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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별난 세상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내 어렸을 적만 해도 의업은 인기 없는 직업군이었다. 기껏 남의 종기를 째고 고름을 닦아주는 천직(?) 이어서일까?  양반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기에 의업은 원래 중인이나 궁녀들이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한데 요즘 세상은 너도나도 의사가 못돼 난리 치는 천지개벽의 ‘별난’ 세상이다.   하기야 그 당시엔 의사뿐만 아니라 배우나 가수조차도 ‘딴따라’ 꾼이나 광대로 취급받던 호랑이 담배 먹던(?) 세대였다. 신분제가 유별난 그 당시엔 괜찮은 집안에선 으레 국가의 녹을 먹어야 가문의 명예를 높이는 일로 여겨, 너도나도 벼슬길로 나가야만 사람대접받던 그런 세상이었다.   1960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과대학에 입학한 내가 고향을 찾아가 큰아버지께 인사를 드렸을 때 듣게 된 첫마디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아깝구나. 가문을 빛내야 할 녀석이 기껏 남의 종기나 짜주는 하찮은 중인의 일을 배우려 하다니…, 어~험,  어허엄!’   혀를 차시던 노기 띤 백부의 실망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실은, 양반 집안에서 ‘입신양명’만이 삶의 목표임을 서너살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 왔기에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처음부터 법대 지망 ‘인문계’ 반에서 공부했다. 더욱이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선생의 재당질로, 그분이 낳고 자란 바로 그 집에서 나도 낳고 자랐기에 법조인이 되고 싶은 꿈이 어렸을 적부터 남다르게 컸다.   공부를 잘했던 탓에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나는 광주일고 전교 문예반장에 천거됐다. 당시 고3은 대학입시 준비로 2학년이 대신 맡았었다. 당시 내 전임 문예반장은 후에 서울대 독문학과에 들어가 정식으로 문학을 공부하여 문학의 길을 걸었던 이청준 작가였다.   덕분에,  나는 고2 일 년 간을 방학 동안에도 학교 도서관에서 학교 공부 대신 수백권의 문학 서적을 읽느라고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책에 빠져 버렸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읽었던 책 한권이 내 인생을 바꿔 놓았다.   그 책이 바로 춘원 이광수가 쓴 ‘사랑’이다. 그 책에 나온 주인공 의사 안빈 박사의 숭고한 삶이 너무 좋아 나도 의사가 되고 싶어 고3에 올라가면서 갑자기 법대 지망 인문계 반에서   의대 지망 이공계로 인생 항로를 바꾸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은, 소설 속 주인공인 안빈 박사의 실제 모델이 평양의대와 서울의대 교수를 역임한 장기려 박사라는 것이었다. 장 박사는 6·25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서 오갈 데 없는 수많은 환자에게 인술을 펼친 분이었다. 너무나 너무나 감회가 깊었다. 자기가 수술해 살려낸 가난한 환자가 며칠 후, 이제는 퇴원해도 된다는 의사의 말에 기쁨보다는 내야 할 치료비 때문에 더욱 고뇌하는 모습을 본 의사는 “내가 오늘 밤 병원 창문 한 곳을 열어 놓을 것이니 아무 생각 말고 조용히 빠져나가 집에 가세요”라고 말했다.     한 사람의 숭고한 삶은 춘원 이광수를 감동하게 해 ‘사랑’이라는 문학 작품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 소설은 또 수많은 독자를 감동케 했고 그중 하나인  나의 인생 항로도 바꾸어 놓았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고, 문학이 지닌 ‘힘’이다.     한데, 이제 ‘별난’ 세상이 돼 버렸다. 그토록 천시받던 의사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전국의 고등학교 3학년생 가운데 성적 1등에서 3000등까지 모두 의대로 몰리고, 혹시 자녀가 의대에 합격이라도 하면 가문을 빛낼 과거급제인양 떠벌리는 묘한 세상이 돼 버렸다. 그뿐인가! 집안 망신이라고 쉬쉬하던 가수나 배우 등 소위 딴따라가 집안의 자랑거리로 대접받는 세상이니, 이건 분명 도깨비 요술방망이 장난 같은 별난 세상이다.     천시받던 의술이 존경을 받고, 딴따라가 예술인으로 인정받는 별난 세상이 되어 기쁜 마음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도 왜 그런지 마음 한구석이 싸늘한 느낌이다.  혹시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집단 진료거부를 내세워 정부와 대립하는 듯 보이는 의료인들에게서 장기려 박사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들의 짝사랑 때문일까? 김재동 / 의사·수필가문예마당 수필 주인공 의사 서울대 독문학과 고등학교 2학년

2024-12-05

[열린 광장] ‘파란 H’의 삶과 ‘빨간 H’의 삶

사람의 속마음처럼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부부라도 속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지내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까지 생겨났을 거다.   우리 주위에는 이른바 지도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많다. 지도자란 거짓말보다는 참말을 해야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나다니엘 호돈의 소설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에는 딤즈데일이란 목사가 남자 주인공이다. 젊고 아름다운 여주인공 헤스터는 나이 많은 의사 남편을 찾기 위해 보스턴에 왔지만 그를 찾지 못하고 젊은 딤즈데일 목사와 사랑에 빠져 딸까지 낳게 된다. 그러나 헤스터는 젊고 유망한 딤즈데일을 매장할 수 없어 스스로  감옥에 간다. 이후 딤즈데일은 7년이란 세월을 밤낮으로 깊이 생각하고 헤아리는 ‘주사야탁(晝思夜度)’의 삶을 살다 끝내 양심의 가책으로 죽음을 선택한다.   빅토르 위고가 쓴 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의 주인공 장발장은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감옥생활을 한다. 형기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오지만 전과자인 그를 반기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좌절과 분노가 거의 터질 무렵, 미리엘 신부를 만나게 되고 은촛대를 얻게 된다. 그는 늘 이 은촛대를 지니고 다니면서 미리엘 신부의 말을 되새긴다. 그러다가 그는 인공 진주를 발견해 큰 부자가 됐고 ‘마드렌느’란 이름으로 시장까지 된다. 그런데 장발장 사건을 다뤘던 자벨 경감은 마드렌느 시장이 장발장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자벨 경감은 마드렌느 시장 덕에 목숨을 건지게 된다.  자벨 경감은 장발장의 인격 앞에 고민하다 센강에 몸을 던지고 만다.   두 소설의 주인공은 H로 시작하는 대조적인 의미의 두 프랑스어 낱말과 같은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어 Honnetete(정직)과 Hypocrisie(위선)이다. 색으로 파란색은 정직을, 빨간색은 위선을 상징한다. ‘파란 H’의 삶을 살던 딤즈데일 목사는 ‘빨간 H’의 삶으로 죽음을 맞게 되고, ‘빨간 H’의 삶을 살던 장발장은 ‘파란 H’의 삶으로 훌륭한 지도자가 된다. 죄인이던 장발장은 올바른 지도자가 되었고, 거짓말만 하던 목사 딤즈데일은 불쌍한 사람이 된 것이다.     요즈음 이스라엘에 관한 목사들의 설교를 가끔 듣는다. 구약 성서에 나와 있는 대로 이집트를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매우 자랑스럽게 설교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이런 설교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이스라엘이란 낱말을 들을 때마다 매우 부정적인 생각이 앞선다. 성서적인 설교가 오늘의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빨간 H’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사람은 거짓 없이 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좋은 뜻의 거짓말이라도 하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도자라면 ‘순청색 정직’ 을 택하는데 ‘참정절철(斬釘截鐵, 결단성 있게 일을 처리함)’ 해야 한다. 그러면 저 푸른 하늘처럼 ‘파란 H’를 가슴에 깊이 새겨 넣은 지도자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윤경중 / 목회학박사·연목회 창설위원열린 광장 주인공 장발장 여주인공 헤스터 프랑스어 낱말

2024-11-05

‘K-드라마'로 정신건강 열쇠 찾는다...애틀랜타 방문한 상담치료사 지니 장

여행사 설립, 드라마 촬영지 투어도   이민 2세는 궁금하다. 한국에 살던 우리 부모의 모습은 어땠을까. 고국을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내가 한국에서 자랐다면 어떤 모습일까. 부모가 잊은 이 질문에 답해주는 건 한국 드라마다. ‘응답하라 1988’에서 40년 전 엄마의 학창시절을 그려보고, ‘미생’에서 한국 직장 문화를 엿본다. ‘갯마을 차차차’를 통해 경북 포항이라는 낯선 어촌마을에서의 생활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한인 2세 지니 장(한국명 장유진) 결혼·가족상담치료사(LMFT) 겸 임상심리전문가(CCTP)가 저서 ‘K-드라마가 당신의 삶을 바꾸는 방법’을 들고 조지아주 애틀랜타를 찾았다. 1992년 18세의 나이에 드라마 ‘질투’를 보고 최진실 배우를 롤모델로 삼았다는 그는 1980년대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사였던 배창호 감독의 조카이기도 하다. 비영리단체 캐털리스트 코울리션 주최 아시아태평양계(AAPI) 청소년 정신건강 주간 행사를 마친 그를 11일 둘루스 한 호텔에서 만났다.   서울에서 태어나 생후 5개월만에 필라델피아로 이주한 그는 "부모가 한국에 대해 많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고 운을 뗐다. "한때 온전한 미국인이 되고 싶었다'는 그는 연세대학교에서 여름 학기 수업을 듣기 위해 한국에 방문했다가 최진실과 ‘서태지와 아이들’을 필두로 한 90년대 한국 대중문화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VHS 테이프를 사와 드라마를 봤다”며 “사건 줄거리보다 인물의 트라우마, 기쁨, 치유에 집중하는 한국 드라마의 스토리텔링 방식이 와닿았다”고 회고했다.   그에게 한국 드라마는 가족의 비밀을 푸는 열쇠였다. 어릴적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의 관습적 행동, 할머니가 어린 그에게 누누이 당부했던 ‘눈치’의 뜻을 비로소 알게됐다. 수십 년이 지나 네 아이의 엄마가 된 다음에도 한국 드라마를 통해 육아를 배웠다. 그는 “드라마를 보며 ‘나도 저런 강한 여성이 되어야지’ 생각했다며 "평범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희망과 회복력에 매료됐다”고 전했다.   상담치료사로서 드라마는 다른 사람의 내면을 여는 열쇠이기도 했다. 장 치료사는 “'최근 드라마 뭐 봤어?’라는 질문이야말로 정신건강을 쉽게 이야기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예를 들었다. “드라마 주인공 우영우는 ‘나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본인을 소개하죠. 내가 겪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은 ‘나는 괜찮다’는 하나의 신호입니다. 누구나 ‘나는 우울증이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인물들도 우울증을 앓는다. 그는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이민으로 인한 세대간 트라우마를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지만, 한국 드라마를 같이 시청하면 ‘아, 우리도 그런 일을 겪었지’라고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K-드라마를 생생한 현실로 가져오는 작업을 수행하는 전문가다. 지난해 9월부터 한국에서 드라마 촬영지 여행 가이드 프로그램을 본인이 설립한 여행사 ‘누나’s 눈치’를 통해 운영하고 있다. 그는 “작년 2회의 한국 투어를 진행한 데 이어 올해 6회, 내년 10회의 단체 관광이 예정돼 있다”며 “서울을 비롯한 전주, 포항 등 전국 6개 도시를 방문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 전역과 유럽 각국 등지에서 매회 20여명의 참가 신청을 받는다. 회사와 동일한 이름의 팟캐스트, 유튜브 등을 통해서도 한국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2022년 이태원 참사를 취재한 외신 기자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호소하는 상담 요청을 보내오기도 했다”며 “드라마를 매개로 전세계 사람들이 정신 건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취재, 사진 / 장채원 기자 [email protected]          드라마 한인 한국 드라마 드라마 주인공 최근 드라마

2024-08-20

[음악으로 읽는 세상] 행운이 이어지기를

1993년에 개봉된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주인공 다니엘이 애니메이션을 더빙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때 다니엘이 더빙하면서 부르는 노래는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에 나오는 피가로의 아리아 ‘나는 이 거리의 해결사’이다. 만능 해결사로 통하는 피가로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면서 부르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앞 다투어 피가로를 부르는 광경을 빠른 템포의 패시지에 실어 무한 반복한다.   멜로디는 다르지만 이런 기법은 로시니의 희극 오페라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관용적인 어법이다. 이것은 관성의 법칙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처럼 음악에 일정한 속도감을 부여한다. 한번 속도가 붙으면 절대 멈출 수 없다. 감정이 최고조에 달할 때까지 무한질주를 계속한다.   피가로의 노래도 그렇다. 처음에 호방하게 시작한 피가로의 자화자찬은 템포에 가속이 붙으며 점차 절정으로 치닫는다. 여기저기서 피가로를 불러대는 마을 사람들. 그는 제발 천천히 한 사람씩 얘기하라고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여기서도 피가로, 저기서도 피가로. 빠른 템포의 패시지로 무한 반복된다. 그러다가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템포가 인간의 혀가 허용하는 극한의 경지까지 치닫는다.   피가로가 자랑한 것처럼 그는 정말로 많은 재주를 가진 재간꾼이다. 이 점은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다니엘과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피가로는 세속적인 계산에 밝은 반면, 다니엘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다. 하지만 다니엘이 무능한 것은 아니다. 현실적이지 못한 처세 때문에 늘 손해를 본 것이다. 그렇다고 그 재주가 어디로 가나. 결국 그는 자신의 재주로 성공한다. 그 모습에 축복을 보내고 싶다. 피가로의 노래를 빌어서.   “아! 훌륭해. 아주 훌륭해. 랄라라라라라…. 행복한 인생이야. 앞으로 행운이 계속 이어지기를”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행운 피가로 저기 주인공 다니엘 이때 다니엘

2024-08-12

[문예 마당] 결혼식의 의미

  한국의 미를 표현하는 고사성어로 ‘검이불루 화이불치 (儉而不陋 華而不侈)’가 잘 알려져 있다.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의미다. 우리 문화유산을 관통하는 정신이다. 이 말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하고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 답사기’로  유명해졌다. 유 교수는 우리 문화유산을 설명할 때 자주 이 문구를 강조한다.   가장 인상적인 결혼식 주인공을 꼽으라면 아마도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일 것이다. 그들의 결혼식은 많은 사람에게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1981년 7월 29일, 영국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열린 ‘동화 같은 결혼식’,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전 세계에서 7억 5000만 명이 TV를 통해 지켜봤다. 영국은 이날을 국경일로 선포했고 영연방 국가들에서도 행사가 열렸다.     신랑 찰스 왕세자는 가슴에 영국 왕실 문장이 그려진 해군 정장을 입었다. 신부 다이애나비는 옅은 아이보리 색에 수천 개의 진주가 달려 있고, 7.6m 길이의 긴 트레인 드레스를 입어 화제가 됐다. 그들은 70년 된 왕실 마차를 타고 버킹엄 궁으로 입장했다. 다이애나비는 현대판 신데렐라가 되어 선망의 대상이 됐다. 이 특별한 날을 보기 위해 6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고, 공식 초대 하객만 3500명이 넘었다. 그렇게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건만 불화로 15년 만에 이혼했다.   그 결혼식이 있을 무렵 한국에서도 나름 화려한 결혼식이 있었다. 친척 조카의 결혼식이었다. 조카는 당시 실세였던 장관의 아들과 결혼했다. 인물 좋고 가문 좋은 조카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마담 뚜’라 불리는 중매쟁이가 나섰고 몇 번 만나지도 않고 결혼이 성사됐다. 이 서두름은 조카의 비극적 운명의 전조였다. 결혼식은 유명 호텔에서 열렸는데 축하 화환이 시내 큰길까지 늘어섰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조카는 남편과 함께 LA로 떠난 후 소식이 끊겼다.     10여년 후 우리가 LA로 왔을 때 그 조카가 찾아왔다. 그동안의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조카는 갑자기 울면서 “아줌마, 내가 그 사람 버렸어”라고 했다. 아직 아이도 갖기 전이라고 했다. 너무나 착하고 순진한 조카가 남편을 버렸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알기에 캐묻지 않았다.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남편의 의처증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했다. 행복하게 잘살고 있겠지 생각했는데 가슴이 너무 아팠다.     얼마 후 조카네 집을 방문했는데 주차장에서부터 2층까지 벽에 촘촘하게 그림이 붙어 있었다. 조카는 남편과 별거 후 두문불출하며 전공했던 회화만 그리며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동창회 골프클럽에 가입하는 등 사람들과 어울렸다. 한국문화원에서 민화 전시회도 했는데 유방암이 발견됐다. 조기 치료 덕에 완치 판정을 받았고, 5년이 지나 안심을 했다. 그런데 재발이 됐고 이번에는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형제들이 사는 한국으로 갔다 이듬해 세상을 뜨고 말았다. 혹시 결혼에 실패하고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암이 생긴 건 아닌가 싶어 안타까웠다.     최근 인도 최고 부자인 무케시 암바니의 막내아들 결혼식이 화제가 됐다.  암바니는 세계 9위이자 아시아 최고 부자이다. 지난 1월 약혼식을 시작으로 7개월에 걸쳐 행사가 진행되다 드디어 7월 12일 결혼식이 시작됐다. 사흘간 열리는 결혼식엔 세계 유명 인사들이 하객으로 참석했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 등도 포함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인도 전통 의상을 입고 이들과 함께 했다. 결혼식 축하연에도 저스틴 비버 등 유명 연예인의 공연이 있었다.       암바니 가문은 하객들을 위해 전세기를 100대 이상 빌리는 등 결혼식 비용으로 6억 달러를 썼다고 한다. CNN에 따르면 뭄바이 지역 주민들은 암바니 가의 흥청망청 결혼식에 복잡한 심경을 나타냈다. 어떤 주민은 “본인 재산이지만 하는 짓이 정도를 벗어나 우스꽝스럽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가치 없게 쓰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들린다. 요란한 결혼식만큼이나 그들은 오래도록 행복할까?     세계적인 거부로 유명한 록펠러는 ‘나는 수천만 달러를 모았으나 그것이 나에게 행복을 주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포드 자동차를 창업한 헨리 포드도 ‘돈과 행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때는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던 때였다’고 했다.     반면 그 결혼식에 참석했던 세계 3위 부자 저커버그는 소박한 결혼식으로 유명하다. 그는 2012년 집 뒤뜰에서 결혼식을 했다. 초대받은 하객 90여 명은 뒤뜰로 안내를 받고 나서야 결혼식임을 알았다고 한다. 본인이 디자인한 소박한 루비 반지를 신부 손가락에 끼워줬고, 인근 식당 음식을 주문해 피로연을 했다. 호화 결혼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울림을 준다. 인도식 초호화 결혼식이 저커버그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지 궁금하다.   나의 결혼을 돌아봤다. 결혼식 무렵 무역회사를 하던 아버지의 사업에 문제가 생겼다. 남편도 부모의 경제적 도움을 받을 형편이 못됐다. 비가 오면 물이 발목까지 차는 이문동 버스 종점 인근에서 전세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맞벌이를 하며 열심히 살았다. 비슷한 시기 부모가 마련해 준 큰 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 친구가 있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그녀 앞에서 전혀 누추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몇 년 후에는 집을 장만했다. 남편도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면서 그녀가 나를 부러워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사치할만한 형편이 되었지만 검소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젊은 시절부터 책상머리에 김천택의 시조 ‘잘 가노라 닫지 말며 못 가노라 쉬지 말라. 부디 긋지 말고 촌음을 아껴 쓰라.  가다가 중지곳 하면 아니 감만 못하니라’를 붙여놓고 교훈으로 삼았다. 또 ‘정직이 최고의 방책’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같은 말도 붙여 놓았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 답사기' 강의를 들은 후로는 '검이불루 화이불치'를 또 하나의 좌우명으로 마음 속에 담아두고 지낸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 마당 결혼식 의미 막내아들 결혼식 결혼식 주인공 친척 조카

2024-08-08

[음악으로 읽는 세상] 사랑은 자유로운 새

치명적인 매력으로 남자를 유혹해 파탄에 이르게 하는 요부나 악녀를 팜므 파탈이라고 한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주인공 카르멘은 전형적인 팜므 파탈이다. 그녀는 순진한 청년 돈 호세를 유혹하기 위해 ‘하바네라’를 부른다. “사랑은 자유분방한 새. 그 누구도 길들일 수 없어요. 일단 거절하기로 마음 먹으면 불러봤자 아무 소용없어요.”   하바네라는 2/4 박자의 춤곡으로 특징적인 3-3-2 패턴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 이 리듬이 매우 관능적인 느낌을 준다. 가슴 깊숙이 눌러 놓았던 본능을 깨우는 리듬이라고나 할까. 윤리나 도덕에 얽매인 남자를 무장해제 시키는 리듬, 남자로 하여금 기꺼이 자기 넥타이를 풀게 만드는 리듬이다.   비제가 팜므 파탈의 전형인 카르멘이 부르는 노래를 하바네라로 한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사실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클래식 음악 양식은 인간의 본성과 관능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데에 적합한 양식이 아니었다.  인간의 감정을 날 것 그대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고상하다고 해야 할까. 인간의 감정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싶었던 낭만주의 작곡가들에게는 이게 불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페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나라에는 인간의 본능을 밑바닥부터 흔들어 놓는 무수한 춤곡들이 있기에. 하바네라도 그중 하나였다.   카르멘은 하바네라로 돈 호세를 유혹하면서 자기의 사랑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다. 그런데도 돈 호세는 속수무책으로 카르멘에게 빨려 들어간다. 하지만 카르멘은 나중에 돈 호세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간다. 돈 호세는 카르멘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녀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가 자기를 죽일 것을 뻔히 알면서도 끝내 그를 거부한다. 결국 카르멘은 돈 호세의 칼을 맞는다. 마지막까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살다 간 것이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사랑 주인공 카르멘 리듬 남자 팜므 파탈

2024-06-24

한인 성악가 첫 NBA 미국 국가 열창

지난 4일 LA ‘크립토닷컴 아레나(Crypto.com Arena)’에서 열린 LA 클리퍼스의 미국프로농구(NBA) 홈경기에서 한인 성악가가 미국 국가를 불러 화제다. 주인공은 뮤지컬 ‘도산’의 주역 최원현 테너.     이날 LA 클리퍼스와 작년 NBA 우승팀인 덴버 너기츠의 대격돌로 수많은 관중이 모인 가운데, 최원현 테너는 미국 국가 ‘The Star Spangled Banner’를 열창했다. 최 테너는 고음과 어려운 가사에도 이를 완벽히 소화해내면서 관중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크립토닷컴 아레나 NBA 경기에서 한인 성악가가 국가를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인으로는 앞서 지난 2014년 가수 소향이 한국인 최초로 국가를 부른 바 있다.     지난 1월 라크마(LAKMA) 심포니 지휘자인 윤임상 월드미션대학교 교수는 LA 클리퍼스 측으로부터 경기 오프닝 세레머니에 관한 연락을 받고 최 테너를 추천했다.     최 테너는 “고민이 많은 시기였는데 용기가 되고 도전이 되는 소식이었다”며 “처음에는 부담이 컸지만 좋은 기회인 만큼 열심히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 국가는 고어와 운율이 있어 헷갈리는 부분이 많고 또 고음에 대한 부담도 있다. 더구나 실제로 경기장에 섰는데 (목소리) 모니터가 하나도 안 돼서 쉽지 않았다”며 “하지만 그런 환경이었기 때문에 온전히 노래만 집중해서 최선을 다해 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현장 반응은 뜨거웠다. 한인 성악가의 열창에 타인종 관객들도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최 테너는 “클리퍼스 쪽에서는 다음 시즌에 또 초청하겠다고 전했다”며 “사실 당일날 감기로 목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걱정했는데 컨디션에 비해 잘해낸 것 같아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최 테너는 이번 무대로 한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끼고 한인 성악가 꿈나무들에게 도전을 줄 수 있어 감사하다고 전했다.     그는 “10대인 학생 제자가 나를 보고 더 큰 꿈을 꾸게 됐다고 전해 너무 뿌듯했다”며 “나 역시 6년 전 한국에서 떠나와 식당 서버 일을 하며 맨땅에 헤딩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한인분들에게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도전하다 보면 좋은 기회가 올 거라고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 테너는 현재 뮤지컬 ‘도산’을 주최하는 무대예술그룹 ‘시선’의 제너럴 디렉터이자 지난 2018년부터 ‘도산’에서 주인공 도산 안창호역으로 활약하고 있다.     또한 최 테너는 LA나성순복음교회와영엔젤스 합창단, 남가주 한인합창단, 남가주 경희대학교 총동창회 합창단 등에서 지휘자를 맡고 있으며 우리방송(AM1230)에서 프로그램 ‘좋았어’를 진행하고 있다.   장수아 기자 [email protected]미국 한인 한인 성악가 주인공 도산 남가주 경희대학교

2024-04-07

[문장으로 읽는 책] 사양

'작년엔 아무 일이 없었다./ 재작년엔 아무 일이 없었다./ 그 전 해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 이런 재밌는 시가 종전 직후 어느 신문에 실렸는데,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 보면 여러 일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전쟁의 추억이란 건 말하기도, 듣기도 싫다.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이 죽었는데도 진부하고 지루하다.     다자이 오사무 『사양』   ‘아아, 돈이 없다는 것은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두려운, 비참한, 살아날 구멍 없는 지옥 같다는 걸 태어나 처음으로 깨닫고는 가슴속에서 뜨거움이 복받친다. 속이 꽉 메어와 울고 싶어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인생의 쓴맛이란 이런 느낌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천장을 바라보며 누운 나는 빳빳이 굳어 그대로 돌이 되어버렸다.’ 오래된 소설이 새롭게 또 나왔다. 전후 일본 ‘데카당스 문학’의 아이콘 다자이 오사무의 1947년작. 끔찍한 전쟁을 겪은 이들은 ‘아무 일 없었다’고 능청을 떨며 허무와 불안을 달랜다. 몰락한 귀족의 자제인 주인공 남매는 하나는 자살하고, 하나는 유부남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홀로 키우며 세상의 도덕률에 맞선다. ‘패전 후, 우리는 이 세상 어른들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 혁명도 사랑도, 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고 맛있고, 그러니까 좋은 일이라서 어른들은 못된 심보로 우리에게 설익은 포도라 이르며 틀림없이 거짓말한 거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아름답고 우아한 소설이다. 단, 당대로선 파격적 여성상이겠지만 지금 독자에겐 남성 작가의 한계도 느껴진다.문장으로 읽는 책 사양 다자이 오사무 아이콘 다자이 자제인 주인공

2024-04-03

"시간은 신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문제다"

시트콤 프레이저(Frasier)는 1993년부터 2004년까지 방영됐다. 주인공 프레이저 크레인 박사는 정신과 의사이자 라디오 방송국 토크쇼 진행자로 시애틀에 살며 독특하고 복잡한 개인적 관계를 푸는 줄거리다. 지난해부터 이 시트콤이  파라마운트 플러스에서 리부트 됐다. 오리지널 작품의 주인공 킬시 그래머(Kelsey Grammer)가 최근 '더매거진'과 인터뷰했다. 인기 시트콤 주인공이 69세의 시니어가 돼 인생을 되돌아본 얘기를 들어본다.     프레이저 주인공인 킬시 그래머는 에미상을 다섯번 수상했다. 한 캐릭터로 3번 에미상을 받은 것도 기록이다. 원래 시트콤 프레이저는 이전의 히트작인 치어스의 스핀오프 작품으로 11년간 방영됐다. 지적이면서도 섬세한 유머를 특징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시청자들은 프레이저의 복잡한 가족 관계, 친구들과의 우정, 마주한 다양한 인간관계의 문제들에 깊이 몰입했다.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이후 상당한 채널에서 재방되고 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 주인공이 20년만에 리부트 작품에 흰머리를 날리며 돌아온 것이다. 배우 킬시 그래머는 1955년생으로 이미 고교10학년부터 '더리틀폭시'에서 16세임에도 50세 남자역을 맡아 기립 박수를 받았다. 배우로서 평생을 받친 것이다. 그래머는 전작인 치어스부터 이제까지 총 35년간을 프레이저 크레인으로 살아왔다. 그래머라는 배우의 몸에 다른 사람인 프레이저의 삶이 살아 숨쉬는 그런 모습이다.   ◆69세의 삶과 행복   그래머는 자신이 69세가 돼 리부트 작품의 주인공이 된 것을 '회춘'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단계가 소설의 한 챕터라면 나는 그것을 '회춘'이라고 부를 것"이라며 "이전보다 기뻐할 기회가 더 많아졌다. 일곱 자녀는 7세부터 40세까지 다양하다"고 밝혔다. 그는 이전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가끔 놓쳤던 중요한 기회를 되찾고 있다.     "특히 꼭 챙겼어야 마땅했던 큰 딸과의 기회를 가끔 놓쳤습니다. 어떤 행사에 참석하지 못할 때가 많았죠. 하지만 이제 우리는 다시 연결되고 치유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막내 3명은 그의 방에서 자고 있는데, 새벽 3시쯤 7살 아들 제임스가 살짝 발을 차며 몸을 구르기도 한다. 그는 "이게 나에게 일어난 최고의 행복"이라고 덧붙였다.   ◆어려웠던 기억의 치유   그래머는 프레이저로 수많은 정신과적 문제를 상당하는 캐릭터였지만 실상 그 자신은 그렇지 못하고 아픈 상처를 갖고 있었다. 그는 "내년이면 여동생이 19살에 피살된 지 50년이 된다"며 "그 고통을 살아오면서 어느 정도 숨겨두었지만 2년 전에 동생으로부터 하나의 메시지를 받았다"고 말했다. 상실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됐고, 그로 인해 그가 가둬 두었던 감정과 믿음이 솟아 올랐다. 치유의 목소리였다. "나는 항상 거기에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여동생과 함께한 모든 좋은 기억이 이제는 나쁜 것보다 더 뚜렷하게 기억할 수 있다.   ◆끝난 게 끝난 것이 아니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그룹 Yes의 전 리드 싱어였던 존 앤더슨을 포함해 오랜 로큰롤 친구들이 많이 있다. 그와  곧 뮤지컬 제작에 들어갈 예정이다. 앤더슨은 샤갈의 생애 말기에 롤링 스톤즈의 빌 와이먼(Bill Wyman)을 통해 프랑스에서 만난 예술가 마크 샤갈(Marc Chagall)의 삶에 대한 놀라운 노래를 썼다. '끝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샤갈은 항상 비평가들로부터 '대가'라기 보다는 그저 '인기 있는' 화가라고 무시당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벽화나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천장과 같은 기념비적인 작품을 그리고 나서야 '대가 샤갈'이 된 것은 인생의 후반기에 이르러서였다. 적지 않은 나이에 뮤지컬 제작자로 나서는 69세 그래머가 포기 하지 않는 이유다.   ◆부는 항상 상대적이다   수입은 괜찮지만 몇 번 이혼했다. 그래서 그 빚을 갚는다. 왜냐하면 솔직히 그 빚이 두 배라고 해도 여전히 적다고 생각한다.     "난 살아있고 행복하다. 그러나 이혼들은 대가를 가져온다. 많은 사람이 내게 의존하고 있다. 나는 아직 일하고 있고 가끔 코스트코에서 쇼핑을 한다. 내가 이혼한 적이 없었다면 그런 빚이 없었을 것이다."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   그래머는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슬프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때때로 영국의 극작가 앤드루 마벌의 '수줍은 여인에게(To His Coy Mistress)'의 시구절이 떠오른다.   "내 뒤에서는 항상 들린다 / 시간이라는 날개가 달린 마차가 가까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아직 제대로 해보지 못한 일들이 있다. 그는 "똑딱거리는 시계를 마주한다"며 "물론 시간은 실제로 신의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우리의 인간들의 문제"라고 말했다. 비록 노배우의 삶이지만 우리 시니어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병희 기자문제 시간 주인공 프레이저 정신과적 문제 시트콤 프레이저

2024-03-31

쎄시봉 “그리운 한인들 보러 갑니다”

“13년 만에 남가주 한인들을 만나게 돼 설레기도 하고 기대도 됩니다.”   이름만 들어도 반가운 윤형주·조영남·김세환씨가 출연하는 ‘쎄시봉’ 무대가 오는 3월 16일 오후 7시 야마바 리조트 극장(Yaamava Resort·777 San Manuel Blvd., Highland)에서 열린다.   ‘쎄시봉’의 정신적 리더이자 기획자인 윤형주씨는 24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인들에게 좋은 목소리로 추억의 노래를 들려줄 수 있도록 영남이 형(조영남)과 세환이(김세환)이에게 매일 노래 연습하라고 말한다”며 “모처럼 추억에 흠뻑 빠질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겠다. 기대해달라”고 강조했다.   쎄시봉은 1953년 서울시 무교동에 개업한 대중음악감상실의 이름이다. 그 당시 인기 있었던 최신 팝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이라 당대 유명하다는 뮤지션들이 이곳에서 라이브 공연을 펼쳤다. 윤씨는 물론 이장희, 김세환, 조영남 모두 쎄시봉을 통해 통기타 가수로 이름을 떨쳤고 그중에서도 윤씨는 이장희씨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1세대 싱어송라이터이자 통기타 가수로 한국을 말 그대로 주름잡았다.   감미로운 목소리와 감성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윤씨의 히트곡들은 70~80년대 청춘들을 대표하는 문화였다.     이날 공연에서 윤씨는 자작곡 한히트곡뿐만 아니라 음료수 오란씨, 지금도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새우깡, 신세계백화점 등 당시 TV를 틀면 나오던 유명 CM송을 김세환씨와 함께 메들리로 들려줄 예정이다. 또 성악을 가요에 접목한 목소리의 주인공 조영남씨와 영원한 젊은 오빠 김세환씨도 이날 노래와 유쾌하고 따뜻한 삶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에게 감동과 여운을 선사한다.   윤씨는 “젊은 시절 음악을 좋아했고 즐겁게 했는데 그게 ‘통기타 음악’이라는 장르가 됐고 어느새 문화가 됐다”며 “시간이 흘러갔지만, 우리를 여전히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너무 감사하다. 지금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분들에게 우리의 노래가 힘이 된다면 그걸로 기쁘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언제 또 남가주에서 공연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이번 공연의 타이틀에 ‘마지막 콘서트’라고 붙였다”는 윤씨는 “사람들이 우리를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건 끈끈함을 넘어서 공동체적인 모습을 보기 때문인 것 같다. 조영남, 김세환과 쎄시봉 시절부터 함께 한 시간을 합치면 260년이 넘는다. 오래된 우리들의 우정의 노래들을 LA에서 뜨겁게 보여드리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공연은 센터메디컬그룹이 창립 10주년을 맞아 마련했다.     센터메디컬 그룹은 “오랜 세월 고국을 그리워하며 살아온 부모님들을 위해 효도하는 마음으로 이번 공연을 준비했다”며 한인들의 관심을 부탁했다. 센터메디컬그룹 가입 회원들은 무료로 티켓을 받을 수 있으며, 비회원들은 중앙일보 핫딜을 통해 티켓 구매가 가능하다.   ▶문의: (213)368-2611  장연화 기자 [email protected]청춘시절 콘서트 조영남 김세환 센터메디컬그룹 가입 주인공 조영남씨

2024-02-26

시칠리아 가는 낡은 배…16세 선장의 인생 항해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환상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를 동반한다. 세네갈 사람들에게 이탈리아는 꿈의 나라다. 그러나 그 꿈은 그저 꿈에 불과할 뿐, 영화의 주인공 세이두처럼 아프리카 사막을 건너고 지중해를 항해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그 꿈이 공포로 뒤바뀌어 지옥을 경험하고 마지막에 가서야 희망의 부스러기를 주워 담는 이야기다.     2008년 범죄 르포소설을 영화화한 ‘고모라’로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면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탈리아의 마테오가로네의 신작 ‘이오 카피타노’는 제80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감독상과 신인배우상을 수상했고 다가오는 제96회 아카데미상 국제영화 부문 이탈리아의 출품작으로 최종 후보에 올라있다.     16세의 세이두(Seydou Sarr)는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 외곽에서 홀어머니, 그리고 여러 명의 여동생들과 함께 단칸방에서 살고 있다. 세이두와 그의 사촌 무사는 부모 몰래 이탈리아로 떠날 계획을 세우고 학교 대신 공사판에 나가 노동을 하며 돈을 모은다. 이탈리아로 가서 돈을 벌어 가족들을 돕겠다는 생각, 그리고 힙합 스타가 되어 백인들로부터 싸인 공세를 받는 꿈을 꾸면서.     세이두의 어머니는 떠나겠다는 아들에게 불호령을 내린다. 그러나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두 소년을 자제시키지 못한다. 세이두와 무사는 마법사의 중보로 조상들의 허락을 받는다. 그리고 가짜 여권을 구입하고 픽업트럭의 뒷자리에 올라 아프리카 대륙을 달린다. 수천 마일 죽음의 여정이 시작된다.   말리 군인들에게 린치를 당한 일행은 이제부터 걸어서 사막을 건너야 한다. 여러 명이 목숨을 잃는다. 리비아에 도착하지만, 무사는 어디론가 끌려가고 세이두는 납치되어 온갖 고문 끝에 벽돌공 노예로 팔린다.     세이두와 무사는 공사판에서 극적으로 재회한다. 심한 외상을 입은 무사를 돌보며 세이두는 이탈리아행 배를 타기 위해 돈을 모은다. 뱃삯을 지불하고 나서야 브로커들은 방향키를 한번도 잡아 본 적이 없는 세이두에게 선장의 책임을 떠맡긴다. 황당해할 틈도 없이 세이두는 수백명의 밀입국자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낡은 배를 몰고 시칠리아를 향한 항해에 나선다.     영화는 공포의 현실 세계와 황홀한 영적 세계가 뒤섞여 있는 가운데 죽어가는 생명들 앞에 인간의 마지막 도리를 포기하지 않는 세이두의 영웅적 모습을 그린다. 마지막 순간까지 예측불허의 반전이 이어진다. 아프리카 사막과 망망대해 지중해에 흩어진 희망의 부스러기들을 붙잡고 배를 몰고 가는 세이두의 외침 “나는 선장이다(Io Capitano)!” 그는 끝내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김정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시칠리아 선장 인생 항해 아카데미상 국제영화 주인공 세이두

2024-02-23

‘쎄시봉’ 콘서트 열린다

센터메디컬그룹이 창립 10주년을 맞아 오는 3월 16일 오후 7시 야마바 리조트(Yaamava Resort·777 San Manuel Blvd., Highland)에서 열리는 ‘쎄시봉(포스터)’ 콘서트 티켓을 가입 환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한다.   센터메디컬그룹은 “10주년을 맞아 가입 환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은 특별한 행사와 혜택을 기획했다. 그중 하나가 이번 3월 쎄시봉 콘서트로, 선착순 1000명에게 무료 티켓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오랜 세월 고국을 그리워하며 살아온 부모님들을 위해 효도하는 마음으로 이번 공연을 준비했다고 센터메디컬그룹은 강조했다.     ‘쎄시봉’ 공연 주인공은 수식어가 필요 없는 조영남, 윤형주, 김세환.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는 이들은 주옥같은 노래와 때로는 유쾌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이날 들려주며 남가주 한인들에게 특별한 시간을 갖게 할 예정이다.   무엇보다 관객들은 귀에 익은 ‘화개장터’, ‘조개 껍질 묶어’, ‘토요일 밤에’, ‘두 개의 작은 별’, ‘모란 동백’, ‘영영’ 등 명곡들을 듣고 함께 따라 부르며 그리운 젊은 시절의 추억을 선물한다.   센터메디컬그룹이 제공하는 무료티켓은 전화(714-904-1701)로 신청할 수 있으며, 센터메니컬그룹은 가입 환자 여부를 확인해 문자로 알려준다     한편 대한민국 포크 음악을 상징하는 ‘쎄시봉’의 미주 마지막 공연 티켓은 중앙일보 ‘핫딜’을 통해 구매하고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공연 관계자들은 “그동안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고자 준비된 쎄시봉의 미주 지역에서의 마지막 무대인 만큼 놓치지 않고 즐기길 바란다”고 많은 한인의 관심과 사랑을 부탁했다.   ▶문의: (213)368-2611 무료티켓 게시판 공연 무료티켓 공연 주인공 공연 관계자들

2024-02-07

[글로벌 아이] ‘퍼펙트 데이즈’를 꿈꾸며

이른 새벽, 근처 공원 빗자루 소리에 잠에서 깬다. 침대도 TV도 없는 좁은 다다미방, 이불을 개고 화분에 물을 주고 ‘도쿄 토일렛(Tokyo Toilet)’이란 문구가 새겨진 작업복을 입고 집을 나선다. 도쿄(東京) 시부야구에 있는 공공화장실을 청소하는 것이 그의 일. 청소가 끝나면 대중목욕탕에 들러 몸을 씻고 아사쿠사역 지하 선술집에서 하이볼 한잔과 함께 간단한 식사를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헌책방에서 산 문고본을 읽으며 잠을 청하는 생활, 지난 연말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의 주인공 히라야마(平山)의 하루다.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야쿠쇼 코지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긴 이 영화는 ‘베를린 천사의 시’를 만든 독일 감독 빔 벤더스가 연출했다. 제작의 계기는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등 일본 유명 건축가들이 시부야 구내 17개 공공 화장실을 설계해 개조하는 ‘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였다. 주최 측은 이 사업을 알리려 영화를 기획했고 도쿄를 찾은 벤더스 감독은 이 화장실들의 예술성과 독창성에 감탄해 연출을 수락했다. 그렇게 일본과 독일의 거장들이 참여한 ‘화장실 홍보 영화’가 탄생했다.   영화에는 대사가 아주 적다. 주인공이 화장실을 청소하고 밥을 먹고 운전을 하고 책을 읽는 모습이 잔잔하게 반복된다. 하지만 사이사이 여러 반짝이는 순간들이 있다. 출근길 차 안 카세트 테이프에서 패티 스미스, 루 리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이 흘러나올 때, 휴식 시간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 하늘과 나무를 찰칵 찍는 찰나, 누군지 모르는 화장실 이용자가 숨겨 놓은 쪽지에 암호를 적으며 소통하는 순간 등이다.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도 주인공은 자주 미소를 짓고 그렇게 매일 같으면서도 다른, 정갈한 ‘퍼펙트 데이’를 살아간다.   한 해의 마지막 날, 극장엔 혼자 온 관객이 많았다. 연말연시 긴 연휴를 맞아 다들 고향으로 떠나 텅 비어버린 도쿄에 이런저런 이유로 남은 이들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변기 아랫부분까지 거울로 비춰가며 열정적으로 청소하는 히라야마에게 젊은 동료 다카시는 말한다. “히라야마씨, 너무 과한 것 아닌가요. (변기는) 어차피 또 더러워질 텐데 말이에요.”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고 실패할 줄 알면서도 도전하고, 상처 받을 줄 알면서도 사랑하는 날들이 또 이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퍼펙트한 순간들을 조금씩 늘려가며 정성스럽게 일상을 꾸려가야겠다는 다짐. 연말의 탁월한 영화 선택이었다. 이영희 / 한국 중앙일보 도쿄특파원글로벌 아이 퍼펙트 데이즈 퍼펙트 데이즈 주인공 히라야마 화장실 이용자

2024-01-03

[독자 마당] 죄인을 위해 오신 예수님

건강한 사람에겐 의사가 필요 없다. 죄인을 위해 오신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셨다. 그러나 세상엔 모두 선남선녀만 있어서 예수님이 거하실 곳이 없어졌다. 교회는 화려하고, 설교는 멋지고, 찬양대는 훌륭하다. 세상에는 예수님이 유하실 마구간도 말구유도 없다. 더는 고요한 밤도, 거룩한 밤도 없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크리스마스 카드도 실종되고 홀리데이(holiday) 카드로 변질하여 하나의 축제일이 되어버렸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한 가지가 있다. 미국의 노예시대 때 한 흑인이 주인을 따라 교회에 갔다. 하지만 그곳은 백인 교회라 그는 들어가지 못하고 창밖에서 예배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예배는 드려야 하는데 보고만 있는 그의 곁에 한 백인 청년이 다가왔다. 이 청년도 그의 곁에서 교회 안의 예배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는 “왜 당신은 백인인데 교회 안에 들어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 청년은 “나도 쫓겨났다. 그들은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 나는 예수인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이 없는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작 주인공은 안 계시는데 끼리끼리만 모여서 흥겹게 잔치하는 성탄절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계는 지금 전쟁과 자연재해 등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고통받고 있다. 특히 전쟁으로 힘없는 어린이와 여성의 희생이 많다.     제발 이 귀한 예수님의 탄일 시즌만이라도 전쟁을 멈추고 평화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는 없을까? 오늘도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낮엔 해가, 밤엔 달이 세상 곳곳을 비추듯 그리스도의 사랑이 소외되고 병든 이웃과 환난으로 신음하는 모든 사람에게 넘치기를 기도한다. 노영자·풋힐랜치독자 마당 죄인 예수 크리스마스 카드 백인 청년 정작 주인공

2023-12-19

[이 작품과 만났다] 그리고 봄 -조선희

‘대통령 선거 이후 1년, 상실과 혐오로 해체되었던 4인 4각 가정사 봉합기’…. 책 뒷커버에 이렇게 그 주제를 적어 놓은 이 책은, 노벨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빨강’처럼 다자 초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가족구성원 네 사람, 엄마, 아빠, 딸, 아들의 입장에서 각각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다면 30, 40대 젊은 작가가 쓴 줄 착각할 만큼, 전개가 빠르고 가볍다. 1920년대 여성 혁명가들의 인생을 다룬 ‘세 여자’를 쓴 작가가 맞나 싶을 만큼 소재도 시대 친화적이어서, 이렇게나 다양한 측면에서 빠르게 세상에 스며들어 그 속을 들여다보고 계셨구나!저으기 놀라면서 책을 읽어 내려갔다. 시작 부분 젊은이들의 방황 이야기를 읽다 보니, 올해 영화 평론가들이 최고의 한국영화로 선정한 ‘다음 소희’라는 영화가 오버랩되기도 했다. 비열한 비양심의 끝판왕 어른들의 세계에 눌려 삶을 놓아버린 어린 청춘을 보며 나도 몰래 눈물이 흘렀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가족구성원 각자에게 드리워진 사회의 그늘이 아픈 눈물로 번지려나 다소 조바심이 일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다행히도 달달한 맛이 살짝 섞인 건강한 눈물 한소끔이 있는 소설이었다.   동성애자에 대한 다분히 보수적인 시선의 나에게는 상당히 거북한 주인공 동성애자 딸 ‘하민’이 튀르키에 여자와 국제결혼을 하겠다고 엄마 ‘정희’에게 폭탄선언을 하는 내용. 또한, 입사지원서를 100번 쓰고 지친 아들 ‘동민’이 말다툼 끝에 기타 하나 달랑 메고 가출을 한 채, 한 방에 훅 뜨기를 꿈꾸며 삼인조 밴드의 가난하고 불투명한 생활을 하는 이야기가 쭉 이어질 때, 내가 이 소설을 잘 따라갈 수 있을지 요즈음의 트렌드에 너무 어두운 나를 책망하면서 지극히 수동적인 자세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나이 서른에 정해진 것 하나 없이 사라져가는 젊음 속에서 꿈과 현실 사이를 방황하는 동민이 그 틈을 어떻게 좁혀가는지를 읽으면서 또래의 내 아들이 세상과 마주하며 겪었을 고민이 교차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동성애자 하민의 삶의 해법을 보며, 요즈음 주변에 턱없이 늘어나는 동성애자들을 한 번쯤은 세심히 들여다봐야 하지 않는지 숙제를 받아 안은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네 번째 장, 1959년생인 아버지 ‘영한’의 이야기에서는 한자도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엄청난 몰입감이 일었다. 이 네 번째 장으로 이 책은 그 역할을 다했다고 할까. 뭔지 온몸에 가득 채워지는 플러스에너지.     삶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육체와 정신의 노쇠, 죽음에 대한 예감을 강건하고도 유머러스한 글과 드로잉으로 담은 양철북의 작가 귄터 글라스의 ‘유한함에 관하여’가 수필 형식의 위로와 해법서라면, ‘그리고 봄’의 4장은 소설로 된 해법서라고나 할까. 씨네 21 편집장과 한국영상자료원장을 지낸 소양일는지, 영화와 문화 전반에 관한 넘치고 빛나는 일련의 예들은 선물로 받은 듯, 밑줄 그어두고 하나씩 찾아보고 싶게 했다. 지극히 가볍게 트렌디한 세상을 훑는 듯 시작하지만, 이 4장의 저력으로, 세대 간 사고의 차이나 코로나19로 조각난 젊은이들의 한숨과 아버지의 갱년기 슬럼프를 단번에 돌아보게 한다. 우리의 유한성을 딛고 일어나 오늘 내게 할당된 의미 한 부분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채우기로 하자를 표표히 일게 했다.   내 삶의 최애 가치인 ‘역지사지’. 틱낫한 스님의 책,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에서 배운 ‘차를 마실 때는 차만 생각하자’는 책 속 캐치프레이즈도 반가웠다.   우리 다음 세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정치적 잉여뉴스로 받는 이 엄청난 스트레스는 어찌해야 할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광고카피가 완전히 틀렸음을 날마다 절감하는 인생 후반기에서 그 의미를 찾지 못해 서성인다면, 가족 간의 끈끈함이 얼마나 당연하고도 고마운 현실인지를 뭉근히 느끼면서 이 책에서 답을 찾아보시기를 권해드린다. 박영숙 / 시인이 작품과 만났다 조선희 주인공 동성애자 방황 이야기 가족구성원 각자

2023-12-11

폭발 사망 제임스 유 "비극의 주인공인가, 잠재적 테러리스트인가"

지난 4일 벌어져 전국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알링턴 폭발사건 사망자이자 용의자 한인 제임스 유(56) 씨는 알콜 중독과 정신병 전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씨가 법원 소장을 통해 주장한 내용에 따르면, 폭파시킨 주택은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것이었으며, 알콜 중독으로 고통받아왔다.   유씨가 작성한 법원 소장과  본인의 소셜 미디어를 보면 ,  2003년 국제통신회사 ‘글로벌 크로싱’의 보안 책임자로 일하다가 해고됐다. 이 회사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유씨의 아버지는 한국의 한 대선 후보 자문으로 일했으며 어머니는 미국언론사 기자로 일하며 주로 한국관련 소식을 담당했다. 그는 연방수사국(FBI) 워싱턴 지부에 수년 동안 수시로 사기를 당했다며 전화와 온라인을 통해 제보를 하거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유씨의 제보가 실제 수사로 이어진 사건은 없었다.     유씨의 전부인 스테파니 유씨는  2017년 3월 이혼소송을 제기하고 2018년 승소했다. 당시 판사는 현금 위자료 8만달러와 함께 이번에 폭발한 주택의 지분 15만달러 지급을 명령했으나 판매기록은 나와 있지 않다. 위자료 지급명령이 이행되지 않자 법원은  2020년 10월말 전부인 유씨에게 지급할 위자료를 마련하기 위해 유씨가 소유한 주택의 매매를 명령했다.  버지니아 등기국 기록에 의하면 유씨는 2021년 이혼소송 결과 판사의 명령에 의해 버지니아 맥클린의 주택을 100만달러에 판매했다.  이들  부부 사이에 아이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씨는 뉴욕과 버지니아에서 자신의 소송을 주관했던 판사와 소송을 대리했던 변호사, 의사, 전부인, 여동생(혹은 누나) 등이 자신의 권리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이들 소송의 증거로 유씨가 2015년 뉴욕주 로체스터의 한 병원에서 알콜중독 치료를 받았던 정황이 제시됐다. 유씨로부터 소송을 당한 한 변호사는 자신의 거주주택에 다시는 서류를 보내지 말라고 경고했으며 계속할 경우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편지를 발송했다.     그는 유씨의 정신건강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했으나 “유씨가 이혼 과정을 매우 힘들어 했으며 이미 공개된 몇몇 법원 자료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유씨의 전부인은 2015년 11월 유씨를 뉴욕 로체스터 종합병원에 입원시켰는데, 유씨의 소장에는 자신이 10학년때부터 평생동안 과도하게 음주를 했던 전력이 있다고 쓰여져 있었다.   유씨의 전부인은 유씨가 자살을 하기 위해 유서를 쓴 적도 있었다고 밝혔으나 유씨는 관련 사실을 부인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병원 치료를 강행한 전부인과 여동생(혹은 누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소송은 모두 기각되거나 각하됐다.     각하된 소송에는 러시아의 2016년 미국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해 로버트 뮬러 3세 특별검사가 투입돼야 한다는 등 여러 음모론과 결합된 것이 많았다. 그는 논리적인 비약이 심한 주장을 하며 때론 소송을 제기했었다. 유씨는 자신의 옆집에 거주하는 부부를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할리웃 영화 ‘미스터 앤 미세즈 스미스’를 빗대, 그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유씨는 자신의 어머니가 1992년 오랜 병원 투병 생활 끝에 사망하고 50만달러 이상의 빚을 남겼다고 주장했다.     한편 경찰당국은 사건 현장에서 사체의 일부를 수습했으나 정확한 부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유씨의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폭발로 인해 유씨의 거주 주택은 완전히 내려앉았으며 폭발 잔해가 인근으로 퍼져 10여 채의 주택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폭발 인화물질이 조명탄으로 알려졌으나, 연방 알콜담배무기폭발물국(ATF)는 “조사가 끝날 때까지 폭발의 원인 물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김옥채 기자 [email protected]테러리스트 주인공 위자료 지급명령 이혼소송 결과 스테파니 유씨

2023-12-06

[음악으로 읽는 세상] 오페라로 빚은 도박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도박중독자였다. 그는 도박하려고 빚을 졌고, 그 빚을 갚기 위해 글을 썼다. 돈이 급한 나머지 헐값에 소설 판권을 팔아넘기기도 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작가로 우아하게 살 수 있었던 그는 도박 때문에 평생 돈에 쪼들리는 비루한 삶을 살았다.   도스토옙스키의 『노름꾼』은 평생 도박판을 전전했던 작가의 경험담을 담은 것이다. 주인공 알렉세이의 심리나 도박판의 풍경 묘사가 그렇게 리얼할 수 없다. 직접 경험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의 디테일이 살아 있는데, 특히 알렉세이가 도박판에서 큰돈을 연달아 따는 대목은 읽기만 해도 기분이 짜릿해진다.   러시아 작곡가 프로코피예프는 이 소설을 오페라로 만들었다. 오페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도박판 장면이다. 알렉세이가 돈을 걸 때 음악도 숨죽인 듯 조용하게 흘러간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룰렛 기계의 움직임을 묘사한 야릇한 음향만 들릴 뿐이다. 사람들은 가진 것을 모두 거는 알렉세이의 대담함에 혀를 내두른다. 갑자기 장내가 조용해지고, 마침내 딜러가 숫자를 외친다. 그 순간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알렉세이가 돈을 모두 딴 것이다. 음악이 다시 시끄러워진다. 알렉세이와 사람들은 신나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이 엄청난 행운이 가져다준 환희를 만끽한다.   도박꾼이 늘 그렇듯 마지막에 알렉세이 역시 무일푼이 된다. 친구가 저녁을 사 먹으라며 준 동전 몇 닢을 만지작거리며 전에 동전 몇 닢으로 대박을 터트렸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행운을 기대하며 도박장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프로코피예프는 단호하기 그지없다. 파국을 예고하는 오케스트라의 짧은 굉음으로 단번에 오페라를 끝내 버린다. “네가 생각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라고 말하듯이.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오페라 도박 평생 도박판 주인공 알렉세이 도박 때문

2023-12-04

세상 가장 낮은 존재의 신명 나는 소리

극단 어울림(단장 손영혜)의 ‘품바’ 공연이 오는 28일(목) 오후 7시30분 풀러턴의 머켄탈러 문화센터(1201 W. Malvern Ave)에서 열린다.   손 단장은 “품바는 1979년 초연 이후 전세계에서 6000회 이상 공연돼 한국 기네스북에 오른 작품”이라며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존재인 각설이가 토해내는 신명 나는 소리를 관객에게 들려주기 위해 유난히 더웠던 여름 내내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했다”라고 말했다.   강운식씨가 연출, 백진주씨가 조연출을 맡은 이 작품에서 주인공 품바 역을 맡은 홍정민 배우는 관객의 반응에 따라 재치 있는 입담과 타령으로 100분 동안 극을 이끌어간다.   고수를 담당, 장구와 타령을 새로운 연기 영역을 보여줄 강나윤 배우, 산받이로 노래와 춤, 연기를 보여줄 김소연 배우도 관객을 만날 준비에 한창이다.   손 단장은 “시대를 초월한 해학과 삶의 아픔을 담은 품바 공연을 즐기다 보면 웃음의 회오리 바람에 시름을 모두 날려 보내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OC 공연 이틀 뒤인 오는 30일(토) 오후 6시 LA의 동양선교교회에서도 품바 공연이 열린다. 티켓 가격은 이틀 모두 일반 30달러, 시니어와 10명 이상 단체 20달러다. 문의는 전화(909-610-0889)로 하면 된다.신명 소리 품바 공연 주인공 품바 김소연 배우

2023-09-22

[기고] 바비 인형 문화와 영화 ‘바비’

1959년 처음 출시된 바비인형 이야기를 다룬 영화 ‘바비’가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코미디와 판타지 장르인 영화는 페미니즘적 메시지 덕분에 여성들의 공감과 호응을 얻고 있으며, 베이비부머와 Z세대가 함께 즐기는 문화적 감동이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바비’는 미국에서 개봉 3일 만에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 중 역대 최고 흥행 작품이 되었고, 국제적으로는 17일 만에 수익 10억 달러를 넘기는 올해 두 번째 히트작이 됐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흥행에 실패했고, 일본에서는 원자폭탄 제조 과정을 다룬 ‘오펜하이머’와 결부시킨 홍보 광고로 일본인의 감정을 상하게 해 논란이 됐다. 중국서는 여성의 자립을 다룬 주제가 젊은 관객들의 호응을 얻어 시간이 갈수록  인기를 얻고 있다.     동서양의 이런 흥행 차이는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문화적 배경과 선입견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동양 문화에서는 어린이가 비현실적인 어른 체형을 가진 인형과 노는 것이 어색할 수 있다. 그에 반해 바비에 대한 미국인들의 어린 시절 추억은 세대를 막론하고 영화와 감정적인 연결 고리를 쉽게 만들 수 있다. 한국에서는 바비인형이 한 번도 큰 인기를 얻은 적이 없어 영화에 담긴 유머가 낯설고 공감대 형성이 어려운 듯싶다.    ‘바비’에는 여러 명의 바비와 바비의 남자 친구인 ‘켄’이 등장한다. 이들은 마텔사가 출시한 다양한 직업과 이미지를 가진 바비와 켄 인형들이다. 주인공 인형(바비 역할의 배우 마고 로비의 이름을 따서 ‘로비의 바비’라 불린다)은 금발에 8등신 몸매를 가진 전형적인 외모(Stereotypical Barbie)의 바비다. 인형들은 낙원 같은 바비랜드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나, 영화 끝부분에 바비는 더는 바비랜드에 안주할 수 없고, 또 인간적 감정과 경험을 원해서 죽음이 없는 인형 세계를 떠나 인간 세계인 캘리포니아에서의 삶을 선택한다.     바비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주인공 바비의 소유주인 10대 소녀 샤샤와 그녀의 엄마 글로리아의 발언에 드러난다. 샤샤는 페미니즘을 비난하며 바비가 미국 사회 오류의 상징이라고 주장해 바비인형에 대한 비판을 대변한다. 반면에 글로리아는 “여성은 늙어도 안 되고, 항상 공손해야 하며, 자랑하지도 말고, 이기적이지 않으며, 넘어지거나 실패하지도 말고, 도를 넘어서도 안 된다”고 성 평등의 한계를 지적한다.    의사이며 작가인 앤디 자이스러는 “바비는 우리의 어린 시절과 여성의 상징이자, 여성의 희생양이며 우리의 거울”이라고 말했고, ‘바비’의 감독인 그레타 거윅은 “우리와 바비는 서로를 창조했다. 그리고 다시 서로를 재창조했다. 그리고 지속해서 대화를 나눈다”라며 인간과 바비의 상호 지속적인 영향력을 강조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미셸 골드버그는 “영화 ‘바비’와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의 전국 투어 공연인 ‘에라스 투어(the Eras Tour)’가 올여름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현상인데, 두 이벤트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고 논평했다. 둘 다 여성의 성장 이야기로 여성의 존재적 위기 극복과 성차별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바비는 출시부터 화제와 논란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여성의 욕망과 미적 기준의 대상으로서 지난 64년 동안 끊임없이 이미지 변화를 시도해 왔다. 영화 ‘바비’는 어른들을 위한 작품으로, 감독은 바비 인형을 창조한 루스 핸들러를 통해 소녀들에게 “바비가 한다면 너도 할 수 있다. 인생은 웃기지만 감동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다.     NBC뉴스는 많은 여성이 영화를 통해 남자 친구가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이해하는지, 혹은 적어도 수용하는지 알아보고 싶어 한다고 전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감동은 받지 못했지만, 신선함과 기발함에는 최고 점수를 주고 싶다. 정 레지나기고 바비 인형 바비인형 이야기 주인공 바비 바비 역할

2023-08-28

[이 아침에] 분수를 내뿜는 고래

열돔 현상 탓일까? 캘리포니아도 아열대기후로 바뀌나 보다. 습하고 높은 온도에 살갗 신경이 화들짝 놀란다. 차가운 물과 음식만 찾으니 예민한 위장이 신음한다.   여행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태평양 앨범을 뒤적여 본다. 짙푸른 바다 위로 힘센 물기둥을 뿜어내는 고래가 보인다. TV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에서 분수를 내뿜던 고래가 떠오른다. 이 드라마는 나에게 청량한 자극이 되었다. 비전통적인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하는 극적 긴장감으로 감동을 주었다.     우영우는 ‘고래 마니아’였다. 무엇을 떠올리거나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고래 이미지로 상상했다. 크기와 종류가 다양한 고래로 중요한 암시와 의미를 보여주었다. 또한 고래는 그녀의 기분과 정체성을 상징했다. 고래는 편견에서 벗어나 바다를 헤엄치듯 자유롭게 능력을 펼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즉 고래는 내면세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였다.     그녀는 왜 고래에 집착했을까? 고래에 대한 의미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감정이나 심리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더불어 고래를 통해 드라마의 화면구성을 풍성하게 했다. 그녀에게 슬픔이 몰려올 때는 창틀 너머로 조용히 유영하는 혹등고래의 실루엣 그림자로 표현됐다. 이는 차별의 시선에 대한 슬픔과 좌절감을 보여주었다.       또한 고래는 차별받는 주인공을 이해하고 주인공과 소통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시청자에게 장애인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형성되길 원했다. 주인공은 “길 잃은 외뿔고래가 흰고래 무리에 속해 함께 낯선 바다에서 살고 있어요. 모두 나와 다르니까 적응하기 쉽지 않고 나를 싫어하는 고래들도 많습니다”라고 말한다.   주말에 샬롬장애인선교회에서 주최한 ‘사랑의 휠체어 보내기’ 음악회를 경청했다. 많은 사람이 장애인의 삶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체감하지는 못한다. 우영우는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이다. 자폐증이란 다른 사람과 상호관계가 형성되지 않고 정서적인 유대감도 일어나지 않는 증후군으로 자기 세계에 갇혀 지내는 상태의 발달 장애다. 주인공은 이런 증상을 가졌음에도 변호사란 직업을 통해 사회에 적응하며 남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과거 내가 운영하던 학교에서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자폐증(Autism), 아스퍼거 증후군 등 여러 발달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하지만 장애를 극복하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홀로서기에 성공한 아이들이 내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 이 드라마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다.       아직도 장애인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상한’이라는 단어는 낯설고 피하고 싶다는 느낌이지만 이상하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는 창의적인 사고도 있다. 이상함이 때로는 우리 사회를 변하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내 삶은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 있고 아름답습니다. 제가 느끼는 이 감정의 이름은 바로 뿌듯함입니다”라고 말한다,  별난 삶도 가치가 있다고 일깨워주며 막을 내린 드라마였다.    잔디밭 스프링클러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솟아오른다. 분수를 내뿜는 고래처럼. 이희숙 / 수필가이 아침에 분수 고래 고래 이미지 고래 마니아 비전통적인 주인공

202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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