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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누울 자리

6촌 동생의 생일에 다녀왔다. 나와 내 동생, 우리가 아저씨라 부르는 아버지의 6촌 동생, 그리고 생일을 맞은 6촌 동생네, 이렇게 4집이 모였다. 일가친척이 귀한 실향민의 자식들이다 보니 촌수와 상관없이 가깝게 지낸다. 지난해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부모님 세대는 모두 떠나시고, 이제 우리 시대가 되었다.     모이면 화제는 정치도 연예인의 스캔들도 아니다. 주변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들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복용하는 약, 어디 아픈 데는 무엇이 좋다더라는 이야기들이다. 이날은 무릎이 아파 지팡이를 짚고 온 숙모 탓에 자연스럽게 아픈 이야기로 시작해 장지 준비로 이어졌다. 6촌 동생의 아내가 장지를 마련하려고 요즘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다고 한다.   나와 내 동생은 부모님 돌아가신 후 장지를 사 두었다. 장지는 5년 할부로 구입했고, 할부가 다 끝난 후에는 다시 장례보험을 5년 할부로 구입했다. 부모님은 같은 해 봄, 가을로 돌아가셨는데, 살아생전 미리 마련해 두셨던 장지와 장례보험 덕에 마음 편히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주변에 나이 든 친구들이 여럿 있지만, 장지를 미리 마련해 둔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 아마도 아직 먼 훗날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죽은 후 어디로 갈 것인지는 개인에 따라 생각이 다를 것이다. 산소 쓰기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장 후 납골당이나, 아예 바다나 산에 뿌려 달라는 사람도 있다.     내가 일찌감치 장지를 사놓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내게는 4명의 자녀가 있다. 나 죽고 나면 아내까지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진 5명이 의견을 모아야 한다. 장례를 어떻게 치를 것인가부터, 관이며 꽃, 장지, 화장해서 재를 뿌리더라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방법에 따라 발생하는 비용도 천차만별이다. 살림에 여유가 있는 놈은 비용이 좀 드는 방법을 선호할 수도 있고, 형편이 어려운 놈은 은근히 비용이 적게 드는 방법을 바랄 것이다. 서로 눈치를 보고, 언짢은 말이 오갈 수도 있다.     경험해 보니, 나는 보고 싶을 때 찾아갈 수 있는 산소가 좋다. 얼마 전에도 딸아이가 부모님의 산소 번호를 묻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알고 보니 그날 친구 할머니의 장례식 참석차 로즈 힐스에 갔는데, 간 김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고 가려고 한 것이다. 잠시 후, 산소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임에도 이를 미리 생각하고 계획하는 일은 소홀히 하는 것 같다. 그중 하나가 내 이야기를 남기는 일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내가 그분들에 대해 너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분들이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고, 어떤 일이 가장 힘들었으며, 그 힘든 시절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글로 써 놓았다. 내 이야기뿐만 아니라, 내가 기억하는 외가와 일가친척 이야기까지 썼다. 4년 전부터 매일 일기를 쓴다. 요즘은 번역기가 좋아 훗날 자녀나 손자들도 한글 원고를 번역기에 올려 영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기억하고, 행여 내게 받은 상처가 있다면 이해하고 용서해 주기 바라는 마음이다.  고동운 / 전 가주 공무원이 아침에 일가친척 이야기 할아버지 할머니 장지 준비

2024-04-10

[이 아침에] 새해 당부

늘 떠오르는 해지만, 새해 아침에 맞는 해는 언제나 새롭다. 지난해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새로운 날의 소망을 담고 떠오르기 때문이다. 새해를 맞으며 당부의 말이 오간다. ‘새해에는 건강히 지내라고, 하는 일마다 잘되라고, 소원 성취하라고’. 말로 단단히 부탁하는 당부가 고맙다.     ‘풀꽃’이라는 시로 이름을 알린 나태주 시인의 ‘새해 아침의 당부’라는 시가 있다. ‘올해도 잘 지내기 바란다/내가 날마다 너를 생각하고/하나님께 너를 위해 부탁하니/올해도 모든 일 잘될 거야’. 시인은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푸근한 소리로 새해를 맞는 이들에게 올해도 모든 일 잘될 것이니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걱정도 하지 말고 또박또박 걸어서 앞으로 가기만 하라고 당부한다.     부모님이 계신 고향을 떠나 도시에 사는 아들이 있었다. 효심이 깊었던 아들은 고향에서 농사짓는 연로하신 부모님이 늘 마음에 걸렸다. 좋은 교육을 받고, 번듯한 직장에서 나름대로 괜찮게 사는 아들이었다. 착한 아들은 시간만 나면 부모의 농사일을 돕기 위해 고향을 찾았다. 꽤 큰 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농사일은 끝이 없었다. 모내기와 추수는 물론, 비료 주기, 농약 뿌리기, 잡초 제거하기, 물 대기 등 일 년 열두 달 쉼 없이 이어지는 농사일에 아들도 슬슬 지쳐갔다.   그날도 부모님을 돕기 위해 고향에 내려온 아들이 새벽에 부모님과 함께 널따란 들판 앞에 섰다. 해도 해도 끝없는 일, 아무리 부지런히 일해도 표나지 않는 일이 갑자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이런 아들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아버지가 말했다. ‘눈아, 겁내지 말라 손이 있다!’   아들의 가슴에 파고든 이 말은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고 은근히 낮잡아 보던 배우지 못한 아버지의 말이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 일들에 치여 두려움으로 마주한 숱한 날들을 성실한 손으로 감당해 낸 농부의 외침이었고, 두려움에 주저앉지 않고 몸으로 부딪치겠다며 던지는 출사표요, 결국은 눈에 들어오는 두려움을 손의 꾸준함으로 이겨냈다는 체험이 담긴 지혜의 말이었다.   우리의 눈앞에도 2024년이라는 널따란 들판이 펼쳐졌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무섭다. 전쟁과 재해가 끊이지 않는다. 올 한 해도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더구나 세상에서는 반갑지 않은 소리만 크게 들린다.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여기저기서 쉴 새 없이 터진다. 요즘은 나만 잘한다고 안녕을 장담할 수 없는 세상이다.   또다시 시작되는 한 해를 바라보면 솔직히 겁부터 난다. 불확실한 미래를 내다보면 두려움이 밀려오고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아무리 세상이 험할지라도 거친 세상이 토해내는 두려움을 이길 무기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눈에 들어오는 일의 무게감을 이겨내게 하는 것이 성실한 손이라면, 마음속에 생긴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것은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손이다.     새해를 맞아 스스로 이른다. ‘눈아, 겁내지 말라 손이 있다’. 눈앞에 가득한 두려움을 이겨낼 성실한 손이 있다. 험한 길 홀로 가게 내버려 두지 않고 붙잡아 줄 손도 있고, 내가 잘되기를 빌어 주는 기도의 손도 있다. 그 귀한 손이 있는데 겁낼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 손을 의지해서 새해 당부를 한다. ‘올해도 모든 일 잘될 거야’라고 말이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이 아침에 새해 당부 새해 당부 새해 아침 이웃집 할아버지

2024-01-10

[열린광장] 하모니카 부는 100세 할아버지

100세에 88하게 사는 할아버지가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실버레이크 지역에 사는 그는 하루건너 그리피스 천문대와 할리우드산을 한 바퀴 돌아가는 2마일 코스를 하이킹한다. 그는 언젠가 신을 신다가 몸이 무겁고 거북한 것을 느낀 다음 체중 감량을 위하여 하이킹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할아버지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1930년대 가족이 펜실베이니아로 이주했다. 그는 2차 대전 때 미군으로 유럽, 아프리카,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고, 제대 후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해  USC에서 미술 석사 학위를 받고 미술 교사로 50년을 재직했다.   그가 조용히 하이킹만 했으면 유명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하이킹 도중 가끔 벤치에 앉아 쉬면서 하모니카를 연주한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벤치의 연주자가 됐다. 그는 남들이 즐거워하니 자기도 즐겁단다.       이 노인은 지난해 11월 26일, 100세가 되었다. 그의 장수 비결은 무엇인가. 첫째, 몸을 움직인다. 그는 모든 근심 걱정을 로스앤젤레스시의 고층 건물과 주택에 놓아두고 그리피스 천문대 하이킹을 하며 자연을 즐기고 친구를 사귄다고 한다.  또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인류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투쟁하며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악순환을 거듭하지 않았느냐며 태연자약한 태도다.   그는 하이킹뿐 아니라 두뇌 활동도 열심히 한다.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한다. 바이올린도 두 개나 만들었다. 컴퓨터로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100세 노인이 컴퓨터로 만화를 만들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는 어릴 때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어느 목공소에 들러 가구 만드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데, 주인이 그에게 도구를 주면서 한번 만들어 보라고 했다고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만들어 본 것이 미술가의 씨앗이 되었다고 한다.   이 할아버지보다 10년 아래인 이 젊은이도 그를 따라서 하이킹을 할 계획이다. 우리 주변에는 하이킹 코스가 널려있다. 내가 사는 부에나파크에서 가까운 롱비치에는 여름에도 시원한 울창한 숲, 네이처 센터가 있다.     나는 두뇌 활동을 보강하기 위하여 올해부터는 영어 신문도 구독했다. 노인들은 신문을 읽어야 한다. 치매 예방의 한 방편으로 신문을 읽고 글을 쓴다. 글을 쓰려면 많이 읽고(多讀), 많이 쓰고(多作), 많이 생각해야(多商量) 한다. 활발한 육체와 두뇌 활동의 병행이 필요하다.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열린광장 하모니카 할아버지 하이킹 코스 하이킹 도중 그리피스 천문대

2024-01-09

[이 아침에] 나는 왕이로소이다

‘밤 하늘의 별도 그에게는 총맞은 상처. 그것도 총알이 들어간 자리가 아니라 빠져나온 자리. 너덜너덜 찢긴 살점이 별의 빛의 갈라져서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그의 첫 시집 제목은 ‘사출 (射出) 상처가 있는 밤 하늘(Night Sky With Exit Wounds)’이다. 그의 이름은 ‘큰바다’.  엄마가 지어주었다. 쫓겨난 조국과 피난 온 이국 사이의 큰 바다.  아들의 꿈이 그만큼 장대하기를 바랐을 터이다. ‘큰바다’는 미국의 시민이 되고 시인이 된다. 미국의 언어로 엄마 그리고 할머니가 겪었던 전쟁의 기억을 그린다.   큰바다가 한 살 때 할머니와 엄마는 생존의 위협을 느낀다. 베트남에선 1990년 때 까지도 미국은 적국이었다. 엄마의 아버지는 미국인. 엄마는 전쟁 때문에 태어난 혼혈아.  그것이 공산 베트남 당국이 그들을 박해할 빌미가 됐다. 그래서 전 가족이 베트남을 탈출한다.     필리핀 난민 수용소에서 발이 묶인다. 15년간 소식이 없던 할머니의 미국 남편이 스폰서를 해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 정착한다. 그 때까지 지니고 있던 할머니의 결혼증명서 덕분에 할머니의 남편과 연락이 되었던 터이다.   큰바다는 할머니와 어머니 품에서 자란다. 온 가족이 네일 살롱 비즈니스에 매달린다. 할머니는 이미 조현병 환자, 어머니도 어린 시절 겪은 전장의 공포 때문에 가끔씩 환청·환각에 시달린다. 큰바다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집에서는 베트남말만 하기 때문에 11살이 될 때까지 영어를 제대로 못한다.     그가 14살이 되었을 때 여름, 하트포드 교외 담배 농장에서 일을 한다. 거기서 두 살 많은 백인 남자를 만난다. 인생의 봄, 은밀한 사연이 생긴다.     큰바다는 엄마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엄마, 나 여자는 안 좋아해.” 엄마는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녀가 간직했던 가족사의 비밀을 아들에게 말해준다. “네가 할아버지라고 가끔씩 찾아가는 그 사람 사실은 내 아버지가 아니야.” 할머니의 서류상 남편인 그 백인 할아버지, 그가 할머니와 결혼한 것은 맞지만, 결혼 당시 할머니는 이미 임신 4개월. 농사꾼이었던 할머니는 다른 미군 병사에게 강간을 당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큰바다가 쓴 자전적 소설 ‘지상에서 우리는 잠시 화려하지(On Earth We’re Briefly Gorgeous)’에 나온다. 소설이 출간된 2019년 큰바다는 미국 문단의 천재 작가로 우뚝 선다. 그해에 엄마가 숨진다. 그 슬픔을 2022년 ‘시간은 어머니이다(Time is a Mother)’라는 시집에 담는다. 영어를 못하는 엄마가 어렵게 찾은 단어 ‘오션(Ocean)’이 그의 이름. 성은 왕(王)자의 베트남어 발음인 ‘Vuong’.   ‘Ocean Vuong’은 홍사용의 싯귀가 딱 들어 맞는 인생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십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울음기가 밴 약간 여성스러운 그의 목소리. 이 시대 최고의 영어권 문인. 그는 현재 뉴욕대학의 현대 시학 교수로 있다.   김지영 / 변호사이 아침에 백인 할아버지 공산 베트남 영어권 문인

2023-12-03

산타 할아버지 기다리는 '어른이'에게 "핫딜이 쏜다!"

 미주 한인 최대 온라인 쇼핑몰 '핫딜'에서는 2023년 한 해 동안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내준 고객들을 대상으로 특별한 연말 이벤트를 펼친다.   핫딜 웹사이트에서 아이쇼핑을 즐긴 뒤에 산타 할아버지에게 받고 싶은 선물을 적은 쪽지를 베개 밑에 넣어두었던 어린 시절 깜찍한 동심을 발휘해 보자.     '핫딜' 인스타그램(@hotdeal.official) 게시물 댓글에 갖고 싶은 '핫딜' 판매 상품을 적으면, 추첨을 통해 '핫딜' 산타로부터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이벤트 상품은 ▶추운 겨울 따뜻한 잠자리를 만들어주는 경동 나비엔 카본매트 퀸사이즈(449달러 상당) ▶경동 나비엔 온수매트 퀸사이즈(449 달러 상당) ▶귀뚜라미 카본매트 퀸사이드(519달러 상당) ▶쿠첸 IH 듀얼프레셔 전기압력밥솥 10인용(359달러 상당) ▶휴비딕 프리미엄 눈마사지기(69달러 상당) ▶헤라 블랙쿠션 본품+리필 21N1 (56달러 상당) ▶로얄 캐네디언 타트체리(50달러 상당) ▶뷰니스 효소구마 30포(62달러 상당) ▶취미생활 취나물쉐이크(27달러 상당) ▶살림백서 실리콘 바르는 곰팡이제거젤 (38달러 상당) 등 핫딜의 인기 상품들로 구성돼 있다.   해당 이벤트는 오는 11월 20일(월)부터 12월 19일(화)까지 '핫딜' 인스타그램에서 진행될 예정이며, 당첨자는 12월 22일(금)에 발표한다.     한편, '핫딜'은 땡스기빙데이와 연말을 맞이하여 품질 좋은 한국 브랜드 제품들을 저렴한 가격에 선보이고 있다.     ▶문의:(213)368-2611   ▶상품 살펴보기:     hotdeal.koreadaily.com핫딜 할아버지 산타 산타 할아버지

2023-11-15

[아버지 선물] 작은 선물에도 아빠는 어깨가 으쓱하다

젊은 아빠, 나이든 아빠, 할아버지까지 선물을 반기지 않는 사람은 없다. 1세 아버지들은 “비싼데 이런걸 왜 샀니...참” 하면서도 “우리 아들이 사줬어” “우리 딸이 한사코...” 등등의 미사여구로 한껏 어깨가 올라간다. 살면서 필요한 대목이다. 그 것이 10불짜리 티셔츠이건, 20불짜리 모자이건 의미가 깊다. 이왕이면 틈이 날 때마다 이것 저것 사드리면 좋아들 하신다. 이제 연말이 됐으니 뭔가 기억에 남을 좋은 선물을 해야하는데 평소에 생각만 하고 쇼핑할 시간이 없었다면 아래 내용을 바탕으로 가닥을 잡아보면 어떨까. 아버지들 좋아하는 것들 중심이지만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에게도 살짝 겹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노래방 기계   팬데믹 이후에 노래방이 뜸해졌다. 노래 꽤나 즐기는 50~80대 아버지들은 가끔 집에서 술한잔 하실 요량이면 묵혔던 노래 가락을 다듬고 싶어진다. 동시에 크고 작은 파티(생일, 결혼기념일, 명절, 결혼식 뒤풀이 등)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당연히 노래와 춤이 합류하는 가족들이 적지 않다. 또한 기회가 있을 때 아이들의 춤과 노래 재롱만큼이나 어르신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있을까.     ‘가라오케 머신’(각종 사이트에서 찾기 편한 이름)으로 주로 불리는 노래방 기계는 진화를 거듭해 가정 안방까지 편리하게 설치가 가능해졌고 소정의 비용으로 신곡 업데이트까지 주기적으로 할 수 있다. 오디오 스피커와 스마트폰 합체 기능을 가진 제품과 한국의 노래방 기계와 같은 중대형 제품으로 나뉜다. 아무래도 소형 제품은 저렴하고 휴대가 용이한 점이 있으나 영상 메뉴가 없거나 업데이트가 어려워 시니어들이 쓰기 불편할 수도 있다. 중대형 제품에는 한국의 TJ 등 2~3개 제품이 있는데 가정용으로 제작된 제품들이 인기다. 무선 마이크를 포함해 가격대는 600~2000달러로 다양하다. 영상과 결합되고 다국언어를 지원하는 중국산 제품들도 좋은 초이스다. 일부 언어 지원이 깔끔하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성능과 내구성 측면에서 수준이 높아졌다. 중국산 제품들은 아마존 등에서 600~120달러대로 구입이 가능하다. 한국 제품들은 한국을 방문할 때 구입해오면 좋다.   ▶스크린 프로젝터   아이들 슬립오버(sleepover)하면 한번씩 거실이나 가든에서 천막을 치고 해보는 것이 프로젝터 영화 감상이다. 따로 스크린이 없이 하얀색 벽에 화면을 쏘면 되기 때문에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 물론 요즘 TV들이 70~80인치로 커졌으니 무슨 프로젝터냐 할지 모르지만 프로젝터는 ‘추억 소환용’으로 제격이다. 최근에는 비교적 쉽게 옛 영화들을 유료 무료로 구할 수 있다. 부모님 생일에 두 분이 즐겼던 옛 영화를 서프라이즈로 상영해드리면 어떨까. 사운드도 리매스터돼서 나오는 경우도 많으니 추억 살리기에 제격이다.     미니 형태로 된 프로젝터는 싸게는 60~70달러대에서 시작하며 첨단 제품은 2000달러까지 호가한다. 써본 소비자들은 300~400달러 정도로 장만하면 무난하다고 전한다. 다만 스마트폰 합체 모델보다는 HDMI, USB 연결이 용이해서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모델을 권한다. 또 일부 블루투스 모델도 찾아보면 결정에 도움이 된다. 요즘은 출력이 높은 내장 스피커도 함께 나오는 경우도 있고 기존 TV 스피커에 USB나 RCA 잭을 연결해도 좋다. 또 요즘엔 아예 안드로이드 시스템을 넣어 바로 넷플릭스나 유튜브 등에 연결해 보기도 한다. 랩탑이나 타블로이드가 내장된 형태인 셈이다.     ▶블루투스 트래커   깜박 깜박 소지품들 찾기가 어려워 고민인 아버지가 계신다면 트래커(Tracker)가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다. 아이폰이나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은 이미 찾을 수 있는 루트가 있지만 자동차 키, 집 열쇠, 금고 열쇠, 귀중품, 등은 깜박 잃어버리면 찾기 힘들어질 수 있고 스트레스가 된다. 트래커는 애플이나 안드로이드를 기반으로한 제품들도 있으며 ‘타일(tile)’과 같은 독립적인 제품들도 나와있다. 일부 어르신들은 자동차에도 설치해두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한다. 일부 사생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가족 안에서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면 트레커는 매우 유용한 선물이다. 가격이 저렴해져 개당 10달러 미만부터 40달러짜리까지 다양하다. 선물과 동시에 앱을 설치해두면 어른들이 필요한 귀중품에 붙여서 쓰면 된다. 제품 종류가 수십가지에 달하니 앱 연동과 이용 편의도 등을 감안해 구입하면 된다.     ▶마사지건   이게 아직도 없는 가정이 있나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다. 저렴해진 가격 탓도 있다. 시중에는 20~30달러짜리부터 400~500달러까지 다양한 제품들이 있다. 대부분이 충전형 리튬 배터리를 쓰고 있으며 배터리 용량이 커지고 대중화되면서 가격이 낮아졌다. 골프, 테니스, 등산, 요가 등 운동을 하고나서 근육과 관절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아직 아버지가 일을 하고 계신다면 사무실에도 하나 두면 요긴하다. 3~4년 전만해도 T, H, O사 제품이 300달러 가량으로 판매됐으나 요즘엔 수십여 제조사에서 관련 제품을 내놓고 있다. 선택의 폭이 너무 넓은 게 오히려 부담스러울 정도다. 구입시 필요에 따른 부착용 도구들(몸과 닿는 진동 부분)을 잘 확인하는 것이 좋고, 굳이 비충전방식을 택할 필요는 없다. 요즘엔 충전이 빠르고 1시간 이상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커스텀 제품   가족들이 커스텀 제품을 구입하고 선물하는 것은 전적으로 ‘추억 만들기’ 때문이다. 졸업, 입학, 생일, 결혼 등 수많은 특별한 날들을 더 재미나게 기억하기 위해서인데 아버지도 예외일 수는 없다. 아버지의 이름이나 사진이 들어간 제품을 주문해보면 어떨까. 아마존닷컴에 가면 무수한 제품들에 커스텀 디자인(이름, 그림, 문양 등)을 더해 제작할 수 있다. 일부는 그래픽을 그대로 인쇄하기 때문에 한글로도 커스텀 작업이 가능하다. 겨울이 유난히 추운 곳이라며 점퍼나 패딩에도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있다. 티셔츠, 골프 수건, 가방, 지갑, 장신구, 크리스탈 포토, 실내 장식품, 양초, 텀블러, 머그컵 등 헤아리기 힘든 많은 종류가 있다. 아버지의 취향과 활동 내용에 맞게 선택하면 되겠다.     제작 기간을 고려해 최소한 3~4주 전에는 준비하는 것이 좋다.  최인성 기자 ichoi@koreadaily.com아버지 추수 아버지 선물 아빠 할아버지 한국 제품들

2023-11-14

80년 전 러브레터에 담은 애틋한 사랑…영어·일본어 섞어 쓴 75통 편지

  한반도의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를 거쳐 미국까지 사랑을 이어온 두 한인 남녀의 80년 된 러브레터가 발견돼 화제다.     지난 2018년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손녀 자넷 곽(40·샌디에이고)씨는 옷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박스 하나를 열어보고선 깜짝 놀랐다. 내용물은 노랗게 빛바랜 편지 75통.     대부분이 30여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연애 시절 할머니에게 보낸 연애편지들이었다.     곽씨는 그 시절 할아버지 곽종기씨와 할머니 정영숙씨의 사랑 이야기의 발자취를 찾아 지난 8일부터 오는 22일까지 한국을 방문 중이다.   곽씨는 “자유를 억압받던 일제강점기의 암울했던 시절에도 사랑을 나누며 서로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었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는 모두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질 것이라 생각했고, 더 알고 싶어져 남동생과 한국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대구에 살며 1928년생 옆집 사는 동갑내기 친구로 만나 연인이 된 곽씨의 조부모는 할아버지가 서울대학교로 진학해 서로 떨어지게 되면서 편지를 주고받았다. 1943년에 시작된 연애편지는 그 뒤로 무려 10년이나 이어졌다.   당시는 황민화 정책이 추진되며 자유가 억압받던 시기였다. 경북여고를 다녔던 할머니는 총동원 체제 때 강제 동원돼 근로 활동을 해야 했다.     또 언어가 통제된 탓에 할아버지의 편지도 대부분 일본어로 쓰였다. 하지만 편지 속 한국의 서정적 정서만은 지워지지 않았다.     곽씨는 “할아버지는 당대 한국의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인용해 할머니에게 사랑 고백을 전하는 로맨티스트셨다”며 “미군정 시기에 들어서부터는 편지의 서두는 항상 ‘To my darling(내 사랑에게)’로 시작했고 ‘You’re my sunshine, you're my higher love(당신은 나의 햇살, 당신은 나의 높은 사랑)’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셨다. 편지들을 발견한 후에 한자와 일본어가 많아 해석 도움을 받고자 SNS에 올렸는데 많은 분이 할아버지의 낭만적인 시적 표현들에 감탄했다”고 말했다.     이어 “아름다운 내용도 많지만, 당시 위태로웠던 시대적 상황도 적나라하게 담겼다. 북한이 서울을 침공했을 때 할아버지는 아는 사람을 통해 어렵게 편지를 전달하며 급박한 상황을 전하기도 했다”며 “하지만 현실에 불안해하는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대구 집에 있던 감나무 얘기를 자주 하시며 함께 꾸려나갈 밝은 미래를 약속하셨다”고 말했다.     결국 둘의 사랑은 할아버지가 대학을 졸업한 후 대구에 돌아가 할머니와 결혼을 하면서 결실을 보았다.     두 아들을 낳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후 1989~1990년쯤 둘째 아들인 곽씨의 아버지 가족과 함께 미국에 이민을 왔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할아버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곽씨는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두 분이 아름다운 사랑을 꽃피운 이야기는 미래를 살아갈 자식들에게 또 다른 희망을 준다”며 “아무래도 한인 2세들에게 이런 시대적 어려움을 극복한 사랑 이야기는 생소하다. 요즘 K팝 등 한류가 널리 퍼지고 있는데 이렇게 당시 시대상과 역사가 담긴 러브스토리도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 한국을 다녀와 갤러리 전시나 책 출판 등을 고려 중이다”고 말했다.   남동생과 한국을 방문 중인 곽씨는 현재 경북대학교 김경남 사학과 교수와 함께 과거 할아버지·할아버지 자택과 편지 속 나오는 장소들을 방문 중이다. 일본강점기 때 주소이기 때문에 현재 주소를 찾기 위해서는 해당 관할지 중구청의 협조가 필요해 김 교수가 이를 돕고 있다.   김경남 교수는 “학술적으로 봤을 때 역사학과 기록학에서 일제강점기 학생들의 일상사라는 관점과 재미동포 역사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성이 있을 거 같다”며 “자넷씨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기록을 소중히 남겨 놓았던 것처럼 그 기록을 남겨놓으면 후손들은 그것을 보고 자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수아 기자 jang.suah@koreadaily.com일본 러브레터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 이야기 시절 할아버지

2023-10-12

[삶의 뜨락에서] 나이에 등급이 있다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전과 다른 자기 자신의 모습이 낯설고 당황스럽고 아직 자신이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친구는 아직도 펄펄 날아다니는데 나만 그런 것 같아 조금 억울하기도 하다. 유전자의 축복을 받은 소수의 사람이나 책과 방송에 나오는 기적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는 혹시 나도 하는 짧은 기대와 역시 나는 하는 긴 우울감에 빠지게 한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으로 이어지는 상실 5단계는 더는 젊지 않은 내 몸과 이별할 때도 그대로 적용된다. 단계마다 머무르는 시간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이 과정을 겪으며 현실 속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현재 좌표를 정확하게 인식할수록 항로와 도달할 장소 그리고 방법을 잘 정할 수 있다. 막연했던 몸의 신호가 좀 더 선명해지면 더는 미루지 말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과거에는 없었던 불편함이 느껴질 때 우리는 이전 같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엄마 뱃속에서 수정이 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전과 같은 때는 한순간도 없다. 사진 속의 내가 나를 닮은 누군가인 것은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들, 머릿속 생각들 그리고 가슴에 품고 있는 감정들이 계속 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변한다는 것은 좋을 때도 있지만 나쁠 때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끔 우리 가게 앞을 지나다니는 한국 할머니를 보았다. 나이는 들어 보이지만 자세가 꼿꼿하고 걸음걸이도 반듯하게 적당한 속도로 걸어가신다. 손가방을 어깨에 메고 마켓에 가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약속이 있어 누군가와 만나기로 한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그분이 가게에 옷을 세탁하러 오셨다. 본인 것이 아니고 남자 옷이었다. 이상해서 물었다. 본인은 80살인데 79살 할아버지와 76살 할아버지 두 분을 돌보는 일을 하신다고 한다. “아니 어떻게 두 노인 양반들을 돌보세요. 힘드실 텐데요.” “그냥 힘들지 않게 슬슬 돌봐요” 한다. 어떻게 노인네 돌보는 일이 쉽겠느냐마는 담담하게 말한다. 하루는 할아버지가 바지에 실례해서 물로 씻었는데 냄새가 가시지 않아 비닐봉지에 바지를 싸서 왔다. 80이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 두 할아버지를 돌본다는 것 쉽지 않다.     하루는 시간을 내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얼굴도 고우시고 손도 매끈해서 어렵게 살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누구나 남이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게 마련인데 남편이 34살에 천국에 갔고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골수암으로 떠났고 며느리와 손자가 한국에 살고 있다고 했다.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믿기지 않았다. 그 뒤로 남을 돌보는 일이 힘들지 않고 가엽게 여겨지고 할아버지 배설물도 더럽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심으로 돌보며 살고 있다고 했다. 보통 노인들 보면 메디케이드를 받으면서 편하게 사는 것 같은데 그런 여건은 원하지도 생각지도 않으며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몸이 이전 같지 않다고 느낀다면 이제 몸과 마음을 그리고 삶을 좀 더 섬세하게 다뤄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선택과 집중의 시기가 온 것이다.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방향이다. 과거와 외부에 시선을 돌리면 전과 같지 않고 남보다 못한 나를 보기 쉽다. 하지만 시선을 미래와 내부로 돌리면 지금의 나와 가야 할 길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가며 내가 아닌 것을 하나둘 내려놓다 보면 삶은 자연스럽게 된다. 우리는 운 좋게도 이전보다 오래 산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급해진 것 같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천천히 즐기며 삶을 살아가면 좋겠다. 양주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나이 등급 할아버지 배설물 한국 할머니 보통 노인들

2023-09-07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당신이라는 나라

시카고는 미시간 호수를 끼고 있어서 동쪽 끝으로만 차를 달리면 바다 같은 호수를 만나게 된다. 날씨가 더워지는 7월부터 9월까지 많은 사람들이 호숫가를 찿아 더위를 식히곤 한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마천루가 등지고 바다 같은 넓고 푸른 호수가 시야에 펼쳐지는 이곳은 어느 휴양지와 비교해보아도 부족함이 없는 퍼펙트한 장소임에 틀림이 없다.     미시간호수는 동쪽으로는 Michigan State를 북쪽으로는 Wisconsin State, 남쪽으로는 Indiana State를 걸치고 있어 어느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도 바다 같은 호수를 만나게 된다.     비가 조금씩 뿌리는 호수를 바라보다 보면 호수와 하늘이 맞닿은 경계가 지워지기 시작한다. 어다가 호수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색깔마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호수는 서러워 서러워 경계를 지운다. 하나를 더 할 이유도 하나를 뺄 이유도 없어질 때, 호수는 하늘을 업고 잔잔한 물결 위로 내려온다. 내 곁에 있어도 늘 그리운 건 하늘이었고 호수였다. 어둠이 내리고 있다.(시인, 화가)   당신이라는 나라     먹구름이 몰려 오더니 비가 부리네요 / 출렁일 때 마다 등이 간지러워요 / 며칠째 말라 갔던 내 몸은 쏟아지는 빗물에 더 말라가고 말았어요 / 이해 못 할 거예요 / 출렁이는 나를 보며 말라 간다니요 / 내 발은 한없이 깊은 허공을 휘젓고 있어요 / 늘 닫지 못하는 하늘을 향해 오늘도 두 손을 높이 들어요 / 하늘로부터 오는 꽃 바람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요 / 그대는 별일 없나요 / 내 몸은 옥색으로 바꿔지고 있어요 / 빗물이 꽃물처럼 내 몸에 구르고 / 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의 기억도 고르지 않은 내 파장 위에 놓여있어요 / 오늘도 뭍으로 내달려지만 / 하얀 거품만 물고 돌아 오기를 반복하고 있어요 / 발끝은 지쳐있는데 당신에게 닫기가 이렇게 어려운가요 / 비가 그치고 햇빛이 고개를 들 때면 하늘과 맞닿은 곳은 윤슬이 되어가요 / 나는 가장 따뜻한 푸른빛으로 변해 가고 있어요 / 잔 주름이 생겨난 곳은 하얗게 반짝이기도 해요 / 무료한 걸음은 간혹 하늘길을 만들어 당신에게 가려하네요 / 멀리 가로등 불빛이 켜지고 / 하늘엔 반짝이는 별빛이 내게로 와요 /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내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보다 훨훨 더 까마득한 시절 / 한밤을 되돌아가도 만날 수 없는 태고의 시간으로 되돌아가야 해요 / 그 별빛과 마주치는 순간 나는 티끌이었어요 / 나는 없답니다 / 이름도 생소한 먼 나라로 가야 해요 / 지구를 수천 번, 수만 번 돌아도 갈 수 없는 나라 / 당신이라는 나라 / 별빛 쏟아지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 그리운 것들은 늘 먼 곳에 있기에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아버지 할아버지 wisconsin state 미시간 호수

2023-08-14

[김형석의 100년 산책] 절대 ‘꼰대 할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꼰대’라는 말을 내가 처음 들은 것은 예전에 나이 든 청중을 대상으로 강연하면서 E군의 조부 얘기를 소개했을 때였다. 강연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손자 결혼에 반대한 할아버지   E군은 대학을 끝내고 군에 입대하면서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약속했다. 자기가 군에서 제대하고 여친도 대학을 졸업하면 양가 부모의 허락을 받고 결혼하기로 했다. 그 뜻이 이루어져 두 젊은이는 인생의 아름답고 행복한 꿈을 간직하게 되었다. 남은 문제는 E군 할아버지의 허락이었다. 할아버지는 E군이 장손이고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여서 두 가지 문제만 없으면 결혼하라고 했다. 우선 사주가 좋아야 하고, 또 우리 가문을 위해서라도 상대방이 천민 직업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조건이었다.   다행히 사주는 좋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상대방 집안도 명문가인데 양가 선조들이 한양에 살았을 때 서로 원수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놈의 집안과는 혼인을 맺을 수 없다. E군 증조할아버지가 유언까지 남겼다는 것이다. 그런 사태에 직면한 E군 부친은 고민에 빠졌다. 생각 끝에 E군 여친 아버지를 찾아가 양해를 얻었다. 할아버지 연세가 높으시니까 아들·딸들의 장래를 위해 좀 기다리기로 하자는 합의였다.   극단적 이념대립의 부작용   이런 얘기를 끝냈는데 내 강연을 들은 몇 사람이 ‘그런 꼰대 할아버지’가 아직도 있을까, 라면서 웃음 반, 걱정 반이었다. 나는 속으로 가정을 위해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꼰대 기성세대’가 사라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다음부터 한동안은 ‘꼰대’라는 사전에도 없는 말이 유행했다. 꼰대 상사를 모시고 일하는 부하들, 생각과 사고방식에 융통성 없는 지도자들, 뜻밖에도 꼰대가 없는 사회를 책임져야 할 일부 종교계 지도자들까지도 정신적 꼰대를 면치 못하는 사례가 떠올랐다.     종교 국가라고 볼 수 있는 인도나 중동지역에 가면 그런 현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정치적 꼰대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극단적인 보수 진영이나 좌파 정치인들 대부분이 그렇다.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극렬한 정치이념에 빠진 사람들은 그 꼰대 정신을 정치적 수단이나 상품화하기도 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일관계도 그렇다. 두 민족이 불행했던 과거의 원한과 적개심을 다 해결하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우호 관계나 친일외교를 할 수 있느냐고 국민을 선동한다. 개인 간에서도 원수는 끝까지 갚아야 하고,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편 가르기를 하는 사고방식을 극복하지 못하면 국가의 미래와 젊은 세대 장래를 누가 책임지겠는가.   열린 세계를 지향하는 21세기   나같이 일제강점기를 산 사람은 ‘꼰대 관념’을 벗어나기 힘들어도 해방 이후에 태어난 세대부터는 국민 장래를 위해서라도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세대도 아니고, 공산주의 사회라면 몰라도 21세기 열린 세계를 지향하는 세계사의 희망을 위해서라도 반(反)사회, 반(反)역사적인 꼰대 정신은 극복해야 한다. 나 같은 사람이 일본의 아베 정권과 우리 문재인 정부 때를 연장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이유이다.   그런데 예상 못 했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꼰대라는 말은 줄어들고 있는데 새로운 꼰대 세대가 늘어나고 있다는 현실이다. 한때는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인 ‘노사모’가 생겼고, ‘박사모’가 박근혜를 지지하기도 했다. 좋은 일은 아니나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문빠’가 등장하고 ‘개딸’들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새로운 ‘젊은 꼰대’가 사회의 혼란과 폐습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국민 다수가 ‘내로남불’이 되니까 무감각한 사회병이 되었는데, 지금은 꼰대 정신이 더 넓게 번지는 것 같다. 공산사회에서 흔히 보던 현상이고 독재정권이 조작해 정치 수단으로 삼았던 나라병을 걱정할 처지가 되었다.   ‘꼰대 할아버지’는 자연히 사라지겠지만 꼰대 정치 세력은 앞으로도 살아남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걱정하는 젊은 세대의 꼰대들은 관념의 한계를 넘어 행동화하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꼰대가 깡패 행태까지 겸하게 되면 사회적 불안과 혼란을 조성한다. 정치 지도자들까지 그런 꼰대 정신, 폭력 의지를 수용하면 국가적 위험으로 번질 수 있다. 히틀러가 그랬고 마오쩌둥(毛澤東)도 같은 길을 따르지 않았는가.   폐쇄적 사회는 오래가지 못해   우리가 지향하는 21세기는 두 가지 주어진 목표가 있다. 자유를 각자가 누리면서도 윤리적 가치가 유지되는 사회, 인간적 가치가 인간애의 정신으로 공존이 존중시되는 세계 역사의 길이다. 고정관념이나 집단적 이기적 절대가치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꼰대 정신이 지배하는 국가와 사회는 그 폐쇄적 사고와 가치관 때문에 스스로 종말을 자초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애국심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선한 가치와 질서를 창조 육성하며, 휴머니즘을 존중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책임이다. 보편적 가치를 역행하는 노동운동, 역사적 진실을 왜곡시키는 정치적 목적의식, 인간의 가치와 생명력을 훼손하는 허위와 위선 모두가 꼰대 정신과 연결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장래를 어둡게 만드는 죄악을 범해서는 안 된다. 진실·자유·인간애는 자유민주 정신의 근원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할아버지 사회 e군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연세 좌파 정치인들

2023-06-23

[이 아침에] ‘산 할아버지 구름모자 쓰고’

한국의 한 친구가 지난달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공연장에서 3형제 그룹 ‘산울림’의 멤버였던, 김창훈의 ‘시(詩) 노래 500곡’ 기념 공연을 다녀왔다고 자랑했다. 그도 노년에 들어섰지만  노래에는 엔돌핀이 솟아나는 힘이 있었다고.     김창훈은 두 해 전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시에다 곡을 붙이는 작업을 해왔다고 한다. 빈 종이에 시를 적고 그 시들과 마주 앉으면 저절로 음악적인 영감이 와 하나의 곡으로 완성된다 하니 그는 천재적인 예술인 모양이다. 그렇게 만든 노래가 벌써 500곡이나 된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한국에 가 살고 싶다. 맛있는 음식 마음대로 사 먹으면서 친구처럼 주말마다 공연이나 뮤지컬을 보러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1977년인가. 아이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던 시절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제1회 대학가요제’를 봤다. 특히 대상을 받은 ‘나 어떡해’라는 곡은 참 멋지고 흥미로운 노래였다. 그런데 그 곡의 작사·작곡가가 김창훈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그리고 2008년 캐나다 밴쿠버에 살던 산울림의 막내 김창익(드럼연주)씨의 사망 소식은 충격이었다. 눈이 많이 와 지게차 작업이 위험하다며 사장인 본인이 직접 운전하다 경사 길에 미끄러져 사고를 당했다 하니 더욱 안타까웠다. 함께 활동했던 형들은 이 믿어지지 않았을 소식에 얼마나 슬펐을까. 다행히 산울림 밴드의 둘째인 김창훈이 이처럼 기념공연을 하고 있다는 것은 기쁜 소식이다.     산울림 3형제가 불렀던 많은 히트곡이 생각난다. 특히 ‘산 할아버지’라는 곡을 들을 때면 대학 때 소풍 갔던 추억이 희미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나도 운명에 따라 미국에 살고 있지만 이민자들의 일상은 늘 고달프다. 한때 자동차에서 CD를 들으며 많은 위로를 받곤 했는데 최근 나오는 차들에는 아예 CD플레이어가 없어 아쉽다.   6·25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우리 세대는 대부분 끼니 걱정을 하며 자랐다. 너나 할 것 없이 대부분 가난했다. 나도 부모님을 돕기 위해 국가에서 등록금을 보조해주는 사범대학에 진학했다.  당시 남학생들은 거의 시골 출신이었다. 그중 ‘지홍’씨는 유난히 키가 크고 늘 웃음이 담긴 가느다란 실눈이었다. 장난기 어려 보이던 눈으로 코믹하게 부르던 그의 애창곡은 ‘서울구경’이었다. ‘시골 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라~’는 가사에 이어 ‘으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로 이어지는 후렴으로 웃음을 자아내던 남학생이었다.     교육 심리학 같은 강의를 들을 때면 대강당에서 모두 만났던 친구들. 화학, 물리학, 지질학, 생물학과의 정원은 각 15명이었고, 일 년에 한번은 60명이 교수님과 함께 소풍을 갔다.     가끔 대구에 사는 여동창을 통해 동문들의 소식을 듣곤 했는데, 이젠 뜸하다. 모두 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어 있나. ‘산 할아버지 구름 모자 쓰고, 나비같이 훨훨 날아서~’ ‘산 할아버지’의 노랫말이 더 가깝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최미자 / 수필가이 아침에 할아버지 구름모자 할아버지 구름모자 산울림 3형제 사망 소식

2023-06-12

[이 아침에] 나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는 일찍이 ‘자기만의 방’이라는 책을 통해 여성이 제대로 문학을 할 수 없는 것은 여성은 돈이 없고 자기만의 방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 나는 방의 소유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게는 밤이면 두 다리 뻗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3년 전, 코로나 펜데믹으로 자택 대피령이 내려 사무실 출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몇 주 또는 몇 달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했는데 장기화하며 결국 재택근무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 후 지금까지 집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 집에 있는 3개의 방에는 모두 주인이 있다. 작은 방 두 개는 우리와 사는 조카 둘이 하나씩 차지하고 있고, 큰 방은 아내와 내가 쓴다. 아이들도 학교에 가지 못하니 각자 자기 방에서 온라인 수업을 하고 나는 거실의 식탁에서 일을 했다. IKEA에서 산 직사각형의 식탁은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테이블이다. 여기에 노트북과 메모장 필기도구를 놓고 일을 했다. 식사 때가 되면 내 살림을 한쪽으로 몰아놓고 밥을 먹고, 식사가 끝나면 다시 펴서 일을 했다.     아이들은 학교로 돌아갔지만, 재택근무로 전환한 나는 계속 식탁을 차지하고 일을 한다. 얼마 전 주말, 침대에 누워 책을 보고 있는데, 아내가 조카 녀석을 불러 가구를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가끔 하는 일이라, 아 또 분위기를 바꾸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무엇이 바뀌었나 하고 나가보니 식탁으로 쓰던 테이블을 페티오가 내다보이는 창문 앞으로 옮기고, 식탁이 있던 자리에는 차고에 두었던 전에 쓰던 둥근 식탁이 놓여 있다.     아내가 마련해 준 내 방, 아니, 나의 공간이 생긴 것이다. 이제 아침이면 나는 이 테이블로 출근한다. 밥을 먹기 위해 하던 일을 서둘러 치울 필요도 없고, 아내도 내 눈치를 보며 상 차리기를 주저할 필요가 없다. 조금씩 살림이 늘어 테이블에는 시계와 램프도 있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블루투스 스피커도 있다.     생각해 보니 내게는 늘 나만의 공간은 있었지만 나의 방은 없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책상 아래쪽의 서랍을 내 몫으로, 위쪽은 동생의 몫으로 정해 주곤 했었다. 가장 먼 기억의 방은 할아버지와 같이 썼고, 외가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은 방을 썼으며, 커서는 동생과 같은 방을 썼고, 결혼해서는 배우자와 같은 방을 썼다. 아내와 함께 쓰는 방은 밤에 잠을 자는 공간일 뿐, 결코 나의 방은 아니다.     아내가 정해준 공간 밖은 내게는 미지의 세계다. 벽장과 서랍장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집은 아내의 공간이며 나는 손님에 불과하다. 결국 객은 주인의 눈치를 보며 살 수밖에.     내가 제대로 된 문학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게는 돈도 없고, 나만의 방도 없기 때문이다. 고동운 / 공무원이 아침에 할머니 할아버지 벽장과 서랍장 사무실 출근

2023-03-06

꽃더러 왜 피느냐고 묻지말라

꽃더러 왜 피느냐고 묻지 말라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나는 글을 잘 쓰지 못한다. 그런데도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마음이, 맘이 아파서였다.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들이, 누구에게도 위로받을 수 없는 현실이 너무 힘이 들어서 글로라도 풀어야 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정년퇴임 후 나에게는 실의와 좌절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암울한 시기가 있었다. 이 암울은 그 이전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나, 좌절은 그 이후에 서서히 무기력으로 나를 탈진시켜갔다. 나의 삶이 거기에서 끝나버리는 것 같은 절망과 좌절에 대한 회한 속에서 언제까지고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치에서 빠져나오듯 '나'로부터 해방되어지는 변화를 맞이했다. 내 미망(迷妄)을 흔들어놓은 한 권의 책. 그것은 생떽쥐베리의  소설 〈인간의 대지〉였다.   〈인간의 대지〉는 일종의 자전적 소설이므로 대부분 에피소드는 실제 있었던 일이고, 등장인물도 실존인물들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야. 그것은 자신과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비참함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이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고." 〈인간의 대지〉 주인공은 막 항공회사에 입사한 '나'다. 작품은 주인공이 항공회사에서 겪은 다양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주인공은 야간비행 중 만나는 별들을 보면서, 무한하면서도 고요한 하늘을 날면서 인생에는 물질적인 것 이상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다. 물론 고요하고 아름다운 일만 있지는 않다. 사막에 비행기가 추락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도 하고, 사막에서 베드윈 원주민과 사막여우를 만나기도 하고, 선인장과 바오바브 나무를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자기가 사랑했던 동료들을 잃기도 한다. 사랑했던 동료 메르모스의 죽음은 가장 큰 아픔으로 그려져 있다. 어느 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하늘로 사라져서는 돌아오지 않은 동료를 떠올리며 주인공은 인간의 책임감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하게 된다. 또한 추락사고 이후 오지에서 끝내 살아 돌아온 동료 기요메에게서는 불굴의 의지를, 배운다.     기요메는 불시착한 안데스 산맥에서 그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이 구조자가 되어 한 발 한 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가 얼어터진 발꿈치가 들어갈 수 있도록 구두 뒤축을 수없이 잘라내며 필사적인 행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죽음보다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나도 어디선가 재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나의 건재함을 알려야 한다. 그들에게 내 생명의 손짓을 보내야 한다.  "나, 여기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사랑보다 더 깊은 연민으로부터 그들을 구제해야 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을 구제함으로써 나 또한 구제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날카롭게 내 머리를 때렸다.     나를 변화시킨 또 한 권의 책이 있다. 노인학교에 나가서 잡담을 하거나 장기를 두는 것이 고작인 한 노인이 있었다. 그가 어느 날, 장기 상대자가 없어 멍하니 앉아있는데, 한 젊은이가 지나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 그냥 그렇게 앉아 계시느니 그림이나 그리시지요." "내가 그림을? 나는 붓을 잡을 줄도 모르는데..." "그야 배우면 되지요." "그러기엔 너무 늦었어. 나는 이미 일흔이 넘었는 걸." "제가 보기엔 할아버지 연세가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더 큰 문제 같네요."   젊은이의 그런 핀잔은 곧 그 할아버지로 하여금 미술실을 찾게 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지도 않았으며, 더우기 그 연세가 가지는 풍부한 경험으로 인해 그는 성숙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붓을 잡은 손은 떨렸지만, 그는 매일 거르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이 새로운 일은 그의 마지막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었다. 그가 바로 평론가들이 '미국의 샤갈'이라고 극찬했던 해리 리버맨이다. 그는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의 격려 속에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그림을 남겼으며, 백한 살, 스물 두번 째의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삶을 마쳤다.     이 일화는 삶의 목표를 잃고 허우적거리던 나에게 진한 감동과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나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일깨워준 계시였다. ‘그래, 바로 이거야..’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절박감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이렇게 시작한 글쓰기였다.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나는 글쓰기를 시작했고, 거기에 나의 정신을 걸었다. 누구에게 기대어 위로받고 싶거나 스스로 무너질 때 차오르는 비애를 기도하듯 쓰다 보면 바람은 잔잔하여지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다. 바늘구멍만한 희망도 안 보여 절망하고 낙담할 때, 글쓰기는 나의 위로요 삶의 의미였다. 글을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무언가 가슴 속에서 북바쳐 오르는 것이 있었고, 그것이 글을 쓸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글쓰기는 나의 깃발이었다. 내 존재를 알릴 수 있는 훌륭한 표적처럼 글은 깃발이 되었다. 나는 그것에 열정적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의 바탕도, 그것의 빛깔도, 그 생김새도 돌아볼 여유가 없이 다만 깃발은 휘날리는 사명만을 지니고 있었고, 나는 그것에 도취했다. 이처럼 글쓰기라는 나의 꽃은 암울했던 시기에 구원의 손길로 다가왔다. 감히 작가가 된다거나 지면에 발표하려는 꿈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고통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다.     나의 의식을 바꾼 것은 7할이 책이었다. 책은 갇혀있던 생각의 틀 속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주고 내 감정적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유일한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글을 쓰고자 했던 것은 아직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잘 소화해서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식이 주는 기쁨, 그리고 이것이 일시적 만족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바꾸고 누적되어 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뒤늦게 노년에 이렇게 글쓰기를 시작한 것도 당장 글을 이렇게 열심히 쓴다고 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유튜브처럼 합리적 보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 꾸준히 준비해 두는 것을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다고 하는 절박함이 강한 동기가 되어 나를 이끌고 있을 따름이다. 연습을 위한 의지만큼은 확고하다. 내게 내 세울 게 없는 이유, 그것은 암울한 시기를 벗어난 결정적인 계기가 외부로부터 주어졌다는 것 때문이다. 지금의 상황에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비하할 만한 어떤 이유도 없다.     돌이켜보니 참 먼 길을 걸어왔다.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삶에 대한 태도가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가를 더욱 더 뼈저리게 깨닫는다. 얼마나 오래 살 것인지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얼마나 보람있게 살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얼굴의 모양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얼굴의 표정은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흘러간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는 또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을 변경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은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현을 연주하는 것이다.     지금 내게는 두 가지 욕망이 남아 있다. 하나는 안 늙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잘 늙는 것이다. 이 두 욕망의 문제는 서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안 늙으면서 잘 늙을 수는 없고, 잘 늙으면서 안 늙을 수는 없다. 그러니 ‘안 늙으면 좋겠지만 안 늙을 수 없다면 잘 늙으면 좋겠다’는 애매하고 긴 문장이 되어버린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모든 것을 쓰기 위하여.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고,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한순간도 자유와 행복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나는 오늘도 온 힘을 다해 읽고, 듣고, 말하고, 쓴다. 언어는 이 불평등한 세상에서 그나마 평등하게 주어진, 너무도 간절한 무기이므로. 들녘에 피어나는 들국화는 피고 싶어서 핀다. 꽃더러 왜 피느냐고 묻지 말라. 살아있음의 가장 확실한 모습임을....내가 뒤늦게 글쓰기에 매달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나의 일이기 때문이다.         김지민 기자할아버지 연세 장기 상대자 mdc시니어센터 회원

2023-02-01

[이 아침에] 염색 역전(逆轉)

이곳에서는 진작부터 만 나이를 썼기에, 12월의 내 생일이 지나자 한 살을 먹고 내년 5월 남편의 생일까지는 연상녀로 살게 된다. 같은 학번이나 남편이 5개월 늦다. 그때까지 누님답게 가르치며 너그러이 봐주면서 살아보겠다.   젊어 보이는 어떠한 인위적인 방법도 거부하는 나는( 실은 무섭다. 주사도 성형도 ), ‘생긴 대로 살자’ 주의다. 나이 들면 주름은 당연하며, 나이만큼 늙어 보여야 인간적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큰 병으로 병원 신세를 오래 지고 나서는 모두 내 나이보다 더 보는 경향이 있다. 미간에 병고의 흔적인 세로 두 줄의 주름이 결정적으로 늙어 보이게 한다.   퇴원 당시엔 항암 치료에 이식 수술을 마친 후여서 머리가 거의 백발이었다. 초췌한 노파가 되어 휠체어에 앉아있고 남편이 뒤에서 미는 중이었다. 대기실의 어떤 분이 우리 내외를 유심히 보다가, 내게 “착한 아드님을 두셨네요” 이러는 게 아닌가? 옆에 앉아 도와주던 올케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고 남편은 “안 사람입니다” 했다. 그분이 민망할까 봐 괜찮다며 나는 웃었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집에 온 그 길로 미용실에 들러 흑발로 염색했다. 염색약이 독성이 있다며 주치의는 하지 말라 했어도 안 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남편에겐 앞으로 염색하지 말고 흰머리로 살 것을 명령했다.   작년 한국 방문시 기도회 참석차 최 목사님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택시기사분이 갈림길에서 남편에게 “할아버지, 터널 위로 가요? 아래로 가요?” 묻는다.   내 눈엔 남편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기사가 남편을 “할아버지”하고 부르니 언짢았다. 송도에서도 택시기사분이 “할아버지가 카카오 택시 부르셨어요?” 해서 당황한 기억도 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언어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흔히 쓰는 호칭 ‘손님, 어르신, 선생님’을 다 놔두고 할아버지라니. 욕도 아니고 비하의 단어도 아니건만 기분이 별로였다. 남편은 “아들에게 아이 생기면 할아버지인데 뭘” 하며 호칭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남편은 염색을 다시 시작했다.     나는 이제 백발인 채로 산다. 백두혈통이라고 농담하며. 누군가로부터 그레이 색 머리칼이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들은 이후 그걸 믿고 그냥 두고 있었다. 며칠 전 클래식 음악 동아리의 송년회가 있었다. 내게 “아직 80은 안되셨죠?” 묻는 회원이 있었다. 자리를 박차고 집에 오고 싶었다.   곧 2023 새해가 되면 먹고 싶지 않은 한 살을 또 먹게 된다. 연초 한동안은 나이가 화제에 오를 것이다. 세월을 어디에라도 붙들어 매고 싶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이정아 / 수필가이 아침에 역전 염색 염색 역전 할아버지 터널 주사도 성형도

2022-12-28

[이 아침에] 염색 역전(逆轉)

이곳에서는 진작부터 만 나이를 썼기에, 12월의 내 생일이 지나자 한 살을 먹고 내년 5월 남편의 생일까지는 연상녀로 살게 된다. 같은 학번이나 남편이 5개월 늦다. 그때까지 누님답게 가르치며 너그러이 봐주면서 살아보겠다.   젊어 보이는 어떠한 인위적인 방법도 거부하는 나는( 실은 무섭다. 주사도 성형도 ), ‘생긴 대로 살자’ 주의다. 나이 들면 주름은 당연하며, 나이만큼 늙어 보여야 인간적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큰 병으로 병원 신세를 오래 지고 나서는 모두 내 나이보다 더 보는 경향이 있다. 미간에 병고의 흔적인 세로 두 줄의 주름이 결정적으로 늙어 보이게 한다.   퇴원 당시엔 항암 치료에 이식 수술을 마친 후여서 머리가 거의 백발이었다. 초췌한 노파가 되어 휠체어에 앉아있고 남편이 뒤에서 미는 중이었다. 대기실의 어떤 분이 우리 내외를 유심히 보다가, 내게 “착한 아드님을 두셨네요” 이러는 게 아닌가? 옆에 앉아 도와주던 올케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고 남편은 “안 사람입니다” 했다. 그분이 민망할까 봐 괜찮다며 나는 웃었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집에 온 그 길로 미용실에 들러 흑발로 염색했다. 염색약이 독성이 있다며 주치의는 하지 말라 했어도 안 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남편에겐 앞으로 염색하지 말고 흰머리로 살 것을 명령했다.   작년 한국 방문시 기도회 참석차 최 목사님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택시기사분이 갈림길에서 남편에게 “할아버지, 터널 위로 가요? 아래로 가요?” 묻는다.   내 눈엔 남편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기사가 남편을 “할아버지”하고 부르니 언짢았다. 송도에서도 택시기사분이 “할아버지가 카카오 택시 부르셨어요?” 해서 당황한 기억도 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언어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흔히 쓰는 호칭 ‘손님, 어르신, 선생님’을 다 놔두고 할아버지라니. 욕도 아니고 비하의 단어도 아니건만 기분이 별로였다. 남편은 “아들에게 아이 생기면 할아버지인데 뭘” 하며 호칭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남편은 염색을 다시 시작했다.     나는 이제 백발인 채로 산다. 백두혈통이라고 농담하며. 누군가로부터 그레이 색 머리칼이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들은 이후 그걸 믿고 그냥 두고 있었다. 며칠 전 클래식 음악 동아리의 송년회가 있었다. 내게 “아직 80은 안되셨죠?” 묻는 회원이 있었다. 자리를 박차고 집에 오고 싶었다.   곧 2023 새해가 되면 먹고 싶지 않은 한 살을 또 먹게 된다. 연초 한동안은 나이가 화제에 오를 것이다. 세월을 어디에라도 붙들어 매고 싶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이정아 / 수필가이 아침에 역전 염색 염색 역전 할아버지 터널 주사도 성형도

20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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