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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나에게 거는 최면

가을을 반납했다는 G 작가의 글을 접하고 소름이 돋았다. 얼마나 절실했으면 시간과 계절을 내려놓았을까? 암 투병과 함께 지긋지긋한 통증에 약효가 점점 짧아지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통증이 가시면 글을 쓰고 있다는 G 작가를 마음으로나마 응원하고 있다. 가을을 반납하고서라도 써야 할 그 무엇에 박수를 보낸다. 아무쪼록 그 글의 완성이 책으로 엮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선물이 되기를 바란다.       새벽 언덕에 아침이 온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침이 온다   우수수 낙엽이 날려도 먼동이 트고   한 치 앞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햇살이 눕는다       새벽 언덕에 아침이 온다   누군가는 짙은 커피 향에 취해   떠나는 계절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그리울 때 갈대는 땅으로 눕는다       새벽 언덕에 아침이 온다   꿈과 현실의 갈래길에서 한길을 택해   언덕을 내려오다 쓰러진 나무를 보았다   거기 나는 속이 텅 빈 나무처럼 땅으로 눕는다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 꿈은 꿈 자체로 아름답다. 기쁨과 슬픔의 조건조차 현실을 인식하는 우리 내면의 의식에서 빚어진다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일상의 결과가 그 가치를 판단하는 바로미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함부로 타인의 인생을 평가한다거나 스스로의 삶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객관적이지 않다고 본다. 늘 사람을 대할 때 수직적인 관계보다는 수평적인 사고로 대하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덕망이 아닐까 한다. 세상의 잣대가 아닌 스스로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아직 이 지구상에 존재하므로 세상은 여전히 빛나고 아름다울 수 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흰’을 읽고 있다. 소설이라기보다 짧은 수필의 연결 같기도 하고 자세히 읽다 보면 깊은 시 같기도 했다. 흰 것들에 대한 기억과 사유들을 덤덤히 적어 간 그의 글 속에서 인간의 진진한 삶의 고뇌와 덤으로 살고있는 아픔과 고마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속도보다는 방향의 진의가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빨리 결론지으려는 조급함이 때론 방향감을 상실한 채 표류하기도 하기에 우리는 자연의 변화처럼 천천히, 바른 방향으로 그렇게 물들어 가야 한다. 글을 읽는 내내 차분하지만, 영감이 자유로운 그의 내면을 송두리째 접할 수 있었다. ‘흰’의 마지막 소제목 ‘모든 흰’의 내용은 이러했다.     당신의 눈으로 흰 배춧속 가장 깊고 환한 곳. 가장 귀하게 숨겨진 어린 잎사귀를 볼 것이다. 낮에 뜬 반달의 서늘함을 볼 것이다. 언젠가 빙하를 볼 것이다. 각진 굴곡마다 푸르스름한 그늘이 진 거대한 얼음을, 생명이었던 적이 없어 더 신선한 생명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올려다볼 것이다. 자작나무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다. 겨울 해가 드는 창의 정적 속에서 볼 것이다. 비스듬히 천장에 비춰진 광선을 따라 흔들리는, 빛나는 먼지 분말들 속에서 볼 것이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최면 새벽 언덕 노벨 문학상 시인 화가

2024-11-04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홀로서기

홀로 피었다   바람에 흔들려 구겨진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도 예상 못 했지만 현실이었다   구겨진 얼굴 피기가 쉬웠겠는가   흔들리는 갈대가 하얗게 울음을 터뜨렸다   비바람 앞에, 천근의 무게를 지고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설 때   정면으로 부딪칠 때 그때 비로소   홀로서기는 시작되었다   홀로 핀 당신만 보인다   쏟아 내지 않고 별빛 하나로 모이는   그곳에 서 있어 보면 알 수 있었다.   같은 생각, 같은 걸음을 옮길 때   외로움은 멀어졌다   결국 그 힘은 뿌리에 있는 것이다   당신 앞에 날마다 서는 그 힘은   홀로 견디는 그 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자세히 보아라. 홀로 핀 것들이 너만이더냐. 시름시름 꽃대를 세우더니 백일홍도 홀로 피었고, 씨 뿌리지 않은 과꽃도 여린 꽃망울 홀로 맺었고, 망초도 담장 구석에 기대 안개 같은 하얀 꽃으로 홀로 활짝 웃었다. 그뿐이더냐. 수백 광년을 지나 발밑 아래 홀로 부서지는 별빛은 그냥 서서 맞이하기엔 얼마나 눈물겨운가.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햇살은 또 얼마나 포근하고 따사로워 온몸을 녹이지 않던가.    여름내 울어대던 매미가 홀로 제 몸을 벗었고, 딱새도 홀로 밤낮으로 알을 품더니 올망졸망 제 식구를 데리고 춤추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자세히 보면 모두가 홀로 견디는 것이다.   나도 어릴 때 어렴풋이 홀로 사는 법을 배웠다. 어머니가 홀로 되신 후 하루하루를 어떻게 견디어 내는가를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지만 결국 어머니는 홀로 견디고 홀로 사셨다. 그리고 홀로 하늘의 별이 되었다.   초에 불을 댕기면 심지가 타면서 불꽃이 보인다. 심지가 곧게 깊이 박혀 있으면 불꽃은 오랫동안 그 빛을 잃지 않는다.     나무도 그 뿌리가 깊게 뻗어있지 못하면 비바람, 눈보라에 쓰러지게 된다. 아무리 버티려 해도 제 몸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홀로 서려면 그 뿌리가 깊어야 한다. 홀로서는 힘은 보이지 않는 그 심지에서, 그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무리 화려해도 아무리 무성해도 홀로 서는 힘은 보이지 않는 다른 곳에 있다.     나무가 눈을 뜨는 시간에 나도 눈을 떴다. 나무는 자신이 심어져 자란 곳을 불평하지 않는다. 오늘도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지를 휘며 살아감의 유연함을 보이고 있다. 보이지 않는 뿌리는 깊은 땅을 향해 뻗어 가고 있겠지. 서 있다는 것은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온 힘을 다해 버티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도 그랬다. 하루를 그냥 맞은 게 아니다.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두렵고 떨리는 하루를 그림자처럼 지내셨다. 노을마저 져버린 서쪽 창가에 어둠이 찾아오면 지친 어깨를 들썩이며 가슴을 저몄을 것이다. 잠든 네 자녀의 이마를 쓸어주며 기도 반, 눈물 반으로 지샜을 것이다. 나는 안다. 그 먹먹했을 하루하루의 시간을. 그 고통스런 날들을 견디며 고개 숙이지 않은 것들에겐 향기가 난다. 그래서 난 홀로인 것들이 좋다. 더 마음에 와닿는다. 홀로 견디어낸 시간이 자랑스럽다. 홀로여서 외롭다고 생각지 마라. 사람도 홀로 있을 때 가장 사랑스럽지 않더냐.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비바람 눈보라 얼굴 피기 시인 화가

2024-08-19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당신은 내 집입니다

당신은 내 집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내 안에 지어진   당신은 내 집입니다 누군가 불러주지 않아도 걷다 보면 머물러지는 곳 봄의 향기가 떠나지 않고 오월의 초록이 가득 담긴 당신은 내 집입니다 다시 불러봅니다 마지막 날처럼 안타깝고 경이로운 시간 당신은 여전히 내 집이어서 눈을 감으면 더 가까이   선명한 핏줄같이 만져지는 사랑스러운 내 집이어서 마음에 담기로 합니다 원뿔 같은 모난 세상 모난 뿔로 피어나기 싫어 몸 아래로 아래로 꽃 피우는 비밀의 정원, 나의 쿼렌시아 먹여주고, 재워주고 사랑해 주는 당신은 같은 곳, 같은 시선으로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내 집입니다     한낮, 찌는듯한 더위에 몸을 잠시 피했다. 창가에서 바라보니 테크 주변에 나무가 만들어 놓은 두 평 남짓 그늘이 보였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어나 데크로 나가 의자를 그늘 밑으로 옮겼다. 작은 테이블을 옮기고 나니 유리컵에 들꽃이라도 담아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손을 뻗어 수수꽃다리 탐스러운 꽃송이를 가졌는데 그 향기가 바람에 실려 산들 내 앞으로 불어왔다. 더위는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늘 위에는 쉼과 새소리와 함께 수수꽃다리 향기가 온몸에 가득했다.     집이란 장소에 대해서 또 이 집에 살고 있는 자신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가? 늘 궁금했다. 집이란 의미가 그냥 사람이 거주 하는 생활 공간 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어쩌면 집이란 의미는, 나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편안하게 지켜 주는 것 이외의 것들을 잊거나 생각조차 안 하고 살아갈 때가 많았다. 당연히 그러려니. 맞아 그게 다야. 그 이외에 다른 건 없지. 더 바라면 욕심이지. 주변을 둘러봐도 다 그렇게 살고 있어. 잘 길든 애완견처럼 때로 사랑도 받고, treat도 받아먹으면서.      집은 그런 게 아니었다. 바로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두 평 남짓 그늘 밑 같은, 그저 햇빛을 막아준 그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해지는, 따져보면 가진 것도 없는데 한없이 누리는 알 수 없는 포만감. 그런 사소한 관심과 작은 행복의 연유가 아닐까? 잘 꾸며놓은 집에 갇힐 수도 있겠다 생각되었다. 문득 집은 지친 나를 반가이 맞아 주는 곳. 상처받은 마음을 싸매고 치유해 주는 곳. 마음이 헛헛해 그리운 마음을 열면 꽃처럼 환하게 반겨 주는 곳. 마주 보고 있어도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정다움이 포말처럼 가득해지는 곳. 한없이 피로가 몰려와도 엄마 품 같이 포근하고 따뜻해 이내 잠들 수 있는 곳.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곧은 시선으로 바라보아도 가슴 설레는 곳이어서. 상처와 아픔의 처진 어깨가 위로 받고 보듬어져 어느새 펴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집이어야 한다는, 다름 아닌 그늘 같은 퀘렌시아가 집이 되어야 한다는.   마치 투우장의 성난 소가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 바로 그것이 진정한 집의 개념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루의 피곤이 사라져 버리고 새 날, 새 아침이 기적같이 펼쳐지는 곳이야말로 나의 집, 나의 쿼렌시아, 나의 천국이라 말할 수 있다.   늦은 오후, 나무 밑 두 평의 그늘. 넘어가는 햇살에 나의 쿼렌시아는 누워도 될 만큼 더 넓고 쾌적한 면적으로 확장되었다. 긴 하루가 그 축을 당기며 하루의 펼쳐진 휘장을 서서히 닫고 있다. 조용한 침묵을 깨고 오후의 끝자락을 잡아줄 심금의 첼로 선율이 들리는 늦은 오후. 그런 집을 찾습니다. 그런 당신은 나의 집입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수수꽃다리 향기 첼로 선율 시인 화가

2024-05-20

"발달장애 화가에게 꿈의 날개를…"

한미특수교육센터(이하 센터, 소장 로사 장)가 발달장애인의 재능을 발굴하고 작품 활동을 격려하기 위한 연례 미술대회 ‘드림아트 콘테스트’를 개최한다.   올해로 5회를 맞이한 드림아트 콘테스트엔 국내 각지의 발달장애인은 인종, 나이, 지역에 상관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로사 장 소장은 “부모들이 발달장애 자녀의 어려움에만 집중하지 말고 최대한 어린 나이부터 이들이 가진 잠재적인 능력과 관심을 빨리 찾아 개발하면 평생 좋은 취미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직업이 될 가능성을 높이게 된다. 발달장애 화가에게 꿈의 날개를 달아줄 드림아트 콘테스트에 많이 참여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올해의 작품 주제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다. 작품은 오는 6월 21일 오후 5시까지 우편 또는 직접 방문을 통해 제출할 수 있다. 자세한 응모 방법은 센터 웹사이트(kasecca.org)를 참고하면 된다.   한국 TV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한 유명 발달장애 화가 정은혜 작가가 지난해에 이어 대회 홍보 대사를 맡는다. 심사위원회는 한젬마 작가 겸 예술 감독, 김은정 발달장애 아트 디렉터, 이지안 캘폴리 포모나 미술 대학 교수, 미셸 오 전 남가주미술가협회장 등 미술 전문가, 특수교육 전문가들로 구성됐다.   전시회를 겸한 시상식은 8월 중 부에나파크의 더 소스 몰에서 열린다. 센터 측은 총 12명의 우수상 수상자에게 각 300달러의 장학금과 상장, 트로피를 수여한다. 또 우수상과 가작 등 총 24점의 작품과 지난해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초청 작품을 함께 전시할 예정이다.   장 소장은 “발달장애 화가들의 예술 활동을 장려하고 지역사회에 널리 소개하기 위해 수상작들을 커뮤니티 곳곳에 전시할 기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역사회에 발달장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고 발달장애인들의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활발히 참여하고 통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드림아트 콘테스트는 오픈뱅크, 재외동포청, OC한인상공회의소가 후원하며, UCLA자폐증연구치료센터, 오렌지와 LA 카운티 리저널센터, 특수교육컨설팅(SERAC) 등이 파트너로 참여한다.   드림아트 콘테스트 관련 문의는 전화(562-926-2040) 또는 이메일(outreach@kasecca.org)로 하면 된다. 임상환 기자발달장애 화가 발달장애 화가들 발달장애 자녀 발달장애 아트

2024-04-29

[글마당] 개고생 동지들

폭우가 쏟아지는 저녁, 새 문화원 개관식에서 한때 나와 같은 처지의 화가 부인을 만났다. 우리는 동시에 외쳤다.   “우리 내일 우보경 개인전에 가서 응원하자.”     오랜 인연을 이어오는 화가 부인들의 남편들은 나와 같은 대학을 나온 선후배 관계다. 아트 졸업장으로는 직장 잡기 힘들다. 마약을 끊지 못하듯 작업하기를 고집하는 화가 남편을 둔 와이프들은 집안 경제를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우보경 작가를 그녀의 남편 대학원 졸업 전시장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싱그럽고 수줍은 싱글들이었다. “목소리 한번 들어봅시다”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나는 말이 없었다. 내가 말이 없었던 과거가 있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지만, 그 당시 나는 정말 그랬다. 화가와 결혼하면 고생길이 훤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뭐에 씌었는지, 철없는 우리는 겁도 없이 연애 시절부터 남편 될 남자들을 서포트했다.     우 동지(무슨 독립군 비밀 요원 호칭 같은)는 유학 생활 중, 어디서 그렇게 커다란 노란 양은 냄비를 구했는지 냄비 가득 푹 익은 무를 넣은 오뎅과 음식을 만들어 와서 연인(훗날 남편인 화가 최성호) 오프닝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가난한 유학 시절 그 오뎅이 어찌나 맛있던지! 우 동지도 프랫 대학 학부와 대학원 졸업은 했지만, 결혼하자마자 생계를 위해 붓을 놓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지금은 모두 다 접고 작업에 몰두하며 뉴저지 포트리, ‘패리스 고’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하고 있다.     온 심혈을 기울인 작품에서 영혼이 깨어나 지난 힘든 날을 속삭이듯 커피 필터(커피 내리고 난) 바탕 위에서 살아난다. 능숙하면서도 절제된 작가의 손놀림은 장단에 맞춰 춤추듯 강하면서도 은은한 색과 선이 감각적으로 피어난다. 기막힌 묘사력은 빛바랜 민화를 싱싱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부활시킨다. 작품이 팔렸다는 붉은 신호가 곳곳에 반짝였다. 도대체 얼마 만인가? 브루클린 창고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오는데! 올해로 정확히 40년 만이다.     “오셨어요. 코트 벗으세요. 걸어드릴게요.”   전시회에 맞춰 평상복 검은 치마 위에 초록색 한복 윗저고리를 입은 갤러리 운영자인 고수정 씨가 나를 반긴다.   “개고생 동지 개인전에 오지 않을 수 없지요.”   “저도 개고생해요.”   “자기 남편은 화가도 아니잖아요.”   “화가 친구를 뒀기에. 하하하.”   그녀 말에 백배 공감한다. 화가 남편을 둔 부인도, 화가 부인을 둔 남편도, 화가 주위의 친구도, 부모도, 자식도 모두가 개고생이다. 이수임 화가·맨해튼글마당 개고생 동지 개고생 동지들 화가 남편 남편 대학원

2024-03-22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1   늘 놓아두었던 자리   그 물건이 없으면 여간 불편하지 않다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든   그 장소, 그 시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기적 같은 행복이 아닐까 싶다   다만 새벽만이 아니다   사람도 그렇다     2 깊은 어둠으로부터 깨어나는 새벽 알지 못하는 이야기로 새벽은 깨어나고 마른 가지에 살이 붇고 먼동은 새벽을 당겨 온다     동트기 전 새벽은 깊은 물 속과 같아서 물속 떠오는 비늘 같아서 가득한 물고기 집 같아서 새벽하늘에 빠져 깊이 잠기다 보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잠기다 보면 어둠 속 보이지 않던 것들에게 찾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흔들 수 없는 어둠 속엔 단단한 껍질을 벗는 하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고 깨어난 생명이 내쉬는 숨 허리를 세운 직립의 나무   흔들 수 없는 어둠이 옷을 벗고 하늘의 밑동을 채우는 허락된 하루의 축복이 온다     버려야 할 것이 있고, 담아야 할 일이 있기에 걸어야 할 길이 있고, 주워야 할 이삭이 있기에 나만을 위한 하루가 아니기에 기대가 된다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깊은 곳에서 깨어나는 새벽 내 안에서 매일 눈을 뜨는 사람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옷깃을 여미게 한다     3 시를 쓰듯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릴 때 시를 쓰는 마음을 가지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언제부터인가 멀어졌던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잃어버린 마음을 찾고 싶었다 정한수를 떠놓고 소원을 빌듯 새벽 커피를 내리고 마음을 다잡을 때처럼 맨발로 꽃피는 뒤란을 걸을 때처럼 그런 마음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부자가 된다 가진 자의 행복이 부럽지 않다 그 자리에 그가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 시간에 그 풍경이 내 옆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시를 쓰듯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림을 그리듯 시를 쓸 수 있을까? 물음 후엔 늘 치열한 삶에서 피하려는 비겁한 내가 보이기에 충분히 사랑받았다는 의미가 새롭다 처음 그가 내밀었던 따뜻한 손의 체온이 그립다 내 옆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4 그의 시간은 나의 시간이기도 했다 같은 하늘, 같은 계절을 보내었기에 시간 속에 녹아든 그만의 일상을 추정해 볼 때 그의 일상 안으로 나의 시간이 저물기도 했다 그 자리에 있었단 해프닝만으로 그 자리를 채웠던 사람들 사이엔 먼 나라로부터 밀려왔다던 이방인의 숨 먼 곳으로부터 내게로 오는 별빛이 그렇고 쉼 없이 밀려왔다 되돌아가는 파도가 그랬다 그리고 그가 내게로 온 것이 그랬다 다른 어떤 것을 말하지 않아도 그가 내 곁에 내어준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새벽 커피 시인 화가 자의 행복

2024-03-11

위작 논란 '박수근·이중섭 작품' 진품 확인됐다

지난 25일부터 LA카운티미술관(LACMA)에서 전시 중인 ‘한국의 보물들(Korean Treasures)’ 작품 일부가 위작이라는 의견이 한국에서 나온 가운데〈본지 2월 29일자 A-2면〉, LACMA가 지난 4일 회원 및 비회원들을 초대해 ‘한국의 보물들’ 전시회를 설명하는 특별 강연회를 열었다. 본지는 이날 강연자로 나온 스티븐 리틀 아시아 미술관장을 만나 한국의 위작 논란에 대해 직접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위작 논란을 들은 심정은.     “놀랍지 않다. 사람마다 보는 게 다르기 때문에 이해한다. 아쉬운 건 위작을 거론한 사람들이 그림을 직접 보지 않았고 또 작품에 대한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장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박수근, 이중섭의 그림이 LACMA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LACMA는 작품을 기증받을 때 검증하나.   “모든 기증 작품을 검증하지는 않는다. 논란이 이는 작품일 경우 당연히 검증 작업을 거친다. 박수근과 이중섭 작품은 작년 말에 모두 검증 절차를 끝냈다.”   -어떤 검증 작업을 거쳤나.   “과학적인 방법도 사용하지만 다양한 기록과 자료를 찾고 비교하는 연구도 중요하다. 이중섭 작품의 경우 한지에서만 그림을 그렸다는 지적이 있다. 지난 3년간 한국을 방문해 조사하고 연구한 결과 이중섭은 한지뿐만 아니라 나무, 캔버스, 판지에도 그림을 그렸음을 확인했다. 또 소 위에 어린이가 앉아 있는 작품이 없다는 말도 있는데 기린, 말, 사슴, 용 위에 사람이 타고 있는 그림이 많다. 인터넷으로 검색만 해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박수근 작품의 경우 아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우리는 실험실에서 현미경으로 그림 재질과 그림 기법, 색 등을 세밀하게 조사한 결과 (기증받은) 박수근의 작품이 모두 1963년 이전 것임을 확인했다. 한 예로 그가 쓴 종이는 뉴욕에 있는 종이 공장에서 1963년 이전에 생산된 것이다. 작품 뒷면에 찍힌 집코드(NY, 12, NY)와 종이 생산공장 이름 등이 이를 증명한다. 1963년 이전까지 미국은 2자릿수의 집코드를 사용했는데 당시 종이공장이 있던 뉴욕의 경우 12였다. 또 박수근은 자신의 후원자였던 마거릿 밀러에게 어떤 색을 작품에 썼는지 편지로 남겼다. 그 편지에서 그는 주로 어두운 색을 사용했지만,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드물게 분홍과 파란색을 썼다고 설명했다. 직접 작품을 보면 그가 말한 색을 발견할 수 있다.”   -북한 화가 작품들에 대한 평도 있다.   “마침 어제 (3일) 중국의 관광문화청 관계자와 만났는데 북한 화가들의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북한 화가들의 작품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고 많은 중국인이 작품을 사려 한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북한 화가 작품을 볼 기회가 거의 없어서 낯설 수 있다. 이번 전시회에 뛰어난 북한 출신 화가들의 작품을 보여줄 수 있게 돼 기쁘게 생각한다.”   -한인 커뮤니티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는 작품을 과학적으로 증명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번 전시는 한국의 뛰어난 화가들, 예술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다. 그러니 꼭 방문해서 작품들을 관람하고 평가하기 바란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박수근이중섭 과학기법 박수근 작품 화가 작품들 이중섭 작품 LACMA 위작 논란 스티븐 리틀 큐레이터

2024-03-05

[글마당] 개고생

서울에서 온 화가 전시회였다. 화가 부인을 소개받았다. 훤칠한 미모의 지적이며 단아하고 선한 인상이다. 그녀는 사려 깊은 모습으로 조용히 사람들 말에 경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요 방정맞은  입에서 “저도 화가 와이프이지만 화가 부인하느라 개고생 많이 하셨지요?”   눈물이 핑 돌아 글썽이는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그녀가 말했다.   “개고생‘이라는 말을 들으니 마음 편히 터놓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직장 다니며 남편 서포트한 그녀의 사연이 쏟아져 나왔다.   정말이지 화가 와이프 하기 쉽지 않다. 화가라는 직업은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일단 없다. 꼴에 풀타임으로 작업하고 싶어 한다. 큰 작업 공간이 있어야 한다. 재료비는 말하면 잔소리다. 차라리 컴퓨터 하나만 들고 작은 공간에서 글 쓰는 소설가 부인이 훨씬 낫지 않을까? 그들도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커다란 작업 공간에서 수많은 작품을 만들고 없애고를 반복해서 겨우 만들어 낸 괜찮다는 작품도 팔린다는 보장이 없다.     전시를 위해 사진 찍어야 하고 팸플릿 만들기 위해서는 글을 받아야 하고 운반해야 하고 오프닝 준비해야 하는 과정에서 비용이 엄청나게 깨진다. 뭐 유명해지면 갤러리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그전까지 뒤에서 물심양면 지원하는 부인들이야말로 개고생이다. 유명해지는 것은 로또 맞을 확률이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화가가 되기 위해 달리기 시작한다. 그중에서 많은 이들이 중간에 떨어져 나가고, 또, 또 떨어져 나간다. 골인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부부가 합심해서 달려도 골인 언저리에 도달하기가 무척 힘들다.     요행히 화가로 이름이 조금  날리면 혼자 노력해서 달려간 양 거들던 부인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기 일쑤다. 그나마 조금 성공한 화가의 말이 생각난다.   “마누라 얼굴만 봐도 개고생하던 시절이 떠올라서 싫어.”   싫은 마누라 피해 밖으로 나돌다가 젊은 여자와 그렇고 그런 관계로 이어진다. 결국엔 조강지처는 버림을 받는다. 다행히 옆에서 후원한 와이프를 불쌍히 고맙게 여기는 화가도 있지만, 많은 남자가 그렇듯 성공하면 주위에 젊은 여자들이 달라붙는다. 젊은 여자가 좋지, 늙은 마누라가 좋을 리 없다. 하지만, 조강지처 버리고 잘된 화가를 못 본 것 같다. 게다가 화가는 자기는 재능을 선택받아 남과 다른 일을 하는 양 잘났다고 타협하지 않는다. 예민한 성질 또한 부인이 개고생하는 데 한몫 거든다. 글쎄 다른 화가들은 모르겠지만, 내 남편의 아주 작은 예를 들어보겠다. 모처럼 식당에 갔다. 밑반찬이 주르르 나왔다.     “이 반찬들 들락날락했던 것 아니야?”   “맛있어 보이는데 왜 또~ 밑반찬이 무슨 잘못이라고.”   조용히 깍두기만 우적우적 씹는 찌그러진 얼굴색이 좋지 않다.     “항상 당신이 가자는 식당에 가다가 처음 내가 오자고 한 식당이잖아. 밑반찬 많이 나오는 식당이 싫다고 성질 내는 인간도 있을까? 먹지 마. 내가 다 먹을게.” 나는 반찬 접시마다 다 가져다 싹싹 먹어 치웠다. 남편이 가고 싶어 하는 김치 한 가지 나오는 설렁탕집으로 가지 않았다고 트집 잡기 시작하더니 짜증 내며 하루를 망친다.     ’아이고 내 팔자야. 차라리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도 내 신세보다는 낫겠다. 내 나이도 절에서 받아줄까? 금전 두둑이 가져가면 받아줄까?‘     항상 어딘가 튈 곳이 없나 두리번거리며 푼수처럼 ’개고생‘이라는 헛소리나 하고. 헛소리하며 스트레스 풀지 않으면 화가 부인으로 살아남기 정말 힘들어서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개고생 화가 부인 소설가 부인 작업 공간

2023-12-29

유관순 화가에 유관순 판화 전달…한인 작가 김석원씨 작품

‘유관순 화가’ 모린 울프슨의 갤러리 오픈이 오는 주말로 다가온 가운데 한 한인 작가가 유관순 이름을 새긴 목각 판화를 갤러리 측에 전달해 잔잔한 감동이 되고 있다.     울프슨 갤러리 측은 지난 주 한인 김석원(82 발렌시아)씨가 직접 제작한 목판화을 선물해왔다고 본지에 알려왔다.     목판화는 가로 4인치 세로 9인치 크기로 열사의 이름이 검정색으로 새겨져 있다.     수년 전 은퇴 후 목각으로 창작활동을 해오고 있는 김씨는 “기사를 접하고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 작업했다”며 “열사의 정신을 이해해준 것도 큰 의미가 있고 이런 한국의 역사를 몰랐던 많은 분들에게 알려줘서 고마웠다”고 기증 배경을 설명했다.     울프슨 화가는 “많은 한인분들이 오는 2일과 3일 방문할 예정인데 이런 귀한 작품을 받게돼 감사할 따름”이라며 “작품 활동으로 더 소중한 분들과 인연을 맺게돼 신기하고 기쁘다”고 전했다.     갤러리 측은 김씨의 목각 작품을 태극기를 품은 유관순 열사 작품 아래 전시하고 김씨의 이름도 함께 공개했다.     한편 모린 울프슨 갤러리(19860 Plummer St. Chatsworth, CA91311)는 오는 12월 2일 오후 4시와 3일 오후 1시에 한인들을 포함한 주요 인사들을 초대하고 그랜드 오프닝 행사를 갖는다.  〈본지 11월15일 A-4면〉   행사 참가와 문의는 등록 사이트(https://www.eventbrite.com/e/maureen-gaffney-wolfson-celebrating-60-year-journey-of-love-for-life-tickets-739762458427)를 통해 할 수 있으며 전화(800-588-8552)와 이메일(events@maureengaffneywolfson.com)로도 가능하다.     최인성 기자 ichoi@koreadaily.com유관순 김석원 유관순 화가 유관순 판화 유관순 이름

2023-11-28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친구의 강

1 : 70년의 강물이 흘렀다 / 70년의 해가 뜨고 / 70년의 밤이 지나갔다 / 어제도 걸었고 오늘도 걷고 있고, 내일도 걸어야 할 길 / 7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걸었던 길이 있었다 // 깃털이 비슷한 새가 모여 살 듯 / 멀리 시카고까지 날아와 같은 둥지를 틀었다 / “잘 지냈어?” “응 늘 그렇지 뭐” / 여전한 대답에 별 일 없이 잘 살고 있다고 믿었다 /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었고 /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었다 / 돌짝 밭을 힘겹게 걸을 때도 있었고 / 양팔을 펼치고 하늘을 나는 듯 세상을 다 가질 때도 있었다 // “뭐 사는 게 별거 있냐? 근대 요즘 좀 힘이 빠진다” / 가을엔 가까운 곳에 몇 일 여행 가자던 친구 / Emergency로 실려간 그가 위암 4기란다 / 치료를 안 하면 한달, 안 받으면 1년이란다 / 날은 어두워지고 머리 속은 온통 까만 카오스 // 70년의 강물이 흐르고 / 70년의 해가 뜨고 / 70년의 밤이 지나가는데 / 친구야, 병상의 하루를 잘라 나누어 살자 / 먼저이고 나중인 듯 함께 기대어 걷자 / 시카고 가을 들녘 코스모스처럼 흔들리며 / 널 위해 걸음 걸음 환한 꽃등 밝혀 놓으마     2: 단풍이 아름다운 숲길을 친구와 걷고 있다 / 바람이 불고 낙엽이 구른다 / 저 산도 옷을 벗는다 / 그저 풍경 일 뿐이다 / 나의 풍경은 사람 이었으면 한다 / 그 마음 이었으면 한다 / 알 것 같은 마음이 내 안에 담겨지는 /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이 되고 / 지는 노을에 눈시울 붉힐 줄 아는 / 별빛처럼 오랜 기다림의 이야기들이 낯설지 않은 / 한 사람 이었으면 좋겠다 / 한 방울의 피도, 살도 섞이지 않아도 / 내가 너 이고 / 네가 나 이듯 / 절절한 풍경이고 싶다.      오늘 그대의 나라가 불행합니까? 곳곳에 피어나는 들꽃. 부드러운 들판의 축제가 가슴에 사무치게 아름답습니다. 마침표를 찍은 풍경이 아니라 지어져가는 풍경입니다. 내내 곱게 내려 앉는 사랑입니다. 이어져가는 생명입니다. 꽃처럼 환한 미소입니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자유입니다. 오늘 그대의 나라가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길을 걸으며 저 마다 허락된 시간 속에 살아갑니다. 결국 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되어 가는 일입니다.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지어져 가는 사람입니다. 나무의 모양만으로는 나무를 알 길이 없습니다. 열매로 나무를 압니다. 열매가 나무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나무의 결국은 열매입니다. 결국 사람입니다.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삶은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사람의 무기는 근본이 되어질 때 비로소 힘이 납니다. 오늘 그대의 나라가 깊은 평안 속에 거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세상이 사라진다 하여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꿀어 나머지 시간들을 가꾸기를 바랍니다. 친구의 강은 오늘 아침에도 흐르고 있습니다. 흐른 만큼 짧아지기는 했어도 의연하게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은 먼동처럼 황홀하고 노을처럼 아름답습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B에게 〉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친구 시카고 가을 걸음 걸음 시인 화가

2023-10-30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10년 뒤가 궁금해졌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때쯤 내 모습이 궁금해졌지요. 아직은 쓸만한데 10년 뒤엔 볼 품 없겠죠? 배도 나오고 이마엔 주름이 깊게 파였을 게고 허리도 굽고 걸음도 느릿해지겠죠? 지금도 책읽기가 불편한데 눈도 시원찮아져 책과 담을 싸지나 않을까 걱정이네요. 친구들은 또 어찌 되었을까요. 몇몇은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   다른 몇몇은 병마와 투병 중에 있을 수도 있구요. 누구는 집을 정리하고 노인 아파트로 갔고 누구는 따뜻한 곳을 찿아 저 남쪽 Florida로 이사 갈 수도 있겠죠. 좋은 친구와 헤어지기도 하고 멀리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보내기도 하겠죠.앞으로도 쭈욱 오늘같이 살리란 보장은 없지요. 갑자기 서글퍼 지네요. 살다 보니 사람들을 믿다가 큰 코 다치는 경우도 많이 봤어요. 그렇다고 나는 믿을 수 있냐는 물음엔 노에요. 나도 믿고 너도 믿었는데 너도 변하고 나도 변하더라구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아주 작은 차이로 멀어지더라구요. 말투가 달라지고 행동이 어색해진 너에게 서운해져 괜히 나에게 화를 낼 수도 있겠죠. 그런데 내게 화를 내는 건 아주 잘 하는 거에요. 상황을 자세히 보면 내게 화낼 수도 있어요. 내게 물어봐야 했어요. 무엇 때문이었냐는 화살은 내게 향했어야 했어요. 이전도 그랬거니와 앞으로의 삶도 서로에게 진실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 없어요. 진실이어야 해요. 무엇을 이루기 위해 어떤 일을 한다든지, 내키지 않은 일을 마지못해 하는 것은 거짓이지요. 관계는 서로에게 진실일 때 지속되겠지요. 행여 이 편지를 10년 뒤 읽으신다면 그때 그 마음이 진실이었다고 말해준다면 참 좋겠네요.   오래 정말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급기야 뒤란을 걸으며 달빛에 취하기도 했어요. 어슴푸레 깨어나는 하루를 맞으며 나를 달래야 했어요. 우리 이제 그만해요. 누가 내 마음을 알겠어요. 이게 뭐지? 더 알려고 하지 않으려 해요. 다만 달빛 내리는 뒤란에서 나의 모습, 또 너의 모습을 찿을 거예요.     높고 외롭게 살아요       가을잎처럼 우리 물들어 가는 건 어때요 // 그때가 언제인지 몰라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 / 그냥 꼭 안아줘도 괜찮겠지요 / 고마웠고, 미안했고, 오래 잊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요 /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늘을 나는 샤갈의 우체부 기분이었다구요 / 난 알아요 / 지금 내 일을 꾀나 잘 계획하고 분주히 해나가는 나를 보면 /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 한편으론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부인할 수 없어요 / 이렇게 세월이 흐르다 서로에게 잊혀지기도 하겠죠 / 젊은날 아픔이 사라진 것 같이 / 강물 흐르듯 떠밀려 멀어지기도 하겠죠 // 아무튼 좋아요 / 우리 이렇게 살면 어때요 / 꽃이 피면 봄이 왔다고 너무 소란 피우지 말고 / 비가 오면 젖는다고 피하지 말고 촉촉히 젖으며 살아요 / 한더위에 숨을 고르며 살다 / 노을처럼 붉어지는 가을잎처럼 물들어 함께 익어가기로 해요 / 하얀 눈밭에 눈사람처럼 얼어도 / 더운 숨 내쉬며 서로에게 뜨거운 사람이 되어 살아요 / 등불이 되어 어둔 밤 비춰 주며 / 어깨에 쌓인 눈 털어 주며 / 솔처럼 높고 외롭게 살아요 / 밤하늘 별을 올려다보며 / 이 별은 너의 별 저 별은 나의 별 하며 살아요 // 너의 소리를 나만 들을 수 있고 / 나의 소리를 너만 들을 수 있는 세상에서 / 허락한 시간 만큼 숨죽이고 살아요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남쪽 florida 노인 아파트 시인 화가

2023-09-18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별을 세고 난 뒤에

한밤 중 전화를 받았다. 의식도 없이 계단을 내려와 덱크로 향한 문을 열었다. 밤 하늘 수놓은 별을 올려 보다 그만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왜 우냐고 물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파란 하늘에 붉은 볼을 두 손에 묻고 덱크의 끝 계단에 주저 앉았다. 여전히 밤이었지만 푸른 불빛이 내 안에 반딧불처럼 떠 다니고 있었다. 칠흙 같은 어둠이었지만 빛나고 아름다운 밤이었다.     수선화 가득한 봄날은 가고 / 햇볕 따가운 날들도 지나고 / 당신 미소 같은 가을이 올 것임에 틀림 없다 / 손을 펼쳐 눈을 받고 / 하얀 입김을 쏟아내며 언덕을 오르고 있을 두 다리 / 14시간 앞선 걸음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기에 / 그 이름 눈 속에 묻기로 한다 // 밟혀도 밟혀도 봄처럼 살아날 이름이여 / 이곳보다 무성한 잎들이 자라고 / 아픈 바람이 불고 / 가로수 길엔 안타까움이 물들고 있는데 / 줄 지은 그리움에 기대어 / 기쁜 눈물을 흘리면 어떠랴     살아있는 사람은 이별하지 않는다. 잠시 자기 별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다만 계절의 온도와 색깔이 내게 다가와 절규가 될 때 다른 시간이었던 날들은 견뎌야 했다. 함께 바라보지 못한 것들은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 뿐 스치는 다른 풍경이 겹쳐올 때 시간의 강물은 거슬러 오를 것이다. 장편소설 〈토지〉의 저자 박경리가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처럼 남겼던 말이 기억난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삶의 근간이 된 흙으로 남겨질 때 인생에 대한 물음에 푸르를 수 있다면, 그때 그때 벗어놓은 옷 같은 시간이 내 삶이고 내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기쁜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슬퍼지기도 하는 역설의 문장이 아닌가.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의 뜻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이다. 이 말은 성경 요한복음 십 삼장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던 질문이다. 이 질문에 예수께서는 “로마로-”라는 짧은 대답을 하신다. 네가 두려워 도망 가고 있는 바로 그곳 로마로 간다는 뜻이다. 그 후 베드로는 빠져 나온 로마로 발걸음을 돌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박해 받는 그리스도인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며 남은 삶을 불태운다. 마침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을 당한다. 무엇이 그에게 이처럼 담대한 용기를 주었을까? 버려도 좋을 것들을 위하여 살던 나에게서 꼭 지키고 가져야 할 것들을 위해 기꺼이 남은 삶을 내어 놓고 죽음을 맞이 한다. 로마로 가는 길은 죽으러 가는 길이다. 넓고 편안한 길을 버리고 좁고 험난한 길을 택한 베드로의 길을 통해 오늘 나의 발걸음을 돌아 보는 시간을 가진다. 꽃이 피고 죽어야 열매가 자라고, 윗 잎이 자신의 위치를 내려 놓을 때 새 잎이 그 위로 자란다.     이런 역설의 삶에서 기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나의 삶이 나만의 삶이 아니고, 너의 삶이 너만의 삶이 아니기에, 서로에게 별이 되는 그런 삶은 향기를 풍기게 된다. 살아가는 모습과 똑같이 향기는 멀리 퍼져 나간다. 시간과 환경을 뛰어넘어 향기 나는 삶이 되어진다는 것은 죽음도 막을 수 없다. 죽음을 맞이한 그 곳에 설명하기 힘든 기쁨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산 위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만이 산 아래에서 변화된 삶을 증거할 증인이 될 수 있다.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로마로-” 베드로와 주님의 짧은 대화가 마음을 두드리는 밤이 오고 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곳 로마 성경 요한복음 시인 화가

2023-08-28

[문화산책] 화가들이 꿈꾸는 LA강 사랑

이번 여름, 의미 있는 전시회가 하나 열린다는 소식이다. LA강을 주제로 이 지역 작가 11명이 뜻을 모아 의욕적으로 꾸미는 기획전 ‘OUR RIVER: city floodplain’이다. 상당한 관심을 끌 것으로 기대된다. 반갑고 고맙다.   “LA강이라구? 아니 LA에 무슨 강이 있다는 거야?” 많은 이들이 이렇게 반문하며 뜨악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있습니다. LA강은 로스앤젤레스 산에서 발원하여 여러 커뮤니티를 거치며 롱비치 하류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 51마일 길이의 강입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을 따름이죠.”   이런 대답에는 더 볼멘소리가 돌아올 것이다. “그게 무슨 강이야? 콘크리트 수로(水路)지! 물도 제대로 안 흐르는 강이 무슨 놈의 강이야? 개천이나 도랑이지!”   그렇다. 예술가들의 계획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우리에게도 강다운 강이 필요하다. LA강을 저렇게 특징 없는 ‘콘크리트 폐수 시스템’으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삭막한 사막도시이기에 더욱 시원한 강이 필요하다.   더구나, 최근 들어 그 강을 아예 콘크리트로 덮어버리려는 계획이 구체적으로 검토되고 있다는 소식에 예술가들은 한층 더 마음이 바빠졌다. 화가들의 꿈은 LA강을 자연 상태로 살리는 것이다. 인공적으로 물의 흐름을 고치려 들지 말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맑고 시원한 물이 흐르고, 주변에 나무와 수초가 싱싱하게 자라 바람에 흩날리고, 물고기들이 돌아와 뛰놀고 새들 노래하는 그런 생명의 강으로 만드는 일…. 강이야 말로 우리 생명의 근원이며, 도시의 정체성과 역사의 중요한 일부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일….   이 전시회에 참가하는 작가들은 이런 꿈을 이루기 위해, 정부 기관의 LA강 재개발 사업이 과도하게 인공적으로 추진될 가능성에 대해 염려를 나타내며,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데이빗 에딩턴과 박다애 씨의 주도로 11명의 작가들이 뜻과 마음을 모아 지난 1년 반에 걸쳐 착실하게 준비했고, 전시 큐레이팅은 샤토 갤러리가 담당한다.   이 전시회는 몇 가지 점에서 반갑고 고마운 의미를 갖는다.   첫째, 미술가들이 현실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발언한다는 점이다. 특히 그것이 환경 문제라니 한층 절실하게 다가온다. 작가들이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나 역할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고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대부분의 작가가 저마다 자기 세계에 빠져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과 조형표현에 만족하는 현실에서, 여러 작가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소통하면서 함께 아파하고 고민하고, 그 결과를 작품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정말 소중한 작업이다. 11인 11색의 조형으로 나타날 개성적 목소리가 기대된다.   둘째, 화랑의 역할이다. 갤러리가 예술가들과 뜻을 같이하며 공동체 의식을 갖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물론, 상업 갤러리는 영리를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 문화의 한 몫을 감당하며 커뮤니티와 함께 성장하는 전향적 자세도 필요하다. 샤토 갤러리는 그동안 그런 자세를 적극적으로 실천해온 셈이라서 감사한다.   아무튼 화가들과 갤러리의 합심으로 뜻깊은 전시회가 꾸려졌다. 이제 이 전시회를 완성하는 것은 관객들의 몫이다. 아무쪼록 많은 이들이 참석하여 작품을 감상하며, LA강의 오늘과 내일을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는 건강한 공론의 마당이 되기를 바란다. 예술과 함께 아파하고 꿈꾸는 동안 우리 마음속에 맑은 강물이 시원하게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전시회는 오는 8월12일부터 9월16일까지 샤토 갤러리에서 열린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화가 la강 la강 사랑 la강의 오늘 la강 재개발

2023-07-27

[이 아침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시 〈저녁에〉   얼마 전 문인협회 이사였던 고 변재무 시인의 장례식장을 나오면서 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말을 예의 또 되뇌었다. 대학 4년 내내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이 말은 그 이후로 누가 내 곁을 떠날 때마다 저절로 입속에서 나오는 말이 되어버렸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한국 아방가르드와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김환기 화가의 작품 제목으로 더 유명하다. 사실 이 제목은 친구인 김광섭 시인이 편지로 보내준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그가 뉴욕에서 가난하게 살던 1970년 친구인 김광섭 시인의 잘못된 부고 소식을 듣고 애도하는 마음으로 그린 작품에 바로 이 제목을 붙인 것이다. 그리움으로 가득한 이 그림은 그해 서울로 보내져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짙은 푸른색의 작은 점들이 화면 전체에 가득 찍힌 이 추상화는 우주의 공간을 느끼게 한다고 하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해외에 살면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오만가지 생각을 다 점으로 찍었다고 한다  붓을 들면 언제나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는 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점을 찍고 친구가 보고 싶을 때도 점을 찍고 아내 김향안(이때는 떨어져 살았음)이 보고 싶을 때도 점을 찍으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그의 두 번째 아내인 김향안은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온 자신감이 넘치는 여자로  똑똑하고 지혜로운 여자였다. 바로 첫 남편이었던 시인 이상의 “같이 죽을까”라는 이상한 사랑 고백을 받고 그 길로 짐을 싸 들고 나와 결혼한 당찬 여자였다. 비록 4개월 만에 이상의 죽음으로 결혼생활이 끝났지만 둘은 애정으로 뭉친 멋진 부부였다. 이후 일본 시인의 소개로 아이가 셋이나 달린 무명의 김환기 화가와 다시 결혼하였다.     이상과 결혼 당시에는 변동림이라는 이름으로 살던 그녀는 김환기 화가와 결혼한 후 김향안으로 개명했으며 남편을 일류 화가로 만든다. 프랑스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던 그녀는 화랑주인인 모딜리아니의 초상화 ‘부채를 든 여인’의 모델이었던 튜나와 가까이 지내면서 김환기의 파리 첫 개인전을 열어준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는 두 천재와 결혼하고 두 남편을 모두 유명한 작가로 만들어준 장본인이다.   김환기 작가는 뉴욕에서 61세로 정작 김광섭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3년 후에는 김광섭 시인 역시 오랜 투병으로 세상과 이별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같은 병으로 세상을 마감했다. 문학과 미술을 사랑했던 사람들, 그들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났을까.  정국희 / 시인이 아침에 김광섭 시인 김환기 화가 정작 김광섭

2023-06-23

[신 영웅전] ‘기도하는 손’의 뒤러

인간의 삶에 어디 양지만 있으랴. 서럽게 살던 젊은 시절에는 소망의 기도를 많이 하고, 먹고 살 만할 때는 감사의 기도를 많이 하고, 인생의 황혼에 서서는 참회의 기도를 많이 한다. 그 가운데에도 인생에는 소망의 기도를 드릴 날이 그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그런 소망마저도 없는 사람이 많다.   믿음 생활을 하든 하지 않든 성화(聖畵) ‘기도하는 손’은 큰 감동을 준다. 그 가운데 헝가리 세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독일(신성로마제국)에 이민 가서 활동한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의 ‘기도하는 손’(Betende Hande)이 특히 유명하다.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그림은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바라보는 사도들의 손을 그린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그림의 모티프에 대해 여러 일화가 있다.   뒤러에게는 평생 고락을 함께한 친구 프란츠 나이슈타인이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가난해서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제비뽑기로 나이슈타인이 먼저 돈을 벌어 뒤러의 학비를 대고, 뒤러의 공부가 끝나면 뒤러가 번 돈으로 나이슈타인이 그림 공부를 하기로 약속했다.   친구가 보내준 학비로 공부한 뒤러는 천재성을 인정받아 황실 화가가 될 정도로 성공했다. 뒤러가 빚을 갚으러 찾아갔을 때 나이슈타인은 목수(일설엔 식당 종업원)로 일하면서 뒤러의 성공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친구는 이미 오랜 잡일로 손이 굳어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미안하고 슬픈 마음에 뒤러가 그 친구의 손을 그린 것이 바로 ‘기도하는 손’이다. 화구도 없이 푸른 잉크로 그린 단색 데생이다. 지금도 오스트리아 빈의 알베르티나 박물관에 보관돼 500년 동안 관객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동양의 관포지교(管鮑之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있습니까.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기도 그림 공부 친구 프란츠 황실 화가

2023-05-31

“예술은 하나님에 대한 미학적 차원의 경험”

‘코리언 모네’, ‘여자 피카소’ 등으로 불리며 주류사회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 중남미 등 전 세계에서 단색화 화가로 알려진 강현애 작가가 한인 커뮤니티에서 첫 전시회를 연다.     샤토갤러리(관장 수 박)는 오는 29일부터 5월 27일까지 강현애 작가 초대전 ‘신의 음성’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유명 옥션과 아트 쇼에서 뮤지엄 아티스트로 알려진 강현애 작가는 작품 가격이 온라인을 통해 오픈되어 있고 서포트 그룹이 있을 정도로 인기 작가다.     4500스퀘어 피트의 전시실 전 공간에서 9피트 대작 '그레이스'를 포함해 40여점이 소개된다.     화가이자 조각가인 강작가는 전통적 한국의 정신과 서양의 추상적 표현주의를 연결해서 작가 특유의 화풍을 창조했다고 인정받고 있다.     지난해 뮤지오 박물관은 강현애 작가 초대전 ‘거룩한 대화’를 열며 “폭발적인 색상과 질감이 살아있는 대형 캔버스를 만들기 위해 물감 및 기타 재료를 겹겹이 쌓아 작품을 만든다”며 “한국의 단색화 예술 전통을 활용하고 있다”고 극찬했다.                                   강 작가의 독특한 작품 기법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조소 전공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조각 외에도 회화, 소묘, 판화, 한국 전통 도예를 공부했다.     1993년에는 미주로 이주해 마크 로스코 등 미술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미국 진출은 강 작가에게 큰 전환점이 됐다.     조각, 소며, 판화 등을 기반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색과 질감의 사용에서 볼 수 있는 그만의 독특한 새로운 스타일을 구축했다.     그는 단색의 엄숙함과 차분한 흙색 조가 특징인 다른 단색화 작가들과 달리 작품의 광채가 천상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유쾌하고 밝은색의 사용을 즐긴다.   독특한 화풍에 대해 강작가는 “재료를 두껍게 칠하는 임파스토 색채 이론과 분할법 색채 이론을 사용해 작품의 광도와 생동감을 높이고 두꺼운 붓질을 통해 그림이 내부에서 빛을 발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기법을 사용한다”며 “생생한 색감, 남아있는 듯한 빛, 근본적인 질감을 통해 숭고한 힘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강현애 작가에게는 창작이란 그녀의 신앙 표현이자 고백이기도 하다. 작품에 나타나는 여러 층의 붓질은 그의 기도문이기도 하다. 그는 “예술이란 하나님에 대한 미학적 차원의 경험”이라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신적 체험을 추구하는 행위인 명상의 형태를 띤다”고 말했다.     강 작가는 이탈리아, 러시아, 모나코, 멕시코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전 세계의 여러 곳에서 전시를 한 바 있다.     그의 작품은 뮤지오 박물관, 순천현대미술관, 브레아 역사학회,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영구소장되어 있다.   샤토 갤러리 수 박 관장은 “강현애 작가 작품은 시간대별로 조명 따라 다르게 보인다”며 “직접 와서 원작품을 꼭 보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오프닝 리셉션은 4월 29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열린다.     ▶주소:3130 Wilshire Blvd, #104, LA   ▶문의:(213)277-1960 이은영 기자 lee.eunyoung6@koreadaily.com하나님 예술 단색화 예술 작품 기법 단색화 화가

2023-04-23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별난 공식

별난 공식   나 만의 색깔을 갖는다는 것 / 수 천, 수 만의 소문으론 설명될 수 없지 // 꽃의 색이었던가 / 잎의 색이었다가 / 하늘의 색, 바다의 색은 기억날 듯 한데 / 그걸 바라보는 사람의 색들은 / 오랜 시간을 인내한 후 가지게 된다는 / 은근히 풍기게 된다는 // 바라보는 시각을 뒤집어 보면 / 내 색이 아닌 당신 색으로 보여진다는 / 아픔이 반쪽만 보이기 시작한다는 // 시간을 먼 발치 별빛에 묶어두면 /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은 / 슬픔에도 없는 공식이 존재한다는 //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건 실례가 아니랍니다 // 색보다 향기는 오래 남아 / 그 향기는 봄마다 넓고 낮게 퍼져 가고 / 꽃은 바람에 흔들려 색은 떨어지지만 / 향기는 남겨져 색으로 그려진다는// 얼굴이 달아 올랐지 // 슬픔에도 없는 침묵 이라는 / 개나리 꽃가지 바람에 춤추는데 / 이렇게 낯선 하늘이라니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건 실례가 아니랍니다. 나의 감정을 참다 보면 마음의 병을 가지게 되니까요. 이번 주는 무척 바빴답니다. 내 일에 집중할 수 없을만큼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답니다. 돌아서면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기도 했답니다. 살다 보면 만남과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성장하고 커가는 느낌을 가지게 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좋을법한 경우도 종종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제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은 향기로 혹은 색깔로 남겨지는 것 같습니다. 한 순간을 만났든 오랜 세월을 살아왔든 사람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색깔이 있고 자기만이 풍기는 향기가 있답니다. 짧은 시간 만나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고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잊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답니다. 내가 꼭 필요한 시간에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제나 내 곁에서 분신처럼 날 돕는 사람도 있답니다. 내가 좋은 날엔 내 곁에 있었는데 내가 힘들고 아플 때엔 나를 떠난 사람도 있답니다.     사람의 관계란 우연히 만나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멀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서로의 관심에 공감하면서 깊어지는 경우도 있답니다. 서로의 관계가 인연이 되고 필연이 되면 다행이지만 서로에게 아픔이 되고 무거운 짐이 된다면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되고 맙니다. 얼굴이 먼저 떠오르면 보고 싶은 사람이고 이름이 먼저 떠오르면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어느 시인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외로움은 누군가가 채워줄 수 있지만, 그리움은 그 사람이 아니면 채울 수가 없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반가운 소식에 하루가 빛났습니다. 이렇게 만나 뵐 수 있는 거군요. 오래 전 젊은 날 캠퍼스에서 만나 끓는 피를 나누었던 한 사람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공항엔 못나가지만 그날 저녁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경주에서의 만남과 서울역에서의 고마운 모습은 나의 남은 날 내내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책 출간을 앞두고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는 한 친구는 단 열흘밖에 만나지 못한 그야말로 막 알게 된 도반이지만 깊은 속내를 뒤집어 말해도 웃으며 받아주는 오래된 연인 같답니다.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한 친구는 출판기념회 장소로 고민하는 나에게 선뜻 이곳에서 하라며 시간과 장소를 비워놓겠다는 눈물 핑 도는 말을 보내왔습니다. 한 친구는 하모니카를 불어주겠다고, 몇 몇 시인들은 축사를, 대학동기는 사회를 자청하고 나섰답니다. 누우면 가슴이 저며오는 이름들이, 얼굴들이 있습니다. 오늘 밤하늘엔 유난히 고운 별들이 빛을 발합니다. 반평생을 살아도 낯설은 시카고의 봄은 언제나 오려나요. 비 같은 눈이 주룩주룩 내리는데….(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공식 오늘 밤하늘 시인 화가 개나리 꽃가지

2023-03-27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일곱마리 말이 끄는 마차

세상에는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무겁고 힘 겨워도 어깨에 지워진 짐을 내려 놓지 못한다. 멍에를 맨 소처럼 지겹고 힘겨워도 묵묵히 앞만 보고 걷는다. 해 지기 전, 더 늦기 전에 넓디 넓은 밭고랑을 소처럼 묵묵히 갈아야 한다.    유년의 기억 속 덩치가 우람한 소는 슬픈 눈망울을 가졌다. 삼만이 아재가 날샌 솜씨로 멍에를 씌울 때도 큰 눈을 한두 번 꺼벅거릴 뿐 요동하지 않는다.     ‘멍에’는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해 말이나 소의 목덜미에 얹는 굽은 나무 막대기다. 소의 몸 형태에 따라 크기를 다르게 만드는데 나무 양옆에 구멍을 뚫고 소의 멍에와 쟁기를 이어주는 보줄을 맨 다음, 가슴걸이판을 소의 목쪽 아래로 잡아당기면 멍에가 안정되어 소를 잘 끌 수 있다.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나 억압’도 비유적으로 ‘멍에’라고 한다.   오래 전 화랑으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국사람이 걸면 직원들이 무조건 바꿔준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칼럼 독자라며 전업 화가가 되고자 조언을 얻고 인생상담을 하고 싶어 오하이오주까지 오겠다고 한다. 내 앞길도 구만린데 상담이라니, 목소리가 떨리고 절실해서 거절하기 힘들었다.     화랑과 아트센터 운영하며 아이 셋 간수하고 남편 섬기고(?) 시어머니와 어머니 두분 모시고 번갯불에 콩 튀듯 사는 형편이라 낯선 손님 맞을 상황이 아니었다. 화랑 경영하며 제일 민망할 때가 신예 화가(Budding Artist)들이 보내는 작품과 프로필을 외면하는 일이다. 그래도 나 좋다고, 존경(?)한다며 먼 길 오겠다는 여자분을 호텔에 혼자 재울 수도 없는 처지라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우리집에 숙식하며 화랑에 함께 출퇴근했다.     그 분은 ‘화가의 길이냐, 가정을 지키느냐’의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는 듯 했다.  세세하게 안 물어봤지만, 결혼 생활을 지키려면 ‘화가의 꿈’을 접어야 한다고 했다. 가정과 남편, 자식을 포기하고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라고 말했다. 나도 모른다.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서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 있기나 한 건지. 마침 번화한 도시 한가운데 오래된 마차 한 대가 서있는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이 그림은 마차를 끌고 갈 말이 필요하군요. 몇 마리 말이 필요한지는 마부가 잘 알겠지요”라고 했다. 출발 게이트 쪽으로 가던 그녀가 돌아와 날 꼭 껴안았다. “두 마리 말 고삐 잡아 볼게요.” 눈에 이슬 같은 눈물이 반짝였다.     홍상화 장편소설 ‘사람의 멍에’는 생의 멍에를 벗고 자유를 찾아 나선 한 예술가의 이야기다. 출판사 서평에서 ‘삶의 멍에에서 벗어나려는 한 인간의 아름다운 비상’이라 소개한다. 생의 멍에를 벗고 비상하는 그림은 없다.     나는 일곱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달린다. 가정도 자녀도 부모도 사업도 포기할 수 없는 내가 쥔 말 고삐다. 마르크 샤갈이 못 되도 화가 되길 꿈꾸고, 참회록 적듯 글을 쓴다. 청상의 어머니가 내 손을 놓지 않았던 것처럼 아이들 손을 꼭 다잡는다. 멍에를 목에 걸고 있었기에 위험한 탈출을 꿈꾸지 않았는지 모른다.     ‘수리아’는 인도의 베다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으로 일곱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하늘을 달린다. 밤이면 어둠을 거두고 하계(下界)를 내려다 보며 지상을 둘러본다.     삶이라는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 인생의 치열한 도면을 그린다. 그림이든 글이든, 형체 없는 바람이라 해도, 끝나지 않는 길을 향해 일곱번째 말이 달린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마차 전업 화가 신예 화가 홍상화 장편소설

2023-03-14

몰입하고 공감하는 시각적인 삶의 일기

지난주에 열린 LA 아트쇼에서 특별전시 작가로 선정되면서 집중 조명을 받은 김원숙 화가가 LA 한인타운 샤토갤러리(관장 수 박)에서 개인전 ‘기적의 날들’을 개최한다.     LA 아트쇼는 김원숙 작가에 대해 “신비롭고 생생한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이자 인간의 고난의 보편성에 대한 이야기꾼”이며 “한인 이민자로서 경험과 성찰적인 태도로 몰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시각적인 삶의 일기를 만들었다”고 극찬했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김원숙 작가의 작품은 현실 세계와 환상, 꿈 등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단순한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동양화의 붓과 서양의 유화 기법을 결합해 우아한 아름다움을 그려내고 여기에 신화적 이야기들을 더해 신비스러운 작가의 세계로 관객을 초대한다.     수 박 샤토갤러리 관장은 “작가는 빛과 그림자, 아름다움과 위태로움, 명료함과 모호함, 자신감과 연약함,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균형을 추구한다”며 “뒤돌아보면 모두가 기적만 같은 삶에 대한 감사와, 그 삶이 무엇인가 보다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질문해 다른 관점의 상상 세계를 엿보게 한다”고 설명했다.     이미 주류 미술계에 널리 알려진 김원숙 작가는 1978년 ‘미국의 여성작가’에 선정됐고, 1995년 유엔은 작품 ‘보름달 여인’으로 창립 50주년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또 김작가의 모교에 대한 공헌으로 일리노이 주립대학교의 예술대학이 ‘김원숙 예술대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게스트 큐레이터 그레이스 지가 기획한 이번 전시회는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작품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전시회는 3월 11일부터 4월 8일까지 열리며 오프닝 리셉션은 3월 11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다.     ▶주소: 3130 Wilshire Blvd #104, LA     ▶문의: (213)277-1960 이은영 기자몰입 공감 김원숙 예술대학교 김원숙 화가 샤토갤러리 관장

2023-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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