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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사무라이

여행은 중독이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금단현상이 온다. 아침마다 화려하게 차려진 뷔페 음식 대신 운동하러 나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다음 여행지를 계획하며 달랠 수밖에 없다. 여행지 선택도 전에는 가보고 싶은 곳이 우선순위였으나 이제는 멀고 힘든 오지를 하루라도 젊을 때 다녀오고 싶다. 몸이 가장 건강하고 편안할 때 어려운 환경에 처한 곳을 찾아보고 싶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다.     이번에는 일본, 태국 그리고 한국을 다녀왔다. 일본 여행은 그동안 원죄로 인한 배타심으로 꺼려왔었다. 하지만 이번에 용기를 내서 지금까지 내가 어른들한테서 혹은 학교에서 듣고 배운 것을 다 내려놓고 내가 직접 보고 느껴보고 싶었다. 우리 일행은 뉴욕에서 인천공항을 거쳐 일본 항공을 통해 삿포로에 도착했다. 다른 항공은 위탁 수화물 제한이 23kg이지만 일본항공은 15kg 이어서 17일간의 여정으로 짐을 준비한 우리는 일본에 들어가기 위해 짐을 재정비해야 하는 고충을 겪어야 했다. 결국 일본인은 아담 사이즈를 선호하며 비행기 안의 공간도 낭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처음 방문지는 다테지다이무라로 사무라이 에도시대를 재현해 놓은 민속촌이었다. 직원들이 고유의상을 입고 그 시대 삶의 단면을 연극으로 보여주었다. 다만 홍보자료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연극도 일본어로만 진행되어 관객은 그 공연의 역사적 배경이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을 수 없어 아쉬웠다. 단지 상상 속에서 시간여행을 하며 각자 아는 만큼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첫날은 노보리베츠 마호로바 호텔에서 유카타(일본 실내복)로 갈아입고 호텔 안을 누비며 실내와 옥외 온천에서 몸을 풀었다. 유카타를 입고 들어간 식당은 다다미방으로 꾸며져 있었고 우리 일행 100명은 각자 개인상을 받아 앉았다. 거기서 시식한 홋카이도의 싱싱한 해산물 요리와 광경은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다. 5성급 호텔인데도 객실이 모두 다다미방으로 되어 있어 그들의 자긍심을 엿볼 수 있었다.     다음날 호텔의 조식 뷔페는 바닷속의 생물을 다 끌어올려 온갖 재주와 공을 들여 차려낸 해물 백화점 같았다. 다음날은 도야호 유람선을 타기로 했으나 비가 온 관계로 대신 쇼와 신전과 사이로 전망대에 올랐다. 거기서 바라본 사방의 경관은 과연 우리 숨을 거의 멎게 했다. 다음 도착지는 지옥 계곡,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유황 냄새가 진동했다. 여기저기서 뜨거운 증기가 끓어올라 활화산으로 언제 용암이 분출될지도 모르는 은근한 생동감과 위험 사이를 줄타기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이 지옥 계곡이 열악한 환경이어서 생명이 살아남기 어렵다고 했지만 바로 옆으로 숲이 형성되어 있어 이 숲과 지옥 계곡을 배경으로 사진을 많이 찍어두었다. 그다음은 오타루로 이동했다. 한때는 오타루 운하를 중심으로 큰 상권이 형성되었었으나 지금은 완전 관광지로 변해 오르골당(music box museum)은 관광객으로 붐볐고 과연 박물관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조그마한 예쁜 소품들의 집산지답게 기타이치기라스 공방에 들러 휘황찬란한 유리 공예품을 즐길 수 있었다. 상품 하나하나가 새끼손가락만 한데다 색상이 화려하고 포장 또한 섬세해서 어린이 머리핀 하나도 예쁜 색종이로 싸고 예쁜 비닐봉지에 넣은 후 리본으로 묶어서 다시 중간 사이즈 백에 넣고 마지막으로 상호가 적힌 큰 백에 넣어주었다. 그 포장하는 모습과 그 과정 자체가 행위예술이었다.     내가 경험한 일본인들은 친절하고 성실했다. 그리고 그들은 당당했다. 하지만 영어를 쓰지 않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서로 큰 불편을 느꼈다. 영어 발음이 무척 힘든 민족이다. 언제 그들은 영어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고 우월한 민족적 자존심을 내려놓고 세계적 공용어인 영어를 받아들일까 답답했다. 항상 지진과 쓰나미와 같은 재해를 고려해 건물은 낮게 짓고 한국인과는 다르게 집에 대한 집착이 없다고 한다. 그들은 살림은 간소하게, 가능하면 자연 속에서 자연을 즐기며 살자는 주의인 것처럼 보였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사무라이 사무라이 에도시대 여행지 선택 지옥 계곡

2024-12-16

[문학으로 세상읽기] 정치는 지옥인가

한국에서 가장 낙후된 곳이 정치권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말이 정말로 딱 맞는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저에게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지옥’이라는 말입니다.   ‘좋은 지옥’이라는 말은 형용 모순입니다. 지옥이 어떻게 좋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백 년 전에 루쉰이 쓴 산문시 ‘잃어버린 좋은 지옥’을 보면 ‘좋은 지옥’이라는 말도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말을 통해서만 진실이 포착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의 화자 ‘나’는 지옥 근처에서 지옥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들려오는 지옥의 소리는 지옥답습니다. 그때 홀연 마귀가 나타납니다. 한때 지옥의 통치자였으나 이제 지옥을 인류에게 빼앗기고 도망쳐온 마귀가 “이제 다 끝났네, 이제 다 끝났어! 불쌍한 귀신들은 그 좋은 지옥을 잃어버렸어!”라고 비분강개하며 ‘나’에게 그 전말을 알려줍니다.   원래 지옥은 천신(天神)의 것이었습니다. 마귀가 천신과 싸워 이겨 빼앗았던 것이죠.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지옥의 통치는 해이해졌습니다. 그러자 칼의 숲은 빛을 잃었고, 끓는 기름도 식었고, 불구덩이도 미지근해졌고, 비록 작고 창백하지만, 만다라 꽃이 움텄습니다.   해이해진 지옥에서 귀신들이 깨어났습니다. 깨어난 귀신들은 갑자기 인간 세상을 기억해내고 지옥에 반대하는 절규를 터뜨렸습니다. 인류가 그 소리에 응해 일어났고, 마귀와 싸웠고, 싸워 이겼습니다. 최후의 승리는 인류의 것입니다.   이제 인류가 지옥을 통치합니다. 그런데 지옥의 상황은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집니다. 인류는 마귀보다 더 무서운 통치자가 됩니다. 귀신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다스림을 받는 자일 뿐이며, 인류의 무서운 통치 아래 더욱 무력해지고 더욱 고통받습니다. 귀신들이 지옥에 반대하는 절규를 터뜨려도 이제는 소용이 없습니다. 인류의 반역자로 낙인찍혀 영원한 고통이라는 벌을 받고 칼의 숲 복판으로 쫓겨날 뿐입니다. 이러한 지옥의 현재 모습을 마귀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만다라 꽃은 금세 시들었어. 기름은 똑같이 끓었고, 칼은 똑같이 날카로웠고, 불은 똑같이 뜨거웠고, 귀신들은 똑같이 신음했고, 똑같이 몸부림쳤고, 심지어 잃어버린 좋은 지옥을 기억할 겨를조차 없어졌어.”   마귀가 통치하던 과거의 지옥이 상대적으로 더 좋은 지옥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게 되면 ‘좋은 지옥’이라는 형용 모순이 확실히 성립됩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천신을 청나라, 마귀를 베이징 군벌정부, 인류를 국민당 우파와 그들이 장악한 국민정부라고 보는 해석인데, 흥미롭기는 하지만 그럴듯하지는 않습니다. 루쉰이 이 작품을 쓴 때가 1925년 6월이었고, 국민당 우파의 쿠데타는 1927년 4월이었으니 시간이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해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루쉰이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했다며 그 통찰력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억지인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권력은 동일하며 단지 위치가 바뀔 뿐이라는 보편적 진실입니다. 청나라나 베이징 군벌정부나 국민정부나, 그 이후 지금까지의 여러 형태의 정부들도 모두, 나아가서는 중국뿐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의 각종 정부도, 그 보편적 진실에 비추어 보면 다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루쉰의 이야기를 다시 곱씹어 봅시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통치자가 누구든 간에 피통치자는 언제나 귀신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지옥의 주민은 누구입니까? 귀신들입니다. 그렇다면 귀신들이 스스로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일까요? 자치(自治)는 불가능한가요? 왜 통치를 귀신들 자신이 아니라 천신이 하고 마귀가 하고 인류가 해야 하는 건가요?   귀신들이 자치하지 못하고 통치받는 자로서만 존재하는 한에는 다 똑같은 지옥이고, 통치 기술이 갈수록 더 발달하기 때문에 지옥은 오히려 점점 더 나빠질 것입니다.   자문해 봅시다. ‘나’는 귀신인가요, 인류인가요? ‘우리’가 사는 이곳을 지옥이라고 부른다면 지옥의 주민인 ‘우리’는 인류가 아니라 귀신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인류라고 믿었다면 그것은 큰 착각일 수 있습니다. 지옥의 귀신들에게 ‘잃어버린 좋은 지옥’이라는 말은 너무나 슬픈 말입니다. 성민엽 / 문학평론가문학으로 세상읽기 지옥 정치 해이해진 지옥 지옥 근처 한때 지옥

2024-09-02

[문예 마당] 청동에 불어넣은 예술의 혼

  몇 해 전 스탠퍼드 대학 박물관에 갔었다. 어떤 미술품이 있는지 아들에게 물으니 지금껏 전시관 관람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강의실 오가기도 시간이 바빴을 텐데 한가한 질문을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들은 건물 밖에 있는 ‘지옥의 문’부터 감상하라며 휑하니 떠났다.   그림으로만 보았던 로댕의 지옥문은 높이, 넓이, 두께에 압도된다. 한마디로 아비규환의 장소, 절망의 늪에서 180여 명의 크고 작은 군상이 집합되어 있는 지옥의 축소판이다.     로댕의 지옥문은 처음에는 로렌조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으나 후에 미켈란젤로의 최후 심판을 보고 구상이 바뀌었다고 한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청동 주조물이다.   지옥문 맨 위에 세 그림자 혹은 세 망령이라고도 하는 조각이 서 있다. 땅을 향해 고개를 떨구며 머리를 맞대고 손을 잡고 있는 세 그림자는 하나의 아담 동상을 만든 후 각도가 다르게 셋으로 배치된 것이다. 인류 원죄의 장본인임을 깨달은 후 머리를 들지 못하고 되돌릴 수 없는 운명을 한탄하는 듯 보인다.   “나를 거쳐서 길은 황량한 도시로,   나를 거쳐서 길은 영원한 슬픔으로,   나를 거쳐서 길은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   (신곡 지옥 중 3곡)   세 그림자 아래 문설주 중앙 위에 지옥문의 아이콘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되돌아갈 수 없는 종착역에 다다른 군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물 한 모금 찍어 건넬 수 없는 무기력함을 인지하며 고뇌에 빠진 단테의 눈으로 본 것이다. 삼손을 연상할 정도의 팔 근육은 있으나 오른팔을 왼 다리 위로 얹어놓은 지극히 불편한 자세다. 턱을 괴고 하늘의 것이 아닌 땅의 것을 생각하려니 고충이다. 누가 보아도 번민하는 표정이다. “여기 들어오는 자, 일체의 희망을 버려라” (지옥의 3곡)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지상에 발붙이고 숨 쉬고 있는 한 인류는 생각한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로 역사는 쓰이고 있다.   오욕칠정에 서려 있는 지옥문의 또 다른 저명인사들, 비극의 연인 파울로와 프란체스카의 얘기, 집안끼리의 잘못된 정략결혼으로 생긴 슬픈 운명의 주인공, 불구의 남편을 저버리고 다른 사람도 아닌 시동생과 불륜을 저지른 후 둘 다 지옥문에 떨어진 육신들이다. 그들의 ‘입맞춤 (kiss)’은 전체 분위기와 동떨어진 감이 있어 독립 작품으로 완성시켜 유명세를 받는 조각품이다.  차디찬 대리석과 청동에 예술의 혼을 불어넣은 대작이건만 내면에 담긴 비극적 이야기와는 다른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불꽃 연정만이 드러나는 생동감에 탄성을 하며 조각상 주위에서 발을 떼지 못하는 관람객들로 붐빈다.     지옥문 앞 양옆에 아담과 하와의 청동상은 창조주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하와를 지으셨듯이 로댕도 아담을 먼저 만들고 하와를 만들었다. 청동 조각에서 보는 하와는 아담을 거짓으로 꾀어낸 후 공범죄로 에덴에서 쫓겨난 책임을 아는 듯 얼굴을 못 들고 두 팔로 가슴을 부여잡고 있다. 불순종의 생각이 머리로부터 가슴에까지 이어지며 저지른 죗값이다. 먹음직스러웠던 과실을 먹고 낙원에서 쫓겨난 인류의 어머니!   아담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부른 하와와 함께 죄를 진 후 그 역시 처절한 자세로 지옥문 곁에 서 있다. 흥미로운 것은 아담이 다시는 하와의 꼬임에 빠지지 않겠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귀를 막고 싶었는지 한쪽 귀를 어깨에 대려고 하는 모습이다. 아담의 손은 땅을 향해 있을 뿐 천상을 향할 수는 없었다. 200명도 안 되는 지옥문 앞의 군상을 잠시 보는 것만으로도 팔다리의 힘이 빠지는데 그곳에서 영원을 보낸다는 것은 가히 상상하기조차도 힘든 일이다. 지옥문 앞에 서보니 일상에서 예사로 말하는 교통지옥, 입시지옥 등의 수식어는  지옥의 참상을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데 한자가 쓰인 대형 관광버스가 지옥문 앞에 주차하며 40여명쯤 되는 관광객이 앞다투어 내린다. 시간이 바투어 그런지 인증 사진만 찍고는 떠난다.     중국인 관광객뿐이겠는가? 우리도 천국,지옥에 관한 사전조사를 못 하고 지낸다. 디지털 시대에 지옥 이야기는 인기가 별로 없는 주제로 하향선에 머문다. 기독교 안에서도 설마 지옥이? 그런 곳이 어디 있을까? 가상의 장소로 치부되기 쉽다. 지옥 얘기 듣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일부 인본주의 교직자들은 임의대로 추상화를 그린다. 계속 덧칠을 하기에 그 진상을 구별하기 어렵다. 그네들이 듣고 싶어하는 솔깃한 감동의 메시지로 가려운 귀만을 긁어주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사랑은 생명의 씨앗이자 모든 창조의 근원”이라고 멋지게 말했던 로댕은 현대 조각의 대부로 탁월한 예술가의 자취를 남기고 떠났다. 지옥문을 구상하는데 30여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 장구한 시간을 그가 지옥 대신 천국을 주제로 택하였다면 어떤 작품을 만들었을까? 아름다움의 극치가 되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 마음이 보물로 간직한 하늘의 거룩하고 성스러운 영역을 내 노래의 줄거리가 될 것이다.” (신곡 천국 1) 하루에도 몇 번을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우리네들.     지옥의 참상을 예술화한 그의 작품을 보고 수많은 이들이 천국.지옥에 관한 사유를 하게 된다. 지옥문 앞에서 서성이는 영혼들을 위해 눈에 잘 띄게 대형 전광판을 설치해 놓고 싶다. ‘Detour Please! (잘못 오셨어요, 되돌아가세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박물관 구경 잘했느냐고 아들이 묻는다. “한 마디로 충격이네.” “왜요?” “지옥 예고편 같구나.” “사실은 더 비참할 텐데요.”   때마침 자동차 FM에서 오르페오와 유리디체 아리아가 들린다. 사랑하는 아내가 음부에서 살아나오기를 사랑의 신, 아모르에게 간청하는 노래다. 언제 들어도 애절하다. 그곳의 참상을 알기에 청원을 올리지 않을 수 없던 오르페오. 그의 애달픈 마음이 멜로디를 타고 전해 온다.     지옥문 아니면 천국 문, 누구나 한번은 지나가게 될 문이 아닌가? 독고 윤옥 / 수필가문예 마당 청동 예술 지옥문의 아이콘 교통지옥 입시지옥 신곡 지옥

2024-06-27

[문장으로 읽는 책] 네 눈동자 안의 지옥

“여기서 나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나가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거죠.” 그가 웃는다. “그러면 저들이 당신을 가능한 한 빠르게 치워버릴 거예요.”…나는 여기에 얼마나 더 있게 될까? 갑자기 숨통이 조여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물 밑에 갇혀 있고 수면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수면 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캐서린 조 『네 눈동자 안의 지옥』   ‘여기’란 정신병원이다. 아무 문제 없었다. 사랑하는 남편과 사랑하는 아이를 기다렸고, 사랑스런 아이가 태어났다. 백일잔치를 앞둔 어느 날 아이를 침대에서 안아 올리려는데 아들의 눈이 “악마의 눈으로 바뀌었다”. 호흡이 짧아지고 방안의 벽이 두꺼워졌다. 미친 듯 집에서 뛰어나왔다. 누군가 쫓는 것 같아 SNS 계정을 다 지웠다.   한국계 미국인인 작가가 출산 후 환청과 망상을 동반한 산후정신증에 시달린 기록을 책으로 옮겼다. 병원에서 한동안 작가는 자신이 출산한 사실도, 아이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출산은 축복이지만 모성이란 저절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산후우울증을 경험하는 여성도 적지 않다. 산후정신증에 대한 생생한 고백이자 모성신화를 예리하게 비트는 책으로, 가디언 등이 2020 ‘올해의 책’으로 꼽았다. 부제가 ‘모성과 광기에 대하여’다. 그에게 한국 여성은 어떤 존재일까. “한국의 해녀는 모두 여성이다.…이들이 파도를 헤치고 깊이 잠수해 들어가면서 심청을 떠올릴지 궁금하다. 나는 이들이 진주를 발견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눈물과 같은 진주, 바다 여왕의 선물.”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눈동자 지옥 한국 여성 모성과 광기 수면 위로

2023-07-12

밴쿠버 주택보유자 천국, 무주택자 지옥

 코로나19 대유행 기간 동안 저금리 정책으로 주택가격이 폭등한 후, 캐나다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다소 진정되던 메트로밴쿠버의 주택가격이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다.   그레이트밴쿠버부동산협회(Real Estate Board of Greater Vancouver, REBGV)의 5월 주택 거래 통계 발표에서 모든 형태의 주택 벤치마크 가격이 118만 8000달러로 전달에 비해 1.3%가 상승했다.   단독주택은 195만 3600달러로 전달에 비해 1.8% 올랐고, 아파트는 76만 800달러로 1.1%, 그리고 다세대 주택은 108만 3000달러로 0.2% 올랐다.   당초 REBGV는 주택가격이 조정을 받으며 연말까지 점차적으로 2%의 상승을 예상했으나, 6개월 연속 월간 주택가격이 상승세를 보이며 이미 6% 이상 올랐다.   주택거래도 작년 5월 2947건에서 이번에 3411건으로 15.7%나 늘어나며 활력을 보였다. 주택 형태별로 단독주택은 30.7%, 아파트는 7.9%, 그리고 다세대주택은 16.7%가 각각 증가했다.   프레이져밸리부동산협회(Fraser Valley Real Estate Board, FVREB)의 5월 통계에서도 단독주택이 149만 1700달러로 전달보다 2.5%, 타운홈이 82만 6200달러로 1.4%, 그리고 아파트는 54만 2300달러로 2% 각각 상승했다.   이렇게 메트로밴쿠버의 집값이 오르고 거래도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네셔널뱅크오브캐나다(National Bank of Canada)의 주택 여유도 모니터는 전국에서 밴쿠버가 가장 높은 주택가격으로 무주택자가 주택을 소유하는데 38년 정도 걸린다는 추산치를 내놓았다.   콘드 이외 주택의 평균 가격이 158만 7439달러이고, 연간 소득이 32만 2245달러에 전체 소득의 10%를 저축해서 다운페이먼트를 한다고 계산했을 때 총 454개월이 걸린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다.   콘도는 그나마 가격이 72만 1230달러여서 연간 소득이 17만 1052달러인 가구가 67개월 걸려 다운페이먼트를 마련할 수 있다고 나왔다. 표영태 기자무주택자 주택보유자 기준금리 인상 밴쿠버 주택보유자 무주택자 지옥

2023-06-06

[J네트워크]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의 ‘피카돈’

공습경보 해제 소식에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초등학교 5학년, 3학년생인 두 동생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하늘이 참으로 맑았다.     노면 전차에 올랐다. 서쪽으로 한 20m 달렸을까, 희미한 폭음이 들려왔다. 고함이 터져 나왔다. “빨리 전차에서 뛰어내려!” 어디선가 후끈후끈한 불덩어리가 다가오는 듯했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어둑어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어두워진 아침이 참 신기하단 생각마저 들었다. 조금 밝아지니 타고 있던 전차의 앞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전차는 불타 버린 상태였다. ‘가스탱크가 폭발했나 보다’란 이야길 누군가 했지만 믿기 어려웠다. 조금 더 밝아졌을 땐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거리의 건물들은 모두 무너져있었다.     어른들이 감싼 덕에 무사했던 두 동생의 손을 잡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무너진 건물 잔해에 막힌 길. 집에 가는 것조차 험난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일본 히로시마(?島)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그렇게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박남주(91) 할머니의 인생을 뒤엎었다.   재일동포 2세인 박 할머니가 있던 곳은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에서 1.9㎞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히로시마의 밤은 며칠이 되도록 새빨갰다. 피폭당한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며 입에 올린 단어는 물. 박 할머니는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비참하고도 잔인한 지옥, 히로시마는 지옥이었다”며 몸서리쳤다.     이웃집 동급생 남자아이, 토미코 언니 가족은 그날 이후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안부 인사처럼 이렇게 말했다. “피카돈에서 살아남았구나!” 우리 말로 하면 ‘번쩍(피카) 쾅(돈)’이란 뜻이다. 히로시마에 살던 많은 조선인이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할머니네는 남아서 피폭, 가난과 싸웠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외삼촌을 찾기 위해서였다.   전화 속 할머니의 목소리는 밝았다.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G7(주요 7개국) 정상회담에 초대받은 윤석열 대통령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함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참배한다는 소식에 “정말 기뻤다”고 말했다. “그간 원폭 피해를 본 건 일본인만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양국 정상이 처음으로 참배하게 됐다”며 반겼다. 위령비 뒷면에 ‘약 10만명이 군인, 군속, 징용공, 동원학도, 일반시민으로 살고 있었다’고 새겨져 있는데, 이곳에 참배하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의미 있는 참배가 됐으면 한다”는 기시다 총리의 말대로 부디, 두 정상이 의미 있는 위로가 담긴 메시지를 내주길 바란다. 김현예 / 도쿄 특파원J네트워크 히로시마 지옥 히로시마 한국인 원폭 동원학도 일반시민

2023-05-18

고객센터 통화 어려워…‘환불용병’ 등장

최대 수 시간씩 전화통을 붙잡아도 상담사 목소리조차 듣기 어려울 정도로 기업들의 질 낮은 서비스가 악명높은 미국에서 고객 불만 사항을 대신 접수해 해결해주는 ‘용병 업체’가 등장해 주목받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26일 고객 불만 접수 서비스 대행 스타트업 '캐런구직중(Karens for Hire)'이 최근 고객몰이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업체는 기업 고객센터에 의뢰인 대신 전화를 걸어 환불·교환·행정처리 등을 해주고 평균 65달러를 받는다.   통화 연결음만 몇 시간씩 계속되는 ‘고객센터 지옥’에 질린 고객들이 더이상의 마음고생을 피하려고, 혹은 애초부터 그런 고통을 겪지 않으려고 캐런구직중을 찾는다고 WP는 보도했다.   회사 이름의 ‘캐런’은 미국의 온라인 속어다. 널리 쓰이는 평범한 이름이지만, 온라인에서 쓰이면 까탈스러운 백인 중년 여성을 조롱하는 의미가 된다.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당신네 상사 바꿔봐”라고 말하거나, 식당에서 막무가내로 “셰프 나오라고 해”라며 흥분하는 전형적인 특권층 백인 여성 이미지가 담긴 말이다.   캐런구직중의 회사 로고에는 ‘캐런’의 대표적 상징인 쇼트커트 머리가 그려져 있다. 홈페이지에는 “우리가 캐런 짓을 할 테니 여러분은 안 해도 된다”고 적혀 있다. 상대하기 껄끄러운 캐런을 한없이 듬직한 아군으로 삼으라는 유혹이다.   캐런구직중이 해결해주는 민원은 분야도 다양하다.   페이스북, 에어비앤비, 티켓마스터(예매), T모바일(이동통신사), 자동차 딜러사, 인터넷 공급자, 보험사, 이사 업체 등 온갖 업종에서 캐런구직중에 의뢰가 쏟아진다고 WP는 전했다.   한 고객은 보험사에 서류 한 장을 받겠다고 수십 차례 전화를 돌리다 캐런구직중에 의뢰를 결심했다. 캐런구직중은 소비자 단체와 함께 ‘보험회사가 제 돈도 안 드는 문제로 환자의 치료를 지연시킨다’는 내용의 트윗을 올려 보험사의 관심을 끌고 즉각 서류를 받아냈다.   끊임없이 전화를 피하던 인터넷 회사와 3년 동안이나 싸우던 한 가족은 캐런구직중에 의뢰한 직후 문제를 해결했다. 이 가족은 캐런구직중에 50달러를 지불했다고 한다.   WP에 따르면 캐런구직중은 현재 ‘유명 셰프에게 협찬한 옷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의류업체’, ‘등산을 좋아하는 남성을 소개해 달랬더니 여자 신발에 집착하는 남성을 소개해준 결혼정보회사에 환불을 요구하는 여성’, ‘이유도 없이 임대인에게 쫓겨난 싱글맘’ 등의 사건을 처리하고 있다.   소비자단체 소비자행동센터 관계자는 WP에 “요샌 대기업들이 사람들을 못되게 대우한다. 그런 기업에 ‘캐런’들을 한꺼번에 보내면 아마 기업들한테는 최악의 악몽일 것”이라고 말했다.고객센터 환불용병 고객센터 지옥 기업 고객센터 통화 연결음

2022-12-28

“시카고 다운타운 교통 지옥 될 것"

시카고 다운타운에 들어설 카지노를 두고 시민들의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교통 체증이 심각해질 것이라는 지적이다.           지난 5월 시카고 시청으로부터 카지노 설립권을 인가 받은 밸리스는 내년 임시 카지노를 우선 개장한다는 계획이다.     다운타운 리버 웨스트에 들어설 메인 카지노 건축에 앞서 임시로 기존 건물을 이용한 카지노를 오픈한다는 것이다.     임시 카지노의 위치는 메다이나 템플로 스테이트와 와바쉬, 온타리오, 오하이오길로 둘러싼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빈 건물이지만 예전에는 블루밍데일 백화점이 들어섰던 곳이다.     문제는 이 곳에 임시지만 카지노가 운영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주차난과 교통 체증이다.     온타리오와 오하이오길은 케네디 고속도로에서 나오거나 들어오는 주요 도로인 탓에 평소에도 교통량이 많은 곳이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 아워와 카지노 피크 시간이 겹치게 되면 인근 지역은 교통 지옥이 될 것이라는 게 지역 시의원의 주장이다.     카지노의 경우 대중교통수단이나 도보보다는 택시나 우버, 리프트와 같은 차량 공유 서비스를 타는 이용자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대형 전세 버스가 동시에 카지노에 도착할 경우 교통 체증은 크게 악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울러 메다이나 템플이 주차장을 확보하고 있지 않아 인근 주차 거라지와 거리 주차 시설을 활용해야 하는데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임시 카지노에 사람들이 붐빌 경우 주차난 역시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밸리스가 용역을 발주해 나온 교통 영향 평가에서는 임시 카지노로 인해 지역 교통난이 심각해질 정도는 아니라는 결과가 나왔다.     주중 462회, 주말 516회의 차량 운행이 카지노로 인해 증가한다는 것이 예측 결과였다. 또 주차 시설의 경우에도 인근 주차장을 통해 5000대를 주차할 수 있기 때문에 카지노에서 필요한 500대를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는 결과를 내놨다.     이에 대해 다운타운을 지역구로 하고 있는 브렌든 라일리 42지구 시의원은 이 평가서에 대해 “심각한 오류가 있으며 지나치게 모호하며 카지노가 메다이나 템플에 유리하도록 작성됐다"고 주장했다.     한편 뉴욕 출신 한인 수 김(한국명 김수형)이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인 밸리사의 메인 카지노는 2026년 중반 시카고강 북부 지류 서쪽에 위치한 시카고와 홀스테드길에 오픈할 예정이다.  Nathan Park 기자다운타운 시카고 시카고 다운타운 인근 주차장 교통 지옥

2022-10-04

[열린광장] 사랑과 구원의 밧줄

일본의 천재 작가 아꾸다가와 류노스께가 쓴 소설 ‘구모노 이도(거미줄)’ 는 인간의 양면성을 잘 보여준다.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매우 맑고 조용한 어느 날,  옥황상제가 극락의 연못가를 거닐고 있었다.  옥황상제가 걸음을 멈춘 다음, 연못을 가득 채운 구슬같이 아름다운 연꽃 사이로 문득 아래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  이 극락의 아래는 바로 지옥이었는데, 거기엔 간따다란 죄인이 옥황상제의 눈에 띄었다. 이 간따다는 살인까지 저지른 흉악범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날 깊은 숲속을 거닐다가 작은 거미 한 마리가 기어가는 것을 보고 밟아 죽이려다 “거미의 목숨도 목숨인데...”라고 생각을 고쳐먹고 거미를 살려준 일이다.     옥황상제는 연꽃 위에 작은 거미 한 마리가 은빛 거미줄을 걸고 있는 것을 보고 간따다를 살려줄 생각으로 은빛 거미줄을 잡아 아득히 아래에 있는 지옥으로 내려보냈다. 이때 지옥의 웅덩이에서 무심코 위를 쳐다본 간따다는 극락세계로부터 어둠을 뚫고 은빛 거미줄  한 가닥이 자기 머리 위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이 거미줄에 매달려 올라가면 지옥에서 빠져나와 극락세계까지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한 간따다는 재빨리 이 거미줄을  움켜쥐고 하늘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참 올라가다 아래를 내려다 보고 깜짝 놀란 간따다!  자기가 매달린 줄에 거미떼처럼 다른 죄인들이 매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야 이놈들아!  이 거미줄은 내꺼야!  모두 썩 내려가지 못할까!” 이렇게 소리 지르는 순간,  붇잡고 있던 거미줄이 딱 끊어지면서 간따다는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옥황상제는 흉악범이지만 거미 한 마리를 살려 준 사랑의 마음씨도 지닌 간따다를 살려주려 했었지만, 끝내 미움의 포로가 되고만 간따다는 옥황상제가 내려준 ‘구원의 밧줄’을 놓치고 만 것이다.   이 옥황상제의 ‘구원의 밧줄’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과 미움이 대위법처럼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에게 이로울 때는 천사가 되기도 하고 해롭다고 생각할 때는 미움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도 미움도  마음 속에 지닌 채,  그냥 체념하고 살아가기 마련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라!” 고 성서는 말한다.  제 자식일지라도 부모의 말을 듣지 않으면 미워하게 되는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한단 말인가! 이건 시쳇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이 성서 구절은 매우 깊은 뜻을 말해주고 있다. 곧, 부모가 자식을 미워할 때,  그것은 정말로 자식을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식을 미워한다고 할 때, 이것은 정말로 자식을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식이 하는 말과 행동이 미운 것이다. 이 말과 행동이 바뀌게 될 때 자식에 대한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게 된다.   많은 사람은 간따다처럼 실제로 살인죄는 저지르지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살인을 하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내가 현재 사는 삶이 ‘사랑의 천사’ 쪽인지 아니면  ‘미움의 노예’ 쪽인지를  살피면서 사는 것이 슬기로운 일일 것이다.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 증경회열린광장 사랑 구원 은빛 거미줄 이때 지옥 연꽃 사이

2022-09-25

[이 아침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저희 엊그제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사 왔어요.”   한동안 뜸했던 김 교수님에게서 온 소식이다. 교수님은 커뮤니케이션 분야 은퇴 교수로 파킨슨으로 고생하는 아내를 여러 해 동안  간호했다.     그러다 본인이 뇌졸중으로 1년 반 전 아들이 사는 근처 시애틀 요양원으로 갑작스레 들어갔다.     5명의 환자가 멤버인 개인 요양원으로 옮겼는데, 그곳의 삶에 채 적응도 하기 전  바로 건너편 방에 거주하던 NASA 엔지니어 출신 분이 들것에 실려 나가 영 돌아오지 않는 일을 목격했다고 한다.     5명 중 한 명이 숨졌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다음 날도 나머지 4명의 방으로 환자가 먹는지 마는지, 로봇처럼 세끼 밥그릇을 들여놓고 들고 나가는 로봇 하우스 같은 요양원. ‘지옥’ 과 다를 바 없다고 괴로워 하시던   그 열악한 요양원에서  얼마나 더 계셔야 하나,  멀리서 답답해하던 중 날아온 반가운 소식이다.     교수님이 그 ‘지옥’  같았던 요양원에서 이제까지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젊은 날의 꿈이었던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불편한 손으로 수많은 수채화를 그려내시며 삶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 지난여름에는 그분의  주옥같은 그림을 아끼던  미술 교수들의 주선으로, 은퇴 전 가르치셨던  마운트 버넌 나자린 대학교(Mount Vernon Nazarene University)와 고향 제주도 용담문화센터에서, ‘마지막 불꽃’ 이란  주제로 전시회도 가졌었다.   그분이 드디어 ‘천국’으로 이사하셨다는 소식이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의 생활을 도와주는 시설인 노세이븐 어시스트 리빙으로 들어가신 것.     40여 명이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3층 방 창문 밖으로  자동차들과 사람들이 왕래하는 것을 내다 볼 수 있고  밤에는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볼 수 있다고 감격해 하신다.     그곳에서 일하는 아프리카에서 온 나자렛과 인도에서 온 파마인더, 엘살바도르에서  온 제니퍼 등 천사같은 3명의 도우미들의 초상화와 함께 교수님의  미술 클래스가  스케줄에 들어간 팸플릿도 보내주셨다.     체크무늬 반소매 셔츠차림으로 회원들에게 그림을 가르치시는 교수님의 모습에서 그분의 열정적인 옛 모습이  확연하다.   언젠가는 우리가 모두 다 가야 할 길. 인생의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더는 정상적인 삶을 이어갈 수 없는 때가 올 것이고, 그때 더러는 노인단지를 거쳐 양로원의 삶을, 혹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요양원에서 서글픈 끝을 맺을 것이다.     교수님은 졸지에 요양원을 미리 경험하시고,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시설로 다시 되돌아오신 것.     지옥같은 삶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노세이븐 시설이 천국처럼 감격스러운 교수님. ‘천국’에 입성하신 것을 교수님과 함께 기뻐하며 ‘천국’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음미해 본다. 김찬옥 / 수필가이 아침에 지옥 천국 미술 교수들 개인 요양원 nazarene university

2022-07-25

재밌는 지옥과 심심한 천국 사이

최근 필자는 한국을 3주간 다녀왔다.   한국 여행의 후유증인지 내가 살던 미국이 낯설게 느껴진다. 시차 적응하랴 현실 적응하랴 몸과 마음이 피곤하다.   세월을 뒤돌아보면 미국에서 뼈를 묻으리라 결심하고 이민을 왔다. 그래서 더욱 이민생활에 정착하고자 하여 한국 드라마, 영화, 가요 등도 일부러 접하지 않았다. 그만큼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이제 애들이 커가며 대학에 들어가니 혼란스럽다.   ‘나는 왜 미국에 있는 것일까’ ‘더 잘 살기 위해서인가’ ‘애들 교육을 위해서인가’ ‘나의 자아실현을 위해서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나름 미국에서 이루고 싶은 것은 소소하게 이루고 나니 이제 미국 생활만이 길인가를 재고하게 된다.     한국에 나갈 때마다 이제는 한국이 더 잘 산다는 느낌이 든다. 집값도 한국이 더 높다. 거리에는 처음 보는 외제 차도 많다. 사람들의 옷차림이며 깨끗한 거리에서 최신 IT 서비스를 자연스럽게 누리며 사는 한국 국민이 너무 세련되어 보인다. 한국이 더 외국 같은 느낌이다.     미국에 살다 보면 땅덩이는 넓지만 사는 반경은 제한적이다. 한인과 주로 교제하고 한인교회에 다니며 한인 마켓에만 다니게 된다. 생활 반경이 영화 트루먼 쇼에 나오는 영화 세트처럼 뱅뱅 도는 느낌이다.     한국은 곳곳이 다 볼거리다. 감성 넘치는 힙한 카페들도 넘쳐난다. 문화 전시회, 미술관, 축제, 동네 행사 등 다양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있다. 게다가 마음껏 한국말을 쓸 수 있다는 점은 미국에서 언어로 인한 긴장감에서 해방될 수 있어 좋다.   다만, 한국에 3주째 있다 보니 사람들과 빽빽한 높은 건물로 서울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때마침 찾아온 장마도 하루 이틀 접하고 나니 이제는 남가주의 청명한 날씨가 그립다.   심화한 양극화도 문제다. 돈이 없으면 사람 취급을 못 받는 분위기다. 운전할 때 차선 변경 시 잘 끼워주지도 않는다. 어느새 같이 한국식으로 운전하게 되는 나를 보게 된다.   아파트에 몇 주 머무르다 보니 층간 소음이 뭔지 체감도 해봤다. 운전하다 보면 과속 카메라는 왜 이리 많은지 캘리포니아의 프리웨이가 그립다. 결국, 처음에는 좋았는데 몇 주 있어 보니 미국에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도 다시 한국이 그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제 한국 사람들은 잘살기 위해 미국에 오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교육도 입시학원에서 스펙을 쌓게 한 뒤 미국 대학에 곧바로 유학을 보낸다. 미국이 한국보다 월등히 잘 사는 시대는 지났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스타일로 살고 싶은가를 선택하는 시대가 됐다.     이제는 물리적인 국적보다는 나의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어느 환경에 맞는가로 사는 곳을 선택할 수 있는 시대다.   필자의 경우 이민 중 얻은 최고의 혜택은 미국에서 신앙이 자란 점이다. 한국에서 있었다면 음주와 사람을 좋아하던 내가 자기 성찰과 함께 하나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을까 싶다.     ‘주님, 지금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질 때다. 기존에 한인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이 타지에 어쩔 수 없이 정착할 숙명이었다면 이제는 노마드 적인 디아스포라의 의미도 고민해 봐야 한다.   [email protected] 이종찬 / J&B 푸드 컨설팅 대표지옥 천국 한국 드라마 한국 여행 한국 국민

2022-07-18

[이 아침에] 남은 밥 ‘한 숟가락’

 초등학교 2학년 때가 아닌지 싶다. 저녁 먹다가 밥을 남겼다. 아빠가 지금 북한에는 먹을 것이 부족해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다고 하시며, 밥을 버리는 것은 그 아이들에 대한 적절한 대우가 아니라고 했다.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던 나는 배곯은 채 자는 북한 아이들 몫까지 다 먹어야 했다. 배가 불러서 그날 밤에는 잠도 안 왔다.   학교에 갔다. 선생님은 지난번 시험에 ‘난 공산당이 싫어요’하며 숨진 어린이를 가수인 ‘이용복’이라고 쓴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며, 공책 한 장에 앞뒤로 ‘난 공산당이 싫어요’와 ‘숨진 어린이는 이용복이 아니라 이승복입니다’를 빼곡히 써서 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선생님은 가수 이용복의 왕팬이 아니었던가 싶다.     숙제를 제출하고 온 짝꿍이 심통 맞은 소리로 ‘나는 공산당이 싫어’라고 했다. 그날 아침 역시 밥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다 먹고 온 나도 지지 않고 ‘매일 저만 배부르게 먹고 불쌍한 어린이에게 밥도 안 주는 김일성이 나는 정말 싫어’라고 했다. 짝꿍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봤다.     여름 방학이 되어 외가에 갔다.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늘 가던 절에 가셨다. 할머니 친구인, 억센 이북 사투리의 호들갑스러운 공양주 보살을 난 참 좋아했다. 오랜만에 왔다며 싱글벙글 반기고는 밥공기 가득 밥을 퍼주었다. 나의 남은 밥을 보며 보살은 ‘쯧쯧쯧’ 혀를 차고 농부의 손이 88번을 가야 쌀 한 톨이 만들어진다며 힘들게 키운 것이니 다 먹으라고 했다.     곧이어 열 개가 넘는 지옥의 종류를 설명하면서 기이한 소리로 ‘날 살려주오~’라고 소리치며 손을 올려 허공을 잡는 시늉까지 하며 진짜 지옥에 갔다 온 사람처럼 말했다. 그리고 어떤 지옥은 내가 그동안 먹지 않고 버린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못 나온다고 엄포를 놓았다. 놀란 내가 밥을 꾸역꾸역 먹기 시작하자, 할머니가 보살에게 핀잔을 주며 나를 옆으로 끌어 앉히고 등을 쓰다듬으셨다. 눈물이 핑 돌았다. 깨끗하게 빈 밥공기를 보며 보살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몇 년이 지났다. 저녁 식사 시간에 밥을 조금 남겼다. 이제 북한의 식량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됐는지, 아빠는 아프리카에서 기아에 허덕이며 사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때 세계가 매우 불공평하다는 것을 알았다. 남은 밥을 싹싹 다 긁어 먹으며 남한에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 후로 여간하면 밥을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부른 배를 참아가며 먹다가 한계에 이르는 시점이 바로 마지막 한 숟가락이었다. 그것까지 먹을 때면 속이 더부룩하곤 했다. 하지만 식구들의 밥상을 직접 요리하면서부터 내가 만든 밥은 되도록 남기지 않는다.     오늘 저녁에 딸아이가 두어 숟가락 정도의 밥을 남겼다. 딸을 바라보며 배가 부르면 그만 먹으라고 했다. 버린 음식 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오염 문제와 쌀 농사짓느라 고생하는 농부들을 생각하며, 다음에는 밥이 많으면 먹기 전에 미리 덜어내라고 했다. 다행히 하나님을 믿기에 지옥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리나 / 수필가이 아침에 숟가락 숟가락 정도 지옥 이야기 가수 이용복

2022-03-09

[트렌드터치] 웰컴 투 더 헬

‘오징어 게임’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등장한 또다른 넷플릭스 오리지널 K콘텐트 ‘지옥’은 대중에 공개되기 전부터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평단의 극찬을 받으며 기대감을 높였다. 실제로 영상이 공개된 후 사람들은 지옥의 콘텐트에 강한 호불호를 나타냈고, 결과적으로 이슈몰이에 성공했다. 미지의 영(靈)으로부터 불쑥 고지받은 날짜와 시간에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설명 불가한 상황,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 앞에 혼란이 몰고온 광기로 미쳐가는 세상을 지옥에 빗댄 이 드라마의 성공요인은 초자연적인 소재와 범죄 장르의 성공적인 조합, 그리고 그에 걸맞은 강렬한 제목이다.   이와 함께 요즘 MZ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콘텐트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솔로지옥’이다. 커플이 되어야만 나갈 수 있는 외딴 섬 ‘지옥도’에 쭉쭉빵빵 건강한 솔로들을 모아 놓고 감정선의 변화를 그려내는 리얼리티 데이트쇼 ‘솔로지옥’은 예능 중에서는 처음으로 넷플릭스 전세계 순위 10위권에 등극했을 만큼 그야말로 화끈하다. 한번 보면 헤어나올 수 없어 마치 ‘개미지옥’에 갇힌 것 같다. 맞다. 여기에서도 지옥이라는 단어가 두번이나 등장한다.   필자에게 가장 인상적인 지옥은 ‘생각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지옥의 문’이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부분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지옥의 문’은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진 지베르니의 ‘천국의 문’에 대응하는 작품으로, 대형 조각의 면면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원죄에 대해 깊게 고찰하는 작가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핫한 콘텐트마다 등장하는 지옥들은 원래 가지고 있던 무게감과 두려운 어감에 더해 미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 하나의 놀이이자 문화로 승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살기 어려운 한국사회를 부정적으로 이르는 말인 ‘헬조선’부터 시작된 지옥이라는 워딩은 염세주의적 성향 자체를 오묘하게 즐기는 젊은이들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것이 미덕이었던 기성세대와 달리 즐길 수 없는 것은 피하는 이들은 현실은 지옥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기정사실이라면 즐기기 위해 적극적으로 희화화한다. 경험을 중시하며 늘 새로운 자극을 찾는다. 그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더 나아가 새로운 입맛을 만들기 위해 기획자들은 분주하다. 직접 경험해볼 수 없으면 간접적으로라도 대리경험을 하게 해준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나 나올법한 추억의 아이템들을 사 모으는 콜렉터들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4050이 아니라 의아하게도 10대 20대들이다. 필자는 2017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두고 과거를 돌아보는 노스텔지어에 기인한 레트로(Retro)가 아니라 살아보지 못한 과거를 새롭게 여기는 뉴트로(Newtro)라고 명명한 바 있다. 뉴트로는 디지털원주민이자 경험세대인 10대, 20대들이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아날로그 시절 한국의 콘텐트를 새롭고 신비하게 여기는 콘텐트로, 여전히 진행중인 트렌드다.   콘텐트 산업은 늘 새로운 걸 찾아 기획하며 높아진 연출력과 탄탄한 시나리오로 강한 유행을 만든다. 한 때 현대판 사극이 인기가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며, 시간이동에 대한 소재도 그렇고 셰프 및 최근의 골프 콘텐트가 그렇다. 그런데 이 지옥 아이템은 소재와 형태의 새로움을 넘어 염세적 성향을 전제로 세계관을 건든다. 종교관 및 가치관에 영향을 주는 세계관 중심의 콘텐트 전략을 섬뜩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Z세대 사이에서 말버릇처럼 쓰고 있는 ‘이생망’은 ‘이번 생은 망했어’의 약자다. 리셋증후군이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회자될 때도 우리는 이 부분을 염려했다.   현실과 가상을 오가며 멀티 페르소나를 만들어 놓고 각기 다른 나로 살아가는 MZ들은 망해버린 걸로 간주한 이번 생은 뒤로하고 가상에서의 나, 또다른 공간에서의 자아를 개발하는 데 바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메타버스, NFT, 블록체인 모두 같은 맥락상에 존재한다. 기성세대가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가상공간에서의 정체성은 무한대로 확장할 힘을 갖고 있다. 하루하루 벅차게 변해가는 사회환경 속에서 지옥이라는 컨셉이 콘텐트를 증폭시키는 시대, 우리는 지금 지옥이라는 단어가 트렌디한 세상에 살고있다. 이향은 / LG전자 고객경험혁신담당 상무트렌드터치 웰컴 염세주의 지옥 아이템 오리지널 k콘텐트 콘텐트 전략

2022-01-16

[기고] 드라마 ‘지옥’이 던진 질문

요즘 지옥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드라마 ‘지옥’을 본 사람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일어나고 있다. 나도 그 드라마를 몰아보면서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떠올렸다. ‘저게 말이 되나. 유아적 망상이야’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말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이비 종교, 공포정치 등이 연상돼서였다.   드라마 속 지옥은 권선징악을 상징하는데,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란 개념은 종교 안에서도 비슷하다. 지옥론이 종교계에서 거론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다.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하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당시에는 신자들이 문맹이기에 일명 지옥도라는 그림으로 가르침을 준듯하다. 지옥도는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불교계에도 있다.     드라마를 본 많은 이들은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떤 곳인지를 궁금해한다. 오래전부터 무신론자들은 지옥의 존재를 부인해 왔다. ‘지옥’과 ‘사랑이신 신’의 존재가 모순된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신이 자기 창조물을 지옥 불구덩이에 집어 던진다면 말이 안 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인생의 불공평성을 놓고 볼 때 지옥의 존재는 잔인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 세상은 태어날 때도, 살아가는 과정도, 죽을 때도 불공평한데, 이렇게 불공평한 세상에서 살다가 죽는 사람들을 단순한 잣대로 판단하여 지옥행을 결정한다면 그 자체가 잔인한 행위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대개 심리적으로 병적인 종교인이 만든 지옥론에 대한 반박이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지옥은 신이 인간을 버리는 곳이 아니라 신을 버린 인간들이 가는 곳이다. 어둠을 좋아하는 자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오히려 신은 자기를 버리고 떠난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그래서 성인들은 천당에 있지 않고 지옥에서 기도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다면 신이 지옥을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성장 과정에서 부모에게 학대받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지옥 같은 가정 안에서 살던 기억이 종교까지 연장돼 무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간이 신의 뜻을 거역하면 지옥으로 간다는 주장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데, 가장 심각한 것은 공포 신앙이다.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 중에 으뜸은 공포심이다. 군부 독재 통치를 겪어본 사람들은 공포정치가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안다. 위축된 자아, 정신적 질환,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의 불안감 속에서 인간성을 잃어간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공포신앙을 갖는 사람들은 스스로 노예 신분을 자처한다는 것이다. 즉 가학-피학적인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중세가톨릭은 지옥론으로 신자들을 통제하려 하였고, 이런 방법이 지금은 개신교 안에서 재현되기도 한다. 길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중세에 머무는 그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지옥론은 신자들을 노예화하지만 반대로 교주는 신격화한다. 자신이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판단자인 듯이 선민의식을 가진다. 자신에게 천국행 선발권이 있는 척하면서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이다. 신도들은 교주의 마음에 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고도 오히려 고마워하는 병적인 상태로 전락한다. 그러다 보니 드라마 속 ‘화살촉’ 같은 자들이 설친다. 근거 없는 도덕적 잣대를 휘두르면서 열등감과 권력욕을 채우려는 인간들이 생기는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는다. 이단이니 악마니 하며 마녀사냥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옥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미얀마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선량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자들을 보면서 지옥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만약 그런 자들을 보내는 지옥이 없다면 아무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영원히 구천을 떠돌아야 할 것이다. 미얀마에서 자국민을 학살하는 자들에게 지옥문이 열려서 드라마에 나오는 사자들이 데려가길 학수고대한다.   지금 사는 것이 지옥 같은 사람들에게 지옥은 저세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런 지옥살이를 면하게 해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홍성남 /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기고 드라마 지옥 지옥 불구덩이 요즘 지옥 사이비 종교

2021-12-27

[속풀이처방] 지옥

 요즘 지옥 이야기가 자주 회자한다. 드라마 ‘지옥’을 본 사람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일어나고 있다. 나도 그 드라마를 몰아보면서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떠올렸다. ‘저게 말이 되나. 유아적 망상이야’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말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이비 종교, 전두환 시절의 공포정치, 보안사와 제주 4·3 사건 등이 연상돼서였다.   드라마 속 지옥은 권선징악을 상징하는데,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란 개념은 종교 안에서도 비슷하다. 지옥론이 종교계에서 거론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다.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하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당시에는 신자들이 문맹이기에 일명 지옥도라는 그림으로 가르침을 준듯하다. 지옥도는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불교계에도 있는데, 불교계의 지옥이 더 다채롭게 표현된다.   드라마를 본 많은 이들은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떤 곳인지를 궁금해한다. 오래전부터 무신론자들은 지옥의 존재를 부인해 왔다. ‘지옥’과 ‘사랑이신 신’의 존재가 모순된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신이 자기 창조물을 지옥 불구덩이에 집어 던진다면 말이 안 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인생의 불공평성을 놓고 볼 때 지옥의 존재는 잔인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 세상은 태어날 때도, 살아가는 과정도, 죽을 때도 불공평한데, 이렇게 불공평한 세상에서 살다가 죽는 사람들을 단순한 잣대로 판단하여 지옥행을 결정한다면 그 자체가 잔인한 행위라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대개 심리적으로 병적인 종교인이 만든 지옥론에 대한 반박이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지옥은 신이 인간을 버리는 곳이 아니라 신을 버린 인간들이 가는 곳이다. 어둠을 좋아하는 자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오히려 신은 자기를 버리고 떠난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그래서 성인들은 천당에 있지 않고 지옥에서 기도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다면 신이 지옥을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성장 과정에서 부모에게 학대받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지옥 같은 가정 안에서 살던 기억이 종교까지 연장돼 무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간이 신의 뜻을 거역하면 지옥으로 간다는 주장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데, 가장 심각한 것은 공포 신앙이다.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 중에 으뜸은 공포심이다. 군부 독재 통치를 겪어본 사람들은 공포정치가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안다. 위축된 자아, 정신적 질환,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의 불안감 속에서 인간성을 잃어간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공포신앙을 갖는 사람들은 스스로 노예 신분을 자처한다는 것이다. 즉 가학-피학적인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중세가톨릭은 지옥론으로 신자들을 통제하려 하였고, 이런 방법이 지금은 개신교 안에서 재현되기도 한다. 길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중세에 머무는 그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지옥론은 신자들을 노예화하지만 반대로 교주는 신격화한다. 자신이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판단자인 듯이 선민의식을 가진다. ‘14만4000명’처럼 숫자로 사람들을 우롱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천국행 선발권이 있는 척하면서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이다. 신도들은 교주의 마음에 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고도 오히려 고마워하는 병적인 상태로 전락한다. 그러다 보니 드라마 속 ‘화살촉’ 같은 자들이 설친다. 근거 없는 도덕적 잣대를 휘두르면서 열등감과 권력욕을 채우려는 인간들이 생기는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는다. 이단이니 악마니 하며 마녀사냥을 한다.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지가 종교 안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옥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미얀마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선량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자들을 보면서 지옥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만약 그런 자들을 보내는 지옥이 없다면 아무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영원히 구천을 떠돌아야 할 것이다. 미얀마에서 자국민을 학살하는 자들에게 지옥문이 열려서 드라마에 나오는 사자들이 데려가길 학수고대한다.   지금 사는 것이 지옥 같은 사람들에게 지옥은 저세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런 지옥살이를 면하게 해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홍성남 /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속풀이처방 지옥 드라마 지옥 불구덩이 요즘 지옥 공포정치 보안사

2021-12-26

[살며 생각하며] 일체유심조

겨울을 지내야 푸른 솔의 지조를 알 수 있듯이 사람도 어려운 상황일 때 그 본색을 드러내고 그 지조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승가에서는 천상인간과 지옥 중생에게 똑같은 상황을 주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보는 가르침이 있다. 지옥에 있는 중생들에게 도저히 길어서 먹을 수 없는 숟가락을 주었더니 서로서로 먹겠다고 다툼이 일어나는 바람에 서로 먹지도 못하고 다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다시 똑같은 숟가락을 천상인간들에게 주었더니 스스로 먹기에는 너무 길어서 힘이 들므로 서로 상대방을 먹여주면서 모두 행복하게 잘 먹더라는 이야기이다.    원효 대사가 공부하려고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중 산속에서 밤에 목이 말라 바가지에 담긴 물을 먹었다. 아침에 보니 그것이 해골에 담긴 물이라는 걸 알고 구역질을 하게 된다. “해골에 담긴 물은 어젯밤이나 오늘이나 똑같은데 어이하여 어제는 다디단 물이었던 것이 오늘은 구역질을 나게 하는가. 어제와 오늘 사이에 달라진 것은 내 마음일 뿐이다. 진리는 결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 안에 있구나.”    원효 대사는 큰 깨달음을 얻어 당나라 유학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돌아온다. 이것이 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일체유심조는 〈화엄경〉의 핵심사상을 이루는 말로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라는 뜻이다. 같은 상황이라도 지혜와 덕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에 따라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여주는 가르침이다. 이렇듯 똑같은 상황이라도 우리가 마음 쓰기 여하에 따라 한순간에 지옥도 생겨날 수 있고 천상도 만들 수 있다.     낙엽 지는 호숫가에서 첫사랑을 속삭였던 이는 물만 보면 다정하고 아름다운 감정이 솟구친다. 즉 물에 대한 객관적이고 교과서적인 해석은 존재할 수 없다. 물은 결국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만약 지금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미움에 시달리는 이가 있다면, 옛 기억을 떠올려 보자. 죽을 것만 같았던 그 고통의 시간이 지금 와서 생각하면 모두 부질없는 번뇌 망상이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지금의 현실도 언젠가는 추억이 될 따름이다. 문제는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상념의 차이다.      일체유심조의 사례를 보면 삶의 중요한 공통분모가 하나 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동일한 주체가 공통적으로 ‘마음의 정리’가 전제된다는 점이다. 하는 일이 지지부진하고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면 행동반경도 줄어들고 생각 또한 어두워진다. 마음의 정리가 밝지 못하니 처세 또한 소극적이 된다. 그러다 생각지 않은 곳에서 극적으로 좋은 소식이 오면 상황은 급반전된다. 주체는 동일한데 단지 마음의 정리가 달랐을 뿐이다.      그러니 일이 잘 안 돤다고 안달복달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아내의 바가지에 괴로워하지 말라. 그것은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상사의 꾸지람에 노여워하지 말라. 그것은 내게 다닐 수 있는 직장이 있기 때문이다. 길이 막힌다고 화내지 말라. 그것은 내게 자동차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공부 못한다고 혼내지 말라. 그것은 내게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몸이 아프다고 한탄하지 말라. 그것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지금 어렵다고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 그것은 나중에 인생의 할 말을 당신에게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것이다. 아름다운 면으로 보면, 여전히 세상은 따스하다. 문제는 어느 쪽에 악센트를 두는가 하는 점이다. 시인 이채는 그의 시 ‘마음이 아름다우니 세상이 아름다워라’에서  아름다운 마음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이 없고 / 곱게 보면 꽃 아닌 사람이 없으되 / 내가 잡초가 되기 싫으니 / 그대를 꽃으로 볼일이로다 // 털려고 들면 먼지 없는 이 없고 / 덮으려고 들면 못 덮을 허물없는 이 없으되 / 누구의 눈에 들어가기는 힘들어도 / 그 눈 밖에 나기는 한순간이더라 // 귀가 얇은 자는 / 그 입 또한 가랑잎처럼 가볍고 / 귀가 두꺼운 자는 / 그 입 또한 바위처럼 무거운 법 / 생각이 깊은 자여 / 그대는 남의 말을 내 말처럼 하리라 // 겸손은 사람을 머물게 하고 / 칭찬은 사람을 가깝게 하고 / 넓음은 사람을 따르게 하고 / 깊음은 사람을 감동케 하니 // 마음이 아름다운 자여 / 그대의 그 향기에 세상이 아름다워라.    바람이 날카로운 것은 내 마음이 어수선한 탓이요 바람이 부드러운 것은 내 마음이 평화로운 탓이리. 사랑도 미움도 기쁨도 슬픔도 행복도 불행도 모두 한 길 마음에 달렸으되 맑지 못하니 스스로 고요하지 못하고 깊지 못하니 스스로 시끄러울 뿐이다. 행복은 오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 주위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덕분입니다'로 대하게 되면 그곳이 어디든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 천국에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을 천국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마음은 넓게 쓰면 온 우주를 다 덮을 수 있지만 좁게 쓰면 바늘 하나 꽂을 구멍도 안 생기는 것이 바로 마음이다. 마음은 팔 수도 살 수도 없지만 줄 수는 있는 보물이며, 아무리 퍼 주어도 줄지 않는 것이 또한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은 바로 육체와 영혼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로서 마음이 생각을 낳고, 생각이 바깥으로 나타나면 행동이 된다. 결국 내 생각은 조건화된 내 주관일 뿐이다. 괴롭다, 행복하다 등의 느낌은 단지 상황에 따라 일으키는 내 생각일 뿐이다.      세상 살아가는 일 많이 복잡한 것 같아도 나이 팔십을 넘고 보니 이제 좀 알 것 같다. 인생이란 본디 마음 농사짓는 일, 보이지 않는 마음 하나 잘 가꾸어 가는 일이라는 걸. 사랑과 우정 삶의 기쁨과 행복과 보람, 따뜻한 이해와 용서도 결국 마음의 일이 아닌가.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에 이제 얼마쯤 남았을 나의 생, 거추장스러운 것 미련 없이 가지치기하고 그저 마음의 집 하나 정성껏 지어야겠다.   해가 갈수록 더해지는 육체의 나이는 어쩔 수 없지만 마음만은 영원히 젊어야 한다. 육체의 눈은 나이가 들수록 어두워지지만 마음의 눈은 다르다. 이를 사리 분별력 또는 지혜라고 해도 좋다. 세상을 보는 눈을 밝게 갖도록 애쓰자. 그리고 가급적 내 말은 줄이고 남의 말 많이 듣자. 다만 행동은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이야말로 멋지게 늙어가는 자세가 아닐까. 김건흡 / MDC시니어센터 회원일체유심조 생각 우리들 마음속 마음 하나 지옥 중생

2021-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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