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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선택이 운명을 좌우한다

빌 게이츠가 대학교 3학년 때 하루는 아버지에게 상의드릴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진지하게 무엇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하니 빌 게이츠 아버지는 약간 긴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빌 게이츠는 아버지에게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이 자기 관심이고 열정이며 이를 위해 대학을 중퇴해야겠다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하버드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고 혹시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으니 그래도 대학교 졸업장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쉽게 승낙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빌 게이츠는 “Now or Never” 지금 아니면 미룰 수가 없고 지금 해야 한다고 말하고 하버드를 3학년을 중퇴하고 그는 우리가 잘 아는 마이크로소프트를 만듭니다.     우리가 미국에서는 영어로 소통하듯, 컴퓨터를 이용할 때 빌 게이츠가 이때 만든 소프트웨어를 전 세계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1세기 가장 성공적인 기업이 됩니다. 빌 게이츠는 대학을 중퇴하고 마이크로소프트를 만든 것은 지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개인에 있어서나 회사 혹은 국가에 있어서나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사람들이 바른 실행을 하지 못하는 세 가지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대범, 우리 인류가 선(善)이 좋은 줄은 알되 선을 행하지 못하며, 악이 그른 줄 알되 악을 끊지 못하여 평탄한 낙원을 버리고 험악한 고해로 들어가는 까닭은 그 무엇인가. 그것은 일에 대하여 시비를 몰라 실행이 없거나, 설사 시비는 안다 할지라도 불같이 일어나는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거나, 철석같이 굳은 습관에 끌리거나 하여 악은 버리고 선은 취하는 실행이 없는 까닭이니, 우리는 정의어는 기어이 취하고 불의어는 기어이 버리는 실행 공부를 하여, 싫어하는 고해는 피하고 바라는 낙원을 맞아오자는 것이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지혜롭고 바른 취사를 하지 못하는 첫째 이유는 ‘일에 당하여 시비를 몰라서…’ 즉 어떤 선택을 하는 데 있어서 옳음과 그름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내 백성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한 선지자 말씀입니다. (호세아 4:6)   원불교 정전 ‘고락의 법문’에서도 낙을 버리고 고로 들어가는 첫째 원인을 “고락의 근원을 알지 못함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옳은 일, 불리한 것은 그른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즉 자기 이해가 옳고 그른 것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한때 한국에서 한 코미디언이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라는 책을 써서 회자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좋지 않은 음식을 먹는다고 건강이 금방 나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음식이 분명 우리 몸에 영향을 줍니다. 우리의 옳은 혹은 그른 행동은 반드시 어떤 결과를 초래합니다.   한 경찰이 자기와 친분 있는 한 스님께 자기 경험담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분은 경찰로서 도굴꾼을 체포하는 담당이었습니다. “스님, 전 불교 신자는아니지만 부처님의 인과 진리 말씀은 확실히 믿습니다. 과거에 도굴꾼들이 값비싼 유물을 도굴해서 몰래 팔아 큰돈을 버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잡혀 번 돈을 다 빼앗기고 결국 패가망신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 왔습니다. 그들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식까지 망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심은 데로 거두는 것이 인과의 진리입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모든 사람에게 천만가지경전을 다 가르쳐 주고 천만가지 선(善)을 다 장려하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니라, 먼저 생멸 없는 진리와 인과보응의 진리를 믿고 깨닫게 하여 주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니라.”   필자의 스승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처님의 어떠한 법문을 믿지 않아도, 짓는 데로 받는다는 인과 진리 만은 꼭 믿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선택 운명 게이츠 아버지 인과 진리 대종사 말씀하시기

2024-07-18

[살며 생각하며] 참 진리가 주는 자유함

“참 오래 애썼다. 너에게 진 빚, 어떻게 다 갚아?” “우리가 모르고 산 것 아니냐, 다 알아. 이제부터는 너희도 오붓하게 우리도 오붓하게 살아보는 거야.” 이어 “한마디만 더할게요” 한 뒤 며느리를 향해 90도 머리 숙여 울먹이며 “감사합니다.” 그리고 현관을 향해 걸으며 하는 말 “앞으로 신세 질 일 전혀 없지는않겠지만, 그동안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고마웠다.”   요즘 아침나절에 재방송 중인 ‘그래 그런 거야’ 라는 드라마 44회에 나오는 대사 일부다. 노부부가 수십 년 함께 살았던 셋째 아들 집에서 분가키로 작정한 뒤 이사하는 날 아침, 시어머니 강부자가 그동안 모시고 고생하며 산, 막내며느리 김해숙에게 하는 감사의 표현이다.   말솜씨의 달인 작가, 김수현이 썼다는 것을 고려해도 너무 감동적이다. 도저히 한국사회의 고부지간에 있을법한 장면과 대화가 아니라 귀를 의심하며 몇 번이고 유튜브를 돌려가며 받아적어 소개한다. 앞으로 우리 가정의 말문화가 이처럼은 아니라도 조금씩의 변화를 기대하는 소망과 함께 말이다.   말의 사전적 뜻은 사람의 생각과 뜻을 담아 내놓는 그릇인 동시 뜻과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맛있게 요리한 음식을 어울리는 그릇에 제대로 담아 정성스럽게 치장하는 것을 플레이팅이라 하여 훌륭한 셰프는 요리실력만큼 이 분야의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한다. 말도 마찬가지다. 같은 말도 아! 다르고 어! 다르듯이 때와 장소 분위기는 물론 누가 어떻게 표현되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말도 플레이팅이 필요하지 않을까? 빛깔 좋게 담긴 음식이 맛도 좋고 건강에도 유리해 보이듯이 말 또한 곱게 다듬고 향취를 더할 때 더 맛깔나고 진정성 있게 전해지며 때로는 감정선까지 자극하기도 한다. 그 좋은 예가 강부자의 대사다. 그녀가 짧은 감사의 말을 울음과 함께 허리 굽힌 최상의 겸손이란 그릇에 담아 전달하므로 며느리는 물론 시청자들의 마음마저 훔쳐가고 있는 것이다.   일반인들의 경우 보통 하루에 20만 단어나 되는 말을 한다고 한다. 책 한 권의 원고량이 대략 18만 단어라고 한다니 우리는 매일 책 한 권, 일 년에 400여권, 한평생 3만여권의 자서전을 쓰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말이 많다고 다 좋거나 쓸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악한 생각과 음란과 도둑질, 살인과 간음, 탐욕과 속임수, 질투와 비방, 교만, 우매함’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부처님 또한 ‘생각은 말로, 말은 행동을,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성격으로 굳어진다’라며 생각과 말의 무서움을 경고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말의 순기능은 이웃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배우고 익힌 진리를 표현하며, 변화된 문명을 전달하라는 뜻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특별한 은혜다. 그런데 인간은 말을 통해 좋았던 인과 관계를 깨고 참된 진리를 왜곡시키며, 길이 전해야 할 문명을 훼손시키는 등 말의 순기능을 ‘필요악’으로 전락시키는 경우가 많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성경이 말하는 답이다. 우리 모두 세상의 거짓 선동에 현혹되지 말고 참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에 귀 기울이므로 참자유를 누리길 소망해본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진리 자유 막내며느리 김해숙 음란과 도둑질 재방송 중인

2022-10-28

[삶과 믿음] 진리 공부와 자유로운 생활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전, 물질문명의 발달은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토인비의 말에 따르면 물질문명은 토끼의 뜀뛰기와 같은 속도로 빠르게 진행되지만, 정신문명의 발달은 거북이걸음이라 했습니다. 철없는 어린아이가 칼을 갖게 되면 결국 사고를 내듯, 영적으로 미성숙하고 지혜가 어두운 사람이 찬란한 현재의 물질문명의 이기 속에 살게 되면, 이는 마치 어린이가 칼을 가지고 놀게 되는 상황이 된다고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노벨이 처음으로 화약을 만들었을 때 그것이 처음 응용된 분야가 전쟁용 폭탄제조였습니다. 과학자들에 의해 마침내 원자 구조가 밝혀지고 원자들의 결합과 분리과정에서 무한 에너지가 발생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그것이 응용된 분야는 원자폭탄 제조였습니다.     물질문명 속에서 우리의 참 가치가 매몰되고 물질적, 상업적, 경쟁적 환경 속에서 물질이 우리 삶을 풍요케 하기보다 오히려 우리를 속박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질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인간의 나약한 정신, 성숙하지 못한 마음의 문제입니다. 세탁기, 자동차, 전화 등으로 과거보다 한없는 시간 여유가 생겼지만, 현재 우리 마음은 과거보다 더 불안합니다. 오히려 더 급해지고 선진국일수록 정신병은 많아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인생을 바르고 안락하게 살 수가 있을까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 8:32)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인생을 낙원으로 이끄는 방법을 “진리적 종교와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모르고 진리적인 가치관에 따라 살지 않으면 설사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고 선과 명상을 하더라도 자유롭고 행복한 인생을 사는 데에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것을 좇아서 세상 자랑으로 사는 이상, 우리는 남과 비교하며 살지 않을 수 없고, 현실에 만족하기 힘듭니다.   한 제자가 대종사께 물었습니다. “무슨 방법으로 수양하여야 오욕을 다 없애고 수도에 전일 하여 부처님과 같이 한가롭고 넉넉한 생활을 하오리까.” 대종사께서는 “욕심은 없앨 것이 아니라 도리어 키울 것이니, 작은 욕심을 큰 서원으로 돌려 키워서 마음이 거기에 전일 하면 작은 욕심들은 자연 잠잘 것이요, 그러하면 저절로 한가롭고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대들에게 희로애락의 감정을 억지로 없애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희로애락을 곳과 때에 마땅하게 써서 자유로운 마음 기틀을 걸림 없이 운용하되 중도에만 어그러지지 않게 하라고 하며, 가벼운 재주와 작은 욕심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그 재주와 발심의 크지 못함을 걱정하라 하노니, 그러므로 나의 가르치는 법은 오직 작은 것을 크게 할 뿐이며, 배우는 사람도 작은 데에 들이던 그 공력을 다시 큰 데로 돌리라는 것이니, 이것이 곧 큰 것을 성취하는 대법이니라”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종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20대 중반에 불법을 만나서 희미하지만, 영생의 진리, 생사 해결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원불교에 출가한 후 세상 것들에 별로 끌리지 않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좌선을 많이 해서 정력이 쌓여서 그랬다기 보다 필자의 가치관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참으로 주요하고 영생으로 이르는 길인가를 알았고, 필자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달라져서 세상 것에 별로 끌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말할 때 앞의 구절이 주요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가 자유로운 인생을 위해서는 우선 진리를 알아야 하고,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궁극의 진리는 학교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 세계 많은 인류 중 극소수 사람들만이 진리를 깨달았고 우리는 그 진리를 깨달은 성자들로부터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진리 공부 진리 공부 진리적 종교 진리 생사

2022-10-20

[살며 생각하며] 참 진리가 주는 자유함

지난 한주 무척 바빴다. 월요일부터 4박 5일 일정으로 뉴욕주 끝자락에 위치한 Lake Placid에 머물다 금요일 저녁 돌아왔다. 인구 2638명의 작은 산골 마을이 1932년, 1980년 겨울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일약 유명 관광지로 발돋움하면서 찾는 이들로 넘친다. 개인적으로 이번 여행은 지난 2월에 이어 두 번째다. 당시는 마지막 겨울 끝자락의 눈 나라였다면 이번은 가을의 찬란한 시작이 거기 있었다. “산마다 불이 탄다 고운 단풍에, 골마다 흘러간다 맑은 물줄기, 황금빛 논과 밭에 풍년이 왔네. 드맑은 하늘가에 노래 퍼진다. 눈이 닿는 우주 공간에 손이 닿는 구석구석에…”라는 찬송 가사가마음에 와 닿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산 White face를 오른 것이다. Adirondack park의 랜드마크 격인 1483m(4867ft)의 이 산은 4600피트까지 차가 올라간다. 나머지 267피트는 돌산 한 중앙을 꿰뚫고 꼭대기까지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거나 외곽 등산로를 15분 정도 걸어서 오를 수 있다. 정상에 서면 야호! 하늘과 구름, 굽이굽이 이어진 산과 들판, 호수 사이로 북쪽으로는 몬트리올, 동북으로는 버몬트주가 손에 잡힐 듯 저 앞에 고개를 디민 모습을 굽어볼 수 있다.   다시 336마일을 돌아 토요일,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로 갔다. 수개월 전 예약한 성극 ‘David’을 관람하기 위해서다. 팬더믹 이전 본 작품들도 좋았지만, David는 정말 대단한 영감을 준 명작이었다. 전반부는 인간 다윗의 신실한 믿음과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는 과정이라며 후반은 실수와 범죄, 참회 그리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다. 명장면을 꼽으라면 끝부분, 다윗이 넘어져 절망 중일 때 화면 가득 비친 구세주 예수의 모습과 함께, 용서의 상징인 듯 온 극장에 가득 흩날리는 흰 눈발과 사방에서 들려오는 천상의 화음들! 2000명 관객은 자신도 모른 채 눈가를 훔치며 아멘, 할렐루야 하고 화답한다.   성극 관람 후 찾은 곳은 ‘아미시 타운’이다. 1720년대 독일에서 건너온 재세례파 극보수주의 신앙촌 격으로 지금도 현대문명을 거부하고 옛 방식을 고집하며 불편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직접 만든 검은색 계통의 옷을 주로 입고 4마리의 말이 끄는 쟁기로 땅을 갈며 작은 수확에도 만족해하는 듯하다. 전기도 가능한 직접 사용치 않고, 셀폰 대신 마을 전체가 공용전화 한 대로 비상시를 대비해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자녀들은 마을 내 학교에서 읽기 쓰기 더하기 빼기 정도만 배우고, 주 이동수단은 마차이고 단거리는 바퀴가 두뼘 정도에 지나지 않는 씽씽이를 사용한다.   요즘 세상이 변하고 있다. 금과옥조처럼 알고 지켜왔던 윤리와 도덕 신앙적 기준들이 무너지고 있어 혼란하다. 자녀들이 학교에서 가져온 교재나, 책을 무심코 펼치다 보면 민망한 내용과 장면들로 가득하고, 상대를 he, she 대신 they로 부를 것을 가르침 받고 그것이 옳다고 알고 있어 답답하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성경에서 가증하다고 규정한 동성애 문제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용납당하고, 싫으면 당신들이 떠나라는 항변이 불편한 진실이다.   아미시인! 그들에게 세상은 무엇일까? 참 진리가 주는 자유함을 누리며 작은 불편을 신앙으로 감수하며 평안을 누리는 그들이 오늘 한없이 부럽고 귀한 존재로 느껴진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진리 자유 극보수주의 신앙촌 뉴욕주 끝자락 산골 마을

2022-10-14

[살며 생각하며] 8월에 생각되는 역설적 진리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가 있다. 1998년 상영작으로 대한민국 멜로 영화 수작 중 하나로 꼽힌다. 대강의 줄거리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한 남자가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가운데 구청 주차요원으로 근무하는 한 여인이 단골손님이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남자가 중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여자는 남자에게 은근슬쩍 호감을 보이며 접근하지만 얼마 못 가 죽을 입장인 남자는 무반응으로 일관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여자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놀이터도 가고 밥도 먹는다. 그러다 남자가 입원하게 되고 사진관은 문이 닫힌다. 입원 사실을 모르는 여자는 매일같이 사진관을 찾아가 아쉬운 마음을 편지에 담아 창문틀에 걸어 둔다. 그러나 여전히 남자로부터 연락은 없다.     여자가 타지역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끝나나 했지만 퇴원한 남자가 정리차 사진관에 들르면서 깨진 창문과 함께 놓여 있는 여자의 편지를 발견한다. 남자가 늦은 답장을 쓰지만 붙이지는 않는다. 대신 남자는 수소문으로 찾아낸 여자의 새 근무지 인근의 카페에 앉아 여자를 기다린다. 그러나 막상 여자가 나타났지만 다가가지는 않는다.   남자가 죽고 세월이 적당히 흐른 시점에 검은 상복을 차려입은 여인이 사진관 외곽 진열대를 통해 자신의 사진들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은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이 고맙습니다.’ 남자의 마지막 고백이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역설(Paradox)이란 일반 상식, 통념, 정의에 맞지 않는 논리의 비약적 전개를 말한다. 물론 여기는 거짓말 같은 의미론적 억지까지 포함한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 대신 붙인 제목이다. 왜 제작사나 감독이 본래의 제목 대신 계절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제목으로 택했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제목이 상상 불능하지도 않음은 일본의 수필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같은 제목을 사용한 바 있어서다. 그러나 서울에서만 50만 관객을 모았음은 이런 역설적 발상도 한몫했을 것이다.   성경에는 수많은 역설적인 문구와 이야기가 등장한다. ‘한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이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은 자는 얻으리라.’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 등이 좋은 예다. 이야기로는 아버지와 형을 속여 장자권을 가로챈 야곱이 후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수장이 되었는가 하면, 아들 요셉은 이복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으나 오히려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아버지와 형들을 고센 땅에 이민시켜 400년 후 대이스라엘 민족의 씨앗이 되게 했다 등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진짜 역설의 밑그림에 불과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찐 역설은 예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다. 전에는 십자가가 악과 죽음이었다면 예수 후 십자가는 구원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생각 역설 역설적 진리 역설적 발상 진짜 역설

2022-08-26

[살며 생각하며] 8월에 생각되는 역설적 진리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가 있다. 1998년 상영작으로 대한민국 멜로 영화 수작 중 하나로 꼽힌다. 대강의 줄거리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한 남자가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며 아무 일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가운데 구청 주차요원으로 근무하는 한 여인이 단골손님이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남자가 중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여자는 남자에게 은근슬쩍 호감을 보이며 접근하지만 얼마 못 가 죽을 입장인 남자는 무반응으로 일관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여자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놀이터도 가고 밥도 먹는다. 그러다 남자가 입원하게 되고 사진관은 문이 닫힌다. 입원 사실을 모르는 여자는 매일같이 사진관을 찾아가 아쉬운 마음을 편지에 담아 창문틀에 걸어 둔다. 그러나 여전히 남자로부터 연락은 없다. 화가 치민 여자는 어느 날 밤 돌을 던져 창문을 부수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여자가 타지역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끝나나 했지만 퇴원한 남자가 정리차 사진관에 들르면서 깨진 창문과 함께 놓여 있는 여자의 편지를 발견한다. 남자가 늦은 답장을 쓰지만 붙이지는 않는다. 대신 남자는 수소문으로 찾아낸 여자의 새 근무지 인근의 카페에 앉아 여자를 기다린다. 그러나 막상 여자가 나타났지만 다가가지는 않는다.   남자가 죽고 세월이 적당히 흐른 시점에 검은 상복을 차려입은 여인이 사진관 외곽 진열대를 통해 자신의 사진들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은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이 고맙습니다.’ 남자의 마지막 고백이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역설(Paradox)이란 일반 상식, 통념, 정의에 맞지 않는 논리의 비약적 전개를 말한다. 물론 여기는 거짓말 같은 의미론적 억지까지 포함한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 대신 붙인 제목이다. 왜 제작사나 감독이 본래의 제목 대신 계절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제목으로 택했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제목이 상상 불능하지도 않음은 일본의 수필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같은 제목을 사용한 바 있어서다. 그러나 서울에서만 50만 관객을 모았음은 이런 역설적 발상도 한몫했을 것이다.   성경에는 수많은 역설적인 문구와 이야기가 등장한다. ‘한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이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은 자는 얻으리라.’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 등이 좋은 예다. 이야기로는 아버지와 형을 속여 장자권을 가로챈 야곱이 후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수장이 되었는가 하면, 아들 요셉은 이복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으나 오히려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아버지와 형들을 고센 땅에 이민시켜 400년 후 대이스라엘 민족의 씨앗이 되게 했다 등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진짜 역설의 밑그림에 불과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찐 역설은 예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다. 전에는 십자가가 악과 죽음이었다면 예수 후 십자가는 구원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생각 역설 역설적 진리 역설적 발상 진짜 역설

2022-08-19

[삶과 믿음] 영생의 행복을 위한 지혜

사람들이 제반 분야에서 학습하고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합니다. 여러 분야에서의 지식획득이 세상 성공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지식도 주요하지만, 인류가 참 나와 진리 실상에 관한 참 지혜를 개발해야 하는 이유는 근본적 진리에 관한 우리 앎이 없이는 영생의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처럼 우리가 삶의 고통을 벗어나려면 인생과 우주 진리 실상을 알아야 하는 것이 근원적 해결책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인간 고와 윤회의 근본 원인은 바로 무명(無明)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프랑스의 한 철학자의 말처럼 동물보다 육신이 약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사유의 힘입니다. 이러한 사유의 힘이 현대 문명의 근간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철학자 데카르트의 말입니다. 데카르트가 근대철학의 아버지이듯, 인간 사유의 힘이 서양문명과 현대 물질문명의 발전에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선사(禪師)가 질문했습니다. “생각이 다 없어질 때 나는 누군가?” 또한 이런 화두가 있습니다. “사람이 깊이 잠들어 꿈도 없는 때에는 그 아는 영지(靈知)가 어느 곳에 있는가?”     진리의 실상과 참 마음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연구로써 즉 사유로써 접근할 수 있지만, 우리가 진리 당체, 본성의 세계를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서 모든 망념과 생각이 사라지고 순수의식이 온전히 드러나야 합니다. 참 마음, 진리의 세계는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세계이기에, 이는 사유가 아닌 관조로써 보아야 하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어느 종교에서나 명상, 묵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눈이 자신의 눈을 볼 수 없고, 칼이 자신을 밸 수 없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본다 혹은 듣는다고 할 때도 이는 무엇을 본다, 무슨 소리를 듣는다 등 특정 대상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 본성의 세계, 진리 실상의 세계는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자리 즉,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기 전의 자리입니다. (一念未生前, 天地未分前의 화두) 깨달음으로 얻어지는 지혜 즉, 반야지는 생각이 끊어진 자리, 하나의 진리 당체를 보는 것이기에 생각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깨달음의 자리입니다.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우주 현상에 대한 의심을 발하시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산신을 만나려 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우연히 친척에게서 산신이 모든 것을 아는 전지전능한 분이라는 말을 듣고 11세부터 산신을 만나기 위해 수년간 삼밭재에 올라가 지극정성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산신을 만나지 못하자, 다음에는 인간 스승을 만나기 위해 구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스승을 만나는 것도 성취하지 못하게 되자 20대 초반부터는 ‘이 일을 어찌할꼬!’라는 한 생각에 몰두하게 됩니다. 20대 중반부터는 이 한 생각도 다 잊어버리고 큰 입정(入定)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여름날 아침, 대종사께서 장을 보러 가기 위해 선진포에서 나룻배를 기다리며 계셨습니다. 서 있다가 그대로 입정에 들어버렸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 오후가 되어 장을 보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대종사를 보니 여름 햇살에 얼굴이 완전히 빨갛게 타버렸다고 합니다. 대종사께서는 하나의 생각, 큰 의심에 몰입하여 삼매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몇 년간 지속하다 결국 26세에 우리와 인생에 관한 진리를 대각하셨습니다.     바위 속에 금이 있어도 우리가 캐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묘지에 있는 화강석을 보면 거울과 같이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땅에서 나온 화강석이 처음에는 거칠지만, 자꾸 갈고 닦았기 때문에 빛이 나는 것입니다. 화강암을 갈고 갈아서 거울같이 만들듯, 우리가 진리를 연구하고 묵상할수록 우리 마음에서 지혜의 빛이 나오고 이가 깨달음으로 인도합니다. 진리에 관한 묵상과 명상이 깨달음의 필수입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영생 행복 세계 진리 마음 진리 진리 실상

2022-06-16

[삶과 믿음] 예수의 선포 1 (눅 4:16-30)

예수의 삶을 나눔, 가르침, 저항/ 투쟁, 영적인 삶, 선포, 보내심의 여섯 측면으로 분류해서 살펴볼 수 있고 지난 칼럼에서는 영적인 삶까지 다루었다. 그런데 예수의 삶 가운데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면이 바로 선포이다.     ‘치맥은 진리다’는 표현 속에서 ‘진리’란 무엇일까? ‘좋다/옳다’는 것과 그 좋고 옳음이 ‘늘 그렇다’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는 듯하다. 진리가 이렇게 우리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온 것은 반가운 일인데, 일상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에도 진리에 관한 담론을 기대하지 않는 세상이 되어버릴까 염려되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진리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태나 실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종교, 철학, 과학 모두 진리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그들의 접근법이 다양하다. 과학은 관찰과 경험, 가설을 근거로 진리를 찾고, 철학은 사유와 언어, 인간의 실재에 대한 분석과 통찰을 통해서 진리를 찾는다. 종교는 과학과 철학의 방법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위에 ‘선포되고 약속된’ 진리를 포함한다.     그런데 선포와 약속도 진리라는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과거에는 지성을 진리의 주체로 여겨서 지성의 정합성이 진리의 주된 척도였다면, 현대에는 인간의 총체적인 삶과 그 삶이 소통하는 인간의 상황, 그 상황 속에서 인간, 사회, 세계, 자연을 얼마나 참된 길로 인도하는가 하는 점들이 진리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예를 들어, 어릴 때 부모와 함께 연주회장에서 들었던 음악 소리를 기억하고 그 소리를 재현하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게 되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오디오개발에 바친다면, 또한 그 개발된 오디오를 통해서 경험하는 음악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깊은 위로를 가져온다면, 자신의 몸속에 박혀버린 ‘기억과 꿈’, 그것을 타자와 나누는 ‘공유’도 진리다. 소설, 영화, 대중가요의 한 줄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진리란 이렇게 지성, 삶, 상황, 아름다움, 상상, 기술, 지혜, 기억과 꿈을 포함한다.     예수의 선포와 약속은, 비록 우리가 그 실체를 ‘아직’ 찾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이미’ 선포되었고, 인간의 기억, 꿈, 아름다움, 나눔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를 우리에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거룩한 신적 갈망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 가는 일체의 과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진리보다도 더 강력하며, 고난 속의 인간에게 깊은 위로와 소망이 되기도 한다.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 예수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라고 선포했다. 예수는 이 말씀을 선포한 후에 이 말씀이 바로 자신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도 함께 선포했다(눅4:21). 이를 통해서 예수는, ①예수 자신이 자신의 일에 대한 가장 강력한 선포자이며, ②구약을 인용하면서 신약과의 연속성을 드러냈고, 그러나 ③선민 이스라엘에 초점을 맞추던 구약의 세계와는 다르게 전 인류를 향하는 신약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으며, ④고난과 핍박, 질병과 무지로부터 고난당하는 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바로 예수의 사명이라고 선포했다.     예수의 선포를 우리의 믿음, 기억, 상상, 꿈, 삶 속에 품고, 이 놀라운 예수의 세계가 어떻게 이 땅에서 이루어져 가는 가를 지켜볼 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 참여하면서 세상 그 어떤 것에도 찾을 수 없는 예수의 ‘이미 선포된 위로와 해방’을 경험하면서, 고난받는 자들과 거룩한 연대를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하고 기도드린다. 차재승 / 뉴브런스윅 신학대학원 교수삶과 믿음 예수 선포 예수 자신 선포 보내심 모두 진리

2022-02-24

[삶과 믿음] 신년의 마음공부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 근본 원인은 실제 사람들이 행복과 자유에 이르는 ‘길’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운동하기 위해 제가 근무하는 뉴욕주 원달마센터 근처에 있는 YMCA에 갑니다. 운동을 마친 후 보통 건물 정문으로 나오는데, 어느 날 건물을 나오기 전 1층 화장실을 들리게 되었습니다. 화장실 바로 옆에 주차장으로 가는 문이 있다는 것을 그 날 처음 알았습니다. 그 문으로 나가면 주차장으로 바로 갈 수 있었는데 몇 년간 정문으로 나와서 주차장으로 가는 긴 코스로 다닌 것이지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제반 활동과 여러 노력을 하고 있지만 실제 행복으로 가는 길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수의 사람이 가는 인생길, 우리에게 익숙한 길이 결코 영생의 행복으로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영생이 있고, 내가 지은 것은 반드시 내가 받는다는 것을 의심 없이 믿고, 그에 따라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우선 진리 공부, 법 공부를 통해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을 우선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 혹은 불교 경전 공부이건, 유튜브를 통한 여러 가지 진리에 관한 강의건 우리는 진리를 알기 위해 법 공부를 해야 합니다. 원불교 3대 종법사이신 대산종사께서는 사람이 삶을 잘 살기 위해서는 우선 “대진리관, 대철학관, 대인생관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행복을 원하지만 실제 그렇게 살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길을 알아도 그 길을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산악인이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선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다이어트 책을 아무리 읽고 방법에 숙달해도 실행이 따르지 않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이 행복을 위해 성공하기를 바라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지위를 가지려는 등의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서 어떤 ‘외적 조건’을 바꾸려 합니다. 더 많은 물질, 더 존경받는 자리, 더 큰 집, 더 좋은 차 등, 행복을 위해 우리가 하는 제반 노력은 우리의 외적 조건, 환경을 변화시키려는 것입니다.   서울 모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님의 다음 연구가 있습니다. 교수님은 경남에 있는 한 조그마한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기간 졸업생들을 관찰하고 데이터를 모았는데, 교수님의 관심은  ‘어떤 것이 사람들의 사회적 성공을 결정하는가?’ 였습니다. 우선 그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장년이 된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성공지표를 만들었습니다. 교수님은 통상적으로 일반인이 생각하는 사회적 지위와 수입 등을 토대로 성공지수를 계량화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학생들의 지능지수, 학업성적, 그리고 선생님의 학생에 대한 평가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연구 결과, 졸업생의 성공과 지능지수는 거의 관계가 없었으며, 초등학교 때의 학업성적 역시 성공과 큰 상관관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뜻 밖에 초등학교 때 선생님의 학생에 대한 주관적 평가, 즉 학생의 대인관계가 어떠하며, 얼마나 낙관적이고 진취적이며, 그리고 얼마나 정직하고 근면한가 등의 선생님 평가가 졸업생들의 성공과 가장 높은 상관관계를 보였습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아주 큽니다.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는 “모든 학술을 공부하되 쓰는 데에 들어가서는 끊임이 있으나, 마음 작용하는 공부를 하여 놓으면 일분 일각도 끊임이 없이 활용되나니, 그러므로 마음공부는 모든 공부의 근본이 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마음공부 신년 초등학교 학생들 진리 공부 장기간 졸업생들

202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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