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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노다지 주워오기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형님뻘 되는 지인 부부께 만나자고 연락드렸다. 그 댁 남편이 이가 안 좋으니 두부 종류로 점심을 먹자고 하신다. 그분들의 기색이 어딘지 불편해 보였다. 사연인즉슨, 남편분이 평생 모은 애장품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파트로 이사 가니, ‘애기’들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한다. 눈을 껌뻑이며 듣고 있던 남편이 말했다. “그거 제게 주세요.”  
 
다음 날, 우리 집 차고에 상자가 몇 개 들어 오더니, 다음 날에 서너 상자가 또 왔다. 차고에서 지하실까지는 층계가 있어서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다. 허리에 복대를 두른 남편 입에서 끙끙 소리가 튀어나왔다. 왜 남의 것을 받아서 이렇게 고생하는지. 버리는 것, 굴러다니는 것이 남편 눈에는 노다지로 보인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장난감이라곤 깡통 비행기 하나였다고 한다. 그나마 형들이 가지고 놀다 버린 것을 잘 주워야 했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10월 말경, 앞집의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떨어졌다. 남편은 처음에는 우리가 먹을 정도만 줍는다고 한 두 번 나가서 은행을 긁어왔다. 그러다가 아침이면 또 떨어져 있는 은행이 아까운지 매일 앞집의 나무 주위를 서성거렸다. 골목 사람들은 흉한 냄새가 나는 터진 은행이 차 바퀴에 묻을까 봐 비켜서 다니곤 하다가, 고맙게도 나무 밑을 청소하고 있는 남편을 한 번씩 쳐다보면서 지나갔다. 봉사 정신이 뛰어난 이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남편이 쓸어온 은행이 커다란 원통 몇 개에 가득 찼다. 흙과 누런 잎과 터진 열매가 뒤섞인 쓰레기처럼 보였다. 남편은 지인들에게 깐 은행은 아니지만, 까서 드시겠냐고 물었다. 팔순의 어떤 분은 아내의 해소병을 은행으로 고쳤다고 반색했다. 또 누구는 은행잎이 텃밭에 짐승을 못 오게 한다고 잎도 함께 달라고 했다. 그렇게 차고 앞에 쌓여 있던 은행 더미는 11월 내내 조금씩 사라졌다. 남편은 부지런히 ‘택배’를 다녔다.  
 


며칠 전, 식사를 같이한 형님 부부도 실은 마지막으로 남은 은행을 드린다고 만난 것이다. 은행을 다 처분했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남의 이삿짐을 주워서 왔다. 남편의 공간인 지하실에서 쿵쾅 드르륵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져온 물건을 진열할 장을 만들고 있는 눈치다. 그날 이후, 지하실에서 아침부터 들려왔던 트로트 곡은 사라졌다. 옥경이, 안동역 대신에 부드러운 재즈 피아노 소리가 층계를 타고 올라왔다. 오페라, 피아노곡, 첼로 곡, 오케스트라 등등 분류가 된 2000개의 CD가 지하실로 들어왔다. 쓰레기통에 박힐 뻔한 누군가의 평생에 걸친 열정도 같이 묻어서 들어왔다.  
 
“형님, 제가 잘 보관할 테니, 애들이 보고 싶을 땐 언제든 오세요.”  
 
그분의 어두웠던 얼굴에서 미소가 퍼져 나갔다.

김미연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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