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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나의 ‘노 쇼핑(No Shopping)’ 체험기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옷 정리를 하는데 저쪽 박스에서 오늘 산 하얀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가 나왔다.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깨달았다. 색깔, 디자인, 사이즈까지 똑같은 옷을 두 벌 산 것이다. 가물거리는 기억력을 탓하기에는 사건이 너무 중대했다.   나름대로 바겐 헌터를 자처하며 충동구매를 자제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꼴이 되었다. 윤년이라서 그런가. 누구보다도 나에게 실망했고 앞으로 더욱 신중히 생각한 후 소비를 하기로 했다. 내친김에 석 달간 옷이나 신발 등의 원하는 물건을 일절 사지 않기로 했다. 지금껏 이런 일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살면서 이것도 좋은 경험인 듯싶었다.     올 1월에 시작해서 3개월이 지났다. 금욕주의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한 달은 그럭저럭 버텼다. 두 달 가까이 되자, 물건을 사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TV에서 선전하는 물건마다 다 가졌으면 했고, 아마존에서는 찜해 놓았던 귀걸이와 액세서리가 세일을 시작했다. 돈이 없어서 사지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사지 않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지난 석 달간 지출 명세서는 거의 식료품과 레스토랑, YMCA 멤버십이 주를 이루었다. 운동이 기억력 개선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기도 했지만, 하던 운동을 멈출 수는 없었다.     돈을 쓰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는 날에는 트레이더 조에서 작은 물병에 하얀 뿌리가 보이는 히아신스와 튤립을 샀다. 얕은 생각에 내 필요로 산 것이 아니고 온 가족을 위해 샀으니, 이 약속에 어긋나는 행위는 아니지 싶었다. 이왕에 사는 꽃이라서 종류별로 색깔별로 샀다. 갑자기 거실 한쪽에 미니 화원이 생겼다.     하고 싶은 일을 못 하자, 식욕이 늘었다. 위가 든든할 때면, 포만감이 들어 심리적으로 안정됐다. 하지만 솟아나는 식탐을 조절하기는 쉽지 않았다. 평소보다 먹는 양이 늘어나니 살이 찌기 시작했고,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얼굴 좋아졌다고 했다. 금단 현상이 이런 느낌이리라.     이에 비해 좋은 결과도 있다. 무심코 지출되는 푼돈과 씀씀이가 없어지니, 크레딧카드 빌은 확연히 줄고 은행 잔고는 올라갔다. 또한, 버리는 양이 줄어 쓰레기는 눈에 띄게 적어졌다.     계획에 없던 일을 시작하고 석 달이 지나자, 화장품도 떨어지고, 미장원도 가야 했고, 고무장갑도 사야 했다. 제한된 기간 끝까지 잘 참아 준 내가 자랑스럽다. 그동안 이해해 주고 도와준 가족도 고맙다. 소비하지 않아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음을 배웠다. 내년에는 미리 한 달을 작정하고 ‘노 쇼핑(no shopping)’ 생활을 하련다.   이리나 / 수필가이 아침에 shopping 체험기 no shopping 기억력 개선 푼돈과 씀씀이

2024-04-04

네팔 인턴 체험기

 네팔에서 인턴십을 하는 동안 나는 6개의 다른 병원에서 의사들을 따라다녔다. 하지만 내가 가장 기억 남는 순간은 카페테리아에서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헐떡거림이 퍼졌을 때 일이었다. 세 시간 동안 힘든 수술을 마친 의사들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여성을 도울 수 있도록 내게 물러서라고  지시했다  .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내가 할수 있는건 그저 물러나는 것 뿐이었다. 의료 인턴인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에 안타까웠던 순간이었다. 이 경험은 내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사람들을 돕는 의사이자 지역 사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은 일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그 결과 존 홉킨스 캠퍼스  응급 의료 기관의 공인 이엠티가 되기 위해 지원했다. 그러나 의학에 대한 나의 열정은 환자의 죽음을 처음 접했을 때 시험 받았다.   한남자가 여동생과 함께 걷다가 총에 맞아 ,들것에 들려진 상태로 내 앞에 쓰러져 있었고   간호사가 심폐소생술을 시행했으나 , 결국 사망선고를 알리는 간호사를 보며 모두의 노력이 네팔의 의료진에게 절망으로 울려 퍼졌다. 이러한 경험은 나를 의대에 진학하는데 강한 영향을 주었다. 의과대학에 지원하는 것은 좋은 성적, 자원 봉사 찾기, 과외 활동 참여, 수백 개의 에세이 쓰기 등 여러가지 이유로 어렵다.시간이 지나면서 중요 한것은 헌신하고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4년동안 10번의  자원봉사 경험보다 1, 2번의 소중하고 중요한 자원봉사 경험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마찬가지로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것도 장기적으로 중요하다. 하루에 2~4시간을 따로 떼어서 매일 공부하는 것이 시험 전 날 17시간 공부하는 것보다 낫다. 규율을 정해서 규칙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의과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낼 수 는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개인적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지가 중요하다. 그러고 이러한 노력과 경험이  오늘날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저명한 수준에서 조지 타운 대학은 야심찬  의사가 기술을 확장하고 평생 학습에 대한 사고 방식을 개발 할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된 커리큘럼을 갖추고있다. 지금까지의 경험은 교실에서 배운 모든 것이 임상 치료의 의사 결정에 직접 적용된다는 사실에 점점 더 흥분하게 만들었다. 학생들에 대한 학교의 헌신, 강력한의료 기여 및 협력 학습 환경으로 인해 나는 그것에 큰 관심 뿐만이 아니라 의학 분야에서의 경력을 쌓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펜더믹이후 나는 가족들 사이에서 백신에대한 주저함,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가족들에게 노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최근 급증하는 반 아시아인 증오 범죄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했다. 이러한 모든 경험의 조합으로 에에피아이 커뮤니티 일원으서 안타까음을  알게되었다. 환자들이 때때로 의사나 의료전문가에게 자신의 필요에대해 말할 목소리가 없다는것을 배웠다. 침묵의 이유는 신뢰가 부족하거나 훼손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셀수 없이 많이있다. 이것이 내가 왜 내 가족,두려워하는 사람들, 에에피아이커뮤니티, 내가 살고있는 커뮤니티의 옹호자가 되고싶은지에 대한 근거라는 것을 배웠다.     Lucy Zheng체험기 네팔 네팔 인턴 자원봉사 경험 의사 결정

2021-11-17

30일간의 노숙자체험을 마치고…

30일간의 노숙자체험을 애틀랜타에서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이다. 3시간 후면 비행기를 타고 평화나눔공동체 본부가 있는 워싱턴 DC로 돌아간다. 공항으로 향하면서 이곳 노숙자선교와 인종화합을 위한 부활절 꽃심기 행사에 몇 가지 조언할 내용이 떠올랐다. 운전을 돕고 있는 송요셉 목사님과 김마이클 집사님과 함께 행사장으로 사용될 다운타운 빈민가에 있는 노숙자 쉘터 한 곳을 잠시 들르기로 했다. 달리던 차안에서 그간 노숙자체험을 위해 입고 다녔던 외투를 한 노숙자에게 선물로 기증하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들었다. 노숙자체험을 위해 눈보라에도 견딜 수 있는 방한복을 중고재활용품 판매장인 ‘Goodwill’에서 12달러를 주고 구입했었다. 첫눈에 두텁고 따스해 보이는 방한복이 들어왔다. 옷 안을 살펴보니 상표에 새겨진 영문글자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흔히 말하는 명품 ‘런던 포그’였다. 비록 남이 입던 헌옷이지만 명품답게 옷 안에 방한용 조끼도 붙어 있었고 두터운 모자까지 달려있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몸집이 큰 미국사람이 입던 옷인 터라, 입고 보니 나는 말 그대로 막대기에 입혀놓은 논두렁 허수아비와 같았다. 특히 그 유명한 뉴욕 맨해튼 패션거리를 지날 때 가끔 지나가던 사람들이 왜 뒤돌아 곁눈질하며 나를 처다 보았는지 이해가 된다. 여하튼 세찬 눈보라에도 견디게 해 준 12달러짜리 명품 헌옷. 한 달간 나의 보디가드가 되어 준 그 옷에 감사할 따름이다. 쉘터에 막 도착을 했을 때 마침 두 분이 노숙자들에게 다 못 나눠준 외투를 마저 주고 싶다고 했다. 새 옷을 보더니 노숙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옷을 얻지 못하고 실망에 찬 모습으로 돌아가는 노숙자들을 보며 안타까움에 잠기기도 했다. 노숙자들에게 기도를 해 주고 쉘터를 떠나려할 때, 비록 나의 친구가 된 명품헌옷이지만 필요한 노숙자에게 선물로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때마침 마이클 집사님이 전에 나눠준 헌 옷이 너무 작아 고민을 하는 노숙자 형제가 있다며 소개했다. 올랜도 존슨이라고 인사를 하는 형제는 옷이 낡아 가늘게 줄무늬로 뒤덮인 검정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다. 마이클 집사님은 형제에게 내가 노숙자체험을 하며 입은 거룩한 옷이라고 부추겼다. 그러자 형제는 그 값진 옷을 꼭 갖고 싶다고 했다. 나는 형제에게 ‘런더 포그’ 상표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명품이라고 했다. 나는 형제에게 노숙자체험을 통해 나의 친구가 된 옷이라고 했다. 그러자 형제는 명품보다 더 소중한 의미가 담긴 ‘거룩한 옷’이라며 잘 입겠다고 했다. 그 옷을 입고 노숙생활을 벗어 훨훨 날아 새삶을 사는 사람이 됐으면 한다. 애틀랜타 공항대합실에서 30일간의 노숙자체험을 되새기고 있는 동안 걸려온 휴대전화를 받고 보이스 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다 몇 번 비밀번호를 잘못 눌러 그만 그 안에 있는 500명 이상의 전화번호가 다 지워졌다. 공항에 있는 전화회사로 갔더니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겨우 외우고 있는 것은 아내의 휴대전화번호 뿐이었다. DC에 도착하면 긴급히 연락할 일이 산적해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앞이 캄캄하고 온 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간 컴퓨터와 휴대폰에 너무 의존적이어서 문명의 노예가 된 것 아닌가 하는 반성도 됐지만 30일간의 육체적인 노숙자체험에 정보와 통신까지 내려놓은 노숙자가 된 기분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마치 무소유의 인간처럼 그저 묵상에만 잠겼다. 그러나 순간 남들이 하지 않은 노숙자체험까지 하며 왜 사서 고생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 나와 같이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동료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시애틀 둥지선교회(김진숙목사), LA울타리선교회(나주옥목사), LA 소중한사람들(김수철목사), 시카고 기도의집(김광수목사), 뉴헤이븐 아가페교회(유은주선교사), 뉴욕 브니엘선교회(최명희선교사), 애틀랜타 평화나눔공동체(송요셉목사), 볼티모어 평화나눔공동체(김봉수목사), 워싱턴 DC 평화의집(박현호선교사), 그리고 뉴욕 평화나눔공동체와 워싱턴 DC 평화나눔공동체 본부식구들. 이들의 귀한 사역에 경의를 표하며 각 도처에 있는 교회들과 개인들이 많은 기도와 후원으로 이들을 협력하길 간절히 기도한다. 최상진목사(평화나눔공동체 대표)

2010-03-23

[평화나눔공동체 최상진 목사의 30일간 노숙자 체험기-8·끝] 도시 빈민 선교는 교회 몫

지난 2월 28일(일) 버지니아에 위치한 성마가연합감리교회(이광훈목사)가 평화나눔공동체 사역현장에서 노숙선교와 인종화합선교에 힘을 모았다. 미국의 경제적인 위기로 노숙자들와 극빈자들이 증가하고 있고 타종교 이민자들이 워싱톤지역에 몰려들며 지역선교의 중요성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13년전부터 다인종 다문화된 미국에서 "지역선교는 곧 세계선교"라는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의 도래를 강하게 역설해 온 평화나눔공동체의 사역이 미전역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당연한 일이다. 지난달 마지막 주간 나는 애틀랜타지역 교회들을 대상으로 예배인도와 지역선교세미나를 인도한 바 있다. 이 기간 애틀랜타 성약장로교회(심호섭 목사) 시온인터내셔널교회(고재동 목사) 한인연합장로교회(정인수 목사) 평화장로교회(조기원 목사) 등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통해 기독교의 위기와 지역선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실제로 기독교는 밖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건물 안에서 만의 교제로 안주하고 지역선교가 빠진 해외선교에 치우친 사이에 반기독교 운동의 확산 이슬람의 급성장 이단종파의 급성장 젊은 세대의 무종교화 등으로 위기를 겪고 있다. 나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미 세계인종이 몰려있는 우리의 도시지역을 복음화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미전도 종족들이 우리의 가까운 도심지 안에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그들 곁에 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만이 현재 겪고 있는 기독교의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버지니아 알링턴 소재 성마가연합감리교회(이광훈 목사) 신도들이 평화나눔공동체 선교현장을 찾았다. 이날 성마가연합감리교회 여선교회와 남선교회로 구성된 20여 명의 봉사팀들은 평화화나눔공동선교현장에서 150여 명의 노숙자들에게 음식과 겨울용품을 나눠주고 개인전도 활동을 펼쳤다. 이광훈 담임목사는 사역에 동참한 후 "우리의 가까운 DC 안에도 천문학적인 수의 노숙자들과 극빈자들 그리고 복음을 모르는 타인종들이 있어 매우 놀랐다"며 "지역선교를 위해 우리 교회들이 해야 할 일이 산재해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봉사자들은 평화나눔공동체 센터에서 간단한 노숙자전도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내달 4일 부활절에 있을 빈민지역 '꽃심기 행사'를 비롯해 정기적으로 평화나눔공동체의 선교현장을 방문해 이슬람권을 포함한 타인종 선교에도 협력하기로 했다.

2010-03-23

[최상진 목사의 30일간 노숙자 체험기-8·마지막회] "지역(도시 빈민)선교, 교회들의 몫입니다"

지난 2월 28일(일) 버지니아에 위치한 성마가연합감리교회(이광훈목사)가 평화나눔공동체 사역현장에서 노숙선교와 인종화합선교에 힘을 모았다. 미국의 경제적인 위기로 노숙자들와 극빈자들이 증가하고 있고, 타종교 이민자들이 워싱톤지역의 몰려들며 지역선교의 중요성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13년전부터 다인종 다문화된 미국에서 “지역선교는 곧 세계선교”라는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의 도래를 강하게 역설해 온 평화나눔공동체의 사역이 미전역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당연한 일이다. 지난달 마지막 주간 나는 애틀랜타지역 교회들을 대상으로 예배인도와 지역선교세미나를 인도한 바 있다. 이 기간 애틀랜타 성약장로교회(심호섭 목사), 시온인터내셔널교회(고재동 목사), 한인연합장로교회(정인수 목사), 평화장로교회(조기원 목사) 등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통해 기독교의 위기와 지역선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실제로 기독교는 밖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건물 안에서 만의 교제로 안주하고, 지역선교가 빠진 해외선교에 치우친 사이에, 반기독교 운동의 확산, 이슬람의 급성장, 이단종파의 급성장, 젊은 세대의 무종교화 등으로 위기를 겪고 있다. 나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미 세계인종이 몰려있는 우리의 도시지역을 복음화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미전도 종족들이 우리의 가까운 도심지 안에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그들 곁에 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만이 현재 겪고 있는 기독교의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버지니아 알링턴 소재 성마가연합감리교회(이광훈 목사) 신도들이 평화나눔공동체 선교현장을 찾았다. 이날 성마가연합감리교회 여선교회와 남선교회로 구성된 20여 명의 봉사팀들은 평화화나눔공동선교현장에서 150여 명의 노숙자들에게 음식과 겨울용품을 나눠주고 개인전도 활동을 펼쳤다. 이광훈 담임목사는 사역에 동참한 후 “우리의 가까운 DC 안에도 천문학적인 수의 노숙자들과 극빈자들, 그리고 복음을 모르는 타인종들이 있어 매우 놀랐다”며 “지역선교를 위해 우리 교회들이 해야 할 일이 산재해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봉사자들은 평화나눔공동체 센터에서 간단한 노숙자전도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내달 4일 부활절에 있을 빈민지역 ‘꽃심기 행사’를 비롯해 정기적으로 평화나눔공동체의 선교현장을 방문해 이슬람권을 포함한 타인종 선교에도 협력하기로 했다. (노숙자들을 12년째 돕고 있는 최상진 목사는 지난 1월20일 워싱톤 DC를 출발해 메릴랜드,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뉴욕, 메사츄세츠, 커네티컷, 조지아를 거처 2월21일까지 노숙자 체험을 가졌다. 노숙자 선교 후원을 원하는 사람들은 571-259-4937로 연락하면 된다.)

2010-03-16

[최상진 목사의 30일간 노숙자 체험기-7] 한국 처녀 사랑한 레이

어느 날 뉴저지 한무리교회 소속 문혜숙집사님이 매주 화요일 저녁 5시 맨해튼 41번가 버스터미널에서 하는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급식행사에 참여했다. 봉사를 마친 후 개인 전도를 하다가 '레이'라 부르는 한 노숙자 형제를 만났다. 형제는 화요일저녁마다 이곳에 나와 저녁을 먹으며 자원봉사자로 문집사님을 돕곤 한다. 사실 형제는 노숙자라기보다는 요즘 미국에 생긴 신흥계급 워킹푸어(working poor)에 가깝다. 워킹 푸어란 노숙자답지 않은 노숙자로 직업은 있으되 너무 소득이 적어 방 하나 얻기 힘든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노숙자와 종이 한 장 차이로 언제든 거리에 주저앉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 중 다수가 주로 거리나 쉘터에서 무료급식으로 끼니를 채우기도 한다. 다행히도 오늘 만난 레이 형제는 현재 정부가 극빈자들에게 주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형제의 나이는 47세이며 이곳에 선교를 위해 1년 동안 방문했던 한국인 자매와 깊은 교제를 했다고 한다. 그 자매는 학생신분을 유지하며 거리에서 전도활동을 했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여친'은 3주전에 비자가 만료돼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형제는 지금까지 그녀와 전화로 가끔 통화를 할 정도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고백했다. 형제는 한 시도 그녀를 잊을 수 없다며 다시 미국에 돌아오면 결혼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사실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형제가 한국에서 그녀가 다니던 교회 주소와 그녀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실인 듯 했다. 게다가 형제는 나에게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건네주며 꼭 국제전화로 자신의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 그날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뉴저지 버겐 카운티의 시의원 고든씨도 우리와 함께 봉사를 했다. 고든 의원은 몇 개월 전부터 가끔 화요일에 나와 봉사 일을 함께 돕고 있다. 레이 형제는 "고든 의원이 자신의 한국 비자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며 "빨리 한국에 가서 애인을 만나 결혼 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인종과 국경을 넘어선 애타는 사랑! 그러나 만날 수 없는 이수일과 심순애의 슬픈 연가에 당장 핸드폰으로 한국에 있는 형제의 애인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러나 혹시 주책이 아닐까 싶어 포기했다. 그리고 개인 프라이버시를 위해 그녀에 대한 더 자세한 언급은 피하고자 한다. 다만 그녀는 지금 경기도 용인에 거주하고 있다. 여하튼 레이 형제는 그녀를 만난 후부터 한국인과 한국음식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형제는 그녀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에 한국인들을 만나면 꼭 자신의 여자 친구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흥에 겨워 언급한다. 형제가 41번가 버스터미널에서 한국인들이 하는 노숙자급식에 선뜻 자원봉사자로 나선 것도 한국인 애인이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노숙자라고 정상적인 애인을 가질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타인종에 대해 배타성이 강한 한국인이라고 해서 타인종 그것도 타인종 노숙자를 사랑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사실 한국 아가씨들에게 노숙자 그것도 타인종 노숙자들과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면 인격과 인권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그 자리에서 욕설을 퍼부을지 모른다. 성경에도 버림받은 여인을 아내로 삼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종종 있지만 한인들에게는 섬뜩한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 아무튼 한국인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는 노숙자 레이 형제에게 마틴 루터 목사의 유명연설 제목처럼 언젠가 'I have a dream'이 이루어지는 그날이 꼭 왔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2010-03-16

[최상진 목사의 30일간 노숙자 체험기-7] 한국 처녀를 사랑한 노숙자 이야기

어느 날 뉴저지 한무리교회 소속 문혜숙집사님이 매주 화요일 저녁 5시 맨해튼 41번가 버스터미널에서 하는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급식행사에 참여했다. 봉사를 마친 후 개인 전도를 하다가 ‘레이’라 부르는 한 노숙자 형제를 만났다. 형제는 화요일저녁마다 이곳에 나와 저녁을 먹으며 자원봉사자로 문집사님을 돕곤 한다. 사실, 형제는 노숙자라기보다는 요즘 미국에 생긴 신흥계급 워킹푸어(working poor)에 가깝다. 워킹 푸어란 노숙자답지 않은 노숙자로, 직업은 있으되 너무 소득이 적어 방 하나 얻기 힘든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노숙자와 종이 한 장 차이로 언제든 거리에 주저앉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 중 다수가 주로 거리나 쉘터에서 무료급식으로 끼니를 채우기도 한다. 다행히도 오늘 만난 레이 형제는 현재 정부가 극빈자들에게 주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형제의 나이는 47세이며 이곳에 선교를 위해 1년 동안 방문했던 한국인 자매와 깊은 교제를 했다고 한다. 그 자매는 학생신분을 유지하며 거리에서 전도활동을 했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여친’은 3주전에 비자가 만료돼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형제는 지금까지 그녀와 전화로 가끔 통화를 할 정도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고백했다. 형제는 한 시도 그녀를 있을 수 없다며 다시 미국에 돌아오면 결혼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사실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형제가 한국에서 그녀가 다니던 교회 주소와 그녀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실인 듯 했다. 게다가 형제는 나에게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건네주며, 꼭 국제전화로 자신의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 그날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뉴저지 버겐 카운티의 시의원 고든씨도 우리와 함께 봉사를 했다. 고든 의원은 몇 개월 전부터 가끔 화요일에 나와 봉사 일을 함께 돕고 있다. 레이 형제는 “고든 의원이 자신의 한국 비자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며 “빨리 한국에 가서 애인을 만나 결혼 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인종과 국경을 넘어선 애타는 사랑! 그러나 만날 수 없는 이수일과 심순애의 슬픈 연가에 당장 핸드폰으로 한국에 있는 형제의 애인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러나 혹시 주책이 아닐까 싶어 포기했다. 그리고 개인 프라이버시를 위해 그녀에 대한 더 자세한 언급은 피하고자 한다. 다만 그녀는 지금 경기도 용인에 거주하고 있다. 여하튼 레이 형제는 그녀를 만난 후부터 한국인과 한국음식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형제는 그녀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에 한국인들을 만나면, 꼭 자신의 여자 친구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흥에 겨워 언급한다. 형제가 41번가 버스터미널에서 한국인들이 하는 노숙자급식에 선뜻 자원봉사자로 나선 것도 한국인 애인이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노숙자라고 정상적인 애인을 가질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타인종에 대해 배타성이 강한 한국인이라고 해서 타인종, 그것도 타인종 노숙자를 사랑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사실 한국 아가씨들에게 노숙자, 그것도 타인종 노숙자들과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면 인격과 인권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그 자리에서 욕설을 퍼부을지 모른다. 성경에도 버림받은 여인을 아내로 삼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종종 있지만, 한인들에게는 섬뜩한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 아무튼 한국인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는 노숙자 레이 형제에게 마틴 루터 목사의 유명연설 제목처럼 언젠가 ‘I have a dream’이 이루어지는 그날이 꼭 왔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노숙자들을 12년째 돕고 있는 최상진 목사는 지난 1월20일 워싱톤 디씨를 출발해 메릴랜드, 펜실베니아, 뉴저지, 뉴욕, 메사츄세츠, 커네티컷, 조지아를 거처 2월21일까지 노숙자 체험을 가졌다. 노숙자선교 후원을 하기 원하는 사람은 전화 571-259-4937번으로 연락하면 된다.)

2010-03-09

[평화나눔공동체 최상진 목사의 30일간 노숙자 체험기-6] 노숙자가 겨울나는 비결

워싱턴 DC를 포함해 동부지역에 지난달 '재난'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극심한 폭설이 내렸다. 영하권의 기후에 노숙자들을 포함해 일부 사람들이 동사했다. 추운겨울 특히 눈이 내리는 겨울은 노숙자들에겐 눈꽃축제의 밤이 아니라 공포의 대상일 뿐이다. 과연 노숙자들은 어떻게 겨울을 나며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가? 노숙자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자연스레 생존본능을 통해 추위를 이겨내는 다양한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우선 우리가 아는 대로 노숙자전용 쉘터에서 몸을 녹인다. 그러나 쉘터에서는 규칙이 엄격하고 자신의 소지품들을 분실할 가능성이 많다. 일부 노숙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나 빌딩 지하에서 지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선 노숙자 고수들의 겨울나기 비법을 알아보자. 첫째 추운 겨울 거리에서 잠을 자도 끄떡없는 이유는 옷을 많이 껴입거나 담요를 많이 덮고 자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자신의 슬리핑백을 두터운 비닐 천으로 뒤집어씌우기 때문이다. 비닐 안엔 외부공기가 쉽게 들어올 수 없어 충분히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체온으로 따뜻한 공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둘째 미국의 경우 노숙자들은 지하철이나 큰 빌딩의 환기구에서 뜨거운 바람이 나온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특히 미국의 수도 DC의 경우 대형 공공건물 주변에는 커다란 환기구가 밖으로 나와 있다. 아무리 추워도 담요 두 장이면 끝이다. 한 장은 바닥에 그리고 다른 한 장은 덮는 이불로 사용하면 된다. 나도 체험을 해 보았는데 뜨끈뜨끈한 사우나탕에 누워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방법이기도하다. 차가운 몸은 따뜻한 스팀으로 달구어졌지만 이불은 더운 스팀으로 촉촉이 졌어있기 때문에 일단 담요 밖으로 나오면 바로 감기에 걸릴 수 있다. 이때는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가는 것이 좋다. 셋째 지하도에 몸을 피하는 것이 좋다. 특히 지하도에서는 화장실을 적절히 이용하면 좋다. 대부분 미국의 지하도에 있는 화장실 내부는 매우 따뜻하다. 뉴욕 맨해튼 지역의 지하철이나 버스터미널에 가면 많은 노숙자들로 북적거린다. 소변 혹은 대변을 위해 화장실을 자주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고단수 노숙자들은 전기히터 시스템을 갖춘 좌변기가 있는 빌딩의 화장실을 몰래 찜해놓고 아예 앉아 한숨을 자고 나온다. 얼어붙은 몸을 쉽게 녹일 수 있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다. 불행하게도 미국에는 좌변기에 히터 시스템이 있는 화장실이 거의 없다. 넷째 얼어붙은 손을 화장실의 따스한 물에 오랜 동안 담그는 방법이다. 3분만 따스한 물을 틀어 손을 담그면 온 몸에 열기가 돋는다. 뒤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노숙자들은 재빨리 자리를 옮겨 다른 수도꼭지를 찾는 지혜도 갖고 있다. 다섯째는 넷째와 비슷한 수법으로 손을 말리는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을 이용하는 것이다. 화장실의 경우 드라이기가 가슴이나 어깨 높이에 달려 있기 때문에 간혹 노숙자들이 손을 데우는 것뿐 아니라 팔뚝 어깨 심지어 머리와 등까지 몸을 녹이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언젠가 늦은 저녁 뉴욕 맨해튼 펜 스테이션에서 노숙자체험을 할 때였다. 여자 화장실에서 흑인 여성 노숙자와 백인 여성 행인과 싸움이 일어났다. 경찰들이 동원되고 사람들이 화장실 앞에 장사진을 이뤘다. 싸움의 원인은 흑인 여성노숙자가 손을 말리는 드라이기를 너무 오랜 동안 혼자 쓰고 있자 백인 여성이 짜증을 내며 던진 말이 싸움이 되었다. 백인 여성은 흑인 여성노숙자가 온종일 밖에서 떨다 얼어붙은 몸을 잠시 녹이고 있다는 것을 알리가 없었다. 간혹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화장실에 노숙자들이 많이 있느냐고 서로 물어본다. 대부분 볼일을 보려는 것보다는 얼어붙은 몸을 녹이려는 생존본능의 몸부림일 뿐이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노숙자들을 조금만 더 이해해주는 너그러움도 추운 겨울 불우한 이웃을 향한 멋진 선물이라고 본다. 물론 저들에게 따스한 외투 장갑 양말을 직접 선물해 주는 사랑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지만….

2010-03-09

[최상진 목사의 30일간 노숙자 체험기-6] 노숙자에게서 배우는 겨울나기 비결

워싱턴 DC를 포함해 동부지역에 지난달 ‘재난’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극심한 폭설이 내렸다. 영하권의 기후에 노숙자들을 포함해 일부 사람들이 동사했다. 추운겨울, 특히 눈이 내리는 겨울은 노숙자들에겐 눈꽃축제의 밤이 아니라, 공포의 대상일 뿐이다. 과연, 노숙자들은 어떻게 겨울을 나며,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가? 노숙자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자연스레 생존본능을 통해 추위를 이겨내는 다양한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우선, 우리가 아는 대로 노숙자전용 쉘터에서 몸을 녹인다. 그러나 쉘터에서는 규칙이 엄격하고 자신의 소지품들을 분실할 가능성이 많다. 일부 노숙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나 빌딩 지하에서 지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선 노숙자 고수들의 겨울나기 비법을 알아보자. 첫째, 추운 겨울 거리에서 잠을 자도 끄떡없는 이유는 옷을 많이 껴입거나 담요를 많이 덮고 자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자신의 슬리핑백을 두터운 비닐 천으로 뒤집어씌우기 때문이다. 비닐 안엔 외부공기가 쉽게 들어올 수 없어 충분히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체온으로 따뜻한 공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둘째, 미국의 경우 노숙자들은 지하철이나 큰 빌딩의 환기구에서 뜨거운 바람이 나온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특히 미국의 수도 DC의 경우 대형 공공건물 주변에는 커다란 환기구가 밖으로 나와 있다. 아무리 추워도 담요 두 장이면 끝이다. 한 장은 바닥에 그리고 다른 한 장은 덮는 이불로 사용하면 된다. 나도 체험을 해 보았는데 뜨끈뜨끈한 사우나탕에 누워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방법이기도하다. 차가운 몸은 따뜻한 스팀으로 달구어졌지만, 이불은 더운 스팀으로 촉촉이 졌어있기 때문에 일단 담요 밖으로 나오면 바로 감기에 걸릴 수 있다. 이때는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가는 것이 좋다. 셋째, 지하도에 몸을 피하는 것이 좋다. 특히 지하도에서는 화장실을 적절히 이용하면 좋다. 대부분 미국의 지하도에 있는 화장실 내부는 매우 따뜻하다. 뉴욕 맨해튼 지역의 지하철이나 버스터미널에 가면 많은 노숙자들로 북적거린다. 소변 혹은 대변을 위해 화장실을 자주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고단수 노숙자들은 전기히터 시스템을 갖춘 좌변기가 있는 빌딩의 화장실을 몰래 찜해놓고, 아예 앉아 한숨을 자고 나온다. 얼어붙은 몸을 쉽게 녹일 수 있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다. 불행하게도 미국에는 좌변기에 히터 시스템이 있는 화장실이 거의 없다. 넷째, 얼어붙은 손을 화장실의 따스한 물에 오랜 동안 담그는 방법이다. 3분만 따스한 물을 틀어 손을 담그면 온 몸에 열기가 돋는다. 뒤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노숙자들은 재빨리 자리를 옮겨 다른 수도꼭지를 찾는 지혜도 갖고 있다. 다섯째는 넷째와 비슷한 수법으로, 손을 말리는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을 이용하는 것이다. 화장실의 경우 드라이기가 가슴이나 어깨 높이에 달려 있기 때문에 간혹 노숙자들이 손을 데우는 것뿐 아니라, 팔뚝, 어깨, 심지어 머리와 등까지 몸을 녹이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언젠가 늦은 저녁 뉴욕 맨해튼 펜 스테이션에서 노숙자체험을 할 때였다. 여자화장실에서 흑인 여성 노숙자와 백인 여성 행인과 싸움이 일어났다. 경찰들이 동원되고 사람들이 화장실 앞에 장사진을 이뤘다. 싸움의 원인은 흑인 여성노숙자가 손을 말리는 드라이기를 너무 오랜 동안 혼자 쓰고 있자 백인 여성이 짜증을 내며 던진 말이 싸움이 되었다. 백인 여성은 흑인 여성노숙자가 온종일 밖에서 떨다 얼어붙은 몸을 잠시 녹이고 있다는 것을 알리가 없었다. 간혹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친구들과 이야기 중에 왜 이렇게 화장실에 노숙자들이 많이 있느냐고 서로 물어본다. 대부분 볼일을 보려는 것보다는 얼어붙은 몸을 녹이려는 생존본능의 몸부림일 뿐이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노숙자들을 조금만 더 이해해주는 너그러움도 추운 겨울 불우한 이웃을 향한 멋진 선물이라고 본다. 물론 저들에게 따스한 외투, 장갑, 양말을 직접 선물해 주는 사랑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지만….

2010-03-02

[최상진 목사의 30일간 노숙자 체험기-5] 어디로 가시나이까?

필라델피아 릿지 애비뉴 노숙자 쉘터 정문 앞에 서 있는 최상진 목사. 최 목사는 결국 이날 이 센터에서 잠을 청하지 못하고 인근 농구장으로 이송돼야 했다. 필라델피아 흑인 슬럼가에 있는 '릿지 에비뉴 노숙자 쉘터'에 들어서자 모슬렘복장을 한 흑인여성이 카운터에 나를 오라하더니 노숙자 신청서를 작성하라고 했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노숙자로 등록되는 순간이었다. 나중에 미국생활을 하는 데 지장을 받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도 스쳐갔다. 그러나 노숙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다고 생각하니 담대해졌다. 잠시 후 그녀는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인종 란에 Black이라고 적었다. 아시안 노숙자를 본 적이 없었나보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흑인노숙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내심 움터나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밤 11시20분이 되어 한 직원이 이곳 쉘터에 침대가 없다며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고 집합을 시켰다. 30여 명의 노숙자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직원이 갑자기 나를 막고는 내 앞 사람까지 밴에 태우며 자리가 없어 안에 들어가 다시 기다리라고 했다. 매우 당황스러웠다. 밤 11시40분이 되어 직원이 나머지 노숙자들을 낡은 밴에 빈틈이 없이 꽉 끼어 태웠다. 만원 전철에 갇혀있듯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서 몸을 부대낀 것은 처음이었다. 술냄새 악취냄새 심지어 입냄새까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었다. 게다가 흑인 운전자는 노숙자들을 짐짝처럼 다루며 커브 길에서도 너무 거칠게 차를 몰아 어깨는 물론 심지어 머리까지 서로 부딪쳤다. 마치 수용소로 끌려가는 전쟁포로 같은 기분이랄까. 매일 이러한 전쟁을 치러야 하는 노숙자들을 직접 몸으로 체험을 하고 나니 노숙자들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정이 넘어 도착한 곳은 필라델피아 시청에서 운영하는 레크리에이션 센터 실내 농구장이었다. 베드와 담요를 배정을 받고 나니 밤12시10분이 되었다. 저녁을 못 먹은 터라 배가 무척 고파왔다. 때마침 한 직원이 놀라울 만큼 얇은 샌드위치를 하나씩 주었다. 작은 식빵에 슬라이스 햄 두 쪽뿐 야채나 양념도 없었다. 맛은 짜고 음료수도 없어 목에 넘어가질 않았다. 그간 11년 동안 10만 명분 이상의 음식을 노숙자들에게 먹였는데…. 그것도 내용이 풍부한 두꺼운 샌드위치에 불고기까지. 나를 위해 겨우 얇은 샌드위치 하나뿐이라니 야속하고 섭섭해 눈물이 핑 돌았다. 체육관에는 샤워장도 없고 화장실만 있었다. 세면이나 양치질 하는 노숙자들도 아무도 없었다. 도저히 혼자서 세면을 하거나 양치질을 할 용기가 없어 아침에 일어나 하기로 하고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세수를 하거나 양치질을 하는 노숙자가 한 명도 없었다. 쉘터에서 잠을 자는 것도 고난 그 자체였다. 체육관에서 대형 히터가 돌아가는 소리는 마치 비행기가 날아가는 소음과 같았습니다. 게다가 옆에서 같이 자고 있는 노숙자 형제가 코를 고는 소리까지. 결국 비행기 두 대가 옆에서 잠을 방해하는 바람에 20분마다 잠을 깨야 하는 고통을 당했다. 여러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새벽 네 시쯤에 눈을 떠보니 어느 검은 물체가 내 머리 곁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형제는 "I'm sorry!"라며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사실 베개를 대신해 머리 밑에 둔 배낭에는 나의 귀중한 정보들이 담겨있는 노트북컴퓨터가 있었고 주머니에는 비상용 크레디트 카드를 넣어 둔 지갑이 들어 있었다. 감사하게도 도둑을 맞지 않도록 그 시간에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내 옆에서 온갖 소음을 내고 있던 두 대의 비행기 덕분이었다. 어디를 가야할지 모른다는 것 다시 말하면 노숙자의 인생이란 아무런 희망이 없는 그저 두려움과 공포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길을 선택하셨다. 나는 노숙자 체험을 통해 커다란 한 가지를 배웠다. 우리가 영원히 거할 처소가 하늘에 있기에 더 많은 것을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2010-03-02

[최상진 목사의 30일간 노숙자 체험기-5] 어디로 가시나이까? (2)

필라델피아 흑인 슬럼가에 있는 ‘릿지 에비뉴 노숙자 쉘터‘에 들어서자, 모슬렘복장을 한 흑인여성이 카운터에 나를 오라하더니 노숙자 신청서를 작성하라고 했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노숙자로 등록되는 순간이었다. 나중에 미국생활을 하는 데 지장을 받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도 스쳐갔다. 그러나 노숙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다고 생각하니 담대해졌다. 잠시 후 그녀는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인종 란에 Black이라고 적었다. 아시안 노숙자를 본 적이 없었나보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흑인노숙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내심 움터나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밤 11시20분이 되어 한 직원이 이곳 쉘터에 침대가 없다며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고 집합을 시켰다. 30여 명의 노숙자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직원이 갑자기 나를 막고는 내 앞 사람까지 밴에 태우며, 자리가 없어 안에 들어가 다시 기다리라고 했다. 매우 당황스러웠다. 밤 11시40분이 되어 직원이 나머지 노숙자들을 낡은 밴에 빈틈이 없이 꽉 끼어 태웠다. 만원 전철에 갇혀있듯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서 몸을 부대낀 것은 처음이었다. 술냄새, 악취냄새, 심지어 입냄새까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는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었다. 게다가 흑인 운전자는 노숙자들을 짐짝처럼 다루며 커브 길에서도 너무 거칠게 차를 몰아 어깨는 물론 심지어 머리까지 서로 부딪쳤다. 마치 수용소로 끌려가는 전쟁포로 같은 기분이랄까. 매일 이러한 전쟁을 치러야 하는 노숙자들을 직접 몸으로 체험을 하고 나니, 노숙자들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정이 넘어 도착한 곳은 필라델피아 시청에서 운영하는 레크리에이션 센터 실내 농구장이었다. 베드와 담요를 배정을 받고 나니 밤12시10분이 되었다. 저녁을 못 먹은 터라 배가 무척 고파왔다. 때마침 한 직원이 놀라울 만큼 얇은 샌드위치를 하나씩 주었다. 작은 식빵에 슬라이스 햄 두 쪽뿐, 야채나 양념도 없었다. 맛은 짜고 음료수도 없어 목에 넘어가질 않았다. 그간 11년 동안 10만 명분 이상의 음식을 노숙자들에게 먹였는데…. 그것도 내용이 풍부한 두꺼운 샌드위치에 불고기까지. 나를 위해 겨우 얇은 샌드위치 하나뿐이라니 야속하고 섭섭해 눈물이 핑 돌았다. 체육관에는 샤워장도 없고 화장실만 있었다. 세면이나 양치질 하는 노숙자들도 아무도 없었다. 도저히 혼자서 세면을 하거나 양치질을 할 용기가 없어 아침에 일어나 하기로 하고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세수를 하거나 양치질을 하는 노숙자가 한 명도 없었다. 쉘터에서 잠을 자는 것도 고난 그 자체였다. 체육관에서 대형 히터가 돌아가는 소리는 마치 비행기가 날아가는 소음과 같았습니다. 게다가 옆에서 같이 자고 있는 노숙자 형제가 코를 고는 소리까지. 결국 비행기 두 대가 옆에서 잠을 방해하는 바람에 20분마다 잠을 깨야 하는 고통을 당했다. 여러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새벽 네 시쯤에 눈을 떠보니, 어느 검은 물체가 내 머리 곁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형제는 “I’m sorry!”라며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사실 베개를 대신해 머리 밑에 둔 배낭에는 나의 귀중한 정보들이 담겨있는 노트북컴퓨터가 있었고, 주머니에는 비상용 크레디트 카드를 넣어 둔 지갑이 들어 있었다. 감사하게도 도둑을 맞지 않도록 그 시간에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내 옆에서 온갖 소음을 내고 있던 두 대의 비행기 덕분이었다. 어디를 가야할지 모른다는 것, 다시 말하면 노숙자의 인생이란 아무런 희망이 없는 그저 두려움과 공포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길을 선택하셨다. 나는 노숙자체험을 통해 커다란 한 가지를 배웠다. 우리가 영원히 거할 처소가 하늘에 있기에 더 많은 것을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2010-02-23

[평화나눔공동체 최상진 목사의 30일간 노숙자 체험기-4] 어디로 가시나이까?

누가복음 9장을 보면 어느 사람이 길을 가시던 예수님께 "주여 어디로 가시든 나는 따르겠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하셨다. 다시 말하면 '나는 다 내려놓은 빈털터리 노숙자니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나 종말론적인 깊은 의미로 해석을 하면 이 세상에 너무 미련을 갖지 말고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를 건설하는데 소망을 가지라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나눔과 섬기의 도를 따라 위로는 하나님을 아래로는 이웃을 섬기는 제자도의 삶을 실천하라는 말이다. 세상을 살면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만큼 두려운 것도 없을 것이다. 한 밤중에 마약과 살인이 난무하는 흑인 슬럼가에서 길을 잃어 본적이 있는가. 해가 저물어 버린 깊은 산중 숲속에서 나침판도 없이 길을 잃어 본적이 있는가. 뉴욕 맨해튼 같은 대도시를 운전하다 내비게이션이 작동을 안 해 어디로 가야할지 당황해 본 경험이 있는가. 갑자기 실직돼 내일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한 적이 있었는가. 지난 1월22일 30일간의 노숙자체험을 위해 늦은 저녁 메릴랜드에서 필라델피아로 떠날 때였다. 운전 중에 그리고 휴게소에서 미리 준비해 놓은 노숙자 쉘터들 연락처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 어디를 가든 영하의 날씨에는 24시간 오픈하는 응급쉘터가 있기 때문에 큰 걱정을 안했었다. 그러나 저녁9시가 넘자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노숙자 쉘터에 잠자리를 요청하는 데로 거절을 당했다. 영하의 날씨라 노숙자들이 몰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여섯 군데에 전화를 했는데 모두 거절을 당했다. 일곱 번째 전화를 한 쉘터는 오후 4시까지 도착해 신청서를 작성하고 신분이 증명된 노숙자들에 한해서만 받는다며 거절했다. 밤 10시가 돼 필라델피아의 다운타운이 눈에 보였다. 캄캄한 다운타운을 지날 때 갑자기 두려움이 더 엄습했다. 어디로 가야할 지 그리고 어디서 잠을 자야할 지 걱정이 앞섰다. 여덟 번째 쉘터에 전화를 했더니 자리가 없다며 다른 쉘터 전화번호 하나를 달랑 주고는 쌀쌀맞게 전화를 끊었다. 다운타운 흑인 슬럼가에 완전히 들어섰을 땐 정말로 오금이저릴 만큼 무섭고 떨렸다. 우리 평화나눔공동체 노숙자들이 그렇게 노숙자체험을 하지 말라고 나를 말렸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두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어디로 가야할지 앞이 캄캄했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갖고 아홉 번째 쉘터에 전화를 했더니 한 백인 여성이 자리가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는 11년 동안 워싱턴 DC에서 노숙자를 돕고 있는 목사라며 사정을 했다. 결국 그곳에서도 거절을 당했다. 실망이 극에 달하자 두려움도 극에 달했다. 마지막으로 열 번째 쉘터에 전화를 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던 워싱턴 DC의 슬럼가와 별 차이가 없는 데 오늘은 왜 이렇게 무서운 걸까. 정 안되면 차안에서 자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차 안도 불안하다는 생각에 온몸이 써늘했다. 다시 용기를 내 애절하게 도와달라고 사정을 하자 웨이팅 리스트에 넣어 줄 수는 있지만 자리가 없으면 의자에 앉아 밤을 지새워야 한다고 했다. 이 밤에 앉아 있을 공간만 있다는 것 하나로도 너무 기뻤다. 펜실베이니아 다운타운 흑인 슬럼가에 위치한 '릿지 에비뉴 쉘터'에 도착하니 밤10시30분이 넘었다. 〈계속>

2010-02-23

[최상진 목사의 30일간 노숙자 체험기-4] 어디로 가시나이까? (1)

누가복음 9장을 보면 어느 사람이 길을 가시던 예수님께 “주여, 어디로 가시든 나는 따르겠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하셨다. 다시 말하면 ‘나는 다 내려놓은 빈털터리 노숙자니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나 종말론적인 깊은 의미로 해석을 하면 이 세상에 너무 미련을 갖지 말고,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를 건설하는데 소망을 가지라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나눔과 섬기의 도를 따라 위로는 하나님을 아래로는 이웃을 섬기는 제자도의 삶을 실천하라는 말이다. 세상을 살면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만큼 두려운 것도 없을 것이다. 한 밤중에 마약과 살인이 난무하는 흑인 슬럼가에서 길을 잃어 본적이 있는가. 해가 저물어 버린 깊은 산중 숲속에서 나침판도 없이 길을 잃어 본적이 있는가. 뉴욕 맨해튼 같은 대도시를 운전하다 내비게이션이 작동을 안 해, 어디로 가야할지 당황해 본 경험이 있는가. 갑자기 실직돼 내일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한 적이 있었는가. 어디로 가야할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앞이 캄캄한 경험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지난 1월22일 30일간의 노숙자체험을 위해 늦은 저녁 메릴랜드에서 필라델피아로 떠날 때였다. 운전 중에 그리고 휴게소에서 미리 준비해 놓은 노숙자 쉘터들 연락처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 어디를 가든 영하의 날씨에는 24시간 오픈하는 응급쉘터가 있기 때문에 큰 걱정을 안했었다. 그러나 저녁9시가 넘자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노숙자 쉘터에 잠자리를 요청하는 데로 거절을 당했다. 영하의 날씨라 노숙자들이 몰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여섯 군데에 전화를 했는데 모두 거절을 당했다. 일곱 번째 전화를 한 쉘터는 오후 4시까지 도착해 신청서를 작성하고 신분이 증명된 노숙자들에 한해서만 받는다며 거절했다. 밤 10시가 돼 필라델피아의 다운타운이 눈에 보였다. 캄캄한 다운타운을 지날 때 갑자기 두려움이 더 엄습했다. 어디로 가야할 지, 그리고 어디서 잠을 자야할 지 걱정이 앞섰다. 여덟 번째 쉘터에 전화를 했더니 자리가 없다며 다른 쉘터 전화번호 하나를 달랑 주고는 쌀쌀맞게 전화를 끊었다. 다운타운 흑인 슬럼가에 완전히 들어섰을 땐, 정말로 오금이저릴 만큼 무섭고 떨렸다. 우리 평화나눔공동체 노숙자들이 그렇게 노숙자체험을 하지 말라고 나를 말렸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두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어디로 가야할지 앞이 캄캄했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갖고 아홉 번째 쉘터에 전화를 했더니 한 백인 여성이 자리가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는 11년 동안 워싱턴 DC에서 노숙자를 돕고 있는 목사라며 사정을 했다. 결국 그곳에서도 거절을 당했다. 실망이 극에 달하자 두려움도 극에 달했다. 마지막으로 열 번째 쉘터에 전화를 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던 워싱턴 DC의 슬럼가와 별 차이가 없는 데 오늘은 왜 이렇게 무서운 걸까. 정 안되면 차안에서 자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차 안도 불안하다는 생각에 온몸이 써늘했다. 다시 용기를 내 애절하게 도와달라고 사정을 하자 웨이팅 리스트에 넣어 줄 수는 있지만 자리가 없으면 의자에 앉아 밤을 지새워야 한다고 했다. 이 밤에 앉아 있을 공간만 있다는 것 하나로도 너무 기뻤다. 펜실베이니아 다운타운 흑인 슬럼가에 위치한 ‘릿지 에비뉴 쉘터’에 도착하니 밤10시30분이 넘었다. <계속>

2010-02-16

[평화나눔공동체 최상진 목사의 30일간 노숙자 체험기-3] 공동체 설립까지

나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전문적으로 노숙자선교와 인종화합선교 도시선교(영어로는 urban mission 혹은 inner-city mission 이라고 함)를 11년째 전개하고 있는 평화나눔공동체의 설립자다. 현재 평화나눔공동체는 워싱턴 DC 볼티모어 메릴랜드 리치몬드 버지니아 애틀랜타 조지아에 지부를 두고 있으며 오는 3월에 뉴욕 맨하탄에 뉴저지와 뉴욕을 중심으로 도시선교를 전개하게 될 지부를 창립하게 된다. 내가 도시선교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2년 LA흑인폭동이었다. 이 여파로 한인들이 많은 가게를 운영하는 미 전역의 대도시 다운타운 내에서 다양한 인종갈등이 계속돼 매년 미국에서만 70~100명의 한인들이 흑인들에 의해 목숨을 잃고 있었다. 1995년 워싱턴 DC 지역에 있는 조지 메이슨 분쟁해결학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던 나는 워싱턴 지역에서 매년 7~8명의 한인들이 흑인들에 의해 살해되는 것을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접하게 됐다. 그리고 박사과정 수업에서 이 문제가 종종 거론되자 한흑화합을 위해 누군가가 혹은 교회들이나 사회단체들이 직접 나서야만 된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당시 워싱턴 지역 이민 한인교회역사가 50년이 됐으나 누구도 이러한 인종화합과 갈등해결을 위한 평화선교를 시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수소문을 통해 워싱턴 지역의 대표적인 한인목회자들과 사회 리더들을 만났다. 이때 처음 만난 목사가 워싱턴 지역에서 영적으로 존경을 받고 있고 가장 많은 한인들이 출석하고 있는 와싱톤중앙장로교회 이원상 목사와 미국연합감리교회로 이 지역 이민교회 중 가장 오래된 교회이며 지역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 중 하나인 와싱톤한인교회 조영진 목사였다. 이 두 분을 통해 두 가지의 결론을 얻었다. 하나는 당시 매년 350~400명이 워싱턴 DC 흑인 빈민가에서 갱 마약 살인 등에 지역주민들이 노출돼 있는 위험한 상황이어서 누군가 그곳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인종의 갈등문제를 그리고 인종화합차원의 평화선교를 전문으로 공부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두 분의 지도자들은 그러나 이 시점에서 누군가는 꼭 들어가 이 사역을 전문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나는 이 두 분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의 의견을 모으고 당시 버지니아 페어팩스에 있는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성경을 보며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주님의 강렬한 부르심을 깨닫게 됐다. 주님은 나를 향해 "네가 저 DC 할렘지역으로 들어가 막힌 담을 헐고 서로 평화하게 하라. 너는 그 열정이 있고 그러한 전공을 한 사람으로 예비 된 자다"라는 확신을 받게 됐다. 1998년 가을에 흑인들이 밀집돼 있는 DC 북서 4번가와 R스트리드 지역에 노숙자들과 극빈자들을 위한 아주 작은 카페하우스인 '평화의집'을 오픈했다. 나는 이러한 지혜도 하나님이 주셨다고 확신한다. 1998년 10월 31일 평화의집을 오픈하고 300여명의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처음 대접했다. 이 후로 매일 100~200명의 노숙자들이 들러 커피와 음료를 마시며 쉬다가 가곤했다. 혼자 이 일을 감당할 수 없게 된 나는 박사과정을 접고 풀타임 자원봉사자로 나서면서 전문적인 도시선교사역을 감당하는 평화나눔공동체가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됐다. 사실 평화나눔공동체의 전신은 이미 1996년 초에 조직한 '평화를 위한 100인 기도회'로 시작됐다. 그리고 1997년에 와싱톤한인교회에서 첫 평화나눔공동체 이사회를 발족했다.

2010-02-16

[최상진 목사의 30일간 노숙자 체험기-3] 도시선교 관심, 공동체 설립까지…최상진 목사 11년 사역 뒤안길

현재 평화나눔공동체는 워싱턴 DC, 볼티모어 메릴랜드, 리치몬드 버지니아, 애틀랜타 조지아에 지부를 두고 있으며 오는 3월에 뉴욕 맨하탄에 뉴저지와 뉴욕을 중심으로 도시선교를 전개하게 될 지부를 창립하게 된다. ◇한흑갈등이 도시선교 관심 배경 내가 도시선교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2년 LA흑인폭동이었다. 이 여파로 한인들이 많은 가게를 운영하는 미 전역의 대도시 다운타운 내에서 다양한 인종갈등이 계속돼, 매년 미국에서만 70-100명의 한인들이 흑인들에 의해 목숨을 잃고 있었다. 1995년 워싱턴 DC 지역에 있는 조지 메이슨 분쟁해결학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던 나는 워싱턴 지역에서 매년 7-8명의 한인들이 흑인들에 의해 살해되는 것을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접하게 됐다. 그리고 박사과정 수업에서 이 문제가 종종 거론되자 한흑화합을 위해 누군가가 혹은 교회들이나 사회단체들이 직접 나서야만 된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당시 워싱턴 지역 이민 한인교회역사가 50년이 됐으나 누구도 이러한 인종화합과 갈등해결을 위한 평화선교를 시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수소문을 통해 워싱턴 지역의 대표적인 한인목회자들과 사회 리더들을 만났다. ◇워싱턴 교계 리더와의 만남 이때 처음 만난 목사가 워싱턴 지역에서 영적으로 존경을 받고 있고 가장 많은 한인들이 출석하고 있는 와싱톤중앙장로교회 이원상 목사와 미국연합감리교회로 이 지역 이민교회 중 가장 오래된 교회이며 지역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 중 하나인 와싱톤한인교회 조영진 목사였다. 이 두 분을 통해 두 가지의 결론을 얻었다. 하나는 당시 매년 350-400명이 워싱턴 DC 흑인 빈민가에서 갱, 마약, 살인 등에 지역주민들이 노출돼 있는 위험한 상황이어서 누군가 그곳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인종의 갈등문제를 그리고 인종화합차원의 평화선교를 전문으로 공부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두 분의 지도자들은 그러나 이 시점에서 누군가는 꼭 들어가 이 사역을 전문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나는 이 두 분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의 의견을 모으고 당시 버지니아 페어팩스에 있는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성경을 보며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주님의 강렬한 부르심을 깨닫게 됐다. 주님은 나를 향해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아들아, 네가 저 DC 할렘지역으로 들어가 막힌 담을 헐고 서로 평화하게 하라. 너는 그 열정이 있고 그러한 전공을 한 사람으로 예비 된 자다”라는 확신을 받게 됐다. ◇평화의집 오픈... 사역 시작 1998년 가을에 흑인들이 밀집돼 있는 DC 북서 4번가와 R스트리드 지역에 노숙자들과 극빈자들을 위한 아주 작은 카페하우스인 ‘평화의집’을 오픈했다. 나는 이러한 지혜도 하나님이 주셨다고 확신한다. 1998년 10월 31일 이원상 목사와 조영진 목사를 비롯 여러 지도자들의 도움으로 평화의집을 오픈하고 300여명의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처음 대접했다. 이 후로 매일 100-200명의 노숙자들이 평화의집에 들러 커피와 음료를 마시며 쉬다가 가곤했다. 혼자 이 일을 감당할 수 없게 된 나는 박사과정을 접고 풀타임 자원봉사자로 나서게 되면서 전문적인 도시선교사역을 감당하는 평화나눔공동체가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됐다. 사실 평화나눔공동체의 전신은, 이미 1996년 초에 조직한 ‘평화를 위한 100인 기도회’로 시작됐다. 그리고 1997년에 와싱톤한인교회에서 첫 평화나눔공동체 이사회를 발족했다.

2010-02-09

[최상진 목사의 30일간 노숙자 체험기 -2] 마틴 루터 킹 도서관의 노숙자

워싱톤DC 다운타운의 중심가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님 기념 도서관이 있다. 원래는 디씨 정부가 운영하는 중앙도서관으로 1903년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참여한 가운데 마운트 버논 지역에 오픈 되었다가 1972년에 확장개관을 할 때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기념하는 도서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다수가 흑인인 디씨 다운타운에 있어서 그런지 도서관 건물 색이 어둡고 침침해 사람들이 이용을 꺼려할 것 같은데 늘 사람들이 북적인다. 다운타운 한복판에 위치한터라 지역주민들보다는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많다. 그런데 이 도서관을 가장 많이 찾는 비밀계층(?)이 있다. 이들은 책을 빌릴 수 있는 도서관 카드도 없는데 가장 많이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디씨의 노숙자들이다. 도서관에서 노숙자들과 일반 관람객들을 구분하는 일은 매우 쉽고 재미있다. 일반 이용자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자료를 컴퓨터로 검색하고 책장에서 책을 고르느라 매우 분주하다. 그러나 노숙자들은 도서관의 모든 책을 다 읽은 사람처럼 여유 있게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묵상에 잠긴다. 일반 관람객들은 책장을 넘기며 열공을 하는 반면에 노숙자들은 고개를 숙인 채 책상에서 잠을 잔다. 마치 다독 혹은 통독의 도사들처럼…. 이유야 어찌하든 마틴 루터 킹 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장기 관람객들은 노숙자들임에 틀림이 없다. 책을 잘 안 읽고 도서관 가는 것을 꺼리는 현대시대에 노숙자들이 도서관 관람객 수를 높여주는 고정 고객이니 만큼 도서관을 운영하는 디씨 정부의 체면에는 커다란 하자가 없을 듯하다. 몇몇 사람들에게 물어 본 결과 일단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의회도서관이나 국립도서관들 그리고 대학도서관들은 거의 노숙자들에게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노숙자들 대부분이 이들 도서관에서 출입증을 발급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유는 뚜렷한 집 주소 전화번호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ID 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설령 노숙자들이 쉽게 출입할 수 있는 도서관이라 할지라도 많은 경우 노숙자들이 코를 골며 낮잠을 자거나 심한 악취를 풍기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쫓겨나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왜 마틴 루터 킹 도서관에는 여전히 노숙자들이 득실거리는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흑인 인권운동의 선구자요 인종화합의 실천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을 기념하는 도서관이기 때문이다. 일반 관람객들은 노숙자들 때문에 다소 불편을 느낄 수 있겠지만 모든 노숙자들이 도서관에서 잠만 자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음악을 감상하기도하고 영화를 보기도하고 신문이나 소설책 등을 읽기도 한다. 오히려 이들이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요 언론의 자유요 인권운동의 값진 결실이요 마틴 루터 킹 도서관의 가장 멋진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늦은 저녁 도서관 문이 닫히면 다수 노숙자들이 도서관 빌딩 입구에 장사진을 이루며 잠을 잔다. 다른 공공건물에서는 대부분 경찰들이 노숙자들을 몰아내는데 이 도서관만은 예외다. 오늘은 '아리'라고 이름을 밝힌 노숙자형제와 도서관 입구에서 슬리핑백을 깔고 누워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제 역시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이 도서관이 좋아 이곳에서 살다시피 지낸다고 한다. 다시 한 번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위대함을 노숙자들을 통해 깨달았다.

2010-02-09

[최상진 목사의 30일간 노숙자 체험기-2] "DC 한복판에 홈리스 위한 도서관이 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위대했다"

워싱턴 DC 다운타운의 중심가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 기념 도서관이 있다. 원래는 DC 정부가 운영하는 중앙도서관으로 1903년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참여한 가운데 마운트 버논 지역에 오픈 됐다가 1972년에 확장개관을 할 때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기념하는 도서관으로 바뀌게 됐다. 다수가 흑인인 DC 다운타운에 있어서 그런지 도서관 건물 색이 어둡고 침침해 사람들이 이용을 꺼려할 것 같은데 늘 사람들이 북적인다. 다운타운 한복판에 위치한터라 지역주민들보다는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많다. 그런데 이 도서관을 가장 많이 찾는 비밀계층(?)이 있다. 이들은 책을 빌릴 수 있는 도서관 카드도 없는데, 가장 많이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DC의 노숙자들이다. 도서관에서 노숙자들과 일반 관람객들을 구분하는 일은 매우 쉽고 재미있다. 일반 이용자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자료를 컴퓨터로 검색하고 책장에서 책을 고르느라 매우 분주하다. 그러나 노숙자들은 도서관의 모든 책을 다 읽은 사람처럼 여유 있게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묵상에 잠긴다. 일반 관람객들은 책장을 넘기며 ‘열공’을 하는 반면, 노숙자들은 고개를 숙인 채 책상에서 잠을 잔다. 마치 다독 혹은 통독의 도사들처럼… 이유야 어떻든 마틴 루터 킹 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장기 관람객들은 노숙자들임에 틀림이 없다. 책을 잘 안 읽고 도서관 가는 것을 꺼리는 현대시대에 노숙자들이 도서관 관람객 수를 높여주는 고정 고객이니 만큼 도서관을 운영하는 DC 정부의 체면에는 커다란 하자가 없을 듯하다. 몇몇 사람들에게 물어 본 결과 일단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의회도서관이나 국립도서관들 그리고 대학도서관들은 거의 노숙자들에게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노숙자들 대부분이 이들 도서관에서 출입증을 발급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유는 뚜렷한 집 주소, 전화번호,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ID 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설령, 노숙자들이 쉽게 출입할 수 있는 도서관이라 할지라도 많은 경우 노숙자들이 코를 골며 낮잠을 자거나 심한 악취를 풍기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쫓겨나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왜 마틴 루터 킹 도서관에는 여전히 노숙자들이 득실거리는 걸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흑인 인권운동의 선구자요, 인종화합의 실천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을 기념하는 도서관이기 때문이다. 일반 관람객들은 노숙자들 때문에 다소 불편을 느낄 수 있겠지만 모든 노숙자들이 도서관에서 잠만 자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음악을 감상하기도하고, 영화를 보기도하고, 신문이나 소설책 등을 읽기도 한다. 오히려 이들이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요, 언론의 자유요, 인권운동의 값진 결실이요, 마틴 루터 킹 도서관의 가장 멋진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늦은 저녁 도서관 문이 닫히면 다수 노숙자들이 도서관 빌딩 입구에 장사진을 이루며 잠을 잔다. 다른 공공건물에서는 대부분 경찰들이 노숙자들을 몰아내는데 이 도서관만은 예외다. 오늘은 ‘아리’라고 이름을 밝힌 노숙자형제와 도서관 입구에서 슬리핑백을 깔고 누워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형제 역시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이 도서관이 좋아 이곳에서 살다시피 지낸다고 한다. 다시 한 번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위대함을 노숙자들을 통해 깨달았다. (노숙자들을 11년째 돕고 있는 최상진 목사는 지난 1월20일 워싱톤 디씨를 출발해 메릴랜드, 펜실베니아, 뉴저지, 뉴욕, 메사츄세츠, 커네티컷, 조지아를 거처 2월21일까지 노숙자 체험을 갖는다. 함께 한 두 시간만이라도 노숙자 체험을 같이 하거나 후원을 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571-259-4937(최상진 목사)로 연락하면 된다.)

2010-02-02

[최상진 목사의 30일간 노숙자 체험기-1] 50대 노숙자 다이애나

밤 9시30분. 백악관에서 두 블록 떨어진 멕퍼슨공원은 세찬바람은 없지만 코가 시릴 정도의 영하의 날씨다. 맥퍼슨공원의 한쪽 어두운 곳 여기저기 나무벤치엔 커다란 짐짝 같기도 하고 쓰레기 수거를 위해 싸놓은 검은 쓰레기 봉지 더미들 같기도 한 어둠 속의 형체들이 보인다. 한 걸음씩 다가서자 겹겹이 덮여진 담요들이 꿈틀거렸다. 온 몸이 오싹했다. 노숙자들이었다. 반대편 쪽 저편으로 한 노숙자가 담요를 두르고 벤치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 다가갔다. 얼굴까지 가린 채 담요 속에서 두 눈 속의 흰자위만 말똥거리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었다. 얼굴 부분이 어둡게 보이는 것을 보아 흑인임에 틀림없었다. 얼굴과 손은 붉게 부어 마치 에스키모 사람처럼 동상에 걸린 모습이었다. 자신을 다이애나라고 밝힌 50대 후반의 노숙자 여인은 워싱턴 DC 흑인가에서 태어나 사생아 딸을 낳았다. 35세인 딸은 지금 뉴욕의 술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왜 영하의 날씨인데 정부에서 응급으로 제공하는 쉘터에서 지내지 않느냐고 말하자 "사람들도 모두 싫다"며 "혼자 지내는 것이 현재로는 가장 편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성폭행을 여러 번 당하고 짐 보따리까지 도둑맞은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다"며 "오히려 사람들의 눈에 잘 띠는 가로등 밑에서 지내면 더 안전하다"고 했다. 다이애나의 꿈은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딸과 함께 사는 매우 소박한 것. 그러나 노숙자 다이애나에겐 이것도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무신론자가 된 그녀에겐 신앙도 희망도 없었다. 새해의 소망(new year resolution)을 하나만 말해보라고 하자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지난해 이루어진 일도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녀에겐 꿈이란 미래의 소망이 아니라 그저 불가능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이애나에게 혹시 소망하지 않았던 제목들이 자신도 모르게 이뤄진 것들을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내가 매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 추운 겨울에 누군가가 주고 간 담요들을 덮고 몸을 녹이고 있다는 것 누군가가 옆에 앉아 친구가 되어 주고 있다는 것. 그러자 다이애나는 정말 "내가 열거하지 않았던 것들이 채워지고 있다"며 해맑은 미소를 보였다. 나는 다이애나에게 우리가 바라고 갖고 싶어 하는 소망들보다 때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없이 직접 채워주시는 것들이 더 많이 있다며 올 한 해는 그것들을 하나씩 발견해 보자고 말했다. 그러자 다이애나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하나님이 은혜로 거저 채워주신 것들에 대해 감사해 하며 간절히 기도를 했다. 언젠가 다이애나를 다시 만날 땐 하나님이 그녀에게 채워주신 소망들을 나누며 공원에서 또 다른 밤을 지새울 수 있길 희망한다. -------------------------------------------------------------------------------- 최상진 목사는 11년째 노숙자 사역을 펼치고 있으며 지난 20일 워싱턴 DC를 출발해 메릴랜드,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뉴욕, 매사추세츠, 커네티컷, 조지아를 거처 다음달 21일까지 노숙자 체험을 갖는다.

2010-02-02

[최상진 목사의 30일간 노숙자 체험기-1] "겨울밤 얼어죽지 않으려고 사투 벌이는 다이애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밤 9시30분. 백악관에서 두 블록 떨어진 멕퍼슨공원은 세찬바람은 없지만 코가 시릴 정도의 영하의 날씨다. 맥퍼슨공원의 한쪽 어두운 곳, 여기저기 나무벤치엔 커다란 짐짝 같기도 하고, 쓰레기 수거를 위해 싸놓은 검은 쓰레기 봉지 더미들 같기도 어둠 속의 형체들이 보인다. 한 걸음씩 다가서자 겹겹이 덥혀진 담요들이 꿈틀거렸다. 온 몸이 오싹했다. 노숙자들이었다. 반대편 쪽 저편으로 한 노숙자가 담요를 두르고 벤치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 다가갔다. 얼굴까지 가린 채 담요 속에서 두 눈 속의 흰자위만 말똥거리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었다. 얼굴 부분이 어둡게 보이는 것을 보아 흑인임에 틀림없었다. 얼굴과 손은 붉게 부어 마치 에스키모 사람처럼 동상에 걸린 모습이었다. 자신을 다이애나라고 밝힌 50대 후반의 노숙자 여인은 워싱턴 DC 흑인가에서 태어나 사생아 딸을 낳았다. 35세인 딸은 지금 뉴욕의 술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왜 영하의 날씨인데 정부에서 응급으로 제공하는 쉘터에서 지내지 않느냐고 말하자, “사람들도 모두 싫다”며 “혼자 지내는 것이 현재로는 가장 편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성폭행을 여러 번 당하고 짐 보따리까지 도둑맞은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다”며, “오히려 사람들의 눈에 잘 띠는 가로등 밑에서 지내면 더 안전하다”고 했다. 다이애나의 꿈은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딸과 함께 사는 매우 소박한 것. 그러나 노숙자 다이애나에겐 이것도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무신론자가 된 그녀에겐 신앙도 희망도 없었다. 새해의 소망(new year resolution)을 하나만 말해보라고 하자,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지난해 이루어진 일도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녀에겐 꿈이란 미래의 소망이 아니라, 그저 불가능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이애나에게 혹시 소망하지 않았던 제목들이 자신도 모르게 이뤄진 것들을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내가 매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 추운 겨울에 누군가가 주고 간 담요들을 덮고 몸을 녹이고 있다는 것, 누군가가 옆에 앉아 친구가 되어 주고 있다는 것...... 그러자 다이애나는 정말 “내가 열거하지 않았던 것들이 채워지고 있다”며 해맑은 미소를 보였다. 나는 다이애나에게 우리가 바라고 갖고 싶어 하는 소망들보다 때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없이 직접 채워주시는 것들이 더 많이 있다며, 올 한 해는 그것들을 하나씩 발견해 보자고 말했다. 그러자 다이애나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하나님이 은혜로 거저 채워주신 것들에 대해 감사해 하며 간절히 기도를 했다. 언젠가 다이애나를 다시 만날 땐, 하나님이 그녀에게 채워주신 소망들을 나누며 공원에서 또 다른 밤을 지새울 수 있길 희망한다. --------------------------------------------------------------------------------- 노숙자들을 11년째 돕고 있는 최상진 목사는 지난 20일 워싱턴 DC를 출발해 메릴랜드,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뉴욕, 매사추세츠, 커네티컷, 조지아를 거처 다음달 21일까지 노숙자 체험을 갖는다. 함께 한 두 시간만이라도 노숙자 체험을 같이 하거나 후원을 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571-259-4937(최 목사 셀폰)로 연락하면 된다.

2010-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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