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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네트워크]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의 ‘피카돈’

공습경보 해제 소식에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초등학교 5학년, 3학년생인 두 동생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하늘이 참으로 맑았다.  
 
노면 전차에 올랐다. 서쪽으로 한 20m 달렸을까, 희미한 폭음이 들려왔다. 고함이 터져 나왔다. “빨리 전차에서 뛰어내려!” 어디선가 후끈후끈한 불덩어리가 다가오는 듯했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어둑어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어두워진 아침이 참 신기하단 생각마저 들었다. 조금 밝아지니 타고 있던 전차의 앞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전차는 불타 버린 상태였다. ‘가스탱크가 폭발했나 보다’란 이야길 누군가 했지만 믿기 어려웠다. 조금 더 밝아졌을 땐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거리의 건물들은 모두 무너져있었다.  
 
어른들이 감싼 덕에 무사했던 두 동생의 손을 잡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무너진 건물 잔해에 막힌 길. 집에 가는 것조차 험난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일본 히로시마(?島)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그렇게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박남주(91) 할머니의 인생을 뒤엎었다.
 


재일동포 2세인 박 할머니가 있던 곳은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에서 1.9㎞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히로시마의 밤은 며칠이 되도록 새빨갰다. 피폭당한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며 입에 올린 단어는 물. 박 할머니는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비참하고도 잔인한 지옥, 히로시마는 지옥이었다”며 몸서리쳤다.  
 
이웃집 동급생 남자아이, 토미코 언니 가족은 그날 이후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안부 인사처럼 이렇게 말했다. “피카돈에서 살아남았구나!” 우리 말로 하면 ‘번쩍(피카) 쾅(돈)’이란 뜻이다. 히로시마에 살던 많은 조선인이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할머니네는 남아서 피폭, 가난과 싸웠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외삼촌을 찾기 위해서였다.
 
전화 속 할머니의 목소리는 밝았다.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G7(주요 7개국) 정상회담에 초대받은 윤석열 대통령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함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참배한다는 소식에 “정말 기뻤다”고 말했다. “그간 원폭 피해를 본 건 일본인만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양국 정상이 처음으로 참배하게 됐다”며 반겼다. 위령비 뒷면에 ‘약 10만명이 군인, 군속, 징용공, 동원학도, 일반시민으로 살고 있었다’고 새겨져 있는데, 이곳에 참배하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의미 있는 참배가 됐으면 한다”는 기시다 총리의 말대로 부디, 두 정상이 의미 있는 위로가 담긴 메시지를 내주길 바란다.

김현예 /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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