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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의 2024년 탄신일을 축하하는 날이다. 인류애와 세계평화를 의미하는 축제의 날로서 세상은 그야말로 기쁨과 즐거운 분위기로 한창이다.     이맘때쯤이면 6.25 한국전쟁이 치열했던 1951년 연말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한 일촉즉발 위기의 전투 기억이 새롭다.   전투지역은 강원도 양구 북방 25km에 있는 1090고지다. 이 고지에서 크리스마스인 12월25일에 전투를 했다고 하여 이후 이 고지를 ‘크리스마스 고지’라고 부른다.     따지고 보면 6.25 전쟁에서 한국군과 북한군과의 실제 전투는 불과 30%, 나머지 70%는 대부분 대규모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중공군과의 전투였다.     한국전쟁사에는 처절한 전투를 상징하는 지역 이름들이 꽤 많다. 피의 능선을 비롯해 단장의 능선, 펀치볼, 철의 삼각지, 김일성 고지, 스탈린 고지, 모택동 고지와 함께 ‘크리스마스 고지’등이 있다.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는 크리스마스에 중공군과 한국군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벌어진 전투다.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는 1951년 12월25일부터 12월28일까지 4일에 걸쳐 치러졌다. 240만 중공군 병력중 제 68군 204사단과 국군 보병 7사단이 나흘동안 수차례에 걸쳐 싸워 고지의 주인이 낮과 밤으로 바뀌었다. 치열한 전투로 흰 눈에 뒤덮였던 고지는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었고, 피아간 부상자들의 신음소리 또한 천지를 울렸다.   돌이켜보면 압록강을 넘어 남침한 중공군과의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휴전회담이 한창이던 1951년,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로 설전을 벌이던 양측은 11월27일부로 조건부 잠정 군사분계선을 설정하고 30일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그러나 휴전선 문제로 설전을 벌이던 중공군은 결국 이 약속을 어기고 재공격을 감행했다. 고지를 사이에 두고 밀고 밀리는 공방전의 연속에 피아간의 피해는 그야말로 핏물의 홍수였다.     처절한 혈투 끝에 승리했지만 고지는 순식간에 죽음의 동산으로 변해버렸고 결사 항전한 아군은 22명이 전사 21명이 실종됐다. 우리 군은 중공군 172명을 사살하고 5명의 포로를 생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당시 이 전투에서 국군 7사단의 중대장이던 이순호 대위의 크리스마스 고지 진지 방어 임무 수행담이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적의 공격으로 고지가 함락되면서 다급해진 중대는 수류탄과 총검으로 중공군에 맞섰지만, 적의 공세에 밀려 부대가 포위됐고 삽시간에 적과 아군이 한데 엉키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 대위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끝까지 진지를 탈환할 것을 각오하고 직접 수류탄을 던지며 총검을 휘두르는 백병전 속으로 뛰어 들었다.     중대장 이 대위는 전투 중에 적의 총탄이 왼쪽 팔과 우측 정강이 두 곳을 관통하는 중상을 입으면서도 중대원들과 함께 수류탄 투척과 총검전을 벌이며끝까지 진지를 지켰으나 가슴에 흉탄이 관통하면서 장렬히 전사했다.     양구 두메산골엔 지금도 크리스마스 고지전 당시의 아픔과 슬픔이 남아있다. 크리스마스 고지에 평화롭게 울리는 캐롤송을 듣고 있자면 핏빛 물든 곡성이 들리는 듯 해 가슴이 찡해 온다. 크리스마스에는 전선에 복무중인 대한민국 장병들에게 평안이 넘치는 시간이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올 성탄절에도 ‘하늘엔 영광, 땅 위엔 평화로다’라는 메시지가 가득할테지만 지구 한 편에선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 전쟁하는 그곳에 임하옵소서!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크리스마스 전투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 기억 군사분계선 설정

2024-12-15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긴 잠

나무에 기대어 앉았습니다   낙엽 하나 두울 날립니다   두 발을 뻗고 누웠습니다   그는 등을 내어줍니다   그의 숨결이 등을 통해 들립니다       푸른 하늘이 눈부실 때까지   봄의 연두가 살아날 때까지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아는 만큼만 이야기하고   모르는 것은 그대로 놓아두렵니다   새봄의 새싹을 위해   무거운 겉옷을 벗어야 할 때   힘 빼고 두 손을 모아야 할 때   지울 수 없는 사계절 기억을   나무는 제 몸 속 깊은 곳에   한줄의 그리움으로 각인합니다   잠깐 피었다 지는 아쉬움이 아니라   짧게 말하고 오래 견뎌내는   익숙함을 넘어선 그건 믿음입니다   보지 않고서도 말할 수 있는   찬란한 어느 봄날을 꿈꾸며       하늘을 밀고 가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앙상한 나무는 긴 잠을 청합니다 나무는 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감동과 인내와 사랑을 보여 줍니다. 어떤 나무는 500년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 나무는 우리 선조들의 살아온 시간과 환경 속에서 그 당시의 희로애락을 가감 없이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말없이 한 자리에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 옷을 갈아입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아쉬움의 순간들을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어떤 나무는 심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 명을 다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무는 살아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뿌리를 뻗어 나가야 합니다. 땅속 깊은 곳에서 물을 끌어 올려 가지와 잎에 수분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나무는 힘들어하다가 결국 죽고 맙니다. 수분뿐 아니라 적당한 양의 햇빛도 필요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살아가기 위해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이 에너지를 동물은 섭취한 음식물을 통해 몸속에서 소화함으로 얻습니다. 반면에 식물은 뿌리에서 흡수한 물과 입의 기공에서 흡수된 이산화탄소를 재료로 햇빛을 이용해 양분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을 우리는 광합성작용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렇듯 세상의 모든 생명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합니다.     나무도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일부에게 영양분을 공급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죽게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동물도, 바다에 사는 물고기도 살아남기 위해 제 몸의 일부를 떼어내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질병으로 썩어 가는 다리를 잘라 내기도 하고, 한 쪽 팔을 떼어 내기도 합니다.   언덕을 오르다 쓰러져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보았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버티고 서 있던 그 나무가 쓰러지고만 것입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나무의 속이 휑하니 비어 있었습니다. 아마 나무는 결심한 듯 자신을 쓰러트리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무가 보인 결단이고 마지막 사랑이라 생각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나무뿌리 근처에서 물기를 먹은 새 가지들이 올라오고, 연둣빛 잎사귀들이 무성히 자라고 있었습니다. 쓰러진 나무의 등을 만져 주었습니다. “이제 긴 잠을 자려무나. 윗몸을 쓰러뜨리고 뿌리를 살리기로 한 너를 사랑해. 꿈을 버리지 않은 너를 기억할게. 햇볕 따스한 어느 봄날 우리 만나기로 해. 그때 힘 있게 뻗어 나갈 너를 기다릴게.” 언덕을 내려오면서 낮은 바람에 손 흔드는 작은 잎사귀들을 돌아보며 찬란한 어느 봄날을 꿈꾸어 보았습니다. 확연히 키가 커져 알아볼 수 없을까 봐 돌멩이 하나 놓아두었습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나무뿌리 근처 사계절 기억 연둣빛 잎사귀들

2024-11-12

[삶의 뜨락에서]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2)

지난겨울 모로코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당나귀가 짐을 나르는 좁은 골목 안의 작은 가게들은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로 붐볐다. 멜랑꼴리하고 구슬픈 노랫소리가 온 사방에 울려 퍼졌다. 하루에 다섯번 간격으로 들리는 이 노래는 기도시간을 알려주는 것이다.  장사하던 사람들은 물건 파는 것도 잠시 중단한 채, 자기가 있던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머리가 닿도록 깊은 절을 올렸다. 나는 단순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항상 부러워했다. 남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엎드려 기도하는 그들에게서 가슴 뜨거워지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왔다. “신앙이란 자기 자신의 유한하고 불확실한 지식을 초월하려는 정신의 개방이다.”라고 한 에디트 슈타인의 말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많은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고 한다.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갖기 이전에, 무엇을 갖느냐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여유 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리라. 은퇴하고 난 뒤의 나의 생활도 더 바빠지고 있다. 우리는 삶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간다. 자연주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그의 책 ‘월든’에서 “당신의 인생이 빈곤하더라도 그것을 사랑하라… 인생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그런 곳에 살더라도 마치 궁전에 사는 것처럼 만족한 마음과 유쾌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차분히 인생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성조 아브라함, 야곱, 요셉, 이집트 탈출, 바빌론 유배에서 예루살렘의 귀환, 로마제국의 기독교 탄압,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고 십자가로 이어지는 2000년 전의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요한 8, 24-25)     수녀님의 지도, 그리고 필요한 것을 미리미리 알아 챙겨주는 이해심 많고 에너지 넘치는 길잡이님의 사랑과 함께 12명의 자매님이 하느님 앞에서 가슴 졸이고, 망설이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때로는 수줍어하면서 지냈던 그 많은 시간은 밤하늘의 샛별처럼 빛나는 순간들로 남아있을 것이다.       10월도 중반에 들어선 가을의 끝이다. 온통 붉게 물들어가는 숲속을 걸으며 3년 전 가을, 백주 간 성경 통독을 위해 퀸즈의 베이사이드 성당으로 찾아갔던 그 첫날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너도 떠나고 싶으냐?”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나에게도 들려온다. 주님 제가 당신을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안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이춘희 / 시인삶의 뜨락에서 기억 모두 하느님 자연주의 철학자 가을 백주

2024-11-05

[오픈 업] 차세대도 기억해야 할 독도

벼르고 벼르던 숙제를 드디어 했다. 10월 첫 주에 독도와 울릉도 땅을 밟은 것이다. 특히 독도는 동해 지역 기후가 자비로워야만 방문이 가능하다고 한다. 지난 7월에도 방문 계획을 세웠다 파도가 높고 험해 포기한 바 있다. 그래서 그런지 배가 독도 해변에 정박하고 방문객들이 땅에 첫발을 디딜 때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들'이라는 안내자의 방송이 들렸다.배에서 내리기 직전 모든 승객에게 조그마한 태극기를 나눠줬다. 태극기 휘날리며 독도 섬 길을 걷는 방문객 행렬은 장관이었다.   얄팍한 나의 상식에 독도는 동해안에 있는 작은 섬 이름처럼 고독한 섬 지금도 일본이 자기 영토라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섬 정도였다. 이번 방문을 계기로 독도에 대해 더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독도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부터 궁금했다. '독(獨)'은 '홀로 독'이라는 한자에서 온 것으로 '홀로' '외롭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독도는 혼자 있는 섬이 아니라 91개의 암초 바위가 함께하므로 홀로 있는 섬은 아니다.      2019년  동북아역사재단의 '영토ㆍ해양 연구저널'에 소개된 정연식 서울여대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독도란 우리말 '독섬'을 한자로 표기한 것에서 유래가 됐다. 정 교수는 고지도에 '독도'로 표기된 섬은 세 가지가 있다고 소개했다. 독 모양의 옹도(瓮島)와 육지나 큰 섬에서 떨어져 나간 '동' 섬 한자로는 '독(獨)' 섬이지만 '돌섬'을 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독'이란 말은 돌을 의미하는 알타이어의 방언이라고 한다. 독도는 세 번째 해석이 맞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독도를 섬(island)으로 규정하지만 국제해양법에 따르면 독도는 암초(rock) 즉 바위로 구별된다. 섬이란 사람이 살면서 경제활동을 하는 곳이다. 2019년 12월 31일 기준으로 독도의 거주자 등록 인구는 3555명이지만 실 거주자는  59명뿐이다. 주민이 14명 독도경비대원 약 40명 등대 관리원 3명 울릉군청 직원 2명 등이다.     일본은 세계 2차 대전에서 패전하면서 강제로 점령하고 있던 영토들을 반환해야 했다. 미국도 그들이 관리하던 일본 영토를 일본에 돌려주었지만 일본은 아직도 주변 국가들과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다. 쿠릴열도는 러시아와 센카쿠 섬은 중국 및 타이완과 분쟁 중이다.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독도 영유권을 억지 주장하고 있다. 참고로 독도에 일본인이 거주했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다.     '세종실록 지리지' '성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역사책에는 모두 독도가 우리 영토로 기록되어 있다. 1900년대 이후 기록을 봐도 조선시대 울릉도는 강원도에 속했었고 1914년부터는 경상북도에 포함됐다. 그리고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이 선포한 칙령 41호에는  독도가 울릉도 담당 지역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매년 10월25일을 '독도의 날'로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공주대학 김소영 교수에 의하면 일본은 매년 3월 교과서 검정 시행을 하고 이때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한국이 침해하였다고 가르친다고 한다. 한국의 항의에도 매년 가르치는 셈이다. 이에 반해 한국은 독도 관련 교육이 약화되는 듯하다. 2022년에 개정된 역사 교과서에는 한국사가 두 파트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와 현대사 부문은 '한국사 2'에서 다뤄지는데 독도 관련 내용은 거의 끄트머리에 있고 분량도 많이 줄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학기 중에 교과서를 완전히 마치지 못하거나 선생님이 신경을 쓰지 않으면 배우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독도에 대한 차세대 교육이 미흡할 수도 있겠다는 노파심 때문인지 독도 방문 때 받았던 조그만 태극기가 더욱 소중해 보인다. 류 모니카, M.D./ 종양방사선학 전문의·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오픈 업 차세대도 기억 독도 영유권 독도 해변 모두 독도

2024-10-29

[삶의 뜨락에서]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1)

일주일 내내 숨 가쁘게 지내다 매주 목요일 저녁이면 흩어졌던 마음을 추스르고 컴퓨터 앞에 오롯이 앉는다. 성경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모험이며 성취라고 한다. 나의 초기의 믿음 생활은 두려움이 대부분이었다. 가톨릭 교리의 죄에 대한 심각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하느님을 배반한 인간들을 찾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 이야기로 가득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어둠 속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을 우리가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부르면 부를수록 멀어져만 갔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께 찬양하거나 감사를 드리지 않고 허망한 생각으로 마음이 어두워진 인간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로마 1,22-23)     자신의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챙겨 집을 떠난 방탕한 아들이 집으로 되돌아오는 장면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루카 15,20) 시력이 나쁜 늙은 아버지는 멀리서도 아들을 알아본다.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너무나 아름답고 성스러운 이 광경은 내 안에 들어있는 경직된 그 무엇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작은아들이 되어 2000년 전의 그 날의 그 장소로 되돌아가 본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아버지께서 받아주실까? 큰 실수를 저질렀구나… 등등 수많은 번민과 후회로 아버지 앞에 나아갔다. 그러나 그가 미리 걱정했던 그런 일들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깊은 사랑을 체험한 아들은 엉엉 울었을 것이다. 태초부터 있었고 영원히 계속될 하느님의 사랑이다.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은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세인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렘브란트는 아버지의 고독과 분노와 외로움이 무한한 감사가 되게 하였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헨리 뉴우앤은 그의 저서 ‘탕자의 귀향’에서 말하고 있다.     아무리 흉악한 몹쓸 짓을 했더라고 당신에게로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하느님은 나보다 먼저 나를 사랑해 주신 분이시다. 만일 우리 생에서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떨까? 나의 잘못을 되돌릴 수 없는 삶, 용서받을 수 없는 삶, 고칠 수 없는 삶, 손실을 회복할 수 없는 삶, 쉽게 대답을 할 수 없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완전히 패배한 삶, 돌이킬 수 없는 죄책감과 돌이킬 수 없는 수치심으로 사는 삶일 것이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귀향은 나에게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춘희 / 시인삶의 뜨락에서 기억 사랑 이야기 성경 말씀 세인트 페테르부르크

2024-10-28

[글마당] 왜곡된 기억이 아니길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희미해진 기억을 정확히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나는 사진을 찍듯이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메모한다. 예전처럼 수첩에 쓰는 것이 아니라 아이폰 메모장, 스피커 폰에 대고 중얼중얼 기록해 놓는다. 시간이 지나면 나 편리한 대로 기억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에 처음 왔을 당시는 지금과는 달리 한인 작가가 많지 않았다. 특별한 날엔 돌아가며 집에 초대해서 교분하고 전시회도 함께했다. 나이, 학교, 선후배 따지지 않고 모여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만남이 안개 걷힌 듯 사라졌다. 한분 한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옛 시절을 떠올리며 메모장을 들여다본다.   오랜만에 나는 그 당시 어울렸던 작가들과 AHL 재단에서 그룹전을 하고 있다.   ‘AHL 재단은 2024년 9월 20일부터 10월 26일까지 아카이브 전시회인 Visionary Catalysts: Wolhee Choe and the Empowerment of Korean Identity를 발표하게 되어 기쁩니다. 현수정 큐레이터가 진행하는 이 전시회는 1990년대와 2000년대의 변혁기에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들의 진화하는 문화적 정체성과 예술적 업적을 탐구합니다. 이 전시회는 영문학, 번역, 문화 옹호 분야의 선구자였던 최월희(1937.8.20 ~2013.5.27)의 아카이브에 초점을 맞춥니다. 참여 화가는 최성호, 조숙진, 정은모, 김향안, 김정향, 김미경, 김명희, 김포, 김차섭, 김환기, 김웅, 김원숙, 김영길, 이상남, 이수임, 임충섭, 민병옥, 백남준, 한용진.’   최월희 선생님은 내가 존경했던 분이고 참여하는 북클럽에서 강의하셨다. 2013년,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을 때 나의 메모장에는 ‘삼삼오오 몰려다니던 짙은 감청색 교복 속에 상기된 살구 같은 얼굴은 아니지만, 분을 뽀얗게 바른 친구들은 매달 두 번째 수요일 북클럽이 끝나고 나서도 리버사이드 공원에 앉아 강의를 복습한다.     선생님은 에디스 와튼(Edith Wharton)의 순수시대(The age of innocence) 강의에서 사람이 사는 모습에는 4단계가 있다고 하셨다. ’1단계는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돈에 연연하는 삶, 2단계는 정신적인 내면세계를 추구하는 삶, 3단계는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고 이끌어주는 삶, 4단계는 우리 나이에 딴 동네 취급하는 과학에 관심을 가져야 더 나은 삶을 재창조할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지금까지 몰랐던 세상에 눈을 돌리면서 미묘한 느낌과 기쁨을 느낀다. 또 다른 신세계를 볼 수 있는 다음 달 북클럽을 기다리며 마음이 설렌다. 우리는 훌륭한 스승을 옆에 둔 운 좋은 사람들이다.’라고 메모장에 쓰여 있다.   오프닝에서 누군가가 하는 소리를 들었다. ‘보기 드문 좋은 전시회다.’ 아무래도 오래 작업한 분들의 작품이라서 자연스러운 붓 터치와 색감이 주는 깊은 맛과 오래 숙성된 깊은 향을 내뿜는 따뜻한 전시회가 아닐까?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왜곡 기억 메모장 스피커 수요일 북클럽 최월희 선생님

2024-10-17

미래 기억(Prospective Memory)과 성공!

 추억은 기억으로 남습니다. 기억은 과거입니다. 그런데 ‘미래 기억(Prospective Memory)’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미래의 어느 적절한 시점에 수행할 어떤 일에 대한 기억을 미래 기억(prospective memory)이라 부르며, 미래 기억은 ‘의도의 기억(memory for intentions)’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일반적인 기억을 말하는 ‘과거 기억(retrospective memory)’과 크게 다릅니다. 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한다는 말이 이치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와 가까이 지내는 분은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아침 10시경에 일어납니다. 최근 무릎이 아프다고 합니다. 저는 그 분에게 관절에 부담을 작게 주면서 주변 근육을 키우는 운동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자전거타기와 수영이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수영을 하려면 수영장에 가야하기 때문에 자주 수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분은 자전거를 타기로 결정했습니다. 아침 10시경에 일어나시는 분이 아침 일찍 일어나 자전거를 탑니다. 운동도 하고 공원의 아름다움도 보면서 자전거타기를 즐기십니다. 이러한 현상은 즐거운 미래를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은 힘들고 괴롭지만 무릎의 근육을 키우는 미래를 기억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는 행동을 ‘즐거운 행동’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귀찮아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좋은 행동을 계속 하지 못하는 이유는 싫증이 나기 때문입니다. 싫증은 감정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행동으로 옮기기 힘듭니다. 정말로 바꾸어야 할 것은 행동이 아니라 행동의 원동력이 되는 감정입니다. 감정을 바꾸기만 해도 행동은 아주 간단하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감정에 따라 판단력이나 집중력이 높아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합니다. 즉, ‘하기 싫은 일’을 할 것인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인가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입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즐거운 미래기억을 통해 감정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감정을 디자인하여 최대한 행동력을 고조 시키는 힘, 그것이 바로 미래기억입니다.많은 사람들이 목표를 세우고도 달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괴로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과거의 실패한 경험, 힘들었던 일들은 우리의 일상적 행동에 브레이크를 겁니다. 하지만 미래기억은 ‘어떻게 해야 긍정적인 미래가 펼쳐질지, 내가 어떻게 될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합니다.     미래기억은 ‘목표 달성을 위해 지금 바로 행동하라!’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능동적으로 목표를 실천하는 행동심리학의 방법입니다. 이것을 통해 수동적인 ‘해야 할 일’을 능동적인 ‘너무 하고 싶은 일’로 바꿔 효율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미래기억은 능력이 아니라 습관을 형성하는 것이기에 누구라도 손쉽게 익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쉽게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미래기억을 사용해서 목표를 설정합니다. 긍정적인 미래기억은 사람의 감정을 변화시켜 행동을 유발합니다. 지식이 인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미래 기억은 일종의 처세 방법론으로도 힘을 발휘하는 것을 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12세에 벌써 친구들 앞에서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소감을 흉내 냈다고 합니다. 빌 게이츠는 10대 시절부터 세계의 모든 가정에 컴퓨터가 한 대씩 설치되는 것을 상상했다는 사례도 곧잘 인용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미래 모습을 계속 머릿속에 그리면 무의식적인 능력이 발휘된다는 실제적인 예입니다. 기억은 과거를 보존하는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지난 경험의 재처리를 통해 미래를 유용하게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과거의 기억을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됩니다. 반면에 미래의 기억을 못 하면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의 삶은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추억으로 남아있는 사건들은 실체는 없고 뇌에 이미지(기억)로 저장됩니다. 과거의 기억은 감각을 거친 사건이기에 확실하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미래에 할 일을 상상(기억)하는 일은 오감으로는 일어난 일이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일어난 일입니다.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기억이나 다 이미지입니다만 차이점은 믿음에 있습니다. 미래 기억을 믿는 다면 미래가 창조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래 기억에 대해서 가장 잘 말한 분은 예수님이라 생각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마태복음 8장 13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미래 기억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면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목회칼럼 / 에콰도르 임동섭 선교사memory 미래 미래 기억 다면 미래 과거 기억

2024-09-13

왜 자꾸 이름을 잊어버릴까

 시니어가 되면서 아니, 40대부터도 주위 사람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연예인이나 셀럽의 이름을 기억 못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한글로 된 지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경우다. 예를 들어서 이름이 서동균이라는 지인이 있는데 앞의 두 글자가 '서동'만 기억나는 경우다.아니면 아예 서동만, 서동희, 서동훈 등으로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름을 기억하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누군가의 이름을 잘못 부르는 것은 흔한 일이며 대개 걱정할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어렸을 때 잘못된 이름으로 불렸다. 일상에 바쁜 어머니는 가족 이름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인이 되어도 사람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이것이 그들에게 소홀해서 일까.   결론은 그렇지 않다. 한 연구에서 인터뷰에 응한 대학생 중 절반이 자신에게 친숙한 사람이 잘못된 이름을 불렀다는 응답을 했다.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은 부모와 조부모만이 아니다. 이 연구에서 38%의 학생들은 친숙한 사람을 잘못된 이름으로 불렀으며, 대부분 가족인 경우가 많았다.   누군가를 잘못된 이름으로 부를 때 일반적으로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 등 유사하거나 관련된 사람의 이름을 사용한다. 두뇌는 관련 용어의 네트워크에 정보를 저장하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카테고리에 묶인 이름을 대체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실수로 잘못 이름을 붙인 사람보다 나이가 더 많으며, 화자가 자주 만나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여성은 남성보다 이름을 혼동하는 경우가 약간 더 많으며 자신의 이름도 혼동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연구 참가자의 40% 이상이 이름을 혼동한 사람이 피곤하거나 좌절하거나 화가 났다고 보고했다. 여러 일을 동시에 처리하려고 하면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높아진다. 많은 사람이 이름을 기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연구에 따르면 이름보다 직업을 더 잘 기억한다.   이런 명명 오류는 우리가 저지르는 가장 명백한 기억 실수 중 일부이지만 두뇌는 실제로 항상 한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체한다. 또한 정상적인 노화 과정의 일부로 사람들은 원치 않는 단어를 억누르던 능력을 어느 정도 잃는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더 많은 말실수를 하게 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나 엉뚱한 단어를 쓰는 것은 나이와 상관이 있기도 하지만 없기도(?) 하다. 아무리 친했어도 막상 얼굴은 떠오르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것은 결국 자연스러운 것이다.  장병희 기자이름 가족 이름 기억 실수 연구 참가자

2024-08-11

"간편한 유화 그리기, 직접 체험하세요" 재 몬태나씨의 '밥 로스' 미술 강의 화제

한·영어 사용...26일 오로라 풍경화 수업   "어때요, 참 쉽죠?"   1983년부터 11년간 공영방송 PBS에서 방영된 TV 프로그램 '페인팅의 즐거움'을 통해 밥 로스가 슥슥 몇 번의 붓질로 유화를 쉽게 완성하던 장면을 기억하는 시청자들이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EBS가 1994년부터 '그림을 그립시다'로 수입해 틀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풍경화 그리기에 자신감을 북돋아주는 밥 로스 정신을 이은 한인이 있다. 6년 전 처음 붓을 잡은 뒤 밥 로스 미술지도사 자격증을 따고 스와니 아트센터, 아트포라이프(뷰포드) 등에서 지난해부터 시민 대상 미술 교육을 펼치고 있는 재 몬태나씨다. 그는 "밑그림 없이 유화를 마르기 전에 덧칠해 나가는 ‘웻 온 웻'(wet-on-wet) 기법으로 3시간 안에 그림을 완성하는 게 밥 로스 미술의 특징"이라며 "90퍼센트 이상의 수강생이 미술 초보이지만, 나 역시 미술 전공자가 아니기에 그들의 어려움에 공감하며 쉽게 가르치고 있다"고 밝혔다.   2004년 조지아로 이주한 몬태나씨가 미술 강사의 삶을 선택한 계기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실직 후 유튜브로 처음 접한 밥 로스 영상이었다. 그는 "붓을 미끄러뜨리고, 마찰시켜 30분만에 빠르게 작품을 완성하는 그의 간편한 미술관에 매료됐다"며 "정식으로 배워보고 싶어 밥로스 교육협회에 등록해 일주일 동안 매일 꼬박 8시간을 공부했다"고 전했다. 20일 스와니 시청 인근 아트센터에서 열린 그의 수업에는 8명의 주민이 참석했다. 부부나 친구 여러명이 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혼자 와 그림그리기에 열중하는 진지한 예술가들이다. 툭툭 물감을 찍어내는 강사의 빠른 진행을 곧잘 따라하다가도 여기저기서 "어떻게 한거야?"라는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어려운 부분은 애교를 부리며 선생님에게 맡겨버리는 15세 여학생이 있는가 하면 지미 버넷 스와니 시장은 "지미, 제발 그만하세요(Don't go crazy)"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붓질을 선보였다. 그는 몬태나씨가 처음 수업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10회 이상 수강한 단골이다.   8090세대가 노스탤지어를 느끼며 특별한 기념일을 맞아 이곳을 찾기도 하고 소중한 가족을 위해 유화를 직접 그려 선물하려는 이들도 있다. "네 자녀를 기르는 아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하자 3회 분의 강의료를 내준 남편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몬태나씨는 전했다. 다만 매번 강의 요강에 "한국어와 영어 이중언어로 강의를 진행한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아직 수업을 등록한 한인은 없었다고.   한 달 두 번꼴로 열리는 그의 밥 로스 강의는 비정기적이다. 본인 소유 스튜디오가 아닌 지역 아트센터를 빌려 사용하기 때문이다. 오는 26일 오로라 풍경화 그리기가 예정돼 있으며 8~9월 각 두 번의 강의가 열린다. 자세한 내용과 예약은 스와니 아트센터 홈페이지(suwaneeartscenter.org/classes)를 참고하면 된다. 그는 "4명 이상 교회, 또는 가족 모임의 경우 방문 강의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장채원 기자 [email protected]로스 기억 밥로스 미술지도사자격증 밥로스 교육협회 로스 강의

2024-07-23

‘인생 맛의 기억’ 출간…작가 미국서 200인 인터뷰

‘인생 맛의 기억(미다스북스·사진)’은 프랑스에서 삼성 SDS 1호 지역 전문가로 활동하고, 90여 개국을 여행한 조광제 작가가 미국에서 배경, 인종, 환경, 직업, 나이가 다른 200명의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됐다.     작가는 “인생의 마지막 식사로 무엇을 먹겠는가”라는 질문에 따른 답변을 정리해 56개 음식을 선정한 후, 간단한 코멘트를 엮어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의 매력은 질문과 답변이 미국에서 진행됐다는 것이다. 작가는 “200여 개의 민족이 모여 사는 미국은 세계 각국의 음식 문화를 접하는데 최고의 장소”라며 “이 책을 통해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유럽, 라틴 등 흥미로운 음식의 이야기를 누릴 수 있다”고 밝혔다.     조광제 작가는 아주대학교에서 전자계산학 학사, 경영대학원 MBA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 삼성물산 경영정보팀에 입사, 1999년 프랑스 지역 전문가, 1989~200년 삼성SDS 미국 주재원을 역임했다.     2003년 한글과컴퓨터 영업총괄 상무이사, 비영리 단체 리눅스파운데이션 한국 대표로 선임됐다.     저서로 ‘행복한 목요일’, ‘리눅스와 오픈소스의 비즈니스와 경제학’이 있다. 이은영 기자인생 기억 인터뷰 인생 출간 인생 기억 출간

2024-07-14

[창간기념 무료 가족사진] 남편이 지금 이순간 기억하길…

부부는 서로 닮는다는 말이 있다. 아케디아 거주 이준호(81) 할아버지와 이명자(75) 할머니 부부는 반세기 인생을 함께하며 눈매와 표정까지 닮았다. 남편 이준호 할아버지의 오른쪽 팔을 지긋이 잡은 이명자 할머니의 눈빛에는 여러 감정이 담겼다.   이씨 노부부는 1980년 7월 4일, 독립기념일 불꽃놀이가 한창인 날 어린 외아들을 데리고 미국에 도착했다. 40년 넘는 이민생활의 애환을 이 할머니는 고스란히 기억한다. 하지만 백발이 된 할아버지는 말이 없다.   이명자 할머니는 “남편은 고려대를 졸업해 서울 휘문고에서 10년 동안 교사를 한 책벌레였다”며 “그런 남편이 아들 결혼식 날 뇌졸중이 왔다. 그러다 2년 전부터 치매로 고생 중인데 더 늦기 전에 가족사진을 남기고 싶어 중앙일보 스튜디오 촬영장을 찾았다”고 말했다.   이번 가족사진은 이씨 노부부 가족에게 참 특별하다. 아들이 고등학생 때 찍은 가족사진은 3명뿐이었지만, 지금은 며느리와 손주 3명까지 나름 대가족이 됐다.   이 할머니는 “남편이 아프다…살아있을 때 추억을 남기고 싶다”며 “아들과 며느리, 손자녀와 처음으로 다같이 가족사진을 남긴다. 아들 내외에게 ‘다른 집 갈 때마다 가족사진이 부럽다’고 말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얻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LA 이민와서 식당 서빙부터 바느질 공장, 액세서리 장사, 티셔츠 가게 운영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녀는 삶의 굴곡마다 곁을 지켜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삼남매의 아버지가 된 아들 쟈니 이(48)씨는 활짝 웃었다. 아들 이씨는 “우리 가족의 첫 완전체 가족사진”이라며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한 추억과 기억을 오랫동안 간직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며느리 이씨는 가족사진을 위해 희망을 상징하는 하늘색 의상을 준비했다. 가족의 안녕과 시아버지의 쾌유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중앙일보 가족사진 촬영행사는 남가주 사진작가협회(회장 김상동)가 촬영과 보정을 맡고, 캘코보험(대표 진철희)이 후원했다. 관련기사 [창간기념 무료 가족사진] “중앙일보서 5년마다 추억 남겨요” 김형재 기자 [email protected]창간기념 무료 가족사진 남편 기억 할아버지 할머니 완전체 가족사진 남편 이준호

2024-07-02

[사진의 기억] 모내기

지난주에 서울로 기차를 타고 오면서 차창 밖으로 모내기를 앞둔 논마다 물이 찰랑거리는 풍경을 보았다. 예전에도 봄과 여름이 맞물리는 이 무렵이면 농촌에서는 논에 물을 대고 모를 심느라 분주했었다. 바지를 둘둘 말아 무릎 위로 걷어 올리고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모를 심는데 유난히 거머리가 많은 논에선 발끝부터 무릎까지 더 빈틈없이 중무장하곤 했다. 한번 살갗에 달라붙으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맹렬하게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에 물리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오죽하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다’는 표현이 생겼을까.   그러나 모내기 철에 찰거머리보다 더 무서운 게 가뭄이다. 긴 가뭄으로 논이 쩍쩍 갈라지는 바람에 모를 심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이웃 간에 서로 물꼬를 대려는 싸움이 빈번했다. 1년 농사의 성패를 가름하는 일이라서 사이좋던 이웃이라도 얼굴 붉히며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다행히 간밤에 비가 흡족하게 쏟아지면 다음 날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풀어져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농부의 마음을 농부가 알기에 서로 어제 일을 탓하지 않았다. 지금은 기계가 대신해주지만 70년대 농사는 거의 다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모내기가 한창일 때는 교실에 빈자리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고사리손이라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모를 심는 동안 아이들은 잔심부름을 맡았다. 논에 새참을 내가는 일이나 막걸리 심부름은 아이들 몫이었다. 물론 아이들도 싫지 않았다. 슬슬 날씨가 더워지는 참에 교실에 앉아 졸음을 참는 것보다 훨씬 즐거웠고 더구나 새참을 얻어먹는 재미에 신이 나서 논두렁을 뛰어다녔다.   이제 막 점심을 배불리 먹고 논에 들어갈 시간, 마음이 다급한 농부의 아내가 먼저 들어가 모를 배분하는 중이고 논두렁에 선 남편은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피우며 오늘 해치울 일을 가늠해보고 있다. 진흙투성이인 농부의 종아리 사이로 어느새 여름이 밀려오고 있다. 김녕만 / 사진가사진의 기억 모내기 진흙투성이인 농부 농부가 알기 무릎 위로

2024-06-02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을 기억하는 날

5월 가정의 달 두 번째 일요일은 ‘마더스데이’, 즉 엄마의 날이다.     한인들 입장에서는 미국에 이민 오기 전에 ‘어버이의 날’을 기념하다가 미국 생활 2~3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마더스데이를 달력에 마크하게 된다. 일단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그렇게 배우고, 업계의 마케팅이 그렇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축하를 하고 받기 전에 유래를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마더스데이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마더스데이(Mother’s Day)'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 신들의 어머니인 레아에게 바쳐진 ’봄의 축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더스데이는 20세기 초 필라델피아의 애나 자비스라는 여성의 노력으로 국가적 기념일이 됐다고 하는데, 가사 노동과 경제활동도 함께 해야 하는 어머니들을 위한 날이다. 애나는 자신의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에서 매년 5월 둘째 주 일요일을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기리는 날로 삼고 있는 것에 착안해 '마더스데이' 제정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다고 한다.     이후 1911년부터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 5월 둘째 일요일을 마더스 데이로 기념하기 시작했고, 1914년부터 지금의 마더스데이가 미국인들에게 중요한 날로 자리 잡았다.     연방 하원은 마더스데이를 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상원에서는 “마더스 데이를 만들면 아버지의 날, 장모의 날, 장인의 날, 삼촌의 날 등도 만들어야 할 게 아니냐”는 이유로 부결되었다.     자비스는 사회 각계의 저명인사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써 보내는 여론 투쟁을 전개했으며, 그녀의 끊임없는 노력 끝에 결국 상원도 마더스 데이를 통과시키게 된다. 1980년대 중반 미국에서는 어머니의 날에 팔리는 꽃다발만 1000만 개, 축하카드가 1억5000만장에 이르렀고, 어머니의 날은 미국 가정의 3분의 1이 그 날 외식을 하는 바람에 1년 중 레스토랑에 가장 손님이 많이 몰리는 날이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작 마더스데이를 만든 자비스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 외롭고 가난하게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서는 1955년 8월 30일 국무회의에서 5월 8일이 '어머니날'로 제정되었다. 한국에서는 전쟁으로 고아와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여성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에 아이들을 기르고 먹여 살리는 일을 여성들이 도맡아야 했고 한국의 '어머니날'은 그런 어머니의 책임과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었다. 추후 1973년에 대한민국의 어머니 날은 '어버이날'로 제정되었다.   한국의 경우 매년 5월 8일을 어버이날로 기념하고, 영국은 사순절의 네 번째 일요일을 '어머니의 일요일(Mothering Sunday)'로 지내는 등 나라마다 날짜는 조금씩 다르지만 자녀와 가족들에게 큰 사랑을 주는 어머니에게 감사를 전하는 뜻은 같다.   그렇다면 마음의 표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전통적으로 마더스데이에 엄마에게 가장 많이 하는 선물은 바로 꽃. 마더스데이의 공식적인 꽃은 하얀색 카네이션이다. 하지만 요즘은 하얀색 꽃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할 때 쓰는 꽃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대신 분홍색 카네이션은 변하지 않는 엄마의 사랑과 엄마에 대한 감사를 나타낸다고 하며 빨간 카네이션은 엄마에 대한 존경을 나타낼 때 쓰인다.   마더스 데이는 세금 보고 직후에 이뤄지는 가장 큰 쇼핑 시기로 꼽힌다. 올해처럼 경기가 좋지 않은 경우 업계는 각종 할인과 혜택을 얹어 매출을 늘리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있다. 대부분의 가정이 100~200달러를 선물에 소비하고 있으며 외식 업계도 반짝 호황을 누리는 시기다.        ━   자녀·손주들의 깜짝 공연도 큰 선물       마데스데이 특별한 가족모임 행복 담긴 사진·동영상 보기     어머니 마다 연령대가 다르고 취향과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딱 잘라 한가지로 만들기 어렵다. 선물과 외식을 즐기기도 하고 대가족이 집에 모여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선물을 개봉하면서 박수를 치기도 하고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데 여성 심리와 상담을 전문가들은 어머니에게 자존감과 정신적 위로를 보내는 것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것이라고 권한다.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몇가지 아이디어를 정리한다.     ▶사진이나 동영상 함께 보며 추억 찾기   엄마,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시기 별로 골라서 슬라이드쇼를 만들어보자. 가능하면 사진에 날짜와 장소를 적어서 함께 기억하면 좋다. 어떤 가족들은 사진을 TV로 보며 사진 찍은 시기와 장소를 맞추는 게임을 해서 선물을 주는 시간을 보낸다. 추억이 담겨있다보니 함께 깔깔거리며 웃을 수 있고, 중요한 가정사가 담겨있다면 묵직한 느낌도 줄 수 있다. 어머니들은 갱년기가 지나거나 노년에 접어들면 허전하기도 하고 지난 시간이 후회스러운 느낌도 들기 마련이다. 이런 허전함에 어머니가 일궈온 가족의 모습을 사진으로 다시 확인하는 것은 적잖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 슬라이드 쇼가 마무리 될 때 감사인사와 사랑을 듬뿍담은 선물을 선사하면 좋은     ▶추억의 외식 장소 찾아가기   크게 번거롭지 않다면 부모님이 데이트를 한 곳이나 결혼식 장소, 자녀들과 첫 외식을 한 식당을 찾아가보는 것도 좋다. 특히 연세가 많아 옛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한 어머니(또는 할머니)에게는 예전 젊은 시간에 머물러 있는 장소들을 찾아가 보면 좋다. 오전 또는 오후 1~2시간 거리의 장소(식당, 몰, 교회, 경기장, 축제장 등)를 방문하고, 사진도 찍고, 잠시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걸으면서 예전에 느꼈던 감정, 감동을 되살린다면 어머니의 기억력 회복은 물론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엔돌핀이 솟는데도 도움이 된다.     ▶자녀 또는 손주들이 깜짝 공연   잘자란 자녀들과 손주들을 보는 것은 어머니들의 가장 큰 기쁨이자 자랑이다. 이번 마더스데이에는 간단한 공연을 준비해보면 어떨까. 아이들의 학예회 수준이어도 상관없다. 온 가족이 어머니를 위해 3~4분짜리 노래, 춤, 분장쇼를 할 수 있다면 SNS에서 가장 많은 라이크(like)가 나오지 않을까. 가능하면 많은 사람이 참가하면 좋고 어머니의 추억이 담겨있는 노래이거나 춤이면 좋다. 다만 가족들이 사전에 모여 연습할 시간이 좀 필요하다는 점은 감안해야겠다. 어머니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도 추억이 될 것이다.   최인성 기자어머니 기억 마더스 데이 엄마 가족 기억력 회복

2024-04-30

[이 아침에] 시 같은 말

“아, 광합성 충전하시는군요.”   회사 점심 자투리 시간에, 볕 좋은 현관 앞 난간에 기대 서 있는 나를 보고 젊은 직원들이 말했다. 볕 쬐기를 우리는 일광욕이라 하는데 요즈음은 광합성 충전이라고 말하나 보다.   요즘 젊은이들의 말은 정말 기지가 넘친다. 또 준말이 넘쳐나 도통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얼죽아’는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고, ‘생선’은 생일 선물이라니 적응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준말은 유행을 타는 한때의 슬랭도 아닌 것 같다. SNS 시대의 흐름 따라 말의 표현도 디지털화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겠거니 관망하려 하지만 아무래도 말의 의미가 훼손된 것 같아 마뜩잖다. 준말이 표현의 자유라 해도, 자유에는 책임 의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고리타분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더 빠르고 편리한 것을 추구하는 게 당연한 흐름이라 해도, 우리 삶의 기본인 말의 품위는 지켜져야 한다. 이런 생각은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꼰대의 외곬 고집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별수 없다. 준말이 일상화된 신세대 화법을 따라 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고수할밖에.   ‘고전(classic)이 왜 고전이랴? 구식과는 차별되는 것으로 지켜내고 싶은, 언제까지나 좋은 것이기 때문 아니겠는가?’ 라는 글이 떠오르며 준말의 대세가 비단 나 혼자만의 우려가 아닌듯하여 그나마 위안을 받는다.     말은 곧 인격의 표현이자 그 시대 사회 풍조를 나타낸다. 우리 문화는 가까운 사이라도 적절한 예의를 갖춰 말하는 예절을 중시했다. 말의 절도가 미치는 품격이 삶의 품격으로 이어진다는 것의 가르침이다.    막내가 청소년기 때의 일이다. 아들에게 별스럽지 않은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돌아온 대답이 불손한 듯해 당황했던 적이 있다. 어떻게 엄마에게 그런 언사를 쓸 수 있느냐며 다그쳤다. 그런데 엄마가 말하는 것과 똑같이 말했다는 아들의 대답은 참담한 충격이 되어 엄마로서 나의 언사를 돌아보게 했다. 그날을 계기로 아들에게 하는 말은 외마디 외침조차 다듬으려 노력했다.   이제 어엿한 직장인이 된 아들이 얼마 전 “엄마가 하는 말은 모두 시 같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뜻밖의 예찬에 내가 제대로 들었나 싶을 정도였다. 너무 감동을 주는 칭찬이었다. 엄마로서의 인생 전반에 대한 귀한 찬사가 아니겠는가. 엄마 말을 시로 듣는 우리 아들이야말로 시의 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마침 석양이 장관을 이룬 하늘을 보며 아들은 “노을 낀 하늘을 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오래전 아들이 갑자기 한국말을 가르쳐 달라고 해서, 엉겁결에 당장 시야에 들어온 하늘을 가리켜 ‘노을 낀 하늘’이라 가르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이런 형용구의 서정적 느낌이 한국말 초보인 아들에게 제대로 전달 될까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아들은 오래전 배운 어구를 이렇듯 멋지게 적용한 것이다. 아마도 그 말과 함께 그때의 풍경과 정취까지 아들 기억에 아름답게 간직되었나 보다.     한마디 고운 말이 심겨져 고운 말의 꽃을 피운다. 보라!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 모든 것은, 아름다운 말을 품고 있다. 아름답게 꽃피우는 일은 우리 몫이다. 이영신 / 수필가이 아침에 오래전 아들 아들 기억 우리 아들

2024-04-18

[문예 마당] 기억 속에 오래 남을 여행

  몇 년 전 9월 말 나는 세 가지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9월 마지막 주와 첫 주는, 문인회 회원들과 문인회 회원 몇 명의 출판기념회가 대전에서 있을 예정이었고 그 후에는 문학기행 계획이 잡혀 있었다. 세 번째 주에는 시카고간호협회 회원들과 베트남과 캄보디아 여행이 잡혀 있었으며, 10월 마지막 주에는 재외간호사 대회에 참석해야 하는 계획이 짜여 있었다.     그런데 문인회 회원들과 함께하는 동안 나에게 사고가 났다. 한국 나간 지 닷새 되던 날 춘천까지 가서 호텔계단에서 넘어져 오른팔이 부러지는 일이 생겼다. 바로 병원에 갔으나 X-Ray를 찍어 보더니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길로 서울에 있는 조카에게 전화해 조카 아들이 그 밤에 춘천까지 와서 나를 픽업해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야 했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서 문인회 모든 계획에서 도중하차를 해야 했다.     이 탓에 조카 집에서 거의 한 달을 잘 쉬고 10월 마지막 주 제외 한인 간호사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시작 전날, 우리 일행이 묶기로 되어 있는 서울의 한 호텔에서 일행들을 만났다. 내 모습은 말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질 않은가. 나는 그래도 운 좋게 좋은 후배를 룸메이트로 만나 안심이 됐다. 다음 날 오전 중 대회에 참석한 모든 이들의 등록하는 순서가 있었고, 인사동 뒷골목에 있는 큰 한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눈에 익은 거리, 인사동 맛집 ‘여자만’이란 남도 한정식집이 있고, 그 부근에 천상병 시인의 부인 문승옥 여사가 운영하는 곳도 있었다.     그분이 별세 후 지금은 조카가 운영하는 ‘귀천’이란 전통 찻집이 있질 않은가. 이 찻집은 한국의 숱한 시인 묵객들의 명소라고 들었다. 그날 밤 우리는 그 찻집에 들러 천상병 시인을 기리며 차 한 잔씩을 마시면서 이야기꽃을 피었었다. ‘귀천’의 내용은 이렇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모두 국립 현대 미술관을 관람하고는 창경궁을 탐방하는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창경궁 궁궐 전각들을 두루 다니며 둘러보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창경원이라 불렀고 초등학교 때 소풍을 왔던 생각이 난다. 봄이면 이곳은 벚꽃이 유난히 아름답게 만발하여 많은 사람이 벚꽃놀이라는 말과 함께 구경을 왔던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닌가. 세월의 진한 아쉬움과 감동을 하고 돌아섰다.     마지막 날에는 DMZ 및 임진각 견학이 있었다. 이곳들을 가기 위해 북쪽으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고속도로변에 보이는 산들의 가을 풍경은 너무나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옛날과 다른 모습은 시골에도 아파트들이 들어서서 서울 변두리 같은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DMZ에 도착하여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다본 이북 역시 조용한 가을이었다.     내가 대학 다닐 때까지도 작은 할아버지 댁이 임진강변에서 친구와 함께 와 끝이 보이지 않는 참외밭 원두막에서 놀던 때가 생각나는데 몇십 년 만에 오니 모든 것이 많이 달라져 보였고 삭막하기만 했다. 임진강 가까이는 철조망이 있어 들어갈 수도 없었다. 아직도 분단된 우리나라는 언제 다시 저 임진강을 자유롭게 건너가 우리의 형제들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풍성하게 준비된 저녁 식사와 각 지역에서 준비해 온 장기자랑 등으로 즐겁게 지냈다. 11월 초인데도 날씨도 푸근했고 청명한 가을 날씨가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우리 일행을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멀리 해외에 나가 살면서도 그리운 내 조국을 생각하며 하루빨리 통일되고, 우리 형제들이 서로 대화하며 옛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허정자 / 수필가문예 마당 기억 여행 문인회 회원들 캄보디아 여행 대학병원 응급실

2024-04-04

[사진의 기억] 바다 건너 찾아오는 봄

바람이 분다. 수백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고목은 남쪽 바다를 건너오며 한결 순해진 바람 소리를 기억한다. 때가 이르렀음을 아는 나무는 조용히 제 속의 것들을 흔들어 깨운다. 말랑말랑해진 흙 속으로 힘차게 뿌리를 뻗어 서서히 물을 빨아올린다. 겨우내 참았던 오랜 목마름을 풀어줄 수액이 수관을 따라 실개천으로 흐른다. 서너 아름이 넘는 굵은 기둥을 지나 줄기를 타고 가지 끝에 물이 오르면 비로소 딱딱한 표피를 뚫고 부드럽고 여린 새잎들이 다투어 나올 것이다. 그러면 나무는 몸속에 사계절을 지나왔음을 알리는 나이테 하나를 완성한다.   예전에는 마을마다 동네 어귀에 마을의 수문장처럼 동구나무가 버티고 있었다. 나무의 나이가 몇 살인가에 따라 그 마을의 역사도 가늠되었으므로 수령 수백 년의 멋진 동구나무는 마을의 자부심이었다. 나무를 타고 놀던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고 나무와 함께 나이를 먹어갔다. 또한 집에서 멀리 떠났다가 오래간만에 귀향하는 사람들을 가장 먼저 맞이해주는 것도 동구나무였다. 타향에서 거칠게 혹은 서럽게 살아왔다면 나무를 보며 슬그머니 위로받고, 자랑스럽게 잘 살아왔다면 당당하게 어깨를 펼 것이다. 이때 나무 아래 평상에 모여있던 노인들은 “누구네 집 자식이구만!” 묵은 기억을 끄집어내고, 숨바꼭질하며 놀던 동네 개구쟁이 중에는 “삼촌~”하고 뛰어오는 아이도 있을지 모른다. 고향의 문지방을 넘어선 것이다.   전남 강진에서 허리 굽은 노인처럼 ㄷ자로 구부러져 자라는 웅장한 고목을 보았다. 남쪽 바다를 향해 몸을 한껏 내민 나뭇가지는 반갑게 봄을 부르는 손짓 같았다. 그 손끝마다 새순이 돋아나면 겨울과 막 이별한 잿빛 고목은 점차 연둣빛으로 물들고 늦가을 이후 성장을 멈췄던 나무는 싱싱한 계절을 다시 펼칠 것이다. 또한 나무처럼 나이테를 하나 더 그린 사람들도 새봄을 맞이하여 농부는 밭으로, 어부는 바다로, 거침없이 삶의 한가운데로 나아갈 것이다. 어느새 봄이다. 김녕만 / 사진가사진의 기억 바다 남쪽 바다 바다 건너 나이테 하나

2024-03-07

[사진의 기억] ‘어린이’라고 쓰고 ‘희망’이라고 읽는다

그 많던 아이들이 다 어디 갔을까. 그 시절엔 동네에서도 학교에서도 어딜 가나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새들의 합창 같았다. 엄마가 밥 먹으라고 소리쳐 부를 때까지 해가 저물도록 뛰어노는 아이들로 골목은 항상 시끌벅적했다. 더구나 겨울방학이다! 방학식을 마치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음박질치는 이 아이들의 해방된 장난기가 곧 온 동네를 활기차게 휘저을 것이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캠페인이 시작되기 전까지 한 가정에 아이들 네댓 명은 보통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사오십 년, 혼자 자란 요즘 아이들에게 언니, 오빠, 형, 누나라는 다정한 호칭은 무용해졌다. 아울러 과꽃이 피면 유난히 과꽃을 좋아하던 시집간 누나를 그리워하고, 뜸북새 울면 서울 가서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던 오빠를 간절하게 기다린다는 ‘과꽃’이나 ‘오빠 생각’ 같은 동요는 아주 오래전의 정서가 되었다. “둘만 낳자”가 “하나만”으로 바뀌고 농담처럼 “한 집 걸러 하나씩”이 회자 되더니 급기야 학교도 동네 골목도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저출산의 서슬에 화들짝 놀라 “동생 낳아주기” 캠페인을 벌이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엄청난 반전이다.   사실 아이들이 태어나 무럭무럭 자라서 비록 고난 속에서라도 꿈을 이루려고 애쓰는 자체가 자연스러운 삶인데, 우리가 편의적인 잣대로 너무 성급하게 다음 세대를 재단해버린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불과 한 세대 만에 완전히 뒤집힌 정책이 과거 우리의 결정이 얼마나 앞을 내다보지 못했는가를 말해준다. 어린이가 희망인 이유는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사라지면 학교도 사라지고 교사도 사라지고 꿈이 사라진다. 한겨울 추위에 가방도 없이 책보를 끼고 다녀도 기죽지 않고 씩씩하던 아이들. 지금 사진 속 이 아이들은 모두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그때 길 위에서 만난 거침없고 해맑던 아이들을 소환해본다. 김녕만 / 사진가사진의 기억 어린이 희망 동네 골목 오빠 생각 언니 오빠

2024-01-28

치매가 두려운 당신이 기억해야 할 '이것'

치매는 암보다 무서운 병으로 불리며,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에게 큰 고통과 아픔을 주는 병이다.   우리나라는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치매 환자 또한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치매 환자는 2023년 기준 65세 노인인구의 10.3%로 추계되고 있다. 65세 노인 10명 중 1명은 치매 환자라는 이야기다.   치매는 병의 근간을 없애는 약이 아직 개발되지 않아 중증화를 막는 것이 유일한 치료다. 이 때문에 평소 생활습관을 개선해 치매를 예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뇌의 기능을 활성화하고, 나아가 뇌세포를 재생하여 치매와 같은 퇴행성 뇌질환의 치료 효과를 내는 천연 물질 '프테로신(Pterosin)'은 한국인이 즐겨 먹는 고사리에 들어있다. 하지만 프테로신을 추출하기 위해 고사리의 독성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유효성분이 파괴되는 것이 문제다.   이처럼 까다로운 프테로신의 추출 방법을 대한민국의 의학자가 찾아냈다. '지에이치팜(대표 박길홍, 고려대 의대 교수)'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과의 산학공동연구를 통해 프테로신을 주성분으로 한 액상차 '미라클 실버(70ml X 30포)'와 '미라클 모닝(70ml X 30포)'을 출시했다. 두 제품은 한국에서 치매 개선 효능이 입소문을 타면서 3년 만에 매출이 100배나 성장했다.   지에이치팜이 개발한 미라클 실버와 미라클 모닝의 주요 성분은 지리산에 서식하는 고사리 뿌리줄기 추출물로, 프테로신 A, B, C, D, N이 풍부하게 함유돼 있다. 지에이치팜은 프테로신을 고사리 종근에서 안전하게 추출하는 원천기술을 개발해 한국은 물론 미국, 유럽, 중국 등에서 특허 등록과 출원에 성공했다.   지에이치팜 대표이자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신약개발을 연구해온 박길홍 교수는 "프테로신은 치매를 유발하며 신경세포를 파괴하는 β 아밀로이드 생성 효소 및 인지기능을 저하하는 아세틸콜린 분해 효소 2종의 활성을 모두 동시에 억제해 모든 치매에 영향을 미친다"라며 "뇌의 인지기능 관련 단백질을 생산하는 중추적인 전사인자(CREB)를 크게 활성화한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미주 한인 최대 온라인 쇼핑몰 '핫딜'은 신년을 기념하여 미라클 모닝과 미라클 실버의 2+1(바이 투 겟 원 프리) 프로모션을 진행 중이다.     ▶상품 구매하기:hotdeal.koreadaily.com   ▶문의:(213)368-2611핫딜 치매 기억

2024-01-03

[사진의 기억]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불을 밝혀야 할 시간이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이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칠흑 같은 밤이 찾아온다. 아직 읍내에 나간 아버지도, 막차를 타고 내려올 아들도 귀가하지 않았다.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처럼 멀리서 오는 식구에게 기다림의 신호를 보내야 할 시간이다.   사람들이 고향을 묻는다. 고향에 누가 있느냐고도 묻는다. 돌아갈 집이 있느냐,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느냐는 물음이다. 먼 길을 걸어가도 그 길 끝에 어머니가 계신 집이 있으면 고향은 언제나 달려가고 싶은 곳이었다. 그때는 왜 항상 막차를 탔는지 모르겠다. 하룻밤 더 자고 환한 대낮에 여유 있게 가도 되련만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양 한밤중에 길을 나서곤 했다. 그 조급함은 어머니의 기다림과 닿아 있었다. 어김없이 어머니는 불 밝히고 밥상 차려놓고 기다리고 계실 터. 어머니뿐이랴. 온 식구가, 툇마루 아래 멍멍이까지도 눈치를 채고 귀를 쫑긋 세우고 기다릴 것을 알기에 밤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가로등도 없는 밤길에 돌멩이에 걸리고 눈 녹아 질척거리는 진 땅을 밟아도 발걸음은 자꾸 더 빨라졌다. 걷는 듯 뛰는 듯 서둘러 저 멀리 우리 집 불빛이 보일 때, 이윽고 멍멍이가 짖어대고 방문이 열리며 온 식구가 쏟아져 나올 때, 그 순간의 먹먹한 기쁨은 타향살이의 어설픔과 고단함을 위로하는 보약이었다.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 중 하나가 새벽이라지만 칠흑 같은 밤이 먼저다. 도시의 밤이 대낮처럼 환해지면서 옻을 칠한 듯 깜깜한 밤하늘에 보석처럼 빛나는 ‘별 볼 일’도 없어지고, 어둠을 모르니 밝음도 시들하다.     어느새 밤이 가장 긴 동지를 지나 겨울이 깊어져 가는 중이다. 깜깜하면 발이 묶이던 그 시절 시골집에서는 저녁밥 먹고 나면 별수 없이 온 식구가 모여서 복닥거릴 수밖에 없었다. 살붙이의 정이 쌓이는 겨울밤이었다. 칼칼한 겨울바람이 매섭던 그 칠흑 같은 밤, 불빛 따뜻하던 어머니의 집이 다시 그립다. 김녕만 / 사진가사진의 기억 툇마루 아래 시절 시골집

2023-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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