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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소통하기 위해 한국어 배워요" 한국어말하기대회

제7회 한국어 말하기대회가 지난 23일 오전 줌(Zoom)으로 열려 동남부 8개 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 26명이 참가해 실력을 겨뤘다.   올해 대회는 앨라배마주 어번대학 코리아코어와 코리아센터 세종학당이 공동주최했다.   경쟁 부문은 한국계인 '헤리티지 레벨'과 비한인 '비 헤리티지 레벨'로 나뉘었다. 헤리티지 부문 우승은 '한국어와 함께해온 나의 여정'을 주제로 발표한 조지아텍의 김하진 학생이, 논 헤리티지 부문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한 걸음씩'을 발표한 북조지아대학의 크리스티나 키리로브 학생이 차지했다. 두 학생은 박화실보험이 후원하는 한국행 항공권을 상품으로 받는다.   참가자들은 한국어를 배우게 된 계기, 한국에서의 유학생활, 한국 역사 등을 주제로 발표했다. 특히 한인 학생들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다. 조지아주립대의 캐서린 안 학생은 '내가 한국어를 다시 배우게 된 이유'에 대해 발표하며 "언어 때문에 엄마와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이 무서웠다. 엄마와 가족 얘기 등 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국어를 배우는 중"이라고 말해 참석자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하윤선 박화실보험 대표는 대회에 참석해 학생들의 한국어 열정에 박수를 보내며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문화에 관심 갖고 배우는 학생들에게 감사하다. 계속 응원하고 후원하겠다"고 전했다.   내년 말하기대회는 조지아텍에서 대면으로 개최될 예정이다. 윤지아 기자한국어말하기대회 어머니 한국어 열정 한국어 실력 유학생활 한국

2024-03-25

“결식아동 지원에 동참하세요”…글로벌어린이재단 바자회

글로벌어린이재단(GCF) LA지부(회장 클라라 김)가 결식아동 돕기 기금모금 바자회 행사를 개최한다.     재단 측은 오는 20~21일 양일간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LA한인타운 북창동순두부 윌셔지점 야외 패티오에서 행사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수익금 절반은 전 세계 결식아동 지원을 위해 본부로 보내지며 나머지 절반은 LA 지역 내 15세 이하 불우 아동들을 돕는 데 사용된다.   GCF의 클라라 김 회장은 “팬데믹으로 열리지 못했던 바자회를 다시 개최하게 되어 기쁘다”면서 “GCF LA지부 150여명의 회원이 아이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준비했다”고 전했다.     바자회에서는 GCF 어머니들의 손맛과 정성이 담긴 게장과 오징어젓, 겉절이, 고추 장아찌, 빈대떡 등 반찬류와 올가닉 수제 베이커리 잼과 같은 음식들이 준비된다. 또 후원받은 의류와 액세서리 등도 판매될 예정이다.      GCF는 지난 1998년 한국의 금융위기로 결식아동들이 늘어나자 미주 한인 어머니들이 모여 굶고 있는 아이들에게 한 끼라도 먹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2만 달러를 모금해 한국에 보낸 것이 시작이었다.     그간 회원 수는 8000여명으로 늘어나 전 미주와 캐나다 지역에 21개 지부, 아시아에는 일본, 한국, 홍콩 지부 등을 포함해 총 24개 지부로 확장됐다.     GCF LA지부에서는 결식아동들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골프대회와 음악회 등 각종 행사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김 회장은 “함께 봉사하며 삶의 의미를 느끼고 또 회원들끼리 서로 교제하고 취미생활도 공유하며 친교를 나누고 있다”며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것에 관심이 있는 한인들은 누구든지 가입을 환영한다. 현재 바자회를 위한 물품과 금전적 후원도 받고 있으니 많은 동참을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이어 “특별히 이번에 패티오 공간을 선뜻 대여해준 북창동 순두부 측에도 감사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행사장에서는 북창동 순두부 손님 이외에는 주차를 할 수 없으며 현금이나 수표 결제만 가능하다.     ▶문의: (323)717-6975 이정희 총괄 행사위원장     ▶주소: 3575 Wilshire Blvd, LA, CA, 90010 북창동 순두부 윌셔지점  글·사진= 장수아 기자 jang.suah@koreadaily.com결식아동 어머니 la한인타운 북창동순두부 전세계 결식아동 미주 한인

2024-03-14

[Nathan Park 기자의 시사분석] 이온희 전 시카고한인여성회장

이온희 전 시카고 한인여성회장을 알게 된 것은 그녀의 딸인 앨리슨 리를 통해서다. 앨리슨 리는 아시안 기빙 서클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한인을 포함한 아시안들을 대상으로 기부 문화를 널리 확산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설립된 비영리단체였다.     이 단체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앨리슨 리를 만나 인터뷰를 했었다. 아마도 15년도 훨씬 전의 일로 기억한다. 당시 인터뷰를 위해 시카고 다운타운 남쪽 미시간길에 있는 앨리슨 리의 집을 찾았었는데 그녀의 갓난아기를 옆에 두고 단체 설립 목적과 향후 활동 계획 등을 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집이 개인적으로는 처음 접해 본 높은 천장의 상업용 건물을 개조한 주택이었던 것도 특이했다.     이후 앨리슨 리의 기사는 중앙일보를 통해 전달됐고 이를 접한 이 전 회장을 나중에 만날 수 있었다. 이 전 회장은 당시 여성회 회장직을 역임한 뒤였고 불로초라는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던 때였다. 자신이 먼저 앨리슨 리의 어머니라고 소개했었다. 또 한번은 한국을 비롯해 전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던 한인 성악가를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이 전 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성악가를 이 전 회장 집으로 초대했는데 나 역시 자리를 함께 할 수 있도록 이 전 회장이 배려를 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이 전 회장이 유럽 여행을 하는 동안 이 성악가의 무대를 접할 수 있었고 시카고에서도 무대에 선다는 소식을 듣고 자택으로 초대한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성악가를 후원하고 개인적인 인연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기도 한 적이 있었다. 이 전 회장의 남편인 이창복 안과 의사 집안 내력이 음악가였다는 점이 이런 일을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 후로로 이 전 회장과는 가끔 안부도 전하고 2021년 시카고를 떠나 큰 딸이 거주하고 있는 매사추세츠의 보스턴 서버브로 이주하기 직전에는 작별 식사를 함께 하며 아쉬움을 달래기도 했다. 이 전 회장은 위넷카에서 30년, 레이크 포레스트에서 16년 이상을 거주한 뒤 자녀가 있는 타 주로 이주한다고 했다. 시카고에 많은 인연과 애정을 둔 채 타 주로 떠나며 아쉬움을 남기는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다.     이 전 회장은 시카고한인여성회에서 많은 일을 했다. 여성회 3대 회장과 6대 이사장직을 역임하면서 여성회가 설립 초기 한인 사회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애써왔다. 특히 회장으로 재임할 당시 여성회 합창단을 만들어 활발한 활동도 펼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여성회 합창단은 한인사회에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자리를 빛내주는 역할을 하게 됐다. 또 정기 무대도 마련해 회원들이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했다.     무엇보다 이 전회장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단체 활동이라기 보다는 사람의 본성이 그대로 묻어나는 글을 통해서였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시카고 신문에 기고를 했었다. 이 전 회장은 중앙일보에도 고정 칼럼을 통해 다양한 글을 썼다. 앨리슨 리가 어머니를 위해 칼럼 모음집을 내려고 한다고 연락을 해온 적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중앙일보에 실린 이온희 칼럼을 읽을 수 있었다. 신문을 스크랩 해서 모아둔 이온희 칼럼 모음이었던 셈이다. 정성스럽게 신문 스크랩을 해둔 어머니와 이를 모아 영문 칼럼집을 낸다는 딸의 발상이 정겨웠다. 칼럼집은 영문으로 만들어 이 전 회장의 손주들에게도 전달하고자 한다고 했다. 할머니의 글을 통해 어머니와 할머니간의 관계를 배우고 내리 사랑의 표본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값진 일임에 분명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신문 칼럼은 당시 세상을 들썩이던 묵직묵직한 시사적인 주제보다는 한인 어머니로서 딸을 키우며 겪을 수 있던 일화 등을 담고 있었다. ‘궁한 답변’이라는 글은 초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막내 딸 앨리스와 이 전 회장간의 일화를 담고 있었는데 보통의 자녀를 둔 부모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애정을 가득 담아 써내려갔다.     30여년 전에 쓴 글이었지만 당시에도 한국 음식이 현지 사회에 소개되며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을 이 전 회장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자녀 둘을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이 전 회장의 글은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인생 선배가 후배를 앞에 앉혀두고 이런 저런 조언을 조곤조곤 하는 것과 같은 배려와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글이었다. 더군다나 딸이 어머니께 깜짝 선물로 영문판 칼럼집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름대로 도움을 주고자 번역 작업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런 이 전 회장의 부고 소식에 아직도 마음이 가라앉지 못하고 있다.     이 칼럼을 통해 의사 노갑준의 부고 글을 썼던 적이 있었다. 인간 노갑준은 의사로, 한인 단체의 대표로 참 많은 활동을 했고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면서 개인적으로도 큰 충격이었다. 그를 위한 글을 쓰면서 한인사회 발전에 기여해 온 수많은 인물들을 떠올리곤 했다. 이온희 전 회장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람을 통해 그 사회를 설명하고 되돌아 볼 수 있다. 이 전 회장과 의사 노갑준 등을 통해 시카고 한인 이민사도 상당 부분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그들이 활동하고 동포 사회에 기여했던 점뿐만 아니라 이민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그 모든 일들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민자로의 삶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 지면을 통해 우리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점을 이 전 회장을 통해 되새겨 본다. (편집국)     Nathan Park 기자Nathan Park 기자의 시사분석 시카고한인여성회장 시카고 한인여성회장 시카고 신문 한인 어머니

2024-02-07

”어머니들의 작은 사랑이 보여준 기적”

    글로벌어린이재단(회장 이미미, 이하 GCF) 워싱턴DC지부는 3일 메릴랜드 실버스프링 소재 레져월드 클럽하우스에서 '감사 후원의 밤' 행사를 개최했다.   GCF는 세계 각처의 열악한 환경에서 가난과 배고픔에 고통받는 어린이들에게 어머니의 마음으로 도움의 손을 내밀어 용기와 희망을 주려는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미미 회장은 “바쁜 지난 한해 각작의 자리에서 기금 모금 및 봉사에 헌신해 주신 회원들과 임원, 후원자분들게 감사를 드린다”며 “지난해 워싱턴DC지부는 골프대회 및 바자회, 감사 후원의 밤에서 모인 수익금으로 밀알 선교회, 가정상담소, 사람난민센터 등에 도움을 주었다”고 전했다. 이 회장에 따르면 재단은 지난해 모은 성금으로 탄자니아, 케냐에 2만5천달러를 전달했다. 그는 “지난해 모금액이 증가하면서 내년에는 세곳을 후원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모든것이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헌신의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 회장은 “워싱턴 지부는 올해도 한마음으로, 지구촌에 굶주리는 어린이가 없는 날까지 최선을 다 해 열심히 봉사하겠다”고 말했다.   200여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는 마크장 메릴랜드 주하원 의원을 비롯해 이지호 참사관, 리다 나루즈 살람센터 목사 등이 축사를 전했으며 앤젤린 조 GCF 총회장의 인사말을 김제인 동부지역회장이 대독했다.     GCF 공동 창립자 손목자 이사는 이날 격려사를 통해 “26년전 한국은 IMF로 인한 경제위기를 겪으며 중산층이 무너지고 속수무책으로 보호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 12만명이 생겨났다”면서 “안타까운 고국의 소식을 듣고 미국에 있는 어머니들이 ‘우리라도 합심해 아이들을 먹이자’는 일념으로 ‘나라사랑 어머니회’를 결성한 것이 오늘날의 GCF에 이르렀다”며 재단을 소개했다.   이날 문화공연 순서에는 신윤수 테너가 '오 솔레미오' 등의 축가 무대를 꾸몄다. 이어진 시상 순서에서 재단은 마이크 김, 김형묵 씨에게 감사패를, 손영환, 김융남 씨에게 공로패를 전달했다.     이날 행사 사회는 이성숙, 엘리슨 정씨가 진행했으며, 새미한 장로교회 이일복 담임 목사가 단체를 통해 키워지는 어린이들이 미래 소망이 되어 새로운 물결이 흐를 수 있도록 인도해달라는 내용으로 기도했다. 김윤미 기자 kimyoonmi09@gmail.com어머니 사랑 나라사랑 어머니회 김제인 동부지역회장 지난해 워싱턴dc지부

2024-02-06

“어머니의 마음으로 결식 아동 돕자” 글로벌어린이재단 OC지부

줄리엣 이 글로벌어린이재단(GCF) OC지부 회장이 지난 26일 부에나파크의 로스코요테스 컨트리클럽에서 취임했다.   OC, LA, 샌디에이고 지부 관계자와 하객 등 약 50명이 참석한 취임식에서 이 회장은 “굶주리는 아이들이 없는 세상이 올 때까지 우리의 활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어머니의 마음으로 결식 아동을 돕자. 처음엔 길이 아니었던 곳도 다 함께 가면 길이 된다. 우리 모두 함께 가자”라고 말했다.   2년 임기의 4대 회장단은 이 회장 외에 주디 박 부회장, 줄리 백 총무, 샐리 조 회계로 구성됐다.   샌디에이고에서 온 김정아 서부지역 담당 회장은 축사를 통해 “2018년 발족한 OC지부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끊임 없이 활동해왔다. OC지부의 발전을 기원한다”라고 말했다.   글로벌어린이재단은 1998년 금융 위기로 폭증한 한국의 결식 아동을 돕기 위해 미주 지역 한인 어머니들이 2만 달러를 모금해 한국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시작됐다. 이후 지금까지 43개 지부를 통해 약 480만 달러를 모아 59개 국가의 결식 아동을 도왔다.   ▶문의: (714-502-4115) 임상환 기자어머니 마음 결식 아동 oc지부 회장 부회장 줄리

2024-01-28

[이 아침에] 노래가 흐르는 길

색은 빛이 만들어낸 신비스러움이요, 노래는 소리가 만드는 아름다움이다. 새벽 햇살이 어둠을 몰아내고 새들의 노랫소리에 산과 들이 꿈에서 깨어나는 아침, 새날은 기지개 켜고 일어나 새로운 전설을 꾸미기 시작한다. 아기가 자라며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부모의 사랑에 행복해 즐거운 듯 노래하고 춤을 추어 보인다. 이 땅 위에 사람도 말을 하기 이전부터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으리라.   아기가 태어나 자라는 과정은 우리 생명의 지난날들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 아기의 잉태 과정부터 정자가 수억의 경쟁자를 물리쳐야 하는 생존경쟁이다. 이후 어머니 뱃속에서 성장하며 많은 과정을 거쳐 태어난다. 마치 인류가 태초부터 오늘에 이르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하다. 탯줄이 끊기고 소리 내어 우는 때까지 인류의 창조는 진화의 순서이었음을 이야기해 준다.   우리는 모두 한 우물에서 왔다. 뿌리를 찾아가면 모두 한곳에 모이고 뿌리가 있기 전에 씨앗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노래, 창은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누어 문자가 있기 이전부터 노래에서 노래로 전해져 민요, 설화, 무가, 판소리들로 오랜 옛날의 이야기가 후세에 전해졌다고 한다. 노래는 언어로 발달하고 언어는 문자를 만들고 문자는 문학을 탄생시켜 우리가 즐겨 쓰는 시는 문학의 어머니가 되지 않았을까.   시를 쓰는 시간이면 즐겁기만 하다. 모든 잡념에서 벗어나 하나의 생각과 느낌을 마음에 담아 상상의 날개는 한없는 공간을 오르내리며 온 우주를 누빈다. 창작의 희열에 취했다가 깨어나 가끔은 독자가 되어 나를 돌이켜 보며 현실을 관조하기도 한다. 오감을 동원하여 감각적으로 그려 보이면 묘사를 하고 은유적으로 암시하면 독자도 나름대로 전율을 느껴 작가의 느낌을 상상 속에 더욱 선명하게 공명하여 시의 주제는 더욱 깊은 감동으로 전해진다.   달 밝은 밤 둘이서 언덕 위에 앉아 손잡고 부른 노래는 가슴을 울려 새로운 인생길이 열린다.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가족을 꾸려가는 삶은 한없는 기쁨과 어려움을 겪고 하늘이 모든 목숨에 내려준 임무였음을 지나고 난 세월을 돌이켜 본다. 이제 내 한평생 노래하고 말하고 글을 쓰게 되어 이 땅 위에 자국을 남기었다.   사랑이 있었기에 종교가 있고, 노래와 춤이 있었기에 예술이 있고, 이성이 있었기에 과학이 있어 우리는 영성, 감성, 이성의 세 다리를 짚고 고구려의 삼족오(다리 셋의 까마귀)처럼 자신의 인생을 꾸려가고 있다.     머지않은 장래에 인류의 막내는 성숙한 어른이 된다. 그리고 그들이 낳고 키울 우주세대는 성스러운 믿음, 고귀한 예술, 우주를 나르는 과학으로 인류의 황금기를 맞을 것이다. 막내가 길러낸 우주세대는 인공지능을 가진 죽지 않는 기계 인간으로 우주 안에 보금자리를 찾아 별나라에서 노래 부르며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  최용완 / 건축가·시인·수필가이 아침에 노래 예술 우주 잉태 과정 이후 어머니

2024-01-16

[이 아침에] 여자친구

8살에 미국에 온 준이가 지난가을에 대학생이 되었다. 처조카인 준이가 우리와 살게 된 사연은 매우 갑작스럽고 슬픈 일 때문이다. 11년이나 지난 일이다. 어느 날 새벽, 아내의 전화가 울렸다. 새벽에 울리는 전화벨은 늘 불길하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라 서울에 사는 처남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다. 결국 처남은 깨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일 년 후, 준이는 미국에 와서 우리와 살게 되었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내게 초등학생 아들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꼬마 녀석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엄하고 잔소리해 대는 나이 많은 고모부와 살며 엄마가 보고 싶다거나 한국에 가고 싶다는 투정 없이 힘든 세월을 잘 견디어 주었다.   알파벳과 간단한 영어 인사만 겨우 익힌 아이를 학교에 보냈다. 곧 친구들을 사귀고, 2년이 지나니 내 도움 없이 숙제도 혼자 해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학생 대표로 단상에 올라 에세이를 읽기도 했다.     지난 추수감사절에는 전철을 타고 집에 다녀갔다. 겨울 방학 때도 전철을 타고 오면 토요일 아침에 집 근처 노스리지 역에서 픽업을 하기로 했는데, 금요일 저녁 전화가 왔다. 친구 차를 타고 밤에 온다고 한다. 좀 늦을 것 같다고 해서, 집 열쇠를 문 앞 깔개 밑에 넣어두고 잤다.   다음 날 아침, 아내는 일이 있어 집을 비우고 둘이 아침을 먹는데, 준이가 머뭇머뭇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이다. 어젯밤에는 친구 차를 타고 온 것이 아니라 여자친구 어머니가 데려다준 것이라고 한다. 어디 사느냐고 물으니, 학교 근처가 집이라고 한다. 괜찮다고, 아침에 전철을 타고 가면 된다고 했는데, 극구 우기며 데려다주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그 어머니의 의도를 알 것도 같다. 이놈이 어디 사는지 확인도 할 겸, 1시간 남짓 차를 타고 오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눌 겸 해서 차편을 제공한 것이 아닌가 싶다.     여자친구는 같은 기숙사 동에 산다고 했다. 준이는 이제까지 여자친구는 사귀어 본 적이 없다. 아, 이놈도 이제 여자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구나.     이미 성인이 되고 아버지가 된 세 아들은 모두 고등학교 때 여자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여자친구라고 소개를 받았던 기억은 한두 번에 지나지 않는다. 연애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 누가 가르쳐 주고 설명해 준다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겪어 보아야, 아,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그것도 잠시 들 뿐이다. 쉽게 잊히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오랜 세월 아쉬움으로 남는 사랑도 있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랑도 있다.     그런 사랑을 하기에는 이제 늦은 나이가 되고 나니, 가슴 졸이고 실연에 절망하기도 했던 그 시절이 좋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 좀 더 과감히 멋진 사랑을 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도 있다.     준이에게는 축하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꼰대의 충고도 해 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런 사람도 만나고, 저런 사람도 만나. 그 나이에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해.”       고동운 / 전 가주 공무원이 아침에 여자친구 여자친구 어머니 초등학생 아들 학교 근처

2023-12-27

[삶의 뜨락에서] ‘H 마트에서 울다’를 읽고

‘H 마트에서 울다’를 읽었다. 뉴욕타임스에서 60주 이상 인기 자리를 지켰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추천했고 아마존 2021년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작가 미셸 자우너는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녀가 9개월 되었을 때 미 북서부 오리건주에 있는 유진이라는 소도시로 이사를 왔다. 그녀의 어머니는 전업주부였고 아버지는 차 판매원으로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한글학교에서 한글을 배우고 어머니와 함께 한 해 걸러 한국을 방문하면서 친척과 잦은 교류로 한국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이 있었다.     하지만 미셸은 학교에서 유일한 한국인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불편한 시선을 받으며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그녀는 격랑의 사춘기를 겪으면서 그들의 모녀 관계는 점점 더 얽혀간다. 대학은 가능한 부모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Bryn Mawr, Pennsylvania를 택했다. 전공은 문예창작과 영화였지만 전공을 살린 직장을 얻지 못했다. 대신 조그만 밴드를 결성해 크게 성공할 날만을 기다리면서 여러 가지 파트타임 직장을 뛰던 중 어머니의 췌장암 4기라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녀 나이 25, 어머니는 56세였다.     미셸은 모든 일을 제쳐 놓고 유진에 계신 엄마한테 달려간다. 그로부터 6개월 동안 그녀는 엄마 곁에서 극진하게 간호한다. 엄마는 첫 항암 치료를 받고 심신의 고통과 쇠약을 경험한다. 미셸은 어린 시절 엄마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음식을 기억해 내어 한국 식품점에서 재료를 구해 유튜브를 보며 맛을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엄마는 구토와 구강 점막의 궤양으로 입맛이 없을뿐더러 먹은 음식까지 다 토한다. 그래도 미셸은 엄마와의 관계를 이어준 연결고리가 한국 음식이었음을 깨닫고 엄마와 어렸을 적에 함께 즐겨 먹었던 음식을 기억하려고 애쓴다. 음식은 엄마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음식은 인간에게 원초적인 기쁨을 주는 원천이자 한 민족을 하나로 엮어주는 응집력이다. 한국 사람들은 특히 주변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정체성을 확인한다.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면서 정을 나눈다. 음식을 통해 향수를 달래고 우애를 다진다.     결국 엄마는 2차 항암 치료까지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하고 만다. 미셸은 절망의 심연에서 허우적댄다. 엄마의 병마는 아주 이미 그녀를 거의 다 삼킨 상태여서 음식 섭취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미셸은 엄마에게 반짝이는 생의 환희를 선물하기 위해 서둘러 결혼식을 치른다. 그 덕택에 엄마는 그녀의 외동딸인 미셸을 위해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한 줌의 에너지까지 아껴 쓰며 조촐하지만, 성대한 결혼식에 참견하게 된다.     2주 후에 엄마는 조용히 숨을 거둔다. 책을 덮고 상념에 젖는다. 미셸이 겪은 상실은 아주 최악은 아니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그보다 더 불행한 상황을 많이 보아왔다. 더 젊은 나이에 더 어린아이들을 두고 갑자기 떠난 경우도 많이 있었다. 나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래 머문 이유를 생각해 본다. 엄마가 병마와 싸워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계속 지켜보면서 자신의 무력감과 상실감을 한국 음식을 통해 위로하고 구제하려는 절절한 노력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엄마는 한식을 통해 그녀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미셸은 그녀가 받은 사랑을 하나하나 실험해 보이면서 끝까지 엄마의 임종을 지켰다. 한국 음식의 종류나 조리법도 제법 구체적이어서 독자가 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상했다. 비한국인이라면 그 과정에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할 만하다.     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졌음에도 아버지와 관계 회복, 남편 그리고 시집 식구들과의 관계 또한 건강하게 이끌어가는 성숙함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특히 요즘에는 여러 방면에서 한류가 트랜드다. K pop, K drama, K beauty, 한식 등 우리 한국인의 자질이 자랑스럽다. 아쉬운 점은 2세로서 미국 생활에 적응해 나가면서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아들, 딸들은 과연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하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마트 한국인 어머니 한국 음식 시절 엄마

2023-12-15

“알코올 중독과 가족불화로 극단 범행”

지난 4일 버지니아 알링턴 폭발사건 사망자이자 용의자 한인 제임스 유(56)씨는 오랫동안 이혼에 따른 스트레스와 알코올 중독을 겪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그는 장남으로서의 헌신과 여동생과의 갈등을 소장을 통해 밝히기도 했다.     ▶“어머니 병원비·장례 절차 해결”   유씨가 강제 입원 시도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로체스터 제너럴 병원과 전부인, 여동생 등을 소송한 법원 소장을 통해 그는 가족사를 밝혔다.     유씨는 1992년 5월 학교를 졸업하고 시카고 일리노이에 있는 앤더슨 컨설팅 회사에 다녔다며 당시 어머니가 조지워싱턴대학병원 중환자실(ICU)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때 어머니는 여동생 아일린과 버지니아주 알링턴에서 살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유씨에 따르면 어머니는  VOA 한국어과에서 일했던 애나 신 유씨로, 당시 어머니는 식물인간이 되어 의사소통이 불가한 상태로 병원에 한 달을 있었다.     그는 소장에서 “ICU 측에 아일린이 소생 반대 서명을 요청하지 말라고 부탁했다”며 “1992년 9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80만 달러가 넘는 병원비를 처리해야 했고 복잡한 장례 관련 서류도 모두 내가 도맡았으며 동시에 여동생의 대학교 학비를 내는 것을 도왔다”고 주장했다.     ▶10학년 때부터 과도한 음주   유씨의 폭파된 주택은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씨의 전부인 스테파니 유씨는 2017년 3월 이혼소송을 제기하고 2018년 승소했다. 당시 판사는 현금 위자료 8만 달러와 함께 이번에 폭발한 주택의 지분 15만 달러 지급을 명령했으나 판매기록은 나와 있지 않다.   위자료 지급명령이 이행되지 않자 법원은 2020년 10월 말 전부인 유씨에게 지급할 위자료를 마련하기 위해 유씨가 소유한 주택의 매매를 명령했다.     버지니아 등기국 기록에 의하면 유씨는 2021년 이혼소송 결과 판사의 명령 때문에 버지니아 맥클린의 주택을 100만 달러에 판매했다. 이들 부부 사이에 아이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씨는 뉴욕과 버지니아에서 자신의 소송을 주관했던 판사와 소송을 대리했던 변호사, 의사, 전부인, 여동생(혹은 누나) 등이 자신의 권리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이들 소송의 증거로 유씨가 2015년 뉴욕주 로체스터의 한 병원에서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았던 정황이 제시됐다. 유씨로부터 소송을 당한 한 변호사는 자신의 거주주택에 다시는 서류를 보내지 말라고 경고했으며 계속할 경우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편지를 발송했다.     그는 유씨의 정신건강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했으나 “유씨가 이혼 과정을 매우 힘들어했으며 이미 공개된 몇몇 법원 자료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유씨의 전부인은 2015년 11월 유씨를 뉴욕 로체스터 종합병원에 입원시켰는데, 유씨의 소장에는 자신이 10학년 때부터 평생 과도하게 음주를 했던 전력이 있다고 쓰여 있었다.   유씨의 전부인은 유씨가 자살을 하기 위해 유서를 쓴 적도 있었다고 밝혔으나 유씨는 관련 사실을 부인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병원 치료를 강행한 전부인과 여동생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소송은 모두 기각되거나 각하됐다.     각하된 소송에는 러시아의 2016년 미국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해 로버트 뮬러 3세 특별검사가 투입돼야 한다는 등 여러 음모론과 결합한 것이 많았다. 그는 논리적인 비약이 심한 주장을 하며 때론 소송을 제기했었다.     유씨는 자신의 옆집에 거주하는 부부를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할리웃 영화 ‘미스터 앤 미세즈 스미스’를 빗대, 그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유씨는 자신의 어머니가 1992년 오랜 병원 투병 생활 끝에 사망하고 50만 달러 이상의 빚을 남겼다고 주장했다.      ▶생존설   한편 경찰당국은 사건 현장에서 사체의 일부를 수습했으나 정확한 부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유씨의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유씨가 아직 살아있다는 음모론까지 나오고 있다. 특히 경찰이 폭발 전에 가스공급을 차단했다고 밝히면서 폭발 원인은 더욱 미궁 속으로 빠지고 있다.      당초 폭발 인화물질이 조명탄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연방 알콜담배무기폭발물국(ATF)는 “조사가 끝날 때까지 폭발의 원인 물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장수아·김옥채 기자제임스 어머니 병원비 이혼소송 결과 위자료 지급명령

2023-12-06

"한국의 김장김치, 직접 체험했어요"

    워싱턴 DC 정부가 첫 '김장 담그기' 행사를 개최했다.   지난 17일 워싱턴DC 아태사무국(MOAPIA)은  ‘대구 김치(패트리스 커닝햄 대표)'와 워싱턴한국문화원(김정훈 원장) 등과 함께 "DC의 첫 김장: 김치 담그고 나누기’란 주제의 행사를 마틴 루터 킹 기념 도서관에서 진행했다고 알렸다.       이날 행사는 김장 문화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10주년을 기념하고 DC 김치의 날(11월 22일)을 축하하며, 미국의 명절 추수감사절을 맞아 지역 주민에게 김장 김치를 선사하기 위해 마련 됐다.     한인 입양 청소년들 및 미국인 양부모들을 포함 200여명이 참석한 행사에서 참석자들은 대구 김치 커닝햄 대표와 한국계 어머니의 지도 아래, 김장 김치 담그기를 체험했다. 커닝햄 대표는 요식업에 종사하던 중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하자 모친의 김치 레시피를 활용해 만든‘대구 김치’를 선보였고, 이후 DC일원 파머스 마켓(farmer’s market)이나 배송 등을 통해 이를 판매하며 미국내 김치의 보급 및 확산에 힘쓰고 있다.   한편 구즈만DC아태사무국장은 이날 ‘김치의 날’ 선포 기념문을 김정훈 문화원장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김윤미 기자 kimyoonmi09@gmail.com김장김치 한국 한국계 어머니 김장 김치 김정훈 문화원장

2023-11-24

[삶의 뜨락에서] 키 큰 폴란드 여자 -발틱 3개국, 폴란드 여행기 4·끝

폴란드는 발틱 3개국에 비해 큰 나라다. 국토 면적은 리투아니아의 5배, 인구는 4000만 명이다. 독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체코와 국경을 같이 하는 이 나라는 독일, 러시아의 침략을 받았다. 문화적으로는 프랑스와 교류가 많았다. 파리는 런던과 더불어 세계 문화의 중심지였다.     바르샤바 곳곳에 크고 작은 뮤지엄이 많아 도시 전체가 박물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인구 200만, 관광객이 많은 바르샤바에는 술집이 많다. 투어 버스를 타고 가면서 봤는데 67종류의 맥주를 판매한다는 선전문이 있었다. 대부분은 현지 맥주,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선지 질 좋은 보드카도 생산하고 있다. 술꾼들의 천국이다.     여행은 사람 만남이다. 만났다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가끔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 여행을 일주일 정도 앞둔 어느 날 내가 하는 가게에 키 큰 남자가 들어왔다. 미국 영어, 서유럽 엑센트가 아니었다. 폴란드 사람이었다. 곧 발틱, 폴란드를 여행한다고 했더니 그는 전화번호를 주겠다며 바르샤바에 오면 연락하라고 했다. 나는 투어 그룹을 따라가니 괜찮을 거라고 했다. 정말 친절한 사람이었다.     폴란드 여행 마지막 밤 쇼팽(Fryderyk Chopin) 음악 피아노 연주를 감상했다. 올드 타운에 있는 타운홀, 100명 정도 들어갈 수 있었다. 중앙에 쇼팽 사진이 있고, 촛불이 펄럭거렸다. 흰 플라스틱 의자는 깨끗했다. 연주장 실내 장식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클래식했다. 연주자는 마치 폴리조스키(MaciejPoliszewski) 머리는 스타인웨이피아노 건반 같은 백발이었다.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멜로디를 따라가는 그의 손가락을 응시했다. 손이 음악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멜로디가 손을 따라가는 것 같았다. 그는 평생을 연주하며 살아온 것 같았다.     쇼팽은 그 이름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1810년 프랑스 아버지와 폴란드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다. 19살까지 바르샤바에 살다가 아버지의 요청으로 파리로 가, 20년간 작곡을 하다 39세로 요절했다. 몇 여인과의 로맨스가 있었으나 결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죽기 전 유언을 남겼다. 내 심장은 바르샤바에 안치해 주세요. 쇼팽의 유해는 파리에,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 교회에 안치돼 있다.     연주가 끝나고 나왔더니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투어 버스가 주차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수년 전 하바나 여행 때에도 헤밍웨이 호텔에 들어가 메모하다가 잠시 미아가 된 적이 있었다) 길을 지나는 한 키 큰 젊은 여자에게 버스가 어디 있을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녀는 확실치 않으나 같이 찾아보자고 했다. 나는 지갑, 휴대폰 안 갖고 나와 무일푼이라고 했더니 그녀는 우버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15분 정도 기다려 택시가 오고 그녀는 운전사에게 호텔 위치를 알려주었다. 이름은 물어봤으나 전화번호나 이메일 주소는 받지 않았다. 택시는 나를 같은 이름의 다른 호텔에 데려다주고 가 버렸다. 그 호텔 직원에게   물어 밤길 30분을 걸어 무사히 도착했다. 우리 가게를 찾아온 친절한 폴란드 남자, 길을 잃고 헤매다 만난 키 큰 폴란드 여자, 우연이었을 것이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대부분은 무심하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드물다. 오래된 성당 앞에는 걸인이 많으나 적선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이 시리즈 제목을 놓고 고민했다. Polish Heart로 하고 싶었다.   조국 폴란드를 사랑해심장(Heart)을 고향에 두기를 원했던 쇼팽, 아름다운 마음(Beautiful Heart)을 가진 폴란드 남녀, 그들을 잊을 수 없다. 앞으로 혹시 비슷한 상황에 부닥친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큰 폴란드 여자처럼 정성껏 도와주는 것이 신세를 갚는 길일 것이다. 최복림 / 시인삶의 뜨락에서 폴란드 여행기 폴란드 여행 폴란드 어머니 바르샤바 교회

2023-11-21

[수필] 갠지스강의 연기

힌두교도는 갠지스강을 가장 신성하다는 곳으로 여기고 있다. 죽으면 그들은 자신들의 내세를 위해 갠지스 강줄기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진한 소망을 갖고 있다.   우리 여행객들은 갠지스강을 따라 나룻배로 지나간다. 뉘엿뉘엿 지는 가을 저녁해는 인도의 어머니 갠지스강을 붉은색으로 물들이고 곳곳에 흰 거품이 물 위에 떠다니고 있다. 강에서 세례를 받거나 강기슭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는 순례자의 모습도 눈에 띈다. 그런가 하면 많은 쓰레기와 동물의 사체가 강물을 따라 떠내려오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목욕하고 빨래하며, 그 물을 마시는 것도 보게 된다.   신전이 많이 모인 강기슭에는 장작불이 보이고 그 주변에는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다. 그곳에서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솟고 있다.   연기에 대한 나의 기억은 순수하고 아름답다. 연기는 평화로움, 신비스러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세월의 무상함과 환상이다. 시골 저녁노을이 산을 넘을 때, 마을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면 어린 내 마음은 평화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한 줄기 연기를 남기며 멀리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가는 기선을 볼 때면, 미지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그리움의 감정에 가슴이 울컥하기도 했다.   나룻배에 탄 한 승객이 사공에게 물었다. “저 멀리 보이는 연기와 강에 떠다니는 흰 거품은 무엇입니까?” 사공은 머리를 돌려 연기 나는 곳을 쳐다보더니 말없이 노를 저어간다.   한참 후 사공은 “누군가 천국으로 떠나고 있는 징표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죽은 후에 이 강가에서 자신의 몸을 태워 강에 뿌려지는 것을 가장 큰 소원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흰 거품은 밀집된 인구가 쏟아내는 쓰레기와 처리되지 않은 공장 오수까지 더해진 오염 거품입니다.”     그러면서 화장은 장남이 주관한다고 말한다. 자세히 보니 태우고 있는 시신 주변으로 가족들이 엄숙하게 둘러 서 있다. 장례사는 밀려 있는 또 다른 시신 처리를 위해 빨리 태우려고 장작을 이리저리 급하게 뒤적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화장터 주변에는 살이 붙어 있는 뼈 하나 낚아채려고 어슬렁거리는 개들도 띄엄띄엄 보인다.     참 희한한 광경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힌두교도들은 매년 11월이 되면 강물에 몸을 담그며 기도하는 의식을 치르기에, 이 강물이 매우 더러운 것을 알지만, 종교를 위한 선택과 내세를 위한 선택의 여지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과연 삶과 죽음은 무엇일까? 한 줌의 흙일까? 개뼈다귀 같은 인생일까? 사라지는 연기와 같은 것일까? 지식은 무엇이며 또 신앙은 무엇인가? 머리가 무거워지며 구토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룻배에 함께 탄 승객들 사이엔 침묵이 흐르고, 연기가 맴도는 곳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붉게 물든 연기는 영혼이 깃든 것처럼 하늘로 계속 날아오르고 있다. 순간 나는 아름답던 기억의 연기가 아니라, 어릴 때 제삿날 제단에서 피어오르던 향불 연기와 아버지의 얼굴이 겹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갠지스강에서 흰 거품이 묻어 있는 얼굴을 내미는 꿈을 꾸다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개꿈이다.   세월이 한창 지난 지금도 나의 머릿속엔 나룻배의 행진은 계속되고, 내 인생 또한 여전히 갠지스강의 물결 따라 어디론가 정처 없이 떠내려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강정애 / 수필가수필 갠지스강 연기 어머니 갠지스강 향불 연기 줄기 연기

2023-11-16

[문화산책] 음식의 힘, 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의 책 ‘전쟁 같은 맛’을 읽는 내내 가슴이 무겁고 아팠다.     이 책은 저자가 사회학 박사이며 대학교수의 관점에서 자기 어머니의 파란만장한 삶과 영혼을 성실하게 되살려낸 회고록이다. 어머니는 일제강점기, 6·25한국전쟁을 겪으며 기지촌에서 일하다 미국인 남편과 결혼하고, 미국으로 이주해 ‘생존’해낸 인물이다. 말년에는 정신병인 조현병을 앓으며…. 폭력과 트라우마 속에서도 생의 조건과 정신의 고통을 뛰어넘는 존재였다.   저자는 어머니를 괴롭히는 조현병의 발병 원인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매번 혹독한 현실과 역사를 마주한다. 그렇게 마주한, 우리 현대사의 아프고 서러운 상처를 ‘혹독한 솔직함’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피할 수만 있다면 그냥 덮어두고 싶은 생생한 상처들을 꾸밈없는 민낯으로 까발려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끼리 나누는 은밀한 성찰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당당하게 말한다.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자칫 감정적 푸념이나 하소연으로 끝나기 쉬운 이런 이야기를 가슴 저미는 설득력으로 승화시키는 힘은 저자의 객관적이고 진지한 학문적 자세와 솔직하고 용기 있는 자기 고백에서 나온다. 저자 그레이스 M. 조는 상선 선원이던 백인 미국인 아버지와 기지촌에서 일하던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냉전 시기 외국인 혐오가 극심했던 워싱턴주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이 책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2021년 전미 도서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작, ‘타임’지, NPR 2021년 ‘올해의 책’, 2022년 아시아-태평양 미국인 도서상을 수상했다.   나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음식의 힘에 대한 진지한 학문적 성찰이었다. “어디서든 음식이란 단순히 먹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먹는다는 것은 (적어도 인간에게 있어) 결코 단순한 생물학적 과정이 아니다”라는 명제가 기조를 이룬다.   뿌리 깊은 차별과 외로움으로 얼룩진 미국생활을 헤쳐 나가면서 엄마와 딸은 한국음식을 요리하고 같이 먹으면서 정체성을 확인하고 위로받으며 살아갈 힘을 얻는다. 중요한 굽이마다 김치, 생태찌개 같은 한국음식이 등장해 이민 가정의 음식이 연결과 기쁨, 기억과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길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음식을 중심으로 한 이런 근원적 정서는 미셀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 같은 작품에서도 실감 나게 드러난다.   식구란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이고, 사회에서는 회식을 통해 관계를 만들고 다진다. 교회에서는 예배를 드린 뒤에 함께 밥을 먹는 식사공동체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거룩하게 여긴다. 잔치의 중심은 대개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이다. 음식이란 이렇게 사회적 인간관계의 중요한 연결고리다. 치유와 구원이 되기도 한다.   국제결혼으로 미국에서 살던 한국 여성들의 눈물겨운 증언도 음식의 잠재력을 실감 나게 말해준다. “이들은 은신처에서 함께 김치와 미역국을 먹으며 한국 이야기를 나눴다. (…) 맵고 마늘 맛이 강한, 발효된 한국 음식을 마침내 맛보는 경험은 마치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가 처음으로 물 한 모금을 마시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천천히 다가오던 죽음을 가까스로 피하는 일이었다.”   작가는 말한다. “이 기억의 전면에는 항상 음식이 있었다. 즐거움의 원천으로, 수입의 원천으로, 아니면 좀더 근본적인 생존의 방식으로, 음식을 먹는 장면으로 돌아가서 나는 발견했다. 엄마를 망가뜨린 것뿐만 아니라 엄마를 살아 있게 했던 것을.”   그렇게 그리워하며 숨어서 몰래 먹던 한국 음식이 지금은 K-푸드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자랑스럽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음식 전쟁 한국 음식 한국인 어머니 한국 이야기

2023-10-26

[수필] ‘김샛다’

내 외동딸 라영이는 1982년 5월생이다. 나는 8남매의 불우한 가정에서, 아내는 6남매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기에 우리는 한명만 낳아서 잘 기르기로 이미 결혼 전에 약속한 터였다.     아내가 출산 기미가 있어 화곡동 단골 산부인과에 입원했다. 나는 퇴근 후 곧장 병원으로 갔다. 어머니와 장모님이 나보다 먼저 병원에 와 계셨다. 우리는 단산을 결정했기에 성별 검사를 하지 않아서 궁금했으나 내심으로는 은근히 아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아내가 서너번 유산한 경험이 있어 초조해서 병원 출입문 입구에서 줄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중학교 동창 2명이 격려차 방문해 주었다.     산고로 고통을 호소하는 아내의 비명을 들을 때마다 복도 의자에 앉아 있는 나는 가슴에 비수가 날아들어 후벼 파는 것처럼 아팠다. 아이 낳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인지 미처 몰랐다. 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힘든 출산을 어떻게 여덟번이나 하셨을까? 새삼 어머니의 노고와 은혜에 고마움을 느꼈다.     새벽 2시가 거의 다 되어갈 때 간호사가 병실로 호출하여 들어갔더니 “예쁜 공주님이 탄생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부인은 회복실에 계십니다”라고 알려 주었다. 회복실에 들어가 아내의 손을 잡고 “수고했다”고 위로했다. 어머니는 “우리 집안에는 쓰잘머리 없는 것만 자꾸 나온다”며 노여워하셨고 장모님은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죄송하다.”며 어머니께 곰비임비 조아리고 계셨다.     회복실을 나오니 그때까지도 같이 기다려 주었던 친구들이 “아들이냐?” 묻길래 나도 모르게 ‘김샛다’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눈치 빠른 녀석이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데… 잘 됐다”고 위로하였다. 그 이후로 친구들은 나를 볼 때마다 “김샛다. 아빠! 김샛다는 잘 자라고 있는가?”라며 빈정대는 것이 인사였다.     퇴원 후 아내의 몸보신을 위해 우시장에 가 돼지 족을 사 왔다. 그 당시는 가난하게 살 때여서 소 족을 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소 족을 고아서 우려 먹여야 원기를 회복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능했던 남편이었던 것이 지금까지도 가슴 저리다.   나의 ‘김샛다’는 잘 자라 주었다. 두 살 때 연탄가스 중독으로 새벽에 기절하여 혼비백산한 내가 안고 병원으로 달음질치던 중 의식이 깨어난 것 이외는 속 썩이거나 걱정시키는 일은 하지 않은 것이 고맙기만 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가고 싶어 해 옥스퍼드에 있는 사립여고에 입학시키고 돌아오는 기내에서 얼마나 훌쩍거렸는지 옆 승객들한테 핀잔까지 받았다. 저 어린 것이 엄마, 아빠를 얼마나 그리워하게 될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린애를 물가에 놔두고 온 부모 마음 이해할 만했다.     ‘김샛다’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거의 10년간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군의관과 결혼했고 자신은 영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나에겐 귀하기만 한 손자까지 한 명 안겨주었다. 사위가 “애 엄마가 자식을 한명만 더 낳자고 졸라대도 거절하니 아버님이 압력 좀 넣어 달라”고 부탁하기에 내 손자가 외로워서 안 좋으니 한명 더 낳으라고 권유했더니 “아빠도 한명만 낳고 왜 더 낳으라고 하냐”고 반문했다.   나에게는 ‘김샛다’가 아니라 복덩이가 태어난 것이었다. 딸자식이 태어난 이후로 직장에서는 승승장구했고 아내가 부업으로 손댄 요식업이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가는 듯 금상첨화가 되어 부를 쌓게 되었다. 애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드레스를 입히고 예쁜 모자를 씌워 나들이 데리고 나가면 지나치던 사람들이 모두 뒤돌아보며 단란한 가족이라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내가 젊었던 시절에는 남아선호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지만 지금은 딸을 더 선호하는 추세다. 주위를 둘러보면 아들보다는 딸이 부모에게 더 효도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딸 둘이면 금메달, 아들 둘이면 목메달’ 이란 우스개도 있다. 나는 ‘김샛다’가 효도해 주길 바라지는 않는다. 그 가족이 건강하고 화목하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효도이다.   나는 노후 대책은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고 있다. 이진용 / 수필가수필 우리 어머니 병원 출입문 엄마 아빠

2023-10-19

"첫 미국 방문 귀국길이 어머니 마지막 여행"

피격 KAL 007편 유가족 김석형 목사 인터뷰 40년전 공항에서 마지막 배웅 미국 초청 효도가 외려 불효 8년후 사할린 추락 바다 방문 "참사 잊혀가는 것 안타까워"  아들이 ‘미국 구경’ 시켜준다고 불렀으니 더없이 행복했다. 임원복(당시 60세)씨는 그렇게 한 달간 아들과 함께 지내며 웃고 또 웃었다. 김석형(76·롱아일랜드성결교회·사진) 원로목사는 40년 전 뉴욕 JFK공항에서 작별했던 어머니가 아직도 선하다. 임원복씨는 1983년 9월 1일 발생한 대한항공 007편 피격 사건의 희생자다.  관련기사 KAL기 피격 40년 “추모행사 없다” 김 목사는 31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개척교회 목사였다. 어머니는 평생 고생만 하다가 외국 여행 한번 못해 보고 환갑을 맞으셨다”며 “그때 나는 이민 생활 7년째였는데 뉴욕에서 하던 택시사업이 잘 풀려서 여유가 생기다 보니 미국 구경시켜드리려고 어머니를 초청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김 목사는 어머니와 함께 나이아가라 폭포부터 동부 지역 유명 관광 명소를 두루 돌아다녔다. 당시 김 목사는 30대 중반이었다. 자녀들도 어렸다.   김 목사는 “우리 애들도 그때 할머니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며 “어머니 손을 잡고 온종일 좋은 거 보러 다니고, 같이 밥 먹고, 웃고, 고생했던 이야기 나누다 울기도 하면서 한 달을 함께했다”고 전했다.   임원복씨는 신앙인이었다. 평생 새벽기도를 빼먹지 않았다. 미국 구경을 하면서도 틈틈이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다.   행복은 흐르는 시간도 잊게 했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1983년 8월 31일)이 됐다. 김 목사는 어머니를 모시고 JFK 공항으로 향했다. 그날 출국장 앞에서 어머니가 손을 잡고 한 당부가 유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김 목사는 “어머니가 내 손을 꼭 잡더니 ‘너 이제 하나님이랑 한 약속 지켜야 하지 않겠니’라고 하셨다”며 “그래서 ‘사업 조금 더 하다가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계속 기도해주세요’라고 답한 뒤 어머니를 꼭 안아주며 들여보낸 게 마지막이었다”고 말했다.   다음날 새벽, 전화벨이 급히 울렸다. 한국에 있던 아버지(고 김희탁 목사)로부터 피격 소식을 처음 들었다. 날벼락 같은 소식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효도관광이 불효가 됐다는 자책감에 아버지에게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하염없이 울었다.   김 목사는 “그런 아버지는 오히려 나에게 ‘괜찮다’ 하시며 가장 좋은 때에 하나님이 데리고 가셨다고 위로해주셨다”며 “그때부터 어머니의 당부대로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피격 사건이 발생한 지 8년 후(1991년)였다. 김 목사는 선교를 위해 처음으로 러시아 땅을 밟았다. 그때 어머니가 묻혀 있을 사할린 섬의 바다도 방문했다.   김 목사는 “당시 사고 현장에 갔는데 일본인들을 비롯한 각국 희생자들의 유가족이 세워 둔 추모비가 있더라”며 “그때 한국에서는 그 사건이 잊히는 분위기였다. 40년이 지난 지금 피격 사건이 세월에 묻히는 것 역시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편, 임원복씨의 남편 김희탁 목사는 이후 계속 목회 활동을 이어갔고 지난 2018년에 별세했다. 현재 김석형 목사는 3남매를 두고 있다. 첫째 딸(수미)과 둘째 아들(동진)도 목회자가 됐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미국 귀국길이 그때 어머니 방문 귀국길이 김희탁 목사

2023-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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