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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도네시아 수교 50주년 공연

LA 한국문화원(원장 정상원)이 LA 총영사관, LA 인도네시아 총영사관과 함께 한국과 인도네시아 수교 50주년을 기념하는 ‘트만(Teman·친구)’ 음악회를 개최한다.     7일 오후 7시 LA 한국문화원 3층 아리홀에서 열리는 이번 음악회는 대한민국과 인도네시아의 외교관계 수립 5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행사다.     특히, 인도네시아는 한국이 동남아 국가 중 유일하게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로, 그간 한-인도네시아 양국이 방산, 무역·투자, 산업기반시설, 문화교류 등 여러 방면에서 괄목할 만한 협력관계를 발전시켜왔다.   이날 음악회에서는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전통과 역사를 담은 음악과 춤을 통해 양국 간 신뢰와 우정, 교류와 상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인도네시아 타악기인 ‘콜린탕’ 합주, 인도네시아 전통 무용인 ‘자이퐁’ 춤이 무대에 오를 예정이며, 인도네시아에서 크게 사랑받고 있는 K드라마 ‘대장금’ 주제곡 ‘오나라’와 인도네시아에서 널리 불리는 곡인 ‘타나아이쿠’를 공연한다.     또한 한국 측에서는 가야금 산조와 병창, 태평무, 진도 북춤과 부채춤 등 다양한 국악 작품들을 관객들에게 선보일 예정이고, 두 나라의 콜라보공연도 준비했다.     정상원 LA 문화원장은 “이번 ‘트만’ 음악회는 두 나라의 깊이 있는 전통문화를 감상할 수 있는 자리로, 양국 간 우정과 상호신뢰를 문화적인 교류를 통해 보여줄 예정”이라고 전했다.   한정된 좌석으로 인해 사전에 문화원 홈페이지(kccla.org)를 통해 예약이 필요하다.     ▶주소:5505 Wilshire Blvd, LA   ▶문의:(323)936-7141 이은영 기자인도네시아 수교 인도네시아 수교 인도네시아 총영사관 인도네시아 양국

2023-07-02

"한국과 캐나다 미들파워이자 자유, 평화, 번영의 한편"

 한국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소장 박철희) 미주연구부는 지난 21일(수), 「Korea-Canada Relations at 60: Stronger Together」을 주제로 공개 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타마라 모휘니 주한캐나다대사, 크리스 나카무라 캐나다 아시아태평양재단 부회장, 라몬 파르도 킹스칼리지 런던대학 교수, 우정엽 외교부 전략기획관, 김은기 고려대 교수 등이 참석했다.   국립외교원은 한국-캐나다 수교 60주년을 기념하여 이번 회의를 개최하였으며, 북태평양, 인도-태평양 및 국제무대에서의 한-캐 관계 강화 및 협력 증진 방안을 고안함에 있어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하고 국민과의 쌍방향 소통을 확대하기 위해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박철희 국립외교원장은 환영사를 통해 "한국과 캐나다는 호주 등과 더불어 흔히 미들파워라는 개념으로 표현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한국과 캐나다는 강대국과 약소국의 중간에 위치해 있는 미들파워(middle power)라는 개념을 넘어서서 글로벌하게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협력 파트너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한-캐나다는 자유, 평화, 번영의 편에 서서 글로벌 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해 나가는 최상, 최적의 파트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공개 회의의 제1세션에서는 ‘한-캐 관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주제로 김현욱 국립외교원 미주연구부장의 사회 하에 라몬 파체코 파르도(Ramon Pacheco Pardo) 킹스칼리지런던대 교수의 기조발제가 진행되었으며, 타마라 모휘니 주한캐나다대사와 우정엽 외교부 외교전략기획관의 지정토론이 이어졌다.     제2세션에서는 ‘학술, 문화, 비즈니스 및 인적 교류를 통한 한-캐 관계 강화’ 제하 김태환 국립외교원 교수의 사회로 크리스틴 나카무라(Christine Nakamura) 캐나다 아시아태평양재단 부회장과 김은기 고려대 교수의 발제가 진행되었다. 이후 박철희 국립외교원장의 폐회사를 통해 회의를 종료하였다. 표영태 기자캐나다 번영 자유 평화 한국 국립외교원 캐나다 수교

2023-06-22

[중국읽기] 베트남의 중국화?

지난해는 한·중 수교 30년이자 한·베트남 수교 30년의 해였다. 이에 맞춰 지난해 12월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국가주석이 한국을 찾았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한데 그는 귀국 한 달여만인 지난달 중순 전격 사임했다. 그의 측근인 부총리 두 명이 부패 문제에 연루되자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는 거다. 이를 액면 그대로 믿기만은 어렵다. 권력투쟁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베트남 공산당은 서기장과 국가주석, 총리, 국회의장의 4두 마차가 이끄는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서기장은 군권과 당권을 장악하고 국정 전반을 관장한다. 국가주석은 외교와 국방, 총리는 행정, 국회의장은 입법을 관할한다. 한데 베트남 정치에서 정작 중요한 건 남북의 균형이다. 주로 하노이 출신 북방파가 서기장을, 호치민 배경의 남방파가 총리를 맡는다. 현재 서기장인 응우옌 푸 쫑은 1944년 하노이 출생으로 대표적인 북방파다.   그가 2011년 권좌에 오를 무렵엔 4두 마차 중 북방파는 그 혼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2016년부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따라 강력한 부패척결 운동을 벌이며 권력 다지기에 성공했다. “어떤 금지구역도, 어떤 예외도 없다”는 서슬 퍼런 반부패 운동에 10만여 당원이 낙마했다. 여기엔 정치국 위원 출신 4명도 포함됐다. 그 결과 권력 지형이 바뀌었다. 4두 마차 중 남방파는 최근 사임한 응우옌 쑤언 푹 한 사람만 남게 됐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물러난 것이다.   특히 응우옌 푸 쫑은 2021년 1월 ‘특별 후보자’ 형식으로 예외를 인정받아 서기장 3연임에 성공했다. 1975년 베트남전이 끝난 이후 최장수 서기장이다. 지난해 10월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3연임에 성공했을 때 가장 먼저 베이징을 찾아 축하한 게 그였다. 시 주석은 답례로 그에게 외국인에 주는 최고 훈장을 수여했다. 두 사람은 투철한 사회주의자로 국유기업 중심의 경제발전 노선을 추구한다는 점도 같다.   부패척결을 내세워 장기집권 가도를 열고 있는 점도 매우 흡사해 일각에선 ‘베트남의 중국화’라는 말이 나온다. 베트남은 지난해 우리가 가장 많은 342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한 곳이다. 9000여 한국 기업에 20만 한국인이 활동 중이다. 베트남 중부 다낭은 ‘경기도 다낭시’라 불릴 만큼 한국인 발길이 잦다. 아이러니한 건 중국의 환경 변화에 따라 탈(脫)중국에 나선 한국 기업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베트남인데, 최근 베트남의 정치 환경이 중국을 닮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베트남의 변화를 주목해야 할 이유다. 유상철 / 한국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중국읽기 중국 베트남 베트남 국가주석 베트남 공산당 베트남 수교

2023-02-06

"세계평화 중심에 선 한미동맹"

    글로벌 한인연대(회장 린다 한) 주최 한미수교 140주년 기념식 및 축하행사가 14일 워싱턴 DC 소재 연방하원의회 레이번스 빌딩에서 열렸다. 제임스 윤 목사의 개회기도로 시작된 기념식은 이어서 국기에 대한 경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의 시간 순으로 진행됐다.   환영사를 통해서 린다 한 회장은 “한미 동맹은 세계 평화의 중심에 있는 동맹으로, 외교 관계가 얼마나 성공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관계”라며 “한미 수교 14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했다.   이어 소프라노 정세영 교수의 무대와 권명원 작가의 서예 무대가 있은 후, 내빈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조태용 주미대사는 “한미 수교 140년을 기념하는 이 자리는 우리 동맹관계의 역사를 돌아보게 하며 미국 내 한인 커뮤니티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우리 동맹관계를 강하게 만들어 준 모든 이에게 감사한다”고 축하인사를 전했다.   제이미 레스킨 의원은 “한미 양국의 외교관계는 매우 중요한 관계다. 한국과 미국은 모두 번영하는 민주 국가이며 공통의 가치인 자유, 헌법, 평등 등을 수호하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연합해야 한다. 지난 3개월간 조태용 주미대사의 임기가 시작되고, 바이든 대통령도 한국을 방문했을 정도로 많은 성과가 있었다. 곧 카밀라 해리스 부통령도 한국을 방문한다. 우리 협력의 장은 이제 경제 안보를 넘어서 반도체와 같은 새로운 분야에서도 이뤄져야 한다. 수교 140주년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앤디 김 의원(민)은 “한미 수교의 역사는 140년, 우리 부모님 이민의 역사는 50년이다. 지난 50년간 한국이 선진국으로 성장한 역사를 생각하면 놀랍기 그지 없다"면서 "지난 달 한국을 방문했는데, 이민자의 아들이 미국을 대표하는 의원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은 강력한 메세지를 준다고 생각한다. 이는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 미국에 온 이민자의 삶에 양국의 관계가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데이빗 트론 의원도 “한인들이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최고의 인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양국 모두 후세대를 생각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축하의 메세지가 전해졌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한미 수교 140주년 기념식에 깊은 감사와 특별한 격려를 보낸다. 이번 행사가 우리 혈연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양국의 영원한 우정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전했다.   올해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지 140주년이 되는 해다. 조미조약은 조선이 최초로 서양국과와 맺은 국제조약이다. 이때부터 시작된 한미 관계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동맹 중 하나로 발전했다. 한편, 이번 행사는 메릴랜드 교회 협의회, 메릴랜드 교역자 협의회, 메릴랜드 한인교회 협의회, 메릴랜드 코내스톤 커뮤니티 교회, 메릴랜드 한인회, 몽고메리 한인회, 메릴랜드 한인회, 한국 자유 총연맹 워싱턴 지부, 한미 자유 총연맹 미주지역, 워싱턴 한인 무역 협회, 워싱턴 문화예술 재단, 옴니 보험 자산 관리(이상 무순)의 후원으로 개최됐다.  김정원 기자 kimjungwon1114@gmail.com세계평화 한미동맹 주최 한미수교 우리 동맹관계 한미 수교

2022-09-14

[중국읽기] 수교 30년, 단교 30년

24일로 중국과 수교한 지 30주년, 대만과 단교한 지 30주년을 맞는다. 대만과 단교할 때 대만에서 1등 서기관으로 근무했던 조희용 전 캐나다주재 대사가 지난 3월 ‘대만 단교 회고’를 펴냈다. 자신의 경험에 한국은 물론 중국과 대만에서 관련 자료를 꼼꼼히 수집해 기록을 남겼다. 책은 우리 외교에 크게 세 가지 교훈을 던지고 있다.   첫 번째는 우리가 곧잘 시간 싸움에서 패한다는 것이다. 협상은 느긋하게 밀고 당겨야 하는데 주어진 시간 안에 무얼 이루려다 보니 상대 페이스에 말리곤 하기 때문이다. 30년 전 한중 수교 협상에 나선 우리 대표단은 두 가지 사항이 중요했다. 조기 수교와 노태우 대통령의 방중 성사였다. 한데 수교하던 1992년은 사실상 노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에 해당하는 해였다.   우리는 시간에 쫓기는데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앞세우며 이걸 인정 안 하면 더는 대화가 없다는 식으로 버텼다. 결국 우리 외교는 중국 요구 대부분을 수용하면서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첫 번째 수교국이었던 대만에 대해선 배려가 소홀했다. 대만으로부터 “은혜를 잊고 의리를 저버렸다(忘恩負義)”는 말을 듣게 된 배경이다. 여기서 우리가 새겨야 할 교훈은 중국과의 협상에선 되도록 마감시한을 갖지 않는 게 좋다는 점이다.   두 번째 교훈은 중국에 한국은 밀면 밀린다는 인식을 심어줬다는 점이다. 중국은 수교를 위한 한국과의 첫 번째 공식협상 과정에서 한국의 중국에 대한 기본 입장과 태도를 단기간에 경험하며 한국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나름의 접근법을 정립할 수 있었다.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은 수교 교섭 2차 예비회담 이후 한국의 마지막 패를 다 읽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이후 마늘 파동이나 사드(THAAD) 사태 등 분쟁이 생길 때마다 중국이 보이는 강경한 태도의 배경에 혹시 과거 수교 당시 갖게 된 한국은 밀면 밀린다는 인식이 작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떨칠 수가 없다.   세 번째는 우리 외교의 고질적인 문제로서 단기 성과에 대한 집착이다. 정권마다 단기적 성과를 내기 위해 외교 당국이 매달리면서 대국 및 북한 중심의 외교를 하다 보니, 여타 주요 국가에 대한 배려와 투자를 소홀히 하게 된다.   특히 그때그때 정치권의 단기적인 계산에 영합해 불과 몇 년 전의 관계나 약속을 저버리고 대외 관계를 처리하는 건 궁극적으로 국익을 해치고 국위를 손상하는 일이라고 조 전 대사는 말한다. 수교 30주년을 축하하되 단교 30주년의 상처를 돌아보며 과거의 잘잘못을 되새겨 미래 발전의 동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유상철 / 한국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장중국읽기 수교 단교 대만 단교 한중 수교 수교 교섭

2022-08-22

[중국읽기] 수교 30년, 시험대 오른 한·중관계

수교 30년을 맞은 한·중관계가 시험대에 올랐다. 지난달 26일과 27일 이틀 연속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정례 브리핑에서 나온 한국 관련 언급은 제2의 사드(THAAD) 사태가 터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는다. 자오 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달 26일 “한국이 지난해 수출한 칩의 60%가 중국에 들어왔다”며 한국이 미국 주도의 반도체 동맹인 ‘칩4(미국·한국·대만·일본)’에 가입하지 않았으면 하는 뜻을 내비쳤다.   이튿날엔 사드 문제를 꺼냈다. 자오 대변인은 “새로운 관리는 과거의 부채를 묵살할 수 없다”며 윤석열 정부가 문재인 정권의 3불(사드 추가 배치 않고, 미국의 미사일 방어 들어가지 않으며, 한·미·일 군사협력이 동맹으로 발전하지 않게 한다) 입장을 유지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람이 신의가 없으면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공자 말씀도 인용했다. 훈계에 가까운 말이다.   한국 새 정부 출범 이후 관망세를 보이던 중국이 윤 대통령의 나토 정상회의 참석 이후 예민해졌다. 당시 최상목 경제수석이 ‘중국 외 대안시장’을 언급한 게 중국의 의심을 키웠다. 중국은 이를 한국의 탈중국 행보로 본 것 같다.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꾀하는 미국에 한국이 보조를 같이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중국은 한국 관련 문제를 늘 패권경쟁을 벌이는 미국과 연관지어 본다. 우리는 중국의 고구려사 빼앗기나 한복과 김치를 자신의 문화라 말하는 중국에 흥분한다. 한·중 양자 차원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본다.   한데 중국은 반도체와 사드 등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믿는 문제에 흥분한다. 반도체와 사드 중 시급한 건 반도체 문제다. 미국은 8월 말까지 한국에 칩4 가입 여부 결정을 요구 중이고, 중국은 지난달 중순부터 온갖 중국 매체와 학자, 그리고 관리를 동원해 결사반대에 나서고 있다. 한국이 칩4에 참여하면 어떻게 될까. 제2의 사드 보복이 꼭 없다고는 말하기 힘들 정도로 중국의 압박이 거세다.   어떻게 해야 하나. 미·중 모두의 마음을 살 방법을 찾아야 하는 숙제가 새 정부에 주어졌다. 정부는 “가입 시한은 없다”며 일단 시간 벌기에 나선 모양새인데 궁극적 해법은 되지 않는다. 사드 때도 결정을 미루다 당하지 않았나. 특히 앞으로 미·중 갈등에 따른 문제는 계속 한·중관계를 위협할 것이다. 그때마다 휘둘리지 않으려면 우리 나름의 원칙이 필요하다. 그 원칙은 우리 국민의 합의에 기반한 국익이 잣대가 돼 정해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 미·중 갈등에 흔들리지 않은 미래 30년의 한·중관계를 건설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유상철 / 한국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장중국읽기 시험대 중관계 반도체 동맹인 한국 관련 수교 30년

2022-08-01

괴소리 공격에 쓰러진 외교관들…미, 쿠바 주재 대사관 폐쇄 검토

원인을 알 수 없는 끔찍한 소리를 들은 뒤 누군가는 청력을 잃고, 누군가는 균형 감각을 잃었다. 뇌 손상까지 일어났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파견된 미국 대사관 직원들은 지난해부터 이같은 증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의학적으로 확인된 사례만 21건이다. 이를 쿠바 정부의 '비밀스러운 공격'이라고 짐작한 미국은 아바나 대사관 폐쇄를 고려하고 있다. 렉스 틸러슨(사진) 국무장관은 17일 CBS 뉴스 인터뷰에서 아바나 대사관 폐쇄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특정 개인들이 고통을 받는 피해와 관련한 매우 심각한 문제"라면서 "우리는 그들 일부를 미국으로 데려왔다"고 말했다. 국무부는 지난 2월 쿠바 정부에 이에 대해 공식 항의하고, 5월 2명의 워싱턴 주재 쿠바 외교관에 송환 조치를 했다. 그럼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지난달에도 환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회에서는 이미 아바나 대사관을 폐쇄하라는 요구가 고개를 들고 있다. 공화당 의원 5명은 틸러슨 장관에서 서한을 보내 쿠바가 실질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쿠바 대사를 미국에서 추방하고, 아바나의 미국 공관을 폐쇄하라고 요구했다. 틸러슨 장관의 CBS 인터뷰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나온 것이다. 미국이 아바나 대사관을 폐쇄할 경우 국교 단절 이후 50년 만에 대사관을 재개설한 지 불과 2년 만에 다시 문을 닫게 된다. 냉전시대로 다시 돌아가는 셈이다. 쿠바 정부는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심지어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을 아바나에 보내 조사하라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했다. 쿠바 정부 역시 이 사건으로 당혹스럽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2017-09-18

쿠바 '음파공격' 청력 손상 최소 16명

쿠바 주재 미국 외교관들이 갑작스러운 청력 손상을 호소하며 귀국해 치료를 받은 것과 관련, 국무부가 처음으로 쿠바에 있던 미국인 16명이 음파 공격으로 인한 청력 손상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CBS뉴스는 24일 헤더 노어트 국무부 대변인이 이날 기자회견에서 쿠바 주재 미 외교관에 대한 음파공격으로 최소 16명이 청력과 경미한 뇌 손상 증세를 겪었다며 현재는 음파공격이 중지됐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노어트 대변인은 16명에 외교관의 가족이포함돼 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노어트 대변인은 또 연방수사국(FBI)이 아직 수사를 벌이고 있지만 쿠바 주재 미 대사관에서 음파공격과 관련한 장비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국무부는 이번 사건의 배후로 쿠바 정부를 직접 지목하진 않았지만 쿠바 정부가 '미국을 대표해 공무를 수행하는 미 정부 인력들'을 위험에 노출되도록 했다고 비판했다. 미스터리 같은 이번 사건은 지난 5월 국무부가 워싱턴DC에 주재하던 쿠바 외교관 2명을 추방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며 밝혀졌다. 지난해 가을부터 쿠바 수도 아바나에 있는 미국대사관 직원과 배우자들이 잇따라 설명할 수 없는 청력 손상을 겪기 시작했다. 일부는 증상이 너무 심해 근무를 취소하고 미국에 돌아왔으며 최소 한 명은 영구적으로 청력을 잃을 위험성이 있다는 얘기까지 전해졌다. 수사당국은 몇 개월에 걸친 조사를 통해 대사관 직원들이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가 나오는 고도의 비밀 음파장치에 노출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다만 이 장치가 고의적인 공격을 위한 일종의 무기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 설치한 것인지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진 다음날 캐나다 외교부도 아바나 주재 캐나다 대사관 직원도 청력 손상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며 미국, 쿠바 당국과 원인을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첨단 음파 무기는 청력손실 증상과 더불어 두통과 구토, 메스꺼움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이와 관련 쿠바 정부에 배후가 누구인지 파악할 것을 요청했지만 쿠바 정부는 "우리 영토 안에서 공인받은 외교관과 그 가족들을 상대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한 번도 용납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관련설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신복례 기자 shin.bonglye@koreadaily.com

2017-08-24

'아바나 미스터리' 쿠바 주재 외교관 잇단 청력 손상

쿠바 주재 미국 외교관들이 잇따라 갑작스러운 청력 손상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져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이번 사건에 대해 미국 정부가 수사에 착수하고 쿠바 외교관들을 쫓아내는 등 보복 조치에 나서면서 50여년 만에 복원된 양국 외교 관계가 2년여 만에 다시 위기에 빠질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미스터리 같은 사건이 처음 공개된 것은 9일 헤더 노어트 국무부 대변인의 브리핑 자리에서다. 이날 AP통신에 따르면, 노어트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쿠바 주재 미국 관료들이 알 수 없는 신체 증상을 겪고 있다며 이에 따라 워싱턴DC 쿠바대사관에서 근무하던 2명의 쿠바 외교관을 지난 5월23일자로 추방했다고 밝혔다. 노어트 대변인은 "이 사건을 작년 말 처음 알게 됐다"며 "쿠바 수도 아바나의 우리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몇몇 인사들에게 다양한 신체 증상을 유발한 어떤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보고받았다"고 말했다. 노어트 대변인은 연방수사국(FBI)과 국무부 외교경호실(DSS)이 이번 사건을 조사 중이라며 피해자들이 생명이 위험한 정도의 중상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AP통신은 지난해 가을 아바나 미국대사관 직원과 배우자들이 설명할 수 없는 청력 손상을 겪기 시작했다며 그 결과 최소 한 명의 직원이 영구적으로 청력을 잃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일부는 증상이 너무 심해 여행을 취소하고 미국에 돌아왔으며, 현재 다수의 외교관이 아바나를 떠났다고 전했다. 수사당국은 몇 개월에 걸친 조사를 통해 대사관 직원들이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가 나오는 고도의 비밀 음파장치에 노출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수사당국은 쿠바 정부기관이 미국대사관 직원 5명의 주거지 내부 또는 외부에 그들의 귀를 멀게 할 의도로 이 장치를 설치했는지를 조사하고 있다. 쿠바는 정부 보안기구를 통해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을 상시 감시하고 있는데, 미국 외교관은 최우선 감시 대상이다. 아울러 쿠바 정부의 지휘계통을 벗어난 외부 인사에 의해 '음파 공격'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조사가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어트 대변인은 이번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원인과 영향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쿠바 정부는 이런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쿠바 외무부는 성명을 내 "쿠바는 우리 영토 안에서 공인받은 외교관과 그 가족들을 상대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한 번도 용납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미국의 자국 외교관 추방을 "부당하고 근거없는 조치"라고 비난했다.

2017-08-10

트럼프, 트랜스젠더 군복무 전면 금지…또 오바마 지우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6일 트랜스젠더(성전환자)의 군복무 전면 금지 방침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에 "장성 및 군사전문가들과 협의 결과 미국 정부는 트랜스젠더가 미군의 어떤 자리에서도 복무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조언을 받았다"고 적었다. 이어 "우리 군대는 결정적이고 압도적인 승리에 집중해야 한다. 군대 내 트랜스젠더가 야기할 엄청난 의학적 비용과 혼란의 짐을 떠안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제임스 매티스 장관을 비롯한 국방부 고위 참모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깜짝 트위터 발표를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AP통신에 따르면 제프 데이비스 국방부 대변인은 기자들의 관련 질문에 "백악관에 물어보라"는 답변만 내놨다. 데이비스 대변인은 다만 이후 짧은 성명을 내고 "국방부는 조만간 개정된 지침을 내놓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트랜스젠더 군복무 전면 금지 방침은 '오바마 지우기'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직전 버락 오바마 정부 때의 애슈턴 카터 국방장관은 지난해 10월 1일 트랜스젠더의 군복무를 전격적으로 허용했으며, 이에 따라 이미 군복무 중인 트랜스젠더 군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편하게 드러내는 것은 물론 의료혜택도 받을 수 있었다. 국방부는 트랜스젠더 군인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숫자를 밝히지 않고 있지만, 미국의 싱크탱크 랜드연구소는 전체 군인 130만 명 가운데 트랜스젠더는 현역의 경우 2500~7000명, 예비군은 1500~4000명에 각각 달하는 것으로 추정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AP통신은 또 현재 250명의 현역 군인이 당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성전환 허가를 받았거나 현재 허가 절차를 밟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번 조치에 대해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을 포함한 성소수자와 진보 진영은 강력히 반발했지만, 보수진영에선 환영했다. 물론 존 매케인(애리조나), 조니 언스트(아이오와), 리처드 셸비(앨라배마), 오린 해치(유타) 상원의원을 필두로 공화당 내에서도 비판 목소리가 나왔다. 낸시 펠로시(캘리포니아)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는 트위터에서 "69년 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 내 인종차별을 철폐했다. 오늘 아침 트럼프 대통령은 반 트랜스 편견을 정책으로 전환했다"면서 "트랜스젠더 미국인의 군 복무를 막는 트럼프의 결정은 우리나라를 지키려는 용감한 개인들에 대한 비열한 공격"이라고 비난했다. 또 "LGBTQ(성 소수자) 공동체가 혐오스러운 정치적 어젠다로 인해 평가절하되는 것을 보는 게 역겹다"면서 "트랜스젠더 미국인들은 자랑스럽게, 잠자코, 몇 년간 우리 군대에서 복무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의 애국심을 존중하는 대신 그들의 위엄과 복무의 가치를 공격하기로 했다"고 지적했다. 공화당 중진인 매케인 상원 군사위원장은 "이번 일은 중대한 정책 발표가 왜 트위터를 통해 나오면 안 되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좋은 사례"라면서 "현행 군 의료 및 준비태세 기준만 충족한다면 누구라도 군 복무를 계속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성 정체성과 관계없이 싸우고, 훈련받고, 배치될 능력이 있는 군인이라면 내쫓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피터 킹(공화·아이오와) 하원의원은 "우리는 군대를 갖고 시험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트랜스젠더 지원에 필요한) 그런 별도의 재정부담을 떠안을 필요도 없다"며 이번 조치를 환영했다. 이런 가운데 트랜스젠더 군복무 금지 조치가 최종적으로 확정될 경우 이미 커밍아웃을 한 트랜스젠더 군인에 대해 지금처럼 계속 의료혜택을 지원할지, 또 이들을 강제로 군대에서 퇴출해야 할지 등을 놓고 큰 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고 언론은 전했다.

2017-07-26

이방카 부부, 대통령 '두통거리 가족' 합류

지난해 미국 대선 당일인 11월 8일 일부 주의 출구조사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밀리는 발표가 나오자 캠프에 비상등이 켜졌다. 트럼프에게 직보할 사람이 필요했다. 최측근이 누구인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재러드 쿠슈너가 나섰다. 장인인 도널드 트럼프와 처남들에게 아직 투표가 진행 중인 주의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라고 종용했다. 쿠슈너는 지난해 마이크 펜스를 부통령 후보로 밀어붙여 성사시켰다. 타임지에 따르면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국(FBI) 국장을 해임하라고 조언한 이도 쿠슈너다. 쿠슈너의 아내 이방카 역시 트럼프 대통령이 예뻐하는 딸이다. 지난 13일 위스콘신주의 한 대학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직업훈련 프로그램을 발표했을 때 이방카가 옆에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 딸 이방카도 함께 왔다"며 소개하자 딸은 아버지를 대신해 "이 프로그램은 정부 정책의 핵심"이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주류 언론의 시선에선 예쁜 딸과 듬직한 사위는 트럼프 대통령을 옥죌 짐이 되고 있다. 이들 역시 역대 미국 대통령을 힘들게 했던 '골칫덩어리 가족'의 최신 명단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 대통령 친인척 비리가 있다면 미국엔 대통령의 두통거리 가족이 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남동생 닐 부시는 성매매 추문으로 현직 대통령이던 형을 피곤하게 했다. 2003년 이혼했을 때 부인 샤런 측은 남편이 대만·홍콩을 여행하며 성매매를 했다고 폭로했다. 닐의 변호사는 "잠은 잤지만 돈을 주지는 않았다"는 궁색한 변명을 했다. 이 변호사는 "샤런이 부두교 저주에 쓰려고 남편의 머리카락을 몰래 뽑았다"고 역공했다. 샤런 측은 "남편이 약물을 했는지 확인하려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이복동생이자 가수였던 로저 클린턴은 남북 관계사에 이름을 남겼다. 로저 클린턴은 1996년, 97년 잇따라 한국을 찾아 '미국 대통령 동생의 공연'으로 관심을 모으더니 99년엔 한국 가수들과 함께 평양에 들어가 공연을 했다. 당시 김용순 아태위원장을 만나고 내려와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혀 남북 전령사를 자처했다. 하지만 그의 개인사는 험하다. 그는 85년 코카인 소지로 1년간 복역했던 전과자다. 형 클린턴은 비난을 무릅쓰고 퇴임 직전인 2001년 1월 동생의 코카인 처벌 기록을 말소하는 사면을 해줬다. 하지만 동생은 그해 난폭운전으로 체포돼 2년간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다. 2016년에도 음주운전으로 체포됐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동생 빌리 카터는 '빌리 게이트'라는 국정 농단 의혹으로 의회 조사를 받았다. 1980년 리비아 정부를 위한 대리인으로 법적 등록을 하지 않은 채 로비에 나서 리비아 측으로부터 22만 달러를 받은 게 드러나면서다. 그전엔 자신의 이름을 딴 '빌리 맥주'를 팔며 화제를 뿌렸고, 78년 남성 나체 사진을 싣는 외설 잡지 '플레이걸'과 인터뷰해 "형에게 열등감이 있다"고 했다. 기자들 앞에서 소변을 보는 기행으로도 유명했다. 미국인이 사랑하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소련 해체에 성공했지만 '반항아 딸' 패티 데이비스를 붙잡지 못했다. 10대 시절에 마약 중독으로 고생했던 패티는 아버지가 대통령으로 재임할 때 반핵운동에 참여하며 반대로 갔다. 동성 연애도 지지했다. 2001년엔 아버지 재임 시절 백악관의 비품을 몰래 훔쳤다는 자백성 글을 WP에 보내더니 아버지가 퇴임한 이후인 92년엔 어머니 낸시 레이건이 백악관 시절 상습적으로 약물을 복용했다고 주장하는 자서전을 펴냈다. 이들 대통령 가족은 모두 통제 불능의 행동으로 대통령을 피곤하게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쿠슈너와 이방카 부부는 다르다. 두 사람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신뢰는 막강하다. 과거의 말썽쟁이들과는 달리 두 사람은 각각 쿠슈너 선임고문, 이방카 고문으로 백악관내 공식 직함까지 갖고 있다. 그래서 나중에 더 큰 짐이 될 수 있다. 쿠슈너·이방카 부부는 이미 '공직 장사' 논란을 불렀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4월 쿠슈너·이방카 부부는 공식 직함을 갖고 있어 '이해의 충돌'에 해당되는 자산을 소유해 이익을 취하는 게 금지돼 있다고 지적했다. NYT에 따르면 쿠슈너는 부동산 사업 등 200여 직책에서 물러났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운영하거나 관여해 온 업체에서 재산상 이익을 얻고 있다. 지난달엔 쿠슈너 일가가 운영하는 '쿠슈너 컴패니즈'가 중국에서 투자자를 유치하며 쿠슈너를 사업 홍보에 활용했던 사례가 불거졌다. 이 신문은 쿠슈너 컴패니즈의 부동산 사업 등이 "전세계의 구린 돈을 끌어 모으는 자석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방카는 지난 4월 미.중 정상회담이 열렸던 플로리다 마라라고 휴양지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옆에 앉더니 10여 일 만에 중국 정부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딴 패션 브랜드 48건에 대한 상표권을 승인 받았다. 해외 기업에 까다로운 중국 당국이 대통령의 딸을 의식해 전격 승인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쿠슈너는 러시아 게이트의 몸통 의혹을 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초 뉴욕 트럼프타워에서 세르게이 키슬랴크 주미러시아대사를 만나 비밀 채널을 만들려 했다.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는 쿠슈너가 지난해 대선 기간 중 러시아와 금융 거래나 사업을 하면서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과 연계된 게 있는지 조사 중이다. 채병건 워싱턴 특파원

2017-06-27

트럼프 "미국·쿠바 협상 취소"…국교는 유지, 여행은 제한

54년 만에 성사된 미국-쿠바의 국교정상화 기류가 다시 긴장관계로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16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15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시절 쿠바와 맺은 국교정상화 협상을 취소하고 여행 등 일부 제재를 복원한다고 공식 선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 "지금부터 즉시 지난 행정부가 쿠바와 맺은 끔찍하고 잘못된, 편파적인(terrible and misguided, one-sided) 협상을 취소한다"라고 밝혔다. '편파적(one-sided)'이라는 표현은 트럼프 대통령이 외국과의 협상에서 불공정성을 강조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다. 한국과의 FTA, 멕시코와의 NAFTA, 러시아와의 무기감축협정 등에서 빼놓지 않고 명시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 취소와 제재 강화를 천명했지만 양국 간 국교정상화 협상 전체를 뒤집지는 않았다. 쿠바와의 국교는 유지하되, 미국인의 쿠바 개별 여행을 제한하고, 쿠바 군부 또는 정보당국과 연계된 기업과 미국인의 금융거래를 금지하기로 했다. 미국의 자금이 쿠바 군부에 흘러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워싱턴에 있는 쿠바 대사관과 쿠바 수도 아바나의 미국 대사관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쿠바와 미국 사이 항공편과 크루즈편 운항도 계속된다. 또 트럼프 대통령의 반 이민정책과 맥을 같이 하는 쿠바인의 미국 불법이민 우대 정책인 '젖은 발 마른 발(wet foot, dry foot)' 정책은 폐기 상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오바마 정부는 2014년 12월 쿠바와의 관계복원을 선언한 뒤 이듬해 5월 쿠바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33년 만에 삭제하고 같은 해 7월 외교단절 이후 54년 만에 아바나에 미국 대사관 문을 다시 열었다. 이후 여행 및 금융거래 부문 자유화 우편서비스 재개 쿠바 직항편 운항 등의 조치를 단계적으로 취해왔다.

2017-06-16

트럼프 결국…미-쿠바 국교 정상화도 원점으로

반세기 만에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국교 정상화의 길을 걸어온 미국과 쿠바가 다시 과거의 냉각기로 되돌아가게 생겼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기간 자신의 공약대로 전임자인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맺은 국교 정상화를 위한 조치의 대부분을 폐기할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15일 트럼프 대통령이 오늘(16일)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를 방문하는 자리에서 쿠바 여행 금지는 물론 사실상 쿠바 군사정권의 통제하에 있는 쿠바 기업들과의 거래를 금지하는 내용의 대쿠바 관계 원상복귀 조치를 발표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폴리티코가 입수한 쿠바 관련 8쪽짜리 대통령 지시각서 초안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내 정부의 (쿠바) 정책은 미국의 국가이익과 더불어 쿠바 국민과의 연대에 따라 추진될 것"이라면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자금이 자유롭고 공정한 사회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건조차 갖추는 데 실패한 정권으로 흘러들어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폴리티코는 트럼프 정부의 이 같은 대 쿠바 정책은 미국인 여행객들이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럼주를 마시는 날이 곧 끝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 협정 대부분을 무효로 하되 형식적인 외교 관계 자체는 단절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오바마 정부는 2014년 12월 적대 관계 청산 및 쿠바와의 관계복원을 선언한 뒤 이듬해 5월 쿠바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33년 만에 삭제하고 같은 해 7월 외교단절 이후 54년 만에 아바나에 미국 대사관 문을 다시 열었다. 이후 여행 및 금융거래 부문 자유화 우편서비스 재개 쿠바 직항편 운항 등의 조치를 단계적으로 취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쿠바와의 관계를 원점으로 되돌리려는 것은 양국 정상화 협상이 쿠바에만 유리한 조건으로 진행됐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 시절 쿠바가 향후 관계 복원 협상에서 종교와 정치적 자유 보장 정치범 석방 등 특정 요구조건을 수용하지 않으면 단교까지 검토하겠다고 경고했지만 이에 대해 쿠바는 여전히 난색을 보이고 있다.

2017-06-15

쿠바의 한인들은 항상 '아리랑을 불렀다

*한국인 커뮤니티는 강한 결속력이 있었나? 마사=우리는 많은 한국 어른들과 동질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아버지가 왜, 그리고 어떻게 한국임을 느끼는지 설명하는 걸 잘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가족과 다른 한국인 가족들의 삶은 엘볼로라는 농업 마을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곳의 한국인 마을은 마탄사스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카네나즈나 아바나로 이주했으나, 크리스마스 때나 삼일절이 되면 엘볼로로 돌아와 우리와 함께 축하하고 기념했다. (비비안 루이즈는 마사의 딸이고 토목 기사이다. 비비안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비비안=나는 100% 쿠바 사람이다. 한국은 내가 자라온 환경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러나 부모님이 쿠바에 사는 한국인들에 관한 책을 쓰신 이래로 우리는 한국인들과 친밀하게 교류하고 있다. 지금은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에 대해 배우는 것이 매우 즐겁다. *당신의 학력과 직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 마사=아버지는 웅대한 뜻을 품은 분이었다. 교육을 우선시했고, 특히 여자들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들은 남의 집 하녀가 되거나 바나 카페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자라면서 학교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교원자격증을 따기 위해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무사히 시험에 통과했다. 단 90명만 뽑는 시험에서 1000여 명의 지원자들이 팽팽히 겨루었다. 지원자 중 많은 사람들은 그 전해에도 지원했던 경험자들이었다. 나는 운 좋게 지원한 해에 바로 통과했고, 1956년에 졸업했다. 나는 시골 지역인 마탄사스에 있는 학교에서 일했다. 첫 학교에서 나는 서로 다른 학년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쿠바 혁명 이후 중등교육과정을 공부했기 때문에 중학교에서 스패니시를 가르칠 수 있었다. 그리고 교육학과 심리학도 공부했다. 마탄사스에 교육학 대학이 설립됐을 때, 나는 그곳에서는 마르크스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의 관심사는 철학으로 귀결됐고 마르크스 철학을 연구하는 교수가 되었다. *쿠바 혁명 때 어떠했나 마사=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혁명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문제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에 오늘날의 내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학에도 진학할 수 없었을 것이고 대학교수는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학교에 다니신 적이 없었으나, 어깨너머로 책 읽는 법을 배우셨다. 쿠바가 알파벳 캠페인을 시작할 때, 이미 아홉 명의 자녀를 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쓰기까지 배우기 시작하셨다. 토마스=혁명 전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우리 주변에는 의사도 학교도 제대로 없었다. 자원봉사자들이 이곳에 멋진 학교를 세웠고, 우리는 의사에게 진료도 받을 수 있다. 여전히 쿠바는 식량 부족으로 어려운데 우리는 교육이나 의료의 혜택을 누리고 산다. 비비안=아마 완벽하진 않겠지만 기분은 좋다. 내가 원했던 것들을 거의 끝냈다. 나는 원하는 것을 공부했고, 공부하고 싶은 곳에서 공부를 했다. 혁명 이후 쿠바 교육 시스템은 모든 사람들이 학교에 다니도록 했다. (아델리나 임 하이는 의사이고 프리미티보의 딸이다. 아델리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델리나=의료 제도에 있어서 우리는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보편적인 의료 서비스이고,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의논해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프리미티보=나는 혁명 이전과 이후 모두 좌절감을 느꼈던 사람 중 하나이다. 나는 그때 군대에 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혁명으로 커다란 변화가 올 것이라고 믿었고, 그 변화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오랫동안 믿었다.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29세였다. 혁명은 많은 좋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매일 성공을 위해 25년 동안 열심히 일했지만, 현재의 모든 것들이 반드시 옳다고 믿지는 않는다. 혁명을 지지하기 위해서라도 적어도 95%의 사람들은 매우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혁명을 통해 크게 얻은 것은 없다. 우리는 격렬히 투쟁했지만, 많은 것을 얻으려 할수록 더 깊은 상처를 받았다. 마치 속아 넘어간 기분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쿠바를 떠나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마사= 봉쇄정책으로 기인한 경제적인 이유로 사람들은 쿠바를 떠나고 싶어한다. 우리는 음식이나 옷 등 거의 모든 생필품에 있어 선택이 제한되어 있다. 어린 세대들은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친구와 친척들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쿠바 밖의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좀 더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젊은 세대들은 쿠바를 떠나기를 더 원한다. *현 쿠바 정권에 있는 사람들은 발전에의 의욕이 없다고 들었다. 정말 그러한가 프리미티보=사람들은 대개 삶의 목표를 지니고 산다. 그러한 목표 없이는 생존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들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갖기 위해 노력한다. 자본주의적 사고에서 보자면 일을 할 때 좀 더 높은 직위에 올라 가려는 욕구가 일반적이다.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욕조차 없다면 무엇을 위해 투쟁하겠는가? 마사=이것은 관점의 문제이다. 한국인 부모의 전통과 유산을 물려받은 쿠바 전문직의 사람들을 봐라. 우리 가족에도 두 명의 의사, 건축가, 그리고 세 명의 엔니지어가 있다. 모두 직업적으로 전문가들이 되었다. 스위스에 있을 때 빵집을 간 적이 있었는데, 다양한 상표의 빵과 차들이 있었다. 쿠바에서 그러한 선택의 여지를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다양함이 꼭 필요할까? 물론 완벽하지 않더라도 쿠바는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중이다. 비비안=나는 이곳에서 모든 것이 완벽하다거나 쿠바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고 믿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이곳보다 좋은 곳들이 있고,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장점을 아우른 것들을 공유하며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토마스=나는 세 명의 딸과 다섯 명의 손자들을 뒀기 때문에 굉장한 부자이다. 지난 달 29일은 내 생일이었다. 그날 모든 가족이 함께 모인 것이 정말 행복했 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애석하게 느꼈던 것들이 있다면 마사=개인적으로 나에게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사회문제로 인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우리들 스스로를 돌아볼 충분한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바람이 있다면 마사=내가 바라는 것은, 남편에겐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가 죽을 때까지 내가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라울은 희귀한 뇌질환을 앓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어야 한다. 내 인생의 목표는 죽는 날까지 남편을 잘 돌볼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라울의 병 때문에 힘든 적이 있었나 마사=아니 절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불쌍히 여기지만 나의 도움과 사랑 이 필요한 사람과 함께할 때 나는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우고 강해진다.(라울은 2005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 방문했을 때 아버지 대신 수상했던 일을 이야기해달라. 마사=1996년에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에 간 경험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과도 같다. 내가 살아생전에 한국을 방문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랬기에 한국에 도착했을 때 무척 기뻤다. 아버지가 얼마나 오고 싶어하시던 곳인가! 아버지 때문만 아니라, 귀향을 꿈꿨지만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던 모든 쿠바 한인들이 떠올라 엄청 울었다. 그분들은 '아리랑'을 매일같이 불렀다. 우리 어머니 또한 요리할 때건 청소할 때건 항상 부르던 곡이 바로 아리랑이었다. 부모님이 많이 생각났다. *한국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토마스=우리는 남북한에 대해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다. 부모님이 이곳으로 건너올 당시에는 한국이 분단국가가 아니었다. 우리는 한국인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 자체에 기뻐했고, 아무도 북한, 남한 출신으로 편 가르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그냥 한국인이자 한국이었다. 통일된 한국을 볼 수 있다면 최고로 기쁠 것이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책구입: hotdeal.koreadaily.com

2017-06-14

큰 돈 번다고 철썩같이 믿고 쿠바로 이주

어려서 두 벌의 드레스 가져 하나는 한복, 다른 하나는 교복 오전에 한국학교에 갔기에 2세들 누구나 한국어 유창 유대인들은 2000 년이 넘도록 종교적 박해를 당하고 세계대전 중엔 대량 학살을 겪었다. 또한 그들은 세계 도처에서 추방을 당해 빈민가로 몰리면서 사회의 천덕꾸러기로 세상을 헤매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들이 열망했던 정상인의 삶을 성취해냈다. 지금 쿠바 땅에서 '아리랑'은 잊혀지지 않은 노래로 전해진다. '아리랑'은 20세기 시작과 함께 고국을 떠나 시베리아, 만주, 중국, 미국, 멕시코, 쿠바, 일본, 중앙아시아, 유럽, 남미, 아프리카, 호주 등지로 이주한 한인들에게서 들을 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대략 50만 명의 북한 주민들이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로 탈출했다. 그들은 마치 후기 스탈린 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김정일 치하의 혹독한 북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위험한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 망명자들은 생존을 위해 성노예로 전락했다. 게다가 세상은 이들의 안위에 어떠한 관심도 쏟지 않았다. 이렇게 비참한 사람들의 한은 우리를 눈물짓게 만든다. 뉴욕에 거주하는 한국계 영화감독 김대실은 쿠바를 방문해 통역관 최애영과 함께 그곳에서 노예로 살았던 한인들의 후손인 김마사를 비롯해 한국계 3세들을 만나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쿠바 한인들의 한을 밝혀냈다. *당신과 가족들, 그리고 가족의 배경을 말해달라. 마사= 나는 쿠바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쿠바인이다. 그리고 쿠바에서 저명한 작가인 라울 루이즈와 결혼했다. 그러나 내 근본은 한국에 있다고 믿는다. 나의 한국 이름은 임은희이다. 우리 아버지는 한국 커뮤니티 리더 중 한 분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임천택이고, 스패니시 이름은 엘네스토 림이었다. 아버지는 한국의 정체성과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활동했다. 아버지의 활동은 내게 큰 영향을 미쳤고, 덕분에 나는 스스로 한국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내 자신을 한국인 뿌리를 가지고 있는 쿠바인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이름은 김가히, 스패니시어 이름은 구델리아 김이었다. 어머니가 여덟 살 때 외조부모님과 어머니의 가족들은 멕시코로 이주했다. 어머니는 열네살에 아버지와 결혼을 했고, 바로 첫 아이를 가졌다. 어머니는 총 아홉명의 아이를 낳았고, 바느질과 세탁일을 하면서 항상 아버지를 도왔다. 나는 외할머니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멕시코에서 임종했다면서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외할머니는 교육을 받지 못했고 몹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 교육에 있어 굉장히 엄격했고, 높은 도덕적인 규범을 지키며 살았다. 외조부모님과 어머니의 가족들은 시골 지역에서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어느 날 아이들이 멜론 밭에 가서 하나를 서리해 집으로 가져오니, 외할머니는 매섭게 혼을 냈다. 그래서 아이들은 서리한 멜론을 도로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날 어머니의 집에선 어떤 사람도 밥을 먹지 못했다. 멜론 서리에 대한 벌이었다. (이호영 토머스는 쿠바에서 태어났다. 현재 73세이고 그의 아버지는 1921년에 멕시코를 떠나 쿠바로 왔다. 토머스가 들려주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들어보자.) 토머스= 우리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벌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을 철석 같이 믿고 쿠바로 이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애니깽을 베는 일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 넷과 딸 셋 총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나는 그중 세 번째 자녀다. 보통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을 찾아 여러 마을로 퍼져 살고 있다. 우리 가족은 작은 나무 집에 살았다. 우리 어머니는 멕시코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와 그곳에서 만났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주 고된 시간을 보냈다. 애니깽 베는 작업이 끝났지만 부모님의 수중엔 한 푼도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임금을 좀 더 받을 수 있는 다른 일을 구해야만 했다. 또 가난 때문에 세상을 떠난 가족의 장례식을 위해 돈을 빌려야만 했다. (김루시아는 쿠바에서 태어났고, 그의 부모는 멕시코 출생인 한국인들이다. 훗날 루시아는 쿠바 군대에 입대했다. 루시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루시아=우리가 어렸을 때 조부모님은 어떻게 우리가 멕시코에 오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해주었다. 어머니는 종종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부잣집 출신이었다는 것을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는 기갑부대의 군인이어서 말도 몰았다고 한 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멕시코에서 더 부자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곳에 왔다. 그러나 그들은 멕시코에 도착하마자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자랄 때 기억에 대해 좀 더 들려달라. 마사= 나는 우리 집에서 여섯 째 아이였다. 나에겐 두 벌의 드레스가 있었는 데, 하나는 한국 설날에 입었고, 다른 하나는 교복이었다. 학교 갈 때 신는 신발도 따로 있었다. 가난했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풍족하게 사는지 몰랐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고 형제자매끼리 우애도 좋았다. (김프리미티보는 1930년에 태어난 마사의 큰오빠이다. 프리미티보는 네 명의 딸을 홀로 키웠다. 그의 딸들은 잘 성장해 정부에서 일하거나 의사, 건축가로 일한다. 프리미티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프리미티보=나는 한국 학교를 다녔었는데 그곳에서는 환갑과 같은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도 했다. 우리는 한국의 전통 음식과 언어 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나는 6학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훗날 다시 입학해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쳤다. 나는 지금 퇴직을 했다. 대학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나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다. 또 어느 누구에게나 좋은 인상을 줬다. 열심히 일했기에 백 개가 넘는 소수집단 기업들을 관리하는 직책 중 주정부에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 토머스= 우리 모두 한국어를 할 줄 안다. 아침에는 한국 학교에 가고 오후엔 쿠바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1955~56년까지 두 군데 학교를 오가며 공부했다. 만약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 집들은 불에 타 없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바나, 산티아고, 그리고 다른 지역들로 흩어졌다. 우리가 마을을 떠난 후에, 몇몇은 다른 곳에서 일을 찾았다. 나는 아바나에 있는 식당에서 설거지를 했다. 어머니와 여동생들은 세탁을 해서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어머니는 돈을 모아서 큰형이 작은 가게를 살 때 주었다. 형은 가게를 2년 동안 잘 운영하고 나서 내게 물려주었다. 작은 집에 살았지만 우리의 삶이 점점 나아짐을 느꼈다. 1956년에 나는 로지와 결혼했고,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세 명의 아이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엔지니어가 됐다. 아이들은 모두 쿠바인과 결혼해 다섯 명의 손자, 손녀가 생겼다. *자라오는 동안 특별히 한국적이라고 느꼈던 것이 있었나? 마사= 어머니는 우리에게 바느질과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집에서 우리는 항상 한국 음식을 먹었다. 쿠바에 있는 한국인들은 멕시코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인들은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데, 멕시코인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매운 음식을 먹었다. 그래서 한국계 쿠바 음식은 몹시 맵다. 집에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고추장, 김치를 곁들여 먹었다. 장과 김치는 독에 보관했다. 우리는 생일날이나 삼일절 등 특별한 날이면 한국 전통 음식을 해 먹었다. 한국인 커뮤니티에서 삼일절은 매우 중요한 날이라 반드시 기념했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책구입: hotdeal.koreadaily.com

2017-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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