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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준비해놓은 후 가는 게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34쪽)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쉼보르스카 시선집 ‘끝과 시작’에 써진 한 토막의 시(詩)다. 위의 구절이 힘차게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그래 맞아,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났단 말이야. 그리고 아무런 훈련 없이 죽어갈 거란 말이야. 나는 여러 번 이 말을 중얼거렸었다.     일이년이 지난 후, 다시 이 시집을 읽고서, 또 이 구절에서 나는 다시 사색하기 시작했다.   실은, 우리는 태어난 것조차 모르고 태어났다. 자라면서 정신 차리고 보니,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왜 태어나야 했었는지? 왜 살아야만 하는지도 모르면서, 배가 고프니까, 밥을 먹는다. 밥을 먹으니까, 계속 살고 있다. 자발적으로 살고 있는지? 혹은 수동적으로 살아지고 있는지? 모르면서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35쪽)고 쉼보르스카는 말했다. “사라진다”는 게 아름답다니? 이 말이 사실일까?     살아있는 것이 만약 죽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살아있는 것들로 꽉 차버릴 것이다. 살아있는 것들로 꽉 차버린다면? 땅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한다. 그렇다면 사악하고 잔인한 일만 남아 있다. 그것은 서로 죽이기다. 혹은 굶어 죽기다. 그래서 살아 있던 자가 죽어 사라짐을 보고, 쉼보르스카는 ‘아름답다’고 말했던 것 같다. 이런 잔인함을 피하고, 지구를 살리고, 후손을 위해서, 때가 되면 나도 너도 우리는 죽어주어야만 한다.   태어남과 죽음은 윤회한다는 게 불교이다. 이 세상에 한 번만 태어난 게 아니다. 태어나고 또 태어나고 수없이 태어난다. 쉼보르스카는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고 말했는데, 극히 소수지만, 후생(後生)을 위해서 “미리 준비를 해놓은 후” 죽는 사람들도 있다.     부처는 태어남은 고통이라고 했다. 태어나면 늙어야 하고, 병 들어야 하고,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도를 닦으라고 했다. 말이 쉽지, 도를 닦는다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생(生)에서 조금 닦고, 또 다음 생에서 또 조금 닦고, 그러면 어느 생에선가는 도를 깨치게 된다. 하지만, 도를 깨치지 전에는, 모든 생물은 죽으면 다시 태어나니까, 다시 태어날 바에야, 다음 생에서는 좋은 복을 많이 갖고 태어나면 좋지 않겠는가!     좋은 복을 갖고 태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살생·도둑질·간음·거짓말 등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부처는 말했다. 남에게 선한 일을 하라고 했다. 고등학생이 명문대에 가고 싶으면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가. 대학생이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싶으면 열심히 일하지 않는가. 가는 곳을 알고서 졸업하는 게 좋지 않은가. 계율을 지키고 선행(善行)을 많이 행한 사람들은, 죽음 후, 자기가 가기를 원한 곳에서 태어난다고 부처는 말했다(잡아함경). 재벌 집에서 태어나고 싶으면, 재벌 집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당신도 좋은 복을 듬뿍 갖고 좋은 곳에서 태어나기를 바랄 것이다. 어디로 가는가를 미리 준비해놓은 후,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좋은 곳에 가고 안 가고는, 당신한테 달렸네요! 조성내 / 수필가·컬럼비아 의대 임상 조교수삶의 뜨락에서 시인 비스와바쉼보르스카 노벨문학상 수상자

2025-01-20

정지용 해외문학상 공모전…재미시협 주관 올해 4회째

재미시인협회(이하 재미시협·회장 지성심)가 제4회 정지용 해외문학상을 공모한다.     재미시협이 정지용 시인의 고향인 충청북도 옥천문화원과 계간 ‘동행문학’이 함께 주관하는 정지용 해외문학상은 시인의 작품세계를 널리 알리고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했다.   정지용 시인은 현대 시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도 한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했다고 평가되는 한국 현대 시의 선구자다.   정 시인의 고향인 옥천군은 지용제를 매년 개최하고 문학상을 시상하고 창작대회를 열어 후배 시인을 양성하고 있다.   지성심 회장은 “정지용 시인을 기리며, 그의 시 정신과 뛰어난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공모를 시작한다”며 “새로운 시각과 창의력을 지닌 역량 있는 시인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기다린다”고 밝혔다.     응모 자격은 등단 경력 7년 이상 미국 거주 시인으로 응모 기간은 2월 1일부터 3월 1일까지며 응모작 수는 7~10편이다.     당선작은 4월 11일 발표되며 당선자에게 상금 300만원과 상패를 수여한다.       이메일 접수는 소정 양식 신청서 1부를 작품과 함께 제출하고 우편 접수는 소정 양식 신청서 1부와 응모 작품을 제출하면 된다.     이메일 [email protected], 우편 Korean Poet Association of America 22807 Madison St. Torrance CA 90505으로 접수할 수 있다.     ▶문의:(310)612-9580, (626)533-4044해외문학상 정지용 정지용 해외문학상 정지용 시인 주관 올해

2025-01-19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 꽃눈

하얗게 덮인 눈 속에서도 움을 트려고 / 몸을 뒤척이는 나목이 되자 / 새로운 봄날을 맞이하기 위해 / 죽은 자 같지만 살아있는 자 /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 같이 보이지만 / 모든 꿈을 다 가진 한 그루 나목처럼 살아가자 / 버리면 얻게 되고, 낮아지면 높아지는 빈들 / 겨울나무가 속으로 속으로 뿌리내리며 / 찬바람에 울었던 것처럼 / 속으로 속으로 우리도 울자   눈 덮인 창가에 앉아 편지를 쓴다 / 썼다 지워버린 편지를 다시 쓴다 / 보내지도 못할 편지를 가슴으로 쓰고 있다 / 눈이 녹고 봄이 오면 / 그때도 편지를 쓸 수 있을까 / 연두의 잎눈이 보석처럼 어리울 때 / 목련이 긴 목을 내리고 / 슬피 나를 바라볼 때도 나 그대 앞에 / 엎드려 목 놓아 울 수 있을까 / 호흡으로 겨울 숲은 잠드는데      새해를 맞은 지 두 주가 지나가고 있다. 이렇게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면 내게 허락된 삶의 마지막이 코앞에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멍해졌다. 창밖엔 가는 눈이 벌써 몇 시간째 내리고 있다. 나무의 잔가지를 채우고 차가운 땅을 부드러운 손길로 덮어 주고 있다. 저기 먼 하늘도 건너편 집 지붕도 멀리 보이는 숲도 언덕으로 오르는 좁은 길도 하나같이 하얀 풍경 속에 잠겨 있다. 사람의 마음속보다 더 깨끗하고 환한 눈이 내리고 있다. 무엇을 덮으려 하는 것일까? 상처 나고 주름진 깊은 골을 천천히 어머니의 손길처럼 쓸어내리고 있다.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삶 속에는 작고 큰 상처들로 인해 깊은 흔적들이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 상처는 때로 나를 혼돈과 방황 속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때로는 그 고난을 극복하고 더 밝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초석이 되기도 한다. 스티그마라는 단어는 성경 갈라디아 6:17에 단 1번 나오는 단어이다 ”흔적“으로 번역되어 나오지만 ”낙인“이란 말로도 옮겨져 있다. 흔적이나 낙인이라는 말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바울이 그 스티그마란 말을 통해 자신이 예수의 종이요. 예수가 그의 주님임을 생생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에게 닥친 견딜 수 없는 고난 그 자체가 바로 스티그마라는 단어이고 그리스도의 흔적이 고난이라는 삶의 과정을 통해 자신에게도 깊은 골로 새겨져 있다는 말이다. 바로 그 고난은 오히려 축복이 되어 견디어내고 마침내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 있게 됨을 말하고 있다. 여전히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세상은 온갖 아픔과 고통의 깊은 골을 하얀 눈에 맡기고 있다. 내 안에 새겨진 스티그마, 그리스도의 흔적 같이.     지쳐 잠드는 것이고   흔들려 깨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다   짜맞추는 게 아니라   가슴을 치는 일을   받아 적는 일이다   깨달음을 위해 애쓰기보다   길을 걷다 눈에 띈 들꽃을   노래하고 그리는 것이다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쓰이는 것이다   지나온 걸음 속에서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속에 흐르는 노래를   그저 부르는 것이다   사랑과 그리움, 절망을   아파하고 안아주는 일이고   널 보내지 못한 나를   꾸짖는 일이다   세상을 향한 날 선 독백마저   오늘 부딪치며 살아가는   나에게 보내는 편지요   당신께 드리는 용서인 것이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성경 갈라디아 시인 화가 보호 아래

2025-01-13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세월이 지나간 풍경

지나간 것들은 그립다. 고향집 마을 옹기종기 붙은 삼거리 초가집에서 보낸 유년의 기억은 텃밭에서 돋아난 버섯처럼 동그라미를 그린다. 먼 산 봉우리에 살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비슬산을 감싸고 지천으로 핀 참꽃(진달래)은 핏빛 사랑을 품고 광활한 참꽃군락지를 이룬다.   삼만이 아재는 땔감을 장만하러 산에 갈 때마다 참꽃 한아름 꺾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옥이 언니는 양지 바른 툇마루에 날 앉히고 ‘꼬마 공주님’ 하며 머리에 참꽃을 매달았다. 왠지 가슴이 떨려 왔다. 하모니카 불듯 꽃잎 따서 입 안에 넣으면 쌉쌀하고 달콤한 향기가 혀 끝을 맴돌았다.   ‘늙마에 미국 가는 친구/ 이메일과 전화에 매달려 서울서처럼 살다가/ 자식 곁에서 죽겠다고 하지만/ 늦가을 비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인사동에서 만나/ 따끈한 오뎅 안주로/ 천천히 한잔할 도리는 없겠구나./ 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 뜨는 것보다/ 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황동규 ‘이별 없는 시대’ 중에서.   시인은 스코틀랜드 위스키 발렌타인을 좋아한다. 나는 술을 전혀 못 마시지만 서울 갈 때 가끔식 여행 가방 속에 발렌타인21을 챙겨 간다. 선생님은 소중하게(?) 아껴 드시고 반쯤 남으면 뚜껑을 닫아 주머니에 넣으신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건 그냥 수양버들에 묶인 그네가 하늘 높이 나는 신선한 자유로움이다.   ‘이별 없는 시대’의 ‘늙마’는 미국으로 떠나는 친구 마종기다. 마종기 시인은 1965년 군의관으로 군 복무 중 ‘한일 굴욕외교 반대 재경 문인 82인 서명’ 사건으로 수감됐다가 미국으로 추방되듯 이민을 간다.   마종기 시인은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진단방사선과 전문의를 거쳐 톨리도에서 방사선의사로 역임한 후 은퇴했다. 주립대학 시절 타계한 친구 기일이 오면 4시간을 운전해 꽃을 들고 우리 동네에 있는 데이빗 묘지를 찿아왔다.   ‘지금도 아빠를 기억하는 친구 있을까?/ 없어도 친구가 있으니까./ 기억도 못 해 주는 친구는 뭐해?/ 내가 사랑하니까. (중략)/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 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느니까.(중략)/ 오래 전 고국을 떠난 이후 쌓이고 쌓인 눈으로 내 발자국 하나도 식별할 수 없는 천지지만 맹물이 되어 쓰러지기 전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마종기 ‘대화’ 중에서 아픔과 고통, 사랑과 미움, 이별과 그리움은 살아있는 동안 넘치는 축복이였다. 사라져 별이 되는 순간에도 언약의 말들은 사랑의 끈을 놓치 않는다.   ‘누군가 조용히/ 풍경 속으로 들어온다/ 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는다’ 황동규 시인은 ‘외로움’의 존재론적 의미를 ‘홀로움’이라는 새로운 경지로 승화시킨다.   바람이 매섭게 심장을 헤집고 폭풍이 몰아치는 날에도 그대가 풍경 속에 있기에 외롭지 않았다. 찬란했던 시절. 그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걸어가면 눈물이 방울져 내리는 내 손에 안개꽃 한아름을 건네준다.   세월이 지나간 풍경 속에 따스한 햇살로 남은 그대여! 다시 만날 수 없다 해도 작별이 끝이 아닌 것처럼, 사랑이 재가 될 때까지 불꽃으로 타오르기를. (Q7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친구 마종기 마종기 시인 그네가 하늘

2024-12-24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림자

가만히 나를 들여다 보네 / 들여다보는 내 모습이 거기 보이네 / 그리움을 하나씩 숨기고 있네 // 그림자 속에는 // 흔들리는 들꽃의 반가움도 있고 / 나비의 날갯짓도 노을 속에 사라지네 / 들길을 걷는 한 사람의 발걸음도 / 창가에 앉은 그의 심장 뛰는 소리도 들리네 // 그림자 속에는 없는 것이 없어서 / 그림자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 그 몸에 그림자를 달고 다니게 되네 / 자동차 바퀴는 그림자로 달리고 / 구름도 땅 위에 그림자를 그리고 있네 / 나무는 그림자 밑으로 뿌리 내리고 / 꼬리 흔드는 강아지는 흔들리는 그림자를 물고 가네 // 그림자는 시작도 되지만 끝도 되어 / 점 아래로 모이는 정오엔 사라지기도 하네 / 그림자가 사라지는 순간은 순식간이어서 / 한 번도 그 순간을 바라본 사람은 없네 / 그 순간 그림자는 제 몸으로 돌아가 제 몸이 되네 // 숨바꼭질 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 제 발밑의 그늘을 찾지 못하네 / 빛이 있어야 그림자로 살아나고 / 내 생각이 네 생각과 다를 때에는 / 서로의 자리를 바꿔 나타나기도 하네 / 그림자 속에 있지 않은 것은 없기에 / 붉은 해 수평선으로 기울고 긴 여운을 만드네 / 사람들도 그림자로 살아가네 / 온종일 그림자로 살다가 어둠이 오면 / 그림자를 어둠에 숨기기도 하네 // 이제 너는 내 그림자로, 나는 네 그림자로 살기로 하네       빛이 있고 사물이 있으면 그 사물은 그림자를 만듭니다. 그 빛이 눈부신 햇빛이 될 수 있고, 달빛이나 별빛이 될 수도 있습니다. 희미한 초롱불이나 촛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미미한 빛만 있으면 그림자는 어느새 생겨납니다. 어쩌면 사물속에 저마다의 그림자를 품고 사는 것이 아닌 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신기한 것은 그 사물이 흔들리면 그림자도 같이 흔들리고 사물이 뛰기 시작하면 그림자도 같이 뛴다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본체보다 몇 배나 크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로데스크한 모습으로, 본체를 삼켜버릴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림자를 보면 사물의 모습이나 상태가 그대로 투영된다는 말이 됩니다.     사물과 그림자는 한 뿌리에서 나온 한 몸입니다. 사람도, 동물도, 움직일 수 없는 식물도,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미미한 생물체 모두 다 그림자를 가집니다. 하늘의 구름도, 낙하하는 낙엽도, 달리는 자동차도 그림자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림자는 사물의 배경으로 살아가는 듯 보여집니다. 철저히 사물의 움직임대로 가고 순순히 사물이 가고자 하는 의지대로 함께 따라갑니다. 그림자는 처음부터 자기를 내려놓아 사물의 배경으로 만족합니다.     누군가의 배경으로 살아간다는 것. 말이 쉽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림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의 뜻대로, 자기의 방향대로 걸어갈 뿐입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막무가내의 삶 모두는 자기 뜻과 성취를 위할 뿐입니다. 내가 없어지는 배경이 되려 하는 사람을 찾기 힘든 세상입니다. 그림자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살아가는 지혜를 배웁니다. 배경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이요, 자기를 내려놓는 삶이기도 합니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어두운 새벽이었는데 어느새 안개가 자욱한 초겨울 아침이 왔습니다. 햇빛이 없어 그림자가 없는 하루를 시작합니다. 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비추면 그림자와 함께 모두 행복하시길요. 커피 조금 더 내려야겠습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림자 순간 그림자 자동차 바퀴 시인 화가

2024-12-16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기대어 살아야 하지

새벽이 깨어날 때면 / 꽃 한 송이 피어나듯 / 어둠의 뒤로 아침이 오네 // 힘들 때마다 우리 기억해야 하지 / 소리 없이 들길을 걸었던 일 / 바람이 우리를 마구 흔들었던 기억 / 내어준 팔의 따뜻함에 꿈꾸었던 시간 / 기억해야 하지 사는 게 쓸쓸해지면 / 마주 보며 웃음을 되찾았던 일을 // 다시 태어난다면 / 이 땅에 다시 태어난다면 // 들꽃 만개한 일몰의 언덕에서 손잡고 / 붉은 노을로 스러지는 밤하늘 가득 / 서로를 지키는 별빛이 되어야하지 / 살아있는 날 동안 눈동자같이 바라보며 / 기대어 설 서로의 든든한 등이 되어 / 기쁘거나, 슬프거나, 외롭더라도 / 새벽이 깨어나듯, 꽃 한 송이 피어나듯 / 그렇게 우리 기대어 살아야 하지 // 야윈 팔소매 걷으며 웃어줄 당신이기에       기대어 산다는 것은 서로의 등을 내어 준다는 말이다. 등을 내어 준다는 것은 나를 지탱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 준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연약한 한 사람의 등이 다른 사람의 등에 기대어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스스로 서서 버틸 수 없는 사람이 자신의 온몸을 의지하여 맏길 수 있는 어느 한 사람을 만났다면 그는 인생을 잘 산 사람이다. 어떤 사람의 입은 마음에 있어 생각을 마음에 담지만 어떤 사람의 마음은 입에 있어 생각을 무심코 내뱉기도 한다. 확인 되지 않은 말 확신이 없는 말들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해서 좋았던 기억 보다 단 한 번의 서운함으로 오해하고 실망하여 멀어지기도 한다. 서운함보다 함께 한 좋은 기억을 떠올려 먼저 고마웠다고, 미안하다고, 손 내밀 수 있다면 세상은 아름답게 바뀌어 질 것이다.     이처럼 믿을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기대어 살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진정 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언제인가 산행 중에 지쳐 있는 몸을 큰 나무 등에 기대어 본 적이 있다. 편안함과 안락함이 내 등을 통해 따뜻하게 전해 왔었다. 잠깐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다시 힘을 얻고 정상을 향해 걸었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땅을 딛고 살고 있다. 내 발을 지탱해주는 것은 우리가 인식 하든, 인식하지 못 하든 우리가 눈을 뜨면 걷는 이 땅이 자기의 등을 내어 준 것이다. 바람이 더위와 땀을 식혀주는 것도 바람이 자기에 등을 내어 준 것이다. 나무도 서로의 등을 기대고 의지하여 든든히 가지를 뻗는다. 뿌리는 가지에게, 가지는 뿌리에게 든든한 등이 되어준다.     자세히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홀로 살아갈 수 없다. 서로의 등을 내어 주고 서로의 약함을 보듬어주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상대방의 버팀목이 되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방이 나의 든든한 등이 되어 주기도 한다.   슬플 때도, 외로울 때에도, 한없이 깊은 수렁 속에서도 지친 어깨를 안아주며, 눈동자같이 지켜 주자. 어둠의 뒤로 아침이 오듯이 서로의 손을 끌어 빛나는 아침을로 이끌어주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어둠은 사라지고 한송이 꽃이 피어나듯 우리의 마음 속에도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날 것이다.     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삶은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진다는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청춘은 너무도 짧고 아름다웠다.“라고 박경리 작가는 말했다. 그렇다. 버리고 갈 것만 남기고 나머지 모든 것들은 서로의 등이 되어 주자. 넘치면 넘치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감사하며 서로에게 기쁨이 되어주자. 서로의 마음 속에 꽃 한송이 피워 보자.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동안 눈동자 시인 화가 박경리 작가

2024-12-09

[이 아침에] 하나쯤 갖고 싶은 ‘천천히 가는 시계’

벽시계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벽시계 안에는 일정하게 움직여야 할 초침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건전지가 다 닳았는지 6시부터 9시까지는 한 칸 올랐다 두 칸 내려가고, 다시 두 칸을 오르다가 기운이 달렸는지 다시 한 칸 미끄러지면서 보는 이의 애간장을 녹인다. 겨우 9시에 오른 초침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마지막 턱걸이 하나를 앞둔 사람처럼 안간힘을 다하며 마지막 용을 쓰더니 12시라고 쓰인 꼭대기에 올랐다.     시곗바늘이 어기적대며 정상에 오르는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이런 시계 하나쯤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가는 시계’ 말이다. 시곗바늘이 반 바퀴 도는 데 30초가 아니라 한 40~50초나 걸렸으니 이런 시계 하나만 있으면 시간을 넉넉히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정상에 오른 시곗바늘은 뭐가 그리 급한지 후다닥 내려가면서 결국은 60초에 맞춰 한 바퀴를 돌더니 분침을 한 칸 앞으로 돌려놓았다.     오르막길을 더디게 올라가서 내리막길을 만나면 쏜살같이 내려가는 시계처럼 세월도 끝에 가서는 급하게 꼬리를 감추고 사라진다. 온종일 하늘에 떠 있을 것만 같던 해도 때가 되면 지평선 너머로 뉘엿뉘엿하더니 한순간에 사라지고 땅거미가 찾아온다. 가는 길이 급하기는 달도 마찬가지다. 월초라고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면 어느새 월말이 되고 걸핏하면 달이 지나서야 달력을 넘기기 일쑤다. 한 시간 두 시간,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달음박질하듯 달아나는 시간을 좇다 보니 어느새 한 해가 저문다. 더는 시간을 붙들 힘도 없는데,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건전지를 바꿔 끼운 벽시계는 째깍째깍 제 갈 길만 갈 뿐이다.      어디 천천히 가는 시계는 없을까?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의 푸념을 들었는지 나태주 시인이 그런 시계를 하나 내놓았다. 시인이 노래한 천천히 가는 시계는 수탉의 긴 울음소리로 아침 먹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뻐꾸기의 잰 울음소리에 점심때가 지나고 있음을 느끼고, 부엉이의 더딘 울음소리에 저녁밥 지을 때가 되었음을 깨닫게 되는 새의 울음소리로만 돌아가는 시계다.     또, 나팔꽃이 피어서 날이 밝은 것을 알고, 연꽃이 피어서 해가 높이 뜬 것을 알고, 분꽃이 피어서 구름 낀 날에도 해가 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꽃의 향기로만 돌아가는 시계다. 시인은 새의 울음소리로만 돌아가고, 꽃의 향기로만 돌아가는 시계를 소개하면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고 시도 쓸 만큼 써보았으니 나도 인제는,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 하나쯤 내 몸속에 기르고 싶다’라고 노래했다.     ‘천천히 가는 시계’라는 제목의 이 시를 읽으며 우리도 그런 시계 하나쯤 우리 몸속에 기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길러야 하는 ‘천천히 가는 시계’는 사람을 향한 너그러움으로 나이 들었음을 알게 하고, 세상을 향한 이해와 사랑으로 어른이 되었음을 짐작하게 하고, 웬만한 고난쯤은 지금까지 쌓은 연륜으로 가볍게 넘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는 시계다. 또 한 해가 이렇게 옴나위없이 저물어간다. 빠른 세월을 탓하기 전에 이해와 사랑, 너그러움으로 움직이는 ‘천천히 가는 시계’ 하나쯤 우리 마음에 길러 보자. 가는 세월이야 붙잡을 수 없겠지만, 최소한 세월에 치여 살지는 않게 될 것이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이 아침에 시계 시계 하나쯤 나태주 시인 최소한 세월

2024-11-13

손국락 시집 개정판 출간…‘혼돈 속에 핀 코스모스’

  “시를 쓰는 것은 천문학자의 고독한 작업과 같고 나 역시 내면 세계의 아름다움을 길러 내리라 다짐한다.”     2002년 출간한 ‘혼돈 속에 핀 코스모스(도서출판 창조문학사)’의 개정판(도서출판 한강·사진)을 출간한 손국락 시인은 책에 수록된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올해 출간된 개정판 시집은 5부로 구성되어 있고 약 85편의 시가 수록됐다. 손 시인이 초판 출간 이후 20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러시아 근무, 마추픽추 여행 등에서 시상을 얻은 25편 시를 추가했다.   문학평론가인 홍문표 명지대학교 교수는 “시인 작품은 광활한 우주 속에서 존재 인식, 그러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서정과 섬세한 문학적 감성을 보여 준다”며 “그의 시적 공간은 지구라는 비좁은 공간을 벗어난다. 그만큼 시선은 우주적”이라고 평했다.       손 시인은 1985년부터 40년째 보잉사에서 수석 시스템 엔지니어,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며 라번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서 시스템 공학을 가르쳤다.     그는 “일과 여행으로 머무른 제주도에서 밤바다와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보며 시를 쓰기 시작해 모은 작품을 초판으로 출간했다”며 “항공우주 분야에서 일하다 보니 우주에서 시상을 얻는다”고 말했다. 또 “우주는 과학적인 이론으로 이해하지만, 반은 정신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주론을 문학적으로 접근해 보고 싶다”고 밝혔다.     손국락 시인은 1998년 ‘시대 문학’ 신인문학상 당선으로 한국 문단에 등단한 후 시집으로 ‘혼돈 속에 핀 코스모스(초판)’, 언론사 기고를 모은 칼럼 집 ‘우주와 나의 실존’을 출간했다. 이은영 기자코스모스 손국락 손국락 시집 개정판 시집 손국락 시인

2024-11-10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나에게 거는 최면

가을을 반납했다는 G 작가의 글을 접하고 소름이 돋았다. 얼마나 절실했으면 시간과 계절을 내려놓았을까? 암 투병과 함께 지긋지긋한 통증에 약효가 점점 짧아지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통증이 가시면 글을 쓰고 있다는 G 작가를 마음으로나마 응원하고 있다. 가을을 반납하고서라도 써야 할 그 무엇에 박수를 보낸다. 아무쪼록 그 글의 완성이 책으로 엮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선물이 되기를 바란다.       새벽 언덕에 아침이 온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침이 온다   우수수 낙엽이 날려도 먼동이 트고   한 치 앞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햇살이 눕는다       새벽 언덕에 아침이 온다   누군가는 짙은 커피 향에 취해   떠나는 계절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그리울 때 갈대는 땅으로 눕는다       새벽 언덕에 아침이 온다   꿈과 현실의 갈래길에서 한길을 택해   언덕을 내려오다 쓰러진 나무를 보았다   거기 나는 속이 텅 빈 나무처럼 땅으로 눕는다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 꿈은 꿈 자체로 아름답다. 기쁨과 슬픔의 조건조차 현실을 인식하는 우리 내면의 의식에서 빚어진다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일상의 결과가 그 가치를 판단하는 바로미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함부로 타인의 인생을 평가한다거나 스스로의 삶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객관적이지 않다고 본다. 늘 사람을 대할 때 수직적인 관계보다는 수평적인 사고로 대하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덕망이 아닐까 한다. 세상의 잣대가 아닌 스스로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아직 이 지구상에 존재하므로 세상은 여전히 빛나고 아름다울 수 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흰’을 읽고 있다. 소설이라기보다 짧은 수필의 연결 같기도 하고 자세히 읽다 보면 깊은 시 같기도 했다. 흰 것들에 대한 기억과 사유들을 덤덤히 적어 간 그의 글 속에서 인간의 진진한 삶의 고뇌와 덤으로 살고있는 아픔과 고마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속도보다는 방향의 진의가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빨리 결론지으려는 조급함이 때론 방향감을 상실한 채 표류하기도 하기에 우리는 자연의 변화처럼 천천히, 바른 방향으로 그렇게 물들어 가야 한다. 글을 읽는 내내 차분하지만, 영감이 자유로운 그의 내면을 송두리째 접할 수 있었다. ‘흰’의 마지막 소제목 ‘모든 흰’의 내용은 이러했다.     당신의 눈으로 흰 배춧속 가장 깊고 환한 곳. 가장 귀하게 숨겨진 어린 잎사귀를 볼 것이다. 낮에 뜬 반달의 서늘함을 볼 것이다. 언젠가 빙하를 볼 것이다. 각진 굴곡마다 푸르스름한 그늘이 진 거대한 얼음을, 생명이었던 적이 없어 더 신선한 생명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올려다볼 것이다. 자작나무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다. 겨울 해가 드는 창의 정적 속에서 볼 것이다. 비스듬히 천장에 비춰진 광선을 따라 흔들리는, 빛나는 먼지 분말들 속에서 볼 것이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최면 새벽 언덕 노벨 문학상 시인 화가

2024-11-04

[문장으로 읽는 책] 천국은 있다

천국은 있다   뼈의 입장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다가   이미 알고 있었던 일들이   나를 놀라게 한다는 걸 알았다   모든 예상된 일은   예상치 않게 나를 흔든다   물론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뼈가 됐다는 걸   허연 『천국은 있다』   시인 유희경은 허연의 시를 ‘견딤’에 대한 시라고 말한다. “그 견딤은 시종일관 아슬하고,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 역시 견디고 있음을 깨닫는다”고 썼다. 인용한 시는 ‘이장’의 도입부다. 시인은 어머니의 죽음을 견뎌낸 것도 모자라, 뼈가 된 어머니를 확인하는 이장까지 견뎌낸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처럼 예상된 일이(누구나 죽는다), 예상치 않게 나를 흔드는 것, 그런 속수무책을 지치지 않고 견디는 게 삶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지난겨울 날렸던 연이/ 예기치 못한 각도로/ 곤두박질쳤던 것처럼/ 이별은/ 전면적이고 모든 것인 일// 세상의 모든 설탕 덩어리들이/ 언젠가 다 물에 녹듯/ 긴 잠에서 깨어나면/ 어차피 이 세상이 아닌 것.’ 시 ‘이별의 재해석’의 일부다. 날아오른 연이 떨어지고, 설탕이 녹듯이 사랑도 파국을 향해 간다. 진실했다면 됐다고?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별한 사람들이 쓴/ 마지막 편지들을 읽는다/ 마지막이므로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진실은 그저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천국 시인 유희경 설탕 덩어리들 마지막 편지들

2024-10-30

[필향만리]

일부분만 전하는 『시경』의 일시(逸詩) 중에 “아름다운 꽃이여! 펄펄 날리는구나. 어찌 그대를 생각지 않으랴만 집이 너무 머오이다”라는 시가 있다. 이에 대해 공자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움에 어찌 멂이 있겠는가!”라고 평했다. 진정으로 그리워한다면 멀다 해서 못 찾아갈 리가 없을 테니 멀다는 것은 핑계이고, 실은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게 공자의 풀이인 것이다. 공자는 사랑에도 통달했던 것 같다. 진정한 사랑에는 핑계를 댈 틈이 바늘구멍만큼도 없음을 꿰뚫어 보았으니 말이다.   “하늘이 땅에 이었다 끝 있는 양 알지마소. 가보면 멀고멀고 어디 끝이 있으리오. 임 그림 저 하늘 위에 그릴수록 머오이다.…” 시조 시인 이은상이 작사한 가곡 ‘그리움’의 제2절이다. 그리움이 뻗히는 그 가없는 거리를 물리적으로 계산하여 멀다고 생각하는 순간, 순수하고 아름다운 먼 그리움은 사라지고 만다. 1년에 단 한 번 만나지만 어떤 핑계도 없이 마음은 항상 네게 있는 견우와 직녀의 그리움은 애가 타도 오히려 행복한 그리움이다. 허나, 하늘 끝보다도 더 먼 곳 북한 땅. 이산가족의 그리움에는 실지로 ‘멂’이 있다. 내 잘못 아닌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도 먼 그리움이 있다. 핑계마저 댈 수 없이 먼.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필향만리 시조 시인

2024-09-25

달라스 거주 박혜자 시인, 제8회 해외풀꽃시인상 수상

 달라스 거주 박혜자(사진) 시인이 제8회 ‘해외풀꽃시인상’을 수상했다.   해외풀꽃시인상은 미주 한인 문인들의 창작활동을 북돋워 주기 위해 한국의 국민 시인인 나태주 시인이 제정해 2017년부터 시행돼 미 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인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문학상이다. 이 상의 응모 자격은 미주지역에서 활동하는 등단 5년 이상된 시인으로, 신작시 5편을 지난 7월 31일까지 제출해 최종 심사는 한국에서 실시됐다. 박혜자 시인을 수상 소감을 통해 “미주에서 시를 쓰는 많은 디아스포라 선배님들, 동료들, 후배님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주류사회에서 관심을 기우리지 않아도 우리는 글을 시의 형식을 빌어 계속 써왔다”며 “그건 바로 나의 정체성을 우리가 이 땅에서 뿌리내리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자 하는 절박함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박혜자 시인은 “이민살이가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우리는 우리의 뿌리가 지닌 위대한 힘을 알고 있다”며 “물질적인 것 보다 정신적인 힘을, 허탈한 부유함 보다는 선택한 청빈을 택했던 우리 조상들의 삶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울러 기교보다는 그냥 간직해 두었던 풀꽃들의 나눔과 기억을 시로 표현해보았다”며 “부족한 제 시를 공감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더욱 정진하라는 회초리로 알고 시 창작에 더욱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제8회 공모전 최종 심사에는 예심을 거쳐 박혜자 시인을 포함해 총 5명의 시인이 올라갔다. 심사를 맡은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학교 교수)와 나민애 문학평론가(서울대학교 교수)는 심사평을 통해 “박혜자 시인은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과 개성적 문장에 공을 들인 점이 매우 긍정적으로 다가왔다”며 “시를 한 편, 한 편 써가는 기율과 방법에서도 삶의 진정성과 이미지의 선명성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이처럼 외롭고 고단한 이민자로서 모국어를 이렇게 반듯하고 풍요롭게 구축해가는 역량을 보여준 박혜자 시인의 노력과 의지를 평가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토니 채 기자해외풀꽃시인상 달라스 해외풀꽃시인상 수상 박혜자 시인 달라스 거주

2024-08-26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홀로서기

홀로 피었다   바람에 흔들려 구겨진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도 예상 못 했지만 현실이었다   구겨진 얼굴 피기가 쉬웠겠는가   흔들리는 갈대가 하얗게 울음을 터뜨렸다   비바람 앞에, 천근의 무게를 지고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설 때   정면으로 부딪칠 때 그때 비로소   홀로서기는 시작되었다   홀로 핀 당신만 보인다   쏟아 내지 않고 별빛 하나로 모이는   그곳에 서 있어 보면 알 수 있었다.   같은 생각, 같은 걸음을 옮길 때   외로움은 멀어졌다   결국 그 힘은 뿌리에 있는 것이다   당신 앞에 날마다 서는 그 힘은   홀로 견디는 그 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자세히 보아라. 홀로 핀 것들이 너만이더냐. 시름시름 꽃대를 세우더니 백일홍도 홀로 피었고, 씨 뿌리지 않은 과꽃도 여린 꽃망울 홀로 맺었고, 망초도 담장 구석에 기대 안개 같은 하얀 꽃으로 홀로 활짝 웃었다. 그뿐이더냐. 수백 광년을 지나 발밑 아래 홀로 부서지는 별빛은 그냥 서서 맞이하기엔 얼마나 눈물겨운가.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햇살은 또 얼마나 포근하고 따사로워 온몸을 녹이지 않던가.    여름내 울어대던 매미가 홀로 제 몸을 벗었고, 딱새도 홀로 밤낮으로 알을 품더니 올망졸망 제 식구를 데리고 춤추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자세히 보면 모두가 홀로 견디는 것이다.   나도 어릴 때 어렴풋이 홀로 사는 법을 배웠다. 어머니가 홀로 되신 후 하루하루를 어떻게 견디어 내는가를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지만 결국 어머니는 홀로 견디고 홀로 사셨다. 그리고 홀로 하늘의 별이 되었다.   초에 불을 댕기면 심지가 타면서 불꽃이 보인다. 심지가 곧게 깊이 박혀 있으면 불꽃은 오랫동안 그 빛을 잃지 않는다.     나무도 그 뿌리가 깊게 뻗어있지 못하면 비바람, 눈보라에 쓰러지게 된다. 아무리 버티려 해도 제 몸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홀로 서려면 그 뿌리가 깊어야 한다. 홀로서는 힘은 보이지 않는 그 심지에서, 그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무리 화려해도 아무리 무성해도 홀로 서는 힘은 보이지 않는 다른 곳에 있다.     나무가 눈을 뜨는 시간에 나도 눈을 떴다. 나무는 자신이 심어져 자란 곳을 불평하지 않는다. 오늘도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지를 휘며 살아감의 유연함을 보이고 있다. 보이지 않는 뿌리는 깊은 땅을 향해 뻗어 가고 있겠지. 서 있다는 것은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온 힘을 다해 버티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도 그랬다. 하루를 그냥 맞은 게 아니다.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두렵고 떨리는 하루를 그림자처럼 지내셨다. 노을마저 져버린 서쪽 창가에 어둠이 찾아오면 지친 어깨를 들썩이며 가슴을 저몄을 것이다. 잠든 네 자녀의 이마를 쓸어주며 기도 반, 눈물 반으로 지샜을 것이다. 나는 안다. 그 먹먹했을 하루하루의 시간을. 그 고통스런 날들을 견디며 고개 숙이지 않은 것들에겐 향기가 난다. 그래서 난 홀로인 것들이 좋다. 더 마음에 와닿는다. 홀로 견디어낸 시간이 자랑스럽다. 홀로여서 외롭다고 생각지 마라. 사람도 홀로 있을 때 가장 사랑스럽지 않더냐.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비바람 눈보라 얼굴 피기 시인 화가

2024-08-19

‘김이듬’ 시인 줌 강의 개최…15일 재미시협 ‘시인교실’

재미시인협회(회장 고광이)가 오는 15일 오후 6~8시 무료 줌 세미나를 개최한다.     초청 강사는 김이듬 시인이다. 2020년 ‘히스테리아’의 영미 번역본이 전미번역상과 루시엔스트릭 번역상을 동시 수상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부산대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경상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춘수 시문학상을 비롯해 다수의 국내 문학상을 받았다.     저서로 시집 ‘명랑하라 팜 파탈’, ‘베를린, 달렘의 노래’, ‘투명한 것과 없는 것’, 장편 소설 ‘블러드 시스터즈’, 연구 서적 ‘한국현대페미니즘 시 연구’와 영역시집 등이 있다. 한양여대 겸임교수를 역임, 웹진시산맥 주간이다.   이번 강좌에서는 자신의 여덟번 째 시집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을 중심으로 창작 방법론과 시학을 특강한다.     3개의 소주제로 구성된다. 1부는 시간의 세 가지 얼굴이라는 개념과 사물의 순간적 파악, 감정을 표현하는 시의 특징을 살펴본다. 2부는 공간과 장소성, 3부는 시공간을 넘어 타자에게 이르는 시 세계를 탐구한다.     줌 강의에 참여하려면 ID: 387 121 2552, Passcode: kpaa를 사용하면 된다.     ▶문의: (310)612-9580 이은영 기자시인 개최 시인교실 창작 김춘수 시문학상 창작 방법론

2024-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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