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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남겨진 바람이 되는 것이네

알프스의 숨겨진 보석 동쪽 계곡 돌레미티(Dolomiti)로 가는 길은 너에게로 가는 길과 닮아있네. 기억나지 않는 일을 기억하려는 시간 동안 나무는 숨 쉬지 않았고 들꽃은 개화를 멈추었네. 2.000 고지 높이의 산행은 숨이 차지 않았네. 보는 사람들과 누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난 왜 마음이 아파지는 걸까? 얼마나 더 걸어야 하나? 뒤돌아보지 않는 삶을 살 순 있을까? 오랜 시간 누리고 살지 못해 내게 또 미안하네. 하늘은 산등성이를 내려다보고 산에는 작고 앙증한 꽃 비올라, 꽃 한 송이 흐드러진 마음 보라색 꽃잎으로 펼쳐 보듬고 보라색 메아리, 비올라 꽃 한 송이.   산을 오르다 보면 산이 나를 데리고 가네. 푸른 가지 흔들며 오라 하네. 산에 잠깐 머무는 동안 발끝으로 수액이 흐르고 여러 장의 꽃잎이 피어나네. 하늘이 맞닿은 곳에 구름계단을 만들고 한참을 오르다 보면 덩그렇게 산봉우리와 구름과 나만 남았네. 맞은편 산등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나는 이곳에, 또 저곳에도 살고 있었네. 버려진 땅은 없었고 눈이 녹아 내리는 물가에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네. 소리가 사라져 버린 땅, 그림자 지나간 숨결과 걸음 흔들어 깨워도 기척이 없네. 누구는 집으로 가고, 누구는 집을 떠나고 있네.   산을 내려오면서 집으로부터의 나를 기억하지 못하네. 차창 밖으로 너를 보고 있네. 너는 산 정상을 향해 걷고 있네. 멀어지는 너를 돌아다보았네. 햇살 아래 사라져 버린 너는 눈 덮인 알프스로부터 내려온 보라색 메아리가 되었다. 나의 사랑이 죄가 된 날부터 산 속에 피어난 비올라 한 송이 안개처럼 내 속에 살아가고 있네.   독수리의 높은 창공을 날았네. 아래는 아찔했었네. 날개가 없어도 날 수 있는 게 신기했네. 성당의 뾰족한 탑 위 십자가 고공 낙하를 시작했네. 양팔로 방향을 조절하고 오른발은 엑셀레이터, 왼발은 브레이크 도착한 곳은 알프스 산골 마을, 작은 돌멩이로 높지 않은 담장을 쌓고 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알프스 작은 정원엔 들꽃이 피기도 하였네.   한때는 사랑에 목이 메었네. 밤낮 그의 이름에 토씨를 달고 그의 주변에 꽃씨를 뿌렸네. 그에게 나는 하루가 열리는 호흡이었다가 버린 후 어딘가에 남겨질 먼 발 등성이가 되기도 하였네. 나의 발끝부터 사라지는 꿈. 거의 몸의 절반이 보이지 않았네. 백포도주 한 잔을 비울 즈음 나는 사라졌네. 콘도라를 타고 구름 운하를 건너는데 신기하게도 우린 한 배를 타지 못했네. 두리번거렸지만 그는 내 곁에 없었네. 나는 그의 향기를 가져와 들꽃이 되었네. 베네치아의 새벽이 되었네.   하늘에 오래 남겨진 구름은 없네. 늑대가 양의 다리를 물었다가 두 마리의 악어가 되기도 하고 저무는 노을로 피어나기도 하였네. 누구나 그런 거라네. 처음 그 설렘으로 몇 년은 버티고 몇 년은 지워져 가는 것이네. 알프스 설산 눈물처럼 흘러내려 한 번도 손 잡지 못한, 막연히 따뜻했을 다른 하늘, 다른 풍경으로 마주 잡는 것이네. 백팔번의 천둥이 치고 셀 수 없는 별들이 저물어도 나는 그 앞에 그는 내 앞에 무엇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네. 출렁이는 물결 위에 내려놓은 시간, 그 시간이 여전히 나를 끌고 가고 있네. 베네치아에 남겨진 바람이 되는 것이네. (시인, 화가)     Kevin Rho 기자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바람 알프스 산골 보라색 메아리 마음 보라색

2024-04-22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물의 나라 베네치아

밀라노에서 맞이한 밤은 짧고 생소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은 왔고 이어 아침이 밝았다. 시카고 근교의 에반스톤이나 하이랜드 파크의 아침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7시간의 시차가 있을 뿐 하늘과 구름과 사람들의 분주한 걸음마저 다른 점이 없다. 앞으로 10일 동안 나도 함께 분주히 걸으며 사진도 찍고 커피도 마시며 찬란했던 로마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 한다.     4세기 이후 지중해를 중심으로 활발한 해양도시로 발전한 베네치아(베니스)로 향하는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았다. 왼쪽 창문으로 시프러스 나무들이 줄지어 따라왔고 멀리 여럿의 산등성이 뒤로 눈 덮힌 알프스 산들이 보인다. 스위스와의 접경을 좌로 돌려놓고 버스는 3시간여를 달리고 있다.     붉은 기와지붕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그 뒤론 둥글고 뾰족한 탑을 가진 고대 성당 건축물이 보인다. 고대 화려했던 로마의 거리 풍경이 오버랩핑 되었다. 빨간 깃털을 단 투구와 가죽옷을 입은 기마병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십 수세기에 걸쳐 유럽과 서아시아를 지배하며 위세를 떨치던 로마도 저물고 이제는 이탈리아라는 그리 크지 않은 반도 국가로 남겨지게 되었다. 화려했던 문화유산과 3.000고지의 아름다운 알프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소유하고 있다. 이곳에서 100년 된 건물은 현대 건물로 분류될 만큼 도처에 500년, 600년 된 건물이 즐비하다. 도시마다 하나님을 기리는 성전을 건축하였는데 건축 기간이 100년을 넘기기도 한 성전이 많이 있다고 한다. 그 외양이 수려하며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불가사의 건축물들이 많다.     첫날 방문했던 밀라노 성당의 위엄도 대단했다. 성당의 한 면은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 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성전 내부의 장식들도 대단하였는데 이는 세공 산업의 발전으로 연결되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가 디자인, 가구, 패션의 첨단 국가로 발전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도시의 작은 골목에도 구운 벽돌과 세라믹 타일 바닥으로 포장된 곳이 많았다. 오래된 건물을 부수지 않고 보수함으로 옛모습을 보존하는 배려는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이곳을 찾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3.850미터 철도 다리를 건너 베네치아 섬으로 들어간다. 119개 섬으로 연결된 베네치아는 189개 운하, 450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곳 섬들을 곤돌라라는 배를 타고 섬으로 이동하게 된다. 쾌속정 같이 생긴 Water Taxi가 분주히 물살을 가르고 있다.     입학 동기 정경연(홍대 미대 대학원장)이 금상을 수상했다고 수상 작품과 똑같은 염색 작품을 보내주었던 비엔나르 미술제, 강수연(배우)이 여우 같은 연기로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들어 올린 베니스 영화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중세 시대 이곳에서의 교육은 귀족이나 사제들에게만 허락되었다고 한다. 음악교육을 받고 싶었던 비발디는 평민에서 사제의 신분으로 전환해 음악교육을 받았고 후에 사계(Four Seasons)로 음악성을 인정 받기도 하였다.     300년이 넘은 CAFE Florian에서 생음악과 함께 젤라또로 갈증을 해소했지만 물의나라 베네치아의 하루는 온통 물, 물, 물투성이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베네치아 물의 불가사의 건축물들 밀라노 성당 현대 건물

2024-04-15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봄날은

봄날은   천천히 불어오는 바람이어요 나무가지 설레임으로 푸릇 물오른 바쁠 곳도 없이 너를 만나려 나서는   지극한 일상의 하루 두 팔로 안아보는 봄날 아침이어요     봄날은 너의 하루가 시작되는 하늘이어요 나의 하루도 그 길따라 펼쳐져 눈가에 흐려오는 눈물이어요 서로를 향해 걸어오는 반가운 봄날 아침이어요     봄날은 하얀 꽃 망울 품고 있는 언덕이어요 저미도록 꽃잎을 접고, 펼치며 제 손으로 뿌려 놓은 향기 이어요 깊이 들이마시면 막혔던 숨 터지는 봄날 아침이어요     새소리가 들리는 곳, 뒤란이 바라다보이는 데크에 앉아 있다. 따스한 봄 햇살이 온몸을 나른하게 녹이고 있다. 둥근 유리 테이블에 올려놓은 Note book에서는 J. Offenbach의 Belle nuit의 달콤한 첼로 음악이 내 마음의 맨바닥을 쓸어주는 듯 봄날 아침의 여유를 수놓고 있다. 새 한 마리 날아와 데크 펜스에 앉았다. 가벼운 몸짓으로 움직이다 물끄러미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다. 무엇을 한참이나 바라보는 듯,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이나 하는 듯 머리를 떨구기도 하다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움직이기도 한다. 내가 즐기고 있는 이 빛나는 봄날 아침을 함께 즐기기라도 하는 듯 한동안 곁을 떠나지 않았다. 꼭 정지된 시간에 그려놓은 풍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움직이지만 정지돼 있는, 흐르지만 움직이지 않는 봄날 아침을 보내고 있다.   멀리서 바라볼 때 눈에 띄는 풍경이 있었다. 가까이 가 보았더니 가시가 엉켜있는 덤불이었다. 실망하여 발걸음을 돌려 돌아오는 길에 발 밑에 이름도 모르는 들꽃이 피어있었다. 가까이 보아서 이쁜 꽃이 멀리 떨어져서 보니 민민한 들판이 되기도 하였다. 자유가 멋져 보여 다가갔더니 오히려 단단한 속박이 되기도 하였다. 사람도 별반 틀리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 같아서 성급히 생각하고 발을 담갔다가는 물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때도 종종 만난다. 오래 지내봐야 한다. 속을 다 내어줄 것 같다가도 이해 못할 차가운 태도로 변해버리기도 한다. 그 말은 나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 누구나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일들에 접할 때마다 나의 잣대가 아닌 너의 바로미터로 나를 돌아보아야 한다.   시간이 멈추도록 입맞추고 싶을 때가 있다. 목적지를 정해 놓지 않은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날이 져 어두워지면 책 한권을 들고 나와 한 소절씩 되뇌이며 갔던 길을 되돌아 오고 싶을 때가 있다. 읽고 또 읽어 어두운 밤 책을 보지 않아도 낭송이 절로 되는 신기함을 느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시간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을 때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고 느낌으로 받아 안고 싶을 때가 있다. 시간을 길게 늘이고 싶을 때는 깊은 호흡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시간이 내 머리를 차오를 때는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가 있다. 물감이 번지는 노을 아래 스포트라이트를 켜고 여여한, 끝이 없는 길을 걷고 싶을 때가 있다. 하루라는 캔버스에 단순히 물감을 덧칠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관찰을 쏟아 놓는 것이다. 풍경이나 사물이 우리와의 사이에 가려져 있는 것은 우리의 손길이나, 발길이나, 우리의 시선에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는 것을 기억하는 것으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함께 보는 나만의 마음의 눈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지구가 다른 지층을 쌓아가듯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지구의 현상을 평생 만지거나 느껴보거나 경험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나에게서 가려져 있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사물을 넓게, 깊게, 때로는 아주 가깝게, 오랫동안 자세히 경험하려 하는 노력을 게을리한 탓이 아닐는지. 나에게 있어 ‘다시 그림이다.’라는 명제 앞에 떨리는 나의 고백이기도 하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봄날 봄날 아침 나무가지 설레임 첼로 음악

2024-04-08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사월의 시

이렇게 나이를 먹나 봅니다.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애틋해 보이는, 그래도 뒤돌아 가고 싶지 않은 지금이 좋은 건 왜인지 모르겠네요. 꽃샘추위로 싹들이 얼면 어쩌나. 괜히 쌓인 눈을 밀쳐냅니다. 작고 여린 것들에 눈길이 가는, 쓰러지고 밟히는 것들이 소중해지는 이렇게 나이를 먹나 봅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면 살포시 한쪽으로 기우는 갈대가 서러워 두 팔 벌려 서 있는 막무가내가 되어도 부끄럽지 않은 나이가 되었구나 여겨집니다. 소리 없이 찾아드는 연둣빛 언덕에 반해 걸어도 걸어도 발걸음을 돌릴 수 없어. 저린 무릎으로 잠시 앉았다 눈에 뜨인 냉이 푸른 싹, 달래 뾰족 내민 잎에 그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기도 합니다. 낙엽을 들추다 만난 보라색 패랭이꽃, 색색 숨 쉬는 꽃숨, 꿍꿍 뛰는 나의 심장 소리, 등이 따신 햇살에 앉아 느껴보는 봄날 오후입니다. 이렇게 느릿 나이를 먹나 봅니다.     사월의 시       한 움큼의 말을 뿌렸다 한동안 잊혀진 말은   씨가 되어 싹을 내었고 땅은 얼굴을 바꾸었다   이야기가 되어 자라나고   그 자리마다 채워지는   바람의 소리며 모로 눕는 햇살의 따가움 그대들의 눈물들이며 손짓하는 자유가 되었다   슬픔은 꽃으로 피어나고   바람으로 다가온 외로움 절망의 손짓은   푸른 잎으로 돌아와 사월 하늘에 가득하다     사월은 푸르러도 먹먹히 아파 붉어지는 시간 걸음마다 길이 되어 오는   그대들의 말은   십자가로 세워지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사월은 한없이 숙연해져 고개 들 수 없는 미안함 그대들 안으로 들어가는 사월은 망각 중 이거나, 기억해 내는 거울 이거나 사월은 기뻐도 슬픈 계절   높이든 빈 잔에   빨갛게 담겨지는   사월의 숨결, . . 부활의 십자가         나뭇가지 사이로 확 시야로 들어오는 모양이 있어 놀랐습니다. 잔가지가 만들어낸 하트모양이었어요. 가슴에 담아두었다가 다음날 그곳에 가서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루 만에 그 형체를 어디에서도 찿을 수 없었습니다. 각도와 높이 때문인가 하여 눈길을 여러 곳으로 움직여 보았지만 찿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연히 만나게 된 그게 뭐라고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나의 마음을 도닥여 주었습니다. “그래 가지에 꽃잎이 피고, 점점 무성해지면 가지만으로 만들어지던 형체는 영영 사라지고 말 거야. 어쩌면 영영 찾을 수 없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잠깐이나마 눈에 담기고 가슴에 품었던 따뜻했던 소회가 소중한 기억으로 남겨지겠지.”     Easter Sunday를 하루 앞둔 토요일. 암 투병을 하는 B장로의 모습이 아련해 봄꽃을 화병에 담아 찿아갔습니다. 계단을 내려올 힘이 없어 이층으로 올라가 누워있는 그를 만났습니다. 손을 잡아 내 무릎 위에 끌어당겨 기도해 주었습니다. “손이 뽀송하네?“ 묻는 말에 ”손이 부었어.” 하며 웃던 그 모습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많이 말랐지만 봄꽃만큼 귀했습니다. 무슨 말로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그와 나 사이의 깊은 손 잡음은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 삶을 마지막까지 인도하시는 그분의 손안에 있음을 알고 서로 안아주고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돌아오는 길. 차창으로 길게 펼쳐지는 가로수마다 영글어가는 꽃망울이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요즈음은 어디에 있어도 어느 곳을 걸어도 봄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눈이 녹고 겨우내 쌓였던 낙엽을 들추니 살아나는 생명, 푸른 싹들이 무성히 올라오고 있습니다. 나뭇가지 끝마다 뾰족한 잎들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황홀한 봄의 생기, 생명의 부활이 목전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슬퍼하지 말지니 그 슬픔으로 오히려 기뻐할지니 죽음의 계절을 참고 견디면 만물이 살아나는 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으니….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심장 소리 보라색 패랭이꽃 나뭇가지 사이

2024-04-01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우아한 유령(Graceful Ghost)

햇살이 좋은 날 아침이다. 2층 창문 가까이 홍매화도 연분홍 꽃봉오리를 가득 맺고 있다. 쑤욱 쑥 올라오는 새싹들, 나뭇가지마다 맺은 잎눈들로 거리는 온통 봄기운이 가득하다. 이제 막 나지막한 언덕 넘어 얼굴을 내민 해는 긴 햇살을 창문 안으로 길게 뻗고 있다. 창문을 너머 상쾌한 공기. 마음 속까지 연두 봄빛이 적셔온다. 오늘 이렇게 하루가 열리고 있음을 감사한다. 이 벅찬 하루를 날마다 물들이며 맞이하고 싶다.   해가 떴으니 지는 저녁이 찾아올 것이다. 또 밤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내 남은 인생에서 오늘이라는 페이지는 소리 없이 넘겨질 것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많은 이야기들, 만나고 나누었던 대화들, 함께 걷고 바라보았던 미시간 호수의 파도의 결까지, 아직 앙상한 나뭇가지에 앉아 봄을 기다리는 새들의 노랫소리마저 어제라는 굴레 속으로 켜켜이 간직될 것이다. 따뜻한 손잡음의 기억도, 그윽하고 편안한 얼굴 표정과 발걸음의 즐거움조차 이제는 기억을 되살려 돌아보게 될 어제가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 학교를 가기 위해 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 고개는 그리 높지 않아 성큼 고개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언덕 오른편에 사람이 들어갈만한 커다란 굴이 있었다. 동네 어른들은 굴속에 귀신이 산다고 이야기했다. 그것도 육이오 때 죽은 처녀 귀신이라는 이야기가 흉흉했다. 사랑했던 사람을 찾아다니다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사람이 지나갈 때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운다고 했다. 대낮엔 괜찮지만 어둑해지는 저녁이나 밤에는 사람들이 그 길로 가지 않고 긴 거리를 돌아서 갔다. 어쩔 수 없이 어둑한 그곳을 지날 때에는 빠른 걸음으로 고개를 돌리고 지나가기도 했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바람소리 같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도 절대 서거나 뒤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해 고개를 뛰어 내려가기도 했다.   이곳 시카고에서 처음 영화관에서 관람한 데미 무어와 패트릭 스웨이지 주연의 ‘Ghost’란 영화가 떠올랐다. ‘사랑과 영혼’이란 제목으로 한국에 소개된 것으로 알고 있다. 도자기를 만들고 있는 몰리를 뒤에서 안으며 샘은 사랑을 고백한다. 불행하게도 싸움에 연루된 샘은 괴한의 총에 죽음을 맞이한다. 몰리를 떠날 수 없는 샘은 Heaven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Ghost로 슬픔 속에 살아가는 몰리의 곁에 남게 된다. 주제곡인 언체인드 멜로디와 함께 펼쳐지는 가슴 아픈 사랑의 모습, 끝까지 몰리를 지켜주는 샘의 헌신적인 사랑은 전 세계 시청자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차를 타고 가다 길 건너 노란 개나리꽃 무덤이 보인다. 차를 길가에 주차하려다 뒤에 따라오는 차들 때문에 아쉽게도 사진에 담지 못했다. 우아한 개나리 풍경에 머릿속이 온통 노랗게 변해버렸다. 오른쪽 창문으로부터 밀려 나가기 시작한 풍경은 뒷창문을 마지막으로 내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소실점을 찍으며 사라진 노란 풍경은 하늘 위에 한 영혼의 기억과 얼굴을 남겨 놓았다.   클래식과 재즈를 섞은 듯한 ‘우아한 유령(Graceful Ghost)’이란 곡을 듣다가 바이올린의 피치카토 소리에 반해버렸다. 이 곡은 작곡가 윌리엄 볼컴이 댄서였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작곡한 피아노 연주곡인데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의 특이한 해석으로 우아함과 톡톡 튀는 감성으로 무서운 유령이 아닌 우아한 유령의 춤과 몸짓의 유희를 상상시키고도 남는 매력적인 연주였다. 1시간 연속 듣기로 콧노래로 따라 부를 정도로 친숙해졌다. 피아노 연주로도 들어봤지만 역시 바이올린 선율로 끌어오는 감성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내 유아 시절의 유령에 대한 인식을 ‘Ghost’란 영화로 돌려놓더니 이젠 ‘Graceful Ghost’로 유령에 대한 친밀감과 기대감을 유발시키고 있다. 노란 개나리 꽃무덤이 눈길을 끈 오후 내내 어깨춤을 추며 휘파람으로 ‘우아한 유령’을 따라 부르고 있다. 하늘엔 옅은 눈발도 춤추며 흩날리고 있다. (시인, 화가)   Kevin Rho 기자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ghost 유령 개나리꽃 무덤 개나리 풍경 개나리 꽃무덤

2024-03-25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말의 뼈, 생각의 뼈

꽃잎이 피어나던 날 꽃잎이 떨어지던 아픈 날도   다만 눈을 들어 바라볼 때 볼 수 있다는 것을   다만 귀 기울일 때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다만 그 길 속에서만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숨 쉬는 순간 동안만의   설렘이었다는 것을       맞아, 그것은 굳이 기억해 내지 않아도 코끝이 찡하게 오는 것이지 세상은 아마 모를 거야 그렇게 깊은 것인 줄 마음 깊이 새겨진 화석인 줄 몸 속 세포들이 때 되면   자석같이 살아나 때도 없이 당겨지는 힘 막을 수 없지 멈출 길 없지 먼 산 나무숲을 바라만 보았지 그림자처럼 비스듬히 기대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바위 같은 말의 뼈, 생각의 뼈 . . . 따듯한 그리움이지   창문을 통해 아침 햇살이 따갑게 쪼인다. 눈살을 찌푸리고 떠오르는 해를 쳐다보려는 마음을 접고 눈길을 아래로 옮긴다. Deck 앞 넓은 연못에 햇살이 비쳐 잔잔한 물결이 설렌다. 작은 오두막 창가에 앉아 Aldo Leopold의 에세이와 함께 엮은 사진첩을 보고 있자니 보라의 하늘이 연분홍의 하늘로 넘어가는 풍경을 마주하고 있는 듯하다. 하늘이 내려와 춤추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의 우아한 들녘, 여러 색의 조화로운 들꽃들이 춤추듯 펼쳐진 Leopold의 정원과 커피 내음이 풍기는 창가로 몰려오는 이 아침의 설레임. 이 겹쳐오는 감흥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동트기 전, 해지기 전 삼십 분 전의 기적 같은 풍경은 신의 손끝에서만 만들어질 작품일진대 마주하고 있는 터질듯한 가슴은 또 어찌해야 할지.   시간은 흐르고 한 계절을 보내고 있다. 또 다른 계절을 기다리는 마음이란 꼭 사람을 멀리 보내고 그 사람을 기다리는 심정과 같지 않을까? 아름다움이란 멀리 꿈속 같은 아련함에서 찾지 말지니 발끝에 닫고, 손끝에 만져지는 그 순간에서 찾을진 데 우린 얼마나 많은 날들을 꿈꾸며 살아왔는지. 돌아서려는 따뜻한 그리움을 오래 간직하려 손바닥만 하게 남은 온기를 가슴에 담고 넘어가는 노을에 눈길을 주다 보면 와락 밀려오는 낙엽 같은 외로움이 흔들리며 하루가 지는 어둠 속으로 내리기도 했다.   Wisconsin 대학의 교수이자 자연환경가, 에세이스트, 사진작가였던 Aldo Leopold 의 〈Sand county Almanac〉의 화보 속으로 걸어본다. 새벽 산책을 하며 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연을 기록한 책이다. 책의 첫 장을 여는데 새벽의 신비로움이 다가온다. 3월 새벽바람이 상쾌하게 코끝에 전해온다. 말년에 닭장을 개조한 오두막에서 Wisconsin Sand County의 자연을 담은 12달의 화보와 야생의 자연을 사랑한 잔잔한 글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야생의 아름다움을, 땅과 인간의 생명 공동체로서 문화적 가치와 심미적 가치로 땅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고결함을 지키는 것임을 담아내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 책의 출간을 앞두고 자연 속으로 돌아간 Aldo Leopold의 명복을 빈다.   삼월의 들녘은 아직 기지개를 켜지 못한 생명들이 흙더미를 밀고 나오는 중이어서 푸석한 흙들을 밟으며 가면 발자국 뒤로 아작하는 아픈 소리가 따라온다. 깨어야 하고 눈 떠야 하기에 잠깐의 아픔은 참아야 하리. 견뎌야 하리라고 말해주지만 상대는 봄의 새싹이나 움트는 꽃눈에게보다도 견디지 못하고 참아내지 못하는 외로운 사람에게로 향하는 게 맞는 말이 된다. 오늘도 입 밖으로 내뱉은 수도    없이 많은 말들. 흩어지고 사라져 기억도 못 하는 단어들. 그 단어, 말들이 단단해져 뼈가 생기고 힘살이 붙어 명명되는 말의 뼈, 생각의 뼈, 단단하고 따뜻한 그리움이라 말해도 좋겠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생각 자연환경가 에세이스트 aldo leopold wisconsin sand

2024-03-18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1   늘 놓아두었던 자리   그 물건이 없으면 여간 불편하지 않다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든   그 장소, 그 시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기적 같은 행복이 아닐까 싶다   다만 새벽만이 아니다   사람도 그렇다     2 깊은 어둠으로부터 깨어나는 새벽 알지 못하는 이야기로 새벽은 깨어나고 마른 가지에 살이 붇고 먼동은 새벽을 당겨 온다     동트기 전 새벽은 깊은 물 속과 같아서 물속 떠오는 비늘 같아서 가득한 물고기 집 같아서 새벽하늘에 빠져 깊이 잠기다 보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잠기다 보면 어둠 속 보이지 않던 것들에게 찾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흔들 수 없는 어둠 속엔 단단한 껍질을 벗는 하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고 깨어난 생명이 내쉬는 숨 허리를 세운 직립의 나무   흔들 수 없는 어둠이 옷을 벗고 하늘의 밑동을 채우는 허락된 하루의 축복이 온다     버려야 할 것이 있고, 담아야 할 일이 있기에 걸어야 할 길이 있고, 주워야 할 이삭이 있기에 나만을 위한 하루가 아니기에 기대가 된다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깊은 곳에서 깨어나는 새벽 내 안에서 매일 눈을 뜨는 사람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옷깃을 여미게 한다     3 시를 쓰듯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릴 때 시를 쓰는 마음을 가지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언제부터인가 멀어졌던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잃어버린 마음을 찾고 싶었다 정한수를 떠놓고 소원을 빌듯 새벽 커피를 내리고 마음을 다잡을 때처럼 맨발로 꽃피는 뒤란을 걸을 때처럼 그런 마음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부자가 된다 가진 자의 행복이 부럽지 않다 그 자리에 그가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 시간에 그 풍경이 내 옆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시를 쓰듯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림을 그리듯 시를 쓸 수 있을까? 물음 후엔 늘 치열한 삶에서 피하려는 비겁한 내가 보이기에 충분히 사랑받았다는 의미가 새롭다 처음 그가 내밀었던 따뜻한 손의 체온이 그립다 내 옆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4 그의 시간은 나의 시간이기도 했다 같은 하늘, 같은 계절을 보내었기에 시간 속에 녹아든 그만의 일상을 추정해 볼 때 그의 일상 안으로 나의 시간이 저물기도 했다 그 자리에 있었단 해프닝만으로 그 자리를 채웠던 사람들 사이엔 먼 나라로부터 밀려왔다던 이방인의 숨 먼 곳으로부터 내게로 오는 별빛이 그렇고 쉼 없이 밀려왔다 되돌아가는 파도가 그랬다 그리고 그가 내게로 온 것이 그랬다 다른 어떤 것을 말하지 않아도 그가 내 곁에 내어준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새벽 커피 시인 화가 자의 행복

2024-03-11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추억하기 그리고 꿈꾸기

1 열정이기도 하였고 집착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리움은 무어라고 말해도 다 맞고, 또 다 틀리다 말에도 온도가 있듯이 사람에게도 온도가 있다 그 온도에 따라 시들기도 하고 살아나기도 한다 길을 걷는 것이 때로 허망한 생각이 들 때 서로의 동선이 어긋나기 시작할 때 말의 온도나 사람의 온도는 마을 골목 끝까지 퍼지고 나는 그곳에 집 한 채 지으려 매일 잠을 설쳤다 쌓다가 허물어 내린 기억으로 다시 집을 지었다 발 뻗으면 닿을 만큼 불편한 집을 지었다 사람들은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살아갔다 살아가려면 삶의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혀를 차며, 목적은 다른 세계의 숨겨진 길이 되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뭐라든 겨울 문턱에서 집을 짓는다는 것 이미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이후에도 많은 것을 버려야 하기에 왜 그렇게 서둘러 갔냐고 묻고 싶었다 나는 무대를 등진 힘없는 관객일 뿐 버리고도 함께라는 대단한 의미는 찾지 못했다 호수는 언제나 잔잔한 물결로 다가오고 노을처럼 꺼져가던 불꽃이 타오르기도 하였다 그 불꽃 보듬으며 살아야 하는 이유 하늘이라도 끌어내려 파랗게 변해가는 새벽 지은이의 속삭임이 들릴 듯한 짙은 안개 밀물처럼 다가왔다 썰물처럼 사라지는 기억을 더듬으며 나는 그것으로 큰 창이 호수로 향한 작은 집을 짓는다 손이 아닌 머리로 발을 뻗을만한 집을 짓는다 집을 짓는 시간 내내 사람들은 잠들었고 별들은 내려다보고 있었다     2 집을 짓는 재료는 제일 단단한 것으로 부서지지도 또 낡아지지도 않는 기억이라는 무게를 사용하기로 한다 꿈이라는 가능한 큰 창문을, 날마다 열고 닫을 희망의 문을 또한 짓기로 한다 평안의 따뜻한 지붕을 얻었으면 좋겠고 내 몸같이 피어나기를 원했던 자유의 뒤란엔 철마다 꽃씨를 뿌리기로 한다 그러나 내게는 없어도 좋을만한 슬픔과 아픔의 순간 또한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싶다 떠난 곳을 뒤돌아보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하였고 꼭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지나간 후회도 있다 세상이 달라지는 줄도 모르고 이방인의 삶은 채 바퀴였다 쉼 없이 달려왔다 잠시 멈춰 선다 때로 동굴로 도망치기도 하고 뜬금없이 몰두하다 길을 잃을 때도 있었다 후회는 하지 않겠다 다만 시끄러운 시선을 떠나 얼마 남지 않은 추억하기 그리고 꿈꾸기 어느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나의 궤렌시아     3 나의 시간 속으로 들어와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던 소리, 귓전에 가까이 들린다 반가움에 한숨으로 달려갔다 수평선으로부터 발끝까지 이어지는 소리 자갈 위를 낮게 안으며 밀려온다 이내 모래가 소리의 끝을 잡고 따라 나간다 수백 광년의 빛으로 만들어내는 윤슬 시간의 개념이 사라진 미시간 호 수에 떠다니는 소리의 입자들 둥글고 가는, 깊고 높은 음들이 모여 넓은 호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가득하다 한 손을 높이 들고 다른 한 손으론 모든 악기 소리를 멈추게 한다 이어지는 피아노의 선율 건반 위를 춤추듯, 튀어 오르다 미끄러지는 10개의 손가락 숨이 멎는다 하늘의 소리 카덴차 긴 여행길에 맞이하는 나만의 시간에 빠져든다 언덕 가득 눈발이 옆으로 부는 바람에 춤추듯 날린다 흔들리던 나의 평형감각이 돌아왔다 별빛을 주워, 윤슬을 담아, 반짝이는 조약돌을 모아, 피아노의 맑고 청아한 하늘의 소리를 역어 집을 짓는다 호수를 향해 큰 창이 있는, 커피 팟이 딸린 작은 키친과, 좁은 계단을 오르면 퀼트 조각 이불을 덮은 침대가 있고, 누우면 밤 하늘 별들이 반짝이는, 팝콘 고소한 냄새가 가득한 작은 오두막을 짓는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추억 소리 카덴차 악기 소리 소리 자갈

2024-03-04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스티그마

구릉 진 턱, 제 얼굴에도 있더라고요 / 세월 가며 깊어진 주름이어요 / 새날 오기를 기다리어요 / 눈뜨는 매일이 새날이어요 / 깊어진 골에 씨를 뿌리고 / 봄을 기다리려고요 / 꽃 필 날을 손꼽으면서요 // 더디기도 하지요 / 쓰러지기도 하겠죠 / 더러는 밟히기도 할 거예요 / 내려다보는 하늘, / 올려다보는 보는 눈길 / 피어나는 흔적이 보고 싶어요 // 여러 소리 어울리면 / 새로운 소리가 되는 줄 알았어요 / 밀려오는 파도처럼 한 소리로 오는 줄 알았어요 / 여러 소리가 하나가 되기 어려운 가 봐요 / 나뭇가지처럼 더 작은 가지로 자라 / 저마다의 목소리가 되는 걸 알았어요 // 구릉 진 턱에 바람이 불어요 / 깊어진 주름에도 파도가 와요 / 당신 손으로 턱을 만들고, 주름이 깊어갔어요 / 피려고, 덮으려 애를 쓰면 감춘 아픔이 서러워 / 녹아 내리는 골이 시려요 / 밤마다 잔가지처럼 뻗어간 사유 / 깊을수록 쩍쩍 갈라지는 몸 / 그래야 동쪽 하늘에 아침이 오곤 했어요 // 눈발이 세찰 땐 가지로 울고 / 타는 햇살엔 잎사귀를 말며 숨 쉬지 않았어요 / 하늘로 토해낸 붉게 물든 그리움은 / 내 안으로 그어낸 상처가 되어 밤이 저물었어요 / 두 팔로 안을 수 없는 큰 동그라미 / 강을 거슬러 올라 산란하는 연어 / 다른 시간을 본능처럼 낳고 있어요 / 동그라미 끝을 이어 마무리 못하고 / 잠들지 못하는 시간 가슴에 절이며 / 깊어진 주름을 쓰다듬어요     깊은 숨으로 열리는 아침을 맛있게 마신다. 하늘의 신비, 땅의 생명을 어우르며 오는 시간 아닌가. 입춘이 지나가는 아침 향기는 청명하고 맑았지만, 난 뒤를 돌아 지나가는 겨울을 보고 말았다. 별들의 수를 세며 이름을 기억했던 날들을 보았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옷가지와 그림도구를 챙겨 삼척으로 떠났었다. 이른 아침 정라진을 떠난 통통배는 울릉도를 향하고 있었다. 일행 4명은 천신만고 끝에 배에 오르고 언제라도 꺼질 것만 같은 엔진 소리를 들으며 기대와 두려움 속에 있었다.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 나뭇잎처럼 흔들리면서도 앞으로 나가는 배가 신기하기도 했다. 등이 검은 작은 고래가 한동안 배를 따라와 무료함을 덜어주기도 했다. 동해에 보석 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였던 윤슬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동해는 크고 막막했지만 신비롭고 자유로웠다. 사방이 물이었고 배와 그 안에 사람들은 존재도 없었다. 물에도 지탱해 주는 뼈가 있을까? 혹 뿌리가 있을까? 동해는 어린 나에게 존재의 의미를 알려주었다. 만질 수 없지만 형태로 존재케 하는 보이지 않는 엄청 큰 손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동네의 작은 호수,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마주한 집들이 보이는 지척의 그곳에서도 오랫동안 행복했었다. 그곳의 물결은 구불한 선이었고 때론 수많은 점들이었다.   나는 지금 미시간 호수를 바라보며 너른 바위에 앉아있다. 호수라기보다 바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다운타운 마천루에 접한 미시간호수가 아니라 Sheridan 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다 보면 갓길에 차를 세우고 다가갈 수 있는 미시간 호수. 가끔 동네 사람이 지나가다 들러 노을을 즐기는 그런 호숫가.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의 친구가 되기도 하는 미시간 호수. 파도를 바라보다 물결 속으로 빠져든다. 먼 곳에서 가까워질수록 형체는 크고 선명했다. 큰 삼각형 주변으로 작은 삼각 모양들이 춤추듯 촘촘히 채워져 밀려왔다. 깊은 물의 뿌리로부터 작고 투명한 포말이 몰려와 해변에 부딪혀 사라지곤 했다.    나무는 가지와 잎으로 말하기보단 뿌리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삶도 보이는 것보단 감춰진 것에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도 여전히 머리가 끄덕여진다. 파도 소리가 오케스트라 음악처럼 음색의 높낮이를 가지고 하늘소리로 마감하는 호수의 하루에도, 젊은날 동해의 윤슬 속에도, 너른 바위에 앉아있는 나에게도 보랏빛 흔적의 하루가 저물고 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미시간 호수 엔진 소리 호수 건너편

2024-02-26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조성진 그리고 김환기, 베토벤, 모네

오랜만에 Chicago downtown Michigan 거리에 왔다. 젊은 시절 이 거리를 걸으며 미래를 꿈꾸었던 곳. 크리스마스트리에 전등이 켜지고 캐럴이 은은히 들려왔었다. 거리를 걷다 말고 마천루 빌딩 숲에서 불 켜진, 혹은 꺼져있는 창들을 기억한다.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어떻게 만나랴.’ 김환기 화백의 점들로 찍힌 그림이 오버래핑 되던 시간이었다. 그의 뉴욕 유학시절, 점 하나에 찍힌 그리움, 점 하나의 사랑, 이별, 아픔, 견딤의 삶들이 절로 이해되었던 시간이 있었다. 그 거리를 다시 걷고 있다.   Chicago Symphony Orchestra와 협연하는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회에 왔다. 빈 곳을 찾아볼 수 없이 좌석이 차고 무대 위에는 악기의 음을 튜닝하느라 분주하다. 나는 upper level balcony left side F21 좌석에 앉아있다. 시카고 심포니의 ‘Musica Celestis’ 연주가 시작되었다. 이 곡은 String만을 위한 특별한 곡이다. 그러기에 여느 오케스트라 곡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숨소리마저 멈춘 높고 큰 공간 속에 바람이 불어오듯 부드럽고도 아픈 서막이 열리고 있다. 황량한 광야를 걷고 있는 사람의 등 뒤를 밀고 가는 바람. 격렬한 바람에 밀려 한참을 밀려가다 멈춰 선다. 물결 같은 잔잔한 울림이라고 해야 할까? 멀리 먼동이 트듯 천상의 음률이 들려오는 듯하다. 터지는 박수소리에 멈추었던 호흡을 길게 내쉬어본다.   무대 앞부분이 내려가고 길이가 긴 그랜드 피아노가 무대 위로 올라오고 있다. 앞자리 바이올린 1주자가 일어나 전체 튜닝을 한음으로 짧게 한다. 홀을 가득 채우는 박수소리와 함께 조성진이 무대로 오른다. 허리 굽혀 인사한 후 이내 자리에 앉는다. 지휘자 Gemma New의 손끝을 타고 베토벤의 피아노 콘서트 No.3 연주가 시작된다.     연이어 조성진의 물 흐르듯 감미로운 연주가 이어진다. 현악과 관악이 주고받으며 펼쳐지는 연주를 끌고 가는 피아노의 음률은 마치 구슬 굴러가는 소리 같았다. 때론 바위 같은 묵직함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눈을 감는다. 넓은 연회장이 펼쳐지고 미끄러지듯 남녀 한 쌍의 춤사위가 나비처럼 나른다. 건반을 누르는 상체의 힘으로 몸이 잠시 허공에 들린다. 지휘자의 어우르는 손과,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손과, 70명이 넘는 오케스트라 멤버의 각각의 손들이 만들어낸 소리. 심장 박동이 마구 뛴다.   이 곡을 작곡할 당시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을 때였다. 작곡가가 청력을 잃었다면 그의 생명은 이미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중 유일한 단조로 작곡된 피아노 콘서트 No. 3는 청력 상실이라는 좌절을 딛고 자신만의 심오한 작품 세계로 몰입하게 된 결과 탄생하게 되었다.     인상주의, 빛의 화가 모네는 말년에 거의 사물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시력이 약해졌었다. 모네의 정원엔 연못이 있었고 수란이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모네는 그 시기에 250여 연작의 수란을 그렸다.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The Water-Lily Pond는 거의 실명 상태에서 그린 그의 대표작이다.     베토벤의 청각 상실과 모네의 거의 볼 수 없던 시각으로 희대의 작곡과 명작이 탄생된 것은 시련을 극복하고 자신을 이긴 뼈를 깍는 창작 활동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두 번의 Standing Ovation 끝에 앵콜송, Moonlight가 연주되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젊은 피아니스트 조성진을 열광하는 팬들은 그가 떠난 무대를 향해 오랫동안 박수로 그를 열광했다.     2시간에 걸친 공연은 막을 내렸다. 공연장의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이름. 김환기, 조성진, 베토벤 그리고 모네. 미시간 거리에는 잔잔한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조성진 김환기 피아니스트 조성진 피아노 연주회 당시 베토벤

2024-02-12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나무의 꿈은 새벽에 영글어 가고

금방 하루해가 저물었다. 뉘엿뉘엿 흐린 하늘에도 분홍의 노을이 진다. 붉거나 보라의 것에서 풍기는 강렬함 보다는 꿈같은 아련함이 온 몸에 소복히 내려앉는다. 새들도 제 집으로 날아가 버리고 토끼도 제 보금자리를 찾는 하루가 저물고 있다. 등을 기대야 하는 어둠이 오고 잠깐만에 세상은 고요 안에 스스로 잠겼다. 숨죽이고 견디다 보면 저 깊숙이 살아나는 것들이 보이고 지나쳤던 꿈들이 노래가 되어 가까이 들려온다. 나무의 꿈은 영글어 가는데….   숲속에 걸터앉은 나무가 보인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나무는 말을 걸어 오지 않는다. 가지마다 제 몸무게만큼이나 눈송이를 안고 있어도 도무지 흔들리는 일이 없다. 살아 있으나 죽은 듯 전혀 미동이 없다. 찬 바람이 불어도 눈보라가 쳐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다가가지 않는 한 넌 언제고 정지된 나무였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숲으로 돌아가 누웠다. 별빛 아래 가늠할 수 없는 꿈속에 잠들어 있다. 나무도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고 깊이 잠들었나 보다.   나무를 보려고 새벽 커튼을 젖혔다. 어둠 저편 언덕 너머에 동이 트고 있었다. 팔을 뻗어 잔 가지의 눈을 털어주려다 되돌아왔다. 나무 둥지에 새들이 모여 재잘거리고 별빛이 스치고 간 한 밤의 짧은 미련도 사라진 시간. 누군가 내 등을 만지는 손길에 뒤돌아 보았다. 그것은 창살을 통해 들어온 나무의 긴 그림자였다. 한 발자국도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한 마디 말도 걸어볼 수 없는 너의 그림자.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는 하루가 시작되는 소리였다. 왼쪽 팔을 길게 뻗어 팔베개를 했다. 나무를 향해 누웠다. 나무는 잠들기 시작했다. 먼동이 트는 이 새벽에 깊은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내가 나무가 되어 너의 창가에 서 있다. 깊은 밤 눈길을 걸어 그대에게로 가서 잠든 너의 눈시울을 잠깐 바라보다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어쩌면 눈물일지도 모를 둥글고 따뜻한 물방울, 네 등 뒤에서 맡을 수 있는 너의 향기는 지워지지 않는 긴 그림자이고, 겨울 가지를 닮은 봄으로 뻗은 뿌리처럼 깊은 나의 하루가 되었다. (시인, 화가)         눈 덮인 뒤란에 나무 한 그루 서있다 모두 잠들은 이른 아침 하루가 깨어 나는 숲에서 건져 올린 사랑이라는 단어   사랑이 사랑이 되지 못하는   너를 잃고 나마저 잃은 세상에 새벽으로 오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깨부터 기대오는 내 안 가득 당신입니다     총총걸음으로   구름길로 걸어야 하는 곳 한 평 남짓 발 뻗은 자리에도 가는 햇살로 녹이시고 흐르는 새벽으로 챙기시는 그대의 긴 손, 향기     장독대 장들이   느리게 익어가는 별빛 아래 희끗희끗 하얀 새치처럼   눈발이 날리고 나이 먹는 어리둥절 속에 사랑을 느리게 깨달아 갈 때 아픔이 무르익기 전 그대는 잠들어야 해요 말하지 않아도 보이는 손     나무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어머니 손을 꼭 닮은   그대의 손은 약손입니다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나무 새벽 나무 둥지 새벽 커튼 단어 사랑

2024-02-05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갈매기의 꿈

갈매기의 꿈    하늘 별들의 이름이 호명되고 제일 늦게 나온 푸른 별 하나   새들의 무리에게, 붉은 저녁노을에게, 발길을 돌리는 지친 어깨에게, 슬픔과 눈물의 세레나데에게, 뜨겁고 깊은 그루터기에게, 서성이는 걸음 뒤안길에게, 작고 푸른 점 안의 슬픔들에게    춤출 수 있는 흥을 끌어내며 어루만지는 당신의 카타르시스 푸른 별에 살고 있는 우리 위대한 것을 말하지 전에 피 흘리고 땅을 정복한 역사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한낱 먼지일 뿐을 말하고 미시간 호수, 출렁이는 파도일 뿐 시야를 떠난 주저앉는 것들의 얇아진 생채기뿐임을 말하고 서쪽 하늘 피어날 작고 푸른 별 향한 힘찬 날갯짓임을 말하고   Lawrence와 Pulaski 사우스웨스트 코너 3층 건물. 그 옥상은 한 무더기 새들의 집이다. 종종 그곳을 지나갈 때 하늘을 덮는 새들의 무희를 볼 수 있다. 앞장선 한 마리 새를 쫓아 어마 무시한 그룹의 새떼가 하늘을 수놓으며 날아간다. 길 건너로 낮게 날아가다 방향을 틀어 북쪽 먼 곳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이내 제 집으로 돌아와 빌딩의 옥상 근처를 난다. 늦게 발동이 걸린 다른 새 떼가 옥상을 떠나 비행을 시작한다. 하늘엔 먼저 비행을 즐기고 있는 그룹과 어우러져 두 군락의 새떼가 하늘을 겹치며 난다. 빵가루를 뿌려 주었는지 그 많은 새들이 한꺼번에 날갯짓을 퍼득이며 건물 건너 Walgreen 파킹랏을 가득 메운다. 주위에 사람들이 지나가도 잠깐 자리를 옮길 뿐 먹이를 먹는데 여념이 없다. 마치 비둘기들의 천국 같다.   지난 몇 개월 미시간 호수를 구석구석을 찾아 다녔다. 예쁜 등대도 만나기도 하고 노을 지는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밀려오는 파도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찬 바람에 몸이 들썩이기도 하였다. 비 내리는 호수의 적막함에 꿈같은 아득함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눈 내리는 호수는 어느 다른 행성의 모습 같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하였다. 이제 추워진 날씨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곳에도 반전은 있었다. 인적이 끊긴 해변에 갈매기의 무리가 모여 도닥거리고 있었다. 바람에 깃털을 부풀리며 한가로이 망중한을 즐기는 그곳은 또한 그들만의 천국임에 틀림없다.     Chopin의 Waltz of the rain을 들으며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찬바람을 등에 지고 넓은 호수를 나는 한 마리 갈매기가 외롭게 보였지만 호기로웠다. 마치 조나단 리빙스턴을 보는듯 하였다. 리처드 바크(Richard Bach)의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갈매기 이름이다. 조나단에게는 먹는 것보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따라 살아가기를 원했다. 단지 먹기 위해서의 비행을 거부하고 먼바다로의 비행을 통해 자유를 추구하였다. 하늘 높이 날아 오른 후 한계속도를 넘어 수직 하강을 시도하기도 했다. 실패하면 자신의 몸이 산산조각 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마침내 그는 고난도 비행에 성공하고야 말았다. 수천 년 동안 우린 물고기 머리 밖에 찾을 수 없었지만 이제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더 멀리, 더 오래 날아야 할 이유가 생겨났다고 항변했지만 결국 조나단은 무리에서 쫓겨났다. 눈 뜨면 무리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고민하였다. 그러나 왜 사는가? 왜 나는가? 그것이 조나단의 질문이었고 마침내 그는 그 대답을 찾았다.     저자는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조나단이 고민했던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꼭 우리의 삶이 멍하니 바라보았던 새떼의 삶 같아서, 물고기 머리를 찾아 온종일 물가를 서성거리는 갈매기의 삶 같아서 서글퍼지는 오후. 창공을 치고 날아오르는 조나단의 비행에 눈길을 주며 독백처럼 나에게 한마디 한다. “눈이 가르쳐 주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 믿지 말아라. 마음의 눈이 가르쳐 주는 것을 믿어라 그러면 비로소 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제일 늦게 나올 푸른 별 하나 떠오를 서쪽 하늘에 힘찬 날갯짓의 조나단 리빙스턴의 모습이 보인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갈매기 새떼가 하늘 조나단 리빙스턴 미시간 호수

2024-01-29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폭설

눈길을 헤치고 돌아와 목이 길어져 당신이 있는 서쪽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요. 좀 회복되면 함께 걷자던 친구는 생각보다 얼굴은 괜찮았고 조금 마른 듯 했지만, 그 친구 목이 길어져 삶이 깊어졌더라고요. 모두 깊은 동굴에 머무르고 싶지 않은 듯 출구를 찾으려 두리번대고 목소리도 발걸음도 느려진 저녁이었어요. 시킨 생선찌개는 어찌나 짜던지 돌아와 내 마음처럼 애꿎은 냉수만 찾았네요.     그나저나 오늘은 눈이 십여 인치나 쌓여 솜바지 챙겨 입고 창가에 앉아 지내는 게 제일 행복할 것 같기도 하여 빨간 열매 가득한 창가 블라인드를 올렸어요. 빛이 창문을 통해 밀려 들어오는 거예요. 거리도 나무도 지붕도 참 밖은 온통 눈 나라 하얀 고요가 시카고 하늘 위에 가득하네요. 근데 궁금해요. 당신을 후벼 파 끙끙 앓아 눕게 만든 그 시집, 선물로 내게 준다던 시집이 〈혼자 가는 먼 집〉이라는데 얼마나 먼 집인가? 꼭 혼자 가야 하나? 생각하며 눈 나라에서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어요. 목이 긴 짐승이 되면 멀리도 잘 보이려니 했지요. 도무지 보이지 않는, 그래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되어 있지요.     애꿎은 눈가를 훔치는 밤, 눈은 내리는데, 쌓이는데 눈 내리는 밤에 서로를 향해 걷다 보면 발끝이 이어지는 어디쯤에서 다시 지워지는 발 밤새 눈길에 발자국을 내고 지우고 당신을 향해 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동안, 사랑하는 동안 나는 당신 손에 빚어지고 당신 사는 하늘을 자꾸 바라보아요. 바라본 곳이 길이 되어 나는 시들다가 다시 피어나기도 하지요. (시인, 화가)     눈 덮인 계절 모습을 감춘 그대 치열하게 싹을 내미는 봄보다 편안한 호흡으로 행복하신지 나의 몸 어딘가에도 감추어진 마음 그 속 시간을 들여다보면 시간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 존재하는 건 잘게 잘려져 다가오는 작은 조각의 현재일 뿐 또 한 살을 먹고 있다. 오래 살아가고 있다 오래 그리워 오래 걸었다 호수 밀려오는 소리 정겹던 날들이 부른다     눈 내리는 밤 한 해도 그렇게 지나가고 새날도 그렇게 오고 있지 않나 온몸을 기울여야 하는 것 이 순간을 사랑하는 것 사랑하는 동안 행복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모든 나머지 것들은 그냥 지나치게 할 일이다 욕망을 덜어내는 시간 행복은 걸어 들어온다. 다시 눈길이다 사랑한 만큼 비워진 만큼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폭설 시카고 하늘 창가 블라인드 서쪽 하늘

2024-01-22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마음을 연다는 것

겨울날 / 날씨도 포근하여 / 앙상한 나무에 생기가 돌아 / 가지마다 잎눈, 꽃눈이 간지럽다 / 마음을 열고 밀려오는 호수를 담다 보니 / 한 줄 두 줄 퉁기는 기타 소리가 쏟아져 내린다     묵직한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미동도 없이 있어야 할 자리에 나무들이 서 있고 누워야 할 자리에 숲이 누웠다. 빨간 열매들을 가득 품고 있는 벚나무도 보이고, 푸르게 하늘을 찌르는 전나무의 큰 키가 창가에 기댄 내 몸으로 들어와 무거운 마음의 커튼을 젖히고 있다. 살다 보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있다. 어떤 일은 노력하다 보면 되기도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이룰 수 없는 일도 있다. 그 중 하나가 마음을 여는 일이 아닌가 싶다. 마음을 연다. 어떤 상황이나 환경, 어떤 사람에 대해 넓은 마음으로 다가간다는 말이 아닌가 싶다. 사실 마음을 여닫는 것을 본인이 느낄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추울 때나 더울 때, 깜깜한 한밤중이나 동이 트는 새벽에, 마음이 위축 되거나 반대로 마음이 풀어질 때가 있다.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반응하기도 한다.     반대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뻣뻣한 막대기가 되기도 한다. 움츠렸던 꽃잎이 다른 힘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펼치는 신비의 힘처럼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꽃봉오리를 활짝 피워내는 것을 보면서 마음을 연다는 것이 이런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새 물방울을 맺고 동트는 아침 어느 때 쯤 내 것이 아닌 듯 햇살에 미련 없이 내어주기도 하는… 마음이 열린다. 어마어마한 돌문이 눈 녹듯 열린다. 경계가 사라진 호수와 하늘처럼 당신의 아침은 나의 아침이 되어 내게로 온다. 당신이 기쁘면 내가 기쁘고, 당신이 슬프면 나도 슬프다. 당신이 아프면 나도 아프고야 마는……. 사람이 아프다는 건 어딘가 육신에 이상이 생겼거나 상처가 났을 때를 아프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아픈 것은 마음이 아플 때다. 아무 것도 도와줄 수 없는, 아플 때 손잡아 줄 수 없는 그때가 정말 아픈 것이다. 눈을 감으면 보인다 멀어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람이 보인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 / 흐르는 눈물 엄지로 닦아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 한없이 깊은 심장의 소리를 귀담아 내는 것 / 슬픔마저 소중해 떠날 수 없어 맴돌고 있는 것 / 노을 하늘 한 조각 창가에 띄워 보내는 것 / 삐걱거리는 다리를 건너면서도 두려움이 없는 것 / 구름보다 폭신한 마음에 누워 떠다니는 것 / 벌써 출렁이는 물소리를 알아차리는 것 / 어느새 찾은 길고 여윈 손에 깍지를 끼고 있는 것     마음을 연다는 것은 / 새로운 하루가 당신의 하루로 시작되는 것 / 세상의 모든 시선이 당신과 연결된다는 것 / 돌멩이 하나가 말을 걸어오고 / 내리는 눈발 속에서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 / 물새가 흐린 호수 위에 나타나는 것도 / 마른 나뭇가지에 생기가 돌고, / 바람이 등을 밀어 날마다 창가로 당신을 데려오는 것도 / 당신이 디딘 지구의 한 모퉁이로 / 온통 마음이 기울어진다는 것 / 정한 마음, 정직한 영으로 당신 앞에 서는 것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마음 사실 마음 조각 창가 노을 하늘

2024-01-08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별밤

여행자의 쉼 / 머무르고 싶은 곳 머무르고, 쉬고 싶은 곳 자리를 펴는 게 아닌가 싶으오 / 별이 아름다운 곳에 머물고 있소 / 작은 캐빈 다락방에 누우면 / 선루프 통해 쏟아져 내리는 별빛 아래 / 행복에 겨워 바람에 기대어 살다 /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 그의 생각에 꽃피우고 한없이 펼쳐진 / 그의 세계 속에 편안한 나의 스타치오를 펼치고 있소 /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 따라 얼마나 걸었는지 / 하늘과 수평선 맞닿아 검은 푸루션 블루로 변해갈 때 즈음 / 시간은 멈추었다오 // 살아간다는 것 / 비밀스러운 문들을 열어가는, / 숨겨진 나와 얼굴을 마주하는, / 한 걸음 다가가지만 서먹해지는, / 빛이 그리운 날이오 / 뼈저리게 빛이 그리운 날 / 나도 모르는 발걸음은 호수로 향하고 있지 / 살아간다는 것 슬프지만도 / 그렇다고 행복에 겨워 사는 것은 더욱 아닌 것이오 / 삶을 시로 바꾸어 살고 싶은 사람이 있지 / 그런 아름다운 사람이 부러워지오 / 밤하늘 별빛과 함께 다가오는 얼굴 / 여행길에 만나 손잡아 주는 사람 / 노을 붉어지고 다음 이어가는 하늘 이야기 / 어둠 속 별빛 아래 걸으며 마음 뺏어가고 있소 / 별꽃 피고 바람 쉴 새 없이 / 밤 하늘 꽃향기 날라 주는 새벽 향해 / 별 꼬리 길게 내리는 별밤 / 멀리 교회당 보이고 시프러스 나무 / 눈 맞추는 고흐의 마지막 손놀림 / 그 떨림이 느껴지오 / 별꽃 피는 밤하늘 바라보다 잠이 들었나 보오 / 선루프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이 깨었소 / 새벽이 오고 있소 / 별밤은 내 안에 잊힐 리 없소     작은 호수와 전나무 숲 길이 있는 비밀정원이 어딘가에 있으리라 막연히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시카고에서 선명하게 볼 수 없는 별자리들을 보고 싶었다. 누워서 하늘에 아롱진 별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촉촉이 물기를 먹은 나뭇가지가 봄을 향해 벌써 준비를 마친 듯 금방이라도 꽃눈을 터뜨릴 기세다.     봄날 같은 날 별을 보러 간다. 생각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꿈같은 시간을 붙잡았다. 처음 보는 낯선 풍경이 포근하게 다가왔다. 앞선 풍경들을 뒤로 지우며 도착한 곳은 입구부터 하늘을 찌를듯한 나무들이 잔가지를 바람에 흔들리며 반겨 주었다. 작고 아담한 다락방을 가진 오두막은 낯선 동양인을 맞이할 완벽한 준비를 마친 후였다. 선루프가 있는 다락방에 누우면 별빛이 쏟아져 내릴 것이다. 새벽 커피를 내리면 작은 오두막에 커피향이 가득하겠지.   호수를 향한 길고 반듯한 데크에 앉아 호수 위에 펼쳐질 밤과 새벽과 아침 사이를 머리로 그리며 바라보고 있다. 새벽녘의 숲길은 청량하기만 하다. 모든 것들이 살아나는 시간이요. 잠든 것들이 깨어나는 시간이다. 북쪽 하늘 북극성이 작은 별자리들을 거느리고 별빛을 거두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둠이 걷히고 점점 붉은 하늘가로 떠오르는 달무리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당신의 선물이었다. 별밤에 별들을 가슴에 담고 먼동이 틀 때까지 밤하늘이 보여준 기막힌 장면들은 어둠 속에 펼쳐진 빛들의 향연이었고 하루가 태어나고 있는 생명의 움직임이었다. 무엇을 주고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기쁨이었고 내게 주어진 나머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되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별밤 밤하늘 별빛과 하늘 이야기 하늘 꽃향기

2023-12-18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시간을 찾아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한창일 때 / 숲속 집은 거의 지어지고 있다 / 추운 마음 손을 녹이고 / 하루하루 뜨거운 삶을 살아간다 / 늦게 도착한 어두워지는 행성 / 무사한 하룻길을 뒤돌아보는 시간 / 함께 맞이하는 생소한 아침도 / 당신의 손으로 준비한 빛나는 시간이었음에 / 가슴을 채우며 다가오는 생명 숨소리 / 녹아내리는 삶은 쌓인 눈의 무게보다 가볍지 않기에 / 너는 왔던 길을 뒤돌아본다 / 그믐이 지는 하늘을 건너 우리 뜨거웠던 하늘 가 / 멋모르고 만들었던 숲속 집으로 / 노을을 안고 시간을 거슬러 숲으로 간다     산책길이 이리 아름다울 수가 없다. 크리스마스를 2주 앞둔 겨울. 징글벨이 울리고 산타 할아버지가 눈썰매를 타고 지붕 굴뚝에 내려와 아무도 모르게 착한 아이에게 선물을 주고 간다는 눈 덮인 동네에 봄 같은 겨울이 찾아왔다. 잔디가 파릇해지고 하늘이 높고 푸르다. 숲속을 걷다 보면 산새들의 노랫소리가 청명하다.     걷다 보면 만나는 풍경들이 있다. 평소엔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던 하늘, 노을을 배경으로 떠 있는 구름 한 점만으로도 다른 분위기를 내기도 한다. 낙엽이 두껍게 깔려있는 좁은 길가로 빽빽하게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 돌아오는 길을 자칫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덤불 사이로 길을 내기도 하고 끊어진 길을 되돌아 나오기도 하였지만 휴대전화의 셔터를 마구 누를만큼 풍경이 내게로 왔다. 삐죽이 튀어나온 갈대가, 바닥에 떨어진 낙엽 한 장이, 돌멩이에 피어난 이끼가, 어두워지는 하늘에 흐르는 구름이, 언덕에 걸려있는 노을 한 장이 그토록 마음을 위로할 줄은 미처 몰랐다. 세상 어느 구석을 바라보아도 아름답지 않은 곳은 없다.   그 아름다움을 눈으로 찾아내고 마음에 담지 못함은 나의 눈과 마음이 열려있지 못한 까닭이리라. 당신의 손은 오늘도 빛나는 하루를 펼치는데 눈을 가리고 입을 막고 있음은 손에 쥐어도 버리고 갈 것만 찾는 우리의 멍든 가슴 때문은 아닐런지. 변해가는 하늘을 바라보다 쉼 없이 우리 곁을 지나가는 시간을 본다. 붙잡고 싶었다. 달려가 앞서 보기도 하고, 옷소매를 부여잡아 끌어보기도 하였지만 시간은 돌아 보지 않는다.     그리스 신화에 시간의 신 크로노스(Chronos)는 달려가는 젊은 청년의 모습, 발에는 날개가 달려 있고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칼이 들려 있으며, 이마에는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늘어뜨려져 있지만 뒷머리에는 머리카락이 한 오라기도 없다. 쉼 없이 달려야 하니 발에 날개가 달려 있고, 창끝보다 날카로와야 하기에 오른손에 칼이 들려 있고, 만나는 사람이 잡을 수 있도록 앞이마에 머리칼이 늘어뜨려져 있으나, 지난 후에는 누구도 잡을 수 없도록 뒷머리가 없음을 의미한다. 시간은 곧 기회이지만 한번 놓친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인들은 절대적이며 수학적 측면에서 수량화가 가능한 시간을 주관하는 크로노스(Chronos) 외에 질적인 시간을 주관하는 카이로스(Kairos)라는 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자는 일상적이며 안정과 지속을 상징한다면, 후자는 축제와 같은 비일상적이며 기회와 변화, 행복과 불행 등을 상징하고, 또한 인간의 의지에 의해 정의되기도 하는 시간 개념이라는 점에서 시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답답한 마음을 위로해 준다.     우리는 크로노스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순간순간 나에게 다가오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적 개념으로 살아야 한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눈금 같은 시간이 아니라 풍요롭고 사랑스러우며 창의적이다. 나는 노을을 안고, 바람에 기대어 시간을 거슬러 숲으로 가고 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시간 시간적 개념 하늘 노을 크리스마스 캐럴

2023-12-11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기적

‘The secret dare to dream’이라는 영화 한편을 보았다. “There are only two way to live your life. One is as though nothing is a miracle. The other is as though everything is …”라는 자막으로 시작되는 영화. 이어지는 단어는 a miracle임에 틀림없음에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누구나 기적 같은 삶을 꿈꾸어본 적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그럼에도 매일 다가오는 평범한 일상의 모습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기가 일수인 우리에게 잔잔한 교훈을 주는 영화였다. 〈〈〈기적은 거짓 없는 따뜻한 마음과 이웃을 향한 긍휼한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일상을 사랑의 마음으로 돕고 자신을 희생할 때 어려움에 빠진 한 가족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훈훈한 스토리였다.〉〉〉   대부분 처음 몇 장면을 보면 뒤에 전개될 내용들이 어렴풋이 읽혀지기에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기 전에 영화보기를 포기하기 다반수였다. 시사나 다큐, 탐사 프로그램을 즐기는 편이어서 영화 한편 골라 진득하니 스토리에 몰입하기가 드물었다. 시화집 ‘물소리 같았던 하루’ 북콘서트 마치고, 세번째 시문 행사를 어제 마치고, 시카고 디카시연구회 총회를 오늘 마친 후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 한편을 마주한다.     세 자녀를 홀로 키우며 생선가게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Marenda와 대학교수 Bray의 만남은 기적 같은 일들로 채워지고 있었고, 서로의 마음 속에는 행복이라는 꽃 한송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Marenda는 순수했던 Bray의 도움과 친절을 오해하게 되었고 둘은 서로의 길로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Marenda는 Bray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그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Bray도 Marenda를 추억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녀를 만나는 기적 같은 일을 꿈꾸게 되었다. 서로의 일상에 충실하면서도 늘 마음에 담아두었던 만남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서로의 집으로 찿아가는 길 위에서 둘은 만나게 된다. 처음으로 Marenda는 Bray에게 손을 내어주고 서로를 포옹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나는 어려운 일을 겪게 될 때 화를 내고 그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블레임하였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모든 문제가 클리어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어. 기적 같은 사랑은 내 눈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외롭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Bray의 대사 한 토막이 마음에 울림으로 남는다.   바람은 아직 차지만 매서운 겨울 문턱을 넘어가기 전 어쩌면 포근히 걸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다. 언덕길 바로 옆으로 누렇게 물든 갈대와 고개 숙인 억새가 줄지어 나를 반기는 듯 미풍에 살랑거린다. 작은 stream을 따라 오리 가족이 유유히 흐른다. 사실 우리는 순간 순간 기적 같은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길지는 몰라도 우리 눈에 비쳐 오는 풍경과 사람들은 참으로 경이롭다. 파도같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들풀의 춤사위도, 발 밑에 펼쳐 있는 낙엽들의 색과 모양도, 하늘로 뻗은 나무 가지들의 말없는 기도도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오늘의 기적이고 축복이다.   어둠이 내린 highway를 달리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길. 하나는 매일 매일 기적 없는 밋밋한 길을 살아가는 것과 순간마다 특별한 기적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또 하나의 길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 우린 오늘 하루도 가슴 뛰는 기적 같은 축복의 순간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마음의 밭을 기경해야 한다. 버릴 것은 버리고 남겨둘 것만 남겨두어야 한다. 오늘 눈에 비쳐오는 모든 순간을 사랑으로. 긍휼함으로, 진실함으로 마음에 담아야 한다. 그리고 기적 같은 그 길을 내 발로 걸어야 한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기적 대학교수 bray 영화 한편 다람쥐 쳇바퀴

2023-12-04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기적

‘The secret dare to dream’이라는 영화 한편을 보았다. “There are only two way to live your life. One is as though nothing is a miracle. The other is as though everything is …”라는 자막으로 시작되는 영화. 이어지는 단어는 a miracle임에 틀림없음에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누구나 기적 같은 삶을 꿈꾸어본 적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그럼에도 매일 다가오는 평범한 일상의 모습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기가 일수인 우리에게 잔잔한 교훈을 주는 영화였다. 기적은 거짓 없는 따뜻한 마음과 이웃을 향한 긍휼한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일상을 사랑의 마음으로 돕고 자신을 희생할 때 어려움에 빠진 한 가족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훈훈한 스토리였다.   대부분 처음 몇 장면을 보면 뒤에 전개될 내용들이 어렴풋이 읽혀지기에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기 전에 영화보기를 포기하기 다반수였다. 시사나 다큐, 탐사 프로그램을 즐기는 편이어서 영화 한편 골라 진득하니 스토리에 몰입하기가 드물었다. 시화집 ‘물소리 같았던 하루’ 북콘서트 마치고, 세번째 시문 행사를 어제 마치고, 시카고 디카시연구회 총회를 오늘 마친 후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 한편을 마주한다.     세 자녀를 홀로 키우며 생선가게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Marenda와 대학교수 Bray의 만남은 기적 같은 일들로 채워지고 있었고, 서로의 마음 속에는 행복이라는 꽃 한송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Marenda는 순수했던 Bray의 도움과 친절을 오해하게 되었고 둘은 서로의 길로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Marenda는 Bray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그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Bray도 Marenda를 추억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녀를 만나는 기적 같은 일을 꿈꾸게 되었다. 서로의 일상에 충실하면서도 늘 마음에 담아두었던 만남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서로의 집으로 찿아가는 길 위에서 둘은 만나게 된다. 처음으로 Marenda는 Bray에게 손을 내어주고 서로를 포옹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나는 어려운 일을 겪게 될 때 화를 내고 그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블레임하였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모든 문제가 클리어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어. 기적 같은 사랑은 내 눈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외롭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Bray의 대사 한 토막이 마음에 울림으로 남는다.   바람은 아직 차지만 매서운 겨울 문턱을 넘어가기 전 어쩌면 포근히 걸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다. 언덕길 바로 옆으로 누렇게 물든 갈대와 고개 숙인 억새가 줄지어 나를 반기는 듯 미풍에 살랑거린다. 작은 stream을 따라 오리 가족이 유유히 흐른다. 사실 우리는 순간 순간 기적 같은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길지는 몰라도 우리 눈에 비쳐 오는 풍경과 사람들은 참으로 경이롭다. 파도같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들풀의 춤사위도, 발 밑에 펼쳐 있는 낙엽들의 색과 모양도, 하늘로 뻗은 나무 가지들의 말없는 기도도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오늘의 기적이고 축복이다.   어둠이 내린 highway를 달리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길. 하나는 매일 매일 기적 없는 밋밋한 길을 살아가는 것과 순간마다 특별한 기적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또 하나의 길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 우린 오늘 하루도 가슴 뛰는 기적 같은 축복의 순간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마음의 밭을 기경해야 한다. 버릴 것은 버리고 남겨둘 것만 남겨두어야 한다. 오늘 눈에 비쳐오는 모든 순간을 사랑으로. 긍휼함으로, 진실함으로 마음에 담아야 한다. 그리고 기적 같은 그 길을 내 발로 걸어야 한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기적 대학교수 bray 영화 한편 다람쥐 쳇바퀴

2023-12-04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겨울 나무

가벼워진 후 뼈와 살을 추려 간간히 입은 마른 손을 하늘로 뻗는다 미풍에 속삭였던 잎들의 어휘 입안 가득 풀어낸 동그란 바람 그리고 견디어 냈던 푸른 생명들의 기억 짙은 민트향의 겨울로 간다 파이프 올겐의 물기 없는 파장 마른 손을 힘겹게 하늘로 뻗는다    모두가 벗어 버리고 있는 순간 강은 이제부터 봄을 향해 흐르고 옛 이야기도 먼 훗날의 이야기도 아닌 이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오늘로 살아간다 당신으로부터 시작돼 내게로 오는 그저 꽃 피우는 사랑이 되랴 그저 다가 오는 그리움 되랴 그저 흐르는 강물이 되랴   안다고 하는 것 울타리 너머의 상실한 마음 만든 이의 손길을 읽을 수 있다면 깊숙한 손잡음의 떨림이 있다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림자처럼 밟히는 나를 빚어내나니 마른 손으로 춤추게 하나니 비로소 열리는 귀, 보이는 눈, 들리는 노래 힘줄 선 근육의 사이 사이로 가을을 이별하는 사이 사이로 당신을 숨쉬는 사이 사이로    부디 행복하세요. 할 수 있어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데, 말하고 싶어도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데, 천개의 별이 뜨고 천개의 별이 지고 있답니다. 언덕 위 나무는 이제 앙상한 몸을 드러내었고 휑한 바람은 몇개 남지 않은 마지막 잎새를 흔들어대고 있네요. 부디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쓸쓸함을 이기려면 온 신경을 아래로 쏟아 내야 해요. 뿌리로 뻗어야 해요. 지난 봄의 꽃향기를 잊어야 해요. 가지가 보이지 않을 만큼 풍성했던 초록의 기억을 묻어야 해요. 붉게 타올랐던 참을 수 없던 열정을 식혀야 해요. 그렇게 고요해져야 해요. 죽은 듯 숨조차 다듬어야 해요.     언덕 위 나무와 들풀의 손짓은 겨울의 깊은 호흡에 잠겨있어요. 누구도 노래하지 않고 춤추지 않는 날이 올 거에요. 찬 바람에 흰눈까지 온 대지를 덮을 거에요. 그러나 찬 눈을 꽃처럼 피어낼 나무가지들을 축복하려 해요. 그러니 부디 행복하셔야 해요. 모두 자신을 벗고 있는 와중에도 초라해지거나 춥지 않았으면 해요. 보이지 않지만 든든한 뿌리가 버티고 있으니까요. 봄으로 뻗어나가는 멈추지 않는 동력으로 동토의 찬 기운을 녹이는 봄의 전령으로 살아야 해요.     마지막 잡아본 손은 잎사귀를 다 떨군 앙상한 가지 같이 말라 있었어요. 나무의 마른가지처럼 그 손을 사랑하게 됐어요. 오랜 시간을 견디어내며 만들어진 사랑의 자국이라 명명된 그 손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거에요.   창밖은 눈, 이제 가을은 옷깃을 여미고 겨울의 깊은 숲속으로 걸어 갔어요. 두 팔을 벌리고 맞이하는 나무들 사이로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갔어요. 내 발도 걷고 있네요. 깊은 숲속으로, 보이지 않는 오두막으로, 두 팔 벌리고 맞이하는 당신에게로, 끝이 없는 하얀 발자국 남기며 사라지고 있어요. 숲 사이로 들려오는 겨울나무 소리. 당신을 숨쉬는 사이사이로….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겨울 나무 겨울나무 소리 겨울 나무 나무들 사이

2023-11-27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호수의 얼굴

수직 수평의 선들이 지나간다 / 길게 둥글게 연결되어 한 선처럼 / 당신은 잔잔한 물결을 이루며 눈을 뜬다 // 흔들리는 풀같이 고단한 하루 / 앞으로 다가서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 평면의 그녀는 일어나 입체로 접어진다 / 빛의 방향으로 그림자가 길게 눕고 / 지우는 것도 그리는 것이어서 / 어둔 그림자 속에 빛의 존재가 어렴풋하다 / 양 면으로 팔을 뻗어 하늘을 들이 마시면 / 풍경은 저 멀리서 빠르게 눈 앞으로 다가온다 / 빠른 손 끝의 움직임에 호수는 멀고 가까워진다 // 호숫가 잘려나간 나무 밑둥에 앉는다 / 오른쪽 끝을 만지다 왼쪽 끝으로 / 머리를 매만지다 턱밑이 깊어진다 / 눈 가장자리를 바라보다 귀 매무새를 정리하고 / 눈동자, 코끝의 정점을 콕 찍는다 / 눈매가 살아나고 갸름한 양볼, 돌출 같은 웨이브 / 지울수록 섬세히 그려지는 호수의 얼굴 // 지우는 것도 그리는 것이어서 / 호수는 당신 얼굴로 깊어 간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 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뭇잎이 떨어진다’로 시작되는 시입니다. 이어서 시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저기 아득한 곳에서 떨어진다.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밤마다 무거운 대지가 모든 별들로부터 고독 속으로 떨어진다. 우리 모두 떨어진다. 여기 이 손도 떨어진다. 허지만 이 떨어짐을 한없이 부드럽게 두 손으로 받아 내는 어느 한 사람이 있다’로 이 시는 끝나고 있습니다. 이 깊은 가을 떨어지는 것들을 두 손으로 받아 내는 사람이 된다는 것. 턱을 고이고 당신의 문 앞에서 당신의 문이 열리길 기다릴 수 있다는 것. 창조주의 눈 속에 담겨있는 깊은 가을의 의미, 떨어진다는 의미는 살아야 하는 마지막 결단이었으리라 생각 됩니다. 모든 것을 떠나 보내지 않으면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없기에 보이는 것들을 떠나 보이지 않는 아래로 더 깊이 뿌리내리는 것이다. 윗잎이 자신의 위치를 내려 놓을 때 봄이 되면 새잎이 그 위로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호수의 얼굴은 평온합니다. 잔잔한 물결위로 가을이 짙게 묻어납니다. 호숫가 잘려진 나무둥지에 앉아 있습니다. 호수의 표면에 겹쳐오는 한 사람의 얼굴이 거기 있습니다. 길다면 긴 생을 통해 한결같은 몸짓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무릎으로 하루를 마감하신 당신의 얼굴을 그려봅니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손잡음이 벌써 9년째로 접어듭니다. 안녕 하신지요?   누군가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한 본향에서의 삶을 위하여 준비된 경기장 같다’란 말이 생각납니다. 어떤 분은 험난하고 치열하게, 어떤 이는 미래가 없다는 듯 자신의 욕망을 위해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길게 살아가고 어떤 분은 짧은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당신의 삶은 잔잔하고 고요했습니다. 불현듯 밀려오는 두려움과 절망을 따뜻한 손으로 받아 내며 속으로 속으로 울음을 삼켰습니다. 그러나 얼굴은 늘 평온했고 손은 늘 따뜻했습니다.   기다린다는 것. 그곳에 도달할 순 없지만 눈을 감아도 뵈고 귀를 막아도 들려옵니다. 몇 날, 몇 밤이 지나고, 또 한 달, 한 해가 지나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 당신을 손잡을 수 있는 순간이 오겠죠.     나에게는 편안하게 몸을 기댈 수 있는 나만의 쿼렌시아가 있습니다. 거리에 가로등이 줄지어 켜집니다. 저마다 저 가로등의 끝을 향해 분주한 발걸음을 옮깁니다. 퀸튼 길을 따라 가다 팔레타인 길을 지나면 언덕길을 오르게 됩니다. 오른쪽으로 동산이 보이고 그 길로 접어들면 양쪽으로 작은 공원이 있습니다. 노을이 하늘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때나, 눈송이가 펄펄 유희를 즐길 때, 언덕 위 나무가 오랜지 빛으로 변해가는 요즈음엔 자연히 발걸음이 옮겨집니다. 그곳에서 종종 밤을 맞기도 합니다. 그리고 동네 주변에 있는 작은 호수. 수 백 번도 더 찿아간 호수의 얼굴은 항상 다른 얼굴을 띄고 있습니다. 호수의 얼굴은 내 마음의 얼굴을 대변해 주는 것 같습니다. 늘 반갑게 맞아줍니다. 눈물을 닦아주기도 하고 아름다운 세레나데를 들려주기도 하고 때로는 시 한 편을 물결처럼 마음에 전해 주기도 합니다. 호수의 얼굴이 당신의 얼굴과 겹쳐져 올 때면 내 속에서 나직하고 떨리는 음성으로 당신 이름을 부릅니다. “엄마~~”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호수 얼굴 당신 얼굴 물결위로 가을 어둔 그림자

202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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