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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읽는 세상] 왕비의 작은 놀이터

프랑스 혁명으로 단두대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음악을 좋아했다. 음악의 도시인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은 덕분에 음악에 대한 소양이 남달랐다. 특히 오페라를 좋아했는데, 당대에 유행하는 오페라는 거의 꿰뚫고 있었다. 프랑스로 시집을 온 이후에도 요즘 젊은이들이 유행가를 따라 부르듯이 늘 오페라 아리아를 흥얼거렸으며, 틈만 나면 베르사유에서 파리까지 오페라를 보러 가곤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궁정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음악만이 유일한 해방구였는데, 그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그녀는 베르사유 궁의 후미진 곳에 자신만의 도피처를 만들었다. 트리아농 근처에 오페라나 음악회를 열 수 있는 자신만의 작은 극장을 지은 것이다. 극장이 완성된 후, 그녀는 수시로 왕족이나 귀족들을 불러서 함께 놀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객석에 앉아 구경하는 것보다 직접 무대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궁전의 과도한 호사스러움에 권태를 느낀 것일까? 무대 위에서는 허름한 옷을 입고 양치기 처녀나 하녀, 농촌 처녀를 연기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녀뿐만 아니라 왕의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도, 절친한 친구인 폴리냑 백작 부인도 모두 배우나 가수가 되어 무대에 섰다.   그렇다면 객석에는 누가 앉아 있었을까? 바로 하인들이었다. 하인들이 객석에 앉아 무대에서 자기들을 ‘연기하는’ 높으신 분들의 하인 놀이에 박수를 보내는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객석에 앉아있던 하인들은 하녀로 분장한 왕비가 무대에서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는 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물론 지금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왕비가 궁정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선택한 방식 그 자체가 허구이자 유희일 뿐이라는 것을.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놀이터 왕비 오페라 아리아 프랑스 궁정 하인 놀이

2024-12-16

[열린광장] 설 밑을 맞이하면서

어느덧 2024년의 마지막 달 12월을 맞이했다. 음력으론 동짓달인 11월이 지나고 섣달인 12월이 다가오니 설밑(年末)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그런데 동짓달과 관계있는 몇몇 행사가 섣달에 있는 것이 꽤 재미있다. 이를테면 액운을 막는다는 동지 팥죽(冬至一粥)을 동짓날에 쑤는데, 보통 12월 22일 경이다. 새알심을 넣어 쑤는 팥죽은 새해를 맞아 나이만큼의 개수를 먹는다고 한다.   올해는 음력 11월 1일과 양력 12월 1일이 겹치고, 음력 12월 1일이 양력 12월 31일이라 음력과 양력이 같은 달에서 만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양력 12월은 북반구의 겨울이 시작되는 까닭에 ‘혹한의 달(the frosty month)’로 불린다.     12월은 성탄절이 있는 달이다. 초기 영어의 ‘Christes Maesse’에서 비롯된 ‘Christmas’는 서기 336년 로마 달력에 12월 25일로 기록된 이후 기독교의 큰 명절이 되었다. 이 성탄절은 1500년 종교개혁이 이뤄질 때까지 발전했고 신교 탄생에 크게 기여했다. 성탄절과 아울러 예수의 탄생을 축하기 위한 강림절(Advent)이 크리스마스이브 전 일요일까지 4주 동안 열리기도 한다.   양력 12월에는 일어난 일도, 태어난 유명인도 많다. 성가대 지휘자를 오래 한 탓인지 12월에 출생한 음악가 몇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프랑스의 작곡가 엑터 베를리오즈가 1803년 12월 11일  태어났으며,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는 1858년 12월 22일 출생했다. 그리고 미국의 재즈 피아니스트 데이브 브르벡이 1920년 12월 6일에, 미국이 자랑하는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는 1923년 12월 3일 태어났다. 특히 오페라 가수인 칼라스가 부른 ‘고요한 밤, 거룩한 밤(Silent night, holy night)’ 노래를 감명 깊게 들은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리고 수많은 찬송가를 만든 영국의 찰스 웨슬리 목사의 생일이 1707년 12월 18일이다. 웨슬리 목사가 지은 성탄절 노래 ‘들으라, 천사 찬송하시네(Hark, the herald angels sing)’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정치인으로는 캐나다 총리를 세 번이나 역임한 윌리엄 L. M. 킹이 1874년 12월 17일 태어났는데 12월 17일은 나의 결혼기념일과 같아 잊을 수가 없다.       연말에 새길만한 동서양의 비슷한 명언도 재밌다. 히포크라테스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Life is short, art is long)’는 말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하지만 장자의 ‘오생야유애, 이지야무애 (吾生也有涯, 而知也無涯)’라는 말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삶에는 한이 있지만, 앎에는 한이 없다’는 뜻이다. 한이 있는 걸 가지고 한이 없는 것을 좇으려 하다 보니 삶이 매우 어렵게 이어진다는 뜻이다.     또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He who truly knows has no occasion to shout”라는 말을, 노자는 ‘지자불언, 언자부지 (知者不言, 言者不知)’라는 말을 남겼다. 삶의 참뜻을 이해하는 사람은 말을 적게 하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세상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는 뜻이다.  윤경중 / 목회학박사·연목회 창설위원열린광장 맞이 음력과 양력 오페라 작곡가 웨슬리 목사

2024-12-08

[음악으로 읽는 세상] 줄리엣의 왈츠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인도를 다 주어도 셰익스피어와는 바꾸지 않겠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영국인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위대한 극작가였다. 비록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작품들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풍부한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 음악 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많은 작곡가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이야기였다.   클래식 음악 중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이 여럿 있다. 차이콥스키의 환상서곡, 프로코피예프의 발레 음악, 구노의 오페라, 베를리오즈의 극적 교향곡이다. 또한 벨리니는 같은 소재로 ‘몬테규 가와 캐퓰릿 가’라는 오페라를 작곡했고, 레너드 번스타인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20세기 버전인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작곡했다.   이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작품은 구노의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오페라 1막의 무도회에서 로미오가 줄리엣의 아름다움에 황홀해 하고 있을 때, 줄리엣의 유모는 줄리엣에게 청혼자인 파리스를 칭찬하며 이제 적당한 남자를 만나 시집을 가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줄리엣은 이런 유모의 충고에 ‘꿈에 살고파’라는 아리아로 응답하는데, 왈츠풍의 이 아리아를 흔히 ‘줄리엣의 왈츠’라고 한다.   “아! 나를 황홀하게 만든 이 꿈속에서 살고 싶어. 달콤한 불길이 내 영혼 안에 있어. 도취된 젊음은 단 하루만 지속되지. 눈물을 흘리는 때가 오면 행복은 달아나 돌아오지 않아. 나는 우울한 겨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 송이 꽃잎을 따기 전에 그 장미 향기에 취해 살고 싶어.”   이 노래를 부를 때까지만 해도 줄리엣은 꿈에 부풀어있는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곧 다가올 비극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그녀가 부르는 왈츠는 경쾌하기 그지없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줄리엣 왈츠 오페라 베를리오즈 클래식 음악 음악 분야

2024-12-02

[문예마당] 오페라 ‘투란도트’에 홀리다

  한국에 와서 좋은 것 중 하나는 하고 싶은 생각만 있으면 문화생활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가 볼 만한 미술관이 많고 높은 수준의 음악회도, 뮤지컬이나 연극 공연도 심심찮게 열린다. 지하철이 서울 시내, 서울이 아니더라도 가까운 지방까지 안 닿는 곳이 없으니 차가 없어도 어디든지 갈 수 있다.  LA에서도 다양한 문화 행사가 있기는 하지만 내 취향에 맞는 행사는 그리 많지 않다. 혹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하더라도 멀리 있고 운전을 잘 못 하니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투란도트 아레나 디 베로나 오리지널 내한공연’이라는 광고를 봤다.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무조건 봐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몇 달 후에 있을 공연을 위해 일찌감치 티켓을 예매했다. 티켓 값이 만만치 않았지만 대신 다른  비용을 절약하기로 마음먹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집에서 일찌감치 출발했다. 지하철을 몇 번 환승하며 국내 최대 규모의 실내 공연장인 올림픽체조경기장 KSPO 돔 안으로 들어갔다.         평일이라 그런지 객석이 꽉 차지는 않았지만 그 큰 공간에 상당히 많은 관객이 앉아 있었다. “못살겠다, 힘들다”는 아우성은 다 현실과 동떨어진 말 같았다. 한국은 식당이나 콘서트장 등 어디를 가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다.  트럼프가 “한국은 머니 머신”이라며 주한미군 주둔 비용 분담액을 올리겠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무대에 불이 켜지고 공연이 시작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압도적인 스케일에 입이 벌어졌다. 웅장하고 화려한 무대장치와 무대 위에 오른 수백 명의 출연진에 내 눈을 의심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진 화려한 중국풍 의상과 세트는 실제 베이징 황궁을 연상케 했다.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는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 중 하나이다. 많은 작곡가의 작품들이 있지만 투란도트가 한국인들에게 특히 유명한 이유는 대표곡 ‘Nessun dorma(아무도 잠들지 말라)’  때문일 것이다.   아리아 네순 도르마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경기 내내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된 데다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결승전 전날 전 세계에 방영된 ‘쓰리 테너 콘서트’에서 부르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다.   ‘투란도트’는 자코모 푸치니의 유작으로 그가 작곡 중 숨지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마지막 두 장면은 푸치니의 스케치에 따라 제자에 의해 완성된 작품이다. 이에 관해 작곡가 푸치니와 지휘자 토스카니니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둘은 친한 사이였지만 다툼도 잦았다. 크리스마스 즈음 푸치니가 친구들에게 빵을 선물했는데 잘못해서 토스카니니에게도 보냈다. 토스카니니는 푸치니가 보낸 줄도 모르고 그 빵을 먹어 버렸다. 푸치니는 토스카니니에게 ‘크리스마스 빵, 잘못 보냈음’ 이라는 전보를 보냈고, 이에 토스카니니는 ‘크리스마스 빵, 잘못 알고 먹어 버렸음’이라는 답변을 보냈다. 이 사건 이후 둘은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훗날 초연에서 토스카니니가 투란도트를 연주하게 되었는데 그는 완성된 곡을 거부하고 푸치니가 작곡한 마지막 부분인 ‘류의 죽음’까지만 공연했다. 그리고 청중들을 향해 “이 오페라는 여기서 끝납니다. 원작자가 사망하여 뒷부분을 완성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퇴장해 버렸다고 한다.   시대적 배경은 고대 중국의 베이징이지만 고증이 없는 판타지에 가깝다.  내용도 다소 진부하다. 하지만 용감한 왕자가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 흠모하는 왕자님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노비의 순수한 사랑, 냉담한 공주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 등 강렬한 사랑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많이 알려졌지만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한다.  남자에 대한 혐오와 복수심으로 얼음같이 차가운 투란도트 공주는 자신에게 청혼하러 온 남자들에게 세 가지 수수께끼를 낸다. 모두 맞추는 사람과는 결혼하겠지만 만일 맞추지 못하면 참수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남성이 그녀의 미모에 반해 도전했다가 참수형을 당하고 만다.   그 무렵 전쟁으로 나라를 잃은 칼라프라는 용감한 왕자가 투란도트에게 한눈에 반한다. 수수께끼에 도전해 세 가지를 다 풀지만 투란도트는 분노하며 그와의 결혼을 거부한다. 칼라프는 만약 동이 트기 전까지 자신의 이름을 맞히면 기꺼이 죽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자신과 결혼해야 한다고 공주에게 역으로 제안한다.     투란도트는 칼라프 왕자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 된다. 칼라프 아버지와 노비인 류를 잡아 와 고문한다. 칼라프를 흠모하는 류는 모진 고문에도 그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자결한다.  칼라프는 투란도트에게 분노하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공주를 아내로 맞지 않겠다며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밝힌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류를 통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공주는 결국 칼라프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 둘은 모든 사람의 축복을 받으며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이번 ‘투란도트’ 한국 공연은 푸치니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서 열렸다.  ‘아레나 디 베로나 페스티벌’팀이 이탈리아 베로나에서만 볼 수 있었던 웅장한 오페라 무대를 서울로 옮겨왔다는 자체만으로도 큰 화제가 됐다. 베로나 축제팀 100년 역사상 해외 공연은 한국이 처음이라고 하니 이번 공연은 한국 오페라 역사의 한순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세계적인 명작 오페라에 걸맞게 캐스팅도 초호화였다. 월드 클래스 성악가들의 폭발적인 가창력과 연기력, 아름답고 장엄한 오케스트라 음악은 관객들에게 큰 기쁨을 선사했다. 특히 트란도트의 하이라이트 ‘아무도 잠들지 말라(Nessun dorma)’를 현장에서 듣고  가슴에서 뜨거운 감동이 몰아쳤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의 엄청난 환호와 박수갈채 속에서 출연진이 무대인사를 할 때 나도 오랫동안 손이 아프도록 손뼉을 쳤다. 목이 터져라 환호성도 질렀다. 순간 마음속에 쌓였던 모든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한 아름 선물을 안은 듯 기쁨이 충만했다.   공연장을 빠져나오니 날은 저물어 어둑어둑해졌다. 10월 중순의 휘영청 달 밝은 가을밤에 마음은 이탈리아 고대도시 베로나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잊지 못할 소중한 경험을 안고 서둘러 집에 오니 밤 12시였다. 마음은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으나 이틀을 꼼짝 못 하고 집에서 쉬었다. 한국이 아무리 갈 곳이 많고 즐길 거리가 많으면 뭣하랴! 이제는 체력이 달리는걸.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투란도트 오페라 투란도트 공주 투란도트 아레나 오페라 무대

2024-11-28

[음악으로 읽는 세상] 백조의 성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지은 루트비히 2세는 친구 하나 없이 엄격한 통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고립된 생활을 하던 그에게 유일한 탈출구가 있다면 그것은 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을 보면서 환상의 나래를 펴는 것이었다. 그 그림 중에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이 있었다. 로엔그린은 백조가 모는 배를 타고 나타나 곤경에 빠진 소녀를 구한 다음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지는 전설 속 인물이다. 바그너가 이 전설을 바탕으로 ‘로엔그린’이라는 오페라를 만들었는데, 루트비히 2세는 15살 때 ‘로엔그린’을 처음 보고 완전히 백조의 기사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는 나의 백조의 성을 지을 것이라고.   루트비히 2세는 19살의 나이로 왕이 되었다. 세상 물정 모르고 환상 속에서 살던 젊은이가 갑자기 실권을 쥐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 환상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 앞뒤 안 가리고 돌진할 것이다. 루트비히 2세 역시 그랬다. 1869년, 그는 꿈에도 그리던 새로운 백조의 성,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짓기 시작했다. 말이 백조의 성이지 사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바그너 오페라 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엔그린’ ‘탄호이저’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르지팔’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니벨룽겐의 반지’ 등 바그너 오페라 장면을 담은 그림으로 성 안을 그냥 도배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루트비히 2세는 성을 짓고 바그너의 오페라를 후원하는 데에 막대한 돈을 썼다. 왕실 재정을 탕진한 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빚까지 지게 되었다. 이를 보다 못한 대신들이 그를 왕좌에서 강제로 끌어내렸다. 강제 퇴위를 당한 지 닷새 후인 1886년 6월 13일, 루트비히 2세는 뮌헨 근처의 슈타른베르크 호수에서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됐다. 평생 환상 속에 살았던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현실적이고 비극적인 죽음이었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백조 바그너 오페라 기사 로엔그린 루트비히 2세

2024-11-11

한인 가수들, LA오페라단 주역으로 뜬다…'로미오와 줄리엣'서 주연 데뷔

LA오페라에서 한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백인 중심의 오페라 무대에서 한인이 주요 공연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는 등 활약상이 주목받고 있다.   먼저 내달 2일부터 LA오페라에서 열리는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에서 김연준(영어명 듀크.사진 LA) 씨가 로미오 역할을 맡아 첫 데뷔를 한다.   셰익스피어 원작의 고전 작품인데다 세계적인 LA오페라 무대에서 백인이 아닌 아시아계 남성이 로미오 역할을 맡아 운명적인 사랑을 그린다는 점에서 파격적인 캐스팅이다.   김씨는 오페라계에서 떠오르는 스타로 꼽힌다. 16살 때 이민을 왔고, 한국의 발라드 가수 김광석과 박효신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꿈을 키웠다. 첫 노래 교사가 성악을 전공한 것을 계기로 성악에 입문했는데, 대학교 때 오케스트라와 함께 오페라 곡을 부르다가 오페라에 흠뻑 빠지게 됐다.   김씨는 "과거에는 한인 성악가들이 타지에서 외로움과 문화적 적응 문제로 실력에 비해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다"며 "지금은 한인들이 미국과 유럽 오페라 무대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실감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2011년에는 LA 오페라에서 관객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봤는데, 이번에는 무대에서 로미오로 서게 돼 감격스럽다"고 덧붙였다.   LA오페라에 따르면 주요 공연의 한인 성악가들은 또 있다. 특히 이달 중순 LA오페라에서 막을 내린 '나비 부인(Madama Butterfly)'의 주요 배우들도 한인이었다.   손현경(영어명 카라) 성악가는 나비 부인 작품에서 주인공인 초초상(Cio-Cio-San) 역을 맡았다. 고등학교 시절 오페라 '마농 레스코'를 본 뒤 그 감동으로 인해 오페라 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손 성악가는 "초기에는 외모와 체구로 인해 역할의 제한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분장 기술도 발전했고 무엇보다 한인 성악가들이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며 "이전 세대가 겪었던 어려움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지금은 훨씬 나아졌다"고 덧붙였다.   손 성악가와 함께 나비 부인에서 초초상의 충실한 하녀인 스즈키 역할을 맡은 것도 한인이었다.   김효나 성악가는 유럽 오페라 무대에서 경험을 쌓은 실력파 배우다. 김 성악가는 "유럽의 경우 거의 모든 오페라 극장에 한 명 이상의 한인 성악가가 활동하고 있을 정도"라며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등을 의미하는 'DEI' 때문이 아니라 한인 성악가들이 실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 어디서도 밀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전했다.LA오페라 공연에 한인들이 잇따라 무대에 서고 있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주류 오페라 무대에서 한인 음악가들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며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멜로디 창 히튼 아시안 오페라 연합(AOA) 디렉터는 "아시아계 성악가들은 주로 아시아 배경의 작품이나 특정 역할에만 국한돼 있었는데 최근 더 폭넓은 작품과 역할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히튼 디렉터는 "아시아계 성악가들의 실력은 항상 뛰어났지만 동등한 기회를 얻지 못했었다"며 "현재 아시아계 음악가들이 주목받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연준씨가 주인공 역할을 맡은 샤를 구노의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은 내달 23일까지 LA 오페라에서 열린다. 김씨는 이 작품에 대해 "샤를 구노의 음악은 진짜 사랑을 표현하는 것처럼 절절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레코딩으로는 느낄 수 없는 생생한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점이 오페라의 진정한 매력"이라며 "마이크 없이도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는 성악가의 목소리가 관객을 감동시킬 것"이라고 전했다.   정윤재 기자la오페라단 로미오 la오페라 무대 한인 성악가들 오페라 가수

2024-10-29

해설이 있는 오페라 갈라…27일 파사데나장로교회

  파사데나장로교회(담임 최진영 목사)가 ‘이웃을 향한 문화기획 시리즈’의 일환으로 오는 27일(일) 오후 5시 30분, 오페라 갈라 콘서트를 개최한다.   이번 공연에서는 피가로의 결혼, 세비야의 이발사, 카르멘 등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오페라 명곡들이 연주되며, 아나운서 출신 소프라노 김종숙의 해설이 더해져 관객들이 오페라를 더욱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 마련될 예정이다.   공연에는 남가주에서 활동 중인 오페라 주역 성악가들이 대거 참여한다.   소프라노 김주혜와 김시연, 메조소프라노 채주원, 테너 오위영과 전승철, 바리톤 권상욱이 각기 다른 음색과 개성 넘치는 목소리로 파사데나장로교회의 아름다운 공간을 울릴 예정이다.   또한, 김정아, 강희선, 한지인, 김원선으로 구성된 정상급 연주자들이 투란도트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와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의 아리아’ 같은 명곡들을 현악 사중주로 새롭게 재해석해 깊은 감동을 선사하게 된다.   파사데나장로교회는 지역사회와의 문화적 소통을 위해 다양한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을 기획해왔다. 이번 오페라 갈라 콘서트는 오페라 애호가뿐만 아니라 처음 접하는 사람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음악 속에 담긴 인간의 감정과 아름다움을 나누는 이번 공연은 전석 무료로 진행되며, 선착순으로 입장할 수 있다.   ▶문의: (213) 379-2527 장열 기자ㆍ[email protected]게시판 오페라 오페라 명곡들 오페라 애호가 오페라 주역

2024-10-24

[음악으로 읽는 세상] 서푼짜리 오페라

1782년 영국에서 초연된 존 게이 극본, 페푸쉬 음악의 ‘거지 오페라’는 당시 런던 오페라 무대를 휩쓸던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의 주된 소재는 그리스 로마 신화나 왕·영웅·귀족들의 일대기였는데, 이 작품은 당대를 살아가는 밑바닥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거지 오페라’가 나온 지 150년이 지난 1928년,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는 작곡가 쿠르트 바일과 손잡고 이 작품을 번안한 ‘서푼짜리 오페라’를 만들었다. ‘거지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서푼짜리 오페라’의 등장인물은 도둑질이나 사기, 매춘, 폭력, 부정을 일삼으며 살아가는 밑바닥 인간들이다. 왕이나 귀족, 그리스 로마의 신들이 줄줄이 나오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비해 등장인물들의 신분이 엄청나게 낮아졌다.   신분이 달라졌으니 음악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밑바닥 인생들의 노래가 왕후장상의 노래와 같을 수는 없으니까. 이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들은 일단 부르기가 쉽다. 전문적인 성악훈련을 받아야 부를 수 있는 오페라 아리아와 사뭇 다르다. 멜로디도 그냥 평이하다. 그렇게 평이한 노래를 ‘잰 체하지 않고’ 부른다. 잘 부르려는 어떤 노력도 없이, 혼신의 힘을 절대로 기울이지 않고, 전혀 심각하지 않게, 통곡하거나 격렬하게 분노하지도 않고 남의 얘기하듯 부른다.   ‘서푼짜리 오페라’는 탐욕과 위선으로 가득 찬 당대 사회를 냉소적으로 풍자한 작품이다. 마지막에 칼잡이 매키스가 교수형에 처해지기 직전 왕의 사신이 나타나 그가 사면됐음을 알리는 장면이 나온다. 관객들은 극이 해피엔딩으로 끝났다고 기뻐한다. 하지만 여기서 브레히트는 매키스의 입을 통해 관객들에게 냉철한 메시지를 던진다. 방금 보았던 해피엔딩은 실제가 아닌 환상이라고. 당신들의 삶에 ‘왕이 보낸 사신’은 오지 않는다고.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오페라 이탈리아 오페라 오페라 아리아 그리스 로마

2024-09-30

발레·오페라 진수…실황 감상…‘마술피리’, ‘심청’ 등 3편 상영

K발레와 오페라 공연을 실황으로 감상할 수 있는 상영회가 열린다.     LA한국문화원(원장 정상원)은 서울 예술의전당(SAC)과 공동으로 3회에 걸쳐 ‘공연예술 콘텐츠 상영회 K발레·오페라 시리즈’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상영회는 예술의전당이 선별한 예술 콘텐츠를 대형 스크린을 통해 감상할 수 있는 ‘SAC 온스크린(SAC on Screen)’ 프로젝트다.     오는 22일 오후 7시 발레 ‘라 바야데르’, 9월 12일 오후 7시 오페라 ‘마술피리’, 10월 10일 오후 7시 창작 발레 ‘심청’ 등 세 작품이 차례로 상영된다.     시작 전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LA에서 활동하고 있는 발레와 오페라 전문가가 직접 작품 해설을 진행할 예정이다.     발레 ‘라 바야데르’는 고전 작품이자 가장 드라마틱한 발레 중 하나로 꼽히는 대작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유니버설 발레단이 고전 발레의 정수를 보여준다.     6시30분부터 한미무용연합(대표 진 최) 소속 발레리나인 케이티 페이 스미스씨가 작품 해설과 발레 시연을 진행한다.     18세기 후반 유럽 배경의 마술피리는 1791년 모차르트가 작곡한 대표적인 오페라다. 6시 30분부터 LA 마스터 코랄 단원이자 남가주에서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규영 씨가 작품 해설을 진행한다.     유니버설 발레단의 창작 발레 ‘심청’은 1986년 초연 후 전 세계 15개국 40여 개 도시에서 한국의 고전을 세계에 알린 대표적인 창작 발레다.     정상원 LA한국문화원장은 “이번 발레 오페라 시리즈에서는 상영회 직전 전문가들이 영어와 한국어로 해설을 진행한다”며 “접하기 쉽지 않은 예술 장르를 쉽고 재미있게 감상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상영회는 무료로 사전 예약이 필요하다. 문화원 웹사이트(kccla.org)에서 할 수 있다.     ▶주소:5505 Wilshire Blvd. LA   ▶문의:(323)936-7141 이은영 기자오페라 발레 오페라 진수 유니버설 발레단 오페라 전문가

2024-08-11

[열린광장] 오페라 투란도트의 감동

푸치니의 투란도트 오페라를 떠올리면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네슨 도르마 (Nessun dorma) 곡 하나뿐이다. 그것도 전부가 아닌 중간부터 시작되는 아리아 한 소절만 알고 있다. 어느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들어 본 것 같기도 하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치도 도밍고가 즐겨 불렀고, 발레 수업 시간에도 센터 아다지오나 림바링을 할 때 자주 사용하는 음악이어서 이 곡 하나만 친숙하다. 네슨 도르마 하나를 듣기 위해  일 년 전 미리 시즌티켓을 사두었다고도 할 수 있다.   LA 오페라의 투란도트는 20년 만에 다시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공연장은 빈 좌석 하나 없이  꽉 찼다. 오페라를 보러 갈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 있다. 내 좌석에 내 이름이 쓰인 카드가 있다는 것이다. 어김없이 ‘Dear Jean Choi, 투란도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는 푸치니의 마지막 오페라가 여러분의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라며 2025년 시즌 티켓 좌석 예약을 기대합니다.’ 결국 티켓을 사라는 말이지만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 같아 감동이었다. 집에 돌아와 결국 나는 2025년 시즌 티켓도 예약을 하고 말았다.     푸치니의 12개 오페라 작품 중 라보엠, 투란도트, 토스카, 마농레스코, 나비부인 등은 알고 있다. 그중 투란도트는 중국을 배경으로 푸치니가 미완성 작품으로 남긴 채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제자인 프란코 알파고에 의해 1926년 초연이 됐다. 중국 황제의 딸인 얼음공주 투란도트와 그녀의 수수께끼를 푸는 칼라프 왕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핑, 퐁, 팡 대신들의 재치와 익살스러운 모습, 죽음으로 사랑을 지키는 시녀 류의 극적인 이야기가 웅장한 음악과 어우러져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특히 화려한 의상, 수많은 등장인물, 데이비드 호크니가 디자인한 환상적인 무대는 근래에 보기 드문 대작으로 공연 내내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       호크니는 89세의 나이지만 지금도 회화뿐만 아니라 아이패드, 판화, 카메라, 복제 등 다양한 수단과 매체를 탐구하고 즐기는 예술가다. 내가 존경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공연 내내 등을 꼿꼿이 세우고 놀란 토끼 눈을 하고 가슴이 꽁당꽁당 뛰는 것을 느끼며 무대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네슨 도르마를 들으며 호크니의 무대 배경 앞에서 춤을 추는 나를 상상해 보았다. ‘글리사드 아라베스크 통베 파도브레 피루엣 안디당 턴’. 발레작품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생각만 해도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카르페 디엠(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만끽하라)’, 푸치니는 이렇게 나에게 다가와 속삭인다. 진 최 / 한미무용연합회회장·진 발레스쿨 원장열린광장 투란도트 오페라 투란도트 오페라 오페라 투란도트 얼음공주 투란도트

2024-06-27

[손영아의 열려라 클래식] 세계 누비는 K 오페라 가수들의 활약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해외 어느 오페라 무대에 한국인 가수가 서게 되면 음악계의 큰 화제였다. 그나마 대부분 소프라노였고, 남자 가수가 세계적인 오페라 무대에 오른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기악 연주나 솔로 무대와 달리 오페라에서는 체력이나 신체 조건, 또 언어와 성량 등이 아무래도 동양인에게는 핸디캡이 되던 때였다.     오페라는 노래 실력은 당연하고 연기력도 필요하다. 그런데 과거 우리나라 남자 성악가들은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경우가 드물다 보니 타고난 목소리로만 승부를 걸기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원어로 대사까지 소화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바리톤이나 베이스는 그 역할이 중후한 위치나 나이의 역할인 경우가 많아서 동양인이 연기하기엔 보이는 조건과 성량이 아무래도 서양 가수들보다 부족한 편이었다.     그런데 요즘 무대에서는 그 판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탄탄한 기초를 바탕으로 많은 남자 성악가들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대중음악 분야였다면 아마도 꽤 시끌벅적할 만한 무대들이다.     LA 오페라가 2023/2024 시즌에 준비한 베르디의 ‘La Traviata(춘희)’를 관람하기 위해 뮤직센터에 갔다. 오랜만에 고전 오페라를 보려고 갔다가 의외의 두 한인 가수를 만났고 그들의 활약에 무척 감동하고 돌아왔다.     아무래도 주인공인 비올레타와 알프레도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날 주인공은 알프레도의 아버지 조르지오 제르몽 역을 맡은 바리톤 윤기훈 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양대학교를 수석 졸업한 후 독일 유학 준비 중 이탈리아에서 세계적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에게 발탁되어 LA의 도밍고-콜번-스타인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에 들어갔고, 주요 오페라의 주역 커버로 시작했을 만큼 일찍이 실력을 인정받은 가수다. 그의 개인적 역량이 대단한 것도 자랑스럽지만, 무엇보다 이날 본 ‘춘희’에게서의 그의 활약은 그 누구보다 많았던 모든 관중의 박수갈채가 입증했다.     이날 주역인 비올레타와 알프레도 역시 무척 훌륭했다. 그러나 오페라는 노래뿐만 아니라 비주얼 역시 무시할 수 없기에, 그런 면에서 볼 때 두 주역의 캐스팅은 너무나 의외였다. 애절한 사랑을 노래하는 알프레도는 처음엔 음이 들떠있어서 불안하더니 나중엔 꽤 지친 음색이었다. 반면 병들어 쓰러져 죽어가는 비올레타는 연약함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아쉬웠지만 그 모든 걸 무시할 만큼 무대의 품격을 높여준 사람은 바로 제르몽 역을 맡은 바리톤 윤기훈 씨였다. 또한 알프레도의 친구 가스통으로 나오는, 보스톤 뉴잉글랜드 음악원 출신의 오페라 가수 테너 줄리어스 안의 연기와 노래도 눈에 띄었다. 한국인으로서 더욱 만족스러웠던 점은 유럽이 배경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두 가수 모두 전혀 이방인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체격이나 연기력 등도 탁월했고 특히 성량은 그 어떤 가수들보다 탁월하게 뛰어났다.     LA 오페라의 음악감독 제임스 콘론이 거의 모든 작품의 주역으로 한인 성악가들을 초대한 것만 봐도 한인 오페라 가수들의 위상을 짐작게 한다. 오는 2024/2025 시즌 개막작인 푸치니의 ‘나비부인’의 주역에 발탁된 소프라노 카라 손을 비롯한 13년 만에 LA 오페라 무대에 오르는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테너 듀크 킴이 로미오를 맡는다. 이젠 외모나 언어, 성량 등 그 어떠한 조건도 핸디캡이라고 할 수 없는 한국 오페라의 가수들이다.  손영아 디렉터 비영리 공연기획사 YASMA7클래식 오페라 가수들 오페라 무대 고전 오페라

2024-06-02

[손영아의 열려라 클래식] 여행 중에 만난 작은 무대, 큰 감동

클래식 음악 애호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세계적인 연주회장에서 좋아하는 연주자의 무대를 보는 게 소원일 거다. 실제로 여행 삼아 그렇게 무대를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여행 중에 만난 무대는 어쩐지 좀 더 설레고 추억이 된다.     대학 시절 처음으로 간 유럽 여행 중 이탈리아에서 본 오페라 무대를 잊을 수 없다. 사실 뭘 봤는지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심지어 이탈리아어 프로그램은 뭔 소린지 통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때의 기분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순수하게 음악을 듣던 시절의 감동이다.     스무살 어린 학생은 나름대로 공부도 더 하고 여러 연주회를 접하는 경험이 많아졌다. 중년이 된 지금은 오만하게 연주를 평가하기도 하고 극장의 음향 등에 대해 아는 체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유명 연주자나 극장이 주는 명성에 위축되어 오히려 긴장하고 평소보다 더 집중해서 감상한다. 긴장하고 집중해서 감상한다는 말은 정말 우습다. 그래서     노련한 거장들은 청중에게 긴장하지 마, 편하게 들어, 내가 널 위해 연주하는 거야, 네가 날 위해 들어주는 게 아니야. 그렇게 이야기하듯이 듣는 이들이 무방비 상태에서 자유롭게 공감하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연주자와 뜻이 통했을 때 청중은 감동한다.   이렇게 연주자 못지않게 청중도 감상의 요령이 필요하다. 세련된 청중이 되기 위해서는 연주회에 자주 가는 게 지름길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딜 가나 연주회장을 찾아가면 된다. 유명 극장뿐만이 아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언제 어디서든 연주를 보러 가면 된다. 그러다 보면 몰랐던 연주자를 만나고 새로운 연주에 감동하고 즐거울 수 있다.     한국 방문 중 책가옥에서 열린 연주회에 갔다. 책가옥은 다섯손가락의 이두헌씨와 피아니스트 이영희씨 부부가 운영하는 커피전문점이다. 남다른 고급 취향의 커피의 향과 맛도 좋지만 가끔 이곳 무대에서 열리는 연주회는 이미 많은 음악 애호가들에게 유명하다.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밴드 연주도 한다. 좌석이 많지도 않아서 한국 방문 때마다 기회를 노렸지만, 예약이 쉽지 않았다. 드디어 운 좋게 피아니스트 이영희씨와 바이올리니스트 한경진씨의 무대를 만날 수 있었다. 서울대와 USC에서 수학한 이영희씨는 이미 반주의 대가로 평가받고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한경진씨는 미취학 아동일 때도 원숙한 깊은 울림을 준다는 평을 받았을 만큼 바이올리니스트 고 김남윤의 수제자로 성장했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이다.     피아니스트 이영희씨는 노련한 진행으로 곡에 관련한 해석과 에피소드 등으로 재미를 더해 주었다. 악장을 마칠 때마다 박수 치고 싶은 충동이 컸으나 매너 지키는 관객들 덕에 마음으로만 환호성 지르며 감상하려니 가슴이 터질 듯했다. 한국이든 유럽이든 어디든, 여행 중 찾은 연주회, 작은 무대이기에 더 가까이에서 소통할 수 있는 연주회에서 만난 연주 장인들의 미처 몰랐던 보석 같은 연주를 들을 수 있어 행복했다. 마치 마드리드의 어느 골목의 이름 모를 작은 갤러리에서 내 맘에 쏙 드는 그림을 발견한 그런 기분이었다. 손영아 디렉터 / 비영리 공인기획사·YASMA7손영아의 열려라 클래식 여행 무대 가나 연주회장 오페라 무대 바이올리니스트 한경진씨

2024-03-03

[삶의 뜨락에서] 공주는 잠 못 이루고

오늘은 오페라 아리아로 산책하러 나가 보려고 합니다. 이민자로 산다는 것이 뭔지, 먹고 사는 것이 뭔지 통 생활에 여유가 없어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하다가 실로 오랜만에 수필을 쓰는 것 같습니다.   작곡가 푸치니는 많은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투란도트는 그의 유작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아리아 Nessun Dorma는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로 많이 불렸고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투란도트는 고대 중국의 공주 이름인데 공주는 절세미인입니다. 그러나 차갑고 냉혹한 얼음 공주로 나옵니다. 이제 공주가 결혼해야 하는데 맘에 차는 사람이 주위에 도무지 없습니다. 그래서 공주는 전국에 공포해서 멋진 남자를 찾습니다.   공주가 낸 수수께끼 세 개를 다 맞추면 그 청년과 결혼하겠다. 그러나 만일 맞추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공포합니다. 용감한 청년들이 많이 도전했지만 모두 맞추지 못하고 참수형을 당합니다. 그들의 목이 거리에 많이 걸려 있습니다. 이런 공포 속에서 용감히 등장하는 왕자 칼리프. 칼리프는 공주의 수수께끼 세 개를 다 맞춥니다. 약속대로라면 공주는 칼리프와 결혼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주는 거절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이때 왕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내가 수수께끼를 하나만 내겠습니다. 공주가 맞추면 내가 사형당하고 맞추지 못하면 나와 결혼해야 합니다. 내 이름이 무엇입니까. 단 이 밤이 새기 전에 맞추어야 합니다.” 이에 공주는 시녀들에게 선포합니다. 아무도 잠들지 말라. 이 밤이 새기 전에 왕자의 이름을 알아 오라. 만일 알아오지 못하면 모두 죽이겠다.   이때 부르는 왕자의 노래가 Nessun Dorma 입니다.   아무도 잠들지 말라. 아무도 잠들지 말라. 그러나 공주의 수고는 헛될 뿐.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오직 나만 알고 있을 뿐.   이 밤이 가고 새벽이 오면 나는 승리하리라. 나는 승리하리라.   진짜 멋진 아리아입니다. 이 아리아 배경으로 여성 합창이 정말 아름답게 울려 퍼집니다.     이제 새벽이 오면 우리는 다 죽는구나. 우리는 다 죽는구나.   이 오페라에서 공주는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이것을 식언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한 말을 자기가 먹어서 없던 말로 해버렸습니다. 또 공주는 힘의 논리를 폅니다. 공주는 힘이 있고 왕자는 없으며 공주에게는 생사여탈권이 있으나 시녀들에게는 없습니다. 한쪽은 정의는 있지만 힘은 없고 한쪽은 정의는 없지만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왕자는 공주의 불의에 당당하게 저항합니다. 작곡가는 이 모습을 남성의 최고 음으로 표현했습니다.     시녀들은 이제 날이 밝으면 죽어야 합니다. 정의 편에 서 있지만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녀들은 비록 죽음이 앞에 있지만 저항 세력을 응원하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릅니다. 정의를 위하여 싸우는 투사의 노래와 너무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룹니다.   Nessun Dorma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힘없는 정의가 이긴 역사는 없다. 그러나 불의에 저항하는 정의는 있고 이를 지원하는 여성의 절규가 있다. 저항과 절규는 아름답습니다. 이 아침 이 노래를 들어 보세요. 나는 승리하리라고 외치는 남성 최고 음을 감상하시며 오늘도 승리의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중간 부분에 있는 여성의 합창(절규)을 놓치지 마세요. 이강민 / 관세사삶의 뜨락에서 공주 왕자 칼리프 오페라 아리아 아리아 배경

2024-02-01

[음악으로 읽는 세상] 오페라 ‘살로메’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는 데카당스의 진수를 보여준다. 살로메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헤롯왕에게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은쟁반에 담아오도록 요구한 엽기적인 팜므 파탈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수많은 팜므 파탈이 예술작품에 등장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팜므 파탈이 치명적인 매력을 마음껏 발산한 시기는 데카당스 예술이 풍미하던 19세기 말이 아닐까 싶다. 데카당스는 쇠퇴 혹은 퇴폐라고 번역되는데, 난숙기의 예술 활동이 내용이나 형식에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정상적인 힘을 잃고 지나친 향락주의나 탐미주의에 빠지는 세기말적 징후를 말한다.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오페라로 만들었다. 예술사적으로 볼 때, 와일드의 ‘살로메’가 R 슈트라우스의 음악과 만난 것은 필연이었다. 이 엽기적인 작품에는 어떤 음악이 어울릴까. 사실 낭만주의는 탐미주의와 데카당스로 상징되는 이 세기말 병(病)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낡은 도구였다.   이 오페라를 작곡할 당시 R 슈트라우스는 낭만주의를 넘어 모더니즘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수 세기 동안 서양음악을 지배해 온 조성(調性)의 굴레를 벗어던지고자 했다. 실제로 오페라 ‘살로메’에는 조성이 애매모호한 부분이 많이 나온다. 서로 다른 조성이 동시에 등장해서 충돌하기도 하고, 파격적인 방식으로 조(調)가 바뀌기도 한다. 그렇게 듣기에 불편한 불협화음과 애매모호하고 신비한 화성으로 ‘살로메’의 세기말적 병폐와 탐미적 데카당스를 그렸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는 슈트라우스로부터 촉발된 음악의 모더니즘을 ‘알프스 저편에서 넘어온 음악의 성병(性病)’이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시절, 이런 ‘음악적 성병’  말고 살로메의 성도착증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과연 있었을까.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오페라 살로메 오페라 작곡가 데카당스 예술 음악적 성병

2023-12-18

[살며 생각하며] 노다지 주워오기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형님뻘 되는 지인 부부께 만나자고 연락드렸다. 그 댁 남편이 이가 안 좋으니 두부 종류로 점심을 먹자고 하신다. 그분들의 기색이 어딘지 불편해 보였다. 사연인즉슨, 남편분이 평생 모은 애장품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파트로 이사 가니, ‘애기’들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한다. 눈을 껌뻑이며 듣고 있던 남편이 말했다. “그거 제게 주세요.”     다음 날, 우리 집 차고에 상자가 몇 개 들어 오더니, 다음 날에 서너 상자가 또 왔다. 차고에서 지하실까지는 층계가 있어서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다. 허리에 복대를 두른 남편 입에서 끙끙 소리가 튀어나왔다. 왜 남의 것을 받아서 이렇게 고생하는지. 버리는 것, 굴러다니는 것이 남편 눈에는 노다지로 보인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장난감이라곤 깡통 비행기 하나였다고 한다. 그나마 형들이 가지고 놀다 버린 것을 잘 주워야 했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10월 말경, 앞집의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떨어졌다. 남편은 처음에는 우리가 먹을 정도만 줍는다고 한 두 번 나가서 은행을 긁어왔다. 그러다가 아침이면 또 떨어져 있는 은행이 아까운지 매일 앞집의 나무 주위를 서성거렸다. 골목 사람들은 흉한 냄새가 나는 터진 은행이 차 바퀴에 묻을까 봐 비켜서 다니곤 하다가, 고맙게도 나무 밑을 청소하고 있는 남편을 한 번씩 쳐다보면서 지나갔다. 봉사 정신이 뛰어난 이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남편이 쓸어온 은행이 커다란 원통 몇 개에 가득 찼다. 흙과 누런 잎과 터진 열매가 뒤섞인 쓰레기처럼 보였다. 남편은 지인들에게 깐 은행은 아니지만, 까서 드시겠냐고 물었다. 팔순의 어떤 분은 아내의 해소병을 은행으로 고쳤다고 반색했다. 또 누구는 은행잎이 텃밭에 짐승을 못 오게 한다고 잎도 함께 달라고 했다. 그렇게 차고 앞에 쌓여 있던 은행 더미는 11월 내내 조금씩 사라졌다. 남편은 부지런히 ‘택배’를 다녔다.     며칠 전, 식사를 같이한 형님 부부도 실은 마지막으로 남은 은행을 드린다고 만난 것이다. 은행을 다 처분했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남의 이삿짐을 주워서 왔다. 남편의 공간인 지하실에서 쿵쾅 드르륵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져온 물건을 진열할 장을 만들고 있는 눈치다. 그날 이후, 지하실에서 아침부터 들려왔던 트로트 곡은 사라졌다. 옥경이, 안동역 대신에 부드러운 재즈 피아노 소리가 층계를 타고 올라왔다. 오페라, 피아노곡, 첼로 곡, 오케스트라 등등 분류가 된 2000개의 CD가 지하실로 들어왔다. 쓰레기통에 박힐 뻔한 누군가의 평생에 걸친 열정도 같이 묻어서 들어왔다.     “형님, 제가 잘 보관할 테니, 애들이 보고 싶을 땐 언제든 오세요.”     그분의 어두웠던 얼굴에서 미소가 퍼져 나갔다. 김미연 / 수필가살며 생각하며 은행 더미 오페라 피아노곡 형님 부부

2023-12-17

[음악으로 읽는 세상] 오페라로 빚은 도박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도박중독자였다. 그는 도박하려고 빚을 졌고, 그 빚을 갚기 위해 글을 썼다. 돈이 급한 나머지 헐값에 소설 판권을 팔아넘기기도 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작가로 우아하게 살 수 있었던 그는 도박 때문에 평생 돈에 쪼들리는 비루한 삶을 살았다.   도스토옙스키의 『노름꾼』은 평생 도박판을 전전했던 작가의 경험담을 담은 것이다. 주인공 알렉세이의 심리나 도박판의 풍경 묘사가 그렇게 리얼할 수 없다. 직접 경험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의 디테일이 살아 있는데, 특히 알렉세이가 도박판에서 큰돈을 연달아 따는 대목은 읽기만 해도 기분이 짜릿해진다.   러시아 작곡가 프로코피예프는 이 소설을 오페라로 만들었다. 오페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도박판 장면이다. 알렉세이가 돈을 걸 때 음악도 숨죽인 듯 조용하게 흘러간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룰렛 기계의 움직임을 묘사한 야릇한 음향만 들릴 뿐이다. 사람들은 가진 것을 모두 거는 알렉세이의 대담함에 혀를 내두른다. 갑자기 장내가 조용해지고, 마침내 딜러가 숫자를 외친다. 그 순간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알렉세이가 돈을 모두 딴 것이다. 음악이 다시 시끄러워진다. 알렉세이와 사람들은 신나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이 엄청난 행운이 가져다준 환희를 만끽한다.   도박꾼이 늘 그렇듯 마지막에 알렉세이 역시 무일푼이 된다. 친구가 저녁을 사 먹으라며 준 동전 몇 닢을 만지작거리며 전에 동전 몇 닢으로 대박을 터트렸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행운을 기대하며 도박장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프로코피예프는 단호하기 그지없다. 파국을 예고하는 오케스트라의 짧은 굉음으로 단번에 오페라를 끝내 버린다. “네가 생각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라고 말하듯이.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오페라 도박 평생 도박판 주인공 알렉세이 도박 때문

2023-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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