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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역경 딛고 이룩한 빛나는 발자취

[한인 이민 역사]
일당 69센트의 하와이 사탕수수밭 중노동
1965년 이민법 개정, 한인 이민의 전환기
정재계 주류 진출 활발, 곳곳 ‘성공 신화’

사탕수수밭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는 모습. [하와이 주 자료보관소]

사탕수수밭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는 모습. [하와이 주 자료보관소]

2022년 5월 31일 미국 백악관을 방문한 BTS가 아시아계 증오범죄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로이터]

2022년 5월 31일 미국 백악관을 방문한 BTS가 아시아계 증오범죄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로이터]

가난과 망국·전쟁 때문에 정든 땅을 떠나 낯선 땅을 찾은 선조들로부터 시작된 미주 한인 이민 역사가 올해로 120년을 맞는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소수민족 중 하나로 평가받는 한인들이 있기까지 그 여정은 혹독했지만, 도전과 성취로 가득했다.    
 
한 세기 전 선배 이민자들의 발자취를 되새겨 본다.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서  
 


1902년 12월 22일. 살을 에는 엄동의 날씨였다. 인천항 항구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벽보에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다.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배만 곯지 않는다면 족했다.    
 
가슴 속 뜨거운 희망을 가지고 하와이 이민선 갤릭호에 오른 122명. 경유지인 일본 나가사키에서 신체검사에 합격한 102명은 약 20일만인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다. 대한민국 최초 공식 이민자들이다.      
 
혹독했던 하와이의 삶
 
1903년 1월 102명을 시작으로 1905년 7월까지 하와이에는 65편의 배를 이용해 7800여 명의 한인 노동자가 도착했다. 이들은 하와이 전역의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 흩어져 일했다.    
 
이들의 삶은 노예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일요일만 빼고 하루 10시간씩 일해야 했다. 당시 일당은 69센트. 무더운 태양 아래서 사탕수수와 에네켄(용설란 일종)을 수확하며 온몸이 찢겼다. 허리가 아파 잠시 일어서면 말을 탄 감독이 가죽 채찍을 내리쳤다.  
 
언어 문화 차이는 고통을 더했다. 한 예로 영어를 못해 달걀이라도 사려고 하면 식료품점에서 엉덩이에 손을 가져다 대고 암탉이 알 낳는 소리를 흉내를 내야 하기도 했다.    
 
하와이 노동자들 가운데 2000여 명은 고된 노동을 견디다 못해 샌프란시스코와 LA 등지로 재이주했다. 1000여 명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남편 찾아온 ‘사진 신부’들
 
1910년을 전후해서는 사진 신부들이 대거 몰려왔다. 한국의 중매쟁이가 건넨 사진만 보고 남편을 찾아 하와이로 온 여성들이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달랐다.  
 
현지 환경은 열악했고 총각들이 보낸 사진은 실물과 차이가 컸다. 사진 속 저택은 온데간데없고 대부분의 남자는 여자보다 두 배는 나이가 많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한인 여성들은 이내 강인한 정신력으로 자녀를 키워냈다. 가정들이 이루어지면서 한인사회는 비로소 공동체를 형성했다.
 
새로운 이민 물결
 
1965년 미국 이민법이 크게 개정되면서 한인 이민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당시 존 F.케네디 대통령은 유럽인으로 편중된 이민법을 개혁해 아시안에 대한 이민 제한을 제거했다. 실제로 1940년 센서스 당시 전국 한인은 8570명에 불과했으나 80년에 들어서 35만4593명으로 거의 40배가 급증했다.  
 
특히 70년대 들어 한국인들의 집단 이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몇십 달러만 가지고 맨땅에서부터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대한항공이 정기 노선을 개설한 것도 1972년이었다.  
 
한인 이민이 정점을 찍은 것은 1985~1987년대. 연간 3만5000여명의 한인이 미국으로 향했고, 한국은 멕시코와 필리핀에 이은 3대 이민국이 되기도 했다.  
 
LA한인타운의 조성  
 
1930년대에는 약 650명의 한국인이 LA에 거주했다. 그들은 주로 야채와 과일 배급에 중점을 둔 비즈니스를 뒀고 교회, 식당 및 지역 사회 단체를 설립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인종 계약법과 경제적 제약으로 인해 지역적으로 활동에 제한이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가파른 경제 쇠퇴를 기점으로 빈 상업 공간과 사무실 공간이 넘쳐났고 이는 부유한 한국 이민자들을 끌어들였다.  
 
1967년쯤 올림픽 불러바드 선상에 한인식당 2개와 한인마켓 2개가 생겼다. 1970년에는 미국에서 가발이 크게 유행하면서 가발업 종사하는 한인들이 상당한 돈을 벌며 모여들었고, 1973년에는 석유파동을 계기로 주유소를 차려 크게 번창하기도 했으며 또 한인 노동력을 모아 일을 하는 청소업도 유행했다.
 
1970년대 후반, 올림픽 대로와 8가 지역 대부분의 업체는 한인들의 소유였다.  경제 호황은 한인 언론 매체와 지역 사회 단체의 설립으로 이어졌고, 이는 한인들의 정체성을 굳히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주민들은 1982년에 첫 번째 한인타운 사인을 설치하기 위해 성공적으로 로비했다. 이는 현재 2.7 스퀘어 마일의 한인타운 공식 구획이 지정(2010년)되는데 시발점이 됐다.  
 
높아지는 한인들 위상
 
센서스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인 인구는 192만6508명이다. 20년 전인 2000년 기준 107만6,872명보다 78%가 늘었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이민자 중 80%가 10년 이상 미국에 거주한 경우였다.
 
한인 가구의 중간 소득은 7만 2200달러였고, 한인 2세 가구의 중간소득은 8만 8100달러였다. 한인 인구 중 빈곤 계층에 속하는 인구는 전체의 11%로 한인 2세만 살펴볼 경우 빈곤계층이 전체의 9%였다.      
 
지난 2012년 기준 전국의 한인 업체 수도 22만4891개로, 매출만 1078억1323달러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다. 특히 한인 사업체는 중국계 52만8702개, 베트남계 31만864개 다음으로 세 번째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정계는 물론 재계와 문화계 등 다양한 한인 리더들이 곳곳에 포진해 한인의 명성을 높이고 있다. 또한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한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 한국 문화 콘텐츠들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시장 사로잡고 있으며 K팝으로 시작된 미국 내 한류 열풍은 한국문화와 한국상품 등 한국 자체를 동경하고 선호하는 현상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장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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