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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도둑

집에 도둑이 들었다. 연말이면 도둑이 기승을 부린다는 소리를 심심찮게 듣긴 했지만 아쉬운 한 해를 부정적으로 끝맺으려나 보다. 강산이 세 번 바뀔 시간을 같은 집에서 살았어도 도둑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현관문을 열어두는 등 무방비 상태로 지내 온 나였다.     무뢰한 도둑들은 벌집 쑤셔 놓듯, 가지런하던 집 안의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서랍 속의 옷이란 옷은 물론, 가구들도 전쟁 포로 다루듯 방 가운데에 마구잡이로 내던져 팽개쳐 놓았다. 반듯하게 걸려있던 커다란 안방 액자는 중심을 잃고 한쪽 모퉁이에 삐딱하게 걸쳐져 반쯤은 공중에 뜬 채로 간절히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과의 하룻밤 외박에 대한 벌이라도 받는 듯, 온 집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온아하게 흐르던 집안 고유의 질서와 평안은, 삽시간에 침범당한 채 상처받고 찢어지며 온몸이 난도질당했다. 난장판이 된 집 안을 돌아보며, 보금자리를 허가 없이 침범한 도둑을 향한 증오와 혐오는 한동안 나의 혼을 들끓게 했다.   한참 후에 달려온 경찰은 뒷마당에 설치된 CCTV를 돌려보았다. 마스크와 모자를 덮어쓴 세 명의 도둑들이 집 뒤쪽 유리창을 깨고 침범해 삼십 분 뒤 집을 떠나는 영상이 CCTV에 고스란히 녹화되어 있었다. 나는 전날 얼마 되지는 않지만 집안의 모든 현금을 들고 집을 나섰었다. 돈을 찾아내려는 도둑들의 삼십 분에 걸친 필사적인 테러는, 골드러시 시대 금광을 찾으려 혈안이 됐던 광부들처럼 숨 막히는 시간으로 이어졌으리라.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침입한 도둑이 초보인 것 같았다는 점이다. 내 재산 목록 1호인 제일 값나가는 손목시계를 무시하듯 카펫 바닥에 떨어뜨리고 간 것을 시작으로, 남편이 고이 숨겨놓은 현금도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다. 아들의 몇 푼 안 되는 때 묻은 동전통과 진짜 같았던 내 가짜 보석상자를 통째로 들고 나갔을 만큼 그들은 어설펐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 못 한 도둑이 어리석고, 찾지 못하는 것을 찾으려고 온 집을 쑥대밭으로 망가뜨리며 힘을 쏟아부은 것이 오히려 불쌍해 보였다.   생각해 보니, 도둑은 집 안의 물건을 훔치는 짓뿐만 아니라 삶의 도처에도 존재하는 것 같다. 도난당할 수 있는 것이 어찌 물건뿐일까. 삶에서도 진짜와 가짜를 구별 못 해, 진실한 자기 생의 가치관이나 목표를 도둑맞고, 물질적인 것만을 찾아 헤매는 안타까운 영혼이 얼마나 많은가. 또 자신의 고유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도난당한 채, 남과 비교하며 자신의 고귀한 가치를 하찮게 여겨 불행해지는 혼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문득 어수룩한 도둑을 통해 내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본다. 이제껏 혹시 물질보다 더욱 소중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도둑맞고도 어리석은 나머지 그것조차 모르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속담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했던가. 이제부터 영혼을 도둑맞지 않도록 순간순간을 단속하며 살아가리라 마음을 다짐한다. 김영애 / 수필가이 아침에 가짜 보석상자 집안 고유 한쪽 모퉁이

2023-12-28

[수필] 수상스키를 접으며

바람이 분다. 한창 여름이어야 할 날씨가 아직 높은 기온을 만들지 못한다. 게다가 바람까지 세차다. 물속에 들어가긴 좀 차다. 더 기다릴까? 아무리 7월이라 해도 물 온도가 차고, 바깥 온도가 낮고, 바람이 있으니 수상스키 타기엔 별로 좋은 조건은 아니다. 마침 독립 기념일 연휴라서 케스테익 호수엔 사람이 붐비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호수에 들어서며 주차비를 내는데 11달러란다. 언제 그렇게 올랐느냐니까 대단히 미안하단다. 하기야 정부에서 손들고 나간 후 개인이 인수해서 왕창 올린 모양이다. 호수를 닫겠다고 엄포를 놓더니 그나마 열어 주니 고맙게 생각해야 할거나?     그냥 돌아서고 싶었다. 두어 시간 주차에 11달러는 좀 심하다. 아니 너무 아깝다.  기분이 썩 내키지 않지만 약속을 하고 왔으니 오늘은 그냥 타자. 스쿠버다이빙 할 때 입는 웻수트로 무장을 하니 춥지 않아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보트 주인도 차와 보트의 주차비가 엄청 오른 데다 기름값마저 하늘 높은 줄 모르니 한 사람당 100달러씩 받는다.     나까지 세 사람이 보트에 올랐다. 셋 정도라면 기운이 지치도록 탈 수 있겠단 생각에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순간 돈 생각은 다 잊고 나보다 먼저 와서 타고 있던 두 사람과 순서대로 스키를 신었다.  일 년 만에 신는 스키는 언제나처럼 내게 설렘을 준다. 잘 될까? 일 년을 더 늙었으니 기운이 떨어지진 않았을까. 그동안 가벼운 운동도 게을리했던 탓에 물에서 올라올 수나 있으려나. 약한 두려움마저 동반하며 던져진 줄의 삼각형을 잡는다.     웻수트 속으로 스며드는 물의 차가움이 심장을 멈추게 할 듯 두려움을 더해 준다. 내가 이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두렵고 떨릴 거면 오지 않았으면 될 터인데. 호수를 꽉 채운 신선한 공기를 뱃속 저 아래까지 들이킨다. 다시 한번 심호흡이 이어지면서 차츰 안정된다. 됐다. 출발!     그렇다. 난 언제나 잘한다. 공연히 잠깐 떨었다. 균형을 잡을 수 있으려나, 잘 올라올 수 있으려나, 힘들어 줄을 놓치지나 않을까. 이 모든 것은 기우였다. 작년이나 다름없이 의젓하게 물에 서서 유유자적 물 위를 미끄럼 탄다. 달려오는 맞바람도 내게 와선 고개를 숙인다. 끄떡없다. 그 정도 바람에 비틀할 내가 아니다. 오랜만에 나를 포옹하는 바람이 억세게 파도를 몰고 왔다. 그 파도를 넘자니 양다리가 휘청인다. 아니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 살짝 점프해서 파도를 보내면 그냥 이어서 달려들 온다. 난 아직 몸도 안 풀렸는데 초장부터 맹공격이네.     10여분을 매달렸더니 팔도 다리도 뻐근하다. 안 되겠다. 손 신호로 스톱을 주고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이쿠. 역시 나이 탓인가. 생전 이렇게 힘이 들다 헉헉 된 적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난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수상스키? 지난 5년 동안 매해 여름이면 미친 듯이 멕시코 바다로 달려갔다. 열대성 기후여서 바닷물은 따스하니 자쿠지 물을 연상시킨다. 마음이 안정되고 물속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도 겁이 안 난다. 색색의 물고기들이랑 맑고 아름다운 바다가 속살을 내보이니 물속의 화려한 색깔에 취해 수상스키를 타곤 했다.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렁여도 빠지면 저 어여쁜 바다의 품 일터 겁낼 이유가 없다.       새파랗고 고운 연두색을 섞어 내 앞에 옷을 벗는 바다는 간혹 진한 푸르름으로 파도를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나에게 기쁨을 주던 수상스키가 지금은 내게 질문을 한다. 운동? 좋다. 진짜 운동이 많이 된다. 그런데 꼭 수상스키만 운동인가? 더구나 난 수상스키의 진수를 맛보지 못했다. 도저히 한 발로 서는 것이 안 된다. 두 발로 타다가 슬그머니 한 쪽 스키를 버리고 한 발이 될 수는 있지만, 처음부터 한 발로 시작을 못 한다. 올해엔 꼭 해야지. 내년이면 되겠지. 그러다 결국 가을을 맞곤 했다.     지금도 그렇다. 두 발로 시작해서 아직 한 발로는 엄두도 못 내고 난 벌써 지치고 있다. 다시 도전해도 이건 아닌 성싶다. 내 나이가 몇인가? 제발 위험한 운동은 그만두라는 친구의 간곡한 충고가 귓가를 돈다. 어차피 한 발로 일어서지 못한다면 수상스키의 참맛은 없다. 언제까지 초짜 노릇으로 만족할 수 있겠나. 그래. 버리자. 이젠 그만두자. 비용도 이렇게 많이 드는 운동이라면 누군가에게 아주 많이 미안하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배를 곯는 사람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바다야, 난 네가 좋아. 겁나지도 않아. 그렇지만 네 곁을 수상스키를 타며 지키기가 싫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 고운 색의 물이 좋고 파도가 좋으니 영영 떠날 순 없다. 모래사장에 배 깔고 누워서라도 너를 가까이하면 된다. 내 속에 꿈틀거리는 욕망을 잠재우자. 보트가 끌어 주는 속력에 쾌감을 느끼며 발바닥을 쳐대는 물의 애무가 나를 자꾸 유혹해도 이 건 이제 끝내자.  비장한 결심을 하곤 두 번째 스키를 신었다. 첫 번 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탔다. 시간도 길어졌다. 한쪽 스키를 벗어 보겠다고 했더니 보트 주인이 도리질이다. 벗어 버린 한쪽 스키 찾으러 다니는 것도 사실 짜증 나는 일이지만 몹시 귀찮아하는 눈치다. 게다가 투덜대기까지. 어째 그리 힘이 좋으세요? 이를 악물고 누가 이기나 자신과 싸우시는 듯 지칠 줄을 모르시네요.     그래.  이것이 마지막이다. 진짜로 마지막이다. 이쯤 탔으면 그동안 많이 즐겼고 행복했다. 앞으론 돈 안 들이고 즐길 수 있는 운동을 찾아보자. 일도 그만둔 처지에 분명 사치가 심했다. 내가 좀 젊었다면 이렇게 내 욕망을 쉽게 버리진 않았을 거다. 사실 쉽게 버리는 건 아니다. 가슴이 싸하니 많이 아쉬운 상태다.아쉬울 때 접는다는 것도 용기일 수 있다. 나이에 맞게, 형편에 맞게 살자. 그래야 아름다운 삶이 내 것이 될 것 같다. 버리는 일도 때를 맞춰야 행복이 될 것이다. 노기제 / 수필가수필 수상스키 수상스키 타기 한쪽 스키 멕시코 바다

2023-11-09

[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밀코메다 은하

밤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별이 반짝인다. 물론 그 중에는 수성이나 금성 같은 태양계의 행성도 끼어있지만, 별의 집단인 은하도 있다.     은하란 적게는 천만 개의 별에서부터 많게는 수조 개나 되는 별들이 무리를 이룬 집합체이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마치 하나의 별처럼 보인다. 태양이라는 별이 속한 은하를 은하수라고 하며 은하수와 가장 가깝게 이웃한 은하가 안드로메다은하다.   은하수에는 약 4천억 개나 되는 별이 있고 안드로메다은하에는 약 1조 개 정도 되는 별이 모여 있다. 그런 은하가 약 2조 개쯤 모여서 비로소 우주를 이룬다. 입만 열면 억이니 조라는 말이 나오는데 평소 우리가 잘 사용하지 않는 셈 단위다. 그래서 그런 큰 숫자를 천문학적 숫자라고 한다.   우리가 속한 은하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빛의 속도로 약 10만 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 속에 태양을 포함한 약 4천억 개의 별이 바글거리고 있다. 은하수에서 약 250만 광년 떨어진 곳에 우리의 이웃인 안드로메다은하가 있다. 안드로메다의 지름은 약 22만 광년이라니 그 크기가 은하수의 두 배쯤 된다.   우리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밤하늘에 마치 별처럼 반짝이는 안드로메다은하는 에드윈 허블이 외부 은하의 존재를 밝혀내기 전까지 우리 은하 안에 있는 별의 모임, 즉 성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때까지 이름도 안드로메다 성운이었다. 그런데 허블은 그 성운이 우리의 은하 바깥에 있는 외부 은하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우주가 갑자기 수천억 배 커진 순간이었다.   안드로메다은하는 우리 은하에서 250만 광년 떨어져 있으니 설사 빛의 속도로 그곳에 간다고 해도 250만 년이 걸린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우리는 죽었다가 깨도 절대로 갈 수 없는 곳이 그나마 은하수에서 가장 가깝다는 안드로메다은하다.   방대한 우주에 은하수가 속해 있는 부분을 국부은하군이라고 부르는데,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은하는 안드로메다와 은하수 둘뿐이다. 나머지는 들러리를 서는 까닭에 위성 은하라고 부른다. 우리 은하는 주변에 수십 개의 위성 은하를 거느리고 있어서 엄밀히 따지면 은하수에서 가장 가까운 은하는 안드로메다은하가 아니지만 그런 소규모 위성 은하를 제외하고 제 모습을 갖춘 독립적인 은하 중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 은하다. 은하수 주위의 위성 은하 중 대마젤란은하와 소마젤란은하는 맨눈으로도 보인다.   안드로메다은하는 은하수가 속한 국부은하군 40여 개의 은하 중 가장 밝은 은하이며 우리 은하처럼 나선 모양을 하고 있다. 은하수에서 250만 광년 떨어져 있으니 지금 우리는 250만 년 전의 안드로메다은하를 보는 것이다.   손에 들고 있던 못을 놓으면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지구의 중력이 끌어당겨서 그런 것이다. 이번에는 땅에 떨어진 못 위에 자석을 가까이 대면 바로 올라붙는다. 전자기력이 중력보다 훨씬 세다는 증거다.     그렇게 미미한 중력이지만 거시 세계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은하수와 안드로메다는 서로의 중력에 끌려 지금 초당 약 100km씩 가까워지다가 40억 년 후에 두 은하는 충돌하여 합쳐지게 될 것이라고 한다. 밀키웨이(은하수)와 안드로메다 두 이름을 합친 밀코메다 은하가 40억 년 후에 새로 생길 은하 이름이다. (작가)     박종진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은하 은하수 한쪽 은하수 주위 위성 은하

2023-10-27

우리말 이름으로 식당은 맛집이 된다

소비자들의 눈을 사로잡는 독특한 우리말 상호의 식당들이 늘고 있다.   특별한 음식 경험을 찾는 소비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식당들은 점점 더 창의적이고 독특한 방법으로 눈에 띄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특히, 점점 늘어나는 한식당들 사이에서 살아남겠다는 일종의 마케팅 전략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미셸린 가이드 1스타를 받은 ‘쌀(Ssal)’은 재미있는 이름으로 소비자의 이목을 끌었다. 쌀은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한식 파인다이닝 식당이다. 메뉴는 매일 달라지며 주로 해산물, 소고기 갈비, 계절 식재료가 포함돼 있다. 또한, ‘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계절 식재료를 곁들인 갓 지은 가마솥 쌀밥이 메인요리다.   배준수 셰프는 한식을 프랑스 테이스팅 코스요리 형태인 ‘드거스테이션(degustation)’과 결합하여 그리운 밥 한상차림의 추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그의 식당 상호인 ‘쌀’에는 세 가지 흥미로운 철학이 담겨있다. 첫 번째로, 가족의 역사다. 경상북도 포항 시장에서 쌀을 판매하는 ‘쌀집 손자’로 자란 그는 ‘맛있는 쌀밥’에 대한 특별한 추억이 있다고 했다.     두 번째로, 미국 한복판에서 ‘쌀’이라는 한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한국인들에게는 반가운 이름과 숨겨진 코드로 기억되며,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한국 음식의 정확한 발음과 명칭을 한 번 더 알릴 기회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는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이 있듯 ‘쌀’이 한식을 대표하는 키워드이기 때문이라 덧붙였다. 그는 “상호 뜻을 물어보거나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손님들도 있지만 결국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상호를 더 오래 기억해주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LA 채프먼 플라자에 위치한 ‘토끼(Tokki)’에서는 미셸린 3스타 식당에서 경력을 쌓은 서니 장 셰프가 모던한 스타일의 한식을 선보이고 있다.     우리말 발음을 그대로 따서 지은 ‘토끼’라는 귀여운 이름과 독특한 메뉴들이 젊은 층의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트러플 김치볶음밥, 우니 토스트 등 독특하고 이색적인 조합이 인기다. 또한, 직접 개발한 칵테일 메뉴도 제주선셋, 부산비치 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고 있어 한국의 특별한 맛과 풍미를 느낄 수 있다.     토끼의 박요한 파트너는 “한국 민화에서 토끼는 행복과 번영을 가져다준다”며 “고객들이 레스토랑에서 따뜻함, 행복, 긍정적인 힘을 느끼길 원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토끼의 파트너들이 태어난 평균 년도가 1987년 토끼해 이것도 한몫했다고 덧붙였다. 토끼는 소주를 직접 숙성시켜 개발하거나 독특한 퓨전 한식을 개발하는 등 한국 음식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LA 아트 디스트릭트에 위치한 ‘양반 소사이어티(Yangban Society)’ 역시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사회 계급 중 하나인 양반과 사회라는 의미의 소사이어티를 결합하여 한국의 문화를 미국사회에 음식으로 전달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CIA 요리 학교를 졸업한 카티아나 홍과 존 홍 부부 셰프가 운영하는 이 레스토랑은 도토리 국수, LA갈비 등과 같은 전통요리와 더불어 김치 포카치아빵, 김치 포졸, 초콜릿 인절미 등 퓨전 한식도 판매한다. 또한, 식당 한쪽에는 셰프가 직접 엄선한 한국 제품을 판매하는 작은 상점도 준비돼 있다.   이 외에도 한국식 비비큐 식당이지만 주꾸미 철판 볶음을 판매해 지어진 이름 쭈꾸쭈꾸, 소의 향기가 나는 집이라는 뜻의 우향우, 분식을 판매하는 지글지글 분식 등 독특하고 발음하기 쉬운 상호의 식당들이 한인타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한글 이름은 아니지만 흥미로운 이름의 기원이 숨어 있는 한인타운에 위치한 ‘킨(Kinn)’이라는 한정식 맡김 차림(오마카세) 식당도 있다. 식당의 메인 셰프인 기 김(Ki Kim) 셰프의 아이디어로 한국식 성인 김(Kim)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다른 식당에서는 보지 못한 이름으로 소비자들의 흥미를 자극했다. 이 식당은 계절마다 다양한 코스 요리를 선보이며 한국 음식을 새롭게 해석한 것으로 젊은 층의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식당 업계 관계자는 “재미있으면서 부르기 쉬운 상호를 사용함으로써 손님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기억에 남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정하은 기자한인타운 특이 이름 식당 한국 식당들 식당 한쪽

2023-10-08

[카운터어택] 경험하지 말고 증명하라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와 브렌트포드의 2023~2024시즌 1라운드 경기가 지난 13일 브렌트포드의 홈인 영국 런던 지테크 커뮤니티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이 경기는 손흥민의 토트넘 주장 데뷔전이었다. 토트넘 선수들은 경기 전 경기장 한쪽의 원정 응원석 앞으로 가 스크럼을 짜고 선전을 다짐했다. 그 전까지는 대개 센터서클 근처에서 했던 일이다. 원정 응원석의 토트넘 팬들은 바로 앞까지 찾아와준 선수들을 보며 크게 환호했다.   영국 ‘풋볼 런던’은 토트넘 부주장인 제임스 메디슨의 인터뷰 기사에서 스크럼 위치를 옮긴 사연을 공개했다. 메디슨은 “어제(12일) 쏘니(손흥민)가 아이디어가 있다며 메시지를 보냈다. 경기장 가운데 대신 관중석으로 가는 아이디어였다. 우리(선수들과 팬)가 모두 함께한다는 걸 보여줘 기뻐했다고 생각한다. 팬들은 우리 스크럼을 높게 평가했을 것이다”라고 전했다.   축구에서 주장의 역할과 그 중요성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막상 경기에서 보이는 주장의 일이라는 게 선공과 진영을 정하는 동전 던지기에 참여하거나 팀의 대표로서 주심에게 항의하고, 틈틈이 선수들을 독려하는 정도다. 손흥민은 주장에 선임된 직후 인터뷰에서 수차례 “온더피치, 오프더피치” 즉 “경기장 안에서, 경기장 밖에서”라고 말했다. 주장 역할은 어쩌면 오프더피치, 즉 눈에 띄지 않는 경기장 밖에서 더 중요하다 하겠다. 손흥민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주장은 선수들을 대표해 구단과 코칭스태프를 상대한다. 동료의 신뢰를 얻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또 엔제 포스테코글루 토트넘 감독이 손흥민을 주장으로 지명하면서 말한 것처럼 “오랜 경험을 통해 성공으로 나아가는 방향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기에 그 경험을 후배들과 나누고 실행으로 옮기는 것도 주장 몫이다. 팬들에게 무엇을 주고 어떻게 함께할지를 고민하는 것도 주장의 숙제다. 그런 면에서 원정 응원석 앞으로 스크럼 위치를 옮긴 건 주장 손흥민의 첫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제 남은 건 손흥민이 늘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승점 3점을 얻는 일”, 즉 이기는 일이다. 브렌트포드와 2대2로 비긴 토트넘은 19일 홈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한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홍명보 당시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선수들은 이번 월드컵을 통해 좋은 경험을 했다”고 말하자, 당시 방송사 해설위원이었던 이영표가 “월드컵은 경험하러 나오는 자리가 아니다. 실력을 증명하는 무대다”라고 지적했다. 주장도 경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실력을 증명하는 무대다. 장혜수 / 한국 콘텐트제작에디터카운터어택 경험 증명 토트넘 주장 토트넘 선수들 경기장 한쪽

2023-08-18

[중앙시론] ‘K컬처’의 한쪽 빈자리가 크다

‘K컬처’ 한류의 위세는 여전하다. 국내에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느끼지 못하지만, 해외를 다녀온 분들은 한결같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상상 이상으로 높아져 있음을 실감하면서, 자랑스러움을 넘어 우리가 이렇게까지 대접받아도 되는가 하는 놀라움을 말하고 있다.   한류는 ‘K팝’에서 절정에 이른 느낌이다. BTS, 블랙핑크 등의 빌보드 차트 진입은 이제 특파원들의 기삿거리도 되지 못한다. 유튜브를 통해 이들 이외의 아이돌 그룹, 또는 대중음악에 전통장단을 접목한 악단광칠이 세계를 누비는 모습이나, 유럽·남미의 도시 광장에서 젊은이들이 모여 무작위로 틀어주는 ‘K팝’ 음악에 맞춰 ‘커버 댄스’를 추는 랜덤 플레이 댄스(random play dance)를 보고 있자면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에서 시작된 한류는 대중예술을 거쳐 음식 등 생활문화로 뻗어 나가더니 문학, 미술 등 고급문화까지 확대되고 있다. 문학은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고 한강의 『채식주의자』,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의 번역서가 K문학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K아트’도 목하 뜨거운 열기로 진행 중이다. 지난 6월 록펠러센터가 주최한 ‘한국문화예술 기념주간’에는 한국 현대미술 특별전 ‘기원, 출현, 귀환’이라는 주제 하에 단색화 거장 박서보를 비롯하여 한국계 작가 진 마이어슨, 독일에서 활동하는 윤종숙 등의 작품 70여 점이 전시됐다. 이와 동시에 록펠러센터가 있는 뉴욕 맨해튼 심장부 채널가든 광장에는 ‘숯의 작가’ 이배(67)의 높이 6.5m에 달하는 대형 숯덩이 조각이 세워졌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미국 구겐하임미술관이 공동기획한 김구림, 이강소, 이건용, 이승택 등의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은 서울전시회를 마치고, 오는 9월에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내년 2월에는 LA 해머미술관에서 순차적으로 전시가 이어진다.   또 내년 10월에는 필라델피아미술관이 이 미술관 150년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현대미술 전시를 기획하여 ‘시간의 형태: 1989년 이후 한국 현대미술전’(가칭)에 서도호·함경아·신미경 등 33인의 한국 작가 작품들이 전시될 전망이다. 이런 추세에 맞추어 오는 9월 코엑스에서 열리는 한국화랑협회 주최 제22회 키아프(Kiaf)에는 작년에 이어 세계적인 아트 페어인 프리즈(Frieze)가 동참하여 30여 개국의 200여 개 갤러리가 참가한다.   한류는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을 넘어 동경에 이르고 있다. 지난여름 파리에 학술강연 차 갔다가 만난 현지 한글학교 교장들은 프랑스에서는 한국어가 중국어, 일본어를 제치고 제2외국어로 부상해 있다고 전한다. 이런 추세에 맞추어 이달 8일 서울에서는 전 세계 240여 곳에서 운영되는 세종학당의 한국어 교원들이 모이는 ‘세계 한국어 교육자대회’가 열린다.   이러한 ‘K컬처’ 한류의 흐름은 세계 유명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의 발걸음을 자연히 한국실로 옮기게 한다. 그러나 런던 브리티시 뮤지엄,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파리 기메 뮤지엄의 한국실을 다녀간 관람객들은 한국 전통미술에 대한 감동은커녕 오히려 큰 실망을 안고 간다. 바로 곁에 있는 중국관, 일본관보다 형편없이 작은 규모에, 전시 유물도 빈약한 것에 의아해한다.   작년 10월, 세계 최대 공예박물관인 런던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V&A) 뮤지엄에서는 ‘한류! 더 코리안 웨이브’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렸는데, 영국에 있는 지인이 이 전시회를 보고 “지금 우리는 한류 팬덤을 자랑하는 전시보다 한류의 뿌리를 보여주는 기획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친한파 미술사가인 클리블랜드 뮤지엄의 전 학예실장인 마이클 커닝엄은 1979년부터 3년간 미국 7대 도시를 순회한 ‘한국미술 5000년전’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서구의 동양미술사 전공자들도 한국 미술사의 전통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커닝엄의 고백은 미술품이란 그 나라 문화와 역사를 말해주는 구체적인 ‘물질문화의 외교관’ 역할도 한다는 점을 확인해 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한국 미술사의 진수로 ‘한국미술 5000년전’을 꾸며 파리, 런던, 뉴욕 등을 순회하며 ‘K컬처’의 근저에는 오랜 문화적 전통이 있었음을 자랑하고 확인시켜 주면서, 한류가 오래도록 도도히 흘러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유홍준 /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중앙시론 컬처 한쪽 한국문화예술 기념주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한국 현대미술

2023-08-06

[독자 마당] ‘구운 김’ 제품 표기 유감

20여 년 전에만 해도 한국에 다녀온 지인들은 굽지 않은 김 한 톳을 선물로 주곤 했다. 당시 김 가격도 비싸고 종류도 다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가볍고 부피도 작아 한국에서 선물용으로 가져오기도 좋았다. 김 선물을 받으며 김밥을 만들 때 쓰기도 하고 때로는 기름을 발라 구워 먹기도 했다. 장기 보관도 가능했다. 냉동실에 마른 김을 넣어두면 오래되어도 변질이 되지 않아 냉동실 한 쪽에 마른김 한두톳은 늘 있었다.     요즘은 한인 마켓에 가면 다양한 김 제품들이 있다. 특히 기름 바르고 굽는 번거로움 때문에 구운 김을 주로 사 온다. 그런데 항상 구운 김을 구입하면서  ‘몇장이나 들었을까?’ 살피지만 장수 표기가 된 제품은 많지가 않다. 그러다 보니  유통 기간만 확인하고 구매를 하게 된다. 장수 표기가 되어 있는 구운 김 제품은 딱 한 번 본 기억이 난다.   얼마 전 산 구운 김 제품도 바람을 빵빵하게 넣은 부피 큰 포장지 한쪽에 20g이라고만 쓰여 있었다. 이게 상술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을 무게로 생각하는 소비자는 거의 없다. 전장이 몇장 들어 있다거나, 6분의 1장 크기의 김이 몇장 들어 있다고 표기를 하는 게 더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부뚜막 한 쪽에서 솔가지로 들기름 바르고 고운 소금 뿌려 만든 구운 김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처럼 반듯한 모양은 아니지만 사위어가는 장작불 숯에 구웠던 그 바삭함과 맛은 최고였다. 그래서 지금도 마켓에 가면 구운 김은 빠트리지 않고 구입하는 품목이다. 다만 내가 거주하는 곳은 한인 마켓이 멀어 자주 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      구운 김 생산업체들은 포장지에 포장된 김의 장수를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소비자에게는 김의 무게보다 장수 표기가 훨씬 유용한 정보가 되기 때문이다. 박영혜·리버사이드독자 마당 제품 표기 제품 표기 장수 표기 포장지 한쪽

2022-10-09

[독자 마당] 앤드루

개를 사러 갔더니 유리박스안에 요크셔테리어 강아지 두 마리가 있었다. 한 마리만 들고 나왔더니 남겨진 강아지가 몸부림을 치면서 울부짖는다. 하는 수 없이 두 마리를 샀다. 주인에게 남매간이 아니나교 물었더니 잘 모르겠다고 한다.  용모에 상당한 차이가 있어서 미심쩍은 마음을 누르고 나왔다.     하니와 대니였다. 그 후 하니는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 골반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수의사는 하니는 임신을 하면 안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자연분만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니가 임신을 했다. 이렇게 하니와 대니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앤드루였다.   앤드루를 들고 나오면서 냄새를 여러번 맡아 보았다. 나는 강아지 몸에서 향내가 나는 줄을 그전에는 몰랐다. 구태여 강아지의 이름을 앤드루로 한 것은 앤트루의 용모가 작지만 왕자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앤드루는 자라면서 간질을 하기 시작햇다. 어릴때 본 사람이 간질하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쓰러진 다음 사지를 버둥거리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한참을 이러고 나면 나는 앤드루를 안았다. 입도 닦아주고 눈도 닦아 주었다. 식구들을 앤드루를 멀리 하였다. 나는 앤드루를 애지중지하였다.   가여웠던 앤드루는 나만 좋아했다. 그뒤에 앤드루는 주마비치에 갔을 때 교통사고로 죽었다.     나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앤드루를 덮어줬다. 나는 사흘을 밥도 먹지 않고 울었다. 앤드루의 무덤을 찾아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으로 시작되는 동무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술도 한잔 권했다.     지금 미국은 낙태 논쟁이 한창이다. 나는 근친상간으로 임신했을 경우 낙태를 허용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카인은 남동생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여동생과 결혼까지 했다. 우리는 카인의 후예다. 우리는 에덴의 동쪽에 살고 있다. 서효원·LA독자 마당 앤드루 요크셔테리어 강아지 낙태 논쟁 한쪽 골반

2022-07-24

[뉴욕의 맛과 멋] 숨어있던 보물 ‘매실’

내 김치냉장고 한쪽은 한국의 된장, 고추장 등 장류 저장고이다. 어제 배추 된장국 끓이려고 된장과 고추장을 꺼내는데 고추장이 든 작은 용기가 서너개가 되었다. 한국서 올 때 친구들 혹은 지인들이 준 것을 먹다 보면 그렇게 된다. 보통 때도 늘 보던 장면이지만, 왠지 눈에 거슬려서 “이걸 한데 모아야지” 싶었다. 꺼내다 보니 오른쪽 구석에 밑에 매실 병이 있다. 매실청 건더기인데, 뚜껑에 2017년 5월 14일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다.     요즘은 셰프들도 요리할 때 보면 매실청이 빠지는 적이 없다. 매실이 워낙 천연소화제에 기관지와 피로해소에 좋다고 해서 매실청 담는 집이 많다. 나도 덩달아 매실 장아찌를 몇 번 담았다. 매실 씨에 독성이 있다고 해서 씨를 다 빼고 담았는데, 씨 빼는 작업이 하도 일이 많아 몇 번 만들다 포기했다. 그러다가 매실을 씨째로 담아도 일 년 동안 숙성시키면 독이 다 빠져서 아무 상관 없다는 말을 듣고 작년에 다시 매실청을 담았다. 5월에 일 년이 된다.   나는 신 것을 매우 싫어해서 매실청 따르고 나면 건더기는 그냥 버렸다. 그 신맛 나는 매실로 장아찌를 만든다든가 하는 건 엄두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매실이 비싸니까 아깝단 생각이 없진 않았나 보다. 그래서 버릴 날을 미루다가 잊어서 밑에 깔린 바람에 얘는 아직 명줄이 남았던 것이다.     첨엔 그냥 버리려고 했다. 그래도 씨를 빼고 만드느라 애썼던 내 노동에 미련이 남아 형식적으로 한쪽을 먹어 보았다. 그리고 얼떨떨해졌다. 아직도 오돌오돌한 매실은 신맛은 무늬뿐, 뭔가 입맛을 돋워주는 오묘한 매력이 있었다. 만 5년 동안 숙성되었으므로 신맛이 그동안 무뎌지고, 청은 따라낸 후이니 당도도 적당했다. 조금 꺼내어 간장에 살짝 무쳤더니 은근히 입 안을 사로잡는다. 마치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손댄 김에 신이 나서 내가 먹을 것은 그렇게 간장에 버무리고, 나머지는 고추장에 버무렸다. 늘 소화 문제로 골치 썩는 첫째에겐 아주 좋은 선물이 될 것 같고, 친구들에게도 나누어주면 좋을 것 같다. 매실 장아찌는 이렇게 청을 따르고 남은 건더기를 입맛에 맞게 간을 해서 장아찌로 먹으면 되는데, 진즉에 그러지 못한 일이 새삼 아깝기 짝이 없다.   시답잖게 여겼던 매실의 발견이 마치 숨은 보물찾기에서 보물 찾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사실 우리 어릴 적엔 안방 위에 있던 ‘다락’이 보물창고였다. 다락 위엔 꿀이며 엿, 밤, 곶감 등 우리들의 간식거리가 있었지만, 아이들에겐 접근금지의 성역이었다. 그것을 몰래 훔쳐 먹을 때의 스릴과 두근두근 가슴 뜀. 들켜서 혼나도 마냥 즐거웠다. 그리고 겨울이면 뒷마당 항아리에서 짚 위에 켜켜이 쌓여 있는 홍시가 익기를 기다리던 안타까움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보니 어릴 때의 그 기다림과 설렘과 애달픔의 시간이 우리에겐 인생의 인내와 절제를 위한 숙성기였음을 새삼 깨닫는다.     사순절이다. 5년을 묵히니까 원래의 신맛이 무뎌지고 순해진 매실을 보면서 나를 돌아본다. 푹 삭은 매실처럼, 오래된 장처럼, 세월의 두께가 인성의 향기로 담금질 된 사람을 보면 아무 말 없이 옆에만 있어도 평화를 느끼고, 신뢰와 치유가 모르는 새 스며든다. 언젠가는 나도 매실처럼 깊이 숙성되어 사람들에게 그렇게 스며들 수 있겠지. 그 날을 기다리며…. 이영주 / 수필가뉴욕의 맛과 멋 보물 매실 된장 고추장 김치냉장고 한쪽 뒷마당 항아리

2022-04-08

[삶의 뜨락에서] 연습 또 연습 그리고 인내

뉴욕마라톤 대회가 50주년을 맞이했다. 작년이 50주년이었는데 코로나19로 취소되었다. 6만 명이 넘는 참가자를 3만 명으로 축소했다.    나는 새벽 4시에 집에서 출발했다. 맨해튼 메트오페라 하우스 근처에 파킹 하고 5번가 42가까지 걸어 버스를 타야 했다. 42가에 도착하니 버스를 기다리는 선수들 줄이 길게 늘어져 있다. 6시 15분 버스를 타고 스태튼아일랜드에 7시 30분 도착했다. 내가 기다려야 할 자리에 들어서서 간단한 아침을 먹고 12시까지 기다려야 하는 차례다.     친구 남편은 9시 출발이다. 9시 출발자는 2시간대에 완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비행기다. 운 좋게 나도 9시 출발했다. 베자라노브리지 건너 브루클린 4번가에 들어섰다. 아무도 없다. 나 혼자 그 넓은 도로를 뛰고 있다. 5마일 정도를 혼자 달리다 보면 두 번째 3시간대에 완주하는 그룹이 달려온다. 그 사람들도 앞서 가버리고 나면 또 혼자서 달린다. 내 가슴에는 34548이라는 번호가 붙었다. 길가에 응원하는 사람들도 환호한다.    달리다 보면 여러 사람을 만난다. 아주 젊은 남자가 내 옆에서 같이 뛰자고 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는 다리 수술을 받아 뛰지는 못하고 걷는 것이다. 나하고 속도가 비슷하다며 계속 같이 걷고 뛰었다. 나는 힘들어 말할 기운이 없는데 이 사람은 계속 말을 건다. 대답을 포기하고 그냥 뛰었다.     뉴욕마라톤을 15번 이상 완주하면 특별대우를 한다. 등에 몇 번 참가했고 특별한 사람을 위해서 뛰거나 자기가 도와주는 단체나 가족 친지를 위해서 달린다는 문구를 집어넣어 프린트해준다. 48번 달렸다는 사람을 보았고 42번, 37번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다. 달리지는 못해도 걷는 속도가 뛰는 사람보다 빠르다.   선수들을 위해서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많다. 딸랑이를 가져와 흔들고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거나 파이팅을 손바닥이 아프도록 손뼉을 친다. 그리고 바나나, 캔디, 초콜릿, 오렌지를 잘라서 그릇에 담아 내민다. 물을 받아 마시는 것보다 오렌지 한쪽 삼키는 것이 피로한 몸을 일으키는 효소 역할을 한다. 뉴요커들은 삶을 즐기는 묘미가 있다. 다른 마라톤 대회보다 뉴욕은 많은 사람이 길가에 나와 응원하고 자신이 선수인 양 즐기고 선수들의 기운을 북돋운다. 이번 대회는 외국 선수들이 많지 않다. 요란한 커스텀도 보이지 않고 묵묵히 자기가 연습한 역량을 내보이는 것 같다.   우리의 삶을 마라톤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처음부터 잘 뛴다고 끝까지 잘 뛰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뛴다고 늦게 마치는 것도 아니다. 연습에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내 몸이 뛸 수 있는 조건에 다다른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일정량 꼬박꼬박 연습하다 보면 달릴 수 있고 5마일 짧은 거리를 달리다가 10마일, 14마일, 26마일을 달릴 수 있는 컨디션으로 만들어 간다. 아침 4시에 일어나 12시에 시작하는 경주에 직면해 보면 참고 참는 인내가 자리 잡아야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도 경주에 들어서면 가슴이 뛴다.     90가 센트럴파크에 들어서면 2.5마일 파크를 돈다. 파크에 들어서는 순간 다 끝났다 싶지만 2마일은 완전히 지치게 한다. 그래도 삼겹살, 갈비, 대구 매운탕으로 몸보신 시켜준 친구들의 고마움을 생각하면 지친 몸이 조금 느슨해진다. 알록달록한 낙엽들이 머리 위로 내려앉는다. 완주했다는 시계가 바로 앞에 있다. 6시간 25분을 밟는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 그리고 50주년 메달이 내 목을 휘감았다. 양주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연습 인내 뉴욕마라톤 대회 외국 선수들 오렌지 한쪽

202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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