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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히로시마·나가사키> 한인 피해자들 LA 온다…17·18일 간담회서 실상 증언

78년 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한국인 피해자 1, 2세들이 실상 증언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다.     한국의 원폭 피해자 단체 및 지원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방미증언단 5명은 13일부터 12월 2일까지 LA를 비롯해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DC 등을 방문, 핵무기 금지와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또한 뉴욕에서 개최될 TPNW(핵무기금지조약) 회의와 캠페인 등에도 참가해 핵무기반대 운동의 중요성을 지지하고 핵무기 없는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목소리를 낼 계획이다.     방미증언단 단장인 이대수 아시아평화시민넷(ACNP) 대표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한 지 78년이 지났지만, 살상 파괴력과 피폭의 후유증이 유전되고 있다”며 “방사능이 유전자에 영향을 주어 2세, 3세, 나아가 4세까지도 각종 질환의 고통이 대물림되는 사례들이 드러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핵과 인류는 공존할 수 없다”며 “미국 정부는 핵무기 투하 78년이 지나도록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 않고 있다. 이번 방미를 통해 그날의 참상과 진실을 알리고자 한다”고 밝혔다.     원폭 피해자 1세 심진태씨는 “일본의 강제노역 당시 부모님을 따라 히로시마를 갔고 거기서 피폭을 당했다”며 “이 세상에 더는 핵무기가 없어야 한다. 미래 세대들에게 핵에 대한 위협, 평화교육의 중요성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방미증언단은 오는 17일(금) LA에 도착해 18일(토) 오후 2시 한인 노숙인 쉼터(대표 김요한 신부·2251 W 21st St, Los Angeles)에서 간담회를 열고 원자폭탄 피해 실상을 증언한다.     김요한 신부는 “피폭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팠고 한인들도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내용인 거 같아 장소를 제공하게 됐다”며 “누구든지 오셔서 격려와 위로를 해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의: (323)244-8810 김요한 신부, (310)494-563 스텔라 박 장수아 기자 jang.suah@koreadaily.com원자폭탄 히로시마 방미증언단 5명 한인 노숙인 한국인 원폭

2023-11-14

[J네트워크] 전술의 시간

“히로시마 선언은 어떻게 중국과 관계 맺을 것인가를 ‘파트너’ 국가들과 깊이 상의한 결과다. 지난 2년 반의 시간을 통해 핵심 이슈에서 일치된 결론을 얻었다. 간단한 일차원적인 정책이 아니다. 진정 중요한 나라(중국)와 복잡한 관계를 맺기 위한 다차원의 복잡한 정책이다.”   지난달 20일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히로시마에서 말했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의 키워드다. G7, 쿼드, 오커스, 파이브 아이즈, 한·미·일까지 중국을 견제할 합종의 네트워크를 구축한 설리번이 중국 다루기의 복잡함을 인정했다. 과거 진(秦)의 굴기(?起)를 저지했던 외교가 소진(蘇秦)의 마음가짐 역시 비슷했다.   G7이 중국에 노회한 접근법으로 무장했다. 지난해 독일 엘마우 G7 선언과 일본 히로시마 선언은 ‘글로벌 웨스트’의 중국 전략이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우선 성명 분량. 영문 28페이지에서 40페이지로 늘었다. ‘중국’은 14회에서 20회로 늘었다. ‘민주주의·민주국가·민주적’이란 단어는 23회에서 18회로 줄었다. ‘법의 지배’는 4회에서 6회로, 유엔헌장이 1회에서 5회로 늘며 규칙 기반을 강조했다. 1년 전 36회 등장했던 ‘파트너’가 66회로 대폭 늘었다. 한국을 비롯해 인도·브라질·베트남 등 ‘동반자’ 국가와 연대가 필수인 다차원의 시대로 이행했다는 방증이다. G2만의 시대가 아니다.   중국을 상대하는 방식도 입체화됐다. 지난해 없던 ‘하나의 중국’이 포함됐다. 중국을 배려했다. 중국과 “건설적이고 안정적인 관계 구축”을 명시했다. 디커플링이 아니라 디리스킹(위험제거)이라고 못 박았다.   미·중의 행보도 달라졌다. 지난달 8일 중국의 외교부장과 상무부장이 함께 니컬러스 번스 주중 미국 대사를 만났다. 이어 미·중 외교 사령탑인 설리번과 왕이(王毅)가 10~11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8시간 회동했다. 21일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과 ‘해빙(thaw)’을 말했다. 같은 날 번스 대사는 청두(成都)에 도착했다고 트위터에 알렸다. 2020년 휴스턴과 함께 총영사관을 상호 폐쇄했던 도시다. 미국 총영사관 재개관설이 나온다.   중국 역시 변했다. 지나달 23일 5개월여 공석이던 주미 대사에 셰펑(謝峰) 부부장(차관)이 부임했다. 류젠차오(劉建超) 대외연락부장은 이날 미·중 정당 대화에 참석했다. 번스 대사는 셰 대사와 지난 14개월 동안 23번 만났다고 공개했다. 한국 내 담론은 여전히 친미·친중, 공중증(恐中症)에 머문다. 이제 전술이 절실한 시간이다. 중국을 상대할 필드 매뉴얼부터 축적하자. 신경진 / 베이징 총국장J네트워크 전술 시간 히로시마 선언 번스 대사 주미 대사

2023-06-02

[독자 마당] 히로시마의 기억

1946년 이른 봄이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을 앞둔 아버지는 친지 몇분과 원폭 현장인 히로시마에 갔다. 그때 아버지는 겨우 8살이던 나를 데리고 가 전쟁의 참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셨다.     내 눈에 비친 히로시마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대도시가 완전히 폐허로 변해있었다. 무너지고 타버린 수많은 건물, 인적은 끊겨 살벌함 마저 느껴졌다.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폐허의 땅, 그 안에는 수많은 희생자가 있었다. 그 가운데 일본으로 끌려와 억울하게 희생된 한국인도 2만여 명이나 됐다. 전체 희생자의 13%나 차지하는 숫자다. 희생자 가운데는 일본 정부의 회유에도 끝까지 저항하던 의친왕의 차남 이우도 있었다.   일본인들은 패전 후 희생된 자국민들을 위한 추모비를 세웠지만 한국인 희생자들은 제외됐다. 일본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한국인 추모비를 세우려고 동분서주 했지만 추모공원 안에는 자리를 주지 않아 외곽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무려 29년의 세월이 흐른 1999년에야 현 위치로 옮겨졌다.     당시 시민들은 원폭의 피해와 그 규모, 후유증 등에 대해 이해도 하지 못했고,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저 위력이 상당히 큰 폭탄 한 발이 거대한 도시 하나를 통째로 날려보낸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일부 과학자들은 땅도 공기도 녹인 원자폭탄이 터진 곳으로부터 반경 얼마까지는 5년 안에 풀 한 포기 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다음 해 봄에 쑥이 자라났다고 했다. 쑥의 생명력이 경이로울 따름이다.     이런 히로시마에서 얼마 전 선진국들의 모임인 G7 정상회의가 열렸고, 대한민국의 대통령도 회의에 참석해 의미가 컸다. 이제 전쟁은 없어야 한다. 전쟁의 승자인들 피해가 없겠는가. 전쟁은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피해가 따르는 일이다.   노영자 / 풋힐랜치독자 마당 히로시마 기억 한국인 희생자들 한국인 추모비 희생자 가운데

2023-05-30

[J네트워크] 히로시마에 그들이 있었다

“경남 합천에 있는 원폭자료관에 가본 적이 있나요? 한국인 중에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더군요.”   87세 어르신의 질문에 마음이 뜨끔했다. G7 정상회의가 열리던 지난 20일, 히로시마(?島)에서 만난 도요나가 게이사부로(豊永?三?)씨다. 명함에는 ‘한국의 원폭 피해자를 돕는 시민의 모임 활동가’라고 적혀 있다. 아홉 살에 원폭 피해를 당한 그는 한국과 미국, 브라질 등 일본 밖에 있는 원폭 피해자들의 권리를 찾는 일에 지난 50년을 바쳐 왔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長崎)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피폭을 당한 후 한반도로 돌아온 사람은 약 4만30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강제 징병이나 징용, 취업 등으로 일본에 머물던 이들이다.     현지에 남은 한국인 피폭자들은 1957년 일본 정부가 제정한 ‘원폭피해자지원법’에 따라 피폭자 수첩 및 의료 지원 등을 받을 수 있었지만, 해방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한 이들은 지원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한국에는 원폭의 실상조차 알려지기 전, 이들은 양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건강 악화와 경제적 곤란, 차별 등과 싸워야 했다.   1967년에야 한국인원폭피해자협회가 만들어졌다. 1970년 히로시마 피폭자인 손진두(1927~2014)씨가 목숨을 걸고 밀항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국에 있는 원폭 피해자들에게도 피폭자 수첩을 발행해 달라는 소송을 시작했다. 이런 손씨를 돕기 위해 1972년 만들어진 단체가 ‘한국의 원폭 피해자를 돕는 시민의 모임’이다. 이들의 지원에 힘입어 손씨는 1978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승소했다.   국어 선생님이던 도요나가씨는 1970년대 초 교원 연수로 방문한 한국에서 피폭자를 만난 걸 계기로 활동을 시작했다. “함께 피폭을 당했는데 전쟁이 끝나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는 이유로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손씨의 승소 이후로도 오랜 기간 한국의 피해자들은 일본을 직접 방문해 피폭자 수첩을 신청해야 하는 등 지원을 받기 힘든 상황이 이어졌다.     피폭자들이 국내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고 적십자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의료비를 받는 현재의 절차가 안정되기까지 많은 일본인 활동가들이 함께 싸웠다.   G7 마지막 날인 21일 한·일 정상이 함께 ‘한국인원폭희쟁자위령비’를 참배한 것은 이들에게도 의미가 있었다. 도요나가씨는 “(공동 참배는) 이미 했었어야 할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참배는 여정의 ‘마무리’가 아닌, 아직도 진행형인 피폭자의 고통에 주목하는 ‘시작’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는 일본인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영희 / 도쿄특파원J네트워크 히로시마 피폭자 수첩 원폭 피해자들 기간 한국

2023-05-23

[J네트워크]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의 ‘피카돈’

공습경보 해제 소식에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초등학교 5학년, 3학년생인 두 동생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하늘이 참으로 맑았다.     노면 전차에 올랐다. 서쪽으로 한 20m 달렸을까, 희미한 폭음이 들려왔다. 고함이 터져 나왔다. “빨리 전차에서 뛰어내려!” 어디선가 후끈후끈한 불덩어리가 다가오는 듯했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어둑어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어두워진 아침이 참 신기하단 생각마저 들었다. 조금 밝아지니 타고 있던 전차의 앞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전차는 불타 버린 상태였다. ‘가스탱크가 폭발했나 보다’란 이야길 누군가 했지만 믿기 어려웠다. 조금 더 밝아졌을 땐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거리의 건물들은 모두 무너져있었다.     어른들이 감싼 덕에 무사했던 두 동생의 손을 잡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무너진 건물 잔해에 막힌 길. 집에 가는 것조차 험난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일본 히로시마(?島)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그렇게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박남주(91) 할머니의 인생을 뒤엎었다.   재일동포 2세인 박 할머니가 있던 곳은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에서 1.9㎞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히로시마의 밤은 며칠이 되도록 새빨갰다. 피폭당한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며 입에 올린 단어는 물. 박 할머니는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비참하고도 잔인한 지옥, 히로시마는 지옥이었다”며 몸서리쳤다.     이웃집 동급생 남자아이, 토미코 언니 가족은 그날 이후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안부 인사처럼 이렇게 말했다. “피카돈에서 살아남았구나!” 우리 말로 하면 ‘번쩍(피카) 쾅(돈)’이란 뜻이다. 히로시마에 살던 많은 조선인이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할머니네는 남아서 피폭, 가난과 싸웠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외삼촌을 찾기 위해서였다.   전화 속 할머니의 목소리는 밝았다.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G7(주요 7개국) 정상회담에 초대받은 윤석열 대통령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함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참배한다는 소식에 “정말 기뻤다”고 말했다. “그간 원폭 피해를 본 건 일본인만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양국 정상이 처음으로 참배하게 됐다”며 반겼다. 위령비 뒷면에 ‘약 10만명이 군인, 군속, 징용공, 동원학도, 일반시민으로 살고 있었다’고 새겨져 있는데, 이곳에 참배하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의미 있는 참배가 됐으면 한다”는 기시다 총리의 말대로 부디, 두 정상이 의미 있는 위로가 담긴 메시지를 내주길 바란다. 김현예 / 도쿄 특파원J네트워크 히로시마 지옥 히로시마 한국인 원폭 동원학도 일반시민

2023-05-18

[J네트워크] 1인치 장벽을 넘는 또 다른 방식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이 원작인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원작에는 없는, 하지만 퍽 인상적인 설정이 나온다. 연극 연출가 겸 배우인 주인공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연극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다.     히로시마 연극제의 초청을 받은 그가 현지에 두 달간 머물며 준비하는 작품은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연극 팬들에게 친숙한 작품인데, 가후쿠의 연출은 오디션 장면부터 독특하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온 배우들이 각자의 모국어로, 각자에게 가장 편한 언어로 맡고 싶은 배역의 대사를 선보이게 한다.   이런 다중언어 공연 장면은 영화 초반에도 잠시 등장한다. 이번에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다. 무대 위의 두 배우는 서로 다른 언어로 연기하고, 뒤편 스크린에는 관객을 위해 두 언어가 자막으로 흐른다. 두 배우의 연기가 워낙 자연스러워서 다른 언어로 연기한다는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가후쿠다.     그의 이런 작업 방식은 주변에도 널리 알려진 듯, 영화 속에선 그 누구도 이에 대해 굳이 물어보지 않는다.   “자막이라는 1인치 정도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2년 전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받으면서 한 말이다.   ‘기생충’은 미국 관객들이 자막을 읽어야 하는 외국어 영화를 싫어한다는 통념을 보기 좋게 깨뜨렸다. 미국을 비롯해 세계적인 화제작이 됐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작품상 등 4관왕에 올랐다.   연극이라고 자막과 함께 즐기지 말라는 법은 없는데, ‘드라이브 마이 카’의 다중 언어는 그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연극배우들은 지루한 대본 읽기를 반복한다. 모르는 언어로 상대가 읽는 대사를 듣고, 자신의 언어로 대사를 읽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서로의 연기가 강렬하게 어우러지는 놀라운 케미를 경험한다.   연극배우들은 사실 이 영화의 조연일 뿐. 이 영화는 크나큰 상실과 고통을 겪고 소통의 장벽 안에 자신을 가둬둔 인물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연극 연습을 하던 배우들이 그랬듯, 단순하고 반복적인 교류 끝에 마치 방언 터지듯 서로의 이야기를 펼쳐 놓고, 서로에게 귀 기울이는 놀라운 순간을 맞이한다. 뛰어난 영화감독은 어쩌면 인간의 감정에 대한 좋은 통역자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 영화의 공동각본가이자 연출자인 하마구치 류스케가 바로 그런 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본래 부산에서 촬영할 뻔했다. 감독은 가후쿠가 부산의 연극제에 초청을 받아 공연을 준비한다는 설정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했지만, 코로나19 때문에 로케이션이 힘들어지자 지금처럼 히로시마로 바꿨다고 한다. 영화 마지막에 짧게 등장하는 한국 장면은 그 아쉬움을 조금은 달래준다. 이후남 / 한국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J네트워크 장벽 방식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다중언어 공연 히로시마 연극제

2022-01-13

[영화몽상] 1인치 장벽을 넘는 또 다른 방식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이 원작인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원작에는 없는, 하지만 퍽 인상적인 설정이 나온다. 연극 연출가 겸 배우인 주인공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연극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다. 히로시마 연극제의 초청을 받은 그가 현지에 두 달간 머물며 준비하는 작품은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연극 팬들에게 친숙한 작품인데, 가후쿠의 연출은 오디션 장면부터 독특하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온 배우들이 각자의 모국어로, 각자에게 가장 편한 언어로 맡고 싶은 배역의 대사를 선보이게 한다.   이런 다중언어 공연 장면은 영화 초반에도 잠시 등장한다. 이번에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다. 무대 위의 두 배우는 서로 다른 언어로 연기하고, 뒤편 스크린에는 관객을 위해 두 언어가 자막으로 흐른다. 두 배우의 연기가 워낙 자연스러워서 다른 언어로 연기한다는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가후쿠다. 그의 이런 작업 방식은 주변에도 널리 알려진 듯, 영화 속에선 그 누구도 이에 대해 굳이 물어보지 않는다.   “자막이라는 1인치 정도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2년 전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받으면서 한 말이다. ‘기생충’은 미국 관객들이 자막을 읽어야 하는 외국어 영화를 싫어한다는 통념을 보기 좋게 깨뜨렸다. 미국을 비롯해 세계적인 화제작이 됐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작품상 등 4관왕에 올랐다.   연극이라고 자막과 함께 즐기지 말라는 법은 없는데, ‘드라이브 마이 카’의 다중 언어는 그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연극배우들은 지루한 대본 읽기를 반복한다. 모르는 언어로 상대가 읽는 대사를 듣고, 자신의 언어로 대사를 읽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서로의 연기가 강렬하게 어우러지는 놀라운 케미를 경험한다.   연극배우들은 사실 이 영화의 조연일 뿐. 이 영화는 크나큰 상실과 고통을 겪고 소통의 장벽 안에 자신을 가둬둔 인물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연극 연습을 하던 배우들이 그랬듯, 서로에게 귀 기울이는 놀라운 순간을 맞이한다. 뛰어난 영화감독은 어쩌면 인간의 감정에 대한 좋은 통역자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 영화의 공동각본가이자 연출자인 하마구치 류스케가 바로 그런 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본래 부산에서 촬영할 뻔했다. 감독은 가후쿠가 부산의 연극제에 초청을 받아 공연을 준비한다는 설정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했지만, 코로나19 때문에 로케이션이 힘들어지자 지금처럼 히로시마로 바꿨다고 한다. 이후남 / 한국 문화선임기자영화몽상 장벽 방식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다중언어 공연 히로시마 연극제

202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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