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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잡초

온 세상이 초록빛이다. 기다리던 봄비가 마음껏 와준 덕분이다. 우리 집 나무들이 싱그럽게 연한 잎을 뿜어내고 물기 머문 꽃들이 꽃망울을 품는다. 작년 겨울에 선물 받아 심은 개나리가 더욱 선명한 노란 빛을 드리운다. 추운 겨울을 견뎌 지나온 탓이리라.   은퇴 후 우리 집 한 모퉁이에 만들어진 텃밭은 우리 부부의 일터다. 텃밭을 돌보는 건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우리에게 수고 이상의 기쁨을 주는 곳이다. 생명의 성장을 눈으로 확인하며 결실의 희열을 몸 전체로 맛보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도 초록빛으로 자라 젊어지는 듯하다.   거름을 주어 옥토를 조성했다. 잎의 성장에 좋은 것, 꽃을 피우게 하는 것,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 등 용도에 맞는 여러 가지 거름을 뿌렸다. 누렇던 떡잎이 짙푸르게 자라는 모습에 흐뭇해진다. 오이와 호박은 넝쿨을 내밀어 뻗어나려 한다. 고추는 흰 꽃, 가지는 보랏빛, 토마토는 노란 꽃을 맺는다. 그런데 불청객이 힘을 얻어 왕성하게 곁에서 같이 자란다.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바로 잡초다.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니?   하는 수 없이 군데군데 모종을 심고 가까이에 있는 잡초만 뽑아 주었다. 잡초를 하루 뽑고 나면 사흘 동안 팔다리가 아파 절절매는 형편이다. 아∽ 며칠이 지나면 여전히 잡초로 뒤덮이고 만다. 미처 뽑지 못한 잡초가 때를 만난 듯 마구 자란다. 노란 꽃까지 피워내 야생화 동산으로 변하는 걸 막을 수 없다. 텃밭이 유난히 넓어 보이는 건 무슨 이유일까.     생존하려는 질긴 근성을 막을 수 없어, 그냥 너도 같이 자라라고 어쩔 수 없는 아량을 베풀어야 할까? 지인의 조언대로 필요하지 않은 풀이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검정 비닐로 덮어야 하나? 아니면 제초제를 뿌려야 할지? 우후죽순 올라오는 잡초만큼이나 나의 머릿속도 헝클어진다. 어지러운 혼돈 속에서 호미는 해결사로 한몫한다. 잡초는 날카로운 호미 날에 뽑히고 말 처지다.   소중히 여겼던 노란 민들레가 지천으로 흔하다. 초록 잔디밭 가운데 노란 꽃들이 수를 놓는다. 영토를 넓혀갈수록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는 건 무엇 때문일까? 필요와 수요에 의해 가치가 정해지는 건가? 어떤 게 들꽃이고 잡초인가? 기준이 모호해진다.   잡초는 이름 없이 향기도 없이 사랑받지 못한다. 생존했다는 것만으로 의미를 주지 못한다. 우리의 삶 역시 같은 비유가 되지 않을는지. 윤택하지 못한 환경에서 억세게 살아가는 사람이 뽑히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어려움을 극복해 사회의 일원으로 자기 몫을 다한다면 언젠가 꽃을 피울 것이다. 분명 소중한 가치를 지닐 테니까.     옥토가 아닌 곳에서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성실한 생명체가 있다. 심고 거두는 자에게 기쁨을 나누게 해 준다. 이것이 잡초와 구분되는 경계라 생각한다. 목적에 맞게 이루어 가는 삶이리라. 이희숙 / 수필가이 아침에 잡초 보랏빛 토마토 초록 잔디밭 야생화 동산

2024-06-04

2024 시카고 성 패트릭 데이 행사 풍성

뉴욕과 함께 미국 최대 규모의 ‘성 패트릭 데이’(St. Patrick’s Day•매년 3월 17일) 축제를 만끽할 수 있는 시카고에 이번 주말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릴 것으로 보인다.     성 패트릭 데이는 아일랜드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한 수호 성인 패트릭(386~461년)을 기리기 위한 날로, 초록색 옷•초록 염료를 넣은 맥주•네잎 클로버•황금 동전 등으로 상징된다.     아일랜드의 최대 명절일 뿐 아니라 아일랜드계 이주민이 많은 미국, 캐나다 등에서도 기념행사가 열린다.   연방 인구조사국 자료에 따르면 미국 내 아일랜드계 인구는 3천150만여 명으로 독일계(4천300만 명)에 이어 2번째로 많으며, 아일랜드 본토 인구(약 500만 명)의 6배 이상에 달한다.   다음은 이번 주말 시카고서 열리는 각종 성 패트릭 데이 행사이다.   ▶성 패트릭 데이 퍼레이드(16일)–낮 12시15분부터 시작하는 퍼레이드는 다운타운 루프 지역의 콜럼버스 드라이브와 발보 애비뉴에서부터 시작해 북쪽으로 계속 이어진다.     ▶시카고강 초록으로 염색(16일)–62년 전통을 가진 시카고의 ‘시카고 강 초록색으로 물들이기’ 행사는 오전 10시부터 시작한다. 시카고 강에 초록 염료를 푸는 이 행사는 지난 1962년부터 이어져 온 시카고 시의 오랜 전통이다. 배관공 노조인 '시카고 플러머 유니언'(CPU) 소속 회원들이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돌며 초록색 염료를 뿌린다. 친환경 파우더를 원료로 하는 초록색 염료의 제조방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다. 환경보호를 위해 제조된 채소•과일 분말 등이 주로 쓰이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성 패트릭 데이 클로버 크루즈(16일)–초록색으로 물든 시카고 강 위에서 아일랜드 전통 음악 및 음식을 크루즈를 타며 즐길 수 있다.   ▶시카고 샴록 크롤/리버 노스 바 크롤(16일)-20곳이 넘는 술집과 바가 참여하는 크롤(crawl)을 통해 참가자들은 ‘술 마시는 날’로 지정된 성 패트릭 데이를 즐기기도 한다.     ▶사우스 사이드 아일랜드 퍼레이드(17일)–아일랜드 전통을 기리기 위한 또 다른 성 패트릭 데이 퍼레이드가 시카고 남부 베벌리에서 낮 12시부터 시작한다.   한편 시카고 시는 올해 열리는 성 패트릭 데이 행사에 30여 만명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했다.     Kevin Rho 기자시카고 패트릭 패트릭 데이 시카고강 초록 시카고 남부

2024-03-14

[이 아침에] 물뿌리개

비가 오지 않는다. 강과 댐이 메말라 있고 흙이 갈라져 거북이 등을 연상케 한다. 로스앤젤레스는 사막기후로 겨울철이 우기가 되어 강수량을 채워 주었다. 지난 겨울엔 비 온 날이 몇 손가락이나 꼽혔을까?    넓은 뜰 덕분에서 코로나19팬데믹 상황이었지만 남편 은퇴 행사와 내 출판기념회를 가질 수 있었다. 신선한 바람 속에서 여유를 만들어 주는 뜰을 좋아했던 마음이 근심으로 바뀌었다. 누렇게 변한 잔디를 바라보니 마음마저 황량해진다.      봄철이면 텃밭에 갖가지 야채를 심는다. 손주를 돌보듯이 그들을 키우는 보람이 날 젊게 했다. 초록 고개를 들고 넝쿨을 뻗어가던 수박, 호박, 오이 이파리가 시들시들 기운을 잃는다. 가지, 토마토, 고추도 예전처럼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주춤거리고 있다. 뜰에서 화사하게 웃어주던 꽃잎도 고개를 숙여 쉬 떨어지고 만다. 다알리아꽃이 봉오리를 활짝 열지 못하고 뾰로통하게 오므린 입술 모양을 하고 있다. 이를 어쩌나! 정성 들여 키운 초록 가족을 방치할 수 없다.      남편이 수동 호스를 끌어와 키 작은 묘목에 물을 준다. 절수의 방법으로 고심 끝에 선택한 방법이다. 나는 물뿌리개에 물을 담아 꽃의 뿌리 부분에만 물을 부어준다. 마른 입술에 물을 축이듯이. 몸에 기별이나 가려는 지 모르겠다.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면서 부지런히 물을 준다. 입 벌린 손주에게 수유한다고 생각하니 힘든지 모른다.      암스트롱 화원에서 볼록한 배에 목선이 미끈하게 빠진 앙증맞은 모습이 눈에 띄었다. 얼른 그의 손잡이를 잡고 집으로 데리고 왔다. 가벼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초록색 물뿌리개다. ‘Watering Can’으로 포르투갈의 분출이라는 어원에서 온 일본어 ‘조로, 조루’가 합치고 변형되어 ‘물조리개’가 되었단다. 나는 그를 ‘물뿌리개’로 부르기로 했다.    손잡이를 기울이면 기다란 목을 타고 가느다란 물줄기가 뿜어져 나온다. 분사기 역할을 하는 휴대용 용기이므로 손으로 식물에 물을 주는 데 편리하다. 필요한 곳에만 집중적으로 물을 주니 낭비를 막는다.      화씨 90도를 넘나드는 뜨거운 날씨에 텃밭 가족이 걱정되어 눈을 뜨자마자 정원으로 향했다. 여린 채소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자주 먹어야 하는데 어제도 물을 주지 못했다. 죽은 듯 숨죽인 모습을 예상하며 가까이 다가섰는데 웬걸! 다행이다. 흙이 촉촉했다. 하루의 기온 차이가 큰 탓에 새벽에 이슬이 내렸나 보다.      물뿌리개는 메마른 마음을 소리 없이 적셔주는 이슬비와 같다고 할까. 이슬비는 담담하고 유연한 자태로 어려움을 건너며 다가온다. 흙과 같은 내 안 깊숙이 찾아와 마음을 다독인다. 물뿌리개의 줄기가 채소와 꽃잎을 부드럽게 두드린다. 가뭄의 아픔을 만져주며 성장토록 한다. 함께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돕는 자다.  이희숙 / 수필가이 아침에 물뿌리개 꽃잎도 고개 텃밭 가족 초록 고개

2022-07-07

[시로 읽는 삶] 숨비소리

그림자를 다시 돌려놓으며// 광장은// 좋은 오후가 뭔지 알아// 이파리/ 떠가는// 새 날아간 만큼 번지는 하늘// 나무가 더 자라도 될까/ 둘러보는 동안// 모든 어깨를 찾으려고 부는 바람// 누군가는 누군가의 젊음으로 서 있고   -유이우 시인의 ‘숨’ 부분       신록은 우거지고 하늘은 맑다. 바람은 시원하게 불고 새들은 지저귄다. 작약은 피어 함박웃음을 짓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충만해지는 오월이 아름답다. 눈부시게 황홀한 날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될까. 계절과 날씨는 물론이거니와 삶이 기대치에 다다라 흡족한 날은 그리 많지는 않다.     바람도 나무도 긴장을 풀고 평화롭기만 한 주말 오후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쉬어본다. ‘숨’이라고 말해보기도 한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숨을 쉰다. 숨이란 살아있다는 증거, 견뎌온 자가 누리는 호흡이고 우주의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통로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라고 성경은 말한다.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맨 처음 하신 일이 숨을 주신 것이다. 숨이란 하나님의 절대 권한이다. 사는 일과 죽는 일이야말로 누구도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이고 보면 숨을 쉴 수 있다는 건 하나님의 축복임은 자명하다.   살아 있는 모든 이들에게 격려와 감사가 절로 나온다. 아흔다섯 해 봄을 맞고 계신 어머니께 감사하고 걸음마를 시작하더니 몇 달 사이 뛰기도 하는 손자에게 감사하다. 어김없이 피어나는 앞뜰의 패랭이꽃도 대견하고 끝도 없이 손길을 요구하는 잡초들도 그리 밉지 않다.   느낌만으로 살아지는 건 아니다. 생활의 조건들인 물적 필요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 필요들의 여하에 따라 우리는 행복해하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느낌이라는 섬세하고 여린 감정이 그 어떤 것보다 크게 작용하는 때도 있다. 숨이라는 말 앞에, 숨이라는 명제 앞에 서 있을 때, 살아 있음이 느낌이 되어 전율하게 되곤 한다.     해녀들이 잠수를 마치고 물 위로 올라와서 내는 휘파람 같은 소리를 ‘숨비소리’라고 한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고 숨을 고를 때 내는 소리다.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산소를 들이마시기 위한 생존의 소리라고도 한다.     숨은 쉬기도 해야 하지만 고르기도 해야 한다. 숨을 고르는 일은 나아갈 방향을 놓고 고민할 때나 장애물을 건너야 할 때 힘의 안배를 의미한다. 충분한 숨 고르기로 장대높이뛰기 선수는 기록을 경신하기도 한다. 삶이 파도처럼 흔들릴 때, 좌초하지 않으려면 평형을 유지해야 하듯 숨 고르기를 통해 평정심을 얻기도 한다.     ‘숨을 거두다’라는 말은 ‘죽음’의 다른 말이다. 숨이라는 말은 이렇게 서늘함을 거느리고도 있다. 숨이야말로 생명의 마지노선이다. 들숨과 날숨의 짧은 요동 사이로 존재와 부재가 엇갈리는 순간을 맞곤 한다.       오월이 눈 시리게 환하지만 뒤편엔 그늘이 있을 것이다. 생활에서 오는 피로감은 우리의 느낌을 망쳐놓기 일쑤다. 초록에 취해 얼큰해진 기분조차 긁어놓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숨을 쉴 수 있어 이 계절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뭘 더 바라겠는가. 심호흡하고 숨을 고르기도 하는 봄의 막바지, 초록에 편승해 한껏 푸르러지는 마음만으로 족하다. 살아있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바라던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이 벅차오르는 이 느낌이 좋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숨비소리 여호와 하나님 숨이란 하나님 막바지 초록

2022-05-24

[수필] 양란이 봉오리를 맺다

꽃이 졌다. 야들한 꽃잎이 모두 떠나간 가지는 메마른 몸을 겨우 지탱하고 서 있다. 작년에 나는 골반 골절수술을 받았다. 그때 지인이 보내준 양란(Orchid)은 홀로 누운 나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였다. 연분홍, 진분홍, 하양, 노랑의 조화가 아프고 지친 마음을 밝게 해주었다. 희망을 좇는 나비 떼를 연상케 했다. 환한 에너지가 햇살과 어우러져 방안을 채웠다. 침대에 누워서 바라볼 때마다 고마운 분의 기도가 마음에 와닿은 것일까 치료의 효력이 생겼다.   병상에 누운 지 넉 달 만에 일어나 워커를 짚고 걷기 시작했다. 내 몸은 회복되었는데 마음을 만져주던 화분 속의 꽃잎은 시들기 시작했다. 화려한 영화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쇠잔해지는 것처럼 어느 날 양란은 고개를 떨구고 흙 위에 주저앉았다.     꽃이 없는 나뭇가지는 앙상했다. 막대에 불과한 볼품없는 모습에 잘라 버리고 싶었지만 다른 화분 틈에 두었다. ‘꽃 역시 영원할 수 없겠지.’ 혼자 중얼거리며 창가에 놓아두고 물을 주었다.   이민 생활에 정착하기 위해 젊은 시절을 치열하게 살았다. 건강을 잃고 모든 생활이 정지되고 보니 고향을 떠난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여고 시절엔 문학소녀의 꿈을 품은 작은 봉오리를 맺고 있었는데…. 잊었던 그 꽃봉오리가 병상에서 겨울을 보내는 가슴에 움을 틔웠다. 먼지 묻은 일기장을 찾아내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병상일기를 쓰며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골반 골절수술과 팬데믹으로 갇힌 세상에서 글쓰기에 매진했다. 사람의 만남과 관계에서 에너지를 얻어 왔는데, 소통이 끊긴 적막을 이겨내기 위해 육체의 아픔을 견디며 가슴속에 맺힌 감정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글이 그 작업의 매체가 된 셈이다. 깊은 생각과 성찰로 이끄는 기도가 되었다고 할까.   1년을 훌쩍 넘기는 시간이 지나간다. 추운 바람이 떠나간 하늘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죽음을 거쳐 생명을 생성하는 계절의 순환이다. 햇빛이 내리비치며 창 안 깊숙이 자리 잡는다. 커튼을 걷으며 작은 양란에 눈길을 준다. 다시 움이 돋고 연한 가지가 나온다. 초록 기운이 꿈틀거린다. 햇살 아래 물 기운만 있으면 다시 싹을 내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가 보다. 놀랍게도 마른 가지에 꽃봉오리가 맺히는 게 아닌가. 새 생명이 움트는 신비한 힘을 느낀다. 봉오리가 꽃잎을 터뜨릴 때마다 살아있다는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꽃봉오리가 꽃을 피워내는 열정으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가리라. 무언가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내가 도전하고 싶은 다음 푯대는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긍정적인 스트레스는 발전을 가져온다는 대답을 얻었다. 수필 등단으로 작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4년째,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겸손히 밤을 지새우는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알았다. 숨 죽이고 가라앉았던 깊은 곳에 불씨를 던진다. 설레는 마음을 애써 달래며 컴퓨터 앞에 앉아 수필집을 준비한다. 양란에 물을 준다. 봉오리가 꽃을 피우듯 내 무늬로 책이 엮어질 것이다. 이희숙 / 수필가수필 봉오리 양란 봉오리가 꽃잎 골반 골절수술 초록 기운

202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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