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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영웅전] 알래스카 매입한 수어드 국무장관

학교를 28개월만 다닌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1년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 동부 귀족들의 냉대가 심했다. 그를 도울 막료조차 찾기 어려웠다. 링컨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윌리엄 수어드(William Seward·사진)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수어드는 뉴욕 주지사와 상원의원을 지낸 거물이었다.   그 무렵 러시아는 크림전쟁에서 이기고도 빚에 쪼들리는 입장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부터 7000㎞ 떨어진 알래스카를 다스릴 의지도 여력도 없었다. 언제인가는 건설해야 할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공사비도 부족했고, 어차피 알래스카는 영국령 캐나다에 합병될 운명이라며 체념하고 있었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영토가 탐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알래스카를 차지하면 적국인 영국(캐나다)을 포위하는 효과도 있어서 전략적 가치가 작지 않았다. 알래스카의 광물 매장량이나 어족 자원은 당시에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알래스카 매매 의중을 드러내자 수어드는 재빨리 링컨 대통령과 상의하고 매입을 서둘렀다. 면적 172만㎢에 가격은 720만 달러였으니 평당 0.014센트였던 셈이다.   그런데 의외로 상원의 반대라는 난관에 부딪혔다. 그들은 “수어드의 냉장고(Seward‘s icebox)를 왜 사야 하느냐”면서 “수어드의 바보짓(Seward’s folly)”이라고 빈정거렸다. 수어드는 우선 자기 돈으로 알래스카를 매입하는 계획도 생각해 봤으나 링컨이 반대하고 자금 사정이 만만치 않자 상원의원을 매수하기로 했다.   마침 자본이 다급했던 주미 러시아 공사(E. von Stoeck)가 매수 자금을 빌려줬고, 상원을 설득해 매입에 성공했다. 링컨은 알래스카를 밟아보지도 못하고 암살되는 바람에 공로는 다음 대통령에게 넘어갔다. 지도자의 자질은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다. 그는 중국 상하이 총영사(조선 공사 겸임)를 지낸 조지 수어드의 형이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알래스카 국무장관 수어드 국무장관 알래스카 매매 윌리엄 수어드

2024-09-09

이미리내 ‘이름 없는…’ 한국인 첫 사로얀 문학상

장편 소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8 Lives of a Century-Old Trickster)’을 쓴 작가 이미리내(사진)가 한국인 최초로 윌리엄 사로얀 국제문학상을 받았다.     윌리엄 사로얀 재단은 지난 24일 윌리엄 사로얀 국제문학상 소설 부문에 이미리내 작가의 작품을 선정했다.     이 작가의 첫 소설인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은 여자 주인공이 일제강점기와 독립, 6·25전쟁 등을 겪으며 소녀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심사위원들은 격동의 시기를 미스터리 장르로 풀어낸 이 작가의 작품을 “강하고도 약한 인간 본성에 관한 아름답고 심오한 이야기”라고 평가했다. 또 “서정적이면서 기억을 환기하는 문장들은 한쪽, 한쪽 천천히 작품을 음미하고 싶게 만든다”고 평했다.     이 작가는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뒤, 미국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이후 홍콩에서 거주하며 현지 대학원에서 문예 창작 수업을 들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어와 영어 습작을 병행했다. 그는 이번 소설을 영어로 집필해 영국과 미국에서 먼저 출간했다. 미국 최대 출판사로 알려진 하퍼콜린스에서 출간을 담당했다. 한국어판은 지난달 위즈덤하우스를 통해 출간됐다.     한편, 윌리엄 사로얀 국제문학상은 미국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윌리엄 사로얀을 기리며 지난 2003년 제정된 문학상이다. 윌리엄 사로얀 재단과 스탠퍼드대 도서관이 공동으로 주최하며 2년마다 소설과 비소설 부문에서 신진 작가의 작품을 뽑는다. 김경준 기자미국 국제문학상 윌리엄 사로얀 국제문학상 수상 최초 윌리엄

2024-08-26

김준자 작가 '간추린 영미 문학' 출간

김준자(실비치) 작가가 최근 ‘세련된 문화인을 위한 간추린 영미 문학’을 출간했다.   한국의 도서출판 밀알서원이 펴낸 이 책은 영미 문학의 입문서다. 김 작가는 중세부터 근세까지 총 24명 문호를 선정, 그들의 대표작을 소개했다.   책에 등장하는 문호는 제프리 초서, 윌리엄 셰익스피어, 존 밀턴, 제인 오스틴, 너새니얼 호손, 브론테 자매, 허먼 멜빌, 마크 트웨인, 오스카 와일드, 서머싯 몸, 버지니아 울프, 스콧 피츠제럴드, 윌리엄 포크너,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조지 오웰, 아서 밀러 등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이들이다.   김 작가는 “평소 칼럼으로 영미 문학을 소개하다가 책을 쓰기로 결심했는데 완성까지 7년쯤 걸렸다. 영미 문학에 관해 알게 되면 그 영향을 받은 영화, 오페라, 연극, 미술, 음악 등도 쉽게 즐길 수 있다. 서양 고전과 명작을 섭렵하며 얻는 통찰력과 지혜로 글쓰기와 대화에도 자신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작가의 책은 한인 운영 서점, 온라인 서점 등에서 살 수 있다.   올해 80세인 김 작가는 화학을 전공하고 3M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50대 후반 글을 쓰기 시작, 논픽션 작가로 활동 중이다. 2001년 이후 ‘삶을 풍요롭게 하는 생활의 지혜’ ‘하룻밤에 읽는 셰익스피어 전집’ ‘한인보’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 ‘새로운 인생의 문턱’ 등을 출간했다. 글·사진=임상환 기자김준자 영미 영미 문학 김준자 작가 피츠제럴드 윌리엄

2024-06-06

[열린광장] 2월은 맑고 밝은 달

2월이 왔다. 2월은 열두 달 가운데 날자 수는 가장 적지만 맑고 밝은 날이 가장 많은 달이기도 하다. 영어의 2월인 페브러리(February)는 “모든 일을 맑게 해준다”는 뜻의 라틴어 페브루아리우스(februarius)에서 비롯됐다. 2월을 맑고 빛나는 달이라고 하는 이유다.       2월은 다른 달처럼 30일이었는데 로마 황제 줄리우스 시저가 2월에서 하루를 떼어내서 자기 이름자와 비슷한 7월(라틴어 Julius)에다 붙이는 바람에 2월이 29일이 되었고, 또한 다른 황제 아우구스트도 2월에서 하루를 떼어내어 제 이름과 같은 8월(August)를 31일로 만드는 바람에 2월은 28일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올 해는 4년마다 (음력은 5년 마다)돌아오는 윤년의 해이기 때문에 2월이 29일이다.   2월에도 많을 일들이 있었다. 미국의 우주비행사 존 글렌 2세는 1962년 2월20일 지구를 세 바퀴 도는데 채 5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비행기로 LA와 뉴욕을 3시간30분만에 돌파 당시의 대륙횡단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은 1972년 2월21일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당시 중공)을 방문하기도 했다.       2월에는 다양한 기념일도 있다.  2일은 성모 마리아의 순결을 기리는 촛불 행사 ‘캔들머스(성촉절 (聖燭節)’와 ‘그라운드 혹 데이 (Ground-Hog Day)’ 라는 독특한 행사도 있다. ‘그라운드 혹 데이’는  땅굴 속에 있던 ‘마모 (다람쥐의 일종)’가 굴 바깥으로 나왔다가 제 몸의 그림자가 비치면 굴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제 몸의 그림자가 바치지 않으면 봄이 왔다며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4일은 잘 알려진 밸런타인데이다.       그리고 10일은 우리의 전통 명절인 설날이다. 까치가 아침에 집 앞에 와서 울면 반가운 손이 온다는 속설처럼 올 설날엔 이 까치가 훌륭한 선물을 물고 찾아와 울어 줬으면 좋겠다.   2월은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4명의 생일이 있는 달이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등이다.  이중 해리슨 대통령은 취임 한 달 만에 타계하는 비운을 겪었다.     2월에 조지 워싱턴의 생일(22일)이 있어 매년 2월 셋째 월요일이 ‘프레지던트 데이’ 공휴일로 지정됐다. 다만 몇몇 주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생일인 12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유명한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도 2월에 태어났다. 1847년 2월 11일생인 그는 정규 교육을 3개월밖에 받지 못했지만 전기를 발견하고 전구와 축음기 등 1093개의 발명 특허를 받았다. 그래서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다” 라는 그의 명언이 더 공감을 얻고 있다.  윤경중 / 목회학박사·연목회 창설위원열린광장 대통령 에이브러햄 대통령 윌리엄 대통령 로널드

2024-02-04

[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허셜 남매

헨델이 그랬던 것처럼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한 윌리엄 허셜은 모차르트가 활동하던 시절 유명한 작곡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총 24곡의 교향곡을 작곡했으며 바이올린 협주곡도 무려 7곡이나 작곡하여 명실공히 서양음악 대가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그뿐만 아니라 악기 연주에도 능통하여 오보, 첼로, 그리고 오르간 연주자로도 명성을 날렸다.     천체물리학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음악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가 인생 후반부에서 천체물리학에 큰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천체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관찰했는데 그의 업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망원경을 이용해서 태양계의 일곱 번째 행성인 천왕성을 찾아낸 것이다. 사실 천왕성도 자세히 살피면 맨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너무 어두워서 그때까지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천왕성을 발견한 허셜 자신도 처음에는 배경별이거나 꼬리가 없는 혜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태양계의 행성으로 밝혀졌다.   그는 망원경을 만드는 일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자신이 직접 제작한 망원경으로 천왕성을 발견한 것은 물론이고 평생 총 400여 대의 망원경을 만들어 그 중 60대나 유럽의 여러 천문학자에게 팔았다.     윌리엄 허셜에게는 띠동갑인 여동생 캐롤라인이 있었는데 그녀도 천문학자였으며 오빠의 작업을 많이 도왔다. 윌리엄이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찰하면 캐롤라인은 오빠가 구술하는 것을 곁에서 받아 적는 일을 했다. 사실 천왕성도 윌리엄 혼자서 찾은 것이 아니었다. 남매가 함께 하늘 구석구석을 뒤지다 발견했기 때문에 윌리엄은 누이동생과 함께 발견했다고 발표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여자들의 사회 참여가 극히 제한되어 있어서 주위 사람들이 캐롤라인의 이름을 빼버린 까닭에 윌리엄 허셜 이름만 남게 되었다. 윌리엄이 죽자 캐롤라인은 다시 독일로 건너가서 이번에는 오빠의 아들을 도왔다. 조카도 천문학자였는데 캐롤라인 고모와 함께 아버지가 남긴 자료를 정리하고 세상에 알리는 일을 했다.   허셜은 태양계도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인류 최초로 알아냈으며 은하의 모양이 디스크처럼 생겼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는 토성의 위성을 두 개 찾아냈고 자기가 발견한 천왕성에서도 위성을 두 개 찾았다. 무엇보다도 허셜의 또 다른 업적은 자연광에서 적외선을 발견한 것이다. 허셜은 82세가 되던 해에 영국 왕립천문학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지만, 이듬해에 죽었다.   천왕성은 윌리엄과 캐롤라인 허셜 남매가 공동으로 발견했다. 영국 국왕은 그 공로로 윌리엄에게는 기사 작위를 수여했고 캐롤라인에게는 여성으로는 최초로 연봉을 받는 천문학자로 임명했다. 열 살 때 심하게 아픈 후유증으로 한쪽 눈을 실명하더니 성장도 멈춰서 평생 초등학생 키로 살았던 불우한 여성이었던 캐롤라인은 어머니의 반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는데 오빠 윌리엄이 영국으로 데리고 가서 성악과 수학을 가르쳤다. 오빠가 오르간을 연주하는 성가대에서 소프라노 독창을 맡기도 했다. 캐롤라인은 수많은 혜성과 성운(나중에 외부 은하로 밝혀짐)을 발견하여 그녀가 85세가 되던 해 여성으로는 최초로 왕립천문학회 명예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윌리엄 허셜이 천문학과 음악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천재라면 그녀는 여성 사회 참여의 선구자였다. (작가)       박종진박종진 이야기 캐롤라인 허셜 윌리엄 허셜 천체물리학 이야기

2023-08-11

[살며 생각하며]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158년전 1865년 4월 14일, 성금요일 밤 10시,워싱턴 포드극장에서 ‘Our America Cousin’ 이란 연극이 공연중이었다. 2막이 끝나고 링컨 대통령부부가 2층에 마련된 특별석에 입장하면서 극이 잠시 중단되었다가 3막 2장 클라이 막스때 1700명 관중의 박수소리를 비집고 ‘탕’, 날카로운 한발 총성이 극장을 갈랐다. 이어 2층 난간에서 피묻은 칼을 머리 위로 치켜든 한 사내가 뛰어내리는가 하더니 곧장 무대를 가로지르며 ‘시크 셈페르 타라니스’하고 외쳤다.   라틴어로 ‘영원한 폭군이여! 라는 말로 “남부는 복수했다.”를 뜻한다.   이날 링컨은 배우출신, 남부지지자 존 윌크스 부스가 지근거리에서 쏜 권총에 뒷머리를 저격당하였다. 재임 시작 한달 열흘, 전쟁 종료 5일이 되는 날이다. 워낙 위험한 부위의 총상이라 백악관까지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마차로 이동할수 없어 급한대로 극장앞 윌리엄 피터슨 하숙으로 옮겼으나 이튿날 아침 7시 22분 사망하였다. 향년 56세, 미 역사상 첫 대통령 암살이다.   부스와 공범들은 이날 밤 링컨은 물론 부통령 앤드류 존슨, 국무장관 윌리엄 슈어드를 살해한 뒤 혼란을 틈타 연방정부를 전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존슨은 무사했고 슈어드는 치명상을 입긴 혔지만 2년 후 완치되어 국무장관에 복귀, 1867년 제정 러시아로부터 720만 달러에 알래스카를 매입하여 미국영토에 편입시킨 국무장관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링컨의 유해는 열차에 실려 수백만 명의 애도 속에 뉴욕을 거쳐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까지 1700마일을 돌아 4월 19일 엄숙하게 장례되었다. 범인이 노렸던 혼란은 있었지만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슬픔 속에 링컨이 꿈꿨던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미합중국의 숭고한 가치에 일심으로 동참하게된다. 그리고 탄생 100주년되는 1909년, 1달러 지폐에 그의 초상화가 새겨졌고, 1922년에는 기념관이 개장됨으로써 영원한 대통령으로 세계인의 가슴에 살아숨쉬게 된다.   링컨은 임기중 노예 제도를 폐지했지만 갈등과 분열로 연방주의가 훼손되는것을 경계했다.   헌법의 기본정신인 절차의 정당성을 따라 법과 제도를 마련, 흑인에게 자유를 소유주에게는 보상을 통해 손해를 보전하는 등 ‘관대한 화해를 통한 국가 대통합’을 이룰 ‘원대한 계획’을 세워 점진적인 개혁을 하려 하였다. 그런데 암살이라는 변수가 생긴 것이다.   졸지에 링컨의 잔여 임기를 물려받은 앤드류 존슨은 하원에서는 탄핵, 상원에서 1표 차이로 면했을 정도로 무능했고 그후 100년, 그 어떤 대통령도 링컨이 선보인 인종차별, 인권 같은 화두에 관심이 없었다. 이러니 남부곳곳은 흑인에 대한 린치가 일상이었고, 소유주 없는 흑인은 죽여도 재산권침해가 아니므로 면책된다는 억지가 힘을 얻고 있었다.   1866년, 테네시주에서는 6명의 퇴역군인에 의해 악명높은 극우단체 KKK가 조직되었는가 하면, 1868년 루이지아나의 한 소도시에서는 선거에 참여하려했다는 이유로 200여 명의 흑인이 살해된다. 이어 남부 곳곳은 해방후 일본이 조선인을 때려 잡기 위해 했던 것처럼 ‘자경단’을 조직, 흑인테러를 정당화하려 했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하나님 협력 링컨 대통령부부 조직 흑인테러 국무장관 윌리엄

2023-07-07

[김인호의 아웃도어 라이프] 매년 100만명 찾는 해안가 언덕 대저택

중부 캘리포니아의 해안가 샌시메온(San Simeon) 언덕에 허스트 캐슬이라는 유명한 관광명소가 있다.   지금은 이곳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어 자유롭게 관광을 할 수 있지만 1900년대 초에는 오직 초대받은 사람들만 출입이 가능했었다.   허스트 캐슬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라는 사람이 무려 28년이란 세월에 걸쳐 중세 유럽풍 건축물에 희귀한 예술품들을 접목시켜 완공했다. 총 58개의 침실과 60개의 욕실, 18개의 응접실 그리고 수영장, 테니스코트, 극장 등이 있는 호화 저택이다.   허스트 캐슬의 탄생은 이곳 땅을 처음 구입한 아버지 조지 허스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조리 주의 농부였던 조지 허스트는 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후 은광을 개발하여 큰 부자가 된다. 그는 정치에도 관여하여 상원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외동 아들인 윌리엄 허스트에게 언론 사업을 맡겨 아들 또한 큰 성공을 하게 된다.   조지 허스트는 현재 허스트 캐슬이 있는 샌시메온에 땅을 구입한 후 패밀리 랜치와 캠핑장소로 사용했다. 그래서인지 아들 윌리엄에게 이곳 샌시메온은 어린시절 추억이 담긴 놀이터와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모친과 함께 유럽의 여러 문화유적을 탐방하면서 유럽의 건축과 예술품을 일찍 접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윌리엄 허스트로 하여금 샌시메온의 언덕에 자신이 꿈꾸던 멋진 집과 랜치를 건축하게 만든다.   1919년 착공해서 1947년 완성된 허스트 캐슬은 유럽의 건축물들을 모방하여 지었으며 모든 건축 자재들을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의 수도원이나 성에서 사용된 자재 및 예술품들을 그대로 옮겨와 지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예술품을 구입하여 독특하게 자신의 빌라를 만든 재벌로서 게티를 들 수 있는데 동시대의 인물로 허스트와 게티는 유럽의 명품들을 구입하는 경쟁자의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허스트는 건축을 위해 줄리아 모건이라는 여성 건축가를 고용했는데 여성의 지명도가 상당히 낮았던 1900년대 초에 이러한 건축을 여성에게 맡기게 된 것이 상당한 아이러니였다. 윌리엄 허스트는 먼저 3명의 남성 건축가들에게 건축 제안을 했지만 모두 거절당하였다고 한다.   줄리아 모건이 선정된 이유는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당시 도시의 건물 80%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설계한 빌딩은 무너지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즉 허스트 캐슬은 아버지 조지 허스트가 구입한 땅에 아들 윌리엄 허스트의 열정과 자금을 들여 줄리아 모건이 지었다고 할 수 있겠다.   수많은 건물외에도 넓은 목장에 과수원을 조성하고 사설 동물원을 만들어 마치 아프리카 사파리를 온 것처럼 얼룩말, 사슴, 기린 등을 방목했다.   전 세계에 많은 집을 소유한 허스트였지만 이곳 샌 시메온의 허스트 캐슬에서 거주하면서 본인이 소유한 사업체들을 운영하는 사무실로도 이용하였고 정치인과 할리우드 배우들과의 사교장으로도 사용했다. 당시 세간에서는 누가 허스트의 초대를 받았는지가 큰 관심거리였다고 한다. 허스트의 초대를 받은 유명인들로 찰리 채플린, 게리 그랜트, 클라크 케이블, 제임스 스튜어트 같은 배우들과 캘빈 쿨리지,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등 거물급 정치인들이 있다.   윌리엄 허스트가 할리우드 배우들과 가까이 지내게 된 이유는 그의 여자친구였던 배우 매리온 데이비스와의 관계도 있다.   윌리엄 허스트는 부인과 5자녀가 있었지만 내연의 관계였던 매리온 데이비스와 허스트 캐슬에서 거주하였고 부인은 자녀들과 동부에서 살았다고 한다.   당시 할리우드 최고 명성의 여배우였던 매리온이 허스트 캐슬의 손님 초대와 영접을 맡았다고 한다.     1930년대 경제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도 캐슬을 계속 건축하고 최고의 명소로 만들었던 허스트도 연방 하원의원을 역임하고 대통령 경선에도 참여하는 등 씀씀이가 커지면서 말년에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허스트는 1904년 민주당 대선 후보였다. 많은 면에서 그는 트럼프 전 대통령을 연상하게 하는데 먼저 캠페인 자금을 본인의 자산으로 충당하였고 타인종 특히 멕시코인에 대한 인종적인 편견이 있었다.   또한 본인의 언론사업 확대를 위해 엘로우 저널리즘 혹은 태블로이드 저널리즘으로 알려진 과도하게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인 소재, 유명인의 스캔들 같은 가십성 보도행태를 보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51년 허스트가 타계한 후 가족들은 이곳을 캘리포니아 주 정부에 기부하는데 1958년에 허스트 샌시메온 사적지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면서 매년 100만 명에 가까운 방문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모든 방문객들은 투어를 통해 고즈넉한 유럽의 예술품들과 허스트와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생의 즐거움과 허무함을 생각해보게 된다.   예약제로 시행되는 허스트 캐슬 관광은 자리가 있으면 방문자 센터에서 티켓을 구할 수 있지만 미리 예약을 하는 게 좋다.   허스트 캐슬을 처음 방문하는 경우 본관 1층 투어와 여러 개의 침실과 도서실을 둘러보는 본관 2~3층 투어가 추천되며 바깥 정원과 부엌을 둘러보는 투어 그리고 예술품을 둘러보는 투어 등 다양한 투어 옵션이 있다.   캘리포니아 해안선을 따라 모로 베이에서 북쪽으로 약 30분을 운전하면 캠프리아가 나오고 다시 10분을 북상하면 샌시메온이 나온다.   현재 이곳 샌시메온은 숙박시설들이 모여있는 조그마한 마을인데 허스트 캐슬을 지을 당시 노동자들을 위해 형성된 마을이다. 샌시메온 앞바다에 보면 피어가 설치되어있는데 이곳을 통해 허스트 캐슬에 사용할 자재들을 실어 날랐다.   캐슬의 위치는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허스트에게만큼 샌시메온 언덕은 세상 어느 곳보다 추억과 감성이 서려있는 곳이었다. 지금은 캘리포니아 최고의 관광명소로 변한 허스트 캐슬은 한 개인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수많은 사람에게 경이로움과 영감을 주는 귀한 장소가 됐다.   김인호씨   지난 20년간 미주 중앙일보에 산행 및 여행 칼럼을 기고하였으며 유튜브 채널 '김인호 여행작가'를 운영하고있다.김인호의 아웃도어 라이프 대저택 해안가 허스트 캐슬 윌리엄 허스트 조지 허스트

2023-05-25

[음식과 약] 영국 음식에 대한 편견

영국은 음식이 맛없는 나라로 유명하다. 이는 오래 묵은 편견이다. 과거 영국 음식이 맛없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영국인 스스로가 음식을 맛없게 먹어야 성공적 삶을 살 수 있다고 여겼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베스트셀러 『어머니들이 읽어야 할 자녀 양육 지침서』에는 열 살 미만의 아이에게는 말라빠진 빵에 미지근한 우유를 부어 만든 죽만 먹이라고 권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사람은 그렇게 맛없는 음식으로 어린 자녀를 훈육하여 금욕을 배우도록 해야 교육적이라고 믿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듯 음식의 맛보다 영양을 중시하고 배만 채우면 된다고 여기는 게 영국 식문화의 특징이었다.   그런 식문화가 반드시 단점으로만 작용하진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초라한 식량 배급에 영국인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애국심에 더해 음식이 맛없어도 된다는 관념 덕분이었을 거다. 하지만 전후 궁핍한 생활이 이어졌고 영국의 외식 문화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1960년대에 가서는 세계 최악의 음식을 파는 나라라는 오명까지 생겼다.   그렇지만 이런 영국의 상황은 이웃 프랑스의 요리사들에게는 커다란 기회였다. 영국의 음식작가 윌리엄 시트웰은 『외식의 역사』에서 프랑스의 요리사 알베르와 미셸 루 형제가 런던에 르가브로슈, 버크셔의 브레이에 워터사이드인을 열면서 영국의 외식 문화를 크게 바꿔놓았다고 설명한다. 루 형제는 다음 세대를 주도한 여러 명의 요리사를 가르쳤다. 그중 한 사람이 마르코 피에르 화이트이고 다시 화이트에게 훈련받은 사람이 흔히들 영국 하면 떠올리는 요리사 고든 램지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영국 요식업계 종사자들도 자신감을 얻어 프랑스 식당 형태와 서비스에 영국 전통 요리를 섞어내기 시작했다. 루 형제가 런던에 처음 레스토랑을 열었을 때까지만 해도 요리사는 모두 프랑스인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요리사의 국적이 다양해졌다. 영국 전통 요리가 부활한 것에 더해 세계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로 한식·중식·일식·인도식·중동식까지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게 됐다. 그렇다고 모든 식당이 맛좋은 요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영국 음식이 맛없다는 것만큼은 이제 지나간 이야기가 됐다.   과거 음식 맛이나 식당에서 제공되는 서비스가 지금보다 훨씬 덜한 나라가 한 곳 더 생각난다. 30년 전 한국이다. 국제 교류가 덜하고 경제 규모가 작던 시절이니 외식 경험도 그저 그럴 때가 많았다. 누군가 당시를 기준으로 우리의 식문화를 평가하려고 한다면 “한국이 얼마나 역동적인데 옛날 관점에서 평가하려고 하냐”는 반문이 나올 거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 다른 사람에 대해 바라볼 때 나는 어떤가? 생각해보자. 정재훈 / 약사·푸드라이터음식과 약 영국 음식 음식작가 윌리엄 과거 음식 요리사 알베르

2023-02-19

[음식과 약] 영국 음식에 대한 편견

영국은 음식이 맛없는 나라로 유명하다. 이는 오래 묵은 편견이다. 과거 영국 음식이 맛없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영국인 스스로가 음식을 맛없게 먹어야 성공적 삶을 살 수 있다고 여겼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베스트셀러 『어머니들이 읽어야 할 자녀 양육 지침서』에는 열 살 미만의 아이에게는 말라빠진 빵에 미지근한 우유를 부어 만든 죽만 먹이라고 권했다. 현대인의 눈에는 어린이 학대 같은 교육방식이다. 하지만 당시 영국 사람은 그렇게 맛없는 음식으로 어린 자녀를 훈육하여 금욕을 배우도록 해야 교육적이라고 믿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듯 음식의 맛보다 영양을 중시하고 배만 채우면 된다고 여기는 게 영국 식문화의 특징이었다.   그런 식문화가 반드시 단점으로만 작용하진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초라한 식량 배급에 영국인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애국심에 더해 음식이 맛없어도 된다는 관념 덕분이었을 거다. 하지만 전후 궁핍한 생활이 이어졌고 영국의 외식 문화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1960년대에 가서는 세계 최악의 음식을 파는 나라라는 오명까지 생겼다.   그렇지만 이런 영국의 상황은 이웃 프랑스의 요리사들에게는 커다란 기회였다. 영국의 음식작가 윌리엄 시트웰은 『외식의 역사』에서 프랑스의 요리사 알베르와 미셸 루 형제가 런던에 르가브로슈, 버크셔의 브레이에 워터사이드인을 열면서 영국의 외식 문화를 크게 바꿔놓았다고 설명한다. 루 형제는 다음 세대를 주도한 여러 명의 요리사를 가르쳤다. 그중 한 사람이 마르코 피에르 화이트이고 다시 화이트에게 훈련받은 사람이 흔히들 영국 하면 떠올리는 요리사 고든 램지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영국 요식업계 종사자들도 자신감을 얻어 프랑스 식당 형태와 서비스에 영국 전통 요리를 섞어내기 시작했다. 루 형제가 런던에 처음 레스토랑을 열었을 때까지만 해도 요리사는 모두 프랑스인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요리사의 국적이 다양해졌다. 영국 전통 요리가 부활한 것에 더해 세계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로 한식·중식·일식·인도식·중동식까지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게 됐다. 그렇다고 모든 식당이 맛좋은 요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영국 음식이 맛없다는 것만큼은 이제 지나간 이야기가 됐다.   과거 음식 맛이나 식당에서 제공되는 서비스가 지금보다 훨씬 덜한 나라가 한 곳 더 생각난다. 30년 전 한국이다. 국제 교류가 덜하고 경제 규모가 작던 시절이니 외식 경험도 그저 그럴 때가 많았다. 누군가 당시를 기준으로 우리의 식문화를 평가하려고 한다면 “한국이 얼마나 역동적인데 옛날 관점에서 평가하려고 하냐”는 반문이 나올 거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 다른 사람에 대해 바라볼 때 나는 어떤가? 생각해보자. 정재훈 / 약사·푸드라이터음식과 약 영국 음식 음식작가 윌리엄 과거 음식 요리사 알베르

2023-02-16

[열린광장] 맑은 달 2월을 빛낸 사람들

“글렌 주니어 만세!” 채 5시간도 안 돼 지구를 세 바퀴나 돌고 귀환하는 우주비행사 존 H, 글렌 Jr 가 타고 온 ‘프렌드십7(Friendship 7)’ 이 보이자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수천만의 미국인들이 일제히 외친 소리다. 이날이 바로 1962년 2월 20일이었다. 글렌은 6·25 한국전쟁이 끝난 뒤 시험 조종사가 되었고 나중엔 LA에서 뉴욕까지 3시간 30분의 대륙횡단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글렌은 연방 상원의원이 됐고 1984년에는 민주당 대선 예비 후보로 뛰었지만 낙선하기도 했다.   2월은 열두달 가운데 날짜 수는 적지만 맑고 밝은 일이 가장 많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2월의 영어 이름 페브러리(February)가 모든 일을 ‘맑게 해준다’는 뜻의 라틴어 februare 에서 유래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월에 태어난 미국 대통령으로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제 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등이 있다. 매년 2월 셋째 주 월요일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1732년 2월 22일생)을 기리는 연방 공휴일이다. 그리고 몇몇 주에서는 링컨의 생일인 2월 12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제37대 대통령인 리차드 닉슨은 1972년 2월 21일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비교적 맑은 사건이 하나 있는데 1985년 2월 12일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다.  이 선거를 ‘2·12 총선’이라 부르는데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반영 정치해금 인사들을 중심으로 신한민주당이 탄생했다. 또 한국의 13대 노태우와 14대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식 날짜가 똑같이 2월 25일이다. 2월 25일은 미국 헌법과도 관계가 있는 날인데 소득세에 관한 전권을 의회에 주어야 한다는 수정헌법 제16조가 발효된 날이기 때문이다.   2월의 특이한 행사로는 발렌타인 데이가 있다. 이보다 앞서 2월 2일은 ‘그라운드혹 데이(Groundhog Day)’다. 겨우내 땅굴에 머물던 ‘마모 (다람쥐의 일종)’ 가 이날 바깥으로 나와 해가 비칠 때 제 몸의 그림자가 생기면 아직 봄이 아니라고 판단해 다시 땅굴 속으로 들어가고 그림자가 생기지 않으면 봄이 왔다고 활동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캔들머스 (성촉절)’라는 행사도 2월 2일 열린다. 성모 마리아의 순결을 기리며 촛불 행렬이 열리는 행사다.   미국의 유명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도 1847년 2월11일 태어났다. 그는 정식 교육을 받은 기간은 3개월에 불과하지만 그는 전구 상용화에 성공하는 등  1093개의 발명 특허를 받았다. 그는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가지가 더 떠올랐다. 모 은행의 간부로 재직하고 있는 내 막내딸이 2월 11일에 태어난 것이다. 천재는 아닐지라도.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증경회장열린광장 초대 대통령 대통령 에이브러햄 대통령 윌리엄

2023-02-13

SBA 국제무역인지원센터 입주기업 탐방 '실크스톤홀딩스'

서울시의 우수 중소기업의 국내외 유통마케팅과 판로개척을 지원하며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만드는 중소기업 지원기관 서울산업진흥원(SBA, 대표이사 김현우)은 등촌동에 위치한 국제유통센터 내에 국제무역인지원센터를 운영 중이다. 2022년 초에 국제유통센터와 함께 국내외 판로를 개척하는 사람들을 ‘글로벌 마케터’로 통칭하였고, 국제무역인지원센터에는 ‘글로벌 마케터’중에서도 해외 무역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들이 입주해 있다. 우리 중소기업의 경쟁력이라는 어려운 화두에 대해 가장 쉽고, 솔직하게 풀어줄 이들은 어쩌면 국제 시장에 선보일 '숨은 한국 상품'을 찾는 국제무역인들이 아닐까. 이에 본지는 국제무역에서의 성장스토리와 생생한 현장 에피소드를 간직한 ‘대한외국무역기업인’들을 만나볼 기회를 마련해보았다.  (주)실크스톤홀딩스는 미국계 한국인 윌리엄 리 대표이사에 의해 2021년에 설립되었으며 농수산물 생산, 가공, 유통, 수출입을 진행하는 6차산업 융합기업이다. 주요 거래국가는 북미(미국), 서유럽(영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동유럽(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체코, 러시아), 서남아시아(인도, 네팔, 부탄) 등지이며 주로 B2G, B2B 형태로 거래하고 있다.   실크스톤홀딩스의 사업은 농업, 어업, 임업 생산지에서 원료를 구매하여 다양한 식품으로 가공 후 해외에 수출하는 것으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여기에 ICT 등 첨단기술이 접목된 가정용, 농업인용, 대단지형, 귀농귀촌형 등 다양한 스마트팜을 개발하고 보급함으로써 생산 단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저도 눈 앞의 이익 추구보다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기업가가 되겠습니다” 실크스톤홀딩스는 최근 미국계 스마트팜 기업 ‘스마트바이오팜(Smart Biofarm Inc.)’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유수 투자회사들의 견제를 받았지만, 스마트바이오팜 경영진의 적극적인 지지로 선택받게 되었다고. 회사의 화려한 규모보다는 성심성의껏 미래비전을 제시한 작은 회사를 선택해 준 것이 인상적이고 수익 추구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실천하는 이들이 실존한다는 것에 큰 영감을 받았다.   윌리엄 리 대표 역시 피땀으로 생산한 농산물이 좋은 바이어를 만나 농가의 고정적 수입으로 이어질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며 청년 엔지니어들과 함께 스마트팜을 개발하는 이유도 노지에서보다 양질의 농산물을 재배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더 나아가 식량부족으로 허덕이는 나라들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그는 전 세계가 식량부족 현상을 겪을 것으로 예측 중이다. 스마트팜 사업의 발전이 시급하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도 기술을 통해 인류의 문제해결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이제 막 출발선에 선 작은 기업이지만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 되겠다는 마음가짐을 다지고 있다.   윌리엄 리 대표는 좋은 상품과 홍보를 접목해 문화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발판으로 미국계 전시홍보전문 대행사 ‘마이스피씨오(MICE PCO)’를 인수하였고 농산물을 대량 생산하는 농업회사법인에 지분을 투자하여 대주주가 되기도 했다. 다음 단계는 물류기업과 운송업체 등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귀띔하면서 수출에 적합한 인증제도에 대해 준비를 마친, 역량과 잠재력이 우수한 한국 기업을 발굴하면 언제든 현재 실크스톤홀딩스가 연간 10회 이상 참가 중인 해외 현지 박람회 등을 통해 파트너사로서 홍보를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이라 밝혔다.   올해는 이처럼 연간 매출을 올리는 것보다 투자처를 찾고 회사를 인수하는 등 미래를 준비하는 데 중점을 두었지만, 그래도 창업년도보다는 30% 이상 성장한 결산 결과를 받아볼 것으로 예상된다며 내부고객인 직원들과 항상 따뜻한 미소와 관심을 건네주시는 SBA 국제무역인지원센터 관계자들 덕분에 사업이 안정화된 것 같다고 감사를 표했다.     한국의 식음료 역시 한류열풍을 따라 외국 소비자들에게 매력적인 아이템으로 급부상했는데, 현재 실크스톤홀딩스의 주력 수출상품 중 하나도 차(Tea)이다. 윌리엄 리 대표는 그동안 한국의 농수산물은 높은 가격 등으로 인하여 외국 진출이 어려운 면이 있었는데, 중저가 수요시장을 과감히 포기하고 한국의 전통 고급문화와 왕실 문화 등을 접목한 최고가 고급 전략으로 식음료 부문을 수출 품목으로 선택한 것이 적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식품의 수출은 단순히 상품만을 파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차만 해도 다도문화, 시화, 그림, 음악, 명상 등 한국의 전통문화를 함께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외국 박람회를 나갈 때 단순히 상품을 진열하는 것을 벗어나, 국악인이 연주하고 전통 서화를 벽에 걸어 문화를 함께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윌리엄 리 대표가 사업가로서 너무 먼 계획, 추상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면 큰 오해이다.그는 세계적인 차/음료계의 월드컵인 티 마스터스컵(TMC)의 한국계 유일한 국제 공인 심사위원이다.  그로 인해 전 세계 차 소비국과 생산국에 심사위원과 품평위원으로 누비는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  또, 국제기구, 외국계 대기업 등 회사원으로서의 화려한 업력도 가지고 있으며 대학에서는 전자공학과 컴퓨터과학을 전공하여고 대학원에서는 경영학석사(MBA)를 공부하여 사업을 융합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윌리엄 리 대표는 코로나19 이전, 즉 창업 직전까지 외국계 대기업에서 식품 원료, 차, 커피, 콩, 옥수수, 대두유, 밀, 곡물 등의 가격 동향을 미리 파악하고 거래하는 선물거래를 주업무로 근무했다. 그로 인해 경매시장, 유통시장, 국제박람회와 트레이드 쇼, 국제 컨퍼런스 등 F&B 분야의 최전선에서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었고, 이 업계에서는 국제적인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고, 현재의 글로벌 유통망도 자연스럽게 개척할 수 있었다고 한다.   미국 국적으로 미주, 유럽 등 서양권과 서남아시아권에 대한 유통망을 확보하고 있던 것은 그가 창업을 결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요약하면 중국, 동남아보다 비교적 경쟁이 덜한 지역으로의 수출망을 확보한 점, 바이오·ICT·인공지능·빅데이터 등 각종 첨단기술을 F&B 분야와 융합하여 외연을 확장할 준비성, 한국의 문화를 접목하여 꾸준한 홍보 이슈를 창출할 수 있는 문화지향성 품목이라는 3가지 장점이 바로 실크스톤홀딩스의 경쟁력이다.     24시간 열정을 발휘할 수 있는 열린 사무실, 저렴하고 맛있는 점심 ‘최고’ 윌리엄 리 대표는 미팅에서 계약 성사까지 모두 주간 업무시간 내에 마무리되는 미국이나 유럽에서의 경험과 달리 업무 외 식사나 술자리에서도 비즈니스 이야기가 오가는 한국문화가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걱정한 적이 있다고 한다. 또 관급 기관, 공공기관과 일하거나 계약을 맺을 때 미국에서는 간소한 서류만으로 계약 효력을 얻었는데 한국에서 사업가에게 요구되는 행정 서류의 종류가 무수히 많게 느껴졌다고도 했다.   이렇게 사업 현장에서 느낀 고민을 해소해 준 곳이 바로 SBA였다. 창업 이후 입주공간을 찾던 중 무역업에 해당하는 기업에 좀 더 기회가 열려 있는 국제유통센터를 알게 되어 새롭게 입주를 지원했다. 24시간 언제든지 사무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과 구내식당에서 저렴하고 맛있게 점심을 해결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다며 만족을 표했다.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화상회의 등도 비즈니스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긴 했지만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계약 성사 정도의 중요한 사안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악수도 하고 얼굴도 보고, 차 한 잔도 하면서 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윌리엄 리 대표는 올 한해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이태리, 캐나다, 미국 등 벌써 8개국을 방문하여 바이어들을 만나고 박람회나 포럼, 컨퍼런스 등에 참가할 수 있어 오랜만에 무역인으로서 즐거울 수 있었다며 그의 경영 철학처럼 기술과 문화와 사람이 조화된 듯한 한 해의 소감을 남기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강동현 기자 kang_donghyun@koreadaily.com실크스톤홀딩스 국제무역인지원센터 한국인 윌리엄 스마트바이오팜 경영진 중소기업 지원기관

2022-12-20

토마스 제퍼슨 센터 출간기념 헌정식

미국 건국정신을 연구하는 한인들 모임인 토마스 제퍼슨 센터 이종권 대표가 쓰고 토마스 제퍼슨 센터에서 편찬한 ‘이것이 미국독립선언문이다’의 출간을 기념한 헌정식이 23일 뉴저지주 리버에지에 있는 그레이스 루터란 교회에서 열렸다.     이 책은 지난해 10월 17일부터 12월 27일까지 두 달에 거쳐 난해하기로 유명한 토마스 제퍼슨의 독립선언문을 제목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분석해서 해설 강연한 것을 집대성한 것으로, 미국독립선언문의 역사적, 철학적, 어학적 배경이 설명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토마스 제퍼슨 센터는 “미합중국의 통치법인 헌법이 미국독립선언문의 토대 위에 제정되었으므로 그 헌법 아래의 각종 법률과 제도,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문화의 많은 부분도 독립선언문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독립선언문이 바로 미국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종권 대표는 “천부인권과 건국정신의 메시지를 미주한인은 물론 미국인들에게도 널리 전하고자 한다”며 “그것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건강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줄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여 이 책을 헌정한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토마스 제퍼슨의 자손인 린다 윌리엄 여사(목사)가 직접 참석해 환영사와 축사로 책의 출간을 축하했다. 또 성악가 주성배 씨와 피아니스트 김은영 씨가 축하공연으로 자리를 빛냈다. 장은주 기자 chang.eunju@koreadailyny.com토마스 제퍼슨 센터 이것이 미국독립선언문이다 이종권 대표 그레이스 루터란 교회 독립선언문 린다 윌리엄

2022-07-24

[기고] 불황 타개를 위한 경영 전략

제임스 갬블은 신시내티의 비누제조 전문가 윌리엄 벨 공장에서 8년간 견습공으로 일하면서 사업에 눈을 뜨게 된다. 그 후 갬블은 나이 양초제조업자인 알렉스 노리스의  딸 엘리자베스 앤 로리스와 결혼한다.     윌리엄 프록터는 영국에서 출생해 양털모직물 상점을 운영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와 신시내티에서 7년간 양초상점에서 일을 했다. 공교롭게도 프록터도 알렉스 노리스의 딸 올리비아 노리스와 결혼한다. 엘리자베스와 올리비아는 자매였다.     1837년 10월 31일 프록터와 갬블은 비누와 양초제조를 공동사업으로 시작하기 위해 ‘프록터 앤 갬블사(Procter & Camble Company)’를 세웠다. 갬블은 제조와 생산을 감독하고 프록터는 판매와 사무 감독을 책임지기로 합의했다.     그들은 사업자금이 충분하지 않아 7192달러로 회사를 설립했다. 프록터는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던 두 개의 4륜짐차, 마차, 두 마리 말을 팔았다. 마차와 말은 시내를 다녀야 했지만 자금 마련을 위해 모두 팔아야만 했다.     30대 중반의 두 사람은 신시내티의 작은 점포의 뒤뜰에서 쉴새 없이 일을 했다. 대형 철제 솥에 장작불을 피어 비누와  양초의 재료를 만들었고 이를 외바퀴 손수레로 소형 제조 공장으로 운반했다. 제품이 완성된 후에는 배달도 나갔다.     경기침체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신시내티에서 18개의 비누와 양초 제조공장을 운영할 수 있게 됐다.     1944년 P&G는 연방정부에 세제 특허를 냈다. 그간 실험을 통해 흰옷은 더욱 희게, 색깔 옷은 색을 더 밝게 하는 세제를 만들었다. 하지만 세계 2차대전으로 2~3년간 세제 제조를 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제조 공장을 신축할 수 없었고 기구나 기계의 확보도 어려웠다. 특히 생산에 필요한 적절한 원료 조달이 불가능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신제품 개발도 주저하게 됐다. 전쟁 기간 중 회사 수익이 줄어 들었고 연구 인력도 확보하기 힘들었다.     전쟁이 끝나자 회사는 ‘세탁의 날 기적(Washday Miracle)’을 표방하며 새로운 상품을 위한 팀을 구성했다. 제품명은 ‘Tide’라는 간단한 이름으로 짓기로 결정했다. 1946년 ‘Tide’ 제품을 시험하기 위해 뉴욕을 비롯해 여섯 개의 도시를 선정했다. 제품의 상품광고도 필요했지만 소비자의 반응도 중요했다. 직원들은 정규 제품을 만들어 각 가정을 방문해 무료로 배포하고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세제는 소비자의 입에서 입으로 효과가 전해지면서 인기가 높았다. 제품의 성공에 힘입어 1980년대에는 제조공장이 미 전국에 40개로 늘었고 24개국으로 진출했다. 자산은 최초 7192달러에서 65억 달러로 불어났다.   창업 후 P&G는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지속적인 명성을 이어갔다. 양초와 비누 제조에서 시작해 현재는 샴푸, 칫솔, 기저귀 등 다양한 소비제를 판매하는 다국적 기업으로 발전했다.   P&G의 성공은 새로운 제품 개발과 철저한 품질 관리에 있다. 또한 1, 2차 세계대전의 어려운 시기에도 경영진과 직원들이 힘을 합쳐 난관을 극복해 왔다. 여기에 미래의 시장을 예측하는 경영자들의 안목도 회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김기천 / LA카운티 중소기업 자문관기고 불황 타개 양초 제조공장 비누제조 전문가 윌리엄 프록터

202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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