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이 아침에] 터키 나눔

내가 터키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5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때 우리 집은 벽제에 있었는데, 근처 미군 부대의 부중대장 부부가 3명의 어린 자녀와 함께 아래채에 세를 살고 있었다. 난 아내인 바버라에게 영어를 배웠고, 가끔 그녀가 외출할 때면 베이비시터를 해 주었다.     양계장을 하시던 아버지는 넓은 마당에 칠면조를 몇 마리 키우고 있었다. 추수감사절이 다가오자 누가 먼저 꺼낸 이야기인지 터키를 구워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바버라가 오븐을 빌려와서 터키를 굽고, 어머니가 한식을 준비해서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터키 한 마리는 우리 식구 7명에 바버라네 식구 5명, 도합 12명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터키는 맛만 보고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살을 발라 먹고 남은 터키의 뼈는 바버라가 수프를 끓인다고 가져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로서는 매우 의미 있는 추수감사절 만찬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설고 낯선 이국땅에서 현지인과 터키를 구워 함께 먹었으니 추수감사절의 시작 때 그녀의 조상이 했던 것을 재현했던 셈이 아닌가.     1년 후, 바버라네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또 몇 년이 흐른 후, 나도 미국에 오게 되었다. 미국에 오던 해, 1981년, 겨울 크리스마스 연휴에 교우를 따라 유타로 여행을 가게 되었고, 거기서 바버라네 가족을 다시 만났다. 그날은 그녀가 만든 터키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내가 한동안 터키를 멀리하게 되는 사건도 있었다. 다음날, 교우의 이모님 댁에서 터키 껍질을 다져 넣고 만든 만두를 먹게 되었는데, 만두를 잘라 입에 넣는 순간 입안에 퍼지는 조류 특유의 비릿한 맛. 그 후 몇 년 동안 터키는 쳐다보지도 않고 지냈다.     직장생활을 하며 조금씩 터키 샌드위치에 맛을 들이며 다시 터키를 먹게 되었고, 추수감사절이 되면 구운 터키를 먹게 되었다. 홀아비 시절, 추수감사절이 되면 본스마켓에서 파는 터키 디너 세트를 사다가 오븐에 데워 먹었다. 어느 해인가 추수감사절이 다가왔는데 오븐이 고장 났다. 할 수 없이 마켓에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터키를 데워달라고 부탁을 하니 인심 좋은 백인 직원 아줌마가 원래는 안 되는 일인데 특별히 해 준다며 데워 주었다. 오븐을 그다음 해까지 고치지 못해, 또 가서 부탁하니 이번에는 데워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그해 추수감사절에는 콘비프를 끓여 먹었다.     아내를 만난 후 추수감사절이 되어도 더는 터키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나서지 않아도 맛있는 터키 구이가 상에 오른다.     미국인에게 추수감사절 터키는 우리가 설에 먹는 떡국과 같으며, 음식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집이 있건 없건, 가족이 있건 없건, 모든 이들이 터키를 먹는다. 명절이면 시집에 갈 것인지, 친정에 갈 것인지를 두고 다툴 일도 없다. 형편이 되는 집에 모여 음식을 나누기 때문이다. 이때 주변에서 외롭게 지내는 한, 두 사람을 초대해 함께 먹기도 한다.     터키가 입에 맞지 않으면, 닭도 좋고, 아니면 한식도 좋다. 무얼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렵고 외로운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닌가 싶다. 외롭게 혼자 밥 먹는 사람이 없는 추수감사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고동운 / 전 가주 공무원이 아침에 터키 추수감사절 터키 터키 샌드위치 한동안 터키

2024-11-20

[발언대] 어머니의 한(恨)과 북한군 파병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수업이 끝나자마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달려와 방문을 열며 “엄마”하고 불렀다. 그런데 방안에는 평소와 달리 섬뜩한 고요함이 느껴졌다. 방 위쪽 구석엔 처음 보는 흰 광목천으로 덮인 것이 있었고, 엄마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엄마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나를 본 엄마는 눈물을 닦고 순간의 침묵을 깨며 말했다. “네 형이 전쟁터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는 광목천을 들어 올렸다. 거기에 숨진 형의 얼굴이 보였다. 전쟁터에 갔던 형이 시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우리 가족은 6·25전쟁이 한창일 때 피난길에 나서 대구를 지나 경산까지 갔다. 당시 대학교 2학년이던 형은 학도병으로 징집됐다. 그 이후에는 소식이 없다가 낙동강 전투에서 심한 상처를 입고 대구 동산 육군병원으로 이송됐다가 끝내 숨졌다.     형이 숨지고 한동안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셨고, 얼굴에서는 삶의 의욕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부터 10여년 동안 어머니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가족이 함께 식사할 때도 기계적으로 음식을 입에 넣는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는 망각이라는 만병통치약도 효력이 없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뒷산에 뭍은 형을 생각하며 “얼마나 옷이 젖을까?” 괴로워하셨고, 눈 오는 겨울날이면  “나는 방에서 편안히 지내는데 너의 형은 뒷산에서 얼마나 추운 눈보라를 맞으며 누워있을까?”하며 하염없이 밖을 바라보는 것이 어머니의 일과였다.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고 일생을 지낸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북한군 1만여 명이 우크라이나 쿠르스크 지역에 러시아군의 총알받이로 파병됐다는 소식이다. 너무나 한심스럽고 참담한 심정이다. 6·25 전쟁 당시 김일성의 남침으로 국군 사상자가 50만 명이 넘었고, 북한 인민군도 6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렇게 많은 젊은이가 제대로 인생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희생되었다는 것은 잊지 못할 역사의 참극이다.      지난 1989년 3월 평양을 방문해 북한이 자랑하는 ‘능라도 체육관’ 건설 현장을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앳돼 보이는 인민군 병사들이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본 인민군 병사들의 모습이었다. 허름한 군복에 체격은 왜소했다. 그들의 나이가 18~21세 정도인데 남한의 또래 젊은이보다 체격이 훨씬 작았다. 체격이나 얼굴 모습은 한국의 중학교 3학년에서 고 1학년 정도의 소년티를 벗어나지 못한 듯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수줍고 약간은 두려워하는 듯한 순진하고 어린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북한군의 우크라이나 전쟁 파병 관련 뉴스가 나올 때마다, 북한 방문 당시 가까이서 보았던 순진하고 앳된 인민군 병사들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니면 동족이라는 연민 때문일까?  그들도 사랑하는 형제자매가 있을 것이고,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부모가 있을 것 아닌가.   러시아의 젊은이들을 대신해 아직 피어나지 못한 우리 동족 젊은이들이, 김정은 체제 유지를 위해 희생된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우크라이나의 쿠르스크 지방으로 끌려간 북한의 어린 병사들의 어머니들도, 나의 어머니처럼 가슴에 피멍이 드는 한(恨)을 품고 사는 삶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이영송 / 한미문화교류재단 회장발언대 북한 어머니 한동안 어머니 인민군 병사들 우크라이나 쿠르스크

2024-11-05

천사의 도시 LA, SNS 핫플레이스로…가수 비·방송인 김나영씨 등

LA가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SNS)에서 가장 핫한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의 유명 스타, 인플루언서를 비롯한 한인 유튜버들까지 SNS 등을 통해 LA의 매력을 알리면서 더욱 매력적인 여행지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유명 관광지를 넘어 한인타운을 포함한 로컬 맛집과 이색장소 등 숨은 매력이 부각되면서 한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먼저 가수 비는 최근 지인이 운영하는 한인타운 내 고깃집 ‘아가씨곱창’을 방문해 한국 고유의 맛을 즐겼다. BTS 덕분에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아 줄을 서야 먹을 수 있다는 이곳에서, 비는 “타운의 한식당들은 전부 줄을 서야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언급하며 한류의 인기를 실감했다.     이어 그는 베니스 비치 인근 보디빌더들의 성지라 불리는 야외 피트니스 장소인 ‘머슬 비치’도 방문했다. 비는 주민들과 운동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며, LA의 건강하고 활기찬 라이프스타일을 소개했다.   LA지역의 작은 상점들도 모두 따끈한 콘텐츠 소재다.   방송인 김나영씨는 실버레이크의 감성적인 카페와 멜로즈의 패셔너블한 쇼핑 거리를 소개하며, LA의 힙한 문화를 탐방하기도 했다. 전 메이저리거 이대호 선수는 LA한인들에게 익숙한 다저스 구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야구팬들을 위한 투어를 간접 체험할 수 있게 전하며, 스포츠 도시로서의 LA의 매력을 극대화했다.   장은주(풀러턴) 씨는 “로컬에 살며 내가 자주가는 곳이 한국 사람들에게 유튜브 등을 통해 새로운 관점으로 소개되는게 재미있게 느껴진다”며 “이제는 한국에서 놀러 온 사람들이 로컬 사람들보다 더 많이 정보를 아는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통계로도 입증된다. LA 관광청에 따르면 지난해 LA를 방문한 한국인은 약 26만명이다. 매달 2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관광을 위해 LA 땅을 밟고 있는 셈이다. 한국 관광객은 국적별 순위에서 멕시코, 캐나다, 중국, 영국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많다.     이로 인해 LA관광청은 지난 5월 한국의 여행업계 관계자들을 다저스 구장으로 초청해 환영 행사를 열 정도였다.   LA에서 살며, 한인타운과 이 도시의 매력을 깊이 탐구하는 인플루언서들도 주목받고 있다. ‘로컬라이즈’는 타운 내 숨은 맛집과 LA의 핫한 장소들을 소개하며, MZ세대 사이에서 떠오르는 인기 크리에이터로 자리 잡았다. 그는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LA에서 열리는 다양한 행사와 이색 공간을 탐방하며, LA의 다채로운 문화를 젊은 감성으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평가다.   유튜브 구독자만 96만명에 이르는 ‘원지의 하루’는 한동안 LA한인타운에서 살며 콘텐츠를 올리기도 했다. 원지씨는 ‘LA에서 혼자 살기’ ‘미국 면허 도전기’ ‘목수로 일하기’ ‘한인타운 사용법’ 등의 콘텐츠를 올리며 LA에서의 삶을 가감없이 보여주기도 했다.   LA를 안내하는 크리에이터들의 직종도 다양하다. 학생, 스튜어디스, 가정 주부, 직장인, 변호사 등 자신만의 시각으로 LA를 소개하고 있다. 일례로 ‘여행가는 시간’ ‘인세인’ ‘미쿡아재John’ ‘미니홈’ ‘썸띵가가’ ‘에브리데이 Lia’ 등 다양한 유튜버들이 브이로그부터 여행지, LA의 실생활 등이 담긴 콘텐츠들을 올리며 한국과 미국간의 거리를 좁히고 있는 것이다.   영상을 본 네티즌들은 댓글을 통해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에 별을 보러 가보고 싶다”, “햇볕도 쨍하고 캘리포니아는 정말 축복의 도시다”, “캘리포니아만 있는 ‘인앤아웃’을 가보고 싶다”, “올여름 LA를 가는 데 참고하겠다”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라스베이거스 지역에서 여행사를 운영중인 김정수씨는 “LA의 경우 최근 3~4년 사이에 유튜브 콘텐츠 등이 급격히 늘면서 관광객이 늘었고 덩달아 차로 이동이 가능한 거리의 라스베이거스까지 덕을 보는 상황”이라며 “한국이 미국을 많이 안다고는 하지만 인앤아웃처럼 로컬 사람들에겐 익숙한 햄버거집도 특별한 콘텐츠가 될 만큼 그동안 영상 콘텐츠가 부족했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전했다.   이제는 핫플레이스를 넘어 LA의 시사적인 부분까지 다루는 유튜버들도 생겨나고 있다. 그만큼 LA는 세계적으로 이목이 쏠릴 수 있는 콘텐츠가 많아서다.   100만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 ‘희철리즘’은 최근 한인타운 내 한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 인근 지역을 지나며, LA에서 경험한 생생한 현실을 영상에 담기도 했다. 그는 지인 제나 씨와의 대화를 통해, 타운 내 홈리스 문제를 지적했다.  제나 씨는 “밤에는 무서워서 걸어 다닐 수 없다”라고 언급해 LA가 단순히 화려한 도시만은 아니라는 현실을 시청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한 바 있다. 정윤재 기자방송인 김나영 한동안 la한인타운 방송인 김나영씨 한국인 관광객들

2024-09-03

[로컬 단신 브리핑] 한동안 방치 시카고 베트남 참전기념물 복구 외

#. 한동안 방치 시카고 베트남 참전기념물 복구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던 시카고 다운타운 리버 워크(River Walk) 소재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물이 복구 작업을 마치고 29일 다시 일반에 선보인다.     지난 2006년 430만 달러의 예산을 들여 제작된 베트남전 참전용사 기념물은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일리노이 주 출신 군인 293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시카고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물은 와바시와 스테이트 스트릿 인근 리버 워크에 있는데 그동안 낙서로 훼손되는 등 사실상 방치된 상태였다.     브랜든 존슨 시카고 시장은 27일 "20년 가깝게 방치되어 왔던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물에 대한 지적이 많아 그동안 필요한 복원 작업을 진행해 왔다"며 "우리는 재향군인들을 기려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고 이렇게라도 그들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어 기쁘다"라고 말했다. 존슨 시장은 이어 "(복구 공사가 마무리 된) 3월 29일을 앞으로 공식 베트남 참전용사의 날로 선포한다"고 덧붙였다.     베트남전 참전용사 기념물의 복원 작업에 소요된 정확한 예산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 시카고, 총기업체 '글록 건' 상대 집단소송도 추진    “총기 제조업체 '글록 건'(Glock Gun)사가 공공 안전보다 회사의 이익을 중시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한 시카고 시가 전국의 다른 지자체들과 함께 집단 소송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시카고 시가 쿡 카운티 법원에 제출한 소장에 따르면 '글록 건'사가 제조한 총기는 작은 부품 설치 및 스위치 장착 만으로도 권총을 자동 기관총으로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시카고 지역사회 안전국은 "’글록 건’사 간부들은 자신들이 판매하는 총기가 손쉽게 불법 자동 무기로 변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회사의 이익을 위해 계속해서 위험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며 "’글록 건’사가 최소한 자동 기관총으로 전환될 수 있는 스위치 기능만 없앴더라도 많은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카고 경찰(CPD)은 지난 2년동안 1100여정의 불법 개조 자동 기관총을 회수했는데 아직도 더 많은 총기가 시중에 존재할 것으로 추정했다.     한 전문가는 이와 관련 "집단 소송은 분명히 총기 제조업체에 부담을 줄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공동으로 소송을 진행한다 하더라도, 각 주마다 다른 판결이 나올 수도 있다"고 전했다.     ‘글록 건’사는 시카고 시가 제기한 소송과 관련 아직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는데 이와 관련한 재판은 오는 7월 중순께 시작될 것으로 알려졌다.     Kevin Rho 기자로컬 단신 브리핑 참전기념물 한동안 베트남 참전기념물 시카고 베트남 베트남전 참전용사

2024-03-28

[이 아침에] 배꽃

비가 내린다. 꽃비가 내린다. 실바람이 불자 한 무리의 새처럼 화려하게 비상하는 꽃비들. 한동안 공중에서 화사하게 춤을 추던 꽃잎들은 소리 없이 흩어지며 갈색 땅 위에 고운 꽃수를 놓기 시작한다. 쌉쌀한 바람과 함께 우아하고 고운 춤사위를 펼치고 있는 꽃잎들은 새봄의 시작을 알리려고 온 계절의 정령이려나.   새 계절의 향연을 축하하듯 수줍게 피어난 하얀 배꽃이 꼭 이월의 여왕 같다. 온몸을 순백으로 치장하고 신성한 혼례를 치르는 신부의 모습이다. 하늘하늘한 곱디고운 면사포를 쓰고 그 위에 흰 왕관을 얹은 이월의 신부, 순결한 자태가 눈을 부시게 한다. 환한 봄볕 아래 은은한 웃음을 짓고 있는 배꽃은, 다가오는 미래에 꽃길만을 약속받은 듯 무척이나 행복해 보인다.   자세히 보면 배의 꽃잎은 다섯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것은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때로는 분노하기도 하며 즐겁기도 한, 절절한 삶의 사연들을 꽃잎마다에 따로따로 새기려 그리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삶에 대해 전해 줄 말이 많은 꽃잎들은, 한 송이에 통째로 새기기보다는 조곤조곤 나누어 삶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나무 위에서 피어나서 한 생, 땅에 떨어져서 한 생 그리고 열매를 맺어서 다시 또 한 번의 생을 이루는 배꽃은 이렇게 세 차례의 삶을 산다. 삶에 얼마나 깊은 애착을 품었길래 세 번의 생을 마주하며 이생에 머물기를 원했을까. 지독한 겨울을 힘들게 견뎌낸 까닭에 그리도 애착이 깊어진 것은 아닐까. 어쩌면 삶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험하고 힘든 겨울이라는 대상이 꿋꿋이 버티고 있기에, 봄을 맞은 배꽃이 더 곱게 그리고 더 의미 깊게 피어 있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바람이 몰아치며 영원히 머무를 것 같은 버팀목이었던 나무에서 무참하게 떨어지는 하얀 꽃잎들. 아름답고 황홀했던 찰나는 참혹하게 사라지고 영구할 것 같던 행복은 덧없이 추락했다. 원래 삶이란, 높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아서 올라가면 언젠가는 반드시 내려와야 하는 것이 순리 아니던가.     떨어진 꽃잎들은 삶의 모든 것은 한결같을 수가 없어 모두가 변한다는 화두를 던지며, 세상의 모든 일이 덧없음을 의미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임을 말해주고 있다. 어찌 보면 가녀린 꽃잎들은 자신의 몸을 빌어 처절한 삶의 무상함을 설파하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떨어지는 꽃잎들은,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잊을 때마다 바람결에 메시지를 보내며 찰나의 아름다움이 덧없음을 이야기하는 듯도 싶다. 다른 눈으로 살피면 눈부신 꽃잎들은 생명체의 무상함을 세상에 보여주며, 현재의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일깨워 주려는 것도 같다.     추운 겨울이 지나 신선하고 희망찬 계절의 시작인 배꽃이 피어나는 봄이다. 하지만 어설픈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내 영혼에는 아직도 봄이 찾아오지 못하는 것 같다. 언제나 내 가슴에도 따뜻하고 온화한 봄이 찾아오려나. 머지않은 미래에 내 혼에도 밝고 화창한 봄이 오기를, 두 손을 모으고 기다린다. 김영애 / 수필가이 아침에 배꽃 한동안 공중 봄볕 아래

2024-03-20

LA 개스값 5.20불…하락세 지속 전망…가주 5달러 아래로 떨어질 듯

고물가에 지친 운전자들이 기뻐할 소식이 전해졌다. 개스값 하락세가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것.   전국자동차협회(AAA)와 유가정보서비스(OPIS)에 따르면 지난 9일 LA카운티 평균 개스값은 갤런당 5.20달러로 41일 연속 하락했다. 지난 41일간 총 1.12달러 내렸다.   전주와 비교해선 11.5센트, 전달보다는 79.3센트 밑도는 가격이다. 1년 전보다는 32.8센트 낮았다. 역대 최고치를 경신한 지난해 10월 5일의 6.49달러와 비교해선 1.29달러 내렸다.   오렌지카운티의 개스값은 지난 41일 동안 39차례 떨어진 갤런당 5.05달러였다. 지난주 대비 7.5센트, 전달 대비 77.9센트 낮았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는 36.7센트 내린 가격이다.   이날 전국 평균 개스값은 42일 연속 하락한 갤런당 3.40달러였다.     개스버디의 패트릭 드한 애널리스트는 “연말이 다가오는 가운데 전국적으로 개스값이 한동안 하락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며 “가주에서는 곧 갤런당 5달러 이하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향후 개스 가격 하락이 전망되는 이유는 국제 유가가 3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하락했기 때문이다.   8일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12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2.64% 하락한 배럴당 75.33달러로 거래를 마쳤으며, 브렌트유도 2.5% 하락한 79.54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모두 지난 7월 중순 이후 최저치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한 보고서에서 내년 1인당 개솔린 수요가 높은 가격과 인플레이션 등으로 시민들이 차량 운행을 자제하면서 20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국제유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전쟁과 관련된 위험이 낮아지고 수요 둔화가 전망되면서 지난 3주간 큰 폭으로 하락했다.   무엇보다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의 경제 상황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데다 항공 여행도 아직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으면서 수요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공급 측면에서는 러시아 원유 출하량이 4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는 데다 지난주 미국 원유 재고가 1200만 배럴 가까이 증가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이와 함께 미국석유협회(API)는 미국 최대 원유 저장 허브인 오클라호마주 쿠싱의 원유 비축량이 지난주 110만 배럴 증가했다고 밝혔는데, 이 보고가 사실로 확인되면 지난 6월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증가한 것이다.   프라이스 퓨처스그룹의 필 플린 애널리스트는 “최근 유가 폭락은 중국 경제지표에 근거해 세계 경제가 벽에 부딪힐 것이라는 우려와 가자지구 전쟁이 공급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훈식 기자 woo.hoonsik@koreadaily.com개스값 하락세 개스값 하락세 한동안 하락세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

2023-11-09

[우리말 바루기] 널부러질까, 널브러질까?

다음 중 바른 표현이 아닌 것은?   ㉠ 널부러지다  ㉡ 널브러지다  ㉢ 너부러지다   몸에 힘이 빠져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축 늘어지는 상태를 나타낼 때 ㉠과 같이 ‘널부러지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다. “계주를 끝낸 주자들은 한동안 운동장에 널부러져 있었다”처럼 쓰인다. 그러나 ‘널부러지다’는 표준어가 아니다. ‘널부러지다’는 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은 단어다.   정확한 표기는 ‘㉡널브러지다’이다. ‘널브러지다’는 “그들은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앉아 있었다”처럼 몸에 힘이 빠져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축 늘어지다는 뜻으로 쓰인다. ‘널브러지다’는 또한 “방에는 잡동사니들이 널브러져 있다”처럼 너저분하게 흐트러지거나 흩어지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계주를 끝낸 주자들은 한동안 운동장에 널부러져 있었다” 역시 “계주를 끝낸 주자들은 한동안 운동장에 널브러져 있었다”로 고쳐야 한다.   비슷한 단어로 ‘㉢너부러지다’도 있다. “그는 지친 얼굴로 방바닥에 너부러졌다”처럼 힘없이 너부죽이 바닥에 까부라져 늘어지다는 뜻으로 쓰인다. “꽝 소리와 함께 군인들이 여기저기에 너부러졌다” 등과 같이 죽어서 넘어지거나 엎어지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정답은 ㉠.우리말 바루기 한동안 운동장

2023-10-15

[삶의 향기] 힘 빼고 삽시다

일요일 법회가 끝나면 교무와 교도들이 함께 가끔 탁구를 즐긴다.     커피 내기 등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 승부에 크게 관심은 없지만, 같은 팀의 교무가 기분이 다운되어 있다거나, 특정 교도가 매번 커피를 사게 되면, 꼭 이기거나 졌으면 할 때가 있다.   스포츠를 즐기는 분들은 안다. 이겼으면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순간 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긴장이 되면서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반면에 져야겠다고 다짐을 하면, 무슨 일인지 대충해도 잘 된다. 왜일까. 욕심을 버렸더니, 마음을 비웠더니, 평소 기량의 120%가 나오는 것이다.   몸에 힘을 빼라는 말은 긴장하지 마라, 욕심을 버려라, 마음을 비우라는 말과 같다. 늘 정상에 가까운 혈압이, 측정 직전에 친구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나니 30% 가까이 높아졌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 몸에 힘을 빼라는 말은 결국 마음에 힘을 빼라는 말이다.   한동안 히트곡이 없던 유명 가수가 모처럼 가요 순위에서 1등을 했다. 비결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번에는 순위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작업을 했더니,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완전히 비어야 지혜가 나타난다는 불교의 공(空),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스포츠는 물론이고 어느 분야든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긴장도 하고 승리욕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묻는 이들이 있다.     맞는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한국 전쟁 이후 근대화라는 지상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시간이 나면 한자라도 더 익혀야 했고,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다.     입시 열풍을 넘어 광풍의 한 복판에서 자라온 필자 역시 고등학교 시절 존경하던 사회선생님의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죄"라는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한 치의 게으름도 용납하지 않고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아 온 것 같다.     "있는 것은 없는 것으로, 없는 것은 있는 것으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다 공한 것이나, 공한 것 역시 가득 찬 것이다".   불가의 유명한 게송(깨달음을 시구로 표현한 것)이다. 긴장을 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빈 마음에 기초하지 않으면 의욕과 최선은 오히려 패배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탁구의 예에서 명확히 볼 수 있다.     영어캠프에 참석한 초등학생들에게 가끔 이런 농담을 주고 받는다.     "교무님은 학교 다닐 때 한 번도 시험문제를 틀려본 적이 없어서 그런데, 틀리면 기분이 어때? 기분이 나쁠 거 같은데 사람들은 왜 틀리지?"     "교무님은 항상 잘난 척만 해요".   "잘난 척은 못난 사람이 잘났다고 할 때 잘난 척한다고 하는 거지, 교무님은 그냥 잘난 거야".   이런 농담을 들으면 아이들은 어처구니 없어 한다. 사실 재미도 있지만, 긴장을 풀고 여유를 가짐으로써 본래 성품을 유지하려는 수행의 일환이기도 하다.     우리는 유튜브를 볼 때나 심지어 휴식을 할 때에도 가능하면 공부와 일, 혹은 영적 성장과 관련한 것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부담이 있지는 않은 지 돌아봐야 한다.   때로는 소위 말하는 시시한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실없이 웃는 시간을 갖는 것도 정신건강과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될 것 같다.   힘 좀 빼고 살아야 한다.   drongiandy@gmail.com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교무가 기분 정도 긴장도 한동안 히트곡

2023-07-17

“이자율 높은 카드빚부터 갚아라”

다수의 근로자가 지속된 임금상승에도 상승 폭이 가파른 물가 상승을 따라잡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생활비 부담이 커진 많은 소비자의 재정 건전성은 악화 중이다. 이에 개인 금융 전문가들은 간단하지만 오래 지킨다면 더 나은 재정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작은 습관 6가지를 소개했다.   ▶소비 지출 점검   먼저 자신의 재정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소득과 지출, 저축, 대출 등 자신의 재정 현황을 미리 체크해야 성취 가능한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 그다음은  ‘필요한 지출’과 ‘원하는 지출’ 구분이다. 렌트비와 모기지는 항상 우선순위에 둬야 할 필요한 지출일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원하는 지출을 금지하는 것이 아닌 활용 가능한 지출을 확보하는 것이다.   ▶저축 비율 증가   지금 단 1~2%만의 변화로도 미래엔 큰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은퇴 저축, 주택 다운페이먼트 등에 저축하는 비용을 조금씩 늘린다면 적은 부담으로 미래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 만약 현재 401(k), 403(b) 등 은퇴 저축 계좌의 저축 비율이 낮다면 당장 조금씩 올려보는 것이 좋다. 저축금이 많아질수록 세금공제도 늘어나고 은퇴 소득도 늘어난다.   ▶고이자 빚 청산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기준금리를 지속 인상하면서 크레딧카드 이자율(APR)도 올해 역대 최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벌어도 모두 이자 비용으로 써야 한다면 제자리걸음이다. 높은 이자율의 크레딧카드 빚이 있다면 초기 APR이 0%의 크레딧카드를 발급받아 대금을 옮기는 것도 방법이다. 단, 카드사가 청구할 수 있는 수수료와 페널티를 사전 숙지해야 한다.   ▶이자 비용 절감   만약 자신이 비자금이 없어서 비상시에 크레딧카드로 해결하고 있다면 중단하는 것이 좋다. 앞으로 한동안 이자율은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전망이기 때문이다. 학자금 대출 등 변동금리 이자율의 대출이 있다면 지금 고정금리로 전환하는 것이 이로울 수 있다. 또한 주택 구매를 앞두고 있다면 다운페이먼트를 가능한 한 늘려 미래의 이자 비용을 줄이는 것이 좋다.   ▶가족들을 위한 사후 대비   자신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날 경우 남겨질 가족을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이럴 땐 고용주가 제공하는 생명보험을 고려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또한 자신이 신탁을 보유했다면 가족의 상황에 맞게 설정돼 있는지 변호사와 미리 확인해야 한다.   ▶금융 투자 다각화   한 곳에 모든 돈을 투자하는 것은 위험하다. 주식의 경우 성장주와 가치주, 분야별로는 기술, 제조, 의료 등 분산투자로 위험성을 최대한 낮추는 것이 좋다. 명심해야 할 점은 투자는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긍정적인 수확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훈식 기자 woo.hoonsik@koreadaily.com이자율 카드빚 크레딧카드 이자율 변동금리 이자율 한동안 이자율

2023-03-19

[김상진 기자의 포토 르포] LA에 비가 오면…

할리우드 사인도 젖는다.   LA는 12월부터 다음 해 1, 2월 까지가 우기다. 그래 봤자 비 오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데 이번 우기는 다르다. 할리우드 사인이 있는 산에는 장대 같은 비와 우박이 내렸다. 샌버나디노의 산간 지역은 폭설에 갇혀 13명이 사망하고 물과 전기가 끊겨 많은 주민은 아직도 고립돼있다. LA도 큰 일교차로 밤에는 두꺼운 외투가 필요할 정도다. LA에 비가 온다. 막걸리와 전과 향수   비가 흔치 LA의 한인들 특히 1세들은 비는 고국에서의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도시에서 자랐건 시골에서 자랐건 비의 추억을 한가지쯤은 가지고 있다. 비라도 내릴라치면 마켓의 막걸리와 전감 매출이 올라간다. 나이 지긋한 한인 1세들은 식당에 옹기종기 모여 막걸릿잔을 기울이고 고향을 추억한다.   에디(Eddy)는 8년째 LA 길거리를 누비며 밤이면 텐트에서 잠을 잔다. 한동안 스키드로우에서 지내다 최근 LA카운티박물관 인근으로 옮겨 텐트 생활하고 있다. 에디에게 LA의 우기는 혹독하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은 군 출신 베테랑으로 아프가니스탄 참전 경험이 있는 에디에게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다음주에도 비소식이 있다.  김상진 사진부장 kim.sangjin@koreadailyl.com김상진 기자의 포토 르포 할리우드 사인 한동안 스키드로우 아프가니스탄 참전

2023-03-10

[이 아침에] 현실과 환상 사이

어느 청명한 날, 아마존의 깊은 정글 속 작은 마을에 어마어마한 잠자리 한 마리가 폭풍과 구름을 몰고 날아들었다. 짙은 회색빛 몸체에 크고 번쩍이는 눈을 가진 거대한 잠자리는 마을 공터에 날아와 엄청난 먼지를 일으키며 천둥소리와 함께 온 마을을 공포의 도가니로 휘몰아 넣었다. 잠자리의 날개에서 나는 소리는 마치 칼로 바람을 베는 소리와 같았으며 꼬리에서는 연신 뜨거운 바람과 함께 불이 쏟아져 나와 번쩍번쩍 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리고 날개의 칼바람이 움막 지붕과 마을의 정자나무 가지도 갈가리 찢어 허공으로 날려 보내 마을 사람들을 경악게 했다.     마을의 어른과 아이들, 그리고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던 개들도 혼비백산하여 숲속으로 달아났다. 마을 사람들은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재앙의 날이 도래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마을 촌장은 덤불 속에 몸을 숨긴 채 이 거대한 잠자리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잠자리의 몸통이 열리면서 사람의 형상을 한 네 생물이 기어나와 두리번거리며 텅 빈 마을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리는 둥글고 번쩍거렸고 커다란 검은 두 눈은 얼굴 절반을 덮었다. 네 생물은 광낸 구리 같이 빛나는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몸속에서 작은 물체를 꺼내 밝고 푸른 느낌의 하얀 빛을 반짝이며 마을의 움막들을 기웃거렸다. 얼마후 네 생물은 움막에서 가져온 작은 질그릇을 들고 거대한 잠자리의 몸속으로 기어들어가 횃불 모양의 불을 토하며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한동안 마을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조상들이 전해준 전설에 의하면 재앙의 날에는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져 내려 땅 위의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린다고 했다. 촌장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재앙의 날이 우려했던 것 보다는 짧고 피해가 작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겨울 마을 사람들이 사냥꾼의 별자리를 위해 정성껏 드린 제사 덕분으로 여겼다.   촌장은 자신의 움막으로 달려가 덤불 속에 숨어서 목격한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먹물과 나무껍질을 꺼냈다. 거대한 잠자리와 네 생물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곧바로 마을의 중요한 물건들을 저장하는 동굴로 달려가 자신이 기록한 나무껍질을 질그릇 속에 소중히 보관했다. 촌장은 먼 하늘을 쳐다보며 “거대한 잠자리와 사람 같이 생긴 네 생물은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더라”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 시간, 헤지 글로부 방송에서는 아마존 정글 속에 불시착한 아파치 헬기의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국락 / 보잉사 시스템공학 박사·라번대학 겸임교수이 아침에 환상 마을 촌장 한동안 마을 마을 공터

2023-02-28

[우리말 바루기] 표준어가 된 ‘파이팅’

뮤지컬에 출연하느라 한동안  한국에 머물렀던 영어권 배우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어로 ‘파이팅’을 꼽았다. 한국 관객들이 SNS 댓글로 응원을 보내주었는데 ‘파이팅’이란 표현이 아주 많았다고 했다. 처음엔 싸우자는 것인가 했는데 무슨 의미인지 알고 나서는 제일 좋아하는 말이 됐다고 한다.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의 입에서도 ‘파이팅’이란 말이 종종 나온다. 한국인들이 많이 사용하다 보니 이를 익혀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 등을 응원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파이팅’이란 용어가 과거 영국에서 쓰던 ‘파이팅 스피릿(fighting spirit)’에서 왔다는 견해가 있다. 일본에서 응원할 때 사용하는 ‘화이토(ファイト, fight의 일본식 발음)’가 한국에서 ‘파이팅’ 또는 ‘화이팅’으로 변형돼 쓰이는 것이라 보는 사람도 있다.   2004년 국립국어원은 ‘파이팅’이 영어권에선 이런 뜻으로 쓰이지 않는 말이므로 ‘아자’ ‘힘내자’ 등의 우리말로 바꿔 사용하자고 결정한 적이 있다. 하지만 외국인들마저 ‘파이팅’을 한국어처럼 인식하는 상황이 되자 사전도 바뀌었다. 최근 국립국어원은 표준국어대사전에 ‘파이팅(fighting)’을 표제어로 올렸다. ‘감탄사로, 선수에게 잘 싸우라는 뜻으로 외치는 소리’ 등의 설명을 달았다. 사전에 이렇게 올렸다는 것은 표준어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원래는 외국어이지만 우리말처럼 쓰이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우리말 바루기 표준어 fighting spirit 한동안 한국 한국 관객들

2022-11-07

[수필] 바다로 가고 싶다

“짙은 녹색의   바다에 누워   하늘을 보면   하늘이 가볍게   나를 덮었다”   나는 바다를 좋아한다.     바닷가에 서서 광대하게 펼쳐진 바다를 보고 있으면 내 삶을 힘들게 하는 그 어떤 문제도 그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고 만다.     시선을 멀리 던져도 그 끝은 하늘에 닿아 어디서부터 바다인지 알 수 없다. 시작을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파도는 거대한 몸짓으로 나를 향해 달려온다. 하늘을 향해 올랐다 바다 깊은 속으로 떨어지며 바다를 품고 하늘을 품고 그렇게 달려와 끝내는 내 발등에서 하얗게 부서지고 마는 파도. 그 앞에서 나의 고뇌는 한낱 작은 알갱이의 모래알이 되고 만다. 가슴을 옥죄던 상처는 소금물에 씻겨 이미 아물어 버리고 언제 그랬는지 기억마저 없다. 나를 비울 수 있는 곳, 나를 다시 채울 수 있는 곳, 그런 바다를 나는 참 좋아한다.     바다와의 깊은 만남을 위해 난 늘 한적한 때를 택했다. 사람들이 없고, 파라솔이 없고, 해수욕을 즐기는 인파의 아우성이 없는 바다. 인적이 끊어진 곳, 그것은 주로 겨울 바다였다. 때론 북극의 얼어붙은 하늘을 담고 달려온 찬 바람에 온몸이 얼어 와도, 온갖 것으로 몸을 칭칭 감고 난 바다 앞에 섰다.     그렇게 그 앞에 서서 바라만 보다 난 바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나가 보기로 했다.     그것은 거대한 빌딩이었다. 배 안으로 발을 딛는 순간 그 장엄함에 가슴이 뛰었다. 14층이나 되는 건물이 고급스러운 자태로 우뚝 솟아 있었다. 선실마다 직원이 배치되어 있어 우리가 선실을 비울 때마다 들어와 깨끗하게 정리해 주었다. 배의 맨 위층에는 수영장과 달리기를 할 수 있는 트랙이 있고 뱃머리 부분에 카페가 있었다. 간단한 아침식사와 음료가 제공되는 그곳은 푹신한 소파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바다를 향한 3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어디를 앉아도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통유리에 나 있는 문을 나서면 야외용 가구가 있고 거기서는 바닷바람과, 하늘에서 곧바로 쏟아지는 햇살을 만날 수 있었다.     함께간 가족들을 위한 식사를 직접 준비하지 않아도 되니 난 더 많은 시간을 혼자 즐길 수 있었다. 식사는 정찬식당이나 뷔페식당에서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녁식사만 가족과 함께 정찬식당에서 코스요리로 우아한 식사를 하고, 나머지는 각자가 좋아하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다.     나는 주로 맨 위층에 있는 카페의 소파에서 시간을 보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그 장소에서 책을 읽다 음악을 듣다 잠시 오수를 즐기기도 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끝없이 바다만을 바라보며 누워 있기도 했다. 그렇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혼자 바다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짙은 녹색의 바다에 누워 하늘을 보면 하늘이 가볍게 나를 덮었다.     남편의 학교를 따라 메릴랜드에 정착했던 우리는 그곳에서 시작한 사업으로 넉넉한 삶을 살 수 있었다. 바쁜 도시 생활에 지친 우리는 큰아이가 대학에 갈 때쯤 작은 도시로 이사 갈 것을 계획했다. 일찍 은퇴하고 나머지 삶을 보다 보람 있는 것을 찾으며 보내자고 했다.       미국에서 주를 옮기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나라를 옮기는 것과도 같았다. 연방법을 따르는 것은 어느 주나 같지만 각 주마다 조금씩 다른 주법이 있었다. 메릴랜드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사업에 성공하였던 우리는 지나친 자신감으로 그런 세부적인 것을 살피지 않았다. 전문적인 조사나 찬찬한 검열도 하지 않고 급하게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거기에 더하여 생각하지 못한 여러 사건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우리는 그동안 이민생활에서 쌓은 모든 재산을 한꺼번에 잃고 말았다. 그리고 빚더미에 앉았다.     쉬어 가자고 택한 길이 오히려 새벽부터 밤까지 일해야 하는 고된 길이 되었다. 그런 삶을 10여년 살아내며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이 바다였다.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로 나가고 싶었다. 고된 노동에 지친 몸으로 난 날마다 바다를 그렸다. 잔잔한 바다 가운데 떠 있었던 그 순간을. 바다가 내가 되고 내가 바다가 되었던 그 순간을 떠올려 가슴에 담으며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육체적인 고통을 이겨 나갔다. 매일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조금만 여유 생기면 크루즈 가자고. 남편은 꼭 그렇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한 고비 한 고비 넘어가다 보니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이젠 크루즈로 한 일주일 여행을 해도 될 듯하여 남편에게 가자고 했다. 그가 아직은 안 된다고 한다. 코로나로 인해 한동안 운행을 안 하던 크루즈가 다시 시작했는데도 여전히 위험하다고 한다.  예전에는 배 안에서 확진자가 나오면 모든 사람이 배에서 못 내리고 한동안 바다 위에 묶여 있기도 했다.     어서 코로나의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날이 오자마자 그 큰 배를 타고 바다로 갈 것이다. 그 배가 가는 곳이 카리브해든 알래스카든 상관없다. 어디든 바다로 갈 테니. 난 그저 바다 한가운데로 가고 싶다. 그 바다에 눕고 싶다. 하늘을 덮고 싶다.  허경옥 / 수필가수필 바다 한동안 바다 바다 한가운데 바닷바람과 하늘

2022-07-07

개스값 다시 오르고 유류세도 인상

가주 전역의 개스 가격이 다시 오름세로 돌아선 가운데 7월 1일부터 가주 유류세 인상이 예정돼 있어 한동안 개스값 부담이 가중될 전망이다.     캘리포니아에너지위원회(CEC)의 가장 최근 자료에 따르면, 지난 2일 기준으로 가주의 갤런당 평균 개스 가격은 5.53달러다. 이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48%인 2.660달러가 원유 관련 비용이고 정유사 몫은 1.620달러(29%)를 차지한다. 개솔린 유통 및 마케팅 비용도 약 8%인 0.410달러였다. 특히 연방 및 주 정부의 유류세와 수수료는 15%인 0.835달러로 나타났다. 이중 연방 유류세는 0.184달러였고 가주의 유류세 및 수수료는 0.651달러로 계산됐다.   〈그래프·표 참조〉   특히 캘리포니아주는 유류세로만 현재 갤런당 51.1센트를 부과하고 있다. 이는 펜실베이니아주에 이어 2번째로 높은 것이며 현재 개스값으로는 전국 1등이다.   그럼에도 가주 운전자들은 7월 1일 이후부터는 2.8센트가 더 오른 갤런당 53.9센트를 주 정부 유류세로 내야 할 판이다.     가주법에 따라 개스 가격 책정 시 소비자물가지수(CPI)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고물가로 인해서 올해는 작년의 인상 폭인 0.6센트보다 4.7배나 많은 2.8센트가 상승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만약 13갤런짜리 자동차 연료 탱크를 가득 채운다면 36센트를 추가 부담하는 것이다.   올해 들어서 개빈 뉴섬 가주 주지사는 가주민의 유류 비용 부담을 덜어주고자 총 4가지 법안을 가주 의회에 제안했다.   첫 번째 안이 바로 7월 1일 가주 유류세 인상 잠정 중단 안이다. 가주 의회가 지난 1일까지 중단 법안을 처리했다면 7월 1일 유류세 인상을 막을 수 있었다. 가주 정부 측은 법 변경에 60일이라는 기간이 요구된다고 했다. 결국 이 시한이 지나서 7월 1일 가주 유류세 상향은 예정대로 진행된다.     두 번째 법안은 디젤에 부과되는 판매세 유예 안이었지만 이 역시 4월 30일까지 발효됐어야 7월 1일부터 시행할 수 있었다. 이마저도 무산됐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제안은 정부 보조로 3개월 동안 대중교통 무료 이용 안과 400달러 유류 비용 지원 안 이었다. 두 안 모두 의회서 교착 상태다.   이 때문에 주민들의 불만이 들끓고 있다.    오렌지 카운티에서 LA로 통근하는 A씨는 “일주일 새 잠잠하던 개스 가격이 다시 오르고 있다”며 “월 400달러는 더 지출하는 것 같다. 가주 의회와 정부는 왜 손을 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의 말처럼 4일 LA카운티 갤런당 평균 개스 가격은 일주일 동안 5.7센트 뛴 5.831달러를 기록했다. 오렌지카운티 역시 4일 연속 상승하며 갤런당 5.78달러였다. 다시 6달러를 향하고 있다.   또 다른 운전자도  “가주가 전년 400억 달러 흑자에 이어서 올해도 680억 달러의 추가 세수가 예상된다는데 의회는 주민의 고통을 외면만 하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소비자 권익 옹호 단체 관계자들은 “고물가로 인해서 실질 임금이 역성장했다”며 “서민은 통근이나 생계 목적의 자동차 주유와 식료품 구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리고 있다”며 “정부와 의회가 더는 뒷짐만 지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가주 상원은 최근 1인당 200달러를 환급해 주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진성철 기자유류세도 개스값 정부 유류세로 유류세 인상 한동안 개스값

2022-05-04

[글마당] 멸치 똥을 따고 싶지만

신기하게도 자다가 눈을 뜨면 새벽 4시다. 다시 잠들기를 기다린다.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자려고 누워 있는 것도 힘에 부친다. 창밖의 새들이 조잘거린다. 부지런한 새들은 나에게 일어나라고 재촉한다. 잠을 다시 자려고 누워서 버티는 것이 한심하다. 벌떡 일어났다.     커피잔을 들고 창밖을 내다봤다. 간밤에 비가 내렸는지 길바닥이 거무칙칙하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하얀 차 한 대가 물결치는 소리를 내며 길 건너 건물 앞에 멈췄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호기심으로 그 누군가를 나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차는 한동안 깜빡이등을 켜고 있다가 그냥 떠났다.     멸치 똥이라도 따자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냉동칸을 뒤적거렸지만, 멸치가 없다. 한국장을 간 지가 오래되었거니와 간다고 해도 비싼 멸치를 선뜻 집어 올 수가 없었다. 박스로 사다가 쟁여 먹던 예전과는 달리 작은 포장 멸치를 사 왔었다. 다듬을 틈도 없이 이미 바닥이 났다. 밥상 위에 수북이 놓고 멸치 배를 가르던 시절만 해도 여유로웠구나! 물가가 올라도 너무 올랐다. 미국장에 비해서 한국장은 손님에게 겁주듯이 올린다. 지금 이 시간에도 라벨기로 올릴 가격을 찍고 있겠지? 멸치가 뭐라고. 이젠 고만 먹자. 한국장도 가지 말아야지.   아침에 오트밀 죽을 손수 해 먹는 남편을 위해 빵이나 구워야지. 남편이 구수한 빵 냄새가 나면 환한 얼굴로 좋아하겠지. 오트밀 한 컵과 밀가루 한 컵에 베이킹파우더와 소금 그리고 설탕 대신 건포도와 호도를 넣어 훌훌 섞어준 다음 버터 대신 올리브 오일과 달걀과 우유를 넣고 슬슬 섞어서 오븐에 넣었다. 이스트를 넣고 숙성시켜 밀가루 반죽을 치대는, 과정이 복잡한 빵은 이따금 아주 가끔 기분이 당길 때만 한다. 대부분은 베이킹파우더를 넣고 간단히 만들어 먹는다.     남편은 옥수수빵을 좋아한다. 어릴 때 학교에서 얻어먹던 기억 때문인듯하다. 60년대, 그 많은 학교에 아이들의 고픈 배를 채우라고 미국에서 잉여 농산물 옥수숫가루를 보내줬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말을 되뇌곤 한다. 미국에 와서 보니 이곳 사람들이 간편하게 먹는 콘 머핀이다. 옥수숫가루를 사야지 하면서도 깜박 잊고 밀가루만 사 온 것이 못내 아쉽다.   남편은 건강에 나쁘다는 음식은 거의 먹지 않는다. 식당도 될 수 있으면 가지 않으려고 애쓴다. 집에는 설탕도 미원도 없다. 남들이 우리 집 음식을 먹으면 맛이 없다고 하겠지만, 건강식이라고 설거지하기 좋게 그릇을 싹싹 비운다. 마치 스님들이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공양 그릇 비우듯.   빵 반죽을 오븐에 넣고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허드슨강 저 멀리 뉴저지가 어둠을 뚫고 스멀스멀 밝아진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멸치 포장 멸치 밀가루 반죽 한동안 깜빡이등

2022-03-11

[살며 생각하며] 세탁소에서 생긴 일 - 슬픈 소식과 기쁜 소식

 1. 슬픈 소식   지난주 수요일에 세탁소로 전화 한 통이 왔다. 사실 하루에 세탁소로 걸려오는 전화가 한 두 통이 아니건만, 그 전화는 특별했다. 세탁소로 걸려오는 전화의 대부분 비즈니스에 관한 것이다. 자기가 맡긴 옷이 다 되었는가를 묻는 일부터 가게 위치며 세탁비에 관한 내용이 전화 통화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세탁소에서 전화 통화할 때 내 목소리는 늘 메말라 있는 편이다.   그러나 수요일에 걸려온 전화는 내 목소리에 감정이 실리게 하는 그런 종류의 사사로운 것이었다. 수화기를 들면서 발신처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아주 낯이 익은 이름이었고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석 달을 훌쩍 건너뛰었기 때문이었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론(Ron)의 아내의 것이었다. 론과 그의 아내는 그저 손님의 하나가 아니라 잠깐씩이라도 개인적인 마음을 나누는 나의 친구 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론의 아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기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나중에 확인해본 결과 작년에 마지막으로 세탁소에 들르고 일주일 후에 세상을 뜬 것이다.   10여 년 전에는 그의 아내로부터 교통사고로 외아들을 잃었다는 소식을 접한 기억이 있어서 론의 사망 소식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쓰리고 아렸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은 작년이지만, 늦었어도 내게 그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아서 전화했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넬 수 없었다. 그저 “So sorry”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건조하던 내 목소리에서 울음이 묻어 나왔다. 나는 어떻게 그 전화통화를 마무리 지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론의 아내는 밸런타인데이에 내게 전화를 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버지니아에서 짧은 여행을 하고 있어서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온 수요일에서야 뒤늦게 그녀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밸런타인데이에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두 사람, 남편과 아들의 기억 때문에 무척 아팠을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전화를 해서 더는 사랑을 전할 수 없는 그 아픈 마음 한 자락을 꺼내 보이고 싶었던 것일까?   2. 기쁜 소식   G는 이민 초창기부터 인연을 맺었던 친구다. 인연이라는 말과 친구라는 말이 결합하면 뭔가 깊고 그윽한 인간관계가 연상되지만, 그와의 인연은 한마디로 악연이었다. G는 한 마디로 어린 악마였다. 내 상상력을 벗어나는 악행으로 나를 곤경에 빠뜨리곤 했다. 그것은 그 친구의 머리가 얼마나 비상한가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했다. 우리 아이들 또래의 G는 결국 열다섯 살 때인가 내 일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권총으로 강도질을 하다가 살인을 했다는 그의 소식이 들려왔을 때, 나는 더는 그를 보지 않아도 되어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나의 일상에서 지워졌다.   그런데 20년 전쯤에 그에게서 편지 한 통이 왔다. 우리 아이들의 안부를 물으며 나를 Second Father라고 부르고 싶다는 내용이었는데,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았음에도 그 내용이 제법 절절하고 글씨며 문법도 훌륭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와의 인연이 이어졌다. 감옥으로 면회도 다녀왔고, 용돈도 몇 차례 보내주었다.   G는 가석방으로 몇 해 전 출소를 했다. 우리 세탁소를 몇 번을 찾아오면서 우리 인연은 계속되었다. 한동안 소식이 없더니 지난주에 세탁소로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자기가 곧 아버지가 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러면서 내 개인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전화번호를 알려주자 그는 나에게 최근의 사진을 보내주었다. 배가 잔뜩 부른 여자 친구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G는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어린 시절, 아빠를 모르고 살았던 G는 아빠를 그리워했고, 아빠의 모델을 거리에서 찾았다. 아이의 아빠가 된다는 희열을 그는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빠도, 엄마도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 (있어도 아빠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그래서 나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나도 기쁘고 G에게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3. 나는 젊은 시절 시를 쓰고 싶어 했다. 나는 시를 감정의 표면장력의 상태를 글로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응축된 감정이 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응어리진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의 감옥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결국 나는 한 줄의 시도 쓰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감정을 듣고 말하는 통속주의 예찬자가 되고 말았다. 누군가에게 슬픔과 기쁨을 말할 수 있다면, 그리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축복이 아닐까? 나는 현재 뼛속까지 통속 예찬론자임을 고백한다. 김학선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소식 세탁소 사망 소식 한동안 소식 소식 지난주

2022-03-09

[삶의 뜨락에서] 세월에 따라 생각도 변해야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시간의 흐름에 거슬러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 우리의 몸이 우선 그러하다. 한동안 성장을 위해서 달려가던 육체는 이제 어느 시점을 지나면 성장을 멈추고 낡아지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노화로 통칭하는 이 과정이 언제 정확히 시작되는지 그리고 도대체 왜 시작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생각과 마음 정신 또한 예외가 아니다. 몸의 조건과 상태가 하락하기 시작하는 시점보다는 훨씬 늦은 때에 우리의 생각은 진화를 멈추고 망가지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어쩌면 육체와는 달리 정신은 끝없이 전진하고 전진할 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이가 조금 먹은 그러니까 이제는 상당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일방적인 생각일 수 있다.     정신도 퇴락한다. 한동안 굳건했던 저 푸르른 마음도 아주 천천히 밀도가 떨어지며 소멸을 향해 달려간다. 하강이건 상승이건 시간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생각 또한 변한다. 망아지처럼 아무 곳으로나 뛰어다니던 옛 시절의 마음과 생각에 그대로 변함없이 머무른다면 그 또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나이에 따라 우리의 생각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생각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가장 흔히 듣는 대답 중 하나는 경험의 양이 늘어가면서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더욱 포용하고 허용하는 정신이 된다.   아들과 가끔 말다툼을 한다. 특히 시간 약속을 했는데 지키지 않을 때 무척 화가 난다. 우두커니 옷을 입고 외출 준비를 마쳤는데 자동차를 가지고 나가 시간 내에 오지 않을 때 언성이 높아지고 잔소리 겸 화를 낸다. 늦은 이유를 설명하지만 화가 난 상태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미안하다며 소리를 낮추라고 야단이다. 몇 번은 내가 참고 지나쳤다. 반복되는 행동으로 다른 사람과 약속 시각이 늦어졌다. 너무 속이 상해 화를 내고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찾으려고 백방으로 알아보고 전화도 하는데 오늘은 그런 기미가 없다.     하루는 딸 집에서 자고 가게에 나갔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다. 가게에 찾아오지도 않는다. 괘씸했다. 그래서 이틀째는 혼자 사는 친구 집에서 신세를 졌다. 3일째가 되었는데 주말이다. 갈 데도 없고 화가 누그러지지도 않았지만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늦게 집에 들어갔다. 엄마가 들어와도 별 이상한 기류가 없다. 내 방에 들어와 생각했다. 다 큰 아들을 엄마 마음대로 말하고 명령하듯이 대하면 되겠는가. 아들에게 화내기 전에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침에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가는데 아들이 나에게 대화할 준비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 대화를 해서 이해하고 교감이 있어야지 무조건 엄마의 권위를 내세우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세월 앞을 바라보며 멍청해진 나 자신이 어리석기 짝이 없다. 몸은 조금씩 무너지는 것 같은데 내 내면의 강고함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젊은 시절의 부질 없는 욕망으로부터 나는 정말 자유로워지고 있는지 육체를 지배하는 그리고 육체적 삶을 지배하는 번잡한 의무로부터의 해방을 정말로 나는 이해하고 있는지 그것을 참된 삶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내 생각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이 많아진다. 양주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세월 생각 시간 약속 마음 정신 한동안 성장

2021-12-28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