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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영웅전] 쇼팽의 무덤

1830년 11월 2일 폴란드 바르샤바역에서 한 소년이 기차에 올랐다. 이름은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이었다. 그 무렵 이미 세계적인 피아노 연주자의 명성을 얻어 연주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오스트리아 빈이었다. 그에게 고향에서 작은 소포가 배달됐다. 한 줌의 흙이 들어 있었는데, ‘이것은 조국 폴란드의 흙’이라 적혀 있었다.   쇼팽은 빈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 정착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행복했다. 프랑스 여류 소설가이자 사교계의 별인 조르주 상드(1804~1876)를 만나 모정과 애정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객지 생활의 고독과 우울에다 건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쇼팽은 폐결핵으로 쿨룩거리고 있었다. 연상의 상드는 어머니처럼, 아내처럼, 간호사처럼 쇼팽을 보살폈다.   이들의 행복한 세월은 9년이 지나 끝났다. 슬픔을 이기지 못해 영국 런던에 도착한 쇼팽은 스코틀랜드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그해는 유난히도 추웠다. 찬바람과 눅눅한 기후는 폐결핵을 앓던 쇼팽에게 극약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파리로 돌아와 1849년 10월 17일 끝내 눈을 감았다. 39세였다. 임종 무렵 머리맡에는 19년 동안 들고 다닌 조국의 흙이 있었다. 마들렌 교회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쇼팽이 존경했던 모차르트의 진혼곡(Requiem)이 울려 퍼졌다. 유해는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됐다. 쇼팽의 친구가 관 위에 한 줌의 폴란드 흙을 뿌려줬다.   며칠이 지나 바르샤바의 한 교회에서 쇼팽의 또 다른 장례식이 거행됐다. 관도 없이 자그마한 상자 하나만 매장됐다. 그 안에 쇼팽의 심장이 들어 있었다. 친지들은 쇼팽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심장만이라도 고국에 묻어줬다. 오늘이 쇼팽의 175주기다. 이런저런 행사가 이어지겠지만, 음악을 모르는 나에게는 그가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누가 말했던가. 예술에는 조국이 없다고….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쇼팽 무덤 프레데리크 쇼팽 폴란드 바르샤바역 조국 폴란드

2024-10-20

"조국을 위한 헌신 잊지 않겠습니다"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미 남서부지회(회장 박굉정)는 대한민국 재향군인회(회장 신상태)와 함께 지난 22일 오렌지카운티 한국전 참전용사 초청 오찬 행사를 마련, 참전용사들의 공로를 기렸다.   지난 22일 가든그로브의 하이엇 리전시 OC 호텔에서 열린 행사엔 총 9명의 한국전 참전용사가 참석했다. 이들은 미 남서부지회 소속 이승해 전 회장, 정재화, 정명숙 고문, 실비치 분회의 허홍렬 회장, 소교민, 홍성유, 오창성씨, 샌디에이고에서 온 김기홍, 조주호씨다.   박굉정 남서부지회장은 “조국을 위한 여러분의 헌신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어 “10년 전 바로 이 장소에서 미 남서부지회가 창설됐다. 오렌지카운티를 중심으로 실비치, 라구나우즈, 샌디에이고, 라스베이거스 분회 임원, 회원들과 함께 ‘명품 향군’ 만들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영완 총영사는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기를 바란다며 한, 미 재향군인들을 격려하고 감사를 표했다.   신상태 회장은 한국전 참전용사 중 이승해 남서부지회 초대 회장에게 향군 대휘장을, 허홍렬 실비치 분회장, 정재화, 정명숙 고문에겐 감사패를 각각 수여했다. 남서부지회와 상호 협력하고 있는 에빈 플란토 미 재향군인회 뉴포트-하버 커맨더에게도 감사패를 수여했다.   신 회장은 “대한민국 재향군인회는 정부의 한미 안보협력 노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역할을 다하고 있다”며 “남서부지회가 교민 사회의 중심 역할을 해주리라 믿는다”라고 말했다.   박 회장은 한미 예비역 간의 교류를 통해 젊은 회원 확보와 재정 마련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제의했다. 존 앨드리지 미 재향군인회 가주 지부장은 “미국과 한국의 재향군인회가 서로 협력하는 관계로 발전하길 바란다”고 화답했다.   이 행사엔 남서부지회 임원들과 김용일 라구나우즈 분회장, 정한수 라스베이거스 분회장, 백황기 샌디에이고 분회장, 김기태 월남전참전자회 미 남서부지회장, ROTC 기독장교연합회 남철우씨, OC한인단체장 등 70여 명이 참석했다.   행사는 김현석, 오미애 부회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소프라노 김민지씨는 ‘그리운 금강산’과 ‘갓 블레스 아메리카’를 불렀다. 재향군인회와 남서부지회는 각기 제작한 동영상을 통해 활동상을 소개했다.      남서부지회 관련 문의는 김현석 부회장(714-887-6992)에게 하면 된다. 임상환 기자조국 헌신 분회장 정재화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분회장 정한수

2024-05-23

"조국 위한 용사들의 희생에 무한한 경의를"

    6.25참전유공자회 워싱턴지회(회장 손경준)가 25일 한인커뮤니티센터에서 제 32주년 기념 및 총회를 개최했다.   손경준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1991년 4명이 창립해 8년전 475명이었던 회원들이 현재는 161명이 남았다”면서 “생존해 있는 회원 조차 치매와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다. 손 회장은 “매년 보은행사를 열어주는 벧엘교회와 워싱턴여성재단에 등에 감사를 전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행사는 워싱턴한인연합회 고은정 수석부회장의 사회로 김용돈 목사가 개회기도를, 조기중 총영사, 이성진  국방무관보를 비롯 스티브리 회장, 은영재 회장, 헬렌 원 회장, 김인철 회장 등이 참석해 축사를 전했다.     조 총영사는 “6.25 발발 73주년,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 되는 해에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와 조국 평화 수호를 위해 목숨 바친 용사들의 희생에 무한한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며 “여러분의 숭고한 희생이 아니었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73년전 전쟁 속에 피어난 전우들의 뜨거운 우정을 바탕으로 한미유대 강화를 위해 활동하는 모범단체로 오래도록 남아주길 바란다”며 용사들의 건강을 기원했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미동부지회 김인철 회장은 “세계유일의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은 현재 긴장고조 상태에 있다”면서 “앞으로 한미동맹이 더욱 굳건해져야 한다는 일념으로 6.25참전유공자회와 대한민국 재향군인회는 열심히 노력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워싱턴한인연합회 스티브 리 회장은 “여러분의 목숨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주어 감사하다”고 전했다.  메릴랜드 한인회 헬렌 원 회장은 “세계속 대한민국이 오늘날 위상과 입지를 다지기까지 미국과 여러나라의 도움과 참전용사들의 피의 희생이 있었다”면서 “참전 유공자들과 현재도 생존해 민족상잔의 참상을 치르고 증거하는 유공자들께 우리 모두는 빚진 자”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JUB문화센터의 난타 및 꼭두각시 축하무대가 열려 참석자들의 흥을 돋우었다. 더불어 유공자회가 32주년을 맞기까지 헌신으로 수고한 김명호 부회장에게 표창장이 전달됐다.     한편 기념식 이후 신진균 수석부회장 진행으로 이어진 총회에서는 회원들의 만장일치로 제 24대 회장으로 손경준 회장의 2년 유임을 확정했다. 손경준 회장은 답사에서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유공자 회원들의 권익 위해 노력하고 봉사하겠다”고 말했다. 김윤미 기자 [email protected]조국 용사 수석부회장 진행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미동부지회 25참전유공자회 워싱턴지회

2023-11-30

여성 독립유공자 652명 중 55명이 미주서 활동

‘사진신부’로 대표되는 한인 이민선조 1세대 여성들은 1903년 1월 13일 첫 이민 생활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미국 전역에서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2023년 8월 기준 여성 독립유공자 총 652명 중 미주 지역에서만 55명이 포함됐다. 〈19면 표 참조〉   이들은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며 여러 활동에 동참했던 수많은 1세대 여성을 대표한다. 당시 모든 한인 여성은 한마음 한뜻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미국에서 자녀의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일제강점기 한인 이민선조 1세대 여성들은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LA, 필라델피아 등 미 전역에서 여성단체를 만들고 1945년 8월 15일 광복 순간까지 조국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들은 광복 후에도 조국이 어려울 때마다 구호품 지원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일제강점기 한인 여성들은 남편의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역할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들은 미주 각 지역에서 부인회를 결성하고, 연합단체인 '대한여자애국단’을 조직해 여성 주도 독립운동 체계를 구축했다. 남편과 대등한 위치에서 독립운동에 나섰고, 피땀어린 노동의 대가로 얻은 귀한 돈을 40년 넘도록 독립자금으로 보탰다. 한인 차세대 정체성 함양을 위한 뿌리교육의 기틀도 120년 전부터 다졌다. 한인 1세대 여성들의 삶을 대변한 주요 독립유공자를 짚어봤다.   ※자료: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미주독립유공자 전집 애국지사의 꿈 민병용 저     ━   3불씩 모아 4만6천불 독립자금 지원      ■강(김)혜원(1885.11~1982.5)   2020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된 강혜원 선생은 평남 평양 사람이다. 1905년 5월 남동생 강영승(후일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등 가족과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민한 한인 이민선조 1세대다.   1912년 본토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김성권(후일 흥사단 이사장)과 결혼했다.   이후 강혜원 선생은 중가주 다뉴바로 이주했다. 이곳 포도농장에서 일하던 강 선생은 올케 강원신을 비롯, 한성선, 한영숙, 한신애, 김경애 등과 1919년 3월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조직했다. 같은 해 8월 2일 새크라멘토, LA, 샌프란시스코, 윌로우스 부인회 대표들과 여성단체 통합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을 창립했다.     초대 총단장 겸 총부 위원으로 1920년 2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통해 독립운동자금 500달러를 임시정부에 전달, 꾸준하게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당시 단원들은 매달 3달러 단비를 임시정부에 송금, 임시정부와 민족운동단체에 총 4만6298달러를 후원했다.     1930년 LA로 이주해 대한여자애국단, 흥사단, 대한인국민회를 후원, 한인 자녀 민족교육 등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강 선생의 가족 5명 또한 건국훈장에 추서됐다.       ━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에 앞장서     ■심영신(1882.07~1975.02)   2021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된 심영신 선생은 황해도 송화 사람이다. 이민선조 1세대로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심 선생은 1913년 4월 19일 하와이에서 황마리아 등과 함께 여성운동단체인 대한인부인회(大韓人婦人會)를 결성했다. 2세 자녀 한국어교육 장려, 일제용품 구매 거부운동, 교회와 사회단체 후원, 재난동포 구제를 주요 활동으로 삼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조국독립운동 지원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심 선생은 하와이 각 지방의 부녀대표자를 소집해 부녀공동대회를 개최 독립운동 후원을 결의했다.     심 선생은 1920년대 말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재정부족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자 하와이 한인 동포사회에 이 사실을 알리고 모금에 나섰다. 1941년 4월에는 하와이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 대한부인구제회 대표로 참석했다. 임시정부 후원과 대미외교 및 선전사업에 앞장섰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필라 회의서 식민통치 부당성 고발     ■김노디(1898.10~1972.05)   김노디 선생은 황해도 곡산 사람이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하와이에 이민했다. 사탕수수 노동자였던 부모 헌신으로 오하이오주 오벌린대학에 입학했다.     재학생이던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대표자회의(First Korean Congress)’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김 선생은 한국 여성들이 일제 식민 통치하에 겪는 고난, 해방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 대해 연설했다.     1919년 10월부터는 매주 1~2차례 또는 3~4차례 미국 각지를 돌았고, 미국사회에 한국의 사정을 알리고 일제의 반인도적인 행위를 고발했다.   김 선생은 1921년 3월 1일 오벌린대학 3·1독립선언 축하 연설, 6월 1일 오벌린 한인구제회 지회를 조직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1923~1935년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여학생 감독, 1930년 9월부터 교감, 1935년 교장으로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1926~1945년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에서 활동하며 독립자금 모금 및 독립자금 납부에 앞장섰다. 해방 후에는 한국으로 들어가 1953년 11월 24일 외자구매처장에 임명됐고, 1955년 8월까지 재직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한인사회 단합과 국권 회복운동 주도       ■이(안)혜련(1884.04~1969.04)   평안남도 강서 사람인 이혜련 선생은 1902년 9월 3일 도산 안창호와 결혼했다. 결혼 직후 도산과 미국에 이민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산을 도와 ‘공립협회’를 결성해 한인사회 단합과 국권회복운동을 주도했다. 공립협회는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통합해 ‘대한인국민회’를 창설,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이 됐다.     이 선생은 도산의 독립운동을 전폭 지원했고, 대한인국민회를 위한 ‘의연금, 국민의무금, 특별의연금’ 등 독립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으로 도산이 중국으로 떠난 뒤, 이 선생은 LA에서 ‘부인친애회’를 조직해 독립의연금 모금에 솔선수범했다. 1919년 5월 18일 중가주 다뉴바에서 열린 부인회 통합 대한여자애국단 창설 당시 LA대표로 참석했다. 1938년 3월 10일 도산 순국 후에도 여자애국단을 통한 항일전에 매진했다. 해방 후에도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 LA한인사회 발전에 온 힘을 기울였다. 2008년 건군훈장 애족장 추서.   독립운동 단체 조직에 주도적 역할      ━   서재필 워싱턴 회의 참가경비 모금       ■한성선(1864.04~미상)   한성선 선생은 1919~1945년 중가주 다뉴바에서 신한부인회 대표, 대한여자애국단 총부위원·총단장 등으로 활동하며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강원신, 강혜원 등과 한인부녀자회를 이끌고 한인 자녀 민족교육에도 앞장섰다.     1919년 11월 중가주리들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 휴전기념일 행사 준비위원으로 선정됐고, 워싱턴회의에 참여할 서재필의 경비를 모금해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로 송금했다. 1921년 11월 25일 다뉴바에서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했다. 이후 딜라노로 이주한 뒤1931~1932년 3·1절 기념식 참여 등 1918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자금을 지원하였다.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한인 자녀 민족교육 실시에 매진     ■박(강)원신(1887~1977.02)   박원신 선생은 평안남도 평양 사람이다. 1904년 강영승(후일 대한인국민회 총회장)과 결혼 뒤, 1905년 5월 남편 가족과 함께 하와이에 이민했다. 사탕수수 농장 일을 하다 시누이 강혜원과 중가주 다뉴마로 이주해 시간당 15센트 노임을 받고 남편 학업을 뒷바라지했다. 동시에 강혜원과 여성독립운동에 나섰다.     1919년 3월 2일 다뉴바 지방에서 신한부인회를 결성해 회장에 선출됐다. 같은 해 미주 내 부인회를 통합한 대한여자애국단 창설에 나서 제3대 총단장을 역임했다. 이후 미주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 민족독립운동, 한인 자녀 대상 민족교육, 일본상품 불매운동에도 앞장섰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 독려       ■양제현(1892~1959.06)   양제현 선생은 1917, 1919년 새크라멘토부인회 회장, 1929~1930년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 1925년, 1928년, 1941~1942년, 1944년 대한여자애국단 샌프란시스코지부 단장, 1931~1932년, 1934~1938년, 1940년, 1942년,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처럼 양 선생은 1917~1945년까지 독립자금 모금 등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20년 3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3·1절 기념식에서 ‘여자의 일생’이란 제목으로 독립군을 따라 생을 마칠 것을 연설했다.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차세대 교육 위해 학교 시설 건립     ■임메불(1884.07~1987.12)     평안남도 평양 사람인 임메불 선생은 1909년부터 1945년까지 LA에서 부인친애회 대표, 대한여자애국단 LA지부 단장, LA여자청년회구제원, 대한인국민회 LA지방회 구제위원,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1942~1945년)으로 활동하며 조국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나서고 활동을 지원했다.     임 선생은 1929년 12월~1930년 1월 한인 자녀 국어교육을 위한 교육기관 설립 준비 기성위원으로도 참여했다. 1930년 3월 여자애국단 LA지부단장 때는 조선여자대학 설립 건축비 모금운동도 벌였다.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도 지원했다.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대한부인회 조직해 동포 구제       ■황마리아(1865~1937.08)   평안남도 평양 사람인 황마리아 선생은 ‘자녀 교육’을 위해 1905년 5월 장남 강영승, 강영승의 처 강원신, 차남 강영옥, 장녀 강혜원을 데리고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민했다.     황 선생은 1913년 4월 호놀룰루에서 한인 자녀 국어교육에 앞장섰다. 일본상품 배척, 동포 구제를 목적으로 한 대한부인회도 조직했다. 1914년 부인회 재무로 서간도 재난동포에게 구제금 300달러를 송금하는 등 6년간 한국과 중국 재난동포 구제사업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부인회를 독립운동자금 모금, 재난동포 구제를 위한 대한부인구제회로 통합했다. 1930년부터 1937년 별세 때까지 임시정부 독립자금 지원, 김구에게 군자금 100달러 지원, 한인협회 조직, 한인교회 사업 등에 헌신했다.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신문 통해 독립사상 고취 전력       ■차(임)인재(1895.04~1971.04)   차인재 선생은 1920년 6월 경기도 수원군수원면삼일학교 교사로 근무 중 박선태 등이 조직한 구국민단에 참여해 ‘독립신문과 대한민보’ 등 독립사상에 관한 기사 배포 활동을 했다.   1920년 미국 이민 후 1924년 대한인국민회 맥스웰지방회 학무원으로 한인 자녀 국어교실도 운영했다. 1933년 대한여자애국단 LA지부 부단장, 1936년 여자청년회 서기로 활동했다. 1941~1945년 사이 대한인국민회 LA지방회와 여자애국단 LA지부 회장으로 활동했다.   차 선생은 1922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한국광복군에 후원금 지원       ■전그레이스(1882.06~1948.07)     전그레이스 선생은 1914년부터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활동을 시작으로 1945년까지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 기간 독립금, 조선여자대학 설립 기부금, 군자금 등의 명목으로 30차례 이상 독립자금을 냈다.     전 선생은 샌프란시스코 부인회 활동, 대한여자애국단 활동을 하며 독립운동 지원을 독려했다. 1934년 LA로 이주 후 이듬해 여자애국단 LA지부 단장이 됐다. 1940년 딜라노로 이주한 뒤에는 현지 지부도 결성해 단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한국광복군 후원금 모금에 앞장섰다.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건국훈장(建國勳章,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기를 공고히 함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5등급으로 1등급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 Republic of Korea Medal), 2등급 대통령장(大統領章, Presidential Medal), 3등급 독립장(獨立章, Independence Medal), 4등급 애국장(愛國章, Patriotic Medal), 5등급 애족장(愛族章, National Medal)이다.   김형재 기자독립유공자 여성 후일 대한인국민회 조국 독립운동 독립자금 지원

2023-09-21

[기고] 조국 발전과 한인 사회 위상은 비례한다

한인의 미국 이민 역사는 1902년 하와이에 도착한 102명으로 시작됐다. 그나마 16명은 병으로 귀국해 실제로는 86명인 셈이다. 현재 미국 내 한인 인구는 200여만 명에 이른다. 한인 사회는 이승만 초대대통령, 도산 안창호, 서재필 박사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조국의 발전과 함께 한인 사회의 위상도 점차 달라졌다. 지금은 한인 연방하원 등 정치는 물론 경제·과학·문화·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한인들이 많다.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한미정상이 보여준 5박7일간의 일정은 한국은 물론 한인 사회의 위상도 더 높였다고 생각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의회연설은 미국인들에게는 비전과 감동, 친근감을, 한인들에게는 자긍심을 주었다.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은 “윤 대통령은 미국의 위대한 친구”라며 “경제협력과 집단방위에 대한 한국의 약속은 두 나라의 관계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이 한미동맹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계획 등 정부 정책, 국민의 희생과 피나는 노력도 있었지만 한미동맹 덕에 북한의 무력도발과 핵 위협에도 지속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윤 대통령은 “북한의 침공으로 한국이 위태로울 때 미국의 젊은이들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나라의 자유민주주 수호를 위해 소중한 목숨까지 바쳤다”며 “한미 동맹은 피로 맺어진 관계이기에 더 소중하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에서의 ‘자유를 향한 새로운 여정’ 연설에서도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하버드인을 기억하고 있다”며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18명의 이 대학 졸업생들을 추모했다. 그중 동아시아학 박사 과정을 밟던 중 6·25 전쟁에 자원입대해 28세의 나이로 전사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손자 윌리엄 캐머런 쇼와 그의 어머니 캐럴 캐머런 쇼를 초청해 관심을 모았다. 윤 대통령은 이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하여 깊이 감사드린다”며 “고인의 숭고한 희생으로 대한민국은 자유를 지켜낼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또한 “한미동맹은 단순히 이익에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 편의적 계약관계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가치동맹’”이라고 강조하며 “지속 가능하고 회복력 있는 동맹,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정의로운 동맹”이라고 말했다.   한미동맹 70주년인 올해는 과거와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혈맹으로 맺어진 한미동맹 본연의 모습을 찾은 것 같아 의미가 새롭다. 윤 대통령은 방미 기간 중 그동안의 양국 역사를 되새기며, 앞으로 나아갈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한반도의 위협 요소도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북한의 불법적인 핵무기 개발과 핵 협박은 한반도뿐 아니라 주변국,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며 “이러한 전체주의적 태도는 필연적으로 북한 내 참혹한 집단적 인권 유린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미국의 핵우산을 명문화한 ‘워싱턴 선언’은 한미동맹 관계의 새로운 이정표임이 틀림없다. 이 선언은 미국이 동맹국의 핵 억제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담고 있다. 또 이 선언은 미국 대통령이 약속한 최초였다. 한미관계를 안보·경제·기술·문화·사이버 동맹을 포괄하는 글로벌 파트너로 도약시킨 가장 성공적인 정상외교였다고 생각한다.   윤 대통령의 방미를 계기로 조국의 위상과 한인 사회 위상이 비례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됐다. 박철웅 / 일사회 회장기고 조국 발전 한인 사회 한인 연방하원 한미동맹 70주년

2023-05-08

[문화산책] 해외동포의 고국, 모국, 조국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마루턱에 섰다. 바다 건너 떠돌이는 무척 쓸쓸하고 막막해진다.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워지기도 하고, 외로운 그림자를 밟으며 나는 누구인가를 되묻기도 한다. 변방의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의 서글픔이다.   미국 땅에 살고 있는 나에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무엇인가? 고국, 모국, 조국,내 나라, 우리나라…. 다양한 명칭이 있다. 물론 그 의미는 조금씩 다르다. 사전의 설명은 이렇다.   ▶고국(故國)= 주로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를 이르는 말. ▶모국(母國)= 자기가 태어난 나라, 흔히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사람이 자기 나라를 가리킬 때 쓰는 말. ▶조국(祖國)=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던 나라. 자기의 국적이 속해 있는 나라를 뜻하기도 한다.   나는 45년째 미국에 살고 있다. 그만큼 떠나온 고향으로부터 멀어졌고, 돌아가기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실제로 한국에 가보면, 말이 시원하게 잘 통하는 것 빼고는 완전히 타국이나 다를 바 없다. 한국 사람들은 나를 뭐라고 부를까? 재미동포, 교포, 교민, 재미한인, 한민족, 한인 디아스포라 등 다양한 명칭이 통용되고 있다. 그래서 통일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한국 정부의 공식 용어는 ‘재외동포’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한국에서 본 관점이고, 정작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시각은 간단하지 않다. 긴 세월 고달픈 해외 떠돌이답게 우리의 정체성은 이리저리 복잡하다. 법적으로는 미국 시민권자, 즉 독수리 여권을 가진 미국인이지만, 생물학적으로나 심정적으로는 골수 토종 한국인이다. 우리말로는 재외동포 또는 재미 한인이고, 영어로는 코리안-아메리칸이다. 코리안에 방점을 찍느냐, 아메리칸에 악센트를 두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내가 정체성 문제에 유달리 관심을 갖는 것은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자란 우리 아이들의 앞날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민 1세들이야 그렁저렁 살다 사라지면 그만이겠지만, 우리 후손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1세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우리 2세들의 형편은 복잡하다. 2세들은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한국계 미국인이다. 본인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미국사람이다”라고 대답하고,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재외동포 정책에서는 우리 2세, 3세들도 동포로 계산하고 싶어 한다. 숫자가 곧 국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나와 우리 아이들 사이에 이런저런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가령, 중요한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 미국과 한국이 맞붙었다면, 나는 당연히 한국을 응원하겠지만, 아이들은 미국을 응원하거나 약간의 갈등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문제를 자꾸만 고민하게 된다. 실제로 고약한 부딪침이 도처에 깔려 있다. 우리의 명칭이나 이중국적 같은 정책적 배려보다 훨씬 중요한 근원적 문제다. 특히 예술에서는 한결 본질적이다.   그런 갈등에서 떠오르는 것이 ‘디아스포라’라는 다소 애매하지만 포괄적인 개념이다. 다인종,다문화,다언어로 이루어진 ‘짬뽕 사회’ 미국에 살면서 조국, 모국, 고국 등을 생각하다 보면 만나는 낱말이 디아스포라다.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어쨌거나 한국 정부의 해외동포 정책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 정부가 재외동포청을 신설한다고 떠들썩하기에 잔뜩 기대를 걸었는데,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국회에서 다른 용건으로 싸움박질이 요란하더니 까먹은 모양이다. 참 답답하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해외동포 고국 조국 모국 고국 모국 해외동포 정책

2022-12-29

"조국의 올바른 발전 위해 원로들 뭉친다"

    국가원로회의 미국동부지역 지부 및 워싱턴D.C창립 발기인 대회 및 총회가 10일 버지니아 애난데일 소재 한강 식당에서 열렸다.   대한민국 제30대 국방장관을 역임한 권영해 국가원로회의 공동의장(단체사진 아랫줄 가운데)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이날 발기인 총회에서는, 정규섭 제독이 상임의장,  한미 자유연맹 송재성 총재가 준비위원장에 위촉됐다. 국가원로회의 측은 미국동부지역 지부에 상임의장 1명, 공동의장 5명 등 임원을 자격심사를 거쳐 임명한다는 방침이다.   이날 총회에서 권 의장은 "동포들의 '수구초심(首丘初心)'의 마음을 이해하며, 대한민국 건국과 발전에 공헌한 워싱턴 지역 원로들의 뜻과 지혜가 국가원로회의 미동부 지부를 중심으로 모일 수 있길 바란다"고 축사했다. 특히 권 의장은 "우리가 선택한 지도자가 헌법정신에 입각해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조언하는 것이 국가원로회의가 지양하는 목표"라고 말했다.     한편 국가원로회의는 1991년7월7일 창립한 사단법인으로, 통일조국 달성과 인류 공영 구현을 위한 초일류 국가 지향과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자유민주주의 확립, 한류의 세계화촉진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날 발기인 총회에 참석한 워싱턴 지역 인사는 다음과 같다. (이하 무순, 직함 제외) 정규섭, 송재성, 우성원, 정세권, 권동환, 강필원, 이은애, 신용진, 이태봉, 메리 오.     박세용 기자 [email protected]조국 발전 권영해 국가원로회 통일조국 달성 동부지역 지부

2022-08-10

[독자 마당] 조국의 통일

최근 한국 정부나 북한이나 통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미국과의 군사협력을 강화해 조국을 지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에 대해 북한 쪽에서는 남한이 쓸데없는 군사행동을 보일 경우 가차 없이 공격을 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북한은 한 사람의 권력 유지를 위해, 한국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분단을 이용하고 있다.     폴란드를 여행한 적이 있다. 폴란드는 지리적으로 유럽과 러시아를 잇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한반도가 아시아 대륙 세력과 태평양 해양 세력이 만나는 요충지인 것과 비슷하다.     폴란드에서 만났던 분의 말에 따르면 폴란드는 한때 국가가 4개로 쪼개졌었다고 한다. 주변의 강대국들이 자기들의 입맛대로 폴란드를 4등분 한 것이다.     이때 폴란드 국민은 4개의 국가를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스스로 노력해서 통일국가를 만들었다고 한다. 폴란드가 한없이 부러웠고 폴란드 국민이 존경스러웠다.     대한민국은 2차 대전 후 강대국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둘로 쪼개버렸다. 이때 일부 지식인들은 하나의 조국을 만들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허사가 됐다.     남한과 북한에 각각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후 북한이나 남한의 권력자와 정치인들은 통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권력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통일을 위한 일에는 별 관심도 없는 듯 하다.     세계인들이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참으로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다. 혹시라도 한국은 미국의 꼭두각시로, 북한은 중국의 꼭두각시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분단 80년이 다 되어 간다.  이제는 우리 힘으로 통일할 때가 되었다. 서효원·LA독자 마당 조국 통일 폴란드 국민 이때 폴란드 꼭두각시로 생각

2022-08-07

[문화 산책] ‘양간도’의 불편한 진실

소설 ‘광장’의 작가 최인훈은 재미 동포사회를 ‘양간도(洋間島)’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만주의 북간도(北間島)에 빗댄 말이다.   양간도? 조국과 서양 사이에 떠있는 섬,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한인사회를 낮잡아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살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러 모로 새겨봐야 할 상징적이고 절묘한 비유임을 느낀다. 내키지 않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양간도, 맞는 말이다. 우리는 섬이다, 외로운 섬. 미국땅 한 귀퉁이에 고달프게 떠있는 섬,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여기에도 못 미치고 저기에도 못 미치는 어정쩡한 섬, 그래서 외롭고 고달프고 서러운 양간도 주민이다.   섬 살림은 고달프다. 조국과 미국 사이에서, 백인과 흑인 사이에 끼어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아야 하니 늘 긴장해야 한다. 균형이 깨지면 적응에 어려움을 겪어야 하고, 아니면 어설픈 미국 사람처럼 일그러지게 된다. 그렇다고 완전한 미국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서럽다.   하지만 서럽다고 주저앉아 한탄이나 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일은 이 양간도를 축복의 섬으로 만드는 일이다. 사이에 끼어 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양쪽을 이어주고, 모두를 포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양쪽을 든든하게 이어주는 연결고리, 그것이 우리의 몫이다. 양쪽을 이어주려면 우선 내가 바로 서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양간도에는 본질적인 ‘불편한 진실’이 한 가지 있다. 한인커뮤니티가 지금처럼 계속 발전을 거듭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국 이민이 계속 줄어들고, 새로운 이민이 오지 않으니, 한인사회가 빠른 속도로 노령화하고 쇠퇴할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앞날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대비해야 한다. 유대계처럼 완전히 미국 사회에 녹아들어 살면서 민족적·정신적 정체성을 고집스럽게 지킬 수도 있고, 차이나타운처럼 요란하게 드러내 놓고 개성을 강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일본 커뮤니티와 비슷한 운명일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아무튼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한다.   바람직한 방향설정을 위해서는 1세와 2세들이 활발하게 소통하고, 함께 공부를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문화예술도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준비해야 한다. 특히, 언어를 다루는 문학이나 연극 같은 분야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한글로 된 문학은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줄어들 테니 설 자리가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방향전환이 불가피하다. 영어로 쓰든가, 한국의 독자를 대상으로 작품을 쓰든가….   아마도 영어로 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어로 쓴 작품도 한국문학인가라는 문제는 별개로 논의되어야 할 사안이지만 아무튼 주인공은 당연히 2세, 3세들이다. 당연히 앞날의 계획이나 방향 설정은 2세, 3세들을 주역으로 설정하고 세워야 한다.   2세들에게는 다인종 다문화 사회인 미국에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로서의 정체성 확립이 중요하다. 이들은 우리 같은 ‘교포’나 ‘재미한인’이 아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태어나 자라난 미국사람인데도 사회생활에서는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고, 부모 세대나 비슷한 갈등을 겪는다. 그래서 정체성과 자신감이 중요한 경쟁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확신이 없이는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없다.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우리 2세들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이해하고 수용하고, 이들을 위해 판을 깔고, 마당을 펼쳐주는 것이 1세들의 의무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 산책 양간도 불편 양간도 조국 우리 양간도 재미 동포사회

2022-01-20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미동부지회(회장 김인철)는 지난 23일(토) 애난데일 소재의 재향군인회 강당에서   회원 및 내외빈이 참석한 가운데 제 69주년 재향군인의 날 기념식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권세중 총영사, 표세우 국방무관(육군소장), 제임스 피셔 한국전참전공원재단 상임이사 등 여러 내외귀빈과 회원들이 참석해 진행되었다.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김진호 회장은 김인철 회장이 대독한 기념사에는“ 69년이 지난 오늘의 향군은 일천만명의 회원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안보단체로 성장, 발전해 왔다”면서 “ 국가안보와 일선에서 몸 바쳐온 향군 회원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전했다.     권세중 총영사는 “ 오늘 행사를 통해 피로 맺어진 한.미동맹의 공고함을 확인하고 선진한국의 밝은 미래를 되새기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격려했다.     이어 표세우 소장은 “ 재향군인회 동부지회는 한.미동맹이라는 기치하에 다양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해 온 것을 알고 있다”면서   “ 리더십과 회원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표세우 소장은 올연말 이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인갑 사무처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는 개회선언을 시작으로 이범 목사(워싱턴지역한인교회 협의회 회장)가 개회 기도를 했고 국민의례 후, 정찬문 장학부장의 향군의 다짐, 기념사, 장학금 및 장학증서 수여, 축사, 안보결의문 낭독, 페회기도 순으로 진행됐다. 김인철 회장은” 69주년 창설기념일을 갖는 오늘 감회가 새롭다”면서   “ 앞으로도 안보단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혔다. 김윤미 기자 [email protected]자유민주주의 조국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재향군인회 동부지회 재향군인회 강당

2021-10-24

"초기 이민자들의 감동적 삶 뭉클"…UC리버사이드 장태한 교수

"부모 누구나 자녀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녀의 삶이 낯선 이 땅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공하는 인생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자아의식이 없으면 정체성 확립이 어렵고 힘든 인생으로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미주 한인들 각자 역사의식이 필요한 겁니다." UC리버사이드 장태한(사진) 교수가 역사의식을 제대로 키울 수 있는, 미주 한인들의 필독서를 하나 더 출간했다. 최근 고려대학교 출판문화원에서 펴낸 '외로운 여정' 한국어판이다. 원래 이책은 원로 저널리스트 이경원씨와 김익창, 그레이스 김씨의 'Lonesome Journey'의 번역이다. 장 교수는 "20세기 초 미국에 도착한 한인 이민 선조들은 기구하리만큼 험난한 삶을 살았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며 "그들의 하와이, 쿠바, 멕시코 유카탄에 이르는 긴 여정을 우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경원씨의 이 책을 통해서 21세기를 사는 우리 한인들에게 들려주는 그들의 메시지는 강렬하다"고 말했다. 이경원씨의 이민선조 스토리 프로젝트는 대략 80여 명이 취재.작성돼 있지만 책으로는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이다. 이씨가 영어로 작성한 내용을 장 교수가 30여 명만 선별, 원문의 취지와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게 번역했다. 장 교수는 "모두 의미있는 삶을 산 훌륭한 선배들이었지만 한권의 책으로 만들기 위해서 추릴 수밖에 없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며 "스토리텔링과 의미가 특별한 분들만 우선 번역했다"고 설명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분만 뽑아달라는 우문에는 모든 이민선조들의 삶은 모두 감동이라며 "경제적으로 어렵고, 정치적으로 취약하고 인종차별까지 받는 상황에서 꿋꿋하게 고난을 헤쳐 넘은 선조들의 얘기는 자칫 무기력하게 쉬운 것만 원하는 현대 미주 한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미래 한인사회의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는 '길잡이' 역할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외로운 여정'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안헬렌 여사를 비롯한 초기 이민시기의 여자 전사 8명, 유카탄 노예해방의 주인공 황사용, 서재필, 비행학교를 설립한 김종림 등이 수록된 망명가 5명, 이민선조의 자랑스런 2세들인 안 필립, 이새미 등 5명, 인종차별 타파, 이민자를 위해 앞장섰던 3명의 위대한 딸들, 자원입대해 미국의 전쟁영웅이 된 김영옥을 비롯한 한인 3명 등이 수록돼 있다. 장 교수는 "'외로운 여정'은 1970년대부터 시작돼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라며 "번역 초고부터 편집, 출판까지는 대략 1년 반이 걸렸다. 하지만 100년 넘게 이어온 이민 선조들의 삶의 스토리를 읽는 동안 경험한 감동들은 결코 외롭지 않은 뭔가가 있다. 독자들도 같은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책은 한인 타운 일부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고 미주 중앙일보를 독자를 위해 조만간 연재된다. 한편 영어권 독자들을 위해 이 책의 원본격인 'Lonesome Journey'의 단행본 출판작업도 진행중이다. 글.사진=장병희 기자

2016-07-04

김기환 총영사 "한인 이민사 박물관 지원"

30일 김기환 뉴욕총영사가 부임 후 약 1년 만에 처음으로 뉴욕한인회관을 방문했다. 김 총영사는 이날 회관을 방문해 "지난해 4월 7일 부임 후 가장 먼저 방문하고 싶었던 곳이 이곳이었는데 여러 문제로 인해 오늘에야 방문할 수 있게 됐다"며 "그동안 한인회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법원의 훌륭한 결정과 역대회장단협의회의 수고로 한인회 정상화가 이뤄져서 다행"이라고 밝혔다. 이어 "김민선 회장은 남은 임기 1년동안 두 배로 더 열심히 활동할 것이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김 총영사는 한인회가 추진중인 한인 이민사 박물관 건립 사업에 대해 논의했다. 박물관 건립 사업 지원 요청에 대해 김 총영사는 "한인회가 구체적인 사업 제안서를 제출하면 이를 본부에 보내 검토되도록 노력하겠다"며 "큰 규모의 지원은 힘들겠지만 적극 협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올해 지원 요청은 어려울 것 같고 다음 회계연도에 지원 요청하는 것이 시기적으로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에 따르면 박물관 건립 예산은 총 100만 달러. 기금 모금 행사를 통해 단계적으로 건립 작업에 착수할 예정으로 첫 30만 달러 모금 시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할 계획이다. 김 회장은 "박물관 이름은 'Museum of Korean American Heritage(MOKAH)'를 한글로 발음한 '목화'로 고려중이며 사무실을 제외한 모든 한인회 공간을 박물관으로 바꿀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조은 기자 [email protected]

2016-03-30

쿠바 한인 이민사 소개

매달 열리는 한인 교양 강좌 프로그램인 UW 북소리 행사에서는 19일 오후 1시 30분 UW Gowen Hall에서 쿠바 특집으로 한인 2세, 마르따 림 김(한국명: 임은희)씨를 초청, 쿠바의 한인 이민사를 소개했다. 임은희 씨는 쿠바의 한인 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로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훈장, 메달, 표창장을 받은 임천택씨 따님으로 하바나 대학을 졸업, 마탄사스 종합대 교수, 철학부장을 역임했으며 지난 2000년에는 남편 라울 루이즈씨와 함께 Coreanos en Cuba를 저술했고 번역판, '쿠바의 한국인들'을 출간했다고 소개했다 . 한인 4세 루이즈 이즈끼에르도 김씨에 의해 제작된 쿠바의 한인 이민사를 다룬 다큐멘터리인 'Dessarraigo' (뿌리찾기)가 강의 전 상연되었는데 2015년 라틴 아메리카 필름 페스티벌에서 영아티스트 필름 제작자 상을 수상한 20분짜리 작품이다. 임은희씨에 따르면 1033명의 한국인이 농업 이민으로 인천항을 떠나 1905년 4월 15일 1030명이 멕시코 메리나, 유카탄 반도에 도착했다. 부를 이루겠다는 꿈으로 멕시코에 4년 계약으로 도착했지만 4년 후에는 새로운 일자리를 못찾고 거처도 없이 언어, 문화, 전통을 모르는 곳에 남겨지게 됐다. 이로써 아메리카 드림은 악몽으로 변했고 한인들은 멕시코 여러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그 후 1921년, 일본인과 독일인 2명이 멕시코로 찾아와 쿠바를 소개해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쿠바의 사탕수수 밭으로 이주하게 됐다. 약 300명이 1921년 3월 25일 멕시코에서 쿠바에 도착해 사탕수수밭, 설탕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으나 일부 가족들은 낯선 나라에서 일자리, 거처할 곳없이 작은 마을에서 흩어져 살게 됐다. 1950년 '마딴사스'에 도착, 에네껜을 수확, 추수하면서 정착해나가고 일을 잘하는 한국인들은 관리일을 하기 시작했다. '엘볼로'에서는 쿠바에서 최초로 한인회인 대한 국민회를 설립, 한국의 문화, 노래, 음식, 전통 절기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국으로부터 지역적, 문화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고 멕시칸과 결혼하면서 동화되기 시작했으며 경제, 환경적 요건으로 한국적인 것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1940년 노동 국유화로 시민권자에게 일자리 우선권을 주고 1959년 혁명이후 변화로 일자리 평등, 동등화가 추진되었다. 한편, 에네껜 농장이 팔림으로 한국인이 이주하게 되고 연결 고리가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가족들도 흩어지게 됨으로써 정체성을 잃기 시작했다. 1959년생 이후는 정체성 개념이 없어졌는데 현재 한인 인구는 약1060명이다. 그러나 1995년, 없어졌던 한인회가 재설립되고 한국인들이 유대 고리를 회복하면서 정체성을 회복하기 시작했으며, 교회시설, 학교를 세우고 선생님을 보내줘서 한국 역사와 말, 글을 가르쳤다. 언어란 문화의 핵심이며 정체성을 만드는 핵심이다. 현 한인회는 그때 한인회의 정신을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메세지를 전했다. (임은희(왼쪽5번째)씨가 참가자 들과 함께 하고 있다. (이실비아 기자 이실비아 기자

2016-03-21

"사랑하니까 기억하죠, 40년 전 날씨·유니폼 색깔까지"

"1973년 11월 3일인가 13일인가로 기억하는데요. 74 서독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지역 최종예선 호주와의 2차전이 서울운동장에서 열렸어요. 시드니에서 1차전을 0-0으로 비기고 서울에서 우리가 먼저 두 골을 넣었어요. 그런데 호주한테 어이없이 두 골을 먹어 2-2로 비겼죠." "11월 10일입니다. 그날은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데다가 우박까지 내리는 어수선한 분위기였어요. 고재욱의 두 번째 골은 호주 수비수 다리를 두 번 퉁기고 굴절돼 들어갔죠." "제3국인 홍콩에서 최종전을 갖게 됐는데, 그게 11월 13일이네요. 우리 골키퍼 이세연이 군청색 상하의를 입고 나왔는데, 주심이 자신의 옷 색깔과 비슷하다며 갈아입으라고 했죠. 경기장 안에서 선수들이 빙 둘러서 인의 장막을 치고, 그 안에서 이세연이 옷을 갈아입었어요. 왠지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것 같아 불길했는데 결국 1-0으로 졌죠. 골을 넣은 선수가 스코틀랜드에서 뛰고 있었는데…" "짐 매케이 선숩니다. 30m 중거리슛을 때렸는데 그게 골키퍼 오른쪽 상단으로 빨려들어갔고, 그걸로 20년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우리 꿈도 날아갔습니다." 지난주 서울 강남의 한 레스토랑. 중년의 두 남자가 열띤 '토크 배틀'을 벌이고 있다. 40년도 더 지난 일들을 지난 밤에 본 듯 생생하게 묘사한다. 장규홍(51)채널인 대표와 장원재(49) 전 숭실대 교수다. 두 장씨는 스포츠계의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다. 이들은 축구 뿐만 아니라 야구·농구·복싱 등 각 종목의 기록과 데이터, 인물, 중요 경기 상황 등을 녹음기를 틀어 놓은 듯 재현할 수 있다. 화제는 야구로 넘어갔다. "잠깐 반짝 하고 사라진 고교야구 팀이 꽤 있죠. 대광고, 배문고, 대구대건고, 상문고, 명지고, 오산고…." "명지고에는 정삼흠이 다녔죠. 부산공고도 야구를 꽤 했어요. 김명성 감독, 황성록, OB 감독대행 한 이재우…." "황성록은 75년 아시아야구선수권 때 이해창과 함께 센터필더를 봤죠." "그때 클린업 트리오가 3번 김봉연, 4번 김우열, 5번 윤동균이죠." "1번 이해창, 2번 배대웅, 6번 강병철, 7번 김재박, 8번 우용득, 9번 투수 이선희 또는 김호중." 난형난제다. 장원재씨가 중계방송을 하듯 당시 상황을 속사포처럼 토해 내면, 장규홍씨는 사람 이름과 데이터를 가래떡 뽑아내듯 술술 풀어놓는다. 인터넷 생방송을 하면 대박 날 아이템이다. 스포츠 외 문화·예술에도 관심 요즘은 궁금한 게 있으면 인터넷 포털이 뭐든 알려준다(물론 틀린 내용이나 출처가 불분명한 것도 많다.) 그 전에는 친구들끼리 호프집에서 옛날 경기 스코어나 득점자 얘기 하다가 의견이 갈리면 "내기하자"며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바쁜 야근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두 사람은 그 정도 차원이 아니다. 그렇다고 특정 분야에 집착하는 '오타쿠' 계열도 아니다. 장 대표는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를 받은 뒤 iTV·SBS CNBC 등에서 사회부·정치부 기자로 일한 언론인 출신이다. 고려대 국문과를 나온 장원재씨는 영국에서 연극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숭실대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어떻게 스포츠 쪽 만물박사가 됐을까. 두 사람의 대답은 똑같았다. "스포츠를 좋아하니까. 좋아하면 관심을 갖게 되고, 관심이 깊으면 뇌리에 오래 남게 되니까." 어릴 적 아버지 손 잡고 서울운동장으로 축구·야구 보러 가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는 장 박사. "결정적인 장면들은 TV에서 반복해서 틀어주잖아요. 그걸 오래 보면 언제든 자동 재생을 할 수 있게 돼요. 스포츠는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거잖아요. 그래서 스포츠는 돈 버는 것과 상관 없이 인생을 풍성하게 해 주죠." 그는 해박한 축구 지식 덕에 팔자에 없는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 장 대표의 부친은 빙상 선수 출신인 장명희 아시아빙상연맹 회장이다. "아버지 영향으로 스포츠에 관심을 갖게 됐죠. 아는 게 많으니 친구들이 이것저것 물어봐요. 헷갈리는 건 자료를 찾아 확인하고, 이러다 보니 기억이 더 선명해지더라고요." 영상 분야에 관심이 많은 그는 영상 한국야구 인물사를 제작하고 있다. 가칭 '열전 고교야구 시대.' 한 시대를 풍미한 고교야구 스타 출신을 한 명씩 인터뷰 해 기록을 남기고, 생생한 에피소드를 담아내는 작업이다. 선린상고 편을 끝냈고, 군산상고 편을 찍고 있다. 선린상고 편에서는 배성서·김우열·유남호·윤석환·박노준·김건우 등 21명을 인터뷰했다. 두 사람의 기록에 대한 집착은 스포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장 대표는 각 분야 셀레브리티의 이면을 파헤친 『공감 소통 공유: 싸이에서 박근혜까지』라는 책을 냈다. 그는 한국 정치사의 숨겨진 얘기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장 박사는 배우론(論)을 담은 『배우란 누구인가』를 최근 출간했다. 그는 인터넷 방송인 '배우고 나누는 배나TV' 대표도 맡고 있다. 정치·사회·문화·경제 등 각 분야에서 지식과 교양을 전해주는 방송이다. 최근 누적 조회수 400만을 돌파했다. "필름 보존하기보다 다시 찍어" 두 사람의 만남은 한·일 월드컵이 열린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iTV 기자였던 장 대표는 장 박사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에 진출한 북한 경기를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장 박사가 영국 유학 당시 수소문해 사들인 것이었다. 당시 장 기자는 장 박사의 집에까지 찾아가 잉글랜드 월드컵 북한의 전 경기 장면을 확인했다. 기록의 힘은 강하고, 데이터의 가치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하지만 고도성장 과정에서 우리는 이를 무시해왔다. 장 대표는 "한국 스포츠의 결정적인 장면을 담은 자료 중 사라진 게 많아요. 80년대까지만 해도 방송사에서 영상 필름을 보존하는 사람보다 그 필름을 다시 돌려 새로운 걸 찍는 사람을 더 인정해 줬거든요. 최동원의 경남고 시절 다이내믹한 투구 장면이 '대한 늬우스'에 잠깐 나오는데 그것도 1루측에서 찍은 것이죠"라며 안타까워했다. 장 박사가 말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기록을 우리는 충무공의 난중일기, 서애 류성용의 징비록 정도에서만 확인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일본에는 배 타고 조선으로 건너오는 왜병들이 남긴 메모까지 보존돼 있어요. 선상에서 포르투갈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는 장면까지 나옵니다. 임진왜란때 조선의 도공이 어디 출신이고 어디로 가서 일했는지도 다 기록돼 있어요." 기록과 데이터를 잘 보존하면 그 자체로 상품과 콘텐트가 된다는 게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런 점에서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옛 서울운동장)을 얘기할 때 둘의 표정은 어두웠다. 없앨 만한 이유가 있다면 없앨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 대책 없이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창고에 잠자고 있던 많은 자료들이 쓰레기장으로 갔다.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영 행사가 열렸고, 펠레와 에우제비오가 묘기를 보여줬고, 고교야구의 열기가 터져나온 곳이다. 건물이 없어지면 건물이 갖고 있는 역사를 재구성하기 어렵다. 장 박사는 동대문운동장에 얽힌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야구장 3루측과 축구장 본부석 오른쪽이 1m 정도 간격으로 붙어 있어요. 축구 빅이벤트가 열리는 날이면 사람들이 야구장으로 들어와 축구장으로 넘어갑니다. 사다리 아저씨가 500원씩 받고 사다리를 놔 주거든요. 내려다보면 아찔하지만 다들 그리로 건너다녔지요." "원로들 옛날 기억 잘 못할 땐 안타까워" 저녁 메뉴를 시켜 놓고 '스포츠 메모리 배틀' 제2라운드를 시작했다. 장 박사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어렸을 때 우상은 역시 이회택이었죠.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우리 편이 밀린다 싶으면 이회택은 수비 가담은 하지 않고 하프라인에서 짝다리 짚고 인상만 박박 쓰고 있었어요. 스타킹도 항상 발목까지 내려오게 신고. 반항아 스타일이었지만 축구만은 정말 잘했죠." 장 대표는 "스포츠 원로들이 자신들의 플레이나 쌓은 기록에 대해 의외로 기억을 잘 못해서 안타까울 때가 많았어요. 김인식 감독님도 모교인 배문고를 오래 맡았는데 성적이 잘 나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그 얘기를 자세히 해 드리면 그제야 '맞아 맞아, 그때 그랬어'하시죠"라고 말했다. 장 박사가 말을 받았다. "77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때 미들스버러 원더러스라고 영국 팀이 왔어요. 한국이 5-1로 이겼는데, 차범근 선수가 유니폼 하의 안에 입는 흰색 언더팬티 고무줄이 끊어진 거예요. 한동안 허리춤을 잡고 뛰던 차범근이 안 되겠는지 아예 벗어버리고 노팬티로 경기를 마쳤죠. 나중에 차붐에게 물어봤는데 기억을 못한다고 하데요." 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펠레 얘기가 나오자 배틀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장 박사가 열을 올렸다. "지금도 월드컵 사상 최고의 장면으로 기억해요. 펠레와 우루과이 골키퍼 사이로 스루패스가 왔는데 펠레가 공을 안 건드리고 슬쩍 건너뛴 뒤 골키퍼 뒤로 돌아가 슈팅을 했죠. 골대를 살짝 벗어났는데, 그게 들어갔다면…" 장 대표가 점잖게 말했다. "근데 당시 우루과이 골키퍼가 누군지 기억하시는지?" 허를 찔린 장 박사가 멈칫 하는 사이 장 대표가 말했다. "마주르키위치. 러시아계 선수죠." 점입가경이다. 주문한 해물 스파게티만 퉁퉁 불고 있었다. 정영재 스포츠 선임기자

2016-02-08

"미주 한인 이민사 큰 그림을 담았죠"

소설가 박경숙(사진)씨가 장편소설 '바람의 노래'(문이당)를 출간했다. 2013년 소설집 '빛나는 눈물'로 통영문학상을 받은 이민 작가의 또 하나 진솔한 이민 스토리다. 다양한 작품을 통해 이민자 생의 쓰고 단 열매를 다룬 그는 이번 소설집에선 뿌리를 보여주려 한다. 이민 100여 년 전 하와이로 떠났던 이민 1세대를 주인공으로 이들이 고향을 떠나 이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된 사연과 힘겹게 정착해 나가는 과정, 이를 통해 한인 이민의 역사가 그려진 거대한 그림을 그는 페이지마다 가득 담았다. '본질과 현상' 발행인인 소설가 현길언씨는 서평을 통해 "가난한 나라의 백성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안고 하와이 이민을 결정한 그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역사를 이 작품을 통해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며 미주 이민사를 소설로 정리해 보고 싶은 작가의 소망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고 호평한다. 소설의 배경은 구한말. 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하급 군인의 유복자 이갑진이 제물포항의 부두 노동자로 일하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배를 타고 하와이로 떠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곳에서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고된 삶을 보내던 이갑진은 결혼 적령기를 넘겨 한인교회를 통해 신붓감으로 퇴기의 딸 김수향을 만나 결혼한다. 그리고 미국에서의 한인 이민의 역사는 이들의 질풍노도 같은 삶처럼 힘들고 어렵게, 그러나 탄탄하게 뿌리를 내리며 흘러 내려온다. "미국에 이민와 떠도는 듯한 삶을 살면서 그래도 희망을 가졌던 것은 이민 역사를 소설로 써보겠다는 야망때문이었다. 이번 소설을 쓰기 위해 하와이를 포함, 이곳 저곳에서 자료 조사를 하는 동안 매우 많은 것을 배우며 느꼈다. 이민의 흔적이, 우리 선조들의 족적이 훌륭하고 가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매우 값진 경험이었다. 이번 책 출간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박경숙씨는 '바람의 노래'가 한국 출판사에 의해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출간되었지만 사실 미국의 한인 이민자 마음에 닿는 작품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민생활이 힘들 때마다 이민사를 쓰려고 미국에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자위로 마음을 추스렸다"는 작가는 이번 책으로 만족하지 않고 계속 그 꿈을 마음에서 놓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1992년 미국에 온 박경숙씨는 2005년 '안개의 칼날'로 가산문학상, 2007년 '약방집 예배당'으로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최우수상 수상, 2011년 단편 '돌아오지 않는 친구'로 두만강문학상을 수상했다. 박경숙씨는 현재 미주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으로 활동 중이다. ▶문의: [email protected] 유이나 기자

201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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