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담장이 앞에서
담장이 앞에서
기대어 얼굴을 부빈다
따뜻한 손을 펼치며
마음을 다지며 키를 키우고
햇살 향해 하늘을 오른다
가로막히면 피해 가고,
떨어지면 매달려
바람에 살랑이며 춤춘다
인생 좌우명 같은 삶
겨우내 숨을 고르고
어느 봄날 기지개를 켜고
여름내 거침없이 자라고 있다
가파른 담벼락, 고목을 오르며
반짝이는 초록 얼굴을 뽐낸다
그대 앞에서 배운다
얼마나 자유로웠는지,
또 얼마나 진지했는지
그대 손바닥 같은 잎사귀로
덮어주고 포옹해 줬는지
힘들고 캄캄한 삶의 회한
흐르는 눈물 닦아주었는지
그대 앞에서 다짐한다
감추고, 가리지 않겠노라고
모자이크 같은 한 조각 인생
푸르게 채워 가겠노라고
치열한 삶 저 담장 너머로
힘차게 뻗어 가겠노라고
찬 바람 불고, 흰 눈 내려
그대가 잎사귀를 움츠리고
더 단단히 담장을 붙잡을 때
나도 인생의 추운 고비마다
흰 눈을 꽃잎처럼 맞으며
꽃 피울 봄날을 맞을 거라고
굳어진 열 개의 손가락,
앞을 가로막는 높은 담장
깊은 숨으로 푸르게 채워
하늘 향해 꽃 피울 거라고
그대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늘이 흐리고 구름이 모여들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창가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다. 비 내리는 오후, 나무도 풀도 꽃들도 비를 맞고 있다. 나무 둥지를 타고 오르는 담장이가 보인다. 담장이 잎사귀가 빗물에 반짝인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읽었던 기억을 되살린다. 북쪽으로 향한 창문과 18세기 풍의 지붕과 네덜란드풍의 다락방과 방세가 싼 집을 찾아 헤매 다녔다. 나지막한 삼층 벽돌집 꼭대기에 수와 존시는 화실을 차렸다. 예술에 있어서 치커리 샐러드나 예복 소매의 취향에서 서로의 기호가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희망에 부풀었던 존시에게 폐렴이라는 병마가 덮쳐 왔다. 존시는 페인트칠한 철제 침대에 꼼짝 못 하고 누워 네덜란드풍의 조그마한 창으로 이웃 벽돌집의 텅 빈 벽을 바라볼 뿐이었다. 뿌리가 썩은 해묵은 담장이 덩굴이 벽돌담 중간쯤까지 뻗어 올라와 있었다. 차가운 가을바람에 담쟁이 잎은 거의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이 허물어져 가는 벽돌담에 매달려 있었다.
“조금씩 빨리 떨어지고 있어. 남아 있는 잎을 세고 있으면 머리가 아플 정도였지만 이젠 쉬워. 또 하나 떨어지네. 이제 남은 것은 다섯 잎뿐이야” “어, 또 한 입 떨어지네. 어두워지기 전에 마지막 한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 그러면 나도 죽는 거야.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저 가엽고 지쳐버린 나뭇잎처럼 떨어져 내리고 싶어”
맨 아래층에 베어먼이란 화가가 살고 있었다. 베어먼은 예술에서 낙오자였다. 40년 동안이나 붓을 쥐고 살아왔지만 예술의 여신 치맛자락도 잡아 보지 못했다. 수는 베어먼에게 존시의 터무니없는 망상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리고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더 약해진다면 존시는 가냘픈 나뭇잎처럼 둥둥 떠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위층으로 올라가 보니 존시는 잠들어 있었다. 창밖에는 싸늘한 진눈깨비가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존시는 흐릿한 눈으로 내려져 있는 녹색 커튼을 멍하니 바라 보고 있었다. “보고 싶으니까 올려 줘.”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밤새도록 비바람이 몰아쳤는데 담벼락에는 아직도 담장이 잎 하나가 뚜렷이 붙어 있지 않은가? “마지막 잎새야.” 그 후로부터 존시는 조금씩 회복되었다. 그날 오후 수가 침대로 다가가 보니 존시는 누운 채 쓸모 없던 파란 빛깔의 털실로 숄을 짜고 있었다. 존시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수는 존시를 껴안았다.
“베어먼 할아버지가 오늘 돌아가셨대. 겨우 이틀을 앓고 말이야. 신발과 옷은 흠뻑 젖어서 얼음처럼 차가 왔고 초록색과 노란색 그림물감을 푼 팔레트와, 붓 몇 자루가 흩어져 있었다는 거야. 존시! 저 담벼락에 붙어있는 마지막 잎새 좀 봐 바람이 부는 데도 흔들리지 않아. 존시! 저건 바로 베어먼 할아버지의 걸작이야.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진 날 밤에 그분이 저 자리에 그려 놓으셨던 거야.
이렇게 〈마지막 잎새〉의 단편은 끝이 났다. 고귀한 생명은 이렇듯 기적처럼 살아나기도 하고, 이렇게 숭고하게 사라지기도 한다.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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