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이 가을엔
가을이 오는 언덕에는 벌써 황톳빛 갈대가 바람에 온몸을 잔뜩 누입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가을 향기는 코끝을 스쳐 잠긴 마음의 문을 열게 합니다. 지난 계절의 더위와 끈적이던 피부의 물기를 단번에 증발해 줍니다. 생각하기 싫었든 아니 생각나지 않았든 잃어버린 기억의 순간들을 되찾고 싶습니다. 이른 아침 잠깐 내린 비로 하늘은 까마득히 높아지고 하늘하늘 흔들리는 나무의 잎들은 아침 햇살에 눈부십니다. 맑고 깨끗해진 거리의 잔디와 가을 국화와 코스모스도 한결 푸르게 살아납니다. 이렇게 걷다 보면 말끔히 얼굴을 씻은 호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호수에 비칩니다. 호수를 돌아 나지막한 언덕을 오릅니다. 여린 노란색으로부터 진홍의 열정, 타오르는 듯 붉은 단풍까지 물들기 시작한 언덕에 서서 바라볼 수 있는 숲은 아름답습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숲의 겸허한 마음에서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웁니다.
나무는 정직합니다. 속살까지 시원해지는 아침 바람은 나뭇잎의 색깔을 바꿔놓습니다. 봄날 피어날 연두의 새잎을 위해 붉게 익어가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자신을 내려놓을 준비를 합니다. 사람보다 먼저 알고 사람보다 먼저 행동합니다. 사람보다 먼저 깨어나 가을비를 맞고, 사람보다 먼저 익어갑니다. 앙상해진 나무, 잎을 떨군 자리마다 검고 딱딱한 잎눈을 만들고, 가지의 어딘가엔 꽃눈을 만들어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저 서 있는 나무가 아니라 숨겨진 뿌리로부터 끊임없이 물을 찾아 잔뿌리를 내리고 마른 줄기에 수분을 공급합니다. 어느 봄날 연둣빛의 기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랜 시간을 거쳐 만들어집니다. 작은 일에도 참지 못하고 지금 당장 결말을 지어야 편안한 사람의 생각보다 깊고 뜨겁습니다.
이 가을엔 잃어버린 나를 찾으려 합니다. 모든 일을 빠르게 결정지으려는 조급함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불평 없이 그 자리를 지켜온 언덕 나무를 찾아가 배우려 합니다. 별똥별의 긴 꼬리가 사라지는 밤하늘을 봅니다. 보이는 것만으로 다 안다고 말하는 오류를 벗고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행하는 빈들의 기적, 뿌리를 기억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있기에 당신이 있고, 내가 없다면 당신도 없다는 내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숲을 찾아가 무리 지어, 혹은 외로이 자신을 드러내는 들꽃을 만나보겠습니다. 이 가을엔 사람의 언어보다 땅의 언어, 하늘의 언어를 배우고 싶습니다. 춤추고 노래하고 당신과 함께 긴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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