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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고물상

비행기로 세 시간 걸렸다. 오랜만에 여행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양 떼같이 순한 구름이 느릿느릿 가고 있다. 짧은 단발을 뒤집어쓴 야자수가 서 있다. 집 떠난 지 여섯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나는 속이 매슥거렸다. 그러던 중에 친구가 냉면을 준비하여 점심으로 주었다. 나는 맛있게 먹었다. 조금 있으니, 택배가 도착했다. 상자 안에는 배추김치와 무청 김치가 있었다. 우리가 온다고 친구가 주문한 것 같았다. “남편이 여기 오더니 한식을 너무 찾아.” 생전 안 먹던 굴젓, 청국장 등등 먹고 싶은 게 많아졌다고 한다.     친구의 집은 호텔처럼 정갈했다. 물건 하나하나에 눈이 갔다. 마늘, 생강 으깨는 대리석 절구는 소꿉 장처럼 아기자기했다. 에스프레소 머신은치이익 소리 내며 진한 커피를 뽑아냈다. 목욕탕에 걸린 흰색 수건은 두툼했고 비누는 로즈메리 향이 났다. 이불은 가볍고 시원했다. 친구가 부엌을 정리하는 시간은 나보다 2배쯤 많았다. 그릇이 찬장 안으로 들어가고 바닥에 먼지 하나 없는 상태에서 부엌 불이 꺼졌다.     나는 두고 온 우리 집이 생각났다. 오래된 물건이 쌓여 있는 고물상 느낌이다. 수건도 이불도 깨끗하게 빨기만 해서, 원래의 색은 도망갔다. 부엌 용품들은 멋대가리 없이 크고 평범하다. 파트가 고장 나도 끝까지 버티면서 사용하는 편이다. 친구는 삼 년 전에 살던 곳을 훌훌 털고 따뜻한 이곳으로 이사 왔다. 쓰던 물건은 버리고 상자 12개만 들고 간 그녀의 용기와 결단력이 부러웠다. 그녀의 집은 현대에 어울리는 가구와 주방용품으로 꽉 차 있다. 갑자기 나의 물건들이 나의 고착된 삶을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한식을 그리워한다는 친구 남편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어갔다. 오늘 저녁 메뉴는 동파육이다. 오기 이틀 전에 삼겹살을 졸여서 진공 포장을 해서 얼렸다. 얼려온 동파육을 친구의 찜기에서 쪄냈다. 고기는 다시 부드러워졌다. 파와 고추와 양상추 채를 썰어서 접시에 같이 놓았다. 친구 남편은 식탁에 오른 푸짐한 음식을 보고 와인병을 서둘러 땄다. 네 사람은 와인 잔을 부딪치며 소리 높여 건배했다. 은근슬쩍, 평소에 하지 못했던, 아내에 대한 혹은 남편에 대한 불평도 한 마디씩 튀어나왔다. 남쪽 나라의 열기 탓인지 친구와 같이 있다는 흥분 탓인지,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다.     나는 문득 우리 부부가 오래된 물건처럼 살고 있지 않은지. 낡은 수건을 빨고 또 빨면서 살고 있지 않은지 의문이 들었다. 내 집 부엌에 버티고 있는 고장 난 프로세서도 생각났다. 포크를 끼우면 기계는 여전히 잘 돌아간다. 비록 흠집이 생기고 육중한 프로세서지만, 버리지 못한다. 아이들이, 손주들이, 지인들이 놀러 와서 수도 없이 앉았던 부엌이다. 그들이 재잘거리며 기다리는 동안, 가스레인지 위에서 손녀가 좋아하는 일본식 두부를 튀겨내기도 했다. 잘 씹지 못하는 육촌 시숙을 위하여 흐물거리는 해물잡탕을 만들기도 했다. 부엌 살림살이는 내가 수많은 음식을 만들도록 조수 노릇을 해주었다. 그들은 이제 나와 한 몸처럼 움직인다. 그들을 친정엄마만큼 의지하는 내 마음을 알고 있을까? 기계도 새것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원래의 빛나던 광택이 다 달아났지만, 오늘도 묵묵히 나를 지켜주고 있다.     남편들은 어느새 자러 들어갔다. 친구는 뉴욕에 두고 온 친구들을 많이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뉴욕의 단풍이 그립다고 한다. “내년에는 네가 올라와. 단풍 구경하러” 나는 말했다. 우리는 졸면서도 늦도록 이야기했다. 밤사이 우웅 하는 바람 소리가 창문을 가볍게 두들겼다. 김미연 / 수필가살며 생각하며 고물상 친구 남편 부엌 살림살이 부엌 용품들

2024-11-19

12세 소녀 피살에 공분, 법을 바꾸다

  ━   원문은  LA타임스 10월30일자 ‘A 12-year-old girl’s murder shook the country, inspiring far-reaching laws‘ 제목의 기사입니다.     1993년 10월1일 발생한 폴리 클라스(당시 12세.사진)의 실종은 전국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금요일이었던 그날 밤, 캘리포니아 페탈루마에 있는 폴리의 집에서는 믿기 힘든 사건이 벌어졌다.     동갑내기 친구들과 밤샘 파티를 하던 폴리의 방에 괴한이 침입했다. 이 남성은 세 소녀에게 칼을 들이대며 조용히 하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위협했다.   남성은 소녀들의 손발을 방에 있던 닌텐도 게임 상자의 전선으로 결박했다. 그리고 폴리의 친구들의 머리에 베개 커버를 씌우고 1000까지 숫자를 세라고 지시했다. 당시 폴리의 어머니는 집안에 있었지만, 다른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당시 연방수사국(FBI) 수사관은 사건 발생 직후 ‘낯선 사람에 의한 납치’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일부 수사관들은 그 판단에 의문을 품었다. 어린 소녀가 본인의 집 침실에서 낯선 사람에게 납치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고, 특히 목격자가 있는 상태에서 납치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들의 경험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폴리 클라스의 실종 사건은 곧 전국적인 뉴스가 됐고, 수사관들에게는 압박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경찰은 납치 당시 방에 있던 사건 목격자인 폴리의 친구들로부터 좀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집중적으로 심문했다.     “혹시 장난 아니니?”, “폴리에게 남자 친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니?”, “폴리가 남자 친구와 가출한 건 아니니?”   경찰은 증언의 사소한 차이에도 집착했다. 범인이 노란 머리띠를 했다고 폴리의 친구 중 한 명이 말한 것과 달리 다른 친구는 이를 기억하지 못한 것을 의심했다. 또 한 소녀는 문이 쾅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지만, 다른 친구는 듣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한명은 거짓말 테스트를 통과했지만 다른 한명은 불확실했다.   킴 크로스 작가가 이 사건을 바탕으로 쓴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폴리 클라스 납치 사건과 미국의 아이 찾기 수색’에 따르면 수사관들은 소녀들을 용의자처럼 심문하기 시작했다. 한 수사관은 “사건 자체가 말이 안된다, 뭘 숨기고 있는거냐”면서 “폴리의 부모가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알지 않느냐. 너희가 진실을 말하면 이 모든 고통을 멈출 수 있다”고 압박했다.   사건 초기부터 페탈루마 경찰국과 긴밀히 협력해온 에디 프레이어 FBI 요원은 “수천 건의 제보가 쏟아졌지만 신뢰할 정보는 없었다”면서 “소녀들을 상대로 질문을 바꿔가며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내려 했다. 심문 의도는 좋았지만 적절치 못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심한 압박에 견디지 못한 소녀들은 경찰과 대화를 중단하는 상황에 처하게됐다”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자원봉사자 수천 명이 인근 숲과 들판을 뒤지며 폴리의 흔적을 찾으려 노력했다. 심령술사들 마저 사건 현장에 와서 돕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실질적인 진전은 없었다.   프레이어 요원은 “사건이 점점 더 주목을 받으면서 너도나도 유명세에 편승하려했다”면서 “사람들은 사건 현장인 주택을 찾아와 침실을 둘러보며 심령적 현상까지 탐구하려 했다”고 말했다.   결정적인 돌파구는 11월 말, 소노마카운티에 사는 한 여성이 산책 중 발견한 아동용 사이즈의 레깅스(tights) 덕분이었다. 이 여성은 폴리가 실종되던 밤, 길가 도랑에 빠진 틴토 차량에 피투성이의 낯선 남자가 타고 있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당시 경찰 기록에 따르면, 이 남성은 그날 밤 소노마카운티 보안관 두 명에 의해 체포됐지만 차량을 도랑에서 빼낸 뒤에는 풀려났다.   당시 납치사건에 대한 긴급 경보가 발령되지 않았던 탓에 보안관들은 납치 사건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그를 놓아준 것이었다.   이 남성의 이름은 리처드 앨런 데이비스(당시 39세)로 밝혀졌다. 그는 판금공장 노동자로 납치 혐의로 기소됐다가 사건 발생 3개월 전 가석방된 상태였다.   경찰은 그의 외모가 소녀들이 증언한 괴한의 몽타주와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FBI는 사건 현장에서 당시로서는 신기술이었던 교광등을 사용해 지문을 찾아내는 ‘ALS(alternate light source)’ 기법으로 폴리의 침대에서 손바닥 지문을 확보한 바 있다. 이 지문을 데이비스의 지문과 대조한 결과 일치했다.   데이비스는 체포된 후에도 범행을 인정하지 않다가 결국 그의 친구가 면회를 오면서 수사 상황을 전해주자 자백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건 당일 마리화나를 피우고 맥주를 마신 상태였다면서 폴리를 목 졸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사건 장소로 경찰을 안내하며 시신이 유기된 위치를 털어놨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경찰이 그날 밤 자신을 체포했던 당시까지만 해도 폴리가 여전히 살아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찰을 포함한 누구도 이를 믿지 않았다.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고 데이비스의 범죄 기록이 공개되자 대중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다.   데이비스는 수십 년 동안 다양한 범죄를 저질렀다. 정신 병원에서 두 차례 탈출한 전력이 있었다. 또한, 납치와 강도 등의 혐의로 수년간 복역했지만 다시 석방됐다는 사실은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이 사건은 1992년 발생한 18세 대학생 킴벌리 레이놀즈 피살사건과 더불어 캘리포니아주의 ‘삼진법(three-strikes law)’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법안은 세 번째 범죄를 저지를 경우 무조건 최소 25년형을 선고하도록 규정했으며, 이는 당시 범죄 억제에 대한 강력한 대중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폴리의 아버지 마크 클라스는 이 법에 찬성하면서도 우려했다. 비폭력 범죄자에게 상대적으로 더 가혹한 처벌이 내려질 수 있는 부작용 때문이다.   1994년 캘리포니아 유권자들은 삼진법을 골자로 하는 프로포지션 184를 압도적 지지로 통과시켰다. 당시 피트 윌슨 주지사가 법에 서명하면서 가주 전역에서 시행됐다. 2년 뒤 가주대법원은 판사들에게 특정 경우에 ‘스트라이크’ 판결을 제외할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했다. 폴리의 아버지 마크는 이 결정이 충분한 안전장치라고 생각했다.   2012년 통과된 논란의 프로포지션 36은 삼진법 적용 대상은 모두 심각한 강력범죄만 해당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지 개스콘 LA카운티 검사장은 휘하의 모든 검사들에게 삼진법에 따른 형량 가중을 구형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 이에 대한 소송이 캘리포니아 대법원에서 진행 중이다.   마크는 딸 폴리의 죽음 이후 클라스키즈 재단을 설립해 아동 보호를 위한 다양한 법안을 추진하고 실종 아동을 찾는 수색 및 구조 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그는 메간법과 같은 성범죄자 공개법을 지지했고, 딸을 살해한 범인에게 사형 선고를 요구해왔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주지사 개빈 뉴섬이 사형 집행 중단을 선언하면서 클라스는 다시 한번 분노를 느꼈다. 그는 뉴섬 주지사가 자신과 대화를 나눈 후 바로 사형 중단을 발표한 것에 대해 “완전히 이용당했다”고 말했다.   이후 클라스는 뉴섬 주지사의 소환 운동에 참여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사형집행이 중단되면서 폴리를 살해한 데이비스는 상대적으로 더 편한 구금 시설로 이송됐다.     마크는 딸이 무참히 살해됐음에도 범인인 데이비스는 여전히 숨 쉬고 있다는 점에 대해 회한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동안 운영해온 클라스키즈 재단 역시 올해말로 운영을 중단하기로 했다. 재단을 이어갈 후계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활동이 폴리의 희생을 기리며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었다고 평가하면서도, 더 이상 후계자가 없음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이제, 그의 삶의 한 장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길을 걸어가려 한다. 폴리 클라스 사건은 전국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고, 법적·사회적 변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캘리포니아 주와 전국적으로 아동과 가정 보호를 위한 다양한 법률들이 강화되었고, 피해자를 위한 목소리가 더욱 커지게 되었다.     “딸이 남긴 유산이 영원히 기억되길 바랍니다. 내가 떠나더라도 사람들이 폴리의 이야기를 잊지 않고, 이를 통해 아동 보호의 중요성을 깨닫고, 더욱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가길 바랍니다.”   크리스토퍼 고퍼드 기자공분 피살 폴리 클라스 당시 폴리 남자 친구

2024-10-30

[독자 마당] 목숨과 바꾼 자존심

사람이 명예나 지위, 자존심, 그리고 돈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죄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의 목숨은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다. 우리에게는 목숨이 하나밖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무너진 자존심과 수치심 때문에 교사들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너무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나중에 진상이 밝혀져 교사들의 무고함이 밝혀졌다니 이처럼 황당한 일이 어디 있겠나. 사후에 명예를 회복하고 표창장을 받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 남아있는 가족의 슬픔은 어찌하라고. 자존심이나 명예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근거 없는 비난쯤은 한쪽 귀로 흘리고, 조금만 더 인내하며 견뎠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터무니없는 비방으로 마지막 궁지까지 몰고 간 사람들에게도 큰 잘못이 있다.   옛날 중국의 한 고조 유방은 자존심을 버리고 항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갔지만 끝내는 승자가 됐다. 자존심을 잠시 내려놓고 실리를 택했고, 결국 그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학교 성적에 낙담하거나 친구 문제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청소년들이 있다. 또 취업이나 결혼 문제로 인생을 포기하는 젊은이들도 있다. 이런 잘못된 선택은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에게는 차마 해서는 안 될 죄를 짓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세상에 사람의 목숨보다도 중요한 것은 없다. 사람이 한평생 살다 보면 성공도 있지만 실패하는 일도 생기게 마련이다. 무슨 큰일이 생길 때마다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한다. 인생을 길게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매 순간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살겠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아무리 자존심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 극단적 선택은 하지 말아야 한다.    김영훈독자 마당 자존심 목숨 지위 자존심 극단적 선택 친구 문제

2024-10-01

[글마당]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일까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너의 가족 모두 건강하니? 노파심에서…”   친구에게 온 이메일이다. 갑자기 조심스러운 이야기라니? 전에 없던 안부 인사지만, 워낙에 길고 감칠맛 나게 글 쓰는 친구가 아니라 별생각 없이 요즈음 나의 근황을 답장했다.   “실은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걱정 많이 했다. 별일 없다니 다행이다.”   되돌아온 이메일에 뜨악했지만, 자세한 내용과 누가 이상한 소리를 했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살면서 사실과는 전혀 다른 우리 집안 소문에 나 자신도 놀란 적이 서너 번 있다. 한밤중에 문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 나가보니 친구 부부가 문 앞에 서서 놀란 표정으로 나를 살폈다.     “남편에게 두들겨 맞아 엉망이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달려왔어. 괜찮은 거야?”   남편에게 맞아 사경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잠에 빠져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데 말이다. 자다가 일어나 술상을 차리고 밤새도록 애매한 술만 들이켰다.   남편이 잠시 서울에서 강의하느라 1년 나가 있었다.   “네 남편이 이혼하고 서울로 떠났다며? 괜찮은 거야?”   “이혼?”   “잉꼬부부였던 너희 부부가 이혼했다는 소리 듣고 설마 해서 전화한 거야. 정말 이혼했어?”   사람들은 내가 남편에게 두들겨 맞고 사경을 헤매다 이혼당하기를 원하나?     나 자신도 너무 놀라 의심이 들었던 소문 중의 하나는 서울에서 전화한 지인의 질문이었다.   “혹시 친정엄마 죽음이 자살이었나요?”   너무도 황당해 말문이 막혔다.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이다.   내 소문이 사실과 다르기에 남의 소문도 믿지 않다가 혼쭐났다. 점잖은 모임에서 만난 지인에게 물었다.   “사모님은? 함께 오시지 않았나요?”     지인이 화가 몹시 난다는 표정으로 소리 질렀다.   “그 사람 이야기를 왜 내게 해요?”   오랜 세월 참았던 고름이 터지듯 갑자기 폭발하는 그의 목소리에 주위 사람들이 놀라 돌아볼 정도였다.     다음날 그가 나에게 전화해서 사과했다.     “미안해요. 사실은 오래전 이혼했는데 말하지 않았어요.”     그동안 듣지 못한 그의 긴 사연을 들어야 했다. 그 이후론 모임에 혼자 나타나는 사람들에게 남편이나 부인의 안부를 절대 묻지 않는다. 안 보는 사이에 이혼이라도 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지인이 부인과 헤어지고 내가 몇 번 본적이 있는 사람과 사귄다는 소문이 돌았다. 말 못 할 사연이 있어 이혼하고 좋은 사람 만나 즐겁게 지낸다니 다행이다. 본인 입으로 말을 꺼내면 모를까 먼저 물어보지 않았다. 지루하고 힘든 삶 속에 가뜩이나 심심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그들에게 나의 헛소문이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줬다고 생각하니 “누가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며 소문의 근원을 찾으려고 열 올리는 일은 생략하며 산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불행 행복 친구 부부 사람 이야기 친정엄마 죽음

2024-09-05

[글마당] 재봉틀 밟는 남자

친구 남편은 손재주가 많다. 팬데믹 때는 재봉틀에 앉아 마스크도 근사하게 만들어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연말에는 스카프도 받았다. 집수리도 잘할 뿐만 아니라 정원에 허브를 심어 허브티를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이렇게 자상한 남편을 둔 내 친구는 얼마나 좋을까?”   남편에게 말했다.   “나도 만들 수 있어. 재봉틀만 있으면.”   “정말?”   “내가 총각 시절 옷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특히 백투스쿨 시즌에는 재봉틀이 불이 나도록 청바지 아랫단을 줄였다고. 옷가게 주인도 내 실력에 감탄했다니까. 대신 드로잉 테이블 만들어 줄까?”   “또 홈디포 가려고?”   “스튜디오에 나무판이 있어. 가지고 와서 만들게.”   며칠 후 남편이 쓴 카드 명세를 들여다보다가 홈디포에서 널빤지 산 기록을 봤다. 자그마치 나 102달러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그 돈이면 차라리 이케아에 가서 디자인 테이블을 사지.   “널빤지 스튜디오에 있다고 했잖아. 그냥 굴러다니는 것 있으면 만들랬지. 왜 새 나무를 샀어.”   “이왕 만드는데 질 좋은 재료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내가 이케아에서 사고 싶은 테이블 봐 둔 게 있다고. 아이고 말을 말아야지.”   남편 별명은 ‘그린포인트 이 목수’다. 가구를 사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냥 만들겠다고 난리 쳐서. 한번 만들겠다고 마음먹으면 내 발끝에서 허리 높이, 키 재느라 자를 들고 쫓아다닌다. 설계도를 그려 보여주고 다시 고치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고집부려서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마음에 드는 것도 간혹 있지만, 이케아에 점 찍어 놓은 가구가 눈에 아른거려 실망한다. 하지만 만들고 싶어 하는 남편을 둔 내 팔자니 어쩌겠는가.   “그것마저 못 하게 하면 남편은 무슨 재미로 살까?”   얼마 후, 부셔서 다른 것으로 활용할망정 결국에는 내가 포기한다. 나무 판때기를 아예 그린포인트 스튜디오에서 재단하고 프라이머를 칠해 핸드카로 끌고 왔다. 오자마자 내 얼굴 볼 틈도 없이 만들기가 급했다. 다 만들어 놓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떨어져서 보고 가까이서 만져본다.   “와! 잘 만들었는데. 수고했어요.”   저녁 식탁에 앉아서 다시 “너무 잘 만들었어요. 고마워요.”   남편 얼굴을 슬쩍 보니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다.   “근데 내 친구 남편은 친구 머리도 염색해 준다는데. 그 집 남편처럼 내 머리 염색 좀 해줄래?   “아주 나를 머슴으로 부리시네. 내가 마당쇠냐? 그건 못해. 미장원에 가서 해. 돈줄 테니.”   남의 남편 장기 자랑 열거해서 드로잉 테이블 생기고 싸지 않은 미용실 비용도 챙겼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재봉틀 남자 친구 남편 남편 얼굴 남편 장기

2024-08-08

[오픈 업] 우리에게 필요한 친구와 동지

얼마 전 한국 출장 중에 1.5세인 한인 교수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방학을 이용해서 서울에 연구차 나와 있는데, 혹시 한국에 있다면 청계천 산책로에서 만나 ‘치맥’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그와는 몇 년 전 한국에 대한 어떤 연구 과제를 계기로 알게 되었다. 그는 의학계나 한인 단체에 속한 사람은 아니다. 진지하고 겸손한 성품의 학자다. 내가 그의 부모님과 연령대가 비슷한 것 같아  편히 대화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그는 내 딸들과 비슷한 또래다. 이민 1세대와 그 자녀 사이의 견해차로 쉽게 생길 수 있는 갈등을 소재로 즐겁게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하지만 한국 출장 일정은 청계천 치맥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 빡빡해 섭섭했다.     출장 일정을 마친 후 간신히 하루를 비워서 어릴 적 친구들과 전라남도 땅끝마을을 다녀왔다. 한국에 3000개가 넘는 섬들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사수했던 남해이다. 수려한 곳이었다.     흔히 한국을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표현한다. ‘리’는 과거 거리의 단위로 마을과 마을 사이 약 400미터, 360보 정도라고 태종신록에 기록되어 있다. 땅끝마을에서 서울까지 1000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가 2000리여서 삼천리라고 한다.   한 나라의 영토에는 바다도 포함된다. 육지를 둘러싼 바다에서 여러 국가적 활동이 있을 수 있고, 이 영역 안에서 개발권, 무역권, 교통로, 국가 안보를 행사한다. 섬도 포함해야 하는 이유는 대륙 밖의 바다에 있는 땅인 섬들을 연결하는 선이 국가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섬들을 연결해서 그은 선(線) 안쪽의 12해리((海里: neutical mile)에서는 관세, 출입국 관리, 보건, 위생 등 국내법이 적용되어, 이를 접속수역으로 보면 된다. 그곳에서부터 200해리는 유엔이 규정한 배타적경제수역(EEZ: Exclusive Economic Zone)으로 국가가 지원 탐사, 개발 등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곳이다. 얼마 전에 한국 정부는 동해에서 원유 자원을 개발한다고 발표했다. 그곳이 한국 영토라 개발이 가능한 것이다. 몇 년 전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캠페인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을 때, 어떤 네티즌이 ‘그까짓 조그만 섬 갖고, 왜?’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영토 개념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친구들은 무더운 날씨에도 삼천리 금수강산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고 노력했다. 휴전선 인근 통일전망대에서는 오두산 너머, 우리가 갈 수 없는 북한 땅을 함께 바라보았다. 한 친구는 전쟁기념관 동판에서 6·25 전쟁 당시 전사한 삼촌의 이름을 열심히 찾았다. 내가 6·25전쟁 때 전사한 큰오빠 이름을 찾았듯이…. 우리의 우정은  때때로 서로를 응원하는 문자로, 전자우편으로, 전화로 배달될 것이다.     여행을 함께 했던 이들은 10대 초반에 만난 친구들이다. 하지만 나는 치맥을 하자던 젊은 교수도, 이번에 한국에서 함께 활동한 젊은이들도 친구로 생각한다. 내가 영역 없이 넘나들며 쓰는 ‘친구’라는 말에는 ‘동지’와 ‘벗’이라는 뜻이 함께한다. 어려서 썼던 ‘동무’라는 따뜻한 말이 쓰이지 않는지 꽤 오래되었고 ‘동지’ 또한 이념의 색이 칠해진 단어가 됐다. 어떻게 보면, 미국이 이런 점에서는 편하다. 친구라면 ‘프랜드’ 또는 ‘베스트 프랜드’ 정도로 표현하니 말이다.   퓨 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과반수는 한 명에서 네 명 정도의 친구가 있다고 한다. 친구가 한 명도 없는 비율도 8%나 된다. 성별에 따라, 인종과 민족성에 따라 친구의 분포도(分布圖)도 다르게 나타났다고 한다. 우리 삶의 정서적 안전지대는 동족, 동성, 동향, 동문 등 ‘같은 어떤 것’에 있는 것 같다. 같은 인종끼리의 만남이 더 편한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주변의 누구도 친구 없는 8%에 속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특히 이민 사회인 한인들에게는 더욱 필요한 일이다. 류 모니카 / 종양 방사선학 전문의·한국어 진흥재단 이사장오픈 업 친구 동지 한국 출장 전라남도 땅끝마을 한국 정부

2024-08-07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낙장불입, 버린 카드는 잊어라

늪에 빠지면 살려고 발버둥 친다. 배신의 늪은 벗어나기 힘들다. 배신한 사람은 문제 없이 잘 사는데 당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나쁜 인연도 인연이다. 인연(因緣)은 사람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관계다. 살아 있는 한, 사람 사이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 하며 사는 사람도 문제지만 교활하고 뒤통수 치는 사람은 멀어질수록 좋다.   막역한 친구가 고심에 빠졌다. 친하던 후배 K가 배신을 때려 인연을 끓을지 말지 고민이다. 대인관계가 원만한 친구는 사람 때문에 속 끓이는 일이 없었다.   친구는 라호야비치에서 태평양이 보이는 화실에서 영혼을 불태우며 그림 그리는 것이 평생의 꿈이였다. 사업과 부동산 정리하고 이사 갈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집 클로징 2시간 전에 바이어가 파토 내는 일이 발생했다.   가구 자동차 등을 보낸 상태라서 어쩔 수 없이 샌디에이고 행 비행기를 탔지만 오동나무에 걸린 신세가 됐다. 이사할 집도 계약이 파기됐다. 우여곡절 끝에 거금의 이사 비용을 두 차례 지급하고 옛집으로 귀향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바이어는 샐러 쪽에서 백아웃 했다고 거짓말을 꾸며댔다. 믿었던 K가 엄청난 손해를 끼친 여자와 오랜 기간 ‘언니, 동생’하며 지내면서 비밀로 둘러댄 걸 뒤늦게 알게 된 친구는 악몽 같은 지난 날이 떠올라 경악했다.   친구가 지독한 상황에서 죽을 힘 다해 버텨온 지난 4년 동안, 모른 채 꾸미고 양쪽에서 이득을 취한 교활함은 놀랍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법이다. 친구 꼭지를 돌게 한 건 K의 양다리 걸치기와 뻔뻔함이다.   친구는 자신을 도와준 한인회 임원들을 각별하게 챙긴다. 특히 K에게 먹을 것 챙겨주며 살갑게 지냈다. 먹거리를 나눈다는 것은 한솥밥 먹는 식구란 의미다.   ‘낙장불입(落張不入), 버린 카드는 그냥 잊어라’ 친구에게 보낸 위로 문자다. 화투 칠 때 내놓은 패를 물리기 위해 다시 집어 들이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동지는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고 친구는 우정을 나누는 사람이다. 세상에는 동지가 되고 우정을 나눌 사람이 많다.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제 버릇 개 못 주고, 개 버릇 남 못 준다. 버리는 카드는 잊는 게 상수다.   한 번 금이 간 도자기는 쓸모 없다. 붙여도 물이 샌다. 조롱박은 금이 가면 속을 빼고 말려서 굵은 실로 꿰매서 쌀이나 콩을 퍼 담을 때 사용한다. 금이 간 사람 사이는 다시 붙이기 어렵다. 뒤틀린 사랑과 우정에는 접착제가 없다.     인연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다. 스쳐가는 바람은 그냥 보내면 된다. 인연은 선택이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중요한 선택이다. 선택은 다른 인연에 대한 포기다. 함부로 인연을 맺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인간은 인성이나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과 어울린다. 진짜 모습을 알고 싶다면 그 사람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 다섯 명을 살펴보면 참 모습을 알 수 있다.   억울하고 힘들어도 싸우지 않고 적을 이기는 방법은 상대하지 않는 것이다.   복수의 칼날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피하지도 대응하지도 말고, 그냥 개무시 하면 게임은 끝난다. ‘개무시’는 사물의 존재 의의나 가치를 완전히 알아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원수를 복수로 갚으면 빌미를 제공해 빠져나올 기회를 주게 된다.   버린 카드는 다시 잡지 말고, ‘개무시’만큼 상대를 제압하는 형벌은 없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낙장불입 카드 친구 꼭지 이사 비용 한인회 임원들

2024-07-30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고향

고향은 어머니의 부드러운 가슴 같아서, 스며드는 솜사탕 같아서, 언젠가 마주했던 싱그런 파란 바람 한 점 같아서, 이마에 송송 맺힌 땀방울 닦아 주는 엄마 눈물 같아서, 누군가에게 달려가 전해 주고픈 반가운 편지 같아서, 깨어 보니 멀리서부터 온 굽은 인생길 같아서, 길 따라 소담히 핀 들꽃 같아서, 무심히 걸었던 가로수길 느티나무 그늘 같아서, 붉게 피었다 이내 자취를 감춰버리는 서글픈 서쪽 노을 같아서, 하늘 멀리 달아나는 연 꼬리 따라 마냥 뛰었던 숨 가쁜 오솔길 같아서, 싸리비로 쓱쓱 쓸어낸 말끔한 안마당 같아서, 숲길 오르다 잠자리 날갯짓에 걸음을 멈춘 까까머리 친구 뒷모습 같아서, 뿌리치지 못한 애정한 손잡음 같아서, 사라지지 않는 메아리 같아서, 그렇게 또 그래서       그렇게 마음을 저미고, 그래서 또 다지고, 어느 사이 가슴을 열게 하는, 바람 불어오는 들녘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하는, 엄마 누운 한 평 남짓 로즈힐 세미토리, 먹먹한 그리움으로 유년의 기억들이 펼쳐지는, 소식 끊긴 친구 얼굴 흐르는 구름에 밀려가는, 노랑 보라 잔잔한 들꽃들이 반갑게 손짓하는, 노랑나비, 흰나비 한 쌍 날개 겹치며 뒤뚱뒤뚱 언덕 넘어 사라지는, 그 숲길에서 나를 잃고 너를 잃어버리게 되는, 노을 그 깊은 회한의 물감이 별빛에 풀어지는, 싸리문 열면 정갈한 장독대 그 옆 기슭에 앉아 편지를 읽는, 그림 하같은 풍경을 집안에 가득 들여놓고 잠들지 못하는, 그렇게 또 그래서       물병에 들꽃   한나절 햇살은 지고   싸리문 열고 들어온 노을과   가지런한 고무신 한 켤레       나에게 흐르시오   내 그대에게   나의 고요를 모두 내어 드리이다   가슴을 풀으려니   그 자리에   한 송이 꽃으로 오시오       나에게 오시오   내 그대에게   나의 아픔을 이야기 하리다   두 팔을 뻗으리니   그대 떨리는 별자리로   파랗게 손짓해 주시오      나에게 별이 뜨고   소리 없이 밤이 오고 있소   내 그대를 향해   숲이 되어 흐르리니   내 눈 가득   그대 어디라도 오시오   그렇게 또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계단의 끝은 하늘을 향해 뻗어있고, 작은 실개천이 강물로 이르고, 강이 바다 향해 흘러가듯 계단 끝에는 이상의 존재 고향이라는 아득함이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는 날마다 고향을 향해 한 계단만큼 가까이 가고, 호수에 풀어놓은 달빛은 헤어진 기억을 어루만져 올이 풀린 고향의 등을 도닥거리고, 훤히 드러난 시간을 견고한 위로의 손으로 도닥여 준다 고향이라는 위로는 풍랑 이는 바다 한가운데 높은 파도에 깊은 심지의 뿌리를 내리고 다시 살아나고, 거울 속의 나는 나를 닮지 않았다 봄이 겨울을 닮지 않았듯이 생소한 너의 얼굴에 하얀 포말의 바다가 보이고, 가보지 못한 외로운 섬이 보이고, 싸리문의 작은 집이 그리움으로 보인다 저만치에서 고향이 손짓하고, 나를 부르고, 겨울나무 바라보다 보이지 않는 나무의 뿌리를 그려보고, 그렇게 또 그래서       눈이 떠지고   귀가 뜨이는 거야   터지고 트여   보지 못한 것이 보이고   듣지 못한 것이 들리는 거야   그렇게 또 그래서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고향 들꽃 한나절 친구 얼굴 노랑나비 흰나비

2024-07-29

[오픈 업] 의학이 바꿔 놓은 가정과 가족

7월로 들어선 지금은 대부분의 각급 학교가 긴 여름방학 중이다. 거의 100일에 가까운 기간이라 부모들의 고민이 적지 않다. 학과목 보충의 의미에서 자녀를 여름학교에 보내거나, 음악 또는 스포츠 캠프에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사설로 운영되는 이들 캠프는 가격이 비싸고 기간도 1~3주 정도에 불과해 완전한 해결 방법은 되지 못한다.     여름방학을 맞아 다른 주에 사는 손주들이 집에 와 3주를 함께 보냈다. 분주하기는 했지만 한국 음식을 변형해 식사 메뉴를 짜는 등 여러 가지로 즐거웠다. 손주들이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 데려다주는 것, 함께 쇼핑하는 것 등도 즐거움이었다.         어느 날은 작은 손주가 친구 집에서 잠을 자기로 했다고 해서 그 집에 데려다주게 되었다. 그런데 딸이 말할 것이 있다고 했다. “엄마,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어서 말씀드려요. 셋째의 친구 부모는 동성애자인데, 세 아이 모두 아빠는 같다고 해요.”   딸은 내가 성 소수자에 대한 선입관을 갖고, 혹시라도 손주 친구의 부모를 무례하게 대하지나 않을까 걱정한 것 같았다. 딸은 손주 친구의 부모는 생물학적으로 두 명의 여성이고, 이들은 ‘자궁 밖 수정(IVF)’ 방법으로 아이 세 명을 낳아 가정을 이루고 있다고 알려줬다.     동성애가 사회적으로 공식화하고, 자궁 밖 수정, 정자 기증 등을 통해 출산이 가능해진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더는 놀랄 일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런데 손주의 친구가 동성애 부모와 살고 있고, 부모 중 엄마라 불리는 여성이 생물학적 친모이고, 이 엄마가 낳은 두 형제도 생물학적으로 같은 엄마와 아빠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 일을 계기로 가족과 가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가족이라는 말의 어원(語原)은 일본에서 왔다고 한다. 가(家)는 친족 집단을 이르는 말이고, 족(族)은 나부낄 언(?)과 화살 시(矢)가 합쳐진 회의자로 사람이 ‘모이다’에서 온 것이다. 한국의 민법은 가족이란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가정(家庭)은 생활을 함께하는 공간이라는 의미가 더 많다.     손주의 친구가 태어나고, 사는 환경은 현대 의학을 이용해서 이룬 가족관계다. 손주 친구처럼 특수한 가족 구성원 관계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다. 왜 그러한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손주 친구의 부모는 동성 가족으로 ‘자궁 밖 수정’ 방법을 택해서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경우이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임신 가능한 연령대의 여성이나 남성이 항암 치료를 받을 경우 생식기관의 어린 세포들도 죽거나 유전자 변형을 일으킬 우려도 있다. 이로 인해 앞날을 위해서 미리 정자나 난자를 얼려 보관한다. 적절한 때가 되면 자궁 밖에서 수정해서 자궁에 안착시켜 태아를 기르면 된다. 이때 자궁의 주인은 본인이거나, 대리인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또 수정된 배아를 기증하가도 한다.     미국 보건부 자료에 따르면 2022년 미국 내 신생아는 367만여 명이다. 미국 전체 인구가 약 3억3000만 명이므로 출생률은 1000명에 11명 꼴이다. 이 중에 2.3%(약 8만6000명)가 인공수정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대략 한 달에 한 번 있는 여성의 배란 시기에 맞추어 최첨단 의료 기술을 이용하여 인공수정을 해야 하는데, 실패하는 경우가 흔하다. 한 리포트에 의하면 450여 개의 클리닉에서 1년에 약 41만 번의 사이클을 시도했고, 이 중 25% 가 성공적으로 임신했다고 한다.     미국에는 약 70만5000쌍의 동성 부부가 있고 이 중 약 16%인 11만4000 커플은 자녀가 있다. 자녀를 둔 동성 커플의 68%가 생물학적 부모로 남성 부부, 여성 부부의 분포는 비슷하다.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 성전환자) 부모 슬하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정신적, 정서적, 문화적 상태는 다른 아이들과 별 차이가 없다고 보고된 바 있다. 오히려 이 아이들은 홀대받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많고 이들을 차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포용하면서 도움을 주는 태도로 산다고 한다. 하지만 동성의 부모가 이혼하게 되는 경우, 통상적 부부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양육권 이슈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손주에게 친구의 특이한 환경에 관해 묻지 않았다. 그 애는 의학이 변경시켜 놓은 가족의 정의라던가 가정의 영역에 관한 분석 과정을 거치지 않는 환경에서 태어난 나잇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류 모니카, M.D. / 종양방사선학 전문의·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오픈 업 의학 가족 손주가 친구 친구 부모 손주 친구

2024-07-16

[부동산 이야기] 에스크로 - 관공서와의 관계

이민 1세는 물론이고 1.5세나 2세들에게도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인식 부족으로 고생한 부모들이 보기에 아직 그리 인기 있는 직업이 아니어서인지 곳곳에서 한인 직원과 만나는 행운은 흔치 않은 일이다.   시청은 물론이고 주류 통제국(CA Dept. of Alcoholic Beverage Control), 가주 조세평정국(CA Dept. of Tax and Fee Administration), 노동국(EDD) 등 사업체의 시작과 마무리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정부 기관들과 전투태세로 임하는 우리 고객들과의 피할 수 없는 만남은 그래서 늘 고달프다.   사업체 매매 에스크로를 오픈하고 클로징할 때마다 셀러나 바이어들에게 필요한 서류와 함께 잊지 않고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이 관공서와의 좋은 관계이다.     그러나 실없이 처음 만나는 낯선 사람과 웃는 것도 못하겠고, 말끝마다 '마담' 혹은 '선생님'이나 'Please'도 잘 안 나오고, 뭔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지 관공서 직원은 또 왜 그렇게 운 나쁘게도 내게만 퉁퉁거리는 것 같아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도 못하겠다는 것이 대부분의 손님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반대로 가끔 만나 식사도 하는 시 공무원인 타인종 친구의 말을 빌리면 그 상반된 반응이 참으로 재미있다. 백인들은 입술이 얇아서 좀 얌체처럼 보이지만 말을 예쁘게 해서 지나치게 친절한 편이고, 반면 동양인들은 눈도 작아 화나 있는 것 같은데다 입도 뾰로통해 보여 왠지 싸우러 작정하고 온 사람들 같아서 사실은 자신들도 긴장한다고 했다.     더욱이 자신들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같은 말만 되풀이하여 정말 짜증이 날 때도 있다고 호들갑을 떨며 하소연을 하여 겉으로는 경청하였지만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회계 사무실에서 서류 완벽하게 준비해갔는데 갑자기 이해도 안 가는 예상못한  어려운 용어가 나오면 사실 누구나 당황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 한인들은 속 깊은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고 입에 바른 칭찬도 잘 못 하고 영어도 문어체 영어를 위주로 교육을 받아서 실제 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변명을 힘주어 강조해 보지만, 늘 상처받을 우리 손님들 생각에 속이 많이 상하였다.     실제로 관공서에서 요구되는 필요한 서류나 손님에 대한 지적 사항은 너무도 간단한 것이어서 그 자리에서 즉시 메모지에 써주거나 프린트해주면 좋으련만 차후에 통보하겠다는 등의 지극히 관료적인 처리로 일관하여 시간을 지체시키게 되는 일이 많아 안타깝다. 결국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은 우리 손님들이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여러 만나는 타인종 손님 중에는 하도 다정하게 인사를 하여 전에 에스크로를 클로징한 손님인가 열심히 기억을 더듬다 보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자연스레 우리도 오랜 친구처럼 대하면서 부드러운 관계가 이루어진다.     약속 시각에 3분 늦었는데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면서, 30분 이상을 약속 시각에 늦어 다른 사람의 점심시간을 놓치게 하는 우리네 손님들과 사뭇 대조를 보이는 모습이다.   손님에 따라서 서류접수 및 처리가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정부기관에 어떻게 준비하고 접근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문의: [email protected]   제이 권 프리마 에스크로 대표부동산 이야기 에스크로 관공서 관공서 직원 약속 시각 타인종 친구

2024-07-09

[문예 마당] 눈물 젖은 손을 잡고 -양용님 영전에

눈부신 5월의 햇살이     천사의 도시 LA를 비추던 날     우리의 친구, 아름다운 아들은 갔습니다.       어버이날을 누린 그 행복한 웃음소리가     아직도 메아리 되어 남아 있건만.   우리의 아들, 착한 어린이의 가슴을 지닌 양용님은     무참히 갔습니다.       민중의 지팡이, 약한 시민의 등불로     큰소리치던 경찰의 총에 영문도 모른 채     쌍둥이 형, 40년간 보듬어 준 부모 가슴에     한을 남긴 채 우리의 친구는 그렇게 떠났습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랑스러운 모습     다시는 이 세상에서 듣지 못할 목소리     이제 우리는 함께 일어나 손에 손을 잡고     눈물 젖은 손을 잡고 정의 앞에 용감히 섰습니다.   웨스턴 길이 뻥 뚫리도록 크게 외칩니다.       누가 그 아름다운 청년 가슴에 총을 쐈는지?   분명히 밝혀질 때까지,     눈물 젖은 손은 함성이 되어     천사의 도시에 울려 퍼질 것입니다.       정의는 이길 것이고 억울함은 밝혀질 것이고 코리안의     행진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양왕, 아름다운 우리의 친구, 코리안 청년 아픔 없는     평화로운 하늘나라에서 부디 영면하소서   눈물 젖은 우리 코리안의 손을 함께 잡고서. 정린다 / 시인문예 마당 눈물 영전 친구 코리안 청년 가슴 부모 가슴

2024-05-30

[문예 마당] 가슴에 묻은 친구

솔솔 부는 바람, 친구와 알라모아나 비치로 산책하러 나갔다. 초저녁부터 동쪽 하늘의 구름 사이를 비집고 커다란 금 쟁반이 떠오르고 있다. 서쪽 마루에 걸려 있는 석양빛에 곁들여 하늘과 땅 사이에 바닷물은 황혼빛으로 물들고 있다. 넘실거리는 바닷물 위에선 은과 금 자락의 댄스파티가 한창이다. 마주 보고 있는 와이키키 비치에 즐비하게 늘어선 빌딩들은 빛의 반사로 황금빛을 띠며 반짝이고 있다. 잠시 후면 사라질 휘황찬란한 풍경이다.     이 아름다운 저녁을 바라보며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처음 하와이에 와 지상천국이라고 느껴져 이곳으로 초청하고 싶었던 사랑하는 친구이다. 50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 잊을 만도 하건만, 좋을 때나, 슬플 때나 생각나는 그리운 친구이다. 같이 웃고 울던 단짝이었던 친구의 얼굴이 달과 해 사이를 넘나들며, 어른거리는 파도를 타고 다가오고 있다. 항상 내 곁에 있을 것 같은, 손을 내밀면 잡힐 듯이 느껴지는, 어디에선가 나를 바라보고 있을 듯하여 하늘을 쳐다보기도 한다.     나보다 훨씬 키가 큰 그녀는 늘 나를 ‘꼬마야’라고 불렀다. 찬 바람이 불던 부산 기차역에서 홀로 나를 배웅하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아 눈앞이 흐려진다.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그 자체가 마음을 아리게 한다.   한국에서의 일이다. 친구는 시외에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이었다. 친구가 시외버스를 타고 집에 가려는데, 사람이 버스에 오르기도 전에 버스가 급히 출발하는 바람에 버스 바퀴에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 친구는 석 달 동안 누워 있으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천주교를 믿는 그녀는 청순한 마음으로 성스러운 수녀가 되겠다는 꿈을 꾸며 수녀원에 들어갔다. 몹시도 추운 겨울이었다. 숙대 근처에 있는 수녀원이었다. 훈련받는 동안 방한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뜨거운 핫팩을 안고 자다가 다쳤던 다리에 화상을 입어 고생하기도 했다. 내가 방문했을 때 자색 저고리에 검은색 짧은 치마를 입은 그녀의 모습이 몹시도 추워 보였다. 그런데 몇 달 동안 훈련을 다 받고 수녀원을 나온 후 그녀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수녀원에서의 생활이 바깥세상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했다. 그녀는 수녀원을 나온 후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그 후 결혼을 하고 귀여운 두 왕자를 낳았다. 첫아들을 안고 찍은 사진을 보내온 것이 마지막 사진이었다. 그녀는 ‘임신성 고혈압’으로 고생하였다고 한다. 둘째를 낳으면서 고혈압이 극도로 악화해 반신 마비까지 와서 친정에서 3개월 동안 치료를 받으면서 회복했지만 한쪽 손의 마비는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육체적으로도 괴로웠고, 기대에 어긋난 남편에 대한 불만족 등으로 힘들어했다. 그래도 버티고 견디어야 하지 않았을까, 고물거리는 어린 것들 때문에라도 살아야 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나의 생각이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을 백번 이해하고 감싸주고 안아주고 싶다.   헤르만 헤세의 ‘사랑이나 지성보다도 더 귀하고 나를 행복하게 해 준 것은 우정이다’라는 말이 내 가슴을 두드리고 있다. 친구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가. 자책해 보지만 곁에 있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핑계일 뿐이다. 그 당시 나도 미국생활에 적응하느라 무척이나 힘든 기간이었다.     가버린 친구를 잊어버리려, 지워버리려 노력하기보다는 그를 기억하고 그와 같이 지냈던 일들을 가슴에 담고 그리워하련다.   손녀가 뮤지컬 해밀턴에 나오는 노래를 부르는데 유독 내 귀에 남는 가사가 있다. ‘When my time is up, have I done enough?/Will they tell my story?/Will they tell your story?/Who tells your story?(내 시간이 다 되었을 때, 나는 충분히 이뤄낸 걸까?/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할까?/사람들이 너의 이야기를 할까?/누가 당신의 이야기를 전할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며 웃고 살기에도 부족한 인생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사람들은 미소를 잃고, 에너지를 소진하며 힘들게 살고 있다.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를 사랑했던 주위 사람들이 우리를 아름답게 기억되고 회자될 가치가 있는 삶이 되기를 바라는 작은 소원이다.   김평화 / 수필가문예 마당 가슴 친구 버스 바퀴 임신성 고혈압 your story

2024-05-16

"아침에 찬 바닥에서 일어나면 토큰 구해 버스서 몸 녹인대요"

“처음 만났던 분은 사업하다 망해서 가족들 다 한국 보내고 자기는 다리에서 떨어져 죽으려고 했는데 못 죽었대요. 길바닥에서 자는 한인 홈리스가 또 있다는 거야…. 다들 모이라고 해서 맥도날드에서 아침 사주며 ‘제일 필요한 게 뭐냐’고 물었죠. 버스 토큰이 필요하다고 해요. 땅바닥에서 자고 나면 너무 추워서… 아침에 버스를 타면 몸을 좀 녹일 수 있다는 거예요.”   김요한(사진) 신부는 지난 2008년 교회에서 음식을 나눠주다 한인 홈리스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 인연을 계기로 김 신부는 숨어 지내던 한인 홈리스들을 모아 가족 같은 공동체를 꾸렸다. 김 신부가 계획한 일은 아니었지만, 갈 곳 없는 한인 홈리스들이 눈에 밟혀 같이 산 지 10년이 넘었다.   요즘 김요한 신부의 고민은 자꾸만 늘어나는 한인 홈리스의 도움 요청이다.     김 신부는 “지난 3년 동안 이곳 쉼터에서 11명이 세상을 떠났다”며 “대부분 늙고 아파 노동능력을 잃었다. 이분들이 같은 처지인 홈리스들과 최대한 친구처럼, 가족처럼 함께 지내도록 돕는 일이 중요하다. 쉼터에서 재미있게 살면서 삶을 정리하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김 신부는 한 달 운영비인 4000달러 마련이 어렵지는 않을까. 김 신부는 “친구, 지인, 신도들이 도와줘서 다같이 사는데 큰 지장은 없다”면서 “지금도 차에서 자는 한인이 많다. 천막이나 텐트에 사는 한인은 쉼터에 들어오고 싶다고 계속 전화한다”고 실정을 전했다.     “한인 홈리스는 LA 일반 셸터를 무서워합니다. 이분들을 분산 수용해서 가족같이 함께 머물도록 해줄 수 있는 주거공간을 더 마련할 수 있다면 제일 좋겠어요.” 김 신부의 꿈이다.     ▶나눔의 집 쉼터: (323)244-8810   김형재 기자 [email protected]바닥 토큰 한인 홈리스들 버스 토큰 최대한 친구

2024-05-14

[열린광장] “사랑해, 내친구 게일”

“게일!, 게일!”     부르짖는 내 목소리에 그녀는 눈을 떠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결국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그녀는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내 일생에서 가장 귀한 친구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게일을 선택할 것이다. 게일은 나의 친구이자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와의 만남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던 특별한 것이었다. 그녀와 나는 신앙이 같다는 이유로 대화가 통해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게일은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걱정하는 나의 말을 들어주었고, 함께 기도하며 위로해 주던 친구였다.     병세가 위중해진 아버지를 뵙기 위해 한국 방문을 계획할 때였다. 그녀는 기도 중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국에 가라고 했다면서, 동행을 제안했다. 물론 본인의 여행 경비는 본인이 부담하겠다면서….     솔직히 처음에는 흑인인 그녀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다는 것에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너의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러 가는 것”이라는 게일의 말에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아버지께 연락을 했더니 “나야 와주면 고맙지”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그렇게 우리는 함께 한국에 갔다. 그녀는 폐암으로 고생하던 아버지가 기침 때문에 잠을 못 자고 아파할 때마다 아버지 방으로 가 환부에 손을 얹고 정성으로 기도했다. 아버지도 게일을 무척 좋아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그녀가 신은 양말에 구멍이 난 것을 보셨는지 새 양말도 꺼내 주시고 손도 잡아주시며 무척 예뻐하셨다. 그녀의 사랑에 감동하신 아버지는 그녀를 통해 주님을 영접하셨다.   하지만 한 달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게일과 나는 함께 한국을 다녀온 후 더 가까워져 그녀가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는 등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다.   어느 날 낯선 번호의 전화를 받았다. 게일의 이름을 대면서 빨리 병원으로 와 달라는 전화였다. 나는 남편과 함께 그녀가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갔다. 게일이 심장마비로 쓰러진 것이었다.     그녀는 혼수상태였음에도 내 목소리를 듣고는 눈을 떠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마지막 인사 한마디 나눠보지 못하고 게일은 삼 일 만에 하늘나라로 이사를 했다. 그녀가 고혈압과 당뇨로 고생하는 것을 알고 알았지만 심장병까지 앓고 있는 것은 몰랐다. 그녀가 떠난 후 그녀의 아들과 병원 동료들 몇 명이 함께 그녀의 유품 정리를 도와주다 발견한 병원 진료 카드를 보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다. 그녀가 사용했던 침대는 누가 버린 낡은 소파 쿠션 3개를 붙여놓은 것이었다. 옷장에도 내가 선물로 준 옷 몇 벌과 유니폼 몇 개가 전부였다.  그녀는 번 돈을 본인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대신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과 홈리스들을 위해 모두 사용했다.  홈리스들에게 음식도 만들어 주고 재봉도 가르쳐 주는 등 본인이 소유한 물질과 시간을 모두 어려운 이웃들과 나눴다. 그녀는 봉사하는 삶을 직접 실천으로 보여준 성경에 나오는 ‘도르가’와 같은 귀한 여인이었다.   아들 외에는 유가족이 없는 그녀를 위해 근무하던 병원에서 조촐하게 장례식을 치렀다. 동료들과 함께 그녀를 추모했다. 게일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려 추모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나는 소중한 가족 한 사람을 잃은 것 같은 슬픔과, 항상 남을 먼저 배려하며 선행과 나눔을 실천했던 그녀의 아름다운 삶을 이야기했다. 그녀가 베풀었던 선행을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성경 다니엘서 12:3 절을 천천히 읽어주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그녀에게 전해 주고 싶었던 마지막 인사였고 소원이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 주셨던 천사였다. 나는 그녀가 천국에서 나의 아버지와 반가운 재회를 나누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때때로 인생의 어려운 순간을 지날 때, 또 마음이 힘들고 울적할 때면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그녀를 불러본다. 그녀가 언제나 그랬듯이 다정하게 웃으며, 또다시 나에게 말한다. “앨리스, 너는 참 바보 같아(Alice, you are so silly….)”     사랑해, 그리고 보고 싶다, 잊지 못할 나의 영원한 친구 게일.    ━       앨리스 박은 정신과 병원 은퇴 간호사로 은퇴했다. LA폭동 당시 한인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통역 등 봉사 활동을 했으며, 아태가정상담소에서도 활동했다. LA폭동 42주년을 맞아 절친한 흑인 친구였던 게일을 추모하며 쓴 글이다.    앨리스 박 / 은퇴 간호사열린광장 사랑 친구 내친구 게일 게일 생각 정신과 병원

2024-04-28

Z세대 59% “친구와 함께 집 구입 고려”

Z세대(1997~2010년생) 중 절반 이상이 친구와 함께 주택 구매를 고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개인재정 전문 업체 ‘크레딧카르마’의 설문조사에서 Z세대 응답자 중 59%가 친구와 함께 주택 구입을 고려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는 높은 주택 가격과 제한된 주택 공급으로 인해 혼자서는 집을 구매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온 새로운 트렌드라는것이 업체의 설명이다.     또한, Z세대는 다른 세대와 비교해서 주택 구입에 있어 부모의 지원에 더 큰 의존도를 보였다. Z세대 응답자 중 약 44%가 부모의 도움을 받아 첫 주택 구입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는 밀레니얼 세대(16%)와 X세대(12%)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게다가 이미 집을 구매한 Z세대와 밀레니얼세대 중 각각 38%와 27%는 내 집 장만 시 부모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고 답했다.   Z세대는 ▶여행이나 외식과 같은 비필수 지출 축소(35%) ▶추가로 더 일하기(28%) ▶필수 지출 연기(27%) ▶가족과 함께 살기(16%)등의 방법으로 주택 구입 자금을 마련하고 있다고 전했다.   크레딧카르마의 코트니 알레브 소비자 금융 전문가는 “단독으로 집을 구매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주택을 사려는 노력은 좋은 시도”라며 “공동 투자에 따른 위험성을 알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준비하고 집을 사는 게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정하은 기자 [email protected]친구 구입 구입 고려 부모 지원 주택 구입

2024-04-01

[디지털 세상 읽기] 틱톡 금지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던 2020년은 미국에서 중국에 대한 반대가 혐오 수준으로 커지던 때였다. 코로나바이러스를 중국의 탓으로 돌리던 트럼프는 중국이 만든 인기 소셜미디어 앱 틱톡이 사용자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미국 여론에 영향을 행사한다며 사업을 미국 업체에 매각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당시 우여곡절 끝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던 ‘틱톡 금지령’이 미국의 선거철을 맞아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의회가 금지 법안을 통과시키면 서명할 것”이라며 이 문제를 다시 꺼냈기 때문이다.   틱톡은 인도 등 세계 20여개 국가에서 사용이 금지된 상태다. 인도처럼 전면 금지한 곳도 있지만 영국, 프랑스 등 서구 국가들은 정부 소유의 모바일 기기에서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틱톡 앱을 깔면 기업이 이를 통해 정보를 빼낼 우려가 있기 때문에 취한 조치이지, 아직 그런 사례가 나오지는 않았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열렬한 사용자들을 가진 앱을 정부가 금지할 수 있느냐는 반발도 거세다. 미국에서도 정치권이 다시 틱톡 금지를 이야기하자 많은 사용자가 의원들에게 전화해서 틱톡을 막지 말라는 ‘풀뿌리 로비’가 벌어지고 있다.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시진핑의 중국에 대해서는 강경한 자세를 보이기 때문에 법안 통과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바이든은 틱톡을 통해 대선 선거운동을 하고 있어서 위선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틱톡을 공격하며 금지, 매각을 추진했던 트럼프는 바이든이 이 이슈를 다시 꺼내 들어 선점하자 말을 바꿔서 틱톡을 금지하지 말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전면 금지한 인도의 예를 보면 갈 곳을 잃은 틱톡 사용자들이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서 나온 유사 서비스로 몰리는데, 트럼프는 자신이 항상 껄끄럽게 생각하는 실리콘밸리 플랫폼에 손님을 몰아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박상현 / 오터레터 발행인디지털 세상 읽기 틱톡 금지 열중인 친구 틱톡 금지 친구들 모두

2024-03-13

[열린광장]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왜 이런 인사를 하는지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몇주 전 아침에 일어나니 한국에서 카톡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내용이었다.       누구보다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친구가 심정지로 숨졌다는 믿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친구는 동호인들과 산악자전거를 타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근처 카페로 가서 쉬는 도중 갑자기 심정지 상태가 됐고 미처 손 쓸 겨를도 없었다는 것이다.   친구들 모두 비보로 충격에 빠져 “이게 무슨 날벼락” “누구보다 건강하고 활동적이었는데” “여정을 이렇게 먼저 떠날 줄이야” “기가 막혀 뭐라 할 말이 없네” “충격적입니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갑자기 떠난 친구는 ‘비바 그레이’라는 책의 저자로 한국에서 큰 화제가 됐었다. 그의 책은 액티브 시니어, 즉 노년을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특히 베이비부머 세대가 과거의 노년층과는 달리 여가와 취미를 즐기면서 사회생활에도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해 주목을 받았다. 친구는 스스로도 책의 내용처럼 그렇게 살았다. 그는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혈기 왕성하게 생활하며 인생을 즐길 것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이를 몸소 실천했던 친구였다.     그는 청년 시절보다 더 활발하게 여가와 취미 활동을 즐겼다. 50-60대들에게 신나게 노는 방법을 소개하면서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인생을 즐기면서 살았다. 그가 즐겼던 취미 활동으로는 패러글라이딩, 경비행기 조종, 요트와 수상스키, 스키, 승마, 산악자전거,세계일주 여행, 낚시, 서예, 사진, 글쓰기, 그리고 악기 배우기 등 정말 다양했다. 스포츠도 못 하는 것이 없었다. 대학 시절 밴드 활동을 하기도 했던 그는 지난해 연말 파티에서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은퇴 후 제주도로 이주해 서예와 한시 작업에 열중인 친구가 그에게 ‘라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브라보’에서 ‘브’를 뺀 것이지만, 한자로는 벌릴, 그물 ‘라’와 지킬 ‘보’자를 쓴다. 그가 평소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을 즐기면서 살고 싶다”고 해서 지어준 것인데 패러글라이딩할 때 제일 뒤에서 날개를 크게 펴고 위험해 보이는 사람을 보호하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한다.     친구는 떠나기 얼마 전 페이스북에 ‘설 연휴 끝날에 친구들과 북한산 다녀 왔습니다.... 응달에는 아직도 뽀드륵 거리는 하얀 눈 속을 마냥 걷고 싶은데, 아쉬운 겨울이 지나가는군요’라는 글을 남겼다.     이제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서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이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건강을 유지하면서 즐겁고 신나는 인생을 살 것인가?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무엇보다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리한 운동은 지양하고 걷기, 스트레칭, 골프 등으로 건강을 유지할 계획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 마음의 여유를 갖고 생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고 베풀고, 공유하면서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고자 한다.     필자는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평안히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믿는다. 나도 그렇게 되길 간절히 원한다.   어쩌면 친구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다 갑자기 떠났으니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도 있다.   ‘라보’ 친구 잘 가시게. 이제는 ‘밤새 안녕하십니까?’를 물어야 하는 나이가 된 듯하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열린광장 안녕 열중인 친구 친구들 모두 취미 활동

2024-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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