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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건너지 못하는 강 건너

생의 주사위는 던져진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운명이건 숙명이건, 피할 수 있거나 피할 수 없거나 인생의 주사위는 던져진다. 아무도 피하지 못한다. 행복과 불행, 욕망과 좌절, 희망과 절망, 사랑과 이별, 축복과 저주,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 인생의 길고도 짧은 희로애락의 강을 번갈아가며 건너간다.   순간의 차이로 명운이 갈라지고 운명의 수레바퀴는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선택이 아니라 각본 없이 짜여인 원고지의 빈 칸을 채운다.   생명과 죽음을 판정하는 주사위는 단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진다. 모래시계의 마지막 한 알이 칠흙의 어둠으로 생명을 삼킬 때까지 눈 뜬 장님처럼 살아간다.   주사위 어원은 ‘제비뽑기’다. 영어로는 ‘Dice’인데 작은 상자 모양의 각면에 여섯가지의 점이 새겨져 있는데 바닥에 던져 윗면에 나온 수로 승부를 겨룬다. 인생의 패는 낙장불입(落張不入), 한 번 바닥에 놓아버린 패는 다시 무를 수 없다.   기원전 4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갈리아 원정을 함께 했던 군사들과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한다. 로마 공화국은 도시국가를 복속시킨 뒤 군사 지휘권을 가진 집정관이 해외 원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자신이 이끌던 군단들을 루비콘 강에서 해산시키고 단신으로 로마로 돌아오게 했다.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 반란을 의미한다.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루비콘 강에서 군대를 해산하고 단신으로 올 것을 요구했지만 그럴 경우 원로원에게 암살 당할 것임을 직시한 카이사르는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공화정을 종식시킨다.   라틴어 ‘rubico’는 형용사 ‘rubeus(붉다)에서 기원했는데 진흙 침전물에 의해 강물이 붉은 빛깔을 띠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루비콘강을 건너다.’라는 표현은 돌이킬 수 없는 처지에 봉착했을 때 그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의 뜻으로 쓰인다.   살면서 수없이 많은 루비콘 강을 건는다. 건너지 말아야 하고, 건너서는 안 되는 경계를 넘나든다. 넘어서는 안 되는 산도 목숨 걸고 정복하고, 건너지 못하는 강, 건너서는 안 되는 위험한 강을 겁도 없이 건넌다.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앞날을 장담하지 못해도 순간의 유혹과 탐욕을 참지 못해 나락의 길로 들어선다. 조금만 견디면 해결될 일을 그 시간을 못 참아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넌다.   죽기 살기로 사랑을 맹세했던 사람과 결별하고 도원결의로 우정을 다짐하던 친구와 등을 돌린다. 동지가 황야의 무법자로 변해 서로 총을 겨누며 루비콘 강을 혼자 건너간다. 루비콘 강은 먼저 건너는 사람이 자살골을 넣는다. 죽고 사는 일 빼고는 생의 주사위는 언제든지 다시 던질 수 있다.   연어는 산란을 위해 귀향한다. 바위나 돌, 거센 물살에 찢겨 온몸엔 벌건 상처가 가득해도 거센 강물을 거슬러 목적지에 다다른 연어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마지막 사투를 벌인다. 오직 번식을 위한 힘겨운 여정의 막바지 임무를 완성한 연어들은 사체가 되어 자연으로 회귀한다.   그대여, 사는 것이 모질고 견디기 힘들어도 루비콘 강은 건너지 마요. 대신 강물에 헛된 부귀영화와 좌절, 고통과 슬픔을 떠나 보내세요. 루비콘 강은 죽음의 강입니다, 강 건너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사는 날까지 버티며 살아 주세요. (Q7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주사위 어원 율리우스 카이사르 운명이건 숙명이건

2024-11-19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열정을 껴안고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 날밤 새는 줄 모르고 설쳐댄다. 요즘 눈만 뜨면 아들이 사 준 트레드밀에서 다람쥐처럼 뜀박질을 한다. 장가 가서 집에 다니러 온 아들이 다짜고짜로 끌고가 트레드밀을 구입했다.   물론 구입대금은 내 크레딧 카드로 긁었다. 그리곤 시간표를 만들어 놓고 운동을 시킨다. 지들 어릴 때 숙제 조사하듯 매일 체크를 해대니 안하고는 못배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자식이다. 범보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게 자식하고 맺은 약속이다. “오래 건강하게 살려면 운동해야 돼요. 엄마 일찍 죽으면 나 슬퍼해.” 아들의 이 한마디에 40년 동안 ‘운동 안 하고도 스트레스 안 받기 작전’으로 버티던 내 지조(?)가 와르르 무너졌다. 성가시게 보채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뻐근하게 저려온다.   몸으로 떼우는 모든 것에 나는 젬병이다. 특히 운동에는 취미도 관심도 없다. 미식 축구 게임조차 잘 이해를 못하니 무식 정도가 아니라 푼수에 속한다.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 산 골프채는 레슨만 두 번 받고 차고에서 휴식 중이다. 그래도 주눅 안들고 “난 운동 싫어서 안한다”고 오리발을 내밀며 오히려 큰소리치며 산다. 포기각서 쓰면 맨날 마음만 먹고 실천 못해 안달하는 사람보단 정신건강(?)에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런데 이변이 발생했다. 모를 때는 몰랐는데 해보니 진짜 운동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다. 저 혼자 놀아도 즐겁고 봐주는 사람 없어도 신나는 게 운동이다.   신나면 재미있다. 신은 열정을 유발시킨다. 열정이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생긴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알면 자신을 바로 파악할 수 있어 열정이 생긴다. 마음은 콩밭에 있는데 보리밭에 가면 물에 물탄 듯 의기소침해지기 마련이다. 열정은 겉으로 들어난 것만으로 파악할 수 없다. 떠벌리고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열정이라 할 수 없다. 떠벌리기는 겉으로 뿜어내는 거품이기 때문에 잘 사그러든다.   드러나지 않지만 차분한 열정을 가진 사람은 작은 물방울로 바윗돌을 뚫는다. 열정은 마음의 밑바닥에서 용솟음치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영혼을 붙태우는 화염이고 생을 끌고가는 수레바퀴다. 찬물을 끼얹으면 의기소침해지고 풀이 죽어 마음에 병이 생긴다. 열정은 드릴 속의 배터리와 같다. 열정은 드릴처럼 삶에 구멍을 뚫어 신선한 바람이 불게 한다. 드릴을 사용할 때는 배터리 점검도 중요하지만 용도에 맞는 드릴척(drillbit)을 잘 골라야 된다.   분별 없는 열정은 에너지만 소진시킬 뿐 목표 달성에 걸림돌이 된다. 열정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 타협해서 무너지면 열정이 아니라 오기였을 뿐이다. 오기는 벽에 부딫치면 부서지지만 열정은 벽을 넘고 산을 넘어 지칠 줄 모르는 힘으로 인생이라는 동력선을 이끌게 한다.   왠지 의기소침하고 사는 게 시시하고 삶에 열정이 없다고요? 마음의 상자를 열어보고 제일 하고 싶은 것부터 순서대로 줄을 세우세요. 눈을 감고 한 손으로 맥을 짚고 다른 한 손을 심장에 얹어보세요. 살아있다는 이 작은 충만함으로도 당신이 진정 하고 싶었던 그 일을 활화산처럼 불태울 열정이 다시금 용솟음치고 있지 않나요?  (Q7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활화산 열정 맨날 마음 진짜 운동 배터리 점검

2024-11-12

[실학산책] “성<性>만으로는 덕<德>이 될 수 없다”

조선의 실학사상을 연구하다 보면 의외로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연암 박지원, 초정 박제가 등 셀 수 없이 많은 실학자들…. 어느 누구 한 분 뛰어난 사상과 철학을 지닌 학자들이 아닌 분이 없지만,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 다산 정약용에 이르면 그 사상의 혁신성 때문에 더 많은 느낌을 갖게 해준다. 1797년은 다산의 나이 36세였고 지금으로부터 227년 전의 일이다. 이 해에 다산은 황해도 곡산도호부사에 임명되어 최초로 목민관 생활을 하게 되었다. 당시 목민관은 삼권(三權)을 행사하는 권력자로 수사와 재판도 담당하던 때였다.   민란 주동자를 무죄 판결한 다산   기록을 보면 다산이 곡산 땅에 부임하여 첫 번째로 처리한 재판이 바로 이계심(李啓心) 사건이었다. 농민 1000여 명을 이끌고 관아에 쳐들어온 민란의 주동자가 이계심이었다. 판결의 주문은 무죄.   “목민관이 밝은 정치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자신의 안위만을 위하느라 꾀가 많아 관의 잘못에 항의하지 않기 때문인데, 이계심은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고려하지 않고 백성들을 대신하여 관에 항의하는 일을 했으니, 천금을 주고 사야 할 사람이지 벌을 줄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너를 오늘 무죄 석방한다.”   전제군주 국가의 재판관으로 관아에 침범한 민란의 수괴를 무죄 석방한 다산, 230여 년 전의 재판으로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국민의 저항권을 확실하게 인정한 다산, 얼마나 위대한 선각자이자 진보적인 학자인가.   관의 탐학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위해 관아에 쳐들어가 항의하는 일은 무죄라는 다산의 법의식은 어디서 온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주자학’과 분명한 차이를 지닌 ‘다산학’을 비교 검토해야 한다. 주자는 성(性)은 이(理)라고 해석하여 ‘성리학’을 집대성했다. 다산은 성이란 기호(嗜好), 즉 어떤 일에 즐기려는 ‘경향’으로 해석하여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주자는 이(理)라는 관념의 논리를 구축했으나, 다산은 기호라는 행위를 전제한 경험의 논리를 세웠다. 그래서 유학의 최상가치인 덕(德)의 해석에서 주자와 다산은 판이한 사유체계로 갈라진다. 주자는 덕이란 ‘구중리(具衆理)’ 즉 온갖 이치를 갖춘 이의 개념으로 여겼지만, 다산은 덕이란 ‘효제자(孝弟慈)’라는 행하고 실천하는 개념으로 해석하였다.   다산학의 핵심인 ‘원덕(原德)’이라는 짤막한 논문 한 편은 바로 현실에 가장 절실한 글임을 알게 된다. “하늘이 명(命)한 것이 성(性)이요, 성에 따르는 것이 도(道)이다”라는 『중용』의 철학에 따라 다산 자신의 철학이 나왔다. “명(命)과 도(道) 때문에 성(性)이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고, 자기와 남이 있기 때문에 행(行)이라는 명칭이 생겼으며, 그 성과 행 때문에 덕(德)이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만 가지고는 덕이 될 수가 없다”라는 세기적인 발언이다. 아무리 착한 성품이지만 그 착한 성품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어지는 일이 없다면서 그런 착한 성품을 행동으로 옮겨야만 덕이 이뤄진다는 주장이다. 성(性)+행(行)=덕(德)이라는 영원한 진리가 다산학에 담겨 있다.   유학사상의 주류는 당연히 성선설이다. 인간은 본디 착한 성품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이론에 근거해서 다산은 성을 양심(良心)과 함께 설명한다. 하늘에서 받은 착한 성품, 하늘에서 받은 선량한 성품, 이런 성품을 행동으로 실천해야만 덕이 되므로, 성품과 양심을 몸속에 담아두고서는 세상과 역사는 제대로 가지 못함을 밝혀낸 사람이 다산이었다. 우리 시대의 정치가(政治家) 김대중 대통령이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고난의 일생을 행동으로 투쟁하면서 민주화를 이룩했던 역사적 경험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인류의 역사는 바로 착한 성품을 행동으로 옮기고, 양심을 실천할 때에만 바르게 갔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 3·1혁명, 4·19혁명, 5·18민중항쟁, 6·10항쟁, 모두 정의로운 성품과 양심을 잠자게 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에 이 나라에 이만큼의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었다.   지도자는 국민 뜻에 따라 정치해야   민주주의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어야 한다. 지도자는 국민의 뜻에 따라 정치를 해야 한다. 국민들이 돌을 던지면 왜 돌을 던지는가를 알아내서 돌을 던지지 않을 정치로 국정의 기조를 바꿔 국민들의 뜻에 따라야지, “돌 던져도 맞고 가겠다”고 말하면 국민들의 뜻이야 안중에도 없다는 생각이니, 그런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1945년 광복 이후,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많은 고생과 희생으로 이 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오르도록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시켰던가. 그러나 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 겨우 2년 반 사이에 민주주의가 얼마나 망가지고 파괴되었는가. 이 나라 민족정기와는 역행하는 이른바 ‘뉴라이트’ 세력이 국가의 요직을 점령하였고 친일매국 세력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다.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이제는 바른 성품과 양심을 행동으로 옮기자. 박석무 /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실학산책 저항권 주자학 성품 하늘 학자 다산 다산 기록

2024-11-11

[문예마당] 인간의 잔인함·뻔뻔함은 어디까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늦더위에, 가을장마까지 겹쳐 푹푹 찌던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맑고 화창한 날씨로 변했다. 한국의 가을 하늘은 맑고 푸르러 눈이 시릴 정도다. 무겁고 우울했던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쾌청한 하늘을 보던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세상은 엉망진창이다.   세상이 날로 더 악해지고 있다. 한국이 경제대국이라고 하지만 살기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각종 재해와 사건,사고가 이어지면서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 정치도 사악하게 흘러간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 한국 사회가 총체적 난국처럼 느껴졌다. ‘마약 청정국’도 옛말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마약 관련 뉴스가 쏟아진다.  ‘묻지마 살인’ 등 끔찍한 뉴스가 끊이지 않더니 급기야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 하나가 밝혀졌다. 이 사건은 여고 시절 공포에 떨며 읽었던 애드거 앨란포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검은 고양이’를 소환하게 했다.     ‘검은 고양이’는 단순한 공포 소설을 넘어 인간 본성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이다. 한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던 고양이를 학대하고 죽인 후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리다 아내까지 살해하고 발각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가정 폭력으로 고통받았다고 한다. 그 경험들이 ‘검은 고양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요약하자면, 온화한 성격에 동물을 아주 좋아하던 평범한 남자가 술에 중독되면서 점점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인 인물로 변한다. 술에 취해 자신이 기르던 검은 고양이 ‘플루토’의 한쪽 눈을 도려내고 나중에는 풀로토를 나무에 매달아 죽이기까지 한다. 그 후, 그는 술집에서 플루토와 닮은 고양이를 발견하고, 그 고양이를 데려와 또 기르기 시작한다. 이 고양이 역시 그의 폭력적인 성향을 자극한다. 결국 이 남자는 두 번째 고양이도 도끼로 죽이려다 실수로 아내까지 죽이게 된다.     아내의 시신을 지하실 외벽과 내벽 사이에 감추고 벽을 새로 발라서 범행을 숨긴다. 아내가 죽자 기르던 고양이도 자취를 감춘다. 아내가 사라지자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이윽고 경찰이 집을 방문한다. 경관들이 집을 훑어보고 무심히 지나치려는데, 그는 자신이 완전범죄를 저질렀다는 교만한 마음에 벽을 두드린다. 그 순간 벽 뒤에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수상히 여긴 경관들이 벽을 허물게 되고 그 안에서 아내의 처참한 시신이 발견되고, 아내의 시신과 함께 산 채로 묻힌 두 번째 검은 고양이도 발견된다. 결국 그는 체포되고 만다.     공포와 긴장 속에서 읽었던 소름 끼치는 ‘검은 고양이’가 갑자기 떠오른 것은 지난 9월 하순 경남 거제의 한 주거지에서 16년 만에 발견된 시신 때문이다. 한 남성이 말다툼 중 동거하던 여자친구를 살해한 뒤 여행용 가방에 시신을 넣어 유기한 사건이다. 그는 동거녀와  살던 옥탑방 바로 옆 베란다에 가로 39cm, 세로 70cm, 높이 29cm 크기로 벽돌을 쌓은 다음 시신이 담긴 가방을 넣고 10㎝ 두께의 시멘트를 부어 범죄를 은닉했다.     그 후 그는 그곳에서 무려 8년이나 더 살았던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그의 범행은 16년간 아무도 몰랐다. 10㎝ 두께의 시멘트로 은닉한 탓에 별다른 냄새도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인간의 잔인함과 폭력성, 그리고 존엄을 훼손하는 장면을 드러낸 사건이다.   그의 범행은 옥상 누수공사를 하던 중 드러났다. 작업자가 콘크리트 구조물을 파쇄하다 시신이 담긴 여행용 가방을 발견하면서다. 시신은 백골 상태가 아닌 미라처럼 된 상태였다. 다행히 지문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범인을 체포할 수 있었다.     ‘완전범죄는 없다’, ‘반드시 잡힌다’는 말이 있다. 특히 과학의 발달로 범인 체포에 지문 감식과 DNA 분석이 큰 역할을 한다. 과학수사팀 사무실에는 ‘모든 시신에는 흔적이 남아 있다’,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는 문구가 곳곳에 걸려 있다고 한다. 과학 수사 요원들은 ‘스치기만 해도 흔적이 남는다’고 말한다.     “하늘이 무섭지 않으냐?”는 말은 사람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또는 해서는 안 될 고약한 짓을 했을 때 하는 말이다. 천인공노(天人共怒)라는 말도 있다. 하늘과 사람이 함께 분노할 일이나 인간을 두고 쓰이는 낱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 그런 일이 있는데 앞의 사례도 그런 경우다. 사람을, 그것도 한때는 사랑해서 함께 살았던 동거녀를 잔인하게 살해해서 암매장한 집에서 태연하게 8년씩이나 일상생활을 했다는 게 소름 끼친다. 인간의 잔인함과 뻔뻔함은 어디까지인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인 순자의 ‘성악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관점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다”가 아니라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으로 기우는 경향을 지닌다”라는 의미이다.     순자는 예의 같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위적인 노력으로 도덕적으로 교정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이 선하게 되기 위해서는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회규범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에서 말한 암매장 사건은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생명과 법을 경시하는 풍조와 개인의 분노가 사회 전반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더욱 강력한 법 집행과 사회적 경각심이 필요하다. 위의 사건을 통해 사회 안전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애국가의 한 소절이다.  한국의 가을 하늘은 티 없이 맑고 쾌청한데 세상은 왜 이리 혼탁하기만 할까?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잔인함 수필 한국 사회 가을 하늘 다음 시신

2024-11-07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추억의 항아리 껴안고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 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 후회해 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옆같이/ 버림받은 기분에 젖은 적이 있는가 (중략)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다. – 천양희 ‘오래된 가을’ 중에서   모든 것은 지나간다. 어제도 오늘도 떠나간다. 무성한 초록으로 아름드리 서 있던 나무들도 찬란한 옷을 벗고 하나 둘 흩어진다. 낙엽은 아침 이슬로 눈물을 감추고 밟힐 때마다 바스락 신음 소리 내며 작별을 서두른다. 계절은 등을 돌이며 빛바랜 정원에 추억의 꽃 씨 한 알 떨어트린다.     묵은 것들은 농익은 맛을 낸다. 상큼하진 않지만 감칠 맛으로 다가온다. 겉절이는 풋풋하고 신선한 맛을 내지만 오래 두고 먹을 수 없다. 추억의 정원에는 오래 되고 빛이 바랜, 콤콤한 냄새 나는 해묵은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묵은지는 오래된 김장 김치로 양념을 강하지 않게 해 담근다. 저온에서 6개월 이상 숙성시켜야 제 맛이 나는데 오래 숙성 저장 할수록 맛있고 깊은 맛을 낸다. 추억의 창고에 묵은지가 많은 사람의 하루는 가을 햇살처럼 따스하다. 묵은지는 일반 김장김치보다 조금 짜게 담궈야 긴 겨울을 버틴다. 인생의 짠 맛, 신 맛, 험한 맛을 많이 본 사람은 엄동설한을 버틸 힘과 용기를 얻는다.     너무 빨리 숙성된 김치는 금방 신맛이 나지만 묵은지는 서서히 오랜 기간 발효되기 때문에 시어지지 않는 게 특징이다. 짧은 시간 한 방에 날리는 성공은 쉽게 사그러들지만 오랜 시간 각고의 노력으로 일군 삶은 묵은지처럼 오래 지속된다. 묵은지 배추는 속이 덜 차고 푸른 잎이 많으며 단단한 것으로 골라야 한다. 사는 게 마음에 덜 차고 적게 가져도 늘 푸른 잎새로 마음 단단히 먹고 살면 묵은지처럼 깊은 맛을 낼 수있을까?     김장은 배추를 소금물에 담군다는 침장(沈藏)에서 나왔는데 김장으로 바뀌게 됐다. 김치는 침채(沈菜)에서 유래됐는데 딤채→김채→김치로 변형을 거듭했다. 김치가 제 맛을 내려면 배추가 다섯 번 죽어야 한다. 땅에서 뽑힐 때 죽고, 통배추의 배가 갈라지면서 또 한 번 죽고, 소금에 절여지며 다시 죽고, 매운 고춧가루와 짠 젓갈에 범벅 돼 죽고,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 마지막으로 죽는다. 김장 담그는 일은 다가올 험난한 엄동설한을 맞을 준비를 하는 의식이다. 익숙한 손 맛으로 오래된 정원에서 해묵은 추억의 불씨 하나 지피는 일이다. 난로가에서 톡 톡 튀는 밤톨 까먹던 유년의 시간으로 연어처럼 거슬러가는 일이다.   오늘이 허전한 그대여. 계절의 끝자락 붙잡고 허우적거리는 그대여! 사무치게 그리운 날은 마음 속 깊은 곳에 묵은지로 남아있는 추억의 항아리를 꺼내 보세요. 못 견디게 힘든 날만 열어보세요. 너무 자주 열어 보면 그 아름답던 날들이 빨리 시어질지 몰라요. 추억의 항아리는 우거지로 단단히 덮어 땅 속 깊이 묻어 두세요. 찹쌀 풀 섞은 물에 고춧가루와 고추씨를 개고 멸치액젓 다진 마늘과 생강 소금을 넣듯 생의 모든 슬픔과 기쁨, 황홀한 추억들 모두 담아 꼭 꼭 봉해 묻어 두세요. 외로울 때면 오래된 정원에서 은근하게 잘 익은 묵은지 항아리 꺼내 빛바랜 어제를 이지러지게 껴안아 주세요.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항아리 추억 묵은지 항아리 일반 김장김치 추억들 모두

2024-11-05

[손원임의 마주보기] 밤색 하늘과 빨간 말

교육은 아이들의 창의성을 길러주고 고취시키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실상 어린이는 ‘창의성(creativity),’ 즉 창조적 사고를 호기심과 탐구심, 의구심과 함께 아무 거리낌도 없이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이는 그들이 가진 순수하고 맑으며 열린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진실로 바라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유아기와 아동기는 교육으로 아이의 창의력을 길러주고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민감한 시기가 될 수 있다. 이 때는 교육적 환경과 자극, 지지가 언어교육에 미치는 영향처럼 아주 결정적은 아니더라도 어린이들의 창의적 사고력이 성장하고 발달하도록 상당히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발달 시기에 맞게 제공되는 적절한 교육은 아이의 타고난 본성과 자질, 창의적인 능력을 보다 잘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북돋고 키워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간에는 아이의 창의성 상실에 대해서 “어린이들은 물음표로 입학하여 마침표로 졸업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교육의 부작용에 대해서 걱정하고 비관적인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창의성 발달에 관한 그래프를 보자면, 우리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만 해도 창의성이 매우 높다가 초등학교 교육을 거치면서 급격히 감소해간다. 그러다가 다시 중고등 교육을 받으면서 창의성이 다시 어느 정도 상승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어떤 연구 결과에도 개인차와 외부 변수의 효과가 있기 마련이지만, 학교 교육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억누르고, 상상력과 탐구심, 나아가 혁신적인 사고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경향이 있어 왔음은 틀림이 없다.   이런 현상을 여러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우선적으로, 어린이들이 교육을 통해 지나치게 ‘흑백논리적 사고’에 빠져들게 되어서 그렇다고 본다. 말하자면, 교사가 내는 시험 질문에 대한 정답 맞추기 교육에 익숙하다 보면, 학생은 호기심은 버리고 단순 암기를 하기에 너무 바쁘다. 그들은 몽상과 생각의 나래를 펼치기보다 이내 의문을 접고 탐구심을 버려버린다. 그리고 학교의 흑백논리 생활에 자연스럽게 젖어들고 만다.     그것이 당장에는 매사에 의문을 갖고 실험하고 체험해보고 어려운 사고를 하기보다는 훨씬 쉽고 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장기적으로 보면, 학생의 미래와 창의적 사고의 유익한 발전에 별로 이득이나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다행히도 21세기에 들어와서 교육이 많이 변하고 있지만 아직도 개선할 점이 많은 것 또한 여전히 사실이다.     일례로, 현행교육이 기존의 교사와 학생의 대면 수업에 AI 디지털 교과서의 도입을 열심히 활성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난 이것이 학생들의 창의력 계발보다는 또 다른 일문일답이나 속전속결의 수단과 도구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그러면 아날로그적 교육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린이가 놀이방에서 하얀색 도화지에 크레용으로 하늘을 밤색으로 칠하고, 말을 빨갛게 칠했다고 해보자. 이 때 교사는 냉소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얼굴을 붉혀가며 언성을 높여서 이렇게 말하기 쉽다. “하늘은 파랗고 말은 갈색이야, 그러니 당장 다시 칠해!” 그런데 말이다. 이런 경우에 아이가 교사가 말한대로 그림을 고친다고 해도 아이는 수치심과 모욕감만 받기 십상이다. 그 아이는 색깔 칠하기의 재미는 잊은 채로 마음의 상처만 잔뜩 받게 되고 만다. 이는 분명한 교육적 실패다!     조금 더 극단적인 예를 들어, 아이가 지나치게 강압적인 부모 밑에서 자라며, 부모가 터무니없이 ‘빨강’을 ‘검정’이라고 해도, 거부나 반항은 물론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순종적으로 자란다고 생각해보자. 이는 아이의 건전한 사고 발달에 매우 나쁘고 방해가 된다. 결국, 부모나 교사의 지나친 흑백논리 사상 교육은 아이의 열린 사고 및 창의적 사고 발달에 상당히 치명적으로 저해가 된다.     그래서 아이가 그린 ‘밤색 하늘과 빨간 말’에 대해서 지나치게 나무랄 필요가 없다. 이때 진정한 교육은, 교사가 동화책과 여러 다른 매체를 활용하여, 새파란 하늘과 흑갈색이나 하얀 백마를 보여주는 기회를 보다 많이 제공하고, 아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깨우치고, 스스로 생각해보고, 즐겁게 배우도록 돕는 데에 주력하는 것이다. 나는 “교육은 주로 살짝 치고 부드럽게 당겨주어야 효과가 있지, 그 반대로 항상 강하게 치고 세게 당기기만 하면 상처와 부작용 투성이가 되고 만다”고 확신한다. . (전 위스콘신대 교육학과 교수, 교육학 박사)   손원임손원임의 마주보기 밤색 하늘 초등학교 교육 창의성 발달 아날로그적 교육

2024-11-05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눈물 대신 작은 점 하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 낙엽은 흩날리지만 지축 향해 몸을 의탁한다. 떠나 와 세상 이곳 저곳을 떠돌아도 조국은 영원한 목숨줄이다. 살아있는 동안 외로운 영혼을 가누고 지탱하는 피에로의 안식처다. 피에로(Pierrot)는 다른 광대와는 달리 슬픈 얼굴로 분장을 한다. 얼굴에 분칠을 하며 립스틱 짙게 바르고 원뿔형 모자 쓰고 타국에서 어울려 사는 나는 영원한 이방인이다.     시간이 지나도, 세월이 흘러도 그리움은 지워지지 않는다. 바람이 거세게 폭풍으로 몰아치고 먹고 사는 게 부대낄 때는 그리움은 둥지를 틀지 못한다. 텅 빈 가슴 속을 뚫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는 속으로 흐느끼지만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   무시 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곡간을 가득 채우는 것이 성공이라 믿었다. 성공의 탑은 높이 쌓을수록 쉽게 허물어진다. 물질과 허영, 교만으로 생을 가득 채울 때는 비어 있는 것들의 평온과 기쁨을 알지 못했다. 가슴 뚫고 지나가는 세월의 바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비어 있는 것들은 산사에 울리는 새벽 종소리로 가슴 저미며 울려 퍼진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은 작은 신음소리로 비어있는 공간 속으로 번져 나간다.   멀리 떠나와도 조국은 산수화의 여백으로 남는다. 품을 수 없어도 그리움으로 남는다. 비어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아도 가슴으로 만질 수 있다.   동양화의 여백은 그냥 빈 것이 아니라 기(氣)의 표상이고 응축(凝縮)의 미학이다. 화가들은 ‘산수의 기상(山水氣象)’을 묘사하기 위해 여백을 남긴다. 여백은 광(光)과 기를 확대시키고 여운을 표현하는 훌륭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필선을 최소화한 감필과 절파화풍으로 표현을 억제하는 여운을 통해 여백은 광대한 공간을 암시하는 ‘여백의 미’를 창조한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아는 것보다 추구하는 삶, 실용적인 것보다 가치있는 것. 여백은 비어 있는 아름다움의 세계로 생의 깊이를 탐구한다.   동양화를 그릴 때는 산수, 사람, 집을 최소한의 형태로 표현해 여백을 남기는데, 광활한 자연의 기운을 담기 위한 장치다. 형상은 사라지지만 내면이 풍성해지는 역설로 ‘비움’은 채워지지 못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영혼의 술래잡기는 없는 것을 찿으려는 구도자의 발걸음마다 새겨진 고뇌다.     ‘전화 걸면 날마다 / 어디 있냐고 무엇하냐고 / 누구와 있냐고 또 별 일 없냐고 / 밥은 거르지 않았는지 잠은 설치지 않았는지 / 묻고 또 묻는다 / 하기는 아침에 일어나 / 햇빛이 부신 걸로 보아 / 밤사이 별일 없긴 없었는가 보다 /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 이제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다.-나태주의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그리움은 공백에서 헤어나오려는 존재의 부대낌이다. 보이지 않는 그대 사랑을 향해 부단히 추구하는 붓놀림이고 멈출수 없는 생의 몸부림이다.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강물처럼 흐를 때면 그리움은 무시로 떠다닌다. 둥지 튼 여백을 가슴 깊히 간직하면 진눈개비 내리는 날에도 그대 사랑은 따스하다.   죽음과 이별, 고난과 상처의 무게에 짓눌려 못질 하듯 오늘을 살아도 그리움으로 비워둔 화선지에 눈물 대신 작은 점 하나 찍는다.   그대 사랑은 비어 있는 하늘의 끝자락에서 펄럭인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눈물 눈물 대신 가슴 저미 새벽 종소리

2024-10-29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낙엽지고 눈 꽃 내리는 날엔

‘내 그대를 생각함은 /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에 /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 (중략)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 중에서   과거는 흘러갔다. 울고 불고 뉘우치고 후회해도 과거는 까맣게 세월의 강 저편으로 떠나갔다. 과거는 아픈 상처로 할키고 지나갔지만 빛바랜 일기장 속에 한떨기 백합과 진홍빛 장미향기, 혹은 말린 나무잎새로 추억의 창고에 남는다.   큰 맘 먹고 수 년째 미루고 또 미뤘던 가족 사진첩과 비밀문서 박스 정리를 단행했다. 사는 게 얼마나 바쁘고 힘들었으면(?) 이토록 뒤죽박죽 헝클어놓고 살았을까! 남들이 안 보기 천만다행이지 깔끔떨기로 유명한 얼굴에 먹칠 할 뻔했다.     애들 사진은 열심히 찍기만 하고 사진첩에 올라가 정리된 건 국민학교 때까지가 전부, 애들이 필요할 때 뽑아가서 이빨 빠진 째 미완성인 사진첩이 수두룩하다. 찌그러진 박스 비닐봉지에 담긴 사진들은 분리수거 하는데 수 일이 걸렸다.   오! 이 아름다운 과거로의 회귀. 하나 둘 사진을 정리하며 젊은(?) 느티나무가 돼 그 아름다운 순간들에 머물고 싶어 몸부림쳤다. 이렇게 젊고 행복한 날들이 있었구나! 까맣게 잊고 살았었다. 이토록 가슴 사무치게 아름다운 어제가 있었다는 걸. 순간이 영원이 되고 어제가 오늘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증표로 남겨두지 않았다면 마음의 창고 속 빛바랜 추억을 생생하게 짚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대강 서둘러 안 챙기고 즐기며 끝낼 생각을 한다. 종목 별로 분류해 일단 좋은 사진은 스캔해서 컴퓨터에 저장한 뒤 CD로 구워 애들에게 보낼 생각이다.   비밀문서함은 가슴 떨려 뚜껑만 열어보고 곧장 닫았다. 그기엔 보고 싶은 사람들이 보낸 그리운 편지와 깨알 같은 사연들이 담겨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의식은 마음의 세계 중에서 대략 10%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 얄팍한 의식의 헷갈리는 작용으로 지옥과 천국을 오가며 산다.   ‘레몬 실험’은 마음의 작용과 상태가 신체적 생리적인 물리적 현상을 초래한다는 학설이다. 레몬을 생각하고 레몬의 색깔과 촉감, 레몬의 속, 그 냄새가 어떤지를 떠올리면 입 속에 침이 돌게 된다. 이처럼 무엇을 생각하면 마음이 가는 곳으로 에너지가 작용하고 이 에너지의 작용은 물리적인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마음 가는 곳에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담은 그리움의 텔레파시가 작동한다. ‘추억 속 기행’은 세파에 지친 힘든 오늘을 추스리고 내일 향해 용기 잃지 말라는,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텔레파시의 의식이 아닐런지!   낙엽 흩날리고 눈 꽃 내리면 사랑의 편지를 쓰리라. 수취인 없어도 내일로 날아가는 편지를 쓰리라. 사랑이 꽃 피고 진다 해도 눈 꽃으로 살아남아 영롱하게 빛나는 어제를 기억하리라. 사철 따라 피고 지는 추억의 집짓기에 몰두하리라. 떠난 사람 때문에 울지 않으리. 다시 만날 사랑을 그리워하며 시공을 초월한 그대를 만날 때까지, 앞을 가로막는 오늘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리라. (윈드화랑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촉감 레몬 레몬 실험 가족 사진첩

2024-10-22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홀로 망루에 올라

‘바람은 세차고 하늘은 높은데 원숭이 슬픈 울음소리 들리고(風急天高猿嘯哀) / 푸른 강물 하얀 모래톱에 새들이 날아든다(渚淸沙白鳥飛廻). / 끝없이 늘어선 나무들은 우수수 낙엽을 떨구고(無邊落木蕭蕭下) / 장강은 쉬지 않고 도도하게 흘러온다(不盡長江滾滾來). / 만리 타향 쓸쓸한 가을에 이 몸은 항상 나그네 (萬里悲秋常作客) / 한평생 얻은 병을 안고 홀로 높은 대에 오른다. (艱難苦恨繁霜鬢) / 힘들고 어려운 세월에 흰머리 털 무성하고(艱難苦恨繁霜鬢) / 늙고 쇠약해져 이젠 술조차 끊어야 할 지경이다 (潦倒新停濁酒杯).’   두보(杜甫, 712-770)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칠언율시 ‘높은 臺에 올라’는 고향에서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기주에서 중양절을 맞은 두보가 병든 몸을 이끌고 혼자 높은 누각에 올라서 느끼는 감회를 읊은 시다.   중국 최고의 시인, 시성 두보는 이 시를 지을 즈음에는 폐병에 걸렸는데 여기서 보낸 2년간 동안 그가 남긴 1400여 작품 중 437수를 집필했다.   ‘만리비추(萬里悲秋)’는 만리 떨어진 타향에서 가을을 슬퍼한다는 말이다.     슬프지 않는 삶이 있으랴. 사계 중에 가을 바람은 유난히 심장을 뚫고 지나간다. 땅과 하늘을 무자비하게 초토와 시킨 허리케인도 가을이 오는 길을 막을 수 없다. 가을 바람에 우수수 잎이 진다. 단풍나무는 푸르고 높은 하늘 향해 작별의 손 흔들며 군데군데 붉은색 얼룩으로 잎새를 물들인다. 매끈하게 등이 굽은 고추는 립스틱을 짙게 바른 새색시처럼 잎새들 사이에 요염하게 숨어있다.   한국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며칠째 잠을 설친다. ‘한강’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선하고 강단 있어보이는 여류작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부끄럽고 민망하다. “나의 소설 쓰기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란 말을 믿고 그녀의 소설을 열심히 읽고 공부할 생각이다.   2006년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작가 중에 노벨상수상자가 나오길 간절히 기대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황석영도 이문열도 아닌 여성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니, 말 많은 사람들의 시비는 분분하다.     흘러간 물로는 배를 띄울 수도 없고 새 역사를 쓸 수 없다.   젊은 시절 한 때 이문열 작가의 작품에 몰두했다. ‘사람의 아들’ ‘황제를 위하여’ ‘젊은 날의 초상‘ ‘영웅시대’ ‘금시조’를 읽으며 한국작가의 노벨상을 꿈꾸었고 ‘레테의 연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가 출간되고부터 기대를 접었다.   사무치던 젊은 날의 가난과 한풀이 하듯 삼국지로 번 거금으로 부악문원을 짓고 고향에 ‘이문열 기념관’의 다른 이름 ‘광산(匡山) 문학연구소’를 설립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글쓰기를 제외한 모든 활동은 소모이고 악재일 뿐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번역 출간 되었지만 미국에서의 반응은 미미했다.   언제부터인가 망루에 혼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지 않는다. 망루는 방어용 감시용으로 지은 전망대다. 대학 은사님, 선배 작가, 어른들 소식 알기가 두려워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는다. 신장암 수술 후 3~4년간 투병, 치매 경고 받아 명사 찾기가 힘들다는 이문열 기사를 읽는다.     ‘새는 죽을 때 그 소리가 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 그 말이 착하다.’ 장편소설 ‘황제를 위하여’에 나오는 멋진 문구다. 선하게 살다 착하게 죽는 것은 축복이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망루 노벨문학상 수상 가을 바람 만리 타향

2024-10-15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어리석은 자의 변명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매일 걱정하며 산다. 생각나는 가능성을 콩알처럼 펼쳐 놓고 지레 걱정하며 산다. 혹시 사고가 나지 않을까, 넘어져 다치지나 않을까, 애들은 잘 지내는지, 신용카드를 누가 도용하지 않았을까, 잔고가 엄청난 것도 아닌데 누가 빼갔나 확인하고, 혹시 스팸 이멜에 속아 넘어갈까 걱정이 태산이다.   뒷마당에 누렇게 잎이 마른 나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걱정이고, 허리케인에 옆으로 쓰러진 코스모스는 씨는 언제 받나 애가 탄다. 가을 바람에 풍성하게 자란 채소들은 시들기 전 빨리 먹어야 해서 안절부절이다.     세상에 마음 편하게 굴러 가는 것은 없다. 열심히 걱정한다고 일어날 일이 안 일어나지 않는다.     내게 가장 약한 고리는 참을성이 없는 것이다. 보이는 것만 보고 피상적인 것, 겉으로 드러난 것에 즉각 몰두한다. 피상적 매력(Superficial charm)에 필이 꽂히면 물 불 안 가리고 덤벼들어 사고 칠 확률이 높아진다.   어릴 땐 생각에 몰두해 앞을 안 보다가 넘어져 무릎 성한 날이 없었다. 나이 들면서 운명적인 만남에 목숨 걸었지만 제대로 된 사랑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돈키호테식 발상, ‘예술가적 방랑끼’라고 치부 하기에는 청춘시절의 기록은 변명의 여지없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플라톤이 쓴 대화편 중 하나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들을 철학적 입장에서 변론한다. 자신이 신을 밎지 않는다는 혐의에 대해 “신탁(Delphi Oracle)이 자신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했다”며 사람들이 자신이 알고 있지 않은 것을 안다고 착각하는 것을 깨달았으며, ‘자신이 아는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 진정한 지혜라고 주장한다. 젊은이들을 부패시켰다는 혐의는 그들이 자발적으로 따랐으며 진리를 추구하도록 격려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정의를 위해 죽는 것은 두려워 할 일이 아니며 죽음은 무의식 상태거나 다른 세계로의 이동일 수 있으며, 어느 쪽이든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한다.   제자 크리톤이 소크라테스에게 탈옥을 권유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법이 부당하게 느껴질지라도 시민으로서 법을 따를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죽음 직전 마지막 대화를 기록했는데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일 뿐 철학자는 죽음을 준비하고 탐구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세상에는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가 있다. 지혜로운 자는 할 말이 있을 때 말을 하고 어리석은 자는 말을 하기 위해서 말을 한다. 어리석은 자는 잘못을 잘못인 줄 모르고, 잘못인 줄 깨달아도, 누가 알려주어도 고치지 않는다.   후회는 어리석은 자의 변명이다. 인생은 체념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체념은 포기하고 방관하는 것이고 극복은 한계를 뛰어넘는 노력이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제일 잘 안다. 쓸 데 없는 일에 목숨 걸다 자빠지고, 꼭 해야 할 일은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다 때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며 산다.   어릴 적 줄넘기를 할 때 늘 걸려 넘어졌다. 땅에 줄이 닿는 순간을 포착해 힘차게 뜀박질 해도 소용없었다. 줄이 땅에 닿기 전에 공중으로 몸을 날려야 하는 것을.   이젠 줄넘기를 하지 않는다. 남이 던지는 줄에 걸려 쓰러지지 않는다. 사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어리석은 자의 변명은 끝이 없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변명 자의 변명 돈키호테식 발상 죽음 직전

2024-10-08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이 가을엔

이 가을엔 / 처음 듣는 언어를 배우려 하오 / 서로 다른 몸짓으로 / 움직이는 나무 그늘 아래 / 열병을 앓으며 붉어지려 하오 / 가까이 바라보는 계절 속에서 / 잃어버린 것들을 찾으려 하오 // 이 가을엔 / 여린 색들을 잃은 후 / 잘리고 떨어진 자리마다 / 검고 딱딱한 살이 돋고 / 다른 얼굴로 말을 걸어오는 / 답답한 우울을 벗으려 하오 // 이 가을엔 / 푸른 잎 흔들며 이별을 물어오는 / 가을 숲으로 떠나려 하오 / 매달려 흔들린 시간보다 더 아픈 / 영원으로 맞닿은 노스텔지어 / 붉어지는 계절이 지나는 하늘 가득 / 긴 꼬리 태우는 별똥별 여운 / 빛나지 않음으로, 잊혀져야 하는 / 빠르게 결론지으려는 조급함에서 / 작은 일도 오랜 시간과 과정을 거쳐 / 되는 일임을 배우려 하오 // 이 가을엔 / 꽃 피우고서도 한참 지난 후에야 / 열매 맺는 과일나무처럼 / 두 번의 생명을 한 계절에 피우고서도 / 붉은 마음 장렬하게 토하는 / 삶의 뒤안에서 너 하나만을 위해 / 하늘 언어로, 붉게 물든 온몸으로 / 긴 여행을 떠나려 하오       가을이 오는 언덕에는 벌써 황톳빛 갈대가 바람에 온몸을 잔뜩 누입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가을 향기는 코끝을 스쳐 잠긴 마음의 문을 열게 합니다. 지난 계절의 더위와 끈적이던 피부의 물기를 단번에 증발해 줍니다. 생각하기 싫었든 아니 생각나지 않았든 잃어버린 기억의 순간들을 되찾고 싶습니다. 이른 아침 잠깐 내린 비로 하늘은 까마득히 높아지고 하늘하늘 흔들리는 나무의 잎들은 아침 햇살에 눈부십니다. 맑고 깨끗해진 거리의 잔디와 가을 국화와 코스모스도 한결 푸르게 살아납니다. 이렇게 걷다 보면 말끔히 얼굴을 씻은 호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호수에 비칩니다. 호수를 돌아 나지막한 언덕을 오릅니다. 여린 노란색으로부터 진홍의 열정, 타오르는 듯 붉은 단풍까지 물들기 시작한 언덕에 서서 바라볼 수 있는 숲은 아름답습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숲의 겸허한 마음에서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웁니다.     나무는 정직합니다. 속살까지 시원해지는 아침 바람은 나뭇잎의 색깔을 바꿔놓습니다. 봄날 피어날 연두의 새잎을 위해 붉게 익어가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자신을 내려놓을 준비를 합니다. 사람보다 먼저 알고 사람보다 먼저 행동합니다. 사람보다 먼저 깨어나 가을비를 맞고, 사람보다 먼저 익어갑니다. 앙상해진 나무, 잎을 떨군 자리마다 검고 딱딱한 잎눈을 만들고, 가지의 어딘가엔 꽃눈을 만들어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저 서 있는 나무가 아니라 숨겨진 뿌리로부터 끊임없이 물을 찾아 잔뿌리를 내리고 마른 줄기에 수분을 공급합니다. 어느 봄날 연둣빛의 기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랜 시간을 거쳐 만들어집니다. 작은 일에도 참지 못하고 지금 당장 결말을 지어야 편안한 사람의 생각보다 깊고 뜨겁습니다.     이 가을엔 잃어버린 나를 찾으려 합니다. 모든 일을 빠르게 결정지으려는 조급함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불평 없이 그 자리를 지켜온 언덕 나무를 찾아가 배우려 합니다. 별똥별의 긴 꼬리가 사라지는 밤하늘을 봅니다. 보이는 것만으로 다 안다고 말하는 오류를 벗고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행하는 빈들의 기적, 뿌리를 기억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있기에 당신이 있고, 내가 없다면 당신도 없다는 내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숲을 찾아가 무리 지어, 혹은 외로이 자신을 드러내는 들꽃을 만나보겠습니다. 이 가을엔 사람의 언어보다 땅의 언어, 하늘의 언어를 배우고 싶습니다. 춤추고 노래하고 당신과 함께 긴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가을 가을 향기 가을 국화 하늘 언어

2024-10-07

저 하늘 흐르는 별빛 은하수를 님과 함께

별이 빛나는 높은 곳을 우러러 보는 것은 이전 세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현대인들도 하늘 높은 곳에 있는 별과 은하를 올려다 보는 신비로운 경험이 가능하다. 다만 우리 은하의 모습, 은하수는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도시의 불빛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은하수가 물 흐르듯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시니어 들은 아치스 국립공원 등에서 가능하다. 몇 곳을 알아본다.     은하수 '직관'은 도심의 인공 조명에 방해 받지 않고 어둠의 바다에서 별이 빛나는 밤을 보는 것이다. 미국인의 80%가 집에서 은하수를 볼 수 없는 광공해 때문에 흔치 않은 기회다. 미국에서 자연을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전국의 63 개 국립공원 중 16 곳이 밤 하늘 여행지로 꼽힌다.     직관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16곳의 국립공원이 제공하는 천문 축제, 레인저가 안내하는 보름달 산책, 별 파티, 천체 사진 워크숍 등의 전문적인 별보기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국립공원에서 직관을 원한다면 7x50 쌍안경, 야간 시력을 향상시키는 빨간색 손전등, 하늘의 별 배열을 보여주는 별자리표를 휴대하는 것이 좋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별을 바라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경외감은 정신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려면 어두운 하늘 공원에서 캠프를 차리는 것도 추천할 만 하다.         ▶아치스 국립공원(유타)   천문 애호가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 바로 유타주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밤 하늘 국립공원을 보유하고 있다. 아치스(Arches), 브라이스, 캐니언랜즈, 캐피톨 리프, 자이온 등 5개의 국립공원이다.     아치스는 2000개가 넘는 특별한 사암 아치로 두드러지며, 머리 위에서 펼쳐지는 천체 쇼를 위한 극적인 배경을 형성한다. 아치 아래로 별빛이 보이는 사진을 한번 쯤 봤을 법하다. 가장 좋은 관측 장소는 남쪽의 모압의 불빛을 피하고 북쪽의 밸런스드 록 피크닉 구역, 에덴 동산 전망대, 파노라마 포인트 또는 윈도 구역이 좋다. 적절한 조건이라면 표준 쌍안경으로 토성의 고리를 볼 수도 있다. 레인저가 방문객에게 밤하늘의 경이로움을 소개한 다음 별을 관찰하고 망원경을 관찰하는 레인저 주도의 천문 관측 프로그램은 여름에 진행된다. 이러한 이벤트는 아치스와 인근 캐니언랜즈에서 번갈아 가며 진행되고 있다.         ▶빅 벤드 국립공원(텍사스)   텍사스 남서부에 있는 이 광활한 공원은 외딴 사막 지역과 낮은 습도 덕분에 미국 본토의 모든 국립공원 중에서 광공해가 가장 적다.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이 모여 밤하늘을 관찰하는 빅 벤드의 별 파티에 참석하거나, 가이드와 함께 달빛 산책을 하거나, 쌍안경을 사용하여 유성우, 별자리 관찰 또는 은하수 직관을 즐길 수 있다. 맑은 밤에는 250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은하를 포함하여 수많은 별이 눈부시게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브라이스 캐년 국립공원(유타)   세계에서 가장 큰 후두(불규칙적인 바위 기둥) 컬렉션과 미국에서 가장 어두운 밤하늘을 결합하면 마치 마법처럼 보인다. 브라이스에서 은하수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빛 호를 그리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수천 개의 별이 공원의 암석 지대를 비춘다.     파크 레인저, 자원 봉사 천문학자가 매년 100개의 천문학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여기에는 레이저를 든 레인저가 밤하늘에 보이는 별자리를 가리키는 별자리 투어, 달빛이 후두에 빛을 더하는 1~2마일 보름달 하이킹이 포함된다.         ▶데스밸리 국립공원(캘리포니아)   미국에서 가장 건조한 국립공원인 340만 에이커에 달하는 사막은 별을 감상하고 운이 좋다면 유성을 관찰하기에 이상적인 환경이다. 데스밸리의 밤은 너무 어두워서 최고다. 광공해가 매우 낮아 '도시가 생기기 전에 볼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한 경치'를 볼 수 있다.     데스 밸리에서 보이는 많은 천체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육안으로 볼 수 없다. 매년 봄에 열리는 다크 스카이 페스티벌이 있다. 특별 레인저 프로그램, NASA와 같은 기관의 초대 연설자, NASA, 캘텍, SETI 연구소 등의 과학자들이 방문객을 시범으로 참여시키는 탐험 박람회가 포함된다. 혼자 여행하는 경우 천체 사진작가들이 야간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인기 장소인 배드워터 분지, 하모니 보랙스 웍스, 메스키트 플랫 모래 언덕 또는 자브리스키 포인트로 가볼 수 있다.         ▶그랜드 캐년 국립공원(애리조나)   세계 7대 자연경관 중 하나인 그랜드 캐년이 직관 명소임은 분명하다. 달이 없는 밤에 은하수를 보거나 별 구름, 성운, 유성우, 심지어 화성, 목성, 토성과 같은 행성의 광경에 스릴을 느껴볼 수 있다. 사우스 림의 주요 별 관찰 장소로는 은하수를 배경의 이미지를 찍을 수 있는 메카인 데저트뷰 워치타워(Desert View Watchtower, Mather Point), 데저트뷰 드라이브(Desert View Drive)가 있다.         ▶그레이트 베이신 국립공원(네바다)   그레이트 베이신 국립공원은 높은 고도와 낮은 습도로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 미국 국립공원에 지어진 최초의 연구 등급 전망대인 그레이트 베이신 전망대에서 희귀한 심우주 관측을 제공한다. 방문객이 가장 적은 국립공원 중 하나로서 2022년 방문객이 14만2115 명에 불과했다.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는 가운데 밤하늘을 감상할 수 있다.   맑고 달이 없는 밤에는 베이커 천문사이트(Baker Archaeological Site)와 마더 오버룩(Mather Overlook)과 같은 인기 있는 관측 장소로 가서 수많은 별, 행성 유성우, 인공 위성, 안드로메다 은하와 은하수를 감상할 수 있다.         ▶보야저스 국립공원(미네소타)   캐나다 국경 근처의 이 외딴 수상 공원에서 빛나는 것은 별 뿐만이 아니다. 운이 좋으면 오로라 보레알리스가 푸른색, 녹색, 보라색, 빨간색의 반짝이는 줄무늬로 밤하늘을 밝힌다 . 희귀한 빛 현상은 예측할 수 없지만, 겨울의 긴 밤은 현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높아진다. 북극광을 관찰하는 동안 은하수, 위성, 국제 우주 정거장, 유성 및 기타 천체를 볼 수 있다.   장병희 기자은하수 하늘 하늘 국립공원 은하수 직관 모습 은하수

2024-10-06

[문예마당] 가을 소고

어머니의 묘소를 내가 사는 근교 공원묘지에 모셔 놓고도 여름 내내 한 번도 찾아가 뵙지를 못했다. 어머니는 생전에 “나는 너 오기만 기다린다”며 늘 현관 밖에서 나를 기다리곤 하셨다. 추석에 가족들과 함께 산소를 찾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나 혼자 먼저 어머니를 찾아가 ‘모녀 타임’을 가져야 할 것 같아 어머니가 생전에 좋아하시던 커피와 국화꽃 한 다발을 사 들고 산소로 향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공원묘지에는 변화가 있었다. 묘지 확장을 위한 개발공사가 한창이었다. 지난여름 세상을 떠난 많은 사람이 사각 모양의 비석을 이고 죽음의 선배들과 함께 잠들어 있는 광경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였다. “아니, 이렇게나….” 놀라며 쭉 둘러보는 새 비석 가운데는 무슨 연유인지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사람이 꽤 많았다. 사람이 세상에 올 때는 순서대로 오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순서 없이 간다는 말이 새삼 실감 났다.     올여름에는 유난히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고, 불경기를 지나면서 광란의 총기 앞에 무참히 생명을 빼앗긴 사람도 적지 않았다. 부고가 끊임없이 이어지던 여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공동묘지는 고금의 사람들이 같이 사는 장소다. 먼저 간다고 아쉬워할 것 없고, 뒤에 간다고 좋아할 것도 없다. 앞으로 같은 장소에서 같이 살게 될 것이므로…. 수없이 깔린 묘비를 둘러보면 인간의 죽음이란 가을 나무에서 하나, 둘 떨어지는 낙엽과 다를 게 없는 자연의 조화라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내용의 묘비명을 읽어 보면서 책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묘비명들이 떠올랐다. 헤밍웨이는 아내의 묘비에 “조용히 걸어 가시요. 이 사람이 발자국 소리에 놀라 잠이 깨는 날이면 나는 또 이 사람에게 바가지를 긁힐 테니까요”라는 글을 새겼다고 한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끝날 줄 알았지”다.     또 스탕달의 묘비에는 “살았노라 썼노라 그리고 사랑했노라”고 쓰여 있고, 교육의 성자 페스탈로치의 묘비엔 “모든 것은 남을 위해서였으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글이 있다. 그런가 하며 미국 국립묘지에 있는 무용용사 묘비에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미국의 무명용사가 이곳에 명예롭게 잠들다”라고 적혀 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주먹을 쥐고 간 사람”이라는 재미있는 내용의 묘비명도 있다고 한다.     이날 읽어본 묘비명 중에는 “아! 어머님”이라는 짧은 절규가 가장 찡하게 와 닿았다. 묘비명은 망자의 유언에 따른 그의 좌우명일 수도 있고, 자손들이나 지인들이 그의 공덕을 기려 새기기도 한다. 어떻든 묘비에 새겨진 글은 살아서 행동했던 죽은 자의 명함이고 얼굴이다.   오랜만에 어머니 곁에 앉으니 함께 한 모녀의 세월을 뒤돌아보게 된다. 자식을 위해 헌신하신 어머니의 거룩한 모정에 그리움이 가득 차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평생을 기다림의 시간만 안겨 드렸던 불효를 아픔으로 반성한다. 죄송하다, 미안하다, 보고 싶다는 말을 속으로만 삼키고 있을 때 “얘야, 괜찮으니 마음 편히 가져라.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제시간에 오지 않는다는 것을 난 알고 있단다 ”하는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아 사방을 돌아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어느덧 가을이 와 있었고 , 길게 가을 구름이 깔렸다.   가을은 대기의 열을 식힌다. 가을 하늘 아래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은 경이롭다. 아직은 단풍이 들지 않고 무성한 잎들이 떨어지지 않고 있지만 곧 가을이 깊어지면 모든 것은 떨어지며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네 인생도 가을 낙엽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때가 되면 우리도 흙으로 돌아간다. 가을이 오면 우리의 정서는 으레 허망함과 쓸쓸함, 애상과 애수를 느끼지만 가는 세월이나 자연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늘이나 나무,숲, 자연은 자기의 모습을 그대로 꾸밈없이 보여 줄 뿐이다.   자연은 꾸미지 않는다. 있는 것을 없는 척, 없는 것을 있는 척, 추한 것을 아름다운 척 치장하거나 위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굳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고 애쓰며 서두르지도 않는다. 때가 되면 싹이 트고, 잎이 지고, 꽃이 핀다. 자연이 위대한 것은 바로 이런 자연스러움이고 또 그 자연스러움이 겸손이다. 겸손은 자연처럼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도시의 문명에 휩쓸려 우리는 중요한 것을 까맣게 잊고 살 때가 많다. 그런 우리에게 가을은 어떻게 살고 어떤 죽음을 남겨야 하는가를 낙엽을 통해 가르침을 주며 인생을 생각하고 배우라고 한다.     슬기로운 눈을 떠 자신을 다시 살펴보게 하는 은혜로운 계절이다. 낙엽처럼 나도 누군가의 아름다운 배경이 되고 뒷받침이 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싶다. 노력해야겠다는 의욕이 바로 소망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원천이 될 것이다. 겸손으로, 따뜻함으로, 온유함으로 곱게 물든 인간 단풍이 되어 사람들 가슴에 그리움으로 오래오래 간직되고 싶다는 기도를 이 가을에 드리고 싶다. 김영중 / 수필가문예마당 가을 소고 가을 낙엽과 가을 소고 가을 하늘

2024-10-03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죽을 힘을 다해 산다

있다가 없어지면 여간 불편하지 않다. 처음부터 없이 살면 힘든 지 모른다. 사랑도 불태우다 꺼지면 재가 되지만 사랑을 안 해본 사람은 그냥 그렇다. 원래 내 것이 아닌 것들은 남의 것이다. 내 손에 없다고 한탄 해도 소용없다.   세상에 이런 일이! 미국을 강타한 허리케인 여파로 비와 강풍이 몰아쳐 16시간 지속되는 정전사태가 발생했다. 먹거리가 쌓여 있는 냉장고와 냉동실은 음식이 상할까 봐 문 안 열기 작전으로 버티며 하루 종일 라면 끓여먹고 연명했다.   허리케인 ‘헐린’이 미국 남부 멕시코만 해안 지역을 강타하면서 곳곳에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허리케인(Hurricane)은 대서양 서부•카리브 해•멕시코 만이나 북태평양 동부에서 발생하는 강한 열대 저기압으로 태풍처럼 강한 바람과 많은 비를 동반한다. 이번에 미국을 강타한 헐린의 경우 시속 241㎞ 강풍을 동반해 최소 14명이 사망하고 60만여 가구가 정전 피해를 봤다.   허리케인이 미 중서부를 강타할 확률이 낮아서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지내다 혼 줄이 났다. 한풀 꺾이자 ‘산 사람은 먹어야 산다’며 김치찌게를 끓여 주린 배를 채운다.   정전(Power outage)이 발생하면 적막강산!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인터넷이 끊기고 텔레비전 유튜브 불통으로 모든 것이 깜깜해진다. 손전등 찿아 화장실과 긴급 상황 발생할 곳에 촛불을 배치했다. 반나절은 인내심 테스트 하며 버텼는데 해가 기울자 불안 초조 공포가 밀려온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전기가 없던 시절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삼거리 동네에 전기가 들어온 건 국민학교 입학할 즈음이다. 어둑어둑 해가 지면 대나무 평상에 누워 별을 헤다가 옥이 언니가 꾸며낸 이야기 들으며 잠이 들었다.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잠자리에 드는 생체 리듬에 온 마을 사람들이 충실했다.   폭우가 지나가길 학수고대하다 지쳐서 각박할 때 용기를 주는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읽기로 한다. 딸 졸업 선물로 간 파리여행 때 마레(Marais) 지구에 있는 빅토르 위고의 집을 방문했다. 사랑, 용기, 희생, 인간 본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룬 프랑스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이며 서양 문학사의 가장 위대한 소설로 평가받는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을 이 곳에서 집필했다.   1851년 12월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1808~1873)가 쿠데타를 일으켜 제정을 선언하자, 반정부 인사로 찍힌 위고는 벨기에로 피신했다. 이 망명기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깊이 있는 때였고 파리에 돌아온 후 발표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이 시기에 집필됐다.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헌신과 사랑을 담은 대하소설 레 미제라블은 200여 나라에서 출간됐다. 불멸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시대를 정의하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개인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소설은 역사는 무엇이며, 누가 역사를 만들고, 역사는 누구에게 일어나며, 개인은 역사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묻고 있다. ‘그는 잠자네. 비록 그의 운명이 기구했지만 그는 살았네. 자기의 천사가 없어지자 그는 죽었네. 올 일은 오고야 말았네. 마치 낮이 지나 밤이 오듯이.’ 비와 먼지로 퇴색한 주인공 장발장의 묘비에 적힌 4행시로 레 미제라블은 끝을 맺는다.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어둠을 밝히는 것은 낡은 전등의 가는 철사줄이 아니라 ‘태양으로 연결된 빛’이라는 생각을 한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허리케인 여파 빅토르 위고의 사랑 용기

2024-10-01

[손원임의 마주보기] 나와 조지아 오키프의 하늘과 구름

나는 참 하늘을 자주 본다. 특히 비행기를 타면 하늘과 구름, 땅과 바다와 집들을 보며 저절로 감탄을 쏟게 된다. 그리고 내 앞에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언젠가는 ‘잘 그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러고는 높은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크고 작은 구름의 모양들이 조금씩 정말 천천히도 변하다가, 또는 어쩌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모습들에 이내 기가 확 질려버려 창문을 내려버리고는 눈감고 잠을 청하게 된다. 그리고 다 잊어버리기가 일쑤다. 나는 결국 항상 그림에 대한 집념도 끈기도 노력도 모자랐던 것이다.     창의성의 기본 요인 중 하나는 의외의 상상력이다. 그런데 나는 창의성에는 상상력 외에도 관찰력과 집념과 끈기와 노력이 상당히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더해서 남의 시선에 미련을 갖지 않고 도전할 수 있는 대담성과 용기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걸작을 탄생시킨 미술가들에 대해서 저절로 찬사를 외치게 되고, 창조성에 대한 영감을 거듭 받으며 “정말 훌륭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의 작품이 이런 면모들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리라. 물론 이런 예들은 미술뿐만이 아니라 다분야의 예술가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지난 7월 21일, 아주 오랜만에 다운타운의 시카고 미술관(The Art Institute of Chicago)에 갔다. 그 방문의 주된 목적은 거기서 개최한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1986)의 미술전을 관람하는 데에 있었다. 그녀는 미국 모더니즘의 대표적 화가로서, 1985년 레이건 대통령에게서 예술훈장(the Medal of the Arts)을 받았다. 그날 내가 방문한 미술전의 제목은 Georgia O’Keeffe: “My New Yorks”이였다.     사실상 나는 위스콘신 대학교(플랫빌)에서 아이들의 창의성 발달과 교육에 대해서 가르칠 때, 오키프가 미술교사였기도 했지만, 또 위스콘신 태생이라는 이유로 더욱 친근감을 갖고, 그녀의 예술 작품을 교과 내용에 포함시켰었다. 그녀는 특히 큰 꽃 그림, 즉 클로즈업 꽃 그림들로 유명한데, 이는 멀리서 바라본 꽃들의 전체 모습이 아니라, 마치 ‘벌의 관점(a bee’s perspective)에서 보는 마냥, 매우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본 꽃 한 송이의 세밀한 형태와 이미지를 포착한 것이다. 또한 그녀는 주변의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즉 꽃을 포함해서 사막, 언덕, 하늘, 산, 호수, 두개골, 동물의 뼈 등이 그녀 그림의 소중한 재료였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그녀가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를 넘나드는 추상적 신비주의 예술가로 느껴진다. 그녀는 한마디로 시대적 한계와 경계를 넘어뜨린 철저한 ‘자유주의자’였다. 그리고 이에서 더 나아가 시카고에서 열린 미술 전시회는 오키프 예술 작품의 깊이를 한층 더 부각시켜 주었다. 그녀는 뉴욕 호텔 등지에서 거주하며 관찰한 주변 환경과 소재들을 캔버스에 자신의 독특한 관점으로 아름답게 담아내었다. 즉 그녀는 그 당시의 마천루, 거리의 가로등, 하늘, 구름, 달들을 잘 조화시켜 뉴욕의 도시 모습을 매혹적으로 표현했다.     다시 내가 자주 쳐다보는 하늘로 돌아가보자. 오키프의 유명한 작품 중에는 구름 위의 하늘(Sky Above Clouds) 시리즈가 열한 점이 있다. 시카고 미술관에도 그 중 한 점인, Sky Above Clouds IV가 소장되어 있다. 이는 그녀가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그녀의 말년에 이루어낸, 하늘의 구름 풍경을 표현한 그림들이다. 그녀의 예술에 대한 열정은 정말 과연 놀랍다! 물론 그녀는 예술 교육을 받은 전문적인 예술가이지만, 나도 그녀와 똑같이 비행기를 많이 타고 다녔어도, 아직도 구름 한 점 그리기가 두렵고 어렵다. 내가 복잡하게 생각한 구름을 그녀는 어찌 보면 아주 간단한 모양의 반복으로 잘 묘사했다. 여기서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대담성과 용기, 그리고 관찰력, 집념, 꾸준함과 노력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참으로 조지아 오키프는 독특한 상상력을 넘어 창의성의 여러 진면모를 뼛속 깊이 생생하게 살다 간 98세의 장수 할머니 예술가였다. 그래서 그녀가 남긴 “용기가 있어야 자신의 예술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를 더욱 더 기백과 개성 있는 삶으로 인도한다.  (전 위스콘신대 교육학과 교수, 교육학 박사)       손원임손원임의 마주보기 조지아 오키프 조지아 오키프 오키프 예술 가로등 하늘

2024-09-24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슬픔과 고통 속에 빛나는 태양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어떤 것에 몹시 놀란 사람은 비슷한 사물만 보아도 겁을 낸다. 내가 끔찍이 싫어하는 건 지렁이 뱀 등 땅에 기어다니는 환형동물이다. 마른 나무가지나 꾸부정한 실 꽁지만 봐도 기겁하고 놀란다.   현풍 할매 곰탕으로 소문난 읍내에서 한 정거장을 더 가면 초갓집이 버섯처럼 옹기종기 붙은 삼거리동네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좁은 논두렁 따라 갈매기처럼 줄지어 갈 때는 등에 매달린 보자기 속에서 양은 도시락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다들 냅다 잘 내빼고 달리기도 잘 하는데 난 왜 항상 꼴찌였을까. 한 여름을 달군 땡볕이 뺨을 빨갛게 달구던 오후, 촐랑촐랑 딴 생각하며 집으로 오는 길에 뭔가 미끄덩하는 순간 나자빠졌는데 논두렁에 똬리 튼 뱀을 밟은 것.   엄마 등에 업혀 집에 왔는데 밤새 “뱀 잡자” 헛소리를 하고 앓았다. 기억은 몽롱 하지만 스르르 몸을 풀며 논으로 들어가는 뱀을 본 것 같다. 지금도 뱀 그림만 봐도 소름이 끼치고 지렁이나 땅에 기는 것들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공포증(Phobia)은 불안장애의 한 요인으로 특정 대상이나 상황에 공포증을 느껴 오한 발열 경련 어지러움 두근거림 구역질 등의 증상을 나타낸다.   타나토포비아(Thanatophobia)는 죽음에 대한 공포증, 자신 또는 주변 인물의 죽음과 존재의 상실에 대한 공포를 말한다. 죽음만큼 더 고통스러운 기억은 없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멈춰선 나는 죽을 것만 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핏빛 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가 있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다.’ 뭉크가 1892년 1월에 남긴 ‘절규’에 관한 글이다. ‘절규’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정신병원 근처 바닷가 길로 정신질환으로 입원해 있던 뭉크의 누이동생 로라 카트린느를 만나기 위해 드나들었던 정신병원으로 가는 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의 명성에 비해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는 오슬로 시 소재 뭉크 미술관에서 핏빛 하늘과 불타는 구름, ‘절규’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얼마나 더 큰 고통 속에서 허덕이고 절규하며 공포에 시달려야 생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를 근심했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국민화가 에드바르 뭉크는 생과 죽음의 근원에 존재하는 고독, 질투, 불안 등을 담은 표현주의 화가의 선구자로 꼽힌다. ‘나는 날마다 죽음과 함께 살았다’고 고백할 만큼 뭉크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을 안고 산다. 5살 때 결핵으로 어머니와 사별하고 9년 후 사랑하는 누이 소피가 죽고 뭉크도 결핵에 걸려 죽음의 공포와 망상에 시달린다.   정신병원에서 장기간 치료를 받는 동안 뭉크는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보고 큰 충격과 위로를 받고 노르웨이의 자부심이 된 ‘태양(1911년, 캔버스에 오일, 455x780cm, 오슬로대학교 소장) 시리즈을 제작한다. 오슬로대학 창립 100주년을 맞아 그린 대형 벽화 ‘태양’은 노르웨이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뭉크의 얼굴이 그려진 노르웨이 화폐 1000 크로네의 뒷면을 장식한다.   불안과 우울함이라는 삶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도 생명과 희망의 빛을 포기하지 않았던 뭉크는 절망보다는 희망을 노래한다. 슬픔과 고통 대신 눈부신 희망을 담아낸 뭉크의 태양처럼 내일은 내일의 찬란한 태양이 또 다시 떠오른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고통 태양 공포증 자신 에드바르 뭉크 오슬로대학교 소장

2024-09-24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하루 한 뼘씩 자라는 잎새들

무식이 하늘을 찌른다. 각종 모종 얻어 심은 한국 고추가 풍성하게 매달렸다. 요리책에 ‘홍고추’로 고명을 얹으라 해서 내년엔 빨간색 고추 모종 구해달라고 어르신께 부탁했다. “조금만 기다려 봐요. 초록색 고추가 빨갛게 익을테니.” 웃으시는 소리가 들린다. 세상에! 초록색 고추가 하나 둘 빨강색으로 물들었다.   올 여름 유기농 채소 가꾸느라 세월 가는 줄 모른다. 한인 어르신, 이웃 아저씨, 인터넷 뒤지며 연구에 몰두한다. 배우는 것만큼 기쁜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아는 것이 힘이다, 먹어야 산다’를 열창하며 그동안 아는 체하며 까불었던 과거에 고개 숙인다. 애들 키우며 사업하느라 발뒷꿈치가 갈라 터지도록 이리 뛰고 저리 달리느라 ‘흙 밟아 본 적이 없다’는 나의 처절한 변명.   근동에서 땅 부자로 소문난 아버지는 내가 두살 되던 해 돌아가셨다. 논 밭에 나가 본 적이 없던 어머니는 그 때부터 혼신을 다해 농사일에 매달렸다. 머슴이고 집사인 삼만이 아재와 농사꾼들과 함께 하루 종일 밭고랑을 매고 풀을 뽑았다.   유년의 기억 속 어머니는 하얀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무명 소복을 입고 있다. 옥이언니 등에 업혀 밭고랑을 오락가락 하다가 칭얼대면 언니는 핑크색에 동백 꽃무늬가 새겨진 박음질이 촘촘한 포대기를 풀고 어머니 품에 날 내렸다. 어머니 가슴을 비집고 젖줄이 곤고한 젖무덤을 더듬으면 황토색 흙냄새가 스며 들었다.   “현풍댁은 저리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네. 일꾼들만 부려도 잘 먹고 살텐데.” 동네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찼다. 어머니 오른쪽 손목은 모진 호미질로 휘어졌다. 땅은 먹거리를 생산하는 삶의 터전이지만 남매의 미래를 약속하는 희망이였다. 어쩌면 어머니는 청상과부의 한많은 아픔을 매일 땅 속에 묻고 있었는지 모른다.   ‘애들은 자고 나면 한 뼘씩 큰다’며 대청마루 기둥에 어머니는 숯덩이로 금을 그어 키를 쟀다. 자식들이 흙에서 돋은 채소처럼 푸릇푸릇 건강하게 자라 땅 속 깊이 뿌리내리고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 수양버들로 살아남기를 바랬다.   정말이지 텃밭의 채소들은 자고 나면 한 뼘씩 자란다. ‘호박꽃도 꽃인가’란 염려는 무식의 대참사다. 다섯 손가락 벌린 채 관능적으로 굽은 연노란 꽃잎을 밀어내고 매끄럽고 반질반질한 호박이 달린다. 조롱조롱 매달린 방울 토마토는 물주며 군것질 하듯 따먹고 삼만이 아재 주먹처럼 단단한 토마토는 너무 열심히 먹어서 얼굴이 빨게질까 걱정이다. 지중해식단에 몰입해 올리브오일 듬뿍 부어 오븐에 구워 얼리면 겨울내 양식이 된다. 소금에 살짝 간 한 가지는 구워 얼린 뒤 토마토 소스에 마쯔렐라 치즈 뿌려 오븐에 구워내면 멋진 이태리 요리가 된다.   어머니 생전에는 손가락 까딱 안하고 차려주신 음식을 잘 먹었다. 도와드리는 척 폼 잡다가 흡입식으로 퍼먹고 ‘피곤할 텐데 쉬어라’는 말 떨어지기 무섭게 소파에 늘부러졌다. 당신이 떠나면 ‘뭘 해 먹고 사나’ 걱정 되신 어머니는 요리 잘하는 분에게 요리 비법을 전수시키며 딸의 안위를 신신당부 했는데 파토가 났다.   추석이다. 갖은 나물과 전 부쳐 지인들과 나눠 먹던 엄마 생각에 콧등이 찡하다. 궁하면 통한다. 슬픔을 거두고 약식과 감주 만들어 친구들과 먹을 생각을 한다. 음식을 니눠먹는 것은 사랑의 향기를 가슴에 담는 일이다.   최선을 다해 게으름 안 피우고 살게 되기를. 땅을 친구 삼아 머리 숙이는 일에 익숙해지면, 훗날 지구를 향해 홀가분하게 작별의 손 흔들 수 있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잎새들 어머니 가슴 어머니 생전 어머니 오른쪽

2024-09-18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떠나는 시간 붙잡고 울지 말기

시간은 고무줄이다. 늘어나고 줄어든다. 하루를 일년처럼 부지런히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년을 하는 일 없이 지루하게 허송세월로 보내기도 한다. 허송세월(虛送歲月)은 가치 있는 일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모습을 말한다.   시계 추는 다른 방향으로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추가 좌우로 흔들림에 따라 일정한 속도로 태엽이 풀리며 시곗바늘이 움직인다.   ‘특별한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아침부터 밀려오는 하루의 시작(중략)/ 평범하게 씻고 평범한 식사를 하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아침이 지나가면(중략)/ 똑딱거리는 시곗바늘에 맞춰/ 시계추마냥 왔다갔다 하는 하루들/ 하루가 모여 한달, 일년을 넘어가면/ 영원히 도망칠 수 없는 걸까’-유니의 ‘시계추’ 중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매달려 인생의 시계는 돈다. 인생의 시계는 수동이다. 멈추지 않게 하려면 태엽을 감든지 베터리를 갈아끼워야 한다. 매일 새벽 4시, 캄캄한 어둠을 뚫고 하루를 맞는다. 눈 여겨 보는 이 없어도 밤새 어둠 속에서 홀로 반짝이던 새벽별과 작별하고, 제일 먼저 가슴 스치는 바람과 악수한다. 어둠에 묻힌 잔디는 작은 진주알 같은 이슬을 품고 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는, 정갈하고도 고요한 하루의 시작에 가슴 떨린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왠 수다냐고? ‘나이 들면 새벽에 깬다’며 아들은 나의 새벽 세러모니를 평가절하 한다. ‘나쁜 놈, 저도 늙어봐라.’ 하려다가 늦잠꾸러기로 어머니 애간장 태우고 지각 밥 먹듯 하며 벌 서던 생각이 나서 히죽이 웃는다.   절실하면 이루어진다. 성격은 바꾸기 힘들지만 버릇은 길들이기에 달렸다. 화랑과 창작예술센터 운영하고 아이 셋 건사하다 보면 해뜨고 질 때까지 내 시간은 일 분도 허락되지 않았다. 애들이 깊은 잠에 빠진 새벽이 유일한 피신처요 탈출구였다. 그 때부터 글 쓰고, 그림 그리는 내 ‘새벽 동화’가 시작된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를 오락가락하는 시계추와 같다.’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고통과 권태를 견디고 영롱한 새벽별 보고 폭풍이 지나간 하늘에 뜬 무지개를 만나는 사람은 슬퍼도 울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 편한데로 세상을 본다. 자기 생각대로 옳고 그름, 좋고 나쁨, 길고 짧음을 판단한다. 마음은 변덕쟁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에는 순식간에 지나가지만 힘든 시간은 유난히 느리게 흐른다.   한국행 비행 시간은 왜 그리 느리게 가는지. 아이폰 꺼내 보고 또 꺼내 봐도 병아리 눈물만큼 움직인다. 한국에 있는 시간은 번개처럼 지나간다. 옛 동무나 지인 만나 동대문에서 갈치솥밥, 냄비우동, 꼬마김밥. 옛날 짜장면, 추억의 오뎅국물 즐기며 먹방투어 하다보면 날벼락처럼 휘가닥 시간이 달아난다.   ‘동짓달 기니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봄바람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시는 밤 꺼내고 싶은 황진이 사랑은 에로틱하며 서정적이다.   사랑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 시간은 흘러간다. 안 하는 것보다 시작하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을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시작할 지 고민이면 지금 시작하면 된다. 시작의 종창역은 끝이 아니다.   쓰러지고 무너져도 떠나는 시간 붙잡고 울지 않기를.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시간 동안 시간 새벽 세러모니 허송세월로 보내기

2024-09-10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영원한 사랑은 짧다

찬란한 순간은 무너져도 다시 돌아온다. 사랑은 기억의 강가에 작은 별로 반짝인다. 은하수를 본 적이 언제였던가. 날개 부러진 새들처럼 추억은 허공에서 퍼득인다. 참 많은 것들이 떠나갔다. 피흘리며 투쟁하던 젊음, 사랑, 청춘, 욕망, 이별, 절망들이 세월따라 흘러가도 남은 소중한 것들 위해 옷깃을 여민다. 되돌릴 수는 없지만 사랑의 흔적은 화석이나 작은 뼈마디로 남는다.   1879년 에스파냐 북부 알타미라 동굴에서 발견된 구석기 후기의 벽화는 동굴 벽화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벽면의 오목하고 볼록한 부분에 빨강과 검정의 농담(濃淡)으로 입체감을 내고 점묘법을 사용해 27마리의 들소 떼가 사슴, 말 등과 함께 채색돼 있다. 사냥감이 많이 잡히기를 기원하는 크로마뇽인들의 주술적 행위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담아 원시와 현대를 괸통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다나우스 왕은 신탁에서 사위들이 자신을 죽일 거라는 예언을 듣고 50명의 딸들에게 첫날 밤이 지나면 남편을 죽이라고 명한다. 다른 딸들은 모두 남편을 죽였는데 다나이드만 불복해서 그 죄로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독에 물을 퍼 나르는 형벌을 받는다.   1885년 오귀스트 로댕은 ‘지옥의 문’을 구상하면서 로댕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답게 여체를 표현한 ‘다나이드(Danaid)’를 조각한다. 슬픔과 절망, 파도 속에서 쓸려 내리는 듯한 실크 같은 머리결, 관능적인 여인의 등 곡선은 고통 속에서 섬짓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이였던 카미유 클로델이 다나이드의 모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로댕은 ‘옷을 벗은 여성, 그 얼마나 위대한가! 마치 구름을 뚫고 빛을 비추는 해와 같다. … 모든 모델 안에는 자연이 그대로 존재한다.’라며 모델의 아름다움을 격찬한다.   클로델은 19살에 로댕을 만나 24살 나이를 극복하고 사랑에 빠진다. 조각가로 솜씨가 뛰어났는데 대리석을 유리처럼 매끄럽게 조각한 기교를 보면 다나이드를 클로델이 직접 조각했다는 주장도 있다. 로댕은 그녀의 탁월한 재능에 감탄했지만 클로델이 살롱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견제하기 시작한다.   예술적 경쟁자와 연인, 로댕의 뮤즈이자 조수이고 모델이였던 클로델은 대등한 한 사람의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로댕을 사랑한 죄로 비운의 삶을 산다.   로댕이 조각가로서 대성공을 거두는데 비해 카르델은 16년을 연인이자 예술의 동반자였던 로댕과 결별 후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궁핍한 삶과 절망 속에 허덕인다. 빌에브라르 정신 병원에 수용돼 30년 동안 바깥 출입을 금지 당하는 유폐 생활을 하다가 무연고자로 공동 매장 된다. 불행하지만 당당하게 삶을 살아간 카르텔은 ‘창조와 파괴의 여신’으로 현대 미술계에 재조명된다.   사랑은 독약에 꿀을 바른다. 미치거나 꼭지가 돌면 눈먼 사랑의 유혹에 빠진다. 예술은 불변해도 인간은 변한다. 사랑은 휘파람 소리나 작은 돌팔매질에도 부서지고 깨진다. 사랑은 작은 비누방울을 공중에 부는 일이다. 햇볕 속에서 오색 무지개로 떠오르지만 추락하면 사라진다. 사랑은 환상이다. 깨어나도 흔적은 남는다. 비바람 몰아치는 상처도 동굴의 벽화나 화석으로 가슴에 새겨진다.   사랑은 짧고 예술은 길다. 사랑이 한 순간의 착각이라 해도 그 짧은 기억으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꿈꾼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영원 사랑 젊음 사랑 연인 로댕 오귀스트 로댕

202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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