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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이민역사 속 한복의 변천사…내달 7일부터 한복 특별전

LA한국문화원(원장 정상원)이 KAM(Korean American Muse.회장 조민)과 한복 특별전을 공동 개최한다.   이번 특별전은 가주 정부가 한복의 날(10월21일)을 제정한 지 1주년을 맞아 마련됐다.   한국문화원에 따르면 가주 한복의 날 기념 특별전 '한복, 날아 오르다'가 오는 11월7일부터 문화원 2층 전시실에서 진행된다.   11월29일까지 열리게 될 이번 특별전은 문화원이 진행하는 한국 전통미술 시리즈의 다섯 번째 행사다. 한복의 매력과 우수성을 미주 한인사회와 미국 사회에 널리 알리기 위해 마련됐다.   특별전에서는 미주 한인이민 역사와 함께 변화한 한복을 조명하며, 현대적 해석이 가미된 한복 디자인, 민화와 비딩(beading)을 결합한 작품, 패션쇼 컬렉션, 전통 장신구와 보자기 작품 등이 소개된다.     전시를 기획한 김은주 한복 디자이너는 "이번 전시가 한복의 순수함을 담아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며 한인들의 관심을 당부했다.   정상원 문화원장은 "이번 특별전을 통해 미국 사회에 한복의 미와 가치를 알리고자 한다"며 "한국 복식문화의 철학과 미학이 미국 현지인들에게도 영감을 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문의: (323) 936-3014한복 이민역사 한복 특별전 한복 디자인 김은주 한복

2024-10-29

[함께할 50년:차세대 정체성 교육} “미래 주역 위한 정체성 교육은 필수”

제임스 안 LA한인회장     “절대 부정할 수 없는 한국인의 피가 흘러”   클라라 원 국민회 이사장   “정체성 교육 소홀했던 점 1세들은 깊이 반성해야 ”   심지니 한국어 교사             “한국어 문화 못 배운 것 성인돼 후회하는 한인 많아”   장태한 UCI 교수   “한인 이민역사 가르쳐야 뿌리에 대한 공감대 형성”   송정훈 변호사             “세대가 차이를 인정해야 후세교육 시작될 수 있어”   제임스 안(44) LA한인회 회장은 LA토박이다. 한인 2세로 원래는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편하다. 그가 지금처럼 한국어를 편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된 건 2년 전 한인회장을 맡고나서 부터다.   안 회장은 “한국말 하나도 못하고 여기서 태어난 2세, 3세들이 한국 인천 공항에 첫발을 내디딜 때 묘한 기분을 느끼는 걸 아느냐”고 했다.   내재된 정체성이란 그런 것이다. 딱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뿌리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다. 그러면서 2002년 월드컵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미국에 살고 있고, 영어밖에 못하는데 순간 ‘내가 왜 한국을 응원하고 있지’라는 생각을 했었다”며 “절대 부정할 수 없는 ‘한국인’이라는 피가 나에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세대 한인 이민자에게 생존은 화두였다. 먹고 살아야 했다. 힘들수록 이민 생활의 고단함을 자식에게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한국어보다는 영어가 더 유창한 자녀가 되길 원했다. 좋은 대학에 보내야 했고, 주류 사회에서 활동하길 원했다. 그만큼 이민 생활의 고충을 대물림하는게 싫었던 것이 의사, 변호사 등 소위 ‘사’자 직업을 가진 2세들이 다수 배출된 이유이기도 하다.     대한인국민회 클라라 원 이사장은 “그렇다보니 우리는 자녀 세대와 함께 나들이를 갈 우리 민족만의 필드가 없었다”며 “1세대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참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과거의 이민 세대와 요즘 세대의 인식은 모든게 달라졌다. 한인들의 경제력, 문화적 수준이 높아졌다. 이는 정체성 교육의 부재와 관련, 반작용 현상이 발생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히려 지금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2세가 많아졌다.   풀러턴 교육구의 심지니(37) 한국어 프로그램 교사는 1.5세다. 초등학교 3학년때 가족을 따라 미국에 와서 북가주에서 자랐다.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늘 아쉬움이 남는다.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없었다. 한국 문화, 역사 등에 대해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이는 한국어 교사가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심 교사는 “오히려 그런 배경에서 자란 한인들이 정체성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한국어, 문화 등을 배우지 않았던 점을 성인이 되고 나서 아쉬워하더라”며 “지금은 그렇게 자란 한인 2세들이 오히려 정체성을 더 중시하면서 자녀들에게도 한국어를 가르치고자 하는 동기, 분위기 같은 게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일례로 풀러턴 교육구의 경우 명문 공립인 라구나로드초등학교, 팍스주니어중학교 등에는 이미 한국어 이중언어반이 개설돼 있다. 매년 대기 명단이 생길 정도로 인기다.   물론 정체성 교육에 있어 생겨나는 지역적 편차는 한인 사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다. 한인 다수 거주 지역인 LA나 오렌지카운티 등과 달리 소도시의 한인들은 한국을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한인 인구 등에 따라 뿌리 교육의 사각지대가 지역적으로 생겨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편차를 줄이는 일은 학계에서도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UC리버사이드 장태한 교수(소수인종학)는 “코리안-아메리칸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이를 위해서 한인 이민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한국의 역사는 매우 먼 이야기라서 그들이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며 “이 간극을 좁히려면 정체성에 대한 뿌리를 고민해볼 수 있는 한인 이민 역사 교육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장 교수가 한인 이민 역사 교육을 강조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한인 이민 역사는 미국 역사의 일부라는 점이다. 둘째는 한인 차세대가 한인 이민사를 통해 자신의 뿌리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서다.   장 교수는 “미주 한인사는 ‘코리안-아메리칸’에게 있어 정서적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한국과 일종의 중재 역할을 하게 된다”며 “일본계 커뮤니티는 그 부분을 소홀히 하다가 4~5세대로 넘어가면서 대부분 정체성이 많이 희석된 상태”라고 경고했다.   한인 사회는 교회와 함께 태동했다. 한인들이 교회와 아직도 밀접한 이유다. 타 커뮤니티에 비해 한인 사회에서는 교회가 단순히 종교적 역할을 넘어 한인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해왔다. 이 때문에 한인 교회는 이민 사회의 축소판으로도 불린다.   송정훈 전도사는 한인 청소년들을 위한 사역 단체인 JC브릿지미니스트리를 운영하고 있다. 매년 기독교 집회 등을 열며 한인 청소년들을 신앙적으로 돕고 있다. 동시에 그는 가주에서 이민법 전문 변호사(JC스탠드로펌)로도 활동 중이다.     그는 교회를 보면서 정체성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한다.   송 변호사는 “교회 내 1세대와 2세대 사이의 소통 부재로 차세대에게 리더십을 효과적으로 전수해주지 못하고 있는 게 아쉽다”며 “이 때문에 소외감을 느낀 2세들이 미국 교회로 가거나 아예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한인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말했다.   뿌리 교육을 위해서는 세대 간 언어, 문화, 가치관의 차이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게 우선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차세대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 세대 간 차이를 극복하고 한인의 정체성을 공유할 기회가 확대된다는 것이다.   송 변호사는 “앞으로 한인 사회의 존립 여부는 단순히 언어와 가치관의 보존뿐 아니라 한인들이 주류 사회에 적응하면서도 고유한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갈지에 달려있다”며 “그 부분이 가능하다면 앞으로 한국 문화의 자부심 속에서 한인사회는 지금처럼 여전히 강력하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 회장은 매번 한인타운 인근의 리틀도쿄를 보면서 미래를 고민한다. 그는 “리틀도쿄에 가면 사실상 일본계의 뼈대만 남아있지 사실상 언어도, 문화도 없어졌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한인타운이 미래에는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유지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안 회장은 “한인타운의 식당들만 가봐도 겉은 한식당인데 이미 상당수 손님이 타인종들”이라며 “이는 지난 수십 년 사이 한인타운도 많이 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우리의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어야 한인타운 역시 계속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보존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뿌리가 뽑힌다. ‘코리안-아메리칸’이 곧 우리의 미래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정체성 교육 정체성 교육 한인 이민역사 한인 이민자

2024-09-22

한인·라틴계, 정치력 신장 공동 노력

지난 7일 LA한인타운 아로마센터에서 열린 ‘한인 및 라티노 커뮤니티 정치력 신장을 위한 세미나’에는 화랑청소년재단 청소년, 한인 전·현직 정치인, 라틴계 공무원 및 비영리단체 대표 70여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한인과 라틴계 이민역사와 각 커뮤니티가 미국 사회에서 어떻게 정치력 신장을 이뤄나가는지를 공유했다.     이날 행사는 LA총영사관(총영사 김영완)과 멕시코총영사관(총영사 카를로스 곤잘레스 구티에레즈)이 공동주최했다.     세미나에는 폴 서 랜초팔로스버디스 시의언, 케빈 박 샌타클라라 시의원, 마크 김 전 버지니아주 하원의원, 베로니카 페레즈 머큐리퍼블릭어페어 대표, 마리솔로드리게즈 LA시 스트리트LA 대외관계 디렉터, 타티아나 라미레즈 LA카운티노동연합(AFL-CIO) 부디렉터 등이 패널로 나섰다.     이들은 유권자 등록과 선거참여를 통해 ‘선출직 정치인’을 배출하면 각 커뮤니티의 목소리가 ‘정책’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치력신장단체인 코리안아메리칸인스티튜드(KAI) 대표를 맡은 마크 김 전 의원은 “한인사회는 이민 120주년을 맞아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했다”며 “현재 연방 하원의원 4명이 활동하고, 11월에는 역사상 첫 한인 상원의원이 당선될 수 있다. 미국은 민주주의 절차인 정치참여와 입법을 통해 변화를 추구한다. 한인 유권자가 투표하고, 한인 정치인이 선출되면 소수계의 목소리를 정책으로 도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들은 다인종·다문화 사회인 미국에서 소수계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지역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자고 당부했다.     마리솔 로드리게즈 스트리트LA 대외관계 디렉터는 “중학교 때부터 시정부 환경미화 인턴십에 참여하며 작은 실천과 노력이 커뮤니티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했다”며 “시정부, 주정부, 연방정부의 역할에 관심을 갖고 누가 우리를 대변하는지 관심을 갖자. 정치적 이슈가 우리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는 자세는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이민역사 공동노력 라틴계 이민역사 정치력 신장 커뮤니티 정치력

2024-09-08

[문화산책]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 지킴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단재 신채호)   이런 거창한 말씀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는 누구나 안다. 기억되지 않은 역사는 사라져버리게 마련이다.   우리 미주 한인 사회도 이민 연륜이 길어지면서, 정리하고 기록해야 할 역사가 쌓였다. 많은 주요 단체들이 반세기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지만, 역사로 제대로 정리되고 기록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시절을 빛냈던 주인공들은 세상을 떠나고, 기억은 가물가물해지고, 자료들은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다. 급하다.   그런데 사명감을 가지고 역사를 갈무리하고 기록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알기로는, 남가주에서는 한인역사박물관의 민병용 관장, UC리버사이드 교수이며 김영옥연구소 소장인 장태한 교수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민병용 관장의 역작 '대한인국민회 100년사'가 발간되었다. 참으로 반갑고 고맙다.   대한인국민회가 어떤 곳인가? 미주 땅에 독립운동의 씨를 뿌린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과 숨결이 배어 있는 미주 최고의 독립운동기관, 3·1운동 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미주의 임시정부임을 선언하고 미국과 멕시코, 쿠바 동포들의 독립운동 총본부 역할을 감당한 곳, 동포들의 성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계속 후원해온 곳, 독립운동에 앞장선 언론 '신한민보'를 발행한 곳…. 그야말로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곳이 아닌가. 그 100년의 역사가 이제야 한 권으로 책으로 발간된 것이다.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은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이민역사 자료를 전시해 놓은 유일한 교육의 현장이기도 하다. 학생들이 가볼 곳이 거기밖에 없다.   지난 2003년에는 건물 복원공사 중 천장 다락방에 보관되어 있던 다량의 독립운동 자료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귀한 자료들은 USC에서 디지털화해서 도서관에 보관하고 있고, 원본은 한국의 독립기념관에 대여 조건으로 보관되어 있다. 미주에 한인역사박물관이 세워지면 돌아올 것이라고 한다.   민병용 관장이 2년여의 집필 기간을 거쳐 완성한 100년사 책에는 대한인국민회와 기념재단의 역사를 중심으로, 미주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의 역사 등 다양하고 폭넓은 내용이 풍부한 사진 자료와 함께 실려 있다.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학생들에게 이민사와 독립운동사를 가르치는 교사들에게는 참고서가 되도록 교육적인 면에 중점을 두어 편집했다는 설명이다.   저자 민병용 관장은 1976년 신문기자로 독립운동가를 인터뷰하면서 한인 미주이민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초기 이민의 현장인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중가주, 멕시코 등 현지를 발로 뛰어 취재하며 많은 기사를 썼다. 첫 책인 '미주이민 100년, 초기 이민을 캐다' 이후 지금까지 48년 동안 18권의 역사서를 집필, 발간했다. '미주독립유공자 전집, 애국지사의 꿈' 같은 독립운동사를 비롯하여, 미주 지역 주요 한인 단체의 역사,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미주한인의 기본 자료인 '한인인명록' 등 내용도 다양하다.   민 관장이 집필한 미주한인 100년사, 동양선교교회 30년사, 남가주한국학원 40년사, 민주평통 LA 30년사, LA한인회 50년사(전자책으로 발간 예정) 등은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자신을 ‘한인역사 세일즈맨’이라 칭하며, 22년째 LA한인역사박물관 관장을 맡고 있고, 2002년부터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사로 봉사하고 있다.   한 지식인이 어려운 여건에서 이민사회의 역사를 발굴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책을 쓰는 일에 반세기를 바쳤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다. 그런 힘든 일을 해내면서 늘 ‘행복하고 감사하다’며 밝게 웃는 민 관장에게 감사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아주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은 마음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지킴이 역사 이민역사 자료 미주지역 독립운동 한인 미주이민

2024-08-22

남가주한국학원 역사문화 캠프

남가주 한국학원(이사장 박성수, 교육감 전송옥) 산하 10개 주말 한국학교 교직원과 학생 120여명이 ‘제5회 역사 문화 캠프’를 진행한다.     이번 역사 문화 캠프는 ‘선구자들, 세상을 바꾼 위대한 미주 한인’을 주제로 16일과 23일 열린다.   16일에는 온라인 줌으로 이민 역사(차만재 박사), 나의 이민 이야기(강형원 기자)를 주제로 한 세기 넘은 한인 이민역사를 배운다.     23일에는 이민 초기 한인타운이 형성됐던 리버사이드를 방문해 ▶학교별 프로젝트 발표 ▶안창호 기념관 부지 견학 및 강의(이영섭 교수) ▶캘시트러스 주립역사공원 박물관 견학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특히 학교별 프로젝트는 선구자로 활동한 한인을 선정해 선구자의 어린시절과 시대적 배경, 교육과 직업, 업적과 영향력 등을 발표한다. 주최 측은 이를 통해 한인 청소년들이 꿈과 방향을 생각해보는 기회를 얻을 것이라고 전했다.   역사 문화 캠프 위원장을 맡은 신미경 교장은 “한인 이민 역사가 120여 년이 됐다”며 “우리 학생들이 초기 이민자부터 현재까지 앞세대의 삶과 꿈을 알면 정체성 함양하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남가주 한국학원 역사 문화 캠프는 재외동포청,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셀리온이 후원한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한인사회 미국 한인 미주 한인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LA 로스앤젤레스 이민역사 현장학습 한인 이민역사 주립역사공원 박물관 재외동포청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2024-03-12

[기고] 소식 없는 한미박물관 건립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 H.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과거는 현재로 이어지고, 다가올 미래는 현재가 켜켜이 쌓여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시간을 되돌려 가볼 수 없는 과거의 흔적을 보고, 경험하고,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바로 역사박물관이다. 역사박물관에서 과거의 모습을 보고 경험한 것들이 현재를 조명하며 미래를 결정짓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역사를 통해서 뿌리와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더 나은 미래의 꿈을 가꾸어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역사박물관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역사가 없는 민족은 존재 가치가 없다.    올해 미주 한인이민 120주년을 맞았다. 1903년 1월13일, 102명의 한인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를 태운 첫 이민선인 갤릭호가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다. 이들이 우리의 이민선조들이요, 미주 한인 이민역사의 시작이다. 그 후 결혼, 유학, 취업 그리고 가족초청 등 다양한 경로로 많은 한인이 미국에 거주하게 되었다.   1910년 일제는 강제 체결한 한일병합조약을 빌미로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빼앗고 식민지로 삼았다. 이에 일제강점에 맞서 국권을 회복하려는 독립운동이 중국뿐만 아니라 미주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민족적 이념을 추구한 도산 안창호 등 많은 독립투사가 대한독립을 위해 분투한 터전이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한인 최초 의학사를 취득한 서재필 박사를 비롯해 대한의 개혁 운동과 민주주의 가치를 드높인 숭고한 분들의 혼이 담겨있는 곳이다.   미주 한인 이민역사의 흔적들을 한 곳으로 모아 후세에게 민족의 얼을 일깨워 줄 공간이 있어야 함이 당연한 것 아닌가. 현재 250만 명의 한인이 살고 있는 미국에 아직 온전한 역사박물관이 건립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역사박물관 건립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남가주 한인사회는 1991년부터 ‘한미박물관’ 건립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30년이 넘도록 진척 없이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지난 2013년 4월 LA시가 건물 부지를 거의 무상으로 장기임대해준 지 올해로 10년이 됐지만, 아직 설계 도면조차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아쉬운 것은 재정적으로 고 홍명기 회장이 생전에 250만 달러를 기부한 것을 비롯해 여러 독지가가 후원하였고, LA시와 가주, 연방정부까지 기금을 지원했는데도 아직 한미박물관 건립과 관련해 긍정적인 발표가 없다는 것이다.   한미박물관은 한인 이민역사를 알려 줄 대표적인 역사박물관이기에 꼭 건립되어야 한다. 역사가 없는 민족은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와 드라마로 잘 알려진 ‘뿌리(Roots)’는 흑인 노예제도의 역사를 재조명한 작품이다. 한 가족의 여정을 통해 고통 속에서도 생존하고, 유산을 지키려는 그들의 의지를 다뤘다. 그들은 참혹함을 기억조차 하기 싫었겠지만, 뿌리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정체성과 자부심을 확립하려 했던 것 아니겠는가.   한인 1.5세, 2세들이 이민역사를 통해 뿌리를 알고, 정체성과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다민족 사회인 미국에서 중요한 일이다.     미주 한인 이민 120주년을 되돌아보면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비록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한인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뿌듯한 것은 조국의 발전이다. 모든 분야에서 세계를 압도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세계 청소년들이 열광하는 BTS, 블랙핑크 등 문화예술, 그리고 전자, 자동차 등 한인들이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한인 이민 120주년을 기점으로 한인 이민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 눈으로 보고, 알고, 배울 수 있는 한미박물관 건립이 절실하다. 이것은 이민 1세들이 꼭 해야 할 사명이다. 박철웅 / 일사회 회장기고 한미박물관 소식 한미박물관 건립 한인 이민역사 역사박물관 건립

2023-01-29

'교회'로 시작된 이민…하와이 곳곳엔 한인들 무덤

하와이 곳곳엔 한인 이민 선조의 무덤이 남아있다. 무덤은 흔적이고 발자취다. 한인들의 이민 역사를 덤덤하게 담아낸다.     8년 전(2014년)이다. 하와이 최남단의 섬 빅아일랜드를 찾아간 적이 있다. 이민자의 애환이 서려 있는 사탕수수밭이 커피 밭으로 변해 있는 곳이다.     빅아일랜드의 잔잔한 바닷바람은 기억과 함께 여전히 생생하다. 당시 코할라침례교회를 방문했다. 마당 앞에는 수십 개의 무덤이 있다. 묘비들을 들여다보니 한국인이 이름이 여럿 보였다. 이끼가 잔뜩 낀 탓에 묘비에 새겨진 성씨와 사망 연도, 십자가 문양 등은 흐릿해졌지만 한인들의 무덤이라는 사실까지 가릴 수는 없다.   120년 전이다. 그들이 낯선 땅에서 외롭고 힘겨웠을 이민자의 길을 묵묵히 참아내며 걸어갈 수 있었던 건 기독교 신앙 때문이었다. 그들이 묻힌 곳이 교회라는 것은 이를 방증한다. 한인 이민 역사는 그렇게 신앙과 함께 시작됐다.     1901년, 조선 땅에는 대기근으로 굶어 죽는 이들이 많았다. 당시 왕실 주치의였던 알렌 선교사는 하와이의 노동력 부족을 들어 고종을 설득, 황성신문에 이민 모집 공고를 낸다.   1902년 12월 22일, 그렇게 모집된 121명의 조선인은 갤릭호를 타고 제물포를 떠났다. 그때 이민자들을 인솔한 이들이 인천내리교회 장경화 전도사, 안정수 권사, 홍승하 전도사 등 기독인들이었다.   그로부터 10개월 후인 1903년 11월 3일,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현 하와이 그리스도교회)'가 세워졌다. 최초의 한인 이민자 교회였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과 함께 한인 이민역사의 기념비적인 발단이 된다.   이후 감리교 현순 목사와 함께 63명의 한인이 2차 이민을 오게 된다. 이어 1904년(3434명), 1905년(2659명), 1905년(288명) 등 계속해서 한인들은 하와이에 발을 디디게 된다.   당시 한인 이민자들은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힘겨운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하루 품삯이 '69센트'였다. 낯선 곳에서 고된 노동, 외로움, 흐르는 눈물을 신앙을 통해 감내했다. 교회는 한인 초기 이민자들에게 그렇게 위로가 됐다.   그러면서 한인들은 리후에한인감리교회, 한인기독교회, 힐로한인기독교회 등을 계속해서 세워나갔다.     코나한인선교교회에서 시무했던 김교문 목사는 "하와이에는 이민 선조의 무덤이 많이 남아있다"며 "그 무덤을 보며 신앙을 통해 고국을 그리며 기도했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했는데 그 모습이 오늘날 이민자와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풀러신학교 다니엘 이 교수 역시 "한인 교회는 1960년대 이후 이민 붐이 일면서 본격적으로 호황을 누렸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오랜 역사가 있다"며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처음 발을 내디뎠던 한인 이민자들의 신앙을 돌아봐야 하는 이유"라고 전했다.   첫 이민 후 120년이 흘렀다. 한인 교회는 그동안 이민 사회와 함께 성장하고 발전했다.     재미한인기독선교재단(KCMUSA)은 2년마다 전국 한인교회 통계를 발표하고 있다.   KCMUSA 최신 통계에 따르면 미주 지역 내 한인 교회는 2021년 기준으로 2798개다. 이를 한인 인구 수(144만5315명.혼혈 제외ㆍ센서스 통계) 기준으로 나눠보면 한인 516명당 1개꼴로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한인 교회(830개)가 가장 많은 곳은 캘리포니아다. 전체 한인 교회 중 무려 29%의 교회가 캘리포니아 지역에 집중돼 있다. 이어 뉴욕(272개), 텍사스(157개), 뉴저지(139개), 조지아(135개), 워싱턴(125개), 버지니아(110개) 등이 뒤를 이었다.     이민 교회가 태동한 곳이 하와이라면, LA는 이민교회가 전성기를 이룬 곳이다.     한인 교회가 가장 많은 도시는 LA로 무려 184개의 교회가 있다. 캘리포니아 지역 한인교회 5개 중 1개(약 22%)가 LA에 있는 셈이다.   본지는 지난 1972년 LA 한인사회 최초의 한인록을 살펴봤다. 당시 LA에는 동양선교교회, 한인연합감리교회 등 44개의 교회가 운영되고 있었다. 50년 전과 비교하면 LA지역 한인 교회 수는 무려 300% 이상 증가했다. 그만큼 교회의 성장, 확장 등은 한인 이민 사회의 발전상을 동시에 반영한다.   유헌성 연구원(UCLA 사회학)은 "한인 이민 역사 가운데 교회는 종교적 기능, 역할을 넘어 이민 정착, 네트워크 구축, 민족성과 정체성 고수, 언어와 문화 공유 등을 가능하게 한 집단"이라며 "교회는 한인들의 삶을 다양하고도 깊숙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타민족 사회와 달리 독특한 특수성을 지니고 있으며 여전히 한인사회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교계도 한인 이민 역사 120주년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현재 한인 교계에서는 이민 교회 역사는 물론이고 교단사, 기독교 단체 역사까지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민 교계 역사상 최초로 진행되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현재 주마다 선정된 50명의 목회자가 교회사를 집필하고, 각 교단에 소속된 목회자, 신학자 등 25명이 편찬 작업을 펼치고 있다.   KCMUSA 조영숙 국장은 "현재 집필 작업이 끝나고 교열 과정 중에 있다"며 "총 9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미주 한인 교회사인데 올해 3월쯤 출판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글ㆍ사진=장열 기자하와이 교회 한인 이민역사 한인 이민자 하와이 그리스도교회

2023-01-01

첫 이민자 86명…118년 만에 200만 명

한인 이민역사는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노동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시작됐다. 새로운 땅에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온 것이다.   올해 1월 13일은 한인 이민 120주년이 되는 해다. 120주년을 맞아서 미국 한인 이민 인구 변화를 짚어본다.     ▶한인 인구 성장세   하와이에 처음 도착한 102명중 16명은 고된 여정에 병을 얻어 한국으로 돌려보내졌다. 86명이 첫 한인 이민자인 셈이다. 1902년 86명은 118년 만에 2만 배 이상 성장했다. 미국 내 한인 인구가 200만 명에 근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센서스국이 최근 공개한 '2021년 아메리칸커뮤니티서베이(ACS)' 통계에 따르면 한인 인구는 총 196만2184명(혼혈 포함)으로, 전년(192만6508명)보다 3만5600명(1.85%) 더 많았다.   혼혈을 제외한 한인 인구는 144만5315명으로 전체 한인 인구의 77.7%를 차지했다. 한인 혼혈의 경우 2개 인종은 전체 인구의 19.1%를 차지했으며, 3개 인종이 섞인 혼혈인도 2.8%였다. 〈표1 참조〉   한인 연령의 중위 수치는 43세, 혼혈인을 포함했을 경우 36.6세로, 2년 전 발표된 2019년도 조사보다 높아졌다. 당시에는 각각 41.1세와 36.1세였다.     고령인구 비율도 높아지고 있었다. 65세 이상 인구는 16.7%(혼혈 포함 12.9%)로, 2019년도의 15.4%(12.2%)보다 각각 1.3%포인트, 0.7%포인트 늘었다.       캘리포니아주에는 55만8338명(혼혈 제외 46만3808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LA카운티 한인은 2년 전의 23만1147명보다 1.8% 줄어든 22만6793명(혼혈 제외 20만138명)이며, 오렌지카운티에는 11만1292명(혼혈 제외 9만9566명)으로 파악됐다. LA시는 같은 기간 1% 늘어난 11만1794명(혼혈 제외 10만2406명)을 기록했다.   ▶한국 이민자 감소세   미국 내 한인 인구는 증가하고있지만, 한국인들의 미국 이민은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뉴욕대 로스쿨 이민정책연구소(MPI)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미국 이민자 수가 지난 10년간 감소세를 기록했다. 〈그래프 참조〉       1980년 한국 태생 이민자 수는 29만 명이었으며 10년 후인 1990년에는 56만8000명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증가세가 둔화해 86만4000명, 2010년에는 110만 명이 됐다.     약 10년 후인 2019년에는 한국에서 태어난 미주 한인 인구는 103만9000여명이었다. 2010년의 110만 명과 비교해서 약 6만 1000명(6%)이 줄었다.     한국 태생 이민자의 미국으로의 이주는 1960년대 중반 이민 문호를 열어주는 미국 이민법 개정 이후에는 본격화했다. 한인 이민이 정점을 찍은 1985∼1987년에는 연간 3만5000여명의 한인이 미국으로 향하면서 한국은 멕시코와 필리핀에 이은 3대 이민국이 되기도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감소세를 보인 한인 이민은 1997년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다시 증가했지만, 그 이후 성장세는 꺾였다.   이민 정책 전문가들은 1세대 이민자의 자연 감소와 한국인들의 이민 대상국의 다변화 등을 한인 태생 인구 퇴보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즉, 한인 이민 1세대들이 사망하면서 한국 태생 인구가 주는 데 반해서 한국 신규 이민자 수가 자연 감소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더해서 미국은 한국인의 이민 선호 대상 국가 중 하나일 뿐 과거 1980·90년대와 같이 최고의 선망 국가는 아니라는 점도 이런 현상에 일조한다. 이민 대상국 선호 국가는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호주, 동남아 등으로 다변화됐다.   한국인들의 이민 패턴이 변화한 것도 감소 이유 중 하나다. 가난하고 궁핍했던 1960년대엔 이민 통로는 국제결혼과 연고 이주에 따른 것이었고 한국의 산업화가 본격화된 1970년대엔 취업 이민이 급증했다. 한국의 경제성장이 한창이던 1980년대 중반부터는 투자 이민이 빠르게 늘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에는 투자와 취업 이민이 균등해졌다. 그러다 한국의 경제와 품격이 격상된 2000년대부터 한국인들의 미국을 포함한 해외 이민은 감소했다.   다시 말해, 미국 내 이민자 사회가 급성장이었던 시기에는 한인 이민자가 미국에서 스몰비즈니스를 설립하고 번창한 사업을 기반으로 국내에 정착했다. 반면, 최근에는 미국 스몰비즈니스의 어려움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쉽지 않아진 데다 한국의 국격과 경제력 상승으로 이민 패턴이 양분화됐다. 자본력을 갖춘 한국인들의 투자 이민이 늘어나고 서민들의 경우엔 비숙련공 취업이 주된 이민 통로가 됐다. 한국의 국제이주개발공사측 관계자에 따르면, 한국 중상위층의 투자 이민과 서민들의 비숙련공 취업 이민으로 양극화되면서 중간은 사라졌다.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이런 현상이 지속할 것으로 보고 있어서 한국 태생 이민자 수의 증가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재미동포 현황   한국 외교부가 집계해서 격년으로 발간하는 재외동포 현황을 살펴보면 한인 이민자의 또 다른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20201년 재외동포 현황에 따르면, 미국 재외동포 수는 2015년 223만8989명이었다. 2017년에는 249만2252명으로 2년 동안 26만 명 이상 늘었다. 2019년에는 그 수가 254만6982명으로 2017년과 비교하면 5만4000여명 증가에 그쳤다. 2021년 집계치는 263만3777명으로 2019년에 비해서 8만5000명(3.41%) 이상 증가했다.     지역별로는 LA가 66만4414명으로 전체의 23.1%를 차지했다. 뉴욕(36만53명)과 시카고(35만7993명) 각각 12.5%로그뒤를 따랐다. 〈표2 참조〉   거주 자격별로 봐도 LA가 영주권자(11만5100명)와 시민권자 43만3563명으로 전국에서 한인 수가 가장 많았다. 뉴욕의 경우엔 영주권자와 시민권자가 각각 5만256명과 18만8565명이었다. 시카고 지역은 영주권자가 수가 3만9851명으로 뉴욕보다 적었지만, 시민권자가 20만9892명으로 뉴욕보다 많았다.   미국 내에서 한인 인구는 신장세지만 한국으로부터의 이민은 80·90년대의 열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즉, 이민자 사회는 위축되고 있지만, 정치력 등 미국 내 한인사회의 위상은 나날이 성장하고 있다.   다만, 한인 이민 1세대의 고령화와 빠른 자연 감소로 인한 한국어 사용 위축과 한인 정체성 위기는 한인 사회가 풀어야 과제일 것으로 보인다. 우훈식 기자이민자 증감추이 한국 이민자 한인 이민역사 한인 인구

2023-01-01

고난과 역경 딛고 이룩한 빛나는 발자취

가난과 망국·전쟁 때문에 정든 땅을 떠나 낯선 땅을 찾은 선조들로부터 시작된 미주 한인 이민 역사가 올해로 120년을 맞는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소수민족 중 하나로 평가받는 한인들이 있기까지 그 여정은 혹독했지만, 도전과 성취로 가득했다.       한 세기 전 선배 이민자들의 발자취를 되새겨 본다.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서     1902년 12월 22일. 살을 에는 엄동의 날씨였다. 인천항 항구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벽보에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다.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배만 곯지 않는다면 족했다.       가슴 속 뜨거운 희망을 가지고 하와이 이민선 갤릭호에 오른 122명. 경유지인 일본 나가사키에서 신체검사에 합격한 102명은 약 20일만인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다. 대한민국 최초 공식 이민자들이다.         ▶혹독했던 하와이의 삶   1903년 1월 102명을 시작으로 1905년 7월까지 하와이에는 65편의 배를 이용해 7800여 명의 한인 노동자가 도착했다. 이들은 하와이 전역의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 흩어져 일했다.       이들의 삶은 노예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일요일만 빼고 하루 10시간씩 일해야 했다. 당시 일당은 69센트. 무더운 태양 아래서 사탕수수와 에네켄(용설란 일종)을 수확하며 온몸이 찢겼다. 허리가 아파 잠시 일어서면 말을 탄 감독이 가죽 채찍을 내리쳤다.     언어 문화 차이는 고통을 더했다. 한 예로 영어를 못해 달걀이라도 사려고 하면 식료품점에서 엉덩이에 손을 가져다 대고 암탉이 알 낳는 소리를 흉내를 내야 하기도 했다.       하와이 노동자들 가운데 2000여 명은 고된 노동을 견디다 못해 샌프란시스코와 LA 등지로 재이주했다. 1000여 명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남편 찾아온 ‘사진 신부’들   1910년을 전후해서는 사진 신부들이 대거 몰려왔다. 한국의 중매쟁이가 건넨 사진만 보고 남편을 찾아 하와이로 온 여성들이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달랐다.     현지 환경은 열악했고 총각들이 보낸 사진은 실물과 차이가 컸다. 사진 속 저택은 온데간데없고 대부분의 남자는 여자보다 두 배는 나이가 많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한인 여성들은 이내 강인한 정신력으로 자녀를 키워냈다. 가정들이 이루어지면서 한인사회는 비로소 공동체를 형성했다.   ▶새로운 이민 물결   1965년 미국 이민법이 크게 개정되면서 한인 이민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당시 존 F.케네디 대통령은 유럽인으로 편중된 이민법을 개혁해 아시안에 대한 이민 제한을 제거했다. 실제로 1940년 센서스 당시 전국 한인은 8570명에 불과했으나 80년에 들어서 35만4593명으로 거의 40배가 급증했다.     특히 70년대 들어 한국인들의 집단 이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몇십 달러만 가지고 맨땅에서부터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대한항공이 정기 노선을 개설한 것도 1972년이었다.     한인 이민이 정점을 찍은 것은 1985~1987년대. 연간 3만5000여명의 한인이 미국으로 향했고, 한국은 멕시코와 필리핀에 이은 3대 이민국이 되기도 했다.     ▶LA한인타운의 조성     1930년대에는 약 650명의 한국인이 LA에 거주했다. 그들은 주로 야채와 과일 배급에 중점을 둔 비즈니스를 뒀고 교회, 식당 및 지역 사회 단체를 설립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인종 계약법과 경제적 제약으로 인해 지역적으로 활동에 제한이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가파른 경제 쇠퇴를 기점으로 빈 상업 공간과 사무실 공간이 넘쳐났고 이는 부유한 한국 이민자들을 끌어들였다.     1967년쯤 올림픽 불러바드 선상에 한인식당 2개와 한인마켓 2개가 생겼다. 1970년에는 미국에서 가발이 크게 유행하면서 가발업 종사하는 한인들이 상당한 돈을 벌며 모여들었고, 1973년에는 석유파동을 계기로 주유소를 차려 크게 번창하기도 했으며 또 한인 노동력을 모아 일을 하는 청소업도 유행했다.   1970년대 후반, 올림픽 대로와 8가 지역 대부분의 업체는 한인들의 소유였다.  경제 호황은 한인 언론 매체와 지역 사회 단체의 설립으로 이어졌고, 이는 한인들의 정체성을 굳히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주민들은 1982년에 첫 번째 한인타운 사인을 설치하기 위해 성공적으로 로비했다. 이는 현재 2.7 스퀘어 마일의 한인타운 공식 구획이 지정(2010년)되는데 시발점이 됐다.     ▶높아지는 한인들 위상   센서스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인 인구는 192만6508명이다. 20년 전인 2000년 기준 107만6,872명보다 78%가 늘었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이민자 중 80%가 10년 이상 미국에 거주한 경우였다.   한인 가구의 중간 소득은 7만 2200달러였고, 한인 2세 가구의 중간소득은 8만 8100달러였다. 한인 인구 중 빈곤 계층에 속하는 인구는 전체의 11%로 한인 2세만 살펴볼 경우 빈곤계층이 전체의 9%였다.         지난 2012년 기준 전국의 한인 업체 수도 22만4891개로, 매출만 1078억1323달러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다. 특히 한인 사업체는 중국계 52만8702개, 베트남계 31만864개 다음으로 세 번째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정계는 물론 재계와 문화계 등 다양한 한인 리더들이 곳곳에 포진해 한인의 명성을 높이고 있다. 또한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한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 한국 문화 콘텐츠들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시장 사로잡고 있으며 K팝으로 시작된 미국 내 한류 열풍은 한국문화와 한국상품 등 한국 자체를 동경하고 선호하는 현상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장수아 기자신년특집 이민역사 한인 노동자 한인 역사 미주 한인

2023-01-01

[한인이민 120주년] 이민의 역사…다시 한 세기를 꿈꾼다

한인 이민역사가 1세기를 넘어 20년을 더했다. 올해는 이민 120주년의 해다.     1903년 사탕수수 노동자를 실은 배가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면서 척박한 이민역사는 시작됐다. 1902년 고종황제는 노동 이민을 장려하기 위해 ‘하와이는 일자리가 많고 자원이 풍부해 살기가 편하며 자녀 교육을 잘 시킬 수 있다’는 공고를 발표했다. 미주 한인 이민의 출발이었다.     한 세기를 넘으며 하와이 노동자 후손들과 이후 이민자들은 ‘코리안 아메리칸’의 힘찬 역사를 미국에서 써내려 가고 있다.     초창기 이민자들은 먼 이국 땅에서 중노동을 하면서도 고국의 독립을 열망했고 후손이 바르게 뿌리 내리기를 염원했다. 그후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많은 한인들이 이민 길에 올랐다.     하지만 한인들이 정착한 미국은 결코 풍요와 안락의 땅만은 아니었다. LA폭동을 겪으면서 힘없는 소수민족의 슬픔을 삼켜야 했고 장기 불황의 경제위기도 넘어야 했다.     그럼에도 역경에 좌절하기 않고 일어섰다. 이민 연륜이 깊어지면서 한인들은 정치와 경제, 문화 각 분야에서 무한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위상이 높아진 조국도 우리에게 자긍심을 느끼게 한다. 시련과 인내와 시간들은 한인커뮤니티의 빛나는 역사로 승화됐다.     중앙일보는 2023년 한인 이민 120주년을 맞아 신년기획으로 한인 이민사를 조명하는 특집섹션을 발행한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이민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취지다. 또한 다민족 사회에서 살아갈 후세들에게 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갖게하려는 뜻도 있다     지난 시간을 넘어 미래로 나아가야 할 때다. 다시 시작이고 도전은 계속된다. 자유와 축복의 땅에서 또 다른 한 세기를 꿈꾼다. 목차   ▶2면: 이민 120주년의 의미 ▶3면: 이민인구 변화 추이 ▶4면 한인 경제 성장사 ▶8면 한인 정치인들 ▶12면: 미주 한인 종교사 ▶15면: 실바아 장 루크 하와이 부지사 인터뷰 ▶18면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 인터뷰  한인이민 120주년 이민 역사 한인 이민역사 한인 이민사 초창기 이민자들

2023-01-01

[중앙 칼럼] 한류는 있는데 한인타운 정체성은 없다

최근 타주에서 놀러 온 타인종 친구와 리틀도쿄의 재패니스아메리칸 뮤지엄을 둘러본 후 리틀도쿄 빌리지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를 데리고 한인타운으로 향했다.   베버리 불러바드를 타고 다리를 지나는데 대형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큰 아치 모양의 게이트웨이로 ‘히스토릭 필리피노타운’이라고 적혀있었다. 조수석에 앉았던 친구가 탄성을 자아냈다. “정말 멋진 조형물이야!”라고.   그도 그럴 것이 조형물은 30피트 높이에 폭 82피트의 위용을 자랑하며 6차선 도로를 품듯이 서 있었다. 바로 전날 차이나타운으로 식사를 갈 때도 등용문을 보며 감탄했던 친구의 모습이 데자뷔처럼 뇌리를 스쳤다. 등용문도 43피트 높이에 폭 80피트의 대형 철골 구조물로 맨 위에는 두 마리의 황금색 용이 여의주를 마주 보고 있는 다운타운 차이나타운의 랜드마크다. 중국 이민자의 역사를 기념할 목적으로 2001년에 세워졌다.   한인타운으로 들어섰다. “한인타운에 있는 한국 문화와 역사를 보여주는 조형물을 보고 싶다”고 그가 말했다. 난감했다. 차이나타운이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필리피노타운과 같은 게이트웨이를 보여주며 자랑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다. 애써 한류와 한식으로 그의 관심을 돌렸다.   내년은 미주한인이민 120주년이다. 올해 중간선거에서는 앤디 김 연방하원의원이 뉴저지에서 3선에 성공했고 남가주의 미셸 스틸과 영 김, 워싱턴주의 메릴린 스트릭랜드 연방하원의원은 재선 의원이 됐다. 한인 이민역사가 시작된 하와이에서는 처음으로 한인 부지사도 선출됐다. 실비아 장 루크 부지사가 주인공이다. 한인 정치력 신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이다.     한인사회의 경제력 성장도 괄목할만하다. 자산 규모 190억 달러가 넘는 한인 최초의 리저널뱅크는 물론 억대의 순자산을 보유한 한인 부자도 많다. 이에 더해 한국의 문화와 음식은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그런 지금도 한인타운의 정체성을 알릴만할 것이라곤 올림픽 길에 있는 청사초롱 모양의 가로등과 ‘KOREATOWN’이라고 새긴 둥근 구모양의 딱히 의미를 찾을 수 없는 표지석, 그리고 흐릿해져 잘 보이지도 않는 한국 전통문양이 새겨진 건널목 정도가 고작이다. 한인이민 역사를 기리고 한인사회를 대표할만한 랜드마크 부재는 이민 120주년을 맞는 내년에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한인사회의 숙원사업이라는 ‘코리아타운 게이트웨이 프로젝트’가 최근 재추진되고 있다.  타운 중심지인 올림픽 불러바드와 노먼디 애비뉴 교차로의 다울정 옆에 LED 아치형 게이트를 세우는 360만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다. 2008년 프로젝트가 처음 시작된 이후 무산과 재추진을 반복하다 지난 8월 에릭 가세티 LA 시장이 승인을 하면서 재추진 동력을 얻었다. 그러나 중도에 또 무산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과연 그 게이트웨이가 한인타운 상징물로 적합한가에 대한 의구심마저 들게 하는 상황이다.   LA 시정부 소유 주차장을 무상으로 임대받고 LA일본총영사관과 재력가의 지원,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주민 전체가 힘을 보탠 리틀도쿄의 커뮤니티센터인 테라사키 부도칸이 지난 5월 문을 열었다.   이민 120주년인 내년에는 한인 정치인과 재력가들은 물론 한인사회가 힘을 합쳐 우리 자녀에게도, 그리고 타인종에게도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기념비적 상징물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인타운의 정체성을 제대로 세우지 않는다면 한인타운은 리틀 K타운으로 축소되거나 히스토릭 코리아타운이라고 써놓은 도로 표지판으로 남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하겠다. 후세에게 부끄러움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말이다. 진성철 / 경제부장중앙 칼럼 한인타운 정체성 한인이민 역사 한인 이민역사 히스토릭 필리피노타운

2022-11-27

미주한인 이민 역사 차세대들에 알린다

“청소년을 위한 한인 이민사 온라인 강연에 초대합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이사장 윤효신)이 청소년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미주 한인사 교육을 시작한다. 1903년 1월 13일 한인 첫 집단이주 후 한 세기가 넘은 한인 이민역사를 체계적으로 알린다는 계획이다.   그 첫 번째 프로그램인 한인사 교육은 6월 4일부터 매주 토요일(오후 4~6시) 3회에 걸쳐 온라인(Zoom) 강연으로 진행한다. 강연 대상은 청소년과 대학생이다. 6월 18일에는 USC 인근 대한인국민회 기념관(1368 W Jefferson Blvd, LA) 대면관람 수료증과 봉사활동 증명서 전달식이 열린다.   미주 한인사 온라인 강연에서는 ‘1903년 1월 13일 한인 집단이주 역사와 활동, 이민초기 독립운동과 자금 모금, 한글학교 교육, 비행학교, 신문 발간’ 등 한인 이민 초창기 선조들의 왕성했던 애국애족 활동을 알릴 예정이다.     또한 한인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짚어보고, 공동체가 나아갈 미래를 토론하는 시간도 갖는다. 이를 통해 한인 청소년과 대학생 스스로 정체성을 고민하고 자부심을 얻도록 한다는 취지다.     이번 온라인 강연은 뉴오픈월드아카데미 강사인 양숙영씨가 맡는다. 양씨는 UC버클리 경제학을 전공하고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알리고 있다.     윤효신 이사장은 “다문화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서 한인 청소년과 대학생도 자신의 뿌리와 공동체의 역사를 아는 일은 중요하다”며 “자신과 부모의 조국을 알고 역사와 문화를 체득할 때 스스로 자랑스러운 한인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운이 차세대위원장은 “한인사 교육을 수료한 청소년과 대학생은 차후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홍보대사로 활동할 수 있다”며 “자녀가 미국사회에서 주체적인 한인으로 자라길 바라는 부모님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고 말했다.   미주 한인사 교육은 6월 3일까지 이메일(hyoshinyoon@gmail.com)로 신청(신청자 이름, 학교, 학년, 부모 연락처 등 기재)하면 된다.     ▶문의: (213)880-1411 김형재 기자미주한인 차세대 한인 이민역사 미주한인 이민 한인 역사

2022-05-23

권소희 작가 두 권 신간 출간

‘하늘에 별을 묻다’, ‘독박골 산1번지’ 등의 작품을 통해 문단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권소희 작가가 동시에 두 권의 책을 출간했다.     지난달 도서출판 도화에서 발간한 동화책 ‘순득이네’와 장편 소설 ‘포스트 잇’이다.     ‘순득이네’는 순득이네 일가족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이민 가는 험난한 과정을 섬세하게 그린 동화다.     직접 그린 따뜻한 그림과 문체에 역사적 사실을 더해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어린이들 눈높이에 맞춰 재밌게 들려준다.     권작가는 ‘하늘에 별을 묻다’를 집필하면서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들은 육성녹음을 토대로 순득이네를 완성했다.     권작가는 “이민 역사가 120년이지만 아동용 한인 이민사 책이 없다”며 “한인 2세들이 사는 땅에서 선조들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이민사 공부도 중요하다는 생각에 순득이네 출간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장편 소설 ‘포스트잇’은 작가가 팬데믹동안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구상한 작품이다.     부적절한 사랑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로 음습하고 치졸한 사회의 단면과 치부를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권작가는 한국소설 4월호에 단편소설  ‘시타커스, 새장을 나서다’로 작품 활동을 하고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에서 단편소설 ‘틈’으로 신인상을 받았다   저서로 ‘시타커스, 새장을 나서다’, ‘하늘에 별을 묻다’, ‘초록대문 집을 찾습니다’, ‘독박골 산1번지’ 등이 있다.     첫 번째 장편 소설 ‘하늘에 별을 묻다’는 세종도서문학나눔 우수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은영 기자신간 이민역사 이민사 공부 한국소설 4월호 신간 출간

2022-05-22

[기고] 50년 전 ‘한인록’에 담긴 이민역사

 1972년 남가주 한인회에서 한인회 창립 후 처음으로 발간한 한인록이 있다. 50년 전 남가주 한인사회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이민역사의 소중한 자료다.     한인록은 남가주 한인회 역사를 간단히 서술하고 있다. 1962년 2월 김호, 김형순, 김원용, 송철 등 독립운동 원로들 중심으로 남가주 한인센터가 조직됐고 초대 위원장에 김호, 부위원장에 송철 선생이 임명됐다.     1963년 2월 24일에는 남가주 한인회관을 구입했는데 주소는 ‘2559 West Olympic Blvd’로 현재의 한인타운 중심지에서 동쪽에 위치했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1967년 건물을 매각하고 추후 건물 구입을 위해 4만 달러 원금을 적립했다.   1965년 신 이민자들이 들어오면서 가주 한인회를 발족했는데 1968년 1월 14일 두 단체가 통합하여 남가주 한인거류민회를 설립했다. 초대 회장에 조용삼 박사가 선출됐다.     한인록에는 4800명의 남가주 거주 한인 명단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름, 주소, 전화번호 등이 적혀 있다.   체육회와 부인회 등 단체들이 이미 조직돼 있었고 특히 18개의 한국 고교 동문회, 15개 대학 동문회, 7개의 미국 대학 동문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가장 많은 단체는 교회로 당시 44개의 한인 교회가 남가주 지역에 설립돼 있었다.   한인록에는 한인이 운영하는 다양한 업종의 비즈니스들이 광고로 소개돼 있다. 광고를 게재한 업종은 여행사, 마켓, 보험회사, 꽃집, 부동산 중개인, 언론사, 식당 등다양하다.   당시 한인들이 가장 많이 종사한 업종은 단연 무역회사로 77개 업소에 달한다. 두 번째는 가발업으로 57개 업소가 한인록에 수록돼 있다. 주유소 42개, 식당 24개, 마켓 20개, 리커스토어 11개가 당시 영업을 하고 있었다. 또한 10개의 여행사, 7개의 미용실, 양복점 (6곳), 사진관(5곳), 자동차 수리업소(5곳), 꽃집(4곳), 인쇄소(4곳), 보석상과 공예품점(각 1곳)이 문을 열고 있었다.     전문직으로 7명의 의사와 3명의 치과의사가 환자들을 진료했고 6개의 한인 신문과 TV 방송국이 한인 사회의 소식을 전했다. 또한 11개의 회계 관련 업소가 있었다.   남가주 한인 사회는 1970년대부터 신규 이민자들이 급증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는데 1972년 한인록은 초창기 남가주 한인 사회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 50년 동안 남가주 한인사회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엄청난 성장을 거듭해 왔다. 초창기 남가주 한인사회를 이끌어준 ‘올드타이머’들의 노고와 희생 없이는 남가주 한인사회가 오늘날처럼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올해는 4.29폭동 3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지난 30년, 그리고 지난 50년 남가주 이민사를 돌아보면서 한인커뮤니티 미래의 50년 청사진을 새롭게 그려보자. 장태한 / UC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장기고 이민역사 남가주 한인회관 남가주 한인사회 남가주 한인거류민회

2022-01-26

“아시안 차별, 이민역사 교육 절실”

아시안 혐오를 막기 위해 공립학교 정규 교과과정에 아시안아메리칸 역사교육을 의무화하고, 세부 가이드라인 마련에 한인사회도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왔다. 한인 단체를 통해 아시안 혐오가 사회구조적 차별임을 환기시키는 것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인사회 내에서도 세대별 혐오현상 인식이 크게 다른 만큼, 세대별 접근이 달라야 한다는 분석도 있었다. 이민 1세대인 노인·자영업자는 혐오를 개인 일탈로 여긴 경우가 많지만, 청년층은 사회구조적 문제로 보고 다른 소수인종과 적극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민참여센터(KACE)는 18일 온라인 기자회견을 열고 ‘반아시아인 혐오와 한인 사회: 뉴욕·뉴저지 대도시권 대책 마련을 위한 한인사회 실태 조사’ 결과를 공유했다. 사회복지·사회학 전공 연구진이 작년 10월부터 2개월간 총 26명을 심층면접한 내용을 질적 분석한 결과로, 해외동포재단 지원과 KACE 후원으로 진행됐다. 김동찬 KACE 대표는 “뉴저지주가 아시안아메리칸 역사문화 교육을 의무화할 예정이지만 실행방안은 아직 논의된 바 없다”며 “아시안이 사회에 기여한 점을 중심으로 교육하자는 말이 나오고 있고, 커뮤니티별로 이 부분을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시안에 대한 공교육이 절실하다고 본 세대는 이민 2세대, 즉 청년층이다. 분석결과 청년층은 흑인들의 투쟁에서 교훈을 찾고, 그들과 연대해 혐오범죄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 1세대는 혐오범죄가 개인 일탈이라고 믿거나 운이 없어서 당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았다. 정청세 빙햄턴 뉴욕주립대(SUNY) 한국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노인들은 피해자에게서 증오범죄 요인을 찾는 경우도 많았고, 자영업자 그룹도 타민족과 연대해 운동을 벌이는 것엔 회의적이었다”고 말했다. 한인들이 일차적으로 소속된 학생회·경로센터·교회 등과 시민·권익단체 연계를 강화해 아시안 혐오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조언한 배경이다.    이외에도 연구진은 ▶혐오범죄 예방·처벌에 대한 입법운동 ▶혐오범죄 처리과정에 대한 감시 ▶피해자 보상 및 재발방지 제도 마련 ▶피해자 지원 법률조언활동 등을 향후 과제로 꼽았다. 김 대표는 “어려운 상황일수록 연구를 통해 아시안이 새로운 시기에 미국사회를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체계적인 양적·질적 실증연구를 이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은별 기자 kim.eb@koreadailyny.com이민역사 아시안 아시안아메리칸 역사교육 아시안아메리칸 역사문화 아시안 혐오

2022-01-18

119년 이민 역사, 미래를 향한다

미주한인재단-워싱턴(회장 이미쉘)이 온-오프라인을 통해  '한인의 날' 행사를 개최했다.   1903년 대한제국 당시 102명의 한인이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날을 기려 미주한인재단-워싱턴 등의 노력으로 2005년 한인의 날이 제정됐으며 올해 17주년을 맞았다.     1903년 하와이 이민선은 한국 최초의 공식 이민이자, 미주 한인 이민 역사의 시초가 됐다. 이날 행사에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문재인 한국 대통령이 대독사를 통해 축사를 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양국이 공영하는 것이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는 길이며 이러한 동맹은 후세대에도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랑스러운 한인 이민역사는 한미 양국 모두의 자랑”이라고 전했다.     구미경씨의 사회로 진행된 행사에는 정세권 1대 회장의 개회사, 이미쉘 회장의 인사말, 존 틸렐리 한국전 참전기념재단 이사장, 여러 연방의원의 축사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존 틸렐리 이사장은 “한미 혈맹 관계 속에 미국에서 K팝 등 한국문화가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매우 자랑스럽다”면서 “우리의 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자고 전했다.     축사를 전한 연방하원의원은 그레이스 멩(뉴욕), 제리 코널리(버지니아), 쥬디 츄(캘리포니아), 앤디 김(뉴저지), 미쉘 스틸(캘리포니아), 영 김(캘리포니아), 메릴린 스트릭랜드(워싱턴) 등으로 모두 원격 혹은 녹화된 메시지를 전했다.   앤디 김 의원은 “우리같은 아시안이 미국에서 살아가는 매 순간이 역사이며 백인이 압도적인 지역구에서 아시안인 내가 의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한인 이민의 역사”라고 전했다.     미주한인재단-워싱턴은 해나 김 연방보건복지부 부차관보와 밥 허 앨레나 루즈벨트 고교 교사를 올해의 한인상 수상자로 선정하고 상패를 전달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이민선 게일릭호에 올랐던 한인은 1903년 102명을 시작으로 1905년 8월 8일까지 모두 7천226명에 달했다.   한인들은 새벽부터 매일 12시간 동안 사탕 수숫대를 자르는 노역과 말도 통하지 않는 농장 감독자들의 비인간적 처우, 부당한 횡포에 시달리면서도 한인교회를 세워 공동체 결속을 다지고, 피땀 흘려 번 돈을 모아 독립자금에 보탰다. 혼기가 찬 한인들은 사진만 보고 혼인을 정한 이른바 '사진 신부'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남편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고, 부인들은 삯바느질과 세탁 등으로 생계를 돕고 2세들을 길렀다. 한인 학교가 생겨났고, 일부 한인들은 본토로도 진출해 LA와 샌프란시스코 등지로 퍼져나갔다. 이후 119년이 지나는 동안 재미동포 사회는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김옥채 기자 kimokchae04@gmail.com이민 역사 한인 이민역사 하와이 이민선 한인상 수상자

202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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