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마당] 의사가 환자가 되어 시작한 새해
수필
의사라는 직업은 밥벌이를 위한 것이 아니고 타고난 직업, 천직(天職)으로 분리된다. 즉 하늘이 준 일, 영어로는 vocation(보케이션)이라 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직업(occupation)과 구분하는데, 여기에는 봉사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간호사, 교사, 종교인, 변호사도 직업인이라기보다는 천직을 가진 사람이라고 본다.
천직을 가진 사람들, 특히 질병을 다루는 의사들이 매일 천직의 관념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는 어렵다. 물질 만능주의가 강세인 현대를 살아가는 의사들은 학자금 대출 때문에 쌓인 빚을 잊고 살 수는 없다.
의과대학 학자금 빚은 탕감해 주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드물다. 2024년 1월 포브스 잡지는 의과대학생들의 평균 빚이 20만6924달러라고 보도했다. 이들은 졸업하는 시점부터 빚을 갚기 시작해야 한다. 빚에는 이자까지 포함되어 있다. 가정도 꾸려야 할 나이이다.
그런데 환자들이 기대하는 의사는 어떤가? ‘마르코스 웰비, M.D.’의 주인공 의사처럼 인자하고, 인정 많고, 한사람의 환자를 위해서 충분한 시간을 써 주는 의사가 주치의이기를 바란다.
‘마르코스 웰비 박사’ 텔레비전 시리즈는 1970년대 ABC에서 방영되었던 인기 있었던 프로그램이었는데, 천천히 움직이는 한가한 세상에서나 볼 수 있는 실화일 것이다.
얼마전 의사인 내가 환자가 되어 외래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받은 곳은 내가 의사로서 젊음을 보냈고, 그곳에서 은퇴한 메디컬 그룹이 운영하는 큰 병원이었다. 내가 활동하던 시기보다 수술프로토콜이 더 많이 세분되어 있었다. 병원의 운영과 의사 중심에서 환자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체재로 많이 변해 있었다. 내가 전직 의사라서 특별대우를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어느 정도 맞을지도 모르겠다.
수술은 오른쪽 어깨 근대의 파열을 보수하는 것이었다. 담당하는 가정의에게 어깨가 아프다고 알렸을 때, 진단에 필요한 엑스레이, 초음파, MRI 검사와 함께 물리치료 전문의에게도 의뢰되었다. 이어서 정형외과의사, 물리치료와 정형외과 보조 의사와도 몇 번 만나는 바쁜 한 달을 지났다.
수술을 하면 좋은 점, 나쁠 수 있는 점, 부작용 등등 세심한 설명과 내용이 적힌 팸플릿, 영상까지도 제공되었다. 옵션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어떠한 질병 치료에도, 좋든 나쁘든, 옵션이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옵션은 환자가 수술을 거부할 수 있는 옵션이다.
참고로 어깨 근대 파열은 테니스나 골프를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 흔하다. 또는 무거운 것을 들어야 하는 직종을 가진 경우에도 발생한다. 나의 근대 파열 문제는 오랫동안 써서 생긴, 나이와 관련된 것이었다.
치료로는 수술 대신 운동을 하라고 권하기도 하는데, 운동은 근대 주위의 근육들을 튼튼하게 만들어서 병난 부위의 대치 역할을 시키는 방법일 뿐, 운동으로 잘린 근대가 이어지지는 않는다.
수술로 일단 단절되어 있는 부위를 연결해 주기로 했다. 요즘은 환부를 크게 오픈하지 않고 관절경(arthroscopy) 방법을 쓴다. 끄트머리에 꼬마 카메라가 달린 관절경을 관절에 집어넣고, 관절경이 실시간으로 보내 주는 정보를 TV 스크린을 통해서 본다. 외과의사는 환자의 확대된 환부를 스크린에서 보면서 수술한다. 참 좋은 세상이다.
수술하는 날, 새벽 5시 30분까지 입원 대기실에 도착했다. 미래 의료 동향서와 휴대폰만 갖고 갔다. 수술은 전신 마취였고, 하루 전날 밤부터 공복이어야 하였다. 입원 대기실에 도착한 후, 나와 보호자인 남편을 동석시키고, 자세한 개인 정보를 확인하고, 팔에 ID 팔찌를 끼워 주었다.
미래의료동향서를 건네니까, 이를 스캔하는 부서로 일단 보내고, 스캔 된 부분은 전자기록에 첨가된다고 친절히 알려주었다. 직원은 만약 의료사고가 생기거나, 전신 마취 중에 연락이 필요한 경우, 일 순위부터 가족들의 이름, 연락처가 정리되어 있는지도 확인하였다.
수술 대기실로 옮겨지고, 친절하고 명랑한 마취전문의, 마취 전문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맥주사가 연결되었다. ‘잠깐 주무세요!’라는 속삭임 이후의 해프닝은 전혀 알 수도 기억나지도 않는다.
이론적으로만 이해하였던 내 환자들의 ‘육체적 아픔’을 경험하고 있다. 참을성의 문턱이 꽤 높은 나 자신에게, 실상 진통제가 필요할 만큼 심한 이 아픔은 적극적으로 침범해 온다. 시간이 약이라던 어른들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삼각기 팔걸이 슬링을 하고 다니면, 동정도 많이 받을 것 같다.
환자로 시작한 의사의 2025년이다. 아프지만 의미 깊은, 그래서 겸손하게 시작하는 새해이다. 그래서 그런지, 2025년은 힐링의 새해, 겸손과 나눔의 새해가 될 것 같은 좋은 느낌이 든다.
모니카 류 / 종양방사선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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