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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푸른 점 하나

[신호철]

[신호철]

이층 끝 방을 화실로 꾸몄다. 폭신한 매트와 방 안 가득 장난감에 쌓여있던 그 방을 정리하는 데 며칠이 걸렸다. 손주 둘, 손녀 둘의 사랑방이었던 그 방을 정리 해야겠단 생각은 아이들이 하나둘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던 작년 여름이었다. 그와 맞물려 한국에서의 전시가 예상치 못하게 잡혀 그림을 그릴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챙겨야 할 장난감들은 박스에 넣어 아이들 집으로 보내주었다. 드로잉 테이블을 들여놓고 이젤과 그림 도구들을 정리했다. 창문 옆으로 쉴 수 있는 작은 소파를 들이고 턴테이블과 LP를 챙겨놓으니 아늑한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얼마가 될 지 모르지만, 이곳이 나의 피난처,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다.  
 
이 집을 지어 이사 올 때 심었던 매화나무가 이 층 창문을 훌쩍 지나칠 만큼 키가 자랐다. 매년 하얀 매화를 너무 한가득 피워 봄을 알려주었던 나무는 이제 스스로 나뭇잎을 다 내려놓았다. 어느 사이 잎을 떨군 가지마다 붉고 작은 열매가 빼곡히 자리 잡았다. 아마도 꽃이 진 자리마다 한 여름을 지나면서 조금씩 맺은 보람인 듯싶다. 동쪽으로 난 창문을 통해 아침마다 햇볕이 가득히 들어온다. 햇살 아래 작은 열매는 붉은 보석 같이 반짝인다. 드로잉 테이블을 창문과 마주한 덕에 붉어지는 나무의 변화를 날마다 바라볼 수 있는 특혜를 누리고 있다.  
 
오늘은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하루가 다 지나가고 창문마다 불이 켜지고 저마다의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간혹 잊고 사는 티끌 같은 존재 푸른 점 하나로 날 사랑할 일이다. 그러나 누구를 향해 무엇을 위해 맹세하거나 정의하지 않을 일이다. 다만 내게 주어진 길 걸으며 만나게 될 사람들을 위해 내 분량을 덜어낼 일이다. 그리하여 가벼워진 몸으로 당신에게 날아갈 일이다. 푸른 점 하나로 나의 페르소나를 벗어내고 있다. 아니 가벼워지고 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붓끝에 물감을 찍어 하늘을 그리고, 언덕을 그리고, 들꽃을 한 아름 안고 있는 서정을 그린다. 우리의 시간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기억하고 난 후, 기다리고 난 후, 아니면 사랑하고 난 후였을까?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가 기억하는 그날은 수년이 되어 흘렀다. 밤새 기다리다 아침이 와도 때론 무뎌지고 닳아 없어진 어처구니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당신에게 날아갈 일은 나만의 고요를 찾는 일이다. 모든 것이 사라진 이 밤의 고요는 새벽의 고요와 사뭇 다르다. 혼돈과 고요의 차이는 종이의 앞면과 뒷면의 차이 같다. 혼돈 속의 고요. 고요 속에 혼돈. 요란한 강물의 물들을 바다로 다 흘려보낸 후 찾아오는 적막과 흡사하다. 서둘러 도착해야 할 거대한 미시간 호수의 고요가 그립다. 훅 불면 사라질 티끌 같은 존재로 살아간다.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야할 존재이다. 맹세한다는 부질없음을 내려놓는다. 한없이 가벼워져 푸른점 하나로 날아 오른다. 우리 모두 흙으로 돌아간 후 기억이나 하겠는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쏟은 시간과 열정과 땀방울을. 그럼에도 날 사랑할 이유는 오직 하나 독특한 나를 세상에 보낸 당신의 사랑안에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겠다.그리고 밝아올 새벽의 고요를 기다리겠다. (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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