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세월이 지나간 풍경
삼만이 아재는 땔감을 장만하러 산에 갈 때마다 참꽃 한아름 꺾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옥이 언니는 양지 바른 툇마루에 날 앉히고 ‘꼬마 공주님’ 하며 머리에 참꽃을 매달았다. 왠지 가슴이 떨려 왔다. 하모니카 불듯 꽃잎 따서 입 안에 넣으면 쌉쌀하고 달콤한 향기가 혀 끝을 맴돌았다.
‘늙마에 미국 가는 친구/ 이메일과 전화에 매달려 서울서처럼 살다가/ 자식 곁에서 죽겠다고 하지만/ 늦가을 비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인사동에서 만나/ 따끈한 오뎅 안주로/ 천천히 한잔할 도리는 없겠구나./ 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 뜨는 것보다/ 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황동규 ‘이별 없는 시대’ 중에서.
시인은 스코틀랜드 위스키 발렌타인을 좋아한다. 나는 술을 전혀 못 마시지만 서울 갈 때 가끔식 여행 가방 속에 발렌타인21을 챙겨 간다. 선생님은 소중하게(?) 아껴 드시고 반쯤 남으면 뚜껑을 닫아 주머니에 넣으신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건 그냥 수양버들에 묶인 그네가 하늘 높이 나는 신선한 자유로움이다.
‘이별 없는 시대’의 ‘늙마’는 미국으로 떠나는 친구 마종기다. 마종기 시인은 1965년 군의관으로 군 복무 중 ‘한일 굴욕외교 반대 재경 문인 82인 서명’ 사건으로 수감됐다가 미국으로 추방되듯 이민을 간다.
마종기 시인은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진단방사선과 전문의를 거쳐 톨리도에서 방사선의사로 역임한 후 은퇴했다. 주립대학 시절 타계한 친구 기일이 오면 4시간을 운전해 꽃을 들고 우리 동네에 있는 데이빗 묘지를 찿아왔다.
‘지금도 아빠를 기억하는 친구 있을까?/ 없어도 친구가 있으니까./ 기억도 못 해 주는 친구는 뭐해?/ 내가 사랑하니까. (중략)/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 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느니까.(중략)/ 오래 전 고국을 떠난 이후 쌓이고 쌓인 눈으로 내 발자국 하나도 식별할 수 없는 천지지만 맹물이 되어 쓰러지기 전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마종기 ‘대화’ 중에서 아픔과 고통, 사랑과 미움, 이별과 그리움은 살아있는 동안 넘치는 축복이였다. 사라져 별이 되는 순간에도 언약의 말들은 사랑의 끈을 놓치 않는다.
‘누군가 조용히/ 풍경 속으로 들어온다/ 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는다’ 황동규 시인은 ‘외로움’의 존재론적 의미를 ‘홀로움’이라는 새로운 경지로 승화시킨다.
바람이 매섭게 심장을 헤집고 폭풍이 몰아치는 날에도 그대가 풍경 속에 있기에 외롭지 않았다. 찬란했던 시절. 그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걸어가면 눈물이 방울져 내리는 내 손에 안개꽃 한아름을 건네준다.
세월이 지나간 풍경 속에 따스한 햇살로 남은 그대여! 다시 만날 수 없다 해도 작별이 끝이 아닌 것처럼, 사랑이 재가 될 때까지 불꽃으로 타오르기를. (Q7editions 대표)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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