가벼움과 무거움의 실존적 관점에서 묘사한다.     베스트셀러의 영화화는 늘 기대와 우려를 동반한다. 작가 쿤데라는 영화를 관람한 후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토로했다. 그러나 카프만은 그와는 별개로, 복잡하게 얽힌 세 남녀의 서사에 향수, 상실감, 이상주의와 로맨스를 적절히 조화시켜 소설의 주제인 존재의 의미와 삶의 무게에 접근했고 영화만이 연출해낼 수 있는 매력과 여운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1986년 미국에서 이례적으로 같은 날 개봉된 ‘전망 좋은 방’과 ‘마이뷰티불런드렛(My Beautiful Launderette)’은, 연기에 영혼을 바친 남자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놀라운 연기 영역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처음 주연으로 캐스팅되었고 다음 작품 ‘나의 왼발’(1989)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 루이스는 ‘There Will Be No Blood’(2007)와 ‘링컨’(2012)으로 역사상 세 번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는 최초의 배우가 된다.     ‘참을 수 없는… ’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한다. 쿤데라의 원작에서는 소련의 무력개입, 언론자유의 박탈, 망명, 귀환 등과 같은 일련의 정치적인 사건들이 다루어지지만, 카프만은 세 주인공의 에로틱한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프라하의 유능한 외과의사 토마스(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타고난 바람둥이다. 그는 즉흥적으로 여자들에 매료되고 또한 탐닉한다. 수술을 위해 시골로 출장을 갔다가 사진작가 테레자(쥘리에트 비노슈)를 만난다. 늘 책을 읽으며 도시를 동경하는 테레자는 무작정 프라하로 토마스를 찾아온다. 토마스는 예술가인 사비나(레나 올린)와 연인관계를 맺고 있었다. 토마스의 사랑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테레자는 괴로워하면서도 그와 결혼한다.     소련의 침공에 이어 세 사람은 스위스 제네바로 떠난다. 사비나는 프랑스 남자 프란츠를 만나 또 다른 관계를 시작한다. 진보적인 지식인 프란츠는 혁명 지향적인 사비나에 빠져 아내를 버리지만, 그 또한 사비나에게 버림을 당한다. 토마스의 계속되는 여성 편력에 혐오감을 느낀 테레자는 체코 슬로바키아로 돌아간다. 미안한 마음에 토마스는 제네바에서의 안정적 생활을 버리고 테레자를 뒤쫓아 온다. 성의 유희에 집착했던 ‘가벼운’ 토마스가 ‘무거운’ 테레사에게서 비로소 사랑을 느낀다.     의사직을 박탈당한 토마스는 트럭운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나 그의 지속하는 바람기에 테레자는 방황하고 바에서 만난 남자와 ‘반항적’ 섹스를 한다. 두 연인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을 몰고 술집에 가서 하루 저녁을 즐긴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비탈길에서 추락하여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토마스와 사비나는 가벼움, 테레자와 프란츠는 무거움을 상징한다. 토마스와 사비나는 어떠한 책임이나 굴레에 갇히지 않으려는 가벼운 삶을 지향한다. 육체와 영혼의 사랑을 별개로 생각한다. 사비나는 토마스보다 더욱 ‘가벼운 관계’에 몰두하는 보헤미안이다. 둘은 토마스의 결혼 후에도 서로의 섹스를 갈망한다. 청순한 테레자는 운명적인 사랑이 영혼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토마스는 테레자를 만나면서 그간 거부해왔던 책임의 굴레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 사비나와테레자는 예술 안에서 우정을 나눈다.     영화 전체가 섹슈얼리티에 흠뻑 젖어 있지만, 카프만은 원작에서 쿤데라가 소설에 도입한 니체의 허무주의와 실존에 대한 사유를 외면하지 않는다. 소설 속 작가의 존재론적 인식은 영화에서 결국 죽음으로 표현된다. 감독은 결론부에 이르러 토마스와 테레자의 사랑을 죽음으로 처리함으로써 ‘존재의 가벼움’이란 소설의 본질적 주제로 돌아온다. 사비나는 두 사람의 죽음을 편지로 통보받는다. 토마스와 테레자의 애견이 암에 걸려 죽게 되는 서막에 이은 전개다. 카프만은 죽음을 상상으로 처리할 뿐, 실제 죽는 장면은 영화에 없다. 여운의 극대화를 노린 카프만의 연출에 다시금 감탄하게 된다.     사랑과 욕망이 있었으되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었던 테레자와 토마스의 죽음. 카프만은 토마스가 비로소 테레사와 함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하는 장면으로 영화를 끝낸다. 두 연인이 이 세상을 고하고 영원의 세계에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걸 의미하는 듯, 영화의 침울했던 톤이 밝은 톤으로 바뀐다. 찬란한 마지막, 역설과 모순의 논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러나 그 가벼움은 삶의 굴레에서는 누구에게나 무겁기만 했었으리라.   김정 영화평론가민주화운동 여성편력 외과의사 토마스 사진작가 테레자 사랑 방식

2023-05-12

[여행기 특별기고] 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나라, 아이슬란드

  우리가 뉴욕에서 치열하게 살면서, 힘들고 피곤할 때, 친구들끼리 가끔 "단순히 농사만 짓고 살던 옛날 사람들은 속이 얼마나 편했을까"라는 이야기를 한다. 아주 오랜 옛날에 마냥 걱정과 근심이 없이 단순한 삶을 살 수 있는 땅이 지금도 이 지구에 있다면 궁금해서 몇날 며칠이라도 한번 다녀오고 싶지 않을까?     아이슬란드는 그런 곳이라고 말하고 싶은 곳이다. 이곳은 여행을 간다고 하기 보다 그냥 쉬러 가는 땅이다. 물론 신비로운 곳이 무척 많지만, 보면서 즐기는 것뿐만이 아니고, 느끼는 게 훨씬 많은 땅이다.   아이슬란드 여행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대표적인 건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하는 1주일 정도로 남부 지역의 몇 군데 명소와 온천 한 번하고 오는 방법. 둘째는 링로드(Ring Road: 828마일)를 타고 나라를 한 바퀴 도는 여행. 셋째는 링로드를 포함하여 북서부의 피오르드 해안가와 스나이펠스네스 반도까지 다녀오는 여행. 여기서 피오르드는 빙하가 산의 협곡 사이로 흘러 내리면서 U자 모양으로 만들어진 좁고 깊은 만을 말한다.     여행 다니면서 이민이란 단어가 생각난 곳은 여기가 처음이었다. 남부만 다녔는데도 감탄을 넘어서 충격이었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다니…" 하면서. 시간을 내기 힘들면 광활한 빙하 지역 바트나요쿨(Vatnajokull)의 남부 지역만이라도 1주일 정도 다녀오면 정신 건강에도 좋고, 살아가는 데 활력소가 될 것이다. 그런데 1주일만 다녀 온 여행자가 시간이 나면 분명히 안 가 본 아이슬란드의 다른 곳도 가보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만큼 매력적인 땅이다.         또 12일 정도 걸리는 나라 전체를 한 바퀴 도는 '링로드 여행'은 아이슬란드의 절반쯤 느꼈다고 볼 수 있다. 화산의 나라이기 때문인지 모든 땅이 용암이 식어 굳은 까만 바위 땅이다. 그래서인지 도로 옆에 갓길이 없다. 일차선 도로도 차 한대 지나갈 폭뿐이다. 보이는 경치는 모두가 절경인데, 차를 맘대로 세울 수가 없으니 운전에 신경을 더 써야 된다. 물론 가끔 가다 차를 세울 수 있는 전망대 파킹장은 있다.   링로드는 828마일에 불과하지만 중간 중간에 간헐천(Geyser)을 구경하고 온천욕도 할 수 있다. 겨울에 갈 때마다 머무르는 북부 어느 집 마당에는 우리 어렸을 때 동네 목욕탕 욕조 사이즈만한 개인 야외 온천이 있어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밤 하늘에 피어 오르는 오로라를 보는 낭만도 즐길 수 있다. 화산 분화구에 올라 분화구 주위를 걷는 하이킹과 빙하 계곡에서 크레바스를 피해서 빙하 위를 걷는 빙하 하이킹(영화 인터스텔라 촬영지)도 한다.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끝없는 황금색 들판을 걷고, 계곡과 크고 작은 폭포(아이슬란드는 폭포가 1만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작은 것까지 합치면 그보다 훨씬 많을 것 같다)를 보고 다니려면 일정이 12일은 필요하다. 계절별로 다녀 본 링로드의 절경은 10~11월과 3~4월이 최고의 경치를 즐길 수 있다. 물론 여름에는(뉴욕의 봄날 같다) 낮 시간이 길어져서 여행하기 편하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 10월초부터 3월 사이에 가는 게 좋은데, 밤 하늘에 구름이 없어야 하고, 초승달이 뜨면 볼 가능성이 훨씬 많다.   아이슬란드를 간다고 오로라를 다 보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12월과 1월, 2월은 낮 시간이 4~5시간 밖에 안되어 여행하기 불편하고, 6월과 7월은 20시간 가까이 백야이기 때문에 여행 시간이 길어진다.   링로드는 남부지역의 끝없는 평야와, 북부의 가파른 능선을 오르고 내리는 산길로 이어지는데, 날씨 변덕이 심한 이 나라에서 눈 속을 달리다가 뜨거운 수증기가 뿜어 나오는 설산의 화려하고, 신비로운 광경을 본다는 것은 놀랍고 황홀하다고 밖에 표현이 안 된다. 아무리 눈보라가 쳐도 잠깐 기다리면 신기하게도 파란 하늘로 바뀐다. 북대서양을 왼편으로 끼고 돌며 수평선과 지평선을 번갈아 보면서, 이 나라를 한 바퀴 도는 여행 내내 누구나 수도 없이 "OMG" 소리를 저절로 낸다. 가는 곳 마다 우리가 살면서 못 보던 자연을 보기 때문에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뭔가 새로운 역사나 문화를 배워오고, 지식을 얻어오는 땅도 아니다. 그저 때묻지 않은 순백의 땅에 가서 차분한 마음으로 쉬었다 오는 땅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하는 여행처럼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다니면서 여행 경비의 본전은 뽑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갈 곳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몸이 여행을 하는 게 아니고 마음이 여행하는 땅이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펄펄 끓어 오르는 투명한 온천수와 간헐천, 그리고 이끼 낀 녹색 땅과 양떼들의 먹이인 누런 풀밭. 이런 것들을 보면서 "이게 뭐 볼 것인가" 하는 사람과 "오염되지 않는 태고적 자연의 모습을 간직한 이 모든 아름다움은 세상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고 믿는 그룹. 내 생각으로는 이곳을 찾는 여행객을 이 두 그룹으로 구분하고 싶다. 물론 나는 후자에 속하는 여행객이다. 그래서 이곳은 여행을 하러 오는 게 아니고, "그냥 쉬러 온다"고 하는 게 맞다.   이곳의 자연의 모습들을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눈부시게 화려하면서도 단순하고, 자극적이면서도 무료하고, 화끈하면서도 차분하고, 장엄한 풍경 속에서도 소박한 감정을 만들어 낸다. 나라 전체를 한 폭의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옅은 물감으로 그린 수채화나 파스텔화 같은 잔잔하고, 편안한 그림 같기에 이 나라를 다니면 다닐수록, 보면 볼수록 마음을 편하게 하는 나라다.     참조: 유튜브(지구 같지 않은 땅. 아이슬란드 관광과 바이크 투어링) youtube.com/watch?v=3R1ONg8g5b0&t=67s 글·사진=토마스 리 자유여행가아이슬랜드 토마스 리 아이슬랜드 여행 아이슬랜드 여행기 토마스 리 자유여행가

2023-01-29

토마스 제퍼슨 센터 출간기념 헌정식

미국 건국정신을 연구하는 한인들 모임인 토마스 제퍼슨 센터 이종권 대표가 쓰고 토마스 제퍼슨 센터에서 편찬한 ‘이것이 미국독립선언문이다’의 출간을 기념한 헌정식이 23일 뉴저지주 리버에지에 있는 그레이스 루터란 교회에서 열렸다.     이 책은 지난해 10월 17일부터 12월 27일까지 두 달에 거쳐 난해하기로 유명한 토마스 제퍼슨의 독립선언문을 제목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분석해서 해설 강연한 것을 집대성한 것으로, 미국독립선언문의 역사적, 철학적, 어학적 배경이 설명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토마스 제퍼슨 센터는 “미합중국의 통치법인 헌법이 미국독립선언문의 토대 위에 제정되었으므로 그 헌법 아래의 각종 법률과 제도,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문화의 많은 부분도 독립선언문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독립선언문이 바로 미국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종권 대표는 “천부인권과 건국정신의 메시지를 미주한인은 물론 미국인들에게도 널리 전하고자 한다”며 “그것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건강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줄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여 이 책을 헌정한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토마스 제퍼슨의 자손인 린다 윌리엄 여사(목사)가 직접 참석해 환영사와 축사로 책의 출간을 축하했다. 또 성악가 주성배 씨와 피아니스트 김은영 씨가 축하공연으로 자리를 빛냈다. 장은주 기자 chang.eunju@koreadailyny.com토마스 제퍼슨 센터 이것이 미국독립선언문이다 이종권 대표 그레이스 루터란 교회 독립선언문 린다 윌리엄

2022-07-24

토마스 제퍼슨 센터 이종권 대표 책 출간

    미국 건국정신을 연구하는 한인 동포들 모임인 토마스 제퍼슨 센터 이종권(사진) 대표가 책을 출간했다.   이 대표는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연구 분석한 ‘이것이 미국독립선언문이다(표지)’ 책을 펴내고 한인사회에 미국의 독립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오는 23일 오후 4시 뉴저지주 리버에지의 그레이스 루터란처치(Grace Lutheran Church, 925 Fifth Ave)에서 출간기념 헌정식을 개최한다.     이 대표는 “미국사회를 이해하려면 독립선언문을 알아야 한다”며 “헌법을 비롯한 각종 법률이 독립선언문의 정신에 의거하여 제정되었으며, 따라서 각종 제도와 문화 그리고 미국인들의 생각과 행동도 그 근본은 바로 이 독립선언문의 메시지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이 대표는 “이번에 출간된 ‘이것이 미국독립선언문이다’는 토마스 제퍼슨의 독립선언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최초의 한국어 버전 미국독립선언문을 수록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출간기념 헌정식에는 토마스 제퍼슨의 직계 자손 가운데 한 명인 린다 윌리엄스 목사가 참석해 축하할 예정이다. 문의 646-596-1838. 박종원 기자이종권 이종권 대표 토마스 제퍼슨 센터 '이것이 미국독립선언문이다' 린다 윌리엄스 출간기념 헌정식

2022-07-18

[로컬 단신 브리핑] 횡령 혐의 전 주 상원의원, 징역 1년 실형 외

▶횡령 혐의 전 주 상원의원, 징역 1년 실형       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토마스 컬러튼이 횡령 사건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았다.     컬러턴은 지난 2019년 8월 '팀스터스'(Teamsters) 노조로부터 24만8000달러를 받은 혐의로 기소됐고, 지난 3월 이를 인정한 바 있다.     검찰은 컬러턴이 '선출직 공무원'이라는 점을 이용해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월급과 보너스를 챙겼다며 징역 18개월 형을 구형했다.     컬러턴에게 징역 12개월 형을 선고한 로버트 게틀맨 지방 판사는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팀스터스'로부터 보수를 받을 때마다 스스로도 잘못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을 것"이라며 "안타깝게도 일리노이 주에서는 너무 많은 공무원들이 범죄자로 법원에 출두하고 있다"고 말했다.   컬러턴을 '팀스터스'의 '유령 위원'으로 고용한 존 콜라이도 최근 시카고 '시네스페이스 필름 스튜디오'(Cinespace Film Studios)로부터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총 32만5000달러를 횡령한 혐의를 인정한 바 있다. 콜라이에 대한 재판은 아직 진행 중이다.         ▶켈로그, 3개사로 분사… 본사 시카고로 이전     'Frosted Flakes', 'Rice Krispies', 'Eggo' 등으로 유명한 식품업체 '켈로그'(Kellogg Co.)가 3개의 회사로 나눠진다.     식물성 식품업체 '모닝스타 팜'(MorningStar Farms)의 모기업이기도 한 켈로그는 21일 "앞으로 시리얼, 과자, 그리고 식물성 식품에 각각 집중하는 3개의 회사로 분사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3개 회사의 이름은 내년 연말까지 각각 결정될 예정이다.     켈로그는 지난 2021년 기준 과자, 시리얼, 그리고 식물성 식품 분야에서 각각 114억 달러, 24억 달러, 그리고 3억40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켈로그측은 "각 분야마다 독립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고, 분야별로 회사가 나뉘어지면 각 제품에 걸맞는 전략과 리소스를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켈로그는 이와 함께 현재 미시간 주 배틀 크릭에 위치한 본사를 시카고로 옮길 예정이다. 단 매출 비중이 가장 큰 과자 회사는 시카고와 배틀 크릭 사무실을 모두 사용한다는 방침이다.     켈로그는 각 주주의 보유 지분에 비례해 분사되는 회사들의 주식으로 배분할 계획이며 추후 식물성 식품 회사는 매각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켈로그의 분사 발표에 앞서 지난 21일 이 회사 주가는 8% 올라 주당 73.29달러를 기록했다.        ▶윌리 윌슨, 200만달러 무료 주유•음식 이벤트     시카고 시장 선거에 나서는 시카고 사업가 윌리 윌슨(74)이 또 다른 무료 주유 및 음식 나누기 행사를 진행한다.     올 들어 세 차례나 무료 주유 이벤트를 펼쳐 주목을 끈 윌슨은 이번에는 총 200만 달러를 들여 개솔린 및 음식을 무료로 배포할 계획이라고 지난 21일 발표했다.   무료 음식 배포는 오는 29일, 무료 주유 이벤트는 내달 9일 각각 열릴 예정이다.     윌슨은 "모든 제품의 가격이 폭등하면서 저소득층 가정일수록 필수품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JB 프리츠커 일리노이 주지사와 로리 라이트풋 시카고 시장이 단 90일동안이라도 유류세를 중단한다면 일리노이 주민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윌슨의 무료 개솔린 및 음식 이벤트와 관련한 구체적인 정보는 추후 공개될 예정이다.    ▶시카고 남부 매장 전격 폐쇄 발표       독일의 저가 슈퍼마켓 체인 '알디'(Aldi)가 시카고 남부 매장을 전격 폐쇄했다.     알디는 최근 시카고 남부 오번 그레쉠의 76가와 애쉬랜드에 위치한 매장을 영구적으로 문을 닫는다고 발표했다.     알디측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매장 안에서 계속되는 절도와 지속적인 매출 감소 등으로 인해 해당 매장을 유지하는 것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한 옵션이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폐점 이유를 설명했다.     알디를 비롯 시카고 남부서 '홀푸드', 'CVS', 'Save-A-Lot' 등의 식료품점들이 최근 연이어 폐점 결정을 내리면서 지역 주민들은 쇼핑 선택지가 줄어들고 있다며 이에 대한 당국의 적극적인 대처를 요구했다.  Kevin Rho 기자로컬 단신 브리핑 상원의원 횡령 상원의원 징역 횡령 혐의 상원의원 토마스

2022-06-22

위험 무릅쓰고 불길 뛰어들어 이웃 구한 한인 영웅

위험을 무릅쓰고 불길로 뛰어들어 이웃을 구한 한인이 화제가 되고 있다.   오렌지카운티소방국(OCFA)은 지난 2일 실비치 지역 은퇴자 단지 ‘레저월드’에 사는 김정곤(60)씨에게 시민영웅상을 수여했다.   불은 지난 1월 14일 오후 1시38분 레저월드 내 한 주택에서 발생했다.   김씨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때 집에 있었는데 밖에서 누가 ‘도와 달라’고 소리를 치더라”며 “밖으로 나가보니 옆집에서 불이 났는데 이미 창문 등을 통해 연기가 새 나오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불이 난 집에 평소 거동이 불편한 데이나 잉그램씨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곧바로 이웃 주민(윌리 보드빈)과 함께 911에 신고를 하고 정원에서 물 호스를 찾기 시작했다.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창문 너머로 불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김씨는 소방대원들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신선한 공기를 한번 깊이 들이마시고 불이 난 집으로 무작정 뛰어들어갔다.   김씨는 보행기를 찾던 잉그램씨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이후 뒷문 등을 모두 닫고 불길이 주변으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   김씨는 “일단 들어가서 보자는 생각만 했다. 몸부터 움직인 거라서 사실 그때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들어갔을 때 굉장히 뜨거웠고 이후 밖에서 보드빈씨와 함께 불이 난 곳에 호스로 물을 뿌렸다”고 말했다.   이날 김씨가 받은 것은 OCFA 소방국장이 수여하는 시민영웅상이다. 소방 당국이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것 중 최고 영예상이다. 김씨와 함께 물을 뿌리며 구조를 도운 윌리 보드빈씨는 이날 시민공로상을 받았다.   OCFA 브라이언 페네시 소방국장은 “(김씨는) 자신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연기가 가득 찬 방으로 들어가 도움을 주기로 결단했다”며 “신속한 행동과 결단력 있는 행동은 피해자가 살아남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실비치시 조 칼믹 시의원(1지구)이자 시장은 “두 사람의 영웅적인 행동이 없었다면 더 큰 피해가 발생할 뻔했다”며 “시민들의 헌신과 봉사에 감사한다”고 전했다.   김씨는 금융회사에서 펀드 매니저 등으로 활동하다가 지난해 2월 미국에 왔다. 아내와 자녀는 4년 전 먼저 미국에 와있었다.   김씨는 “대단한 일은 아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 상황이었다면 나처럼 행동했을 것”이라며 “그때 구해준 이웃은 건강하게 잘 지낸다. 감사하다는 내용의 편지도 받았는데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김정곤씨는 토드 스피처 오렌지카운티검찰 검사장, 토마스 움버그 가주상원의원(34지구) 등으로부터도 감사장 등을 받았다. 글·사진=장열 기자이웃 상황 이웃 주민 이날 시민공로상 검사장 토마스

2022-06-06

[토마스 정](10) 필생의 사업은 '우정의 종각' 한국전 기념공원 조성

이민 이백주년 행사 열리는 꿈 꾸며 추진 고 김영옥 대령 명예훈장 추서 추진됐으면 새해가 되면 나는 미리 ‘세뱃돈’을 챙겨둔다. 한인 정치인들에게 나눠줄 헌금이다. 연초가 돼서 그냥 ‘세뱃돈’이라고 부르는 거지 실제 절을 받거나 하는 경우는 없다. 나는 그 분들이 도움을 요청하기 전 미리 체크를 써준다. 이왕 주는 건데 일찌감치 드려야 요긴하게 쓸 것 같아서다. 솔직히 ‘짜다’는 소릴 많이 듣지만 한인 정치인들에게 만큼은 아끼지 않는다. 개인이 줄 수 있는 최고액, 곧 7500 달러를 수표로 끊어 준다. 돌이켜 보면 지난해 만큼 신나는 해도 없었지 싶다. 11월 선거에서 남가주의 영 김과 미셸 박 스틸 두 분이 동반 당선되는 쾌거를 이뤘기 때문이다. 문득 지난 2003년 이민백주년의 캐치프레이즈 ‘자랑스런 과거, 약속된 미래’가 떠오른다. 두 분이 ‘자랑스런 과거’를 바탕으로 ‘약속된 미래’를 펼쳐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재선에 이어 3선, 4선…. 영 김 의원에겐 사실 빚을 많이 졌다. 에드 로이스 의원 보좌관 시절, 국군포로송환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하원에서 만장일치 통과된 데는 김 의원의 수고가 많았다. 김 의원의 캠페인과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지난해 선거 막바지에 현직인 ‘백만장자’ 길 시스네로스가 예상을 뒤엎고 물량공세를 퍼부었다. ‘실탄’이 거의 바닥난 김 의원 측에서 긴급 구원 요청이 왔다. 그러나 개인이 줄 수 있는 기부금은 제한돼 있어 나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즉시 지인들을 불러 모았다. 십시일반 돈을 모아 김 의원 측에 전달해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김 의원의 당선 소식을 듣고는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미셸 박 스틸 의원은 그릇이 아주 큰 분이다. 언젠가 기금모금 행사에서 “저는 괜찮으니 영 김에게 기부금을 몰아주세요”하는 말을 듣고는 감동을 먹었다. 김 후보에게 기부금이 쏠리면 자기가 챙겨야 할 몫이 그 만큼 줄어들텐데…. 그런데도 자신을 낮추며 희생하는 마음씨에 정말 반했다. ‘그늘이 넓은 나무 밑에는 새들이 모이고, 가슴이 넓은 사람 밑에는 사람이 모인다’는 옛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다. 단언컨대 두 의원은 ‘가슴이 넓은’ 분들이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두 분이 제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의 영웅 김영옥 대령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가 참전했던 프랑스와 한국 등 국가들에선 모두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정작 자신의 조국인 미국에선 홀대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두 의원이 앞장서 ‘명예훈장(Medal of Honor)’ 추서 캠페인을 벌여줬으면 더는 바랄 게 없겠다. 또다른 한국전의 영웅을 위해 할 일이 남아 있다. 올 상반기 중 LA한인타운 인근의 맥아더 파크에 한국전 기념 벽화를 제작하고 주변 환경미화에 힘을 쏟을 생각이다. 적잖은 경비가 들어갈테지만 자비로 충당할 생각이다. 벽화는 동상 뒷편에 세워진다.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기념비적인 장면들을 담는다. 이미 ‘독도화가’ 권용섭 화백에게 벽화제작을 위촉한 상태다. 시정부도 흔쾌히 승인해줘 걸림돌은 없다. 당초 지난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70주년을 맞아 계획한 것인데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미뤄졌다. 맥아더 파크의 동상을 인천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전혀 관련이 없다. 필리핀(레이테) 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필리핀계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동상을 만들었다. 공원이름은 원래 ‘웨스트레이크 파크’였으나 태평양 전쟁 때 ‘맥아더 파크’로 바꿨다. 암울했던 그 당시 ‘그래도 맥아더가 우릴 구해주겠지’하는 미국인들의 염원을 담아 전국의 많은 공원, 학교, 공항, 거리 이름들이 맥아더로 바뀌었다고 한다. 내겐 필생의 사업이 하나 있다. 샌피드로 ‘우정의 종각’ 인근 부지에 한국전참전 16개국 기념공원(가칭)을 세우는 일이다. 연방정부 소유여서 허가를 받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참전국 마다 별도의 기념관을 만들어 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한편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는 교훈을 후대에 심어줄 작정이다. 프로젝트의 테마는 전쟁이 아닌 평화와 번영으로 잡았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참전 덕분에 대한민국은 지금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세계 10위권 경제강국의 지위가 거저 얻어진 게 아니다. 샌피드로엔 ‘흥남철수’의 주역 빅토리호(Meredith Victory)도 전시돼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이 배를 타고 자유의 땅에 안착할 수 있었다. 1만5000톤에 불과한 화물선이 7000명이 넘는 피란민들을 태워 세계전쟁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나는 지금도 레너드 라루 선장의 회고에서 삶의 영감을 얻는다. “어떻게 이 작은 배가 그 많은 사람들을, 그 위험한 항해에서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구조할 수 있었는지…. 그해 성탄절, 나는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고 믿는다.” 라루 선장은 은퇴 후 수도원에 들어가 전쟁에 쓰러진 영혼들을 위해 여생을 바쳤다. 이외도 종각 인근엔 ‘맥아더 기지(Fort MacArthur)’도 있어 이 일대를 한 묶음으로 연결하면 LA의 유명 관광명소로 부상할 가능성도 크다. 한인커뮤니티의 ‘억만장자’ 한 분께 이 프로젝트를 설명하며 함께 종잣돈을 마련해 성사시키자고 제안해 놓은 상태다. 오렌지카운티 웨스트민스터의 ‘리틀 사이공’에도 베트남전 참전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미군과 베트남(월남) 병사들이 손을 맞잡고 있는 동상이 먼저 눈길을 끈다. 150만 달러가 들었는데 모두 모금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공원을 둘러보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나는 가끔 꿈을 꾼다. 2103년의 미주이민 이백주년 기념식이 샌피드로의 한국전 참전기념 공원에서 열리는 그런 꿈이다. 1903년 하와이의 사탕수수밭, 2003년의 로즈 퍼레이드 꽃차, 2103년의 16개참전국 대표가 모두 참가하는 평화와 번영의 축제. 그런 꿈을 가져본다.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게 2000년대를 살았는지 백년후 후손들이 알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변변치 않은 삶을 살아온 저의 글을 읽어주신 중앙일보 독자님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박용필 전 논설고문

2021-02-15

[토마스 정](9) 북한서 생환 노병 보고 '전우 구하기' 작전

한국과 미국서 백방으로 뛰었지만 성과 없어 한인 정치인 필요성 절감 1.5세 후견인 역할 1994년의 어느날. 우연히 한국어 TV방송을 보다가 생뚱맞은 장면에 눈길이 갔다. 대한민국 육군 예복 차림에 소위 계급장을 단 노인이 누군가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있었다. “군번 xxxxx. 육군 소위 조창호. 오늘부로 본대에 복귀하였음을 신고합니다.” 북한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목숨을 걸고 탈출해 40여 년만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정전협정에 따라 양 측이 수용했던 포로들은 각자의 의사에 따라 모두 송환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난데 없이 포로라니. 그 노인(조 소위)의 말은 그러나 ‘픽션’이 아니었다. 그 순간 내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을 해댔다. 실종된 내 고향 후배 김용석 소위, 내 부하들, 내 동기생들…. 아직도 북녘땅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만 같았다. 벌떡 일어나 상의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미국에 와서도 늘 품고 다녔던 육군종합학교(전시사관학교) 8기 동기생 명단이다. 199명 가운데 절반 가량이 전사 또는 실종자로 분류돼 있었다. “살아만 있어다오. 내가 꼭 구해줄게.” 나는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미국에 살면서 잊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건만~. 1950년의 잔인했던 그 겨울, 그 악몽이 되살아나며 내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전쟁이 터진 해 나는 소위로 임관해 강원도의 8사단에 배속됐다. 제 16연대 제1 대대 제 4중대(중화기 중대) 중대장. 8사단은 원래 유엔군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에 포위돼 전멸하다시피 했다. 재편성된 사단은 장교도, 사병도 대부분 신참으로 채워졌다. 전투경험이 거의 없어 리더십은 애시당초 실종상태였던 것. 우리 중대는 인민군과 교전을 벌이며 제일 먼저 양구에 진입했다. 험준한 산악지대여서 미군의 포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얼마나 치열했는지 고지의 주인이 밤과 낮으로 바뀌었다. 낮엔 국군이 점령하고, 밤엔 인민군에 빼앗기고. 그해 겨울은 한밤중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떨어졌다. 방한복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탓에 병사들은 불을 지펴 몸을 녹였다. 이 바람에 적의 손쉬운 공격표적이 됐다. 이른바 ‘앉아 있는 오리(sitting duck)’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일 터다. ‘높은 분’들은 이미 전투가 시작도 되기 전에 도망쳐버렸다. 그것도 모르고 고지를 사수했으니. 중대 병력 168명 가운데 생존자는 30명에 불과했다. 할 수 없이 철수명령을 내렸다. 어디쯤 내려왔을까. 부상병을 업은채 쓰러지고 말았다. 내가 의식을 잃었을 때는 눈이 막 퍼붓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부하들은 내가 5분만 늦었어도 폭설에 묻혀 구조할 수 없었다며 하늘이 나를 살려줬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내 몸은 얼어 붙어있었다. 마른 나뭇가지를 구해 불을 지핀 다음 부하 여섯이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마치 통돼지 구이하는 것 처럼 나를 돌려가며 불에 쐤다고 한다. 피가 다시 흐르면서 의식을 되찾은 것. 나는 이렇게 부하들에 내 목숨을 빚졌다. 더욱 참담했던 건 내 연락병과의 엇갈린 운명이다. 중대장의 굶주림을 보다 못해 포위망을 뚫고 민가를 찾아갔다가 그만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나 대신 전장의 이슬이 되어버린 연락병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간신히 살아 돌아온 나는 또 한번 좌절했다. 상관의 지시없이 후퇴했다며 나를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는 게 아닌가. 총살형 운운하며…. 맨 먼저 도망간 게 누군데. 이런 비겁한 자들이 전쟁을 지휘하다니 분노가 치솟았다. 또다시 살육의 현장에 내몰렸으나 이번엔 중상을 입었다. 왼쪽 다리 관통상을 당한 것. 결국 ‘상이군인’으로 분류돼 군을 떠나게 됐다. 1계급 특진과 함께 훈장도 달아줬지만 나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부조리가 판치는 군이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창호 소위의 갑작스런 출현이 나를 내 부하들 곁으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나만 잘 살겠다며 미국에 온 내가 부끄러워졌다. 부하들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국군포로송환에 매달렸다. 한국의 여야 정치 지도자들을 두루 만났으나 죄다 ‘립서비스’ 뿐 실천의지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내게 힘이 되어줬던 유일한 분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꼭 북측에 국군포로송환을 요구하겠다며 믿어달라고 했다. 남북정상회담에서 노 전 대통령은 약속대로 국군포로 문제를 꺼냈다. 인도주의에 입각해 돌려보내줄 것을 요구했으나 김정일은 아예 대꾸조차 안했다고 한다. 비록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노 전 대통령에 마음의 빚이 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게 버팀목이 되어준 이는 ‘북한 인권투사’ 수잔 숄티 여사다. 우연히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만난 숄티는 무대를 워싱턴 의사당으로 옮겨 포로문제를 이슈화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2005년 4월 조창호 소위 등 포로 두 분을 자비로 초청해 연방의사당에서 토론회를 열었다. 북에 강제 억류된 국군포로들의 참상이 처음으로 미 정치권에 알려져 반향이 컸다. 2011년에는 연방하원이 전쟁포로 즉각 송환을 요구하는 결의안(HR 376)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작 포로송환에 적극 나서야 할 한국정부가 무관심으로 일관해 이제 포로송환운동은 접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북의 생존 포로는 많아봤자 150여 명 가량이다. 모두 90대의 노쇠한 분들이어서 북에서 생을 마감해야 할 처지다. “살아만 있어다오”하며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이젠 저 세상에서나 만나 용서를 빌어야 할 것 같다. 약속을 못지켜 미안했다고. 포로송환 캠페인을 벌이면서 많은 이들을 만났지만 숄티 여사와 같은 분은 드물었다. 돈이 없어 작품을 무대에 올리지 못하고 있는 탈북 연극인의 딱한 사연을 듣고는 자신의 집을 저당잡혀 비용을 대 주기도 했다. 그 연극인이 내게 들려준 얘기다. 그래서 나는 그 분 앞에만 서면 왠지 작아지는 느낌이 들곤한다.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다는 숄티 여사다. 포로송환문제로 워싱턴을 수차례 오가며 얻은 교훈이 하나 있다. 한국계 선출직 공무원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절감한 것이다.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해 줄 우리의 의원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한인 1.5세들의 정치후견인 역을 자임한 것도 이같은 배경에서다. 박용필 전 논설고문

2021-02-10

[토마스 정](8) 2003년 로즈 퍼레이드 '한인 꽃차'에 올인

‘100년만의 일’ 호소에 주최측 절대 불가 입장 바꿔 2005년 연방의회 '한인의 날' 결의안 만장일치 통과 이민 백주년 기념행사는 모름지기 한인 커뮤니티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벤트였다. 예산을 편성해 보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80만 달러는 족히 필요했다. 내가 먼저 12만 달러를 냈다. 기금모금과 관련해 내게 감동을 준 분이 있다.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시다. “언론사는 무릇 커뮤니티의 친구 같은 존재가 돼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개인 돈 1만 달러를 보내왔다. 내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큰 격려였다. 나는 동전 한 닢 허투루 쓰지 않았다. 식사 등 경비도 각자 부담을 원칙으로 했다. 너무 깐깐하다는 불평이 쏟아졌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 자신 한인단체들의 ‘행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또 봐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시계를 1960년대로 되돌려 보자. 이민이 본격화되기 전이어서 LA 한인인구는 유학생들이 고작이었다. 한인회(처음엔 한인센터로 불렸다)라고 해봤자 몇몇이 모인 친목단체에 불과했던 것. 모두들 가난해 회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한인회의 ‘물주’는 찰스 H. 김(한국명 김호). 한인 이민 역사상 처음으로 백만장자의 반열에 오르신 분이다. 그 분이 한인회관 건립기금으로 1만 달러를 내놨다. 그런데도 한인회는 돈이 떨어지면 그에게 손을 벌렸다. “모이면 싸움질만 하는데 내가 왜 당신들한테 돈을 줘야 하느냐”고 호통을 쳤지만 며칠 후엔 슬그머니 또 돈을 보내왔다. 그 돈을 아껴 쓰기는커녕 먹고 마시며 탕진하기 일쑤였다. 한인회를 자신들의 클럽하우스쯤으로 여겼다고 할까. 찰스 김은 김형순과 함께 ‘김 브라더스’를 설립, 농장을 기업화해 부를 일궜다. 두 사람이 친형제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 피한방물 섞이지 않은 남남이다. 그런데도 계약서 한 장 없이 평생 비즈니스를 함께 했으니 시쳇말로 ‘연구대상’이라고 해야 할지. 며칠 전엔 그 분과의 인연을 떠올리게 하는 기사를 읽고 감회에 젖기도 했다. 한국서 씨 없는 포도가 인기를 끌고 있다며 이젠 한국이 보유한 종묘가 일본을 제치고 세계 5위권으로 부상했다는 내용이다. 사연은 이랬다. 1960년대 초 한국의 지인 한 분이 내게 씨 없는 포도 종묘를 구할 수 있느냐고 문의해 왔다. 찰스 김으로부터 종묘를 얻어 곧바로 보냈다. 씨 없는 포도는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에 처음 보급된 것이다. 나도 한국의 종묘산업에 일조를 한 것 같아 뿌듯해 진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이민백주년 기념사업의 하이라이트는 패서디나의 로즈 퍼레이드 참가다. 미 전역에 생중계되는 신년맞이 최대규모의 축제여서 우리 이민역사를 홍보하는데 이 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을 터다. 행사를 주관하는 패서디나 상공회의소 측에 참가의사를 밝혔다. 뜻밖에도 회신은 ‘절대 불가.’ 최소 5년 전엔 신청해야, 그것도 심사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이유를 댔다. 한마디로 ‘꿈 깨라’는 거 아닌가.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한인 커뮤니티로선 백년만에 한 번 맞는 경사라며 로비를 벌였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백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감동을 줬는지 주최 측으로부터 특별 허가가 떨어졌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그날 밤잠을 설쳤다. 현장에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꽃차 제작에 매달렸다. 한인학생들이 성탄절 휴가를 반납해 가며 자원봉사를 해줘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성서에 나오는 ‘사랑의 수고(labor of love)’는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꽃차 장식은 규정상 모두 생화를 쓰게 돼있다. 전세계의 장미란 장미는 모두 로즈 퍼레이드에 동원된다는 얘기가 결코 우스개는 아니란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또 하나 꽃차와 관련해 중앙일보에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코리안 로즈 퀸’을 선발해 꽃차에 태우자는 안을 내놨다. 주최 측은 그러나 ‘로즈 퀸’은 퍼레이드의 심볼이나 다름없어 어느 누구도 사용할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퀸’을 뽑기는 뽑아야 하는데…. 신문사 측에서 ‘센테니얼 퀸(Centennial Queen)’을 제안했다. ‘(이민) 백주년의 여왕’이다. 중앙일보 측은 선발전을 통해 ‘퀸’ 한 명과 ‘프린세스’ 4명 등 모두 5명을 뽑았다. 미인선발대회가 아니어서 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이민사 숙지 여부 등을 심사해 뽑았다. 이들은 꽃차 탑승은 물론 그해 한인 커뮤니티의 홍보사절로 활동해 백주년을 맞는 우리 이민역사를 주류사회에 두루 알렸다. 프린세스 중에는 미 육사(웨스트포인트) 출신도 포함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꽃차에는 이외도 박찬호(LA 다저스), 로널드 문(하와이주 대법원장) 등 한인사회를 빛낸 인물 29명이 탔다. 새해 첫 날 백만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이민 백주년 꽃차가 밴드를 앞세워 퍼레이드에 나서자 나는 울음을 삼켰다. 나 보다 앞서 살다 간 이민 선배들이 생각나서다. 그 분들이 오늘의 이 장면을 봤으면 얼마나 감격해 했을까. 대망의 2003년 1월 1일은 꽃차 퍼레이드로 마감했지만 내겐 또 마지막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백년 전 1월 13일, 우리 선조들이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처음 미국 땅을 밟은 그 날을 영구 기념일로 제정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연방의회에 냈다. ‘꿈은 꾸는 게 아니라 이루는 것’이라고 했던가. 2년 후 결국 꿈이 성취됐다. 에드워드 케네디, 대니얼 이노우에, 조지 앨런, 딕 더빈, 시어도어 스티븐스 상원의원 등이 우리의 요구를 결의안으로 만들어 상원 전체 회의에 올렸다. 2005년 12월 16일, 결의안(S. Res. 283)은 표결없이 구두로 만장일치 통과됐다. 이후 매년 1월 13일은 ‘코리언 아메리칸 데이’로 지정돼 해마다 빠짐없이 경축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결의문에는 찰스 김의 공적도 들어가 있다. 미국 최초로 넥타린(털없는 복숭아) 묘종을 개발했다는 내용과 함께. 이외도 제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영웅 김영옥 대령,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새미 리 박사 등 한인 이민 역사의 아이콘들이 결의문에 포함됐다. 결의문을 받아든 날 나는 이렇게 빌었다. “선배님들이여, 당신들의 땀과 열정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 세상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박용필 / 전 논설고문

2021-02-08

[토마스 정](7) "좋은 친구와 직원들은 나의 재산목록 1호"

지인들 덕에 이민 100주년 사업 성공적 진행 묵묵히 일해주는 장기 근속 직원들에 감사 30년 전 내가 미주은행(나라은행의 전신)에 투자한 돈은 30만 달러다. 은행감독국이 요구한 자본충당금 150만 달러 가운데 5분의 1을 내가 맡은 셈이다. 1주 당 3 달러에 모두 10만 주를 배당받아 대주주가 됐다. 주주로 참여하신 분들 가운데는 다운타운에서 의류 봉제로 사업을 키운 분들이 많았다. 우병우, 김탁, 김용환씨 등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아메리칸 드림을 일궈낸 분들이다. 내가 이사장을 맡아 은행 살림을 꾸렸다. 벤자민 홍 행장의 뛰어난 경영수완으로 은행은 매년 35%씩 성장을 거듭했다. 주가도 당초 3 달러에서 4 달러, 20 달러, 주식 분할도 세 차례나 이어졌다. 훗날 내가 이사를 그만 둘 때는 주식이 27 달러까지 뛰었다. 직원들도 신이 나 열심히 일했다. 어느핸가 연말 파티에서 일어난 해프닝이다. 어느 부장이 툴툴댔다. 은행 측이 준비한 선물꾸러미가 성에 안찼던 모양이다. ‘은행이 누구땜에 이 만큼 컸는데…’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순간 나도 모르게 버럭했다. “주식회사는 누굴 위해 존재합니까.” 갑작스런 내 질문에 모두 당황한 듯 했다. “주주의 이익입니다. 주주….” 나는 주주를 몇번이나 되뇌었다. 다 망해가는 회사를 살린 건 주주들의 투자 덕분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좀 살만해졌다고 흥청망청 쓰면 주주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따끔하게 일러줬다. 내 ‘훈계질’이 먹혔는지 이후 은행 파티는 조촐하고 검소하게 치러졌다. 이사장 재임시 내가 ‘군기’를 잡은 일이 또 하나 있다. 회의시간 엄수다. 이사들은 각자 생업이 있어 회의는 주로 저녁 7시에 열렸다. 그런데 제 시간에 오는 분들이 거의 없었다. 10분, 20분, 심지어 1시간 늦게 와도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이른바 ‘코리안 타임’이 몸에 배였다고 할까. 담당 직원에게 7시 정각이 되면 문을 걸어 잠그라는 지시를 내렸다. 일부 이사들은 내가 너무 ‘빡빡하다’는 푸념을 해댔지만 나는 시간 문제 만큼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거래선과 계약을 맺는 자리에도 10분 늦게 나타날 것인가”하며 큰소리를 냈다. 내게 시간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 재산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지각에 대해 무관용 원칙을 밝히자 얼마안가 이사회가 정시에 열리게 됐다. 늦기는커녕 10분 일찍 와 그날 토의할 아젠다를 미리 점검하는 등 ‘이색적인’ 장면이 연출된 것. 이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은행업무 쇄신에 큰 기여를 했다고 감히 자부한다. 매해 목표치를 상회하는 실적을 올리다 보니 은행 몸집이 커졌다. 다음 단계는 인수합병(M&A). 한인은행으론 처음으로 M&A에 나섰다. 인수하는 쪽이 아무래도 합병을 당하는 쪽보다 우위에 있는 건 사실이다. 지점도 통폐합되는 등 물갈이 대상의 폭이 커진다. 합병대상 은행장은 당연히 퇴직 제 1호다. 한미은행과의 인수합병을 추진할 때 얘기다. 양측 이사들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 어려운 상황이 됐다. 이때 유재환 당시 한미은행장이 나를 찾아왔다. “이사장님, 합병을 더 강력하게 밀어붙이세요.” 유 행장의 주문에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합병되면 유 행장 자신의 목이 제일 먼저 날아갈텐데…. 유 행장은 그러나 커뮤니티 은행이 성장하려면 합병 외엔 대안이 없다며 자신의 거취따위는 고려하지 말라고 했다. 이후 공교롭게도 유 행장이 맡은 은행이 또 다시 나라은행의 공격목표가 돼 얼마나 미안했든지. 그래도 불쾌한 내색하지 않고 내게 합병을 권했다. 연배로는 내 조카뻘이지만 나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그 분의 '됨됨이’를 존경한다. 모임이 있을 때는 꼭 유 행장을 상석에 앉힌다. 내겐 그가 ‘어르신’이다. 박창규 전 한미은행 이사장은 나의 영원한 ‘주치의’이시다. 내가 몸이 아파 전화를 걸면 한밤중, 새벽녘이라도 한걸음에 달려온다. 약사 출신이어서 의학상식이 웬만한 의사 뺨칠 정도다. 내겐 말년에 믿고 의지하는 몇 안되는 친구 중 한 분이다. 윌셔은행의 고석화 전 이사장은 한마디로 ‘젠틀맨’이다. 매사에 맺고 끝는게 분명한 분이다. 내가 미주한인이민 백주년기념사업회를 맡고 있을 때다. 한인은행들을 찾아 다니며 기금을 모았다. 은행마다 1만 달러를 냈는데 윌셔 은행만 5000 달러를 고집했다. 그러자 고 이사장이 선뜻 5000 달러를 개인체크로 내 1만 달러를 맞춰줬다. 얼마나 고마웠든지. 새크라멘토에서 열린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미주한인의 날 기념 선포식에는 나 대신 참석해줘 지금도 감사할 따름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살아오면서 이처럼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내게 재산목록 1호를 대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친구들을 꼽는다. 그래서 옛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명언을 남겼지 않나 생각이 든다. ‘친구는 제2의 자신이다(A friend is a second self)’. 나는 2500년이 지난 오늘도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뭐니 뭐니해도 묵묵히 내 뒷바라지 하는 회사(His & Her Hair) 직원들이야 말로 내가 가장 신뢰하는 친구들이다. 게중에는 거의 40년을 나와 함께 동고동락한 분도 있다. 그는 중학생 때 이민와 대학졸업후 첫 직장이 지금의 내 회사다. 30여 직원들의 평균 근무연수는 거의 20년을 헤아린다. 우스개로 ‘등 떠밀며 나가달라고 해도 절대 안나가겠다’는 분들이다. 며칠 전 거의 1년 만에 회사에 나갔다. 중앙일보 사진기자의 취재에 응하기 위해서였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을 우려한 직원들이 내 출근을 극구 말렸는데도 '기자 탓’하며 회사를 들렀다. 유럽에서, 뉴욕에서, 곳곳에서 걸려오는 전화주문, 온라인 오더에 바삐 움직이는 그들이 무척 고마웠고 대견했다. 따지고 보면 지난 2003년 새해 첫날 미주한인이민 백주년기념 꽃차가 로즈 퍼레이드를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었던 것도 회사 직원들의 땀이 맺은 열매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성 싶다. 솔직히 말해 한인커뮤니티에서의 내 활동은 직원들이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줬기에 가능했을 터다. 박용필 전 논설고문

2021-02-03

[토마스 정](6) 한인상권·틈새시장 가능성 보고 한인은행 투자

자본금 바닥 문닫을 위기 미주은행 증자 참여 영화포레스트검프보고민물장어수출도전 할리우드의 대박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내게 니치 마켓(niche market)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작품이다. 니치 마켓은 수요는 있는데 공급이 틈새처럼 비어있는 시장을 일컫는다. 내게는 주인공 검프(톰 행크스 분)와 그의 절친 버바(마이켈티 윌리엄슨 분)와의 대화가 가장 인상깊은 장면이다. 베트남의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버바는 검프에게 제대 후 새우잡이 창업을 제안한다. 회사는 두 사람의 이름을 딴 ‘버바 검프 슈림프 캄퍼니’. “새우는 바다의 과일 같은거야. 바베큐도 해먹고, 삶아도, 구워도 먹고, 센 불에 재빨리 볶아도 먹고….” 대화의 방점은 ‘바다의 과일(the fruit of the sea)’에 찍혀있다. 버바는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출신. 그의 끝없는 새우 예찬에 검프는 흔쾌히 동의한다. 그러나 제대를 앞둔 어느날, 친구는 적의 기습공격으로 치명상을 입는다. 검프의 가슴에 안겨 눈을 감는 버바. 검프는 전우와의 약속을 지킨다. 새우잡이 회사를 차려 백만장자가 되고…. 이 대목에서 퍼뜩 장어가 떠올랐다. 언젠가 메릴랜드의 한 식당 주인에게서 뉴올리언스가 장어의 본고장이라고 말한 걸 기억해냈다. 뉴올리언스는 바닷물과 민물이 합쳐지는 곳이어서 어족이 풍부하다. 장어는 멀고 깊은 바다에서 산란하지만 새끼가 부화하면 바다를 거슬러 어미가 살던 하천으로 되돌아온다. 연어와는 반대로 회귀하는 어족이다. 미국인들은 장어를 뱀으로 여겨 먹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 유럽 등지에선 장어가 고급어종이다. 새우는 어림도 없겠지만 장어 만큼은 미국인들과 경쟁이 거의 없어 틈새를 노려볼만 했다. 내게는 장어가 ‘바다의 과일’인 셈이었다. 영화 속의 주인공 검프처럼 뉴올리언스로 달려갔다. ‘민물장어의 꿈’을 안고서. 과연 듣던대로 ‘물 반, 장어 반’이었다. 뉴올리언스에서 두 달을 넘게 지내며 ‘장어 대박’의 꿈에 한껏 부풀었다. 장어 ‘트랩’ 구입과 양어장 마련 등 시설 투자에만 50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 장어는 포획보다 판로 개척이 예상외로 쉽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에선 생태계 파괴를 우려해 활어 반입이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싱싱해야 제 값을 받을 수 있는데. 궁여지책으로 유럽시장을 뚫기로 했다. 무작정 네덜란드의 미국 대사관을 찾아간 것. 경제담당 영사를 만나 도움을 청했다. 1주일 뒤 면담 날짜가 잡혔다. 약속한 시간을 정확히 지킨 영사는 내게 두툼한 서류봉투를 건넸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얼마나 시장조사를 철저히 했는지 보고서엔 나라 별 장어 수요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그때 무릇 공직자의 자세는 이런거구나 실감을 했다. 영사는 일면식도 없는데도 자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다. 가끔 한국서 고위 관리의 처신이 논란이 되는 기사를 읽으면 그 미국 외교관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물장어의 꿈’은 이런 저런 장벽에 막혀 결국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장어를 통해 얻은 수확은 결코 적지 않았다. 뉴올리언스에서 두 달을 지내며 장어를 거의 매일 먹다시피 했다. 그러던 어느날 흐릿하게만 보였던 TV 스크린이 또렷하게 닥아왔다. 어, 이게 웬일. 이번엔 신문을 펼쳤다. 내가 기사를 읽을 수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장어가 내 시력을 거의 정상으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그 때의 그 기쁨이란. 한편으론 슬픔이 밀려왔다. UCLA의 경제학 박사학위가 어른거려서다. 대학병원 의사가 실명의 위험이 있다며 내게 박사과정 포기를 강권했지 않은가. 내가 박사학위를 받았다면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가끔 궁금해지기도 한다. 아마 귀국해서 교수를 하다가 은퇴, 지금쯤 백수로 지내고 있을지 싶다. 나는 지인들과 외식을 하게 되면 주로 장어덮밥, 장어구이 등을 시켜 먹는다. 그러면 ‘저 나이에 아직도 정력을?’ 눈총 받기 십상이다. 내게 장어는 정력 보양제가 아니라 시력 강화제인데…. 요즘도 주 2~3회 정도는 집에서 장어를 구워먹는다. ‘민물장어의 꿈’에서 깨어난 나는 또다시 니치 마켓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번엔 전공을 살려 커뮤니티 은행 쪽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20년 전만 해도 한인은행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했지만 성장가능성이 꽤 높아 보였다. 한인인구가 꾸준히 유입되고 한인상권이 날로 커지고 있어서다. 내게 처음 은행투자를 권유한 분은 벤자민 홍 행장이다. 우연한 기회에 골프를 함께 쳤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골프채가 매우 낡아 보였던 것. 은행장 정도 됐으면 유명 브랜드의 클럽을 가질만도 한데…. 왠지 모르게 그의 골프채에 마음이 끌렸다. 얼마 후 홍 행장이 집에 찾아왔다. 투자 유치를 위해서다. 처음엔 완곡하게 거절했다. 다 망해가는 은행(당시 미주은행)에 뭔 투자? 은행에 관심은 있었으나 미주은행은 아니었다. 훗날 알게 됐지만 벤자민 홍의 미주은행 행장 취임은 ‘배짱’이 작동한 결과물이었다. 은행 측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자 시쳇말로 ‘쎄게’ 불렀다. 쓰러져 가는 은행이어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연봉도 적정가의 2~3배를 요구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그의 배짱이 은행을 살려냈을 뿐더러 한인은행의 대형화에 주춧돌을 놓았다. 은행 측은 그런데도 그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사태가 워낙 급박했던 탓이다. 당시 미주은행은 자본금을 거의 다 까먹어 파산직전이었다. 은행 감독국은 150만 달러 이상의 자본금 충당을 요구한 상태. 기일 내 마무리 짓지 못하면 은행문을 닫아야 할 판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울며겨자 먹기로 홍 행장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졸지에 좌초 직전의 은행을 떠맡게된 홍 행장은 당장 투자자들을 끌어들여 급한 불을 꺼야 했다. 소방수 제 1호로 나를 ‘찜’한 것이다. 내가 거부의사를 밝혔는데도 홍 행장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홍 행장의 끈질긴 권유로 미주은행에 발을 디디게 된다. 나의 은행을 상대로 한 니치 마켓 도전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전열을 정비한 미주은행은 나라은행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새 역사를 쓰게 된다. 박용필 전 논설고문

2021-02-01

[토마스 정](5) 죽으려 스쿠버다이빙 하다 살길 찾다

성공의 어머니는 실패가 아니라 자기성찰 맞춤가발로 재기…파리 유명인사도 주문 신문사로부터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주제로 원고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지만 솔직히 내겐 ‘숨기고 싶은 이야기’가 더 많다. 세상에 드러내기 부끄러운 그런 과거다. 창피스런 과거 중 하나가 ‘스쿠버 다이빙’이다. 혹 내가 돈자랑 내지는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이 얘기를 하는 게 아닌가 지레 짐작하겠지만 천만에. 나는 홀딱 망하고 나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스쿠버다이빙을 배웠다. 1969년 8월 쯤이다. 샌타모니카 비치에서 태평양 바다를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괜히 유학을 와 가지고…. 세관에 그냥 눌러앉았으면 지금쯤 룰루랄라 잘 지내고 있을텐데.’ 고생을 사서 하는 것 같아 후회막급이었다. LA로 돌아오는 길에 간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스쿠버다이빙 아카데미.’ 무엇에 홀렸는지 무작정 들어갔다. 매니저와 마주 쳤는데도 애써 나를 무시하는 듯 했다. 아마 스쿠버다이빙을 백인들의 전유물쯤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고 싶다고 말을 걸었는데도 말투가 아주 퉁명스러웠다. 다짜고짜 ‘몇 살이냐’고 묻는 거였다. 그때 내 나이 50줄이었으니…. 매니저는 아무말 없이 손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가라’는 제스추어였던 것. 그때 무슨 용기가 났는지 그를 붙잡고 통사정을 했다. 그제사 나를 딱하게 여긴 매니저가 조건부로 입학을 허가해줬다. 첫째는 ‘고령자’여서 정식 라이선스는 못내주겠다는 것. 그리고 사고가 나도 아카데미 측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 스쿠버다이빙은 수중 호흡기를 지니고 잠수해 체력을 단련하는 스포츠다.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자칫 심정지를 일으켜 물 속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다. 그래서 2인1조로 훈련을 한다. 서로 감시하기 위해서다. 훈련생들은 모두 짝짓기를 했는데 나와 어느 뚱보여성 둘만 남았다. 나는 동양인이어서, 뚱보는 위험유발자로 간주했는지 기피인물로 찍혔던 것. 결국 우리 둘은 의도치 않게 파트너가 됐다. 그래도 우리는 호흡을 잘 맞춰 4주과정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잠수훈련 중 전복을 따는 재미도 쏠쏠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스쿠버다이빙을 하게 된 동기는 바닷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기 위해서였다. 삶의 의욕도 없고, 비즈니스 재기의 희망도 없고.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장소로 바닷속을 택한 것이다. 숨기고 싶은 얘기지만 용기를 내 글로 남긴다. 평생 꽃길만을 걸을 것 같던 가발사업이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렸다. 일본산 인조모 가발이 시장에 범람하는 바람에 비즈니스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합성섬유로 만든 가발은 대규모 생산이 가능해 가격면에서 인모 가발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쌌다. 고객을 인조모 가발에 빼앗긴데 이어 한국공장에서 말썽이 생겼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할까. 은행빚에 내몰려 더 이상 비즈니스를 꾸리기가 불가능했다. 보다 못한 유대계 고문변호사가 내게 파산신청을 적극 권했다. 수임료를 받지않겠다면서다. 법원이 내 파산신청을 받아들인 날 샌타모니카의 스쿠버다이빙 아카데미를 찾은 것이다. 죽겠다는 심정으로. 그때 깨달음을 얻은 게 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자기성찰이 성공의 어머니’라고 바꿔 써야 된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했다. ‘남의 핑계’ ‘비즈니스 환경 탓’만 하다보면 실패를 거듭할 뿐이다. ‘불굴의 기업인’ 잭 웰치도 제너럴 일렉트릭(GE) 회장시절, 이런 말을 했다. “실패에서 배우지 않으면 성공은 결코 불가능하다.” 자기성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일 터다. 스쿠버다이빙의 쇼크에서 벗어난 나는 재기에 온 힘을 쏟았다. 결과물이 바로 맞춤가발이다. 두상에 맞게 본을 뜬 다음 본인이 가지고 있는 모발의 굵기, 색상 등을 파악해서 디자인하는 방식이다. 고객 특화 가발이라고 할까. 이 부문 특허도 냈다. 아마 가발과 관련해 특허를 받은 것은 내가 처음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뉴욕 등 미 전국에서 뿐만아니라 최근엔 패션의 본고장 프랑스 파리의 유명인사들로부터도 주문이 들어온다. 그래서일까. 60년 전 나를 가발이라는 신비의 세계로 이끌었던 맥스 팩터가 요즘 부쩍 생각난다. 당시 가발 하나에 $4,700의 가격표를 부쳐 나를 놀라게 했던 바로 그 회사다. 또 하나의 교훈은 돈과 관련해서다. 나는 ‘돈이 사람을 알아본다’는 말을 가끔 후배들에게 해준다. 1달러짜리에 답이 나와있다. 돈 뒷면엔 피라미드가 인쇄돼 있는데 13층 짜리다. 아마 독립당시 13개주를 상징하지 않나 싶다. 이 피라미드 꼭대기에 만물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이 그려져 있다. ‘메시아의 눈’이라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 글귀가 적혀있다. 잘 안보이면 확대경으로 보기 바란다. ‘아뉴이트 셉티스(Annuit Coeptis).’ 인터넷을 검색하면 뜻이 나온다. ‘신은 우리가 하는 일에 미소를 지으신다’쯤이 되겠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야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석해도 될 것 같다. 결국 돈이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후 나는 한 눈 팔지 않고 내 비즈니스에만 전념했다. 부동산에 투자하면 억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유혹을 마다한채. 내 소유의 부동산은 웨스트 LA쪽 윌셔 불러바드에 위치한 3층짜리 회사 빌딩 하나 뿐이다. 100년도 훨씬 넘은 LA에선 문화재급 건물이다. 시정부의 허가 없이는 개보수도 함부로 못한다. 나는 이 건물을 볼 때마다 무한애정을 느낀다. 이곳엔 오래전 LA 주재 한국총영사관이 세들어 살았다. 1층은 뱅크오브아메리카((BoA), 2~3층은 총영사관이 렌트해 업무를 봤다. 내 건물에 LA 한인사회의 역사가 살아 숨쉰다는 생각만 해도 얼마나 가슴이 뿌듯한지. 한때 주변에선 내게 재테크 수단으로 부동산 투자를 강권하다시피 했다. 크레딧도 좋을 뿐더러 더구나 은행 대주주여서 쉽게 재원을 조달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쉽게 돈 벌 방법이 있다는데도 난 귀담아 듣지 않았다. 신이 내 부동산 투기에 미소를 짓지 않을까 두려워해서다. 1달러 짜리 돈이 하찮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겐 돈과 재물에 늘 겸손하라는 경구나 다름없다. 박용필 / 전 논설고문

202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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