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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인물- 향유를 깨뜨린 여인

 누가복음 7장36절~50절에는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흔히 우리는 이 여인을 ‘향유를 깨뜨린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의 관점에서 이 여인은 어떤 여인이었을까요?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누가복음 7장37절. ‘죄를 지은 한 여자’로 말합니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 그 여인은 ‘죄를 지은 한 여자’였습니다. 누가 봐도 죄인이라고 할 만한 여자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에 대해서 죄인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나는 적어도 죄인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 누구도 다른 사람을 정죄할 만큼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없습니다. 흔히 법정에서 죄인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법을 어겼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법의 항목 중에서 한 개라도 어기면 법정에서 죄인이라고 선고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죄인이라고 판단할 때 그 기준은 율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은 율법의 모든 항목을 어긴 것이 아니라 어떤 일부분을 어긴 여인입니다. 그리고 그녀를 정죄하는 사람들 역시 율법의 모든 조항을 다 지킨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인에 대해서 ‘죄인’이라고 정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바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 옵니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누가복음 7장38절. 이 여인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를 붓습니다. 여인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인의 이 행동에 대해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7장50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구원하다’는 ‘소조(σώζώ)’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있습니다. ‘구원하다, 구출하다’의 뜻입니다. ‘병에서 구하다’의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이 단어는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다’의 의미입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분명 죄인입니다. 물론 주변에 그녀를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들 역시도 죄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자신의 죄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나아와 예수님만이 구원의 참 길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조금 믿음생활 오래했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합니다. 마치 자신의 신앙이 완벽한 것처럼, 자신은 의인인 것처럼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어떤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께 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아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누가복음 7장47절. 여기에 죄를 사함이 많은 자, 적은 자는 어떤 차이일까요? 죄를 많은 지은 사람, 적게 지은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께로 나아온 사람과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자리에 있는가?의 차이입니다. 지금 나는 얼마나 내가 의롭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얼마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나는 실수를 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자비가 없지 않습니까? 여인이 깨뜨린 향유의 싯가가 얼마인지, 그 여인이 얼마나 고운 머릿결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죄인인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인임을 깨닫지 않는 사람은 용서도 없습니다.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전에 나 자신부터가 죄인임을 깨닫고 내게 예수님의 용서와 긍휼이 필요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용서와 긍휼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 / 더비전교회 윤우식 목사신약 인물 머릿결로 예수님 예수 그리스 당시 유대인들

2024-05-31

신약의 인물-헤로디아와 딸

 마태복음 14장과 마가복음 6장에는 세례요한의 순교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동생 빌립의 처를 아내로 맞이한 헤롯의 죄를 강력하게 책망했습니다. 여기에서 죄를 지적하고 책망한 세례요한을 헤롯이 미워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헤롯의 아내가 된 ‘헤로디아’가 더 미워했습니다. 그녀는 권력에 대한 야욕으로 가득 찬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남편의 형의 아내가 되는 것에 대해서 일말의 죄책감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행동을 책망하는 세례요한을 달갑지 않게 여긴 것입니다. 한편 헤롯 또한 세례요한을 제거하고 싶지만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여기기에 그를 죽일 경우에 큰 소요가 일어날 것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저 감옥에 가두는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는 딸을 이용해서 세례요한을 제거할 명분을 얻습니다. 그녀는 딸을 헤롯 앞에 춤을 추게 합니다. 그리고 그 춤을 기쁘게 여긴 헤롯으로부터 세례요한의 목을 약속 받습니다.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마태복음 14장6절,7절. 의붓아버지 앞에서 춤을 추는 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본 헤롯은 기뻐합니다. 여기에 ‘기쁘다’에 해당하는 단어를 보면, ‘아레스코(ἀρέσκω)’라는 단어로 ‘기쁘게 하려고 애를 쓰다’의 의미입니다. 의붓아버지 앞에서 관능적인 춤을 추는 딸과 그런 춤을 보고 여느 남자들이 가지는 마음으로 그 춤을 바라보는 헤롯의 모습입니다. 헤롯은 이로 인해서 세례요한의 목을 줄 것을 약속하고 그것을 이행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시 문화가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딸을 헤롯 앞에서 남자를 유혹하는 관능적인 춤을 추게 하는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헤로디아에게 우선순위는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이 비록 분봉왕이지만 헤롯의 아내가 됨으로 왕과 같은 위치에 있는 남자의 아내가 됨으로 그녀에게 오는 권력이 그녀의 삶에 중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대한 불합리함과 잘못됨을 책망하는 세례요한은 대단한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한 사람, 그것도 선지자로 여기는 사람을 정당한 죄목이 없음에도 죽이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우리에게 목적이 무엇인가가 삶에 중요합니다. 분명 그 목적은 내가 갈망하고,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개인의 욕심과 야망이고, 이기적인 것이 되어서 분명 옳지 못한 것이라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목적에 사로잡힌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가 전하는 복음이 어떤 내용인지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오직 죽이고자 하는 마음에 사로잡혀서 끝내 죽이려고 한 것과 같습니다. 권력의 자리가 목적이 된 헤로디아는 세례요한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딸마저 마치 음탕한 여자들이 남자를 유혹하는 몸짓을 의붓아버지 앞에서 하도록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중독이라는 말을 합니다. ‘게임 중독’, ‘성 중독’, ‘약물 중독’, ‘알코올 중독’ 등과 같이 사회적인 문제로 거론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농담처럼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드라마에 중독되었다’, ‘나는 쇼핑 중독이다’. 그런데, 중독은 곧 마비입니다. 중독되게 하는 요인으로 인해서 일상적인 생활이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없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중독 시키는 요인의 지배를 강력하게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이 이성적이지도, 정상적이지 못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다면 내가 하는 생각과 판단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생각’은 단순하게 조금 잘못된 것이 아니라 대단히 잘못된 것이 되어 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내가 하는 목적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짓밟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게 되어 버립니다. 혹시 지금 내가 목표로 삼고,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18절 말씀을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술 취하다’는 ‘메뒤스코(μεθύσκω)’라는 단어입니다. ‘술 취함’은 방탕하게 만듭니다. 주인이 올 때를 대비하지 않고 술에 취해서 방탕한 종과 같은 상태처럼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반면에 ‘성령 충만’은 ‘플레로(πληρόω)’라는 단어로 ‘가득하게 하다, 충만하게 하다’의 의미와 ‘완성하다’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를 완성하게 합니다. 마비가 되어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판단을 하게 하고, 바른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합니다. 무엇에 ‘취한 삶’인지, 무엇으로 ‘가득 채워져’ 완성된 삶을 살 것인지를 고민합시다. 나를 바른길을 걷게 하며, 의로운 결정을 하게 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이 땅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 / 더비전교회 윤우식 목사신약 인물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 게임 중독

2024-02-09

알츠하이머 연구 UCI서 한인 모집

백세시대의 가장 큰 걸림돌은 '치매'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치매를 예방하거나 이미 진행된 치매의 진행을 늦출 수 있는 방법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어떤 분야보다도 임상연구가 절실한 분야다.   치매 사례의 60%~80%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원인 질환은 바로 알츠하이머로 알려졌다. 이 알츠하이머를 예방하거나 진행을 늦출 수 있는지 연구하는 'AHEAD' 연구가 현재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해 전 세계 106개 연구소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UC 어바인 대학의 MIND(UCI Institute for Memory Impairments and Neurological Disorders) 연구소도 그중 한 곳이다. AHEAD 연구의 대상자는 이미 알츠하이머로 판정된 환자가 아니고 아직 치매 증상이 없는 건강한 55세~80세 사이의 중장년층이다. 즉, 현재는 치매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피검사와 뇌 영상 촬영을 통해 알츠하이머를 발현시키는 독성 단백질인 '아밀로이드 베타'라는 물질이 있는 경우에만 연구에 참여 가능하다.   과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밝혀낸 것에 의하면 이 '아밀로이드 베타'가 치매 증상이 나타나기 10~20년 전부터 뇌 속에 쌓이기 시작한다는 것인데, 증상이 나타나기 10년~ 20년 전에 아밀로이드 베타를 발견하고 제거하면 과연 알츠하이머를 예방하거나 치매의 진행을 늦출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임상연구에 참여하게 되면 적어도 자신의 뇌 속에 치매를 유발하는 독성 단백질이 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셈이다. 일부러라도 연구에 참여할 이유가 충분하다. 한편 이 연구에 사용되는 약은 지난해 FDA의 승인을 받은 알츠하이머용 신약 레켐비(LEQEMBI)를 사용한다.   무릇 어떤 질병에도 인종과 문화그룹에 따른 적합한 예방법과 진단, 치료법이 있게 마련이다. 알츠하이머를 예방하고 늦출 수 있는 가설이 진정으로 한국인의 특질에 맞는 방법인지 확인할 수 있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한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연구에 참여하는 것은 자신의 질병도 살펴볼 수 있는 기회지만, 내 용기와 결단 덕분에, 결과적으로 널리 이롭게 되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연구와 관련, 한인 커뮤니티에 알츠하이머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동시에 AHEAD 연구를 소개하는 세미나가 오는 21일(일) 샌디에이고 갈보리교회에서 열린다.   UC 어바인 MIND의 AHEAD 프로젝트 리더인 신혜원 박사(소망소사이어티 사무총장 겸임), 멜라니 톨락슨 박사, 크리스 살라자 박사가 소망소사이어티와 남가주 간호협회와 협업해 진행된다. 이번 세미나의 연사는 홍 헬렌 NP로 홍 NP는 UC샌디에이고를 졸업하고 조지타운대학에서 석사를 마쳤으며 현재 패밀리NP 4년 차로 일하고 있다.   ▶세미나 일시:1월 21일 (일) 오후 2시   ▶장소:샌디에이고 갈보리 교회   ▶참여 의사 RSVP:[email protected] 서정원 기자알츠하이머 어바인 알츠하이머 연구 알츠하이머용 신약 연구가 현재

2024-01-16

신약의 인물탐구-섬기는 여인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누가복음 8:1~3. 예수님께서 복음 사역을 하실 때에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닌 이유는 다양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고 남는 기적을 본 후에 예수님을 왕으로 삼기 위해서 따라다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이런 사람이 왕이 된다면 물고기 잡으러 갈 필요도, 고되게 농사를 지을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물위를 걷고, 놀라운 신적 능력을 가진 예수님이 왕이 된다면 로마로부터 충분히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주변 나라들이 범접하지 못할 나라가 건설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런 인기 때문에 자신들이 설 자리가 없어서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서 흠을 잡아서 그를 잡을 구실을 찾기 위해서 따라 다닌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을 따른 여인들에 대한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악귀가 나가고, 병 고침을 받은 여인들입니다. 악귀에 사로잡힌 것은 평생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악귀가 지배하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던 여인들입니다. 그 중에 막달라인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린 자’라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에도 그 자리에 있었고, 장사된 후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무덤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의 순간을 맨 처음 목격하기도 합니다. 귀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무언가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나의 의지보다는 지배하는 자의 의지에 따라서 간다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날에는 이런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무언가에 의해서 지배를 당한 사람은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우리는 ‘중독’이라고 말을 합니다. 마약에 중독이 되고, 알코올에 중독이 되며, 게임에 중독이 된 사람. 때로는 관계 중독, 사랑 중독 등으로 말하는 중독도 있습니다. 이런 삶은 그 중독되게 하는 것으로 인해서 삶이 황폐해져 버립니다.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지 못하게 됩니다.악귀에 의해서 지배를 받던 여인이 그것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는 것은 그 어떤 것에도 지배를 받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완전한 치유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청소가 된 그 안에 무엇이 채워지고, 무엇으로 인해서 지배를 받는 삶이 되느냐 입니다. 이 여인은 성령으로 지배를 받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삶은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지켜지고, 보호하심을 받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삶입니다. 병 고침을 받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여인들은 자신의 삶이 병과 악귀로 인해서 황폐한 삶에서 해방이 된 후에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여인들이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섬기다’는 ‘디아코네오’인데, ‘식사시중을 들다, 돌보다’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들은 자기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자기들이 소유로 식사 시중을 들 듯이, 아픈 사람을 돌보고 간호하듯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이 여인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섬긴 것은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 은혜가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이 구원자이시며,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혹시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도 다양할까요? 다양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가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황폐한 삶에서 구원하신 것처럼 영원한 죽음으로 황폐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구원자이시기에 그 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부자가 되고, 권력을 얻고,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분이 내 삶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성탄절 또한 이런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다시 깨닫고, 기념하며, 그 은혜를 기뻐하는 날입니다. 왜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까? 어떤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열광을 합니까? 그 분이 유일하신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좇는 은혜가 2024년 새로운 한 해에도 우리 모두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 / 더비전교회 윤우식 목사인물탐구 신약 구원자이신 예수님 관계 중독 병과 악귀

2024-01-08

신약 인물탐구: 요셉

 요셉을 우리는 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님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남편인 것은 이해가 되는데, 정말 예수님의 아버지입니까? 예수님의 탄생에 요셉은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요셉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요셉을 통해서 어떤 믿음을 본 받을 수 있습니까? 요셉에 대해서 마태복음 1장18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은 남자와 여자가 약혼을 한 후에 일년 동안 서로가 만나지 않고 떨어져 지냅니다. 약혼 후 결혼까지의 기간은 여자의 순결을 확인하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 ‘잉태된 것’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 아주 큰 사건입니다.         먼저 마리아의 편에서는 돌에 맞아 죽을 일입니다. 깨끗하지 않은 여자라는 겁니다. 그리고 요셉에게도 동거할 수 없다는 규칙을 깨고 약혼한 여자와 동거했다고 오해를 받고 정죄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으로 잉태된 것’입니다. 이 부분의 원어를 보면 ‘앤 가스트리 에쿠사 에크 프튜마토스 하기우’로 되어 있습니다. 원문에 충실하게 직역을 하면, ‘거룩한  바람에 의해서 자궁 안에 가지게 되었다’입니다. 여기에 ‘거룩한 바람’은 곧, 성령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에서 ‘영’에 해당하는 ‘루아흐’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왜 ‘성령으로 잉태된 것’,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 된 것은 첫 번째는 ‘처녀가 잉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7장14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유다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도무지 불가능한 가운데서 유다가 다시 회복하도록 해주심에 대한 약속의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메시야의 구원’입니다. 죄로 인해서 영원한 죽음 가운데 있는 인간이 그 죄를 탕감 받는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불가능한 ‘죄의 탕감’이 ‘메시야’로 인해서 가능한 현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가능이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는 징조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이에 대해서 요셉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마태복음 1장19절 말씀을 보면,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가만히 끊고자 했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조용히 파혼하다’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절대적으로 준수하는 요셉은 동거도 하기 전에 잉태한 약혼녀 마리아를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자!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하는 형벌에 해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 대해서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공의를 집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사랑만이 필요한 겁니다. 또한 이 사랑도 내가 누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누군가가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은 마치 하나님이 공의를 집행하시는 그 자리에 자신이 서게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파혼을 결심한 요셉에게 주의 사자의 말씀이 전해집니다.          마태복음 1장20절에,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주의 사자는 요셉을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자손’은 ‘휘오스는 ‘아들, 남자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메시야에 대한 징조에 대한 확인입니다. 첫 번째가 ‘처녀의 잉태’이며, 두 번째가 ‘다윗의 자손’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예언하신 ‘메시야’의 탄생의 징조이며, 증거입니다. 이것을 요셉에게 다시금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재림’입니다.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약속입니다. 재림의 징조를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징조’에 관심이 있지 정작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그 예수님이 왜 재림을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잊고 있는 모습입니다. 징조를 보고, 확신하게 된 요셉은 어떻게 합니까? 마태복음 1장24절 말씀에,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분부’는 ‘프로스타쏘'인데, ‘명령하다, 지시하다’의 뜻입니다. 요셉은 ‘명령’에 대해서 순종합니다. 이것이 의로운 요셉의 행동입니다. 믿음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재림의 메시야’에 대해서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징조를 볼 때에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십니까? 성경을 읽어서 징조에 대해서는 알지만 그 징조를 보고 무엇을 순종하고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행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십니까? 깨닫고, 행하는 자리에까지 가는 그런 믿음을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 / 더비전교회 윤우식 목사인물탐구 신약 자손 요셉 남편 요셉 약혼녀 마리아

2023-10-27

신약의 인물탐구: 데오빌로

 누가복음에 나오는 ‘데오빌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1차 수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도들의 행적에 대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서 전달합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의 헬라어 원어를 보면, ‘데오필로스’인데,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몇몇 신학자는 이 데오빌로가 어느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당시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데오빌로에 대해서 ‘각하’라는 ‘크라티테스’라는 호칭을 사용했는데, 이 호칭은 당시 로마 총독을 부를 때에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에도 ‘벨릭스, 베스도’ 총독을 부를 때에도 이 호칭이 사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해석은 데오빌로는 특정한 인물을 지칭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오빌로가 어느 특정한 인물이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키든, 누가복음의 내용은 단순한 어떤 특정한 인물에게 쓰여졌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은 아닙니다. 일차적인 독자는 특정한 사람이라 해도, 전체 내용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바울 서신인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등이 그 지역의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편지라고 해서 그 사람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만으로 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서 편지를 쓰게 하심으로 오늘 날 그리스도인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사도행전’도 그리스도인 전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만으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그 내용을 특정한 사람 데오빌로에게 기록한 것은 당시 헬라 문학에서는 작가가 자신의 글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헌정하는 유행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데오빌로를 수신자로 기록했다는 것은 데오빌로가 당시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누가복음 1장1절-3절.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복음 1장4절. 여기에 ‘각하가 알고 있는 바’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에 ‘알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가 ‘카테케오’라는 단어로, ‘가르치다, 배워주다, 깨닫게 하다’의 뜻입니다. 단순하게 데오빌로가 가지고 있는 궁금증이 아닙니다. 데오빌로는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고, 배우고, 깨달은 상태입니다. 거기에 더 확실한 내용을 누가복음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소위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율법, 말씀에 대해서 능통하다고 자부하는 종교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지위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데오빌로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식적으로가 아니라 깊이 깨닫고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겁니다. 당시 상황은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박해와 핍박이 있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고상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핍박과 박해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위치에 있는 데오빌로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최고의 지식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또한 어떤 것이 최고 가치의 지혜라고 생각합니까? 세상의 학문을 아는 것도,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알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더 위대한 지혜와 지식은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우리는 예수를 알고, 말씀을 깨닫는 것에 열심을 내고 있을까요? 세상 돌아가는 것에는 그 누구에게도 뒤져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살면서 정작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애타하지도, 답답해 하지도 않습니다. 이 당시 데오빌로 정도가 된다면 세상적으로 남 부럽지 않을 삶을 살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또한 그냥 믿는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믿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적인 욕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로 알고, 깨닫기를 원하는 믿음의 갈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 말씀을 바로 알고, 깨닫고 신앙 생활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런 믿음을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목회칼럼 / 더비전교회 윤우식 목사인물탐구 신약 정작 그리스도인 당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 전체

2023-08-04

[알츠하이머 신약 일문일답] 초기 환자에 주치의 처방…기능 복구 아닌 지연 효과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알츠하이머 신약 ‘르켐비’에 대해 환자와 가족들의 관심이 높다. 어떤 환자가, 언제부터, 얼마나 내고 복용할 수 있는지, 부작용과 주의 사항은 없는지 등의 내용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확인한다.     -중증 환자는 복용하면 안 되나.     “일단 승인 조건은 알츠하이머 ‘초기 환자’로 주치의가 판단해야 한다. 뇌 기능을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된 질병의 확대와 확산을 ‘늦추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승인된 것이다. 중증 환자는 효과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 개발회사의 설명이다.”     -메디케어 커버가 되는가.     “연방 의료서비스센터(CMS)가 신약 승인을 환영했으며 메디케어를 통해 커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파트 B를 통해 코인슈런스 20% 정도를 부담할 것으로 예상한다. 40~50대 환자들도 일반 의료 보험을 통해 혜택을 받을 수 있을 전망이다. 결과적으로 파트 B 프리미엄이 소폭 상승할 수 있다. 보험이 없는 경우엔 1년에 2만6000달러의 비용이 예상된다.”   -부작용은 없나.     “1800명에게 투약하고 18개월 동안 지켜본 임상실험에서 복용자의 13%가 뇌부종과 뇌출혈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개별 환자에 따라 또는 혈액 희석약을 투약하는 경우에는 그 정도가 심할 수 있다는 것이 제약회사의 설명이다.”   -수요가 급증하면 구하기 힘들게 되나.     “약을 개발한 에자이 사는 당장 2~3년 동안 약 100만 명이 약을 찾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약이 대중을 통해 검증되어야만 일반화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관련 약품이 앞으로 더 개발될까.     “그렇다. 르켐비의 효과와 부작용이 일반 환자들을 대상으로 확인되면서 더 많은 다양한 약들이 승인받고 개발될 것으로 전망된다. 동시에 국내 670만 알츠하이머 환자 중 초기 환자들은 대부분 이약을 찾게 될 것이며 이런 환경은 개발에 긍정적인 환경을 조성할 예정이다.”   최인성 기자 [email protected]알츠하이머 신약 일문일답 초기 환자 초기 환자들 알츠하이머 환자 중증 환자

2023-07-06

신약의 인물-밭에 감춘 보화를 발견한 사람

 마태복음 13장에는 천국에 관한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그 중에 첫 번째 비유는 ‘밭에 감춘 보화를 발견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이 비유에 대한 말씀을 들은 것이 기억에 납니다. 주인의 밭에서 소작농으로 일하던 종이 어느 날 밭을 갈던 중에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합니다. 종은 그 보화를 가만히 묻어 두고,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가 ’천국‘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잦은 전쟁 등으로 인해서 값비싼 소유를 땅에 묻어 두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말씀은 특별한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보화를 묻어 둔 원래 주인과 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극명하게 대조가 되고 있습니다. 먼저 보화를 묻어 둔 원래 주인입니다. 그 사람이 보화를 땅에 묻었다는 것은 그 보화가 값비싼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둑이나, 약탈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땅에 묻어 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입니다. 묻어 둔 다음에 주인은 그 보화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 버린 겁니다. 왜 그 존재를 잊어 버렸을까요? 묻어둔 보화가 없어도 충분한 재물이 손에 쥐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보화의 존재를 잊어버릴 정도로 더 좋고, 귀한 것들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돌아가서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처분합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태복음 13장44절. 이 사람은 보화를 발견한 후 도로 그것을 ‘숨겨두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감추인 보화’에서 ‘감추다’와 ‘숨겨두다’는 같은 의미이지만 헬라어 원어로는 조금 다릅니다. 먼저 ‘감추다’는 ‘케크륌메노’로 원형은 ‘크륍토’입니다. ‘숨기다, 감추다, 덮다’의 뜻입니다. 그런데 ‘케크륌메노’가 수동태로 사용이 되어 있습니다. ‘보화가 숨겨졌다.’는 의미입니다. 즉, ‘보화’가 주체입니다. 반면 ‘숨겨두다’는 ‘에크뤱센’으로 되어 있는데, 원형인 ‘크륍토’의 능동태입니다. ‘사람이 숨겼다.’로 사람이 주체가 되어 있습니다. 보화는 숨겨졌고, 그리고 한 사람이 보화를 발견한 후에 숨겼다는 겁니다. 보화를 다시 숨긴 사람은 그 보화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다시 숨긴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유를 모두 팔아서 이 밭을 삽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전 재산보다 보화가 더 값어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보화를 밭에 숨긴 사람은 그 보화보다도 자신의 소유가 더 크기 때문에 잊어버립니다. 그렇지만 뒤에 이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보다 이 보화를 더 크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천국이다.’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죽으면 가는 하늘나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도 포함이 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 장소 등을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라고 말합니다. 천국이 이와 같다는 것은 어떤 사람은 ‘천국’,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그 보다 더 좋고, 귀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 명예, 성공과 같이 이 땅에서 더 값어치 있게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천국을 그저 삶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천국을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살 값어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이 땅에서 소유하고,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천국’,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값어치 있고,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는 것은 ‘천국’,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보화가 묻혀진 상태에서 다른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기 때문에 보화의 존재를 망각하는 삶일까요? 아니면 보화의 가치를 알고 모든 소유를 팔아서 보화가 묻힌 밭을 사려고 하는 삶입니까?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내 자존심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때론 눈앞에 보이는 돈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명예, 세상의 즐거움에 더 집착하고 살지 않습니까? 보화의 가치를 알고 모든 소유를 팔아서 밭을 산 사람처럼 ‘하나님 나라’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바라며, 갈망하며,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가는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신약 인물 감추인 보화 하나님 나라 물질 명예

2023-05-05

신약의 인물-죄를 지은 한 여자

 누가복음 7장36절에는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서는 이 여자를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누가복음7장37절. 여기에 ‘죄 있는’에 해당하는 단어가 ‘하마르톨로스’로‘죄인’, ‘죄 많은’, ‘죄가 더 있는’의 의미로 신약 성경에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사용하시는 표현이 아닙니다. ‘죄 많은’이라고 한다면 ‘죄가 적은’이라는 표현도 있다는 것이고, ‘죄가 더 있는’이라는 것은 ‘죄가 더 적은’이라는 표현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우리는 모두가 같은‘죄인’이며, 또한‘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일 뿐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이 여인에 대해서‘죄를 지은 한 여자’라는 것은 이 여인을 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누가복음7장39절.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신 곳에 여인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누구인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다 압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는 여자입니다. 죄인이라고 정죄를 받는 여자였습니다. 그런 여인이 예수님께로 옵니다. 그 여인의 손에는 향유 담은 옥합이 들려져 있습니다. 여기에 ‘옥합’은 ‘뮤론’으로 향유, 고약’으로 해석이 됩니다. 즉, 단순한 미용 목적의 기름이라기보다는 치료 목적의 기름으로 아주 귀한 것이었습니다.         여인이 깨뜨려서 예수님의 발에 쏟은 귀한 향유의 가격은 얼마였을까? 혹시 이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이 큰 금액의 향유를 부을 정도의 행동을 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가진 소중한 것을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더 많이 드렸느냐? 누가 더 많이 봉사했느냐? 누가 더 수고 많이 했느냐?”를 따집니다. 왜 이것을 따집니까? 이것이 소위 기득권의 척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에서는 ‘많이’, ‘얼마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어떤 것’을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적게 한 것 때문에 다른 사람과 비교가 되어서 실족했습니까? 누군가 많이 한 사람이 무시해서 시험에 들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지금 드리는 우리 각자의 마음을 받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와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붓습니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누가복음 7장38절. 당시 관습으로 여인이 머리를 풀고 우는 행위는 장례식 때에만 허용된 행동이었습니다. 장례식 때에만 허용된 행동이라는 것은 정말 절실한 슬픔의 상황에서만 하는 행동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슬픔도 있겠지만 여인의 삶을 짓누르고 있던 ‘죄’, ‘죄를 지은 여자’라는 것에 대한 슬픔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위 ‘죄를 지은 한 여자’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7장48절,50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 여인뿐 아니라 주변에 모여 있던 수 많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죄지은 여자’, ‘어떠한 자’,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비판하는 여인에게서 더 이상 정죄할, 비판할 죄가 없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여인을 향해서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죄인’, ‘지를 지은 사람’이라고 말하면 실족하고,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교회도 나가지 않겠다고 아주 대단한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행동을 은연중에 나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누가 어떤 잘못, 실수에 대해서 ‘죄인’, ‘몹쓸 사람’, ‘구제불능’이라고 매도하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마치 이 시대의 의식 있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이 죄인의 죄가 사하여졌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누구를 죄인’이라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또한 다른 사람뿐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도 죄인으로 정죄하며 위축되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앞에 나와서 회개하는 자의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정죄 때문에 시험에 들었습니까? 나보다 더 죄인인 것 같은 사람이 잘난 체해서 실족했습니까? 그래서 교회 나가지 않기를 결단하셨습니까? 오늘 이 여인처럼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실족하고, 시험에 든 그때가 예수님께 나와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평안히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가 있길 소원합니다.   목회칼럼신약 인물 신약 성경 누가복음 7장36절 향유 고약

2022-11-11

리스큐어바이오사이언시스, 미국 간학회(AASLD)서 ‘NASH 신약후보물질’ 구두 발표 선정

      리스큐어바이오사이언시스(이하 “리스큐어”)가 오는 11월 4일부터 8일까지 미국 워싱턴 DC에서 개최되는 간질환 분야 세계 최대 학회인 미국간학회(AASLD)에 NASH(비알콜성지방간염) 치료제로 개발중인 신약 후보물질의 비임상 연구 결과가 구두 발표에 선정되었다고 밝혔다. 이번 발표는 국내기업 중 미국간학회 구두발표자로 채택된 건 최초다.     미국간학회는 유럽 간학회(EASL)와 함께 간질환 분야의 세계 최대 학회로서 1950년에 설립되어, 전세계 1만여명의 의사, 임상연구자, 제약바이오 업계 종사자들이 참가하는 가장 저명한 학회이다.     리스큐어는 이번 AASLD에서 구두 발표를 통해 Mayo Clinic과의 공동연구 결과를 공개한다. Mayo Clinic에서는 Dr. Malhi 박사와 팀 연구진이 참가해 우수성을 밝힐 예정이다.   NASH치료제 신약 후보물질은 마이크로바이옴 기반으로는 세계 최초로 글로벌 임상에 진입한 ‘First-in-class’ 치료제이다. 후보물질은 대사물질에 의한 TGF-β 신호전달 억제를 통해 섬유화를 억제하고 장벽 강화 및 담즙산 대사조절을 통해 NASH의 다양한 병인을 개선시켜 지방증, 염증, 섬유화에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리스큐어 관계자는 “글로벌 시장조사에 따르면 북미, 유럽 NASH 환자 수는 총 6천만 명에 달하지만 복합적인 발병기전에 따라 치료제 개발에 어려움이 따르고 현재까지 마땅한 치료제는 없는 미충족의료수요가 매우 높은 시장이다”라며 “리스큐어의 신약후보물질은 얼마전 글로벌 임상 1상을 성공적으로 마쳐 안전성을 확보하였으며, 글로벌 임상 2상 진입을 앞두고 있어 First-in-class 신약으로서 기존 개발치료제들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방식의 치료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또한 “원발성 경화성 담관염 (PSC) 모델 등에서도 직접적인 간섬유화 개선과 염증 억제 효능 및 관련 기전이 확인되어, 희귀의약품으로 적응증을 확장하여 개발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박원중 기자 ([email protected])미국 신약후보물질 간학회 구두발표자 nash치료제 신약 유럽 간학회

2022-10-23

[음식과 약] 치매 신약의 실패

치매 신약 연구는 실패의 연속이다. 지난 6월 16일 다국적 제약회사 로슈는 알츠하이머 신약으로 10년 동안 연구해온 항체(크레네주맙)가 치매 증상 완화에 효과가 없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콜롬비아에서 유전자 변이로 인해 조기 치매 위험을 안고 사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여서 더 실망감이 컸다. 이들은 40대에 이미 알츠하이머 치매 증상이 시작되어 51세면 정상적 사회활동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진행되고 60대에 사망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사람들이 치매 증상 진행을 늦출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참여한 연구 결과가 긍정적이지 못해 매우 아쉽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아밀로이드 단백질이 알츠하이머 치매 치료약의 열쇠가 될 거라고 예상했다. 알츠하이머 치매 환자의 뇌에는 아밀로이드 단백질이 쌓인다. 과학자들은 이걸 막으면 인지 기능 저하와 같은 치매 증상을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작년에 미국 FDA의 허가를 받은 신약 아두카누맙은 아밀로이드를 제거하는 항체다. 그런데 이 약 승인을 두고 논란이 뜨거웠다. 아밀로이드 단백질 제거에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 치매 증상에 도움이 되는지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약효는 실제로 유익이 있느냐로 판단한다. 만약 어떤 약이 혈압을 잘 떨어뜨리고 혈중 콜레스테롤을 낮춘다 해도 심혈관 질환이 발생할 위험이나 그로 인한 사망 위험을 낮춰줄 수 없으면 약으로 쓸 이유가 없다. 아두카누맙이 그런 경우다. 아밀로이드 제거는 잘하는데 치매 증상 개선이 안 보인다. 결국 이 약은 시장에서 퇴출당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우리는 아직 질병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아밀로이드를 제거하는 도구는 찾아냈지만 기억력, 사고력 감퇴를 막는 데 도움이 안 된다. 그렇다면 아밀로이드가 치매의 원인이라는 가설 자체가 틀린 것일 수도 있다. 100세 이상 장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2021년 네덜란드 연구 결과를 보면 흥미롭다. 치매 환자와 비슷하게 뇌 신경세포가 손상되어도 치매 증상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 치매 위험을 높이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도 인지기능을 유지한 사람들도 관찰됐다. 이들이 100세가 넘어서도 어떻게 알츠하이머병을 앓지 않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아직 확실히 모른다.   치매 위험을 낮추는 숨은 비결은 없다. 규칙적 운동, 균형 잡힌 식사, 정상 체중 유지, 금연과 같은 건강 수칙을 잘 따르면 된다. 방송이나 유튜브에서 누군가 이런 기본 수칙 외에 뭔가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건 조회 수를 높이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연이은 실패가 성공적 치매 치료 신약으로 이어지는 날이 오길 바란다. 정재훈 / 약사·푸드라이터음식과 약 치매 신약 치매 신약 알츠하이머 치매 치매 증상

2022-06-26

[전문가 칼럼] 치매 신약의 실패

치매 신약 연구는 실패의 연속이다. 지난 16일 다국적 제약회사 로슈는 알츠하이머 신약으로 10년 동안 연구해온 항체(크레네주맙)가 치매 증상 완화에 효과가 없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콜롬비아에서 유전자 변이로 인해 조기 치매 위험을 안고 사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여서 더 실망감이 컸다. 이들은 40대에 이미 알츠하이머 치매 증상이 시작되어 51세면 정상적 사회활동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진행되고 60대에 사망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사람들이 치매 증상 진행을 늦출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참여한 연구 결과가 긍정적이지 못해 매우 아쉽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아밀로이드 단백질이 알츠하이머 치매 치료약의 열쇠가 될 거라고 예상했다. 알츠하이머 치매 환자의 뇌에는 아밀로이드 단백질이 쌓인다. 과학자들은 이걸 막으면 인지 기능 저하와 같은 치매 증상을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작년에 미국 FDA의 허가를 받은 신약 아두카누맙은 아밀로이드를 제거하는 항체다.     그런데 이 약 승인을 두고 논란이 뜨거웠다. 아밀로이드 단백질 제거에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 치매 증상에 도움이 되는지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약효는 실제로 유익이 있느냐로 판단한다. 만약 어떤 약이 혈압을 잘 떨어뜨리고 혈중 콜레스테롤을 낮춘다 해도 심혈관 질환이 발생할 위험이나 그로 인한 사망 위험을 낮춰줄 수 없으면 약으로 쓸 이유가 없다. 아두카누맙이 그런 경우다. 아밀로이드 제거는 잘하는데 치매 증상 개선이 안 보인다. 결국 이 약은 시장에서 퇴출당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우리는 아직 질병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아밀로이드를 제거하는 도구는 찾아냈지만 기억력, 사고력 감퇴를 막는 데 도움이 안 된다.     그렇다면 아밀로이드가 치매의 원인이라는 가설 자체가 틀린 것일 수도 있다.     100세 이상 장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2021년 네덜란드 연구 결과를 보면 흥미롭다. 치매 환자와 비슷하게 뇌 신경세포가 손상되어도 치매 증상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 치매 위험을 높이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도 인지기능을 유지한 사람들도 관찰됐다.     이들이 100세가 넘어서도 어떻게 알츠하이머병을 앓지 않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아직 확실히 모른다.   치매 위험을 낮추는 숨은 비결은 없다. 규칙적 운동, 균형 잡힌 식사, 정상 체중 유지, 금연과 같은 건강 수칙을 잘 따르면 된다.     방송이나 유튜브에서 누군가 이런 기본 수칙 외에 뭔가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건 조회 수를 높이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연이은 실패가 성공적 치매 치료 신약으로 이어지는 날이 오길 바란다. 그때까지는 이미 알려진 방법을 따르는 게 건강을 위한 최선책이다. 정재훈 / 약사·푸드라이터전문가 칼럼 치매 신약 치매 신약 알츠하이머 치매 치매 증상

2022-06-21

신약의 인물 탐구: 서른여덟 해 된 병자

 요한복음 5장에는 ‘서른여덟 해 된 병자’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흔히 ‘38년 된 병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기록한 4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는 유난히 병자가 많이 나오고, 병자가 치유되는 기사 많습니다. 당시에는 의술이 발달된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고, 또한 이런 병으로 인해서 고통 받고, 많이 죽기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병 고치는 사역을 통해서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38년이 된 병자’ 우리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38년 동안 낫지 않는 병에 사로잡힌 삶은 암흑 그 자체였을 겁니다. 그런 그에게 희망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평생을 그런 고통 가운데 살았다면 이제 그의 삶에서는 더 이상의 희망도 희미해진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한 가지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베데스다’라는 연못에서 물이 동할 때에 그 곳에 가장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에 걸려 있다고 해도 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데스다’ 연못을 찾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미 수많은 병자들이 자리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요한복음 5장3절.  ‘그 안에 많은 병자가 있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많다’는 ‘프레토스’로 ‘수많은 사람’, ‘무리’, ‘백성’의 뜻입니다. 한두 명의 병자가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병자들이 연못가에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상태였습니다. 38년 동안 낫지 않는 병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희망이란 것이 사라진 상황에서 하나 남은 희망마저도 그렇게 쉬운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만약에 물이 동한다고 해도 연못 안으로 가야 하는데 이 사람의 병도 매우 중한 상태였기 때문에 스스로 물에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한복음 5장7절.         혼자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병자가 자신을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는 상태로 연못가에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어쩌면 그는 자신의 병이 가장 중하기 때문에 연못의 물이 동할 때에 사람들이 자신을 제일 먼저 들어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줄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닐까요? 오늘 날 사람들은 각자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맞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문제가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군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그 문제는 별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든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은 그 사람에게 가장 클 수밖에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 병을 앓은 지 38년이 되었기 때문에 심각한 것이 아니라 그 병으로 인해서 그가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상황이 중요한 겁니다. 그가 병을 앓은 지 3개월이 되었다고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병으로 고생하고, 더욱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단 하나의 희망마저도 얻을 수 없는 상황인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한복음 5장6절.  ‘예수께서 ... ‘보시고’에서 ‘보다’는 ‘호라오’로 ‘찾아내다, 주목하다’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우연하게 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를 주목해 보셨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영혼의 문제를 깨달았다고 해도, 그것을 해결할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38년 된 병자와 같이 우리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문제를 알고, 분석하지만 해결책은 찾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호라오’, 찾아 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 분께서 우리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이 얼마나 중한지를 아십니다. 얼마나 오래 된지도 아십니다. 말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아십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얼마나 아파하며, 힘들어 하는지도 아십니다. 병자가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소망을 가지고 바라본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간 병자가 경험한 은혜를 목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문제든, 어떤 상황이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앞에 오면 해결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께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신약 인물 병자가 자신 병자 맹인 인물 탐구

2022-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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