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늘 놓아두었던 자리
그 물건이 없으면 여간 불편하지 않다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든
그 장소, 그 시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기적 같은 행복이 아닐까 싶다
다만 새벽만이 아니다
사람도 그렇다
2
깊은
어둠으로부터
깨어나는 새벽
알지 못하는 이야기로
새벽은 깨어나고
마른 가지에 살이 붇고
먼동은 새벽을 당겨 온다
동트기 전 새벽은
깊은 물 속과 같아서
물속 떠오는 비늘 같아서
가득한 물고기 집 같아서
새벽하늘에 빠져
깊이 잠기다 보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잠기다 보면
어둠 속 보이지 않던 것들에게
찾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흔들 수 없는 어둠 속엔
단단한 껍질을 벗는 하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고
깨어난 생명이 내쉬는 숨
허리를 세운 직립의 나무
흔들 수 없는 어둠이 옷을 벗고
하늘의 밑동을 채우는
허락된 하루의 축복이 온다
버려야 할 것이 있고,
담아야 할 일이 있기에
걸어야 할 길이 있고,
주워야 할 이삭이 있기에
나만을 위한 하루가 아니기에
기대가 된다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깊은 곳에서 깨어나는 새벽
내 안에서 매일 눈을 뜨는 사람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옷깃을 여미게 한다
3
시를 쓰듯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릴 때 시를 쓰는 마음을 가지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언제부터인가 멀어졌던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잃어버린 마음을 찾고 싶었다
정한수를 떠놓고 소원을 빌듯
새벽 커피를 내리고 마음을 다잡을 때처럼
맨발로 꽃피는 뒤란을 걸을 때처럼
그런 마음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부자가 된다
가진 자의 행복이 부럽지 않다
그 자리에 그가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 시간에 그 풍경이 내 옆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시를 쓰듯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림을 그리듯 시를 쓸 수 있을까? 물음 후엔 늘
치열한 삶에서 피하려는 비겁한 내가 보이기에
충분히 사랑받았다는 의미가 새롭다
처음 그가 내밀었던 따뜻한 손의 체온이 그립다
내 옆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4
그의 시간은 나의 시간이기도 했다
같은 하늘, 같은 계절을 보내었기에
시간 속에 녹아든 그만의 일상을 추정해 볼 때
그의 일상 안으로 나의 시간이 저물기도 했다
그 자리에 있었단 해프닝만으로
그 자리를 채웠던 사람들 사이엔
먼 나라로부터 밀려왔다던 이방인의 숨
먼 곳으로부터 내게로 오는 별빛이 그렇고
쉼 없이 밀려왔다 되돌아가는 파도가 그랬다
그리고 그가 내게로 온 것이 그랬다
다른 어떤 것을 말하지 않아도
그가 내 곁에 내어준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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