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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자 꽃집] 경조사 명문 "꽃은 사랑이고, 위로이고, 감동이에요"

반세기 가까이 아름다운 꽃을 매개로 한인 커뮤니티와 함께 해온 꽃집이 있다.     꽃집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계정자 꽃집'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꽃을 통해 남가주 한인들의 희로애락을 함께해 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는 탄생과 죽음, 사랑, 위로, 축하, 추모의 모든 순간에 꽃을 선물한다.  어떤 날에는 꽃으로 새로운 인생을 화려하게 축복하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한 사람의 마지막을 배웅하며 남은 이들의 슬픈 마음을 위로하기도 한다.     LA 올림픽 가에 위치한 계정자 꽃집은 널리 알려진 대로 웨딩 꽃과 장례 꽃이 전문이며, 자타가 공인하는 경조사의 명문 꽃집으로 정평이 나있다.     "우리 삶의 경조사를 함께 하는 것이 바로 꽃이잖아요. 그런 만큼 책임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꽃을 보내는 분의 사랑과 위로, 감동이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라고 업체 측은 전했다. 이어 "앞으로도 가장 많이 찾으시고 가장 크게 만족하시는 계정자 꽃집으로 남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계정자 꽃집은 '웨딩 꽃 0순위'로 소중한 결혼식 꽃뿐만 아니라 장례식, 약혼, 돌, 회갑 등 다양한 행사 꽃이 전문이다. 축하용 화분이나 난초 플랜트도 전문적으로 취급한다. 특히 장례 꽃은 염가 봉사하며, 주문 즉시 신속배달한다. LA 올림픽과 세라노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다.   ▶문의: (213)388-1945   ▶주소: 3199 W. Olympic Blvd,                  Los Angeles 계정자 꽃집 경조사 명문 경조사 명문 사랑 위로 위로 감동

2024-10-28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호수에 주름이 생기는 이유

한 줄 나이를 먹으며 / 나무도 키가 크고 / 너도 깊어지곤 했지 /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 흩어진 물방울을 모으려 하면 / 쏟아지는 비가 되어 돌아오곤 했지 / 흠뻑 젖은 호수 위로 / 겹겹이 작은 파문을 만들고 / 네 위로 흐르던 하늘 / 보이지 않는 너의 심연 속으로 / 자꾸자꾸 내리다 보면 / 그대라는 마음 떨구지 못해 / 마음 한구석 화석으로 남아 /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재촉하곤 했지 / 책장을 넘기며 궁금한 널 찾아내려고 / 거울 속 길들여지지 않는 너를 향해 / 한 줄 주름을 그리곤 살아야 했지 / 만날 수 없는 네가 더 소중하고 그리워 / 하늘 먼 길 네게로 가곤 했지 / 호수엔 주름 하나 깊어지고       비가 내리는 호수를 향해 걷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호수는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 보고, 하늘은 둥근 호수를 향해 비를 뿌리고 있구나. 둘 중 누구 하나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구나.“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호수엔 파장이 셀 수도 없이 번져 간다. 파장은 모든 기억과 시간을 가장자리로 밀어내려 한다. 불가항력의 원칙처럼 끊임없이 밀려지다 보면 호수의 턱에 걸치게 된다. 어느 사이 파장은 다시 호수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빗방울이 떨어진 곳으로부터 동그랗게 번지고 있다. 중심에서 가장자리로, 가장자리에서 다시 중심으로 반복하고 있다. 와중에도 물결 사이 사이로 하늘이 비친다. 그렇게 하늘은 호수로 내려와 앉고, 호수는 하늘이 된다. 서로에게 자신을 비추고 투영해져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내 이마엔 주름이 세줄 그어져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어느 날 거울을 보다 발견하게 되었다. 눈가에 잔주름도, 입가에 팔자 주름도, 목에 늘어진 주름도 보게 되었다. 거울에 비친 주름은 그날 생긴 게 아닌 것을 알기에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더듬어야 했다. 햇빛에 눈을 찡그렸던지, 이마를 누르고 잠을 잤던 습관 때문인지 나도 모른다. 단지 오랜 시간 지나면서 훈장처럼, 상처처럼 만들어진 흔적, 나뭇잎에 단풍이 들듯 세월이 천천히 만들어간 결과임에 틀림이 없다.     호수의 주름과 거울에 비친 이마의 깊은 주름을 보았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피카소의 고독했던 ‘청색시대’를 떠올렸다. 그의 창작기간 중 가장 외롭고 힘들었던 시기, 청색의 하늘과 푸른 호수의 시간에 나는 푸른 얼굴을 가지고 기타를 치는 한 노인에게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그 작품명은 ‘늙은 기타 연주자’이다. 마티스에게 빨강이 중요한 색이듯 구스타프 클림트에게는 황금색이, 초창기 피카소는 청색이 중심이었다. 피카소의 청색은 특별하고도 개별적인 감정을 표현한다. 청색은 밤의 색이고 바다의 색이며 하늘의 색이었다. 나는 이것에 호수의 색을 더하고 싶다. 붉은색과 노란색이 생명과 열정을 표현하는 따뜻한 색이라면, 파란색은 깊고도 차가우며 허무와 빈곤, 그리고 절망에 직면한 고독의 색이었다. 블루는 캔버스에 칠해진 색을 넘어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고독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고독 없이는 어떤 예술도 창조될 수 없다. 나는 나 스스로 고독을 지켜 왔다.”라고 그는 독백했다. 노인의 깊은 주름이 오늘 호수에 주름이 생기는 이유가 된다면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호수와 하늘이 하나로 투영되듯이 그는 깊고도 우울한 청색의 시간을 이겨내며 호수에 주름이 생겨난 이유를 알아차린 세기의 화가가 아니었을까.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호수 주름 호수 위로 팔자 주름 오늘 호수

2024-09-30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어느 날 나는 노을이어요

어느 날 나는 노을이어요       입에 넣은 사탕은 달콤했어요   하늘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고요   손을 뻗어도 당신은 내 곁에 없어요       소란한 삶이 싫어 이곳에 왔어요   열 번쯤은 떠나왔고 몇 번은 도망쳤어요   멀리 보아도 당신은 보이지 않아요       그러지 말아야 했어요   잔가지에 걸린 하늘이 아득히 번져와요   꽃 한 송이 피워 당신께 가려고요       길에서 넘어진 노을을 주웠어요   흥건히 핏빛 되어 하늘에 걸려있어요   가까이 가면 뒷걸음치는 꿈을 꾸어요       우린 서로 다른 곳에 살고 있어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먼 곳이어요   서쪽 창가 물들은 고요는 아직 따뜻하고요       아무것도 아닌 게 될 때까지 밀려오고 있어요   하늘로 날아간, 슬픔 안으로 숨어버릴   어느 날 나는 노을이어요       호수를 바라 보고 서 있어요.     호수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지만 다정해요. 앉아서 바라볼까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서서 보려고 해요. 아침이 밝아 오는 호수 그리고 하늘, 하얀 물새들과 반짝이는 조약돌, 밀려오는 파도가 아름다워요. 이 세상을 떠날 때, 크고 위대한 당신 앞에 설 때 바로 이런 풍경이 펼쳐져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이런 생각도 가끔 하곤 했어요. 바라보지 못한 풍경, 만나지 못한 사람, 이야기꽃을 피우지 못한 사연들과, 안타깝게도 이 세상을 일찍 떠난 친구들의 이야기들과, 하늘 높이 날고 있는 저 물새들의 대화와, 하얀 거품을 물고 출렁이며 다가오는 파도의 사랑과 속삭임이 그리울 때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곤 했어요. 저 바다 끝 어둠을 뚫고 붉은 몸짓이 연기처럼 아니 안개처럼 피어나기 시작하네요. 수평선으로 번져 가는 붉은 하늘은 아주 크고 동그란 물방울처럼 떠 오르고 있어요. 육안으로도 보일 수 있을 만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수면 위를 차오르고 있어요. 호수가 낳은 신비한 알 같아요. 알을 깨고 나오는 아프락사스의 몸짓 같아요. 이제 그 몸이 미시간 호수의 품을 빠져나오려고 해요.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침내 하루가 떠올랐어요. 신기하기보다 경이로워요. 하루가 떠오르는 동안 고요는 모든 것들의 입을 잠잠히 정지시켜요. 멀리 파도가 밀려오고 있어요. 기다렸다는 듯이 모래가 쓸려 왔다 빠져나가요. 호수의 표면에 새의 깃털 같은 윤슬이 반짝거려요. 하루가 또 이렇게 시작되고 있어요.     호수를 바라 보고 서 있어요.     호수와 하늘이 마땅한 곳에 연분홍의 띠가 수평선 가까이 드리워져요. 어둠이 서서히 찾아들기 시작할 때쯤 하늘은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어요. 호수의 수평선 위로 붉은 물감이 퍼지듯 번져 갔어요. 느린 동작같은 풍경 속에는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낮이 밤으로 천천히 바꾸어 지고 있어요. 수평선 위에 띠처럼 번져 오던 노을은 벌써 하늘의 반을 덮어 가고 있어요. 그 반대편으로 하얀 보름달이 외롭게, 겸허하리만큼 의연하게 노을을 바라 보고 있어요. 이 풍경을 무어라 설명해야 하나요. 닮고싶은 풍경이에요. 일출과 일몰 사이로 하루라는 시간이 천천히 지나갔어요. 노을을 바라보다 보면 나도 노을이 되어 가요. 노을이 지듯 우리의 삶도 저물어 가겠지요. 그러나 낙담하지 마세요. 이제 우리 앞에 형형색색의 별이 뜰 거예요. 캄캄한 밤하늘에 등불이 되어주는 별들의 대화가 한창일 거예요.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온 당신의 길을 비취겠지요. 베개를 끌어안은 당신에게 잘 자라고 머릿결을 어루만져 주겠지요. 뭇별들이 수를 놓으며 엄마가 불러주던 자장가처럼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겠지요. 유독 당신의 새벽 창에 끝까지 남아 곤한 잠자리를 지켜줄 별빛 하나 보이겠지요.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노을 미시간 호수 때쯤 하늘 수평선 위로

2024-08-26

[이 아침에] 부케 캐년 산불

부케 캐년에서 성가대 세미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작은 언덕에서 커브를 도는 순간 도로 옆 비탈로 굴러 뒤집힌 차 한 대가 보였다. 중년의 백인 남성 혼자서 끙끙대며 덩치 큰 운전자를 꺼내려 했지만, 운전자는 의식을 잃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사고로 차 옆의 풀밭에는 불이 붙었다. 손으로 비벼도 바삭하고 부서질 정도로 마른 풀밭이었다. 화씨 100도가 넘는 불볕더위에 건조한 날씨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병물 서너 개면 너끈히 끌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불이었다.     운전하던 장로님은 얼른 갓길에 차를 주차했고 우린 급히 그쪽으로 뛰어갔다. 이곳의 급박한 상황을 알아챘는지 뒤차로 따라오던 일행 가운데 남자 몇 분도 달려왔다. 그 백인 남성은 친구를 차에서 꺼내 안전한 곳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이 팔과 다리를 붙잡고 들자, 머리가 땅에 질질 끌릴 것만 같았다. 얼른 달려가서 운전자의 머리를 받쳐 들고 같이 걸었다. 사람 머리가 그렇게 무거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     이 차선 도로 한쪽에서 불이 나니 도로는 금세 일 차선으로 좁아졌다.  차가 밀리자, 어르신 몇 분이 나서서 옛날에 많이 듣던 “오라이(all right), 오라이(all right)”를 외치며 교통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다른 운전자들과 “오라이”, “노”, “오케이” 등의 간단한 말과 수신호만으로 소통하면서 트래픽 문제를 해결했다.   준법정신이 투철해서 그랬을까 교통 상황은 제법 원활해졌다. “오라이”는 본토인 미국에서도 통했다. 역시 세계 공통어다.   잠시 후 노란색 안전 조끼를 입고 온 동네 분들이 스톱 사인 판까지 들고 와서 교통정리를 맡았다. 우리보고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밸리에 사는 코리안이라고, 코리안에 힘을 주며 알려줬다.  이때 나는 한국인인 것이 오지게 자랑스러웠다.   그동안 갓길에 누워있던 운전자의 입술이 하얗게 바짝 말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물 묻힌 수건으로 그의 입술을 축여줬다. 그리고 이마와 머리에 붙어 있던 자잘한 돌들도 조심히 물로 씻겨 내리고 피를 닦아 주었다. 선홍색의 피는 따뜻했고 약간 끈적였다.     불붙은 마른 들판은 바람이 없는데도 무섭게 빠른 속도로 타들어 갔다. 달리 손쓸 방법이 없어 불길이 언덕 위로 올라가는 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무섭네”라고 말했다.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잠시 후, 소방차와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휴대폰 신호가 터지지 않는 이곳 데드존을 벗어난 어떤 운전자가 신고를 한 모양이다. 운전자의 친구는 우리에게 고맙다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장로님은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그를 위로했다. 소방차가 오는 것을 보고 우리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날 지역 신문 웹사이트에는 부케 캐년에서 차량 전복 사고로 인해 산불이 발생했었다는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이리나 / 수필가이 아침에 부케 산불 언덕 위로 노란색 안전 백인 남성

2024-08-08

[문예 마당] 운동화 한 짝

  운동화를 한 켤레를 샀다. 무거운 발에서 벗어난 시원함일까, 자신의 직분을 다했다는 충만감일까, 새 신 옆의 헌 운동화들이 참으로 홀가분해 보인다.     새 운동화를 살 때마다 생각나는 신발 한 짝이 있다. 그 운동화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떠오르고 아버지를 생각하면 미움과 원망의 내 옛날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반대했다.     가시네가 중학교를 졸업했으면 됐으니 공장에 가 돈을 벌든지 미용기술 같은 것을 배워 시집이나 가라고 했다. 아버지가 반대하니 고등학교가 더욱 가고 싶었다. 다행히 장학생으로 학비를 면제받아 공짜로 학교에 다닌다는 말에 아버지도 더는 반대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한테 많은 빚을 진 기분이었다. 아버지한테 절대 부담을 지우지 않겠다던 내 결심과는 달리 학비를 뺀 책값 등등 모든 것이 아버지 몫이 되었다.                                                                   그래서 신고 다니는 내 운동화가 누렇게 색깔이 바래고 앞 두덩이 터져 발가락이 보여도 새 운동화를 사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내 운동화는 뒤축이 떨어져 걸음을 걸을 때마다 뒤축이 찰딱거렸다. 아무리 발가락을 안으로 구부려 운동화를 눌러도 터진 두덩이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너덜대는 운동화도 아버지의 무시도 다 견딜 수 있었지만 친구들 앞에서 구겨지는 내 자존심을 삭일 길은 없었다.     그저 내게 만만한 사람이 어머니였다. 나는 징징거리며 어머니를 졸라댔다. 아버지 몰래 새 신을 산다는 것이 어두운 숲속에서 마라톤을 하기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 친구들 앞에서 무너지는 내 자존심을 생각하면….     시장에서 본 그 하얀 운동화, 그것은 정말 훔치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났다. 울며 보채는 딸이 불쌍했던지 호랑이 시어머니보다 더 무서운 아버지 몰래 어머니가 새 운동화를 사주셨다. 그날 밤 나는 새 신을 가슴에 껴안고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했다.     다음날 여느 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하얀 운동화가 빳빳하게 세운 내 흰 교복 칼라와 맞물려 백조의 날개처럼 빛났다.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보란 듯이 허리를 쭉 펴고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도도하게 걸었다. 푹신한 쿠션에 둥둥 뜬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등굣길이 조금 더 멀었으면 싶었다. 신문지에 싸 온 헌 운동화는 뒤축을 구부려 실내화로 신었다. 차갑던 교실 바닥이 폭신폭신했다. 온종일 콧노래가 나왔다.     집에 오다 공원 벤치에 앉아 운동화를 가만히 만져보았다. 백합같이 보드라운 운동화가 흰 구름처럼 깨끗하고 사랑스럽다. 갈색 나뭇잎 하나가 팔랑 운동화 위로 떨어졌다. 나는 행여 빨간 물이 들까 봐 얼른 나뭇잎을 치우고 운동화를 탈탈 털었다. 집에 오자마자 먼지를 털어 마루 안쪽 구석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아껴서 오래오래 신어야지. 하얀 운동화 한 켤레가 온 집안을 반짝거리게 했다. 그동안 낡은 운동화 때문에 찜찜하던 기분을 싹 털어낸 나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공부를 더 열심히 하리라 생각하며 책을 펴들었다.     “저게 누구 신발이냐?” 외출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가 마루 위의 신발을 보고 노한 음성으로 물었다. 나는 아차 했다. 운동화를 아버지 눈에 안 띄는 곳에 두었어야 하는 것을 너무 흥분해 깜빡했었다.     “제 신인데요”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헌 운동화는 어쩌고”     “학교에”   “이런 맹랑한 것 봤나. 당장 가서 가져와. 한참 더 신어야 하거늘.” 아버지가 곧 나를 후려칠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다 떨어진 그까짓 운동화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 밤중에 가져오라고 해요. 내일 학교 갈 때 가져오라고 합시다.” 어머니가 옆에서 한마디 하자 “저 여편네가 자식들을 저렇게 망친다니까. 당장 가져와.”   나는 부리나케 집을 뛰쳐나와 학교로 향했다. 구부러진 그믐달 아래 질척질척 걷는 내 발길이 교수대로 끌려가는 사형수 같았다. 컴컴한 골목에서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기도 하고 누가 내 뒤를 따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벌벌 떨며 뒤를 돌아보면 내 그림자가 길게 멈춰 서곤 했다.     나는 엉엉 울면서 정신없이 뛰었다. 굳게 닫힌 교문을 부서져라 흔들며 나는 그 앞에 주저앉아버렸다. 꾸벅꾸벅 졸던 수위 아저씨가 눈을 비비며 교문을 열고 나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훌쩍대며 늘어놓는 내 얘기를 들은 수위 아저씨가 혀를 끌끌 차며 나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가 긴 복도를 돌아 교실 문을 열어주었다.     “너희 아버지, 참 대단한 분이구나.” 다정히 등을 쓸어주는 수위 아저씨의 말에 나는 그만 또 엉엉 울고 말았다. 아버지는 왜 나를 그렇게 미워할까, 나는 아버지의 딸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또 내 머리를 휘저었다.                                         공원을 지나오다 다리 위에 앉았다. 푸르스름한 하천이 달빛을 받아 잔잔한 윤슬을 반짝이며 졸졸 흐르고 있었다. “이 운동화를 다시 신으라고, 그럴 수는 없어. 아버지가 못 버리게 한다면 내가 버릴 거야.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저 다리 밑으로 던져버릴 거야.” 나는 운동화 한 짝을 다리 밑으로 휙 던져버렸다. 또 다른 한 짝을 던지려는 순간 아버지의 불꽃같이 노한 얼굴이 내 손목을 휘어잡았다.     안 돼! 나는 남은 한 짝을 가슴에 꽉 움켜쥐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다. 아버지한테는 오다가 운동화 한 짝을 물에 빠뜨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버지는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다음 날 새 신을 신고 학교에 갔다.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집에 오는 길에 다리 밑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오래되었다. 나름대로 내게 절약하는 습관을 가르치려 했던 아버지, 내가 무엇이든 쉽게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아버지는 이미 아셨을 것이다. 새 운동화를 살 때마다 하천에 던져버린 그 운동화 한 짝이 생각난다. 운동화도 쉴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이젠 미련 없이 버리자. 나는 새 신 옆의 헌 운동화들을 주섬주섬 플라스틱 봉지에 주워 담았다.   임지나 / 수필가문예 마당 운동화 수필 운동화 위로 운동화 때문 운동화 그것

2024-07-25

[우리말 바루기] 기지개를 ‘켜야’?, ‘펴야’?

나른한 오후, 잠이 솔솔 몰려오고 피곤이 쌓여 몸이 찌뿌드드한 것같이 느껴지면 하는 행동이 있다. 바로 ‘기지개’다. 손을 머리 위로 하고 몸을 쭉 펴 주면 몸의 긴장이 풀어지고 정신이 들기도 한다.   “지치고 피곤할 땐 기지개를 한번 켜 보라”고 권유하면, 어떤 이들은 ‘기지개를 펴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듯하다. ‘기지개를 켜다’ 못지않게 ‘기지개를 펴다’라는 표현도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펴다’는 굽은 것을 곧게 하는 행위, 움츠리거나 오므라든 것을 벌리는 행위를 나타낼 때 쓰는 단어다. 그렇기에 팔다리를 펴는 행위인 ‘기지개’에도 ‘펴다’를 결합시켜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될 법하다.   그러나 ‘기지개’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피곤할 때 몸을 쭉 펴고 팔다리를 뻗는 일’이라고 풀이돼 있다. 다시 말해 ‘기지개’에는 이미 ‘펴다’는 뜻이 포함돼 있다. 따라서 의미가 중복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펴다’가 아닌 ‘켜다’와 함께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간혹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를 키는 것이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에서와 같이 ‘기지개를 키다’로 쓰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이 역시 바르지 못한 표현으로, ‘기지개를 켜다’라고 고쳐 써야 한다.우리말 바루기 기지개 머리 위로

2024-06-25

[사진의 기억] 모내기

지난주에 서울로 기차를 타고 오면서 차창 밖으로 모내기를 앞둔 논마다 물이 찰랑거리는 풍경을 보았다. 예전에도 봄과 여름이 맞물리는 이 무렵이면 농촌에서는 논에 물을 대고 모를 심느라 분주했었다. 바지를 둘둘 말아 무릎 위로 걷어 올리고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모를 심는데 유난히 거머리가 많은 논에선 발끝부터 무릎까지 더 빈틈없이 중무장하곤 했다. 한번 살갗에 달라붙으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맹렬하게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에 물리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오죽하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다’는 표현이 생겼을까.   그러나 모내기 철에 찰거머리보다 더 무서운 게 가뭄이다. 긴 가뭄으로 논이 쩍쩍 갈라지는 바람에 모를 심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이웃 간에 서로 물꼬를 대려는 싸움이 빈번했다. 1년 농사의 성패를 가름하는 일이라서 사이좋던 이웃이라도 얼굴 붉히며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다행히 간밤에 비가 흡족하게 쏟아지면 다음 날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풀어져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농부의 마음을 농부가 알기에 서로 어제 일을 탓하지 않았다. 지금은 기계가 대신해주지만 70년대 농사는 거의 다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모내기가 한창일 때는 교실에 빈자리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고사리손이라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모를 심는 동안 아이들은 잔심부름을 맡았다. 논에 새참을 내가는 일이나 막걸리 심부름은 아이들 몫이었다. 물론 아이들도 싫지 않았다. 슬슬 날씨가 더워지는 참에 교실에 앉아 졸음을 참는 것보다 훨씬 즐거웠고 더구나 새참을 얻어먹는 재미에 신이 나서 논두렁을 뛰어다녔다.   이제 막 점심을 배불리 먹고 논에 들어갈 시간, 마음이 다급한 농부의 아내가 먼저 들어가 모를 배분하는 중이고 논두렁에 선 남편은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피우며 오늘 해치울 일을 가늠해보고 있다. 진흙투성이인 농부의 종아리 사이로 어느새 여름이 밀려오고 있다. 김녕만 / 사진가사진의 기억 모내기 진흙투성이인 농부 농부가 알기 무릎 위로

2024-06-02

[문장으로 읽는 책] 천 개의 찬란한 태양

돈이 떨어지자, 배고픔이 그들의 삶에 어둠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마리암은 배고픔이 순식간에 삶의 핵심이 되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 굶어서 죽는 것이 갑자기 현실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다리지 않으려 했다. 마리암은 어떤 집 과부가 마른 빵을 갈아서 쥐약을 묻혀 일곱 명의 자식에게 먹이고, 자신이 가장 많이 먹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 라일라가 말했다. “눈앞에서 제 자식들이 죽어가고 있어요.”     할레드 호세이니 『천 개의 찬란한 태양』   “내 아기만이라도 살려 주세요.” 지난주 아프가니스탄 카불공항 사진이 잊히질 않는다. 엄마들이 갓난아기들을 철조망 너머로 던졌다. 어떤 아기는 낯선 외국 군인 품에 안겼고, 어떤 아기는 철조망 위로 떨어졌다. 목숨을 건 생이별의 현장. 탈레반은 부르카를 입지 않은 여성을 총살했다. 21세기라고 믿기지 않는 야만의 지옥도다.    아프가니스탄 출신 미국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이다. 영화로도 유명한 전작 『연을 쫓는 아이』에 이어 또 한 번 아프간의 비극적 삶을 그렸다. 계속되는 전쟁과 혼란, 궁핍, 폭압적인 이슬람 근본주의로 고통받는 여성들의 얘기다. 스무살도 더 나이 많은 남자와 강제혼인하는 마리암은 결혼하며 처음 부르카를 입는다. “망사를 통해 세상을 본다는 게 낯설었다. …주변을 볼 수 없게 되니 힘이 빠졌다. 그녀는 주름진 천이 입을 질식시킬 것처럼 압박하는 게 싫었다.”   아름답고 역설적인 제목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카불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17세기 시 ‘카불’에서 따왔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찬란 태양 아프가니스탄 출신 철조망 위로 지난주 아프가니스탄

2024-05-29

[삶과 추억] 외롭고 지친 이들 위로한 사역자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이하 마가교회)를 이끌어 온 채동선(사진) 전도사가 15일 오전 4시 48분 카이저병원에서 별세했다. 62세.   유가족에 따르면 고인은 그동안 위암으로 투병하다 암이 간 등으로 전이돼 숨을 거뒀다.   고인은 생전 마가교회를 LA와 오렌지카운티 두 곳에 개척해 전도 활동에 앞장섰다. 지난 22년 동안 마가교회를 이끌며 이민생활 가운데 외롭고 힘겨움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고인은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내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30대 때 사업실패와 우울증에 시달린 뒤 신학에 매진해 마가교회를 개척했다.     고인은 지난해 1월 신년말씀 집회 때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지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사랑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평소 “내 묘비병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하나님이 용서한 자’라고 적고 싶다. 내가 아닌 하나님을 드러내는 자로 살고 싶다”고 말해왔다.   고인은 총신에서 헌법과 교회사를 가르친 채기은 목사의 손자,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한 채정민 목사의 증손자다. 유가족으로는 아내가 있다. 고인 장례 일정은 현재 협의 중이다.     ▶연락처: (626)786-1814 김형재 기자삶과 추억 사역자 위로 생전 마가교회 예수 그리스도 이하 마가교회

2024-01-15

[시] 비 갠 오후

  비 오는 날에는     작고 불편해도     불편함마저 추억이 되는 이 방구석     낡은 축음기에 LP판을 올리고     다악닥 바늘 끝으로     신경줄 긁는 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노래를       손배게 베고 듣다가 눈을 꽉 감는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은       잊었던 옛날이 물바가지에 차오르고       죄명도 모르는 거친 그리움으로 변해 있는데     어느새     푸르고 맑은 하늘에 솜구름이 모여     뭉실뭉실 피어 있다         거리를 걷는다         와우, 빗발이 패인 바닥에 하늘과 구름이 내려와 있네요,     검게 내려앉은 전봇대에는 전선이 길게 뻗어 있네요,     헉, 공벌레마냥 동글게 웅크린 두 개의 꽁초도 널브러져 있네요,         고인 물 위로 차들이 지나가면     하강한 여울목은     꼬부랑 할배가 되어     똑딱똑딱 열심히 방망이를 두들긴다         그 자리, 꼭 그 자리에서     그물코에 걸려 허우적대는 태양도     드러누울 곳 없이 포박당한 채     난감한 북새통,     붉은 깃 목.울.음은,     게딱지같은 초겨울 파란만장한 세상살이     불행과 고독이 진실로         피를 흘리는     생(生)놀이 닳아져라, 서녘 하늘이     검붉게 충혈된다         눈물꽃이 망울망울 핀다,     문득문득 사는 게 목이 멘다, 강양욱 / 시인시 서녘 하늘 꼬부랑 할배 위로 차들

2023-12-07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언덕에 대한 소회

새벽 언덕을 걸어본 사람은 안다. 언덕 위로 펼쳐진 안개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만큼 뒷걸음질친다는 것을. 언덕 끝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념 속에 있었다는 것을. 삼척 정라진 언덕을 오르면서 알 수 없는 황홀에 잠겼었다. 땅이 겹쳐 천천히 내게로 다가와 이마를 만지며 뒤로 물러섰고, 작고 투명한 물방울 입자가 온몸을 향해 친구의 이름 위로 날아 올랐다. 풀섶 위로 나지막히 내려 앉은 유리구슬의 유희. 풀벌레 노래하는 새벽 언덕은 한창 무르익은 학예회 무대 같았다. 그날 우리는 언덕을 넘어 작은 통통배를 탔다. 그리고 12시간의 거친 항해 끝에 친구가 기다리는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친구들과 밤 부두를 걸으며 오징어잡이 배들이 켜놓은 휘황찬란했던 집어등의 수만큼이나 그리움이 조각들이 밤 하늘 별만큼 가득히 저미어 왔다.   소학교를 가기 위해 언덕 두 곳을 넘어야 했다. 학교 가까운 언덕은 눈 오는 날이 장관이었다. 사내 아이들은 종이 널판지를 깔고, 책가방을 깔고 눈길을 빠른 속도로 내려왔다. 단발머리 여학생들은 장갑 낀 손을 호호 불며 언덕 가장자리 돌담을 의지해 느린 등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허연 입김을 뿜으며 행복한 웃음꽃이 피어나는 언덕에는 유년의 기억들이 눈처럼 쌓이고 있었다. 이제는 모두 지나가 버린 유년의 기억 속엔 눈 덮힌 하얀 언덕과 마음속으로만 간직했던 한 소녀의 활짝 웃는 모습이 아직도 아롱진다 “퍼얼펄 눈이옵니다. 바람 타고 눈이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져 온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쿼렌시아가 된 Quintin 길의 작은 언덕. 출근 길, 퇴근 길에 들려 먼동을, 노을을 사랑하게 된 언덕. 1990년 초 미국에서 개봉된 시네마 천국(Niobe Cinema Paradiso)의 main theme을 들으며 새벽 언덕에 오르고 있다. 에리오 모리코내가 작곡해 아카데미 영화 음악상을 수상한 곡이다. 호흡을 잃어버릴 만큼 피아노와 Cello의 하모니가 가슴을 쓸어내듯 아프다. 소학교 때 하얗게 눈으로 덮힌 언덕의 소회며, 대학 일 년 때 삼척 정라진 언덕길을 넘으며 새벽 안개처럼 아롱졌던 기억이며, 고향을 뒤로 두고 이제 편해져가는 Quintin 길의 언덕에 피어나는 들풀들의 작은 흔들림마저 모두 나를 지탱해온 의미가 되었다.   내가 아직 노래할 수 있는 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를 지으신 이의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짓에 무릎 꿇지 않은 그의 품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인, 화가)     시카고, 이곳에서도 먼 위스컨신 / 아득한 언덕 두려움 깨는 울림 / 시월의 Holy Hill 붉게 피어 난다 / 휘영찬란 불빛 없고 종소리 사라진 오지 / 다만 그 곳 풀잎 스치는 소리 / 보금자리 찿아 드는 새들의 날갯짓 / 먼 발치 Holy Hill 고요로 가득해 / 한 알이 썩어 많은 열매 맺는 텅 빈 들녘 / 고요의 소리 시월의 Holy Hill / 광야의 나지막한 기도소리 / 아무도 찾지 않는 좁은 길 / 든든히 세워 지는 하늘소리 // 낙엽도 내리고 / 별빛도 내리고 / 하늘 고요도 내리는데 / 광야의 울음 소리 올라가네 / 텅 빈 들판의 손길 기도의 향 올라가네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언덕 소회 새벽 언덕 언덕과 마음속 언덕 위로

2023-10-23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인연

손을 잡고 걷고 있는 노인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머리는 허옇게 변했어도, 등은 구부정해도 조심스런 발걸음엔 삶의 연륜이 묻어나 뒤를 따라 걷는 발걸음 위로 지나온 세월의 무게가 담겨져 온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아이의 시간은 뛰어 넘더라도 유년의 천진한 시절을 지나면서 키가 자라고 생각의 폭도 넓어졌음에 틀림이 없다. 혈기 왕성했던 꿈 많은 청년의 삶과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시작된 시카고에서의 이방인의 삶은 그야말로 하루를 쪼개서 이틀을 살았고, 학교와 직장을 넘나드는 피곤하고 바쁜 시간을 보냈었다. 그때는 잠을 잘자고 일어나면 어제의 피로가 말끔히 사라져 버리는 느낌을 느끼곤 했었다. 눈을 뜨면 일터로 나갔고 밤이 깊어서야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일에 매달리며 중년의 시간을 보내고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물질이 삶의 목표가 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곤 했었다. 성공한 삶인 듯 했지만 실패한 삶이었고 실패가 결국 성공으로 가는 길을 만들어주기도 했었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는 동안 인연의 얼굴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구부정한 허리로 걷고 있는 노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백세시대인데 나이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되뇌어보지만 한 사람의 생애는 수많은 인연과 관계 속에서 만들어져 감을 새삼 깨닫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사람은 인연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는 수필가 피천득 선생의 인연에 관한 글이 생각난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지금은 만날 수 없어도 일생 마음 언저리에 살고 있어 사람이 있다. 좋은 날에도, 좋지 않은 날에도 그와의 인연을 생각하면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와 함께한 모든 시간이 눈부셨고 아름다워서 다시는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없지만 마음에 꽃등처럼 길을 밝혀주는 사람이 있다.     사실 인연인 사람은 어려울 때 드러나게 된다. 스쳐 지날 사람은 그때 떠나려 하고 오래 머무를 인연은 그때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가려 한다. 사람과의 인연으로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하고, 행복한 순간을 경험하기도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인연이 된 윤동주의 〈별을헤는밤〉은 아직도 내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어 밤하늘을 쳐다볼 때나 친구들 이름이 생각날 때면 마음의 문을 열고 나온다. 이 나이에도 잊혀지기 보다 더 또렷이 기억나는 싯귀이다.     윤동주 시인의 인연은 친구 정병욱이다. 그 인연은 우리에게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후 잊혀질 뻔한 소중한 시들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이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인연이 또 있으랴.     우리의 삶 속에도 더 사랑하고 더 안아주고 더 깊이 삶을 나누고 싶어지는 사람이 있다. 우린 세상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다. 반가운 인연의 끈으로 남겨진 삶의 부분을 가꾸어 나가기를 원한다. 그와 함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꽃을 피우며 살고 싶다. 우리에게 부닥쳐오는 희노애락의 삶을 통해 만들어갈 소중한 인연, 함께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사람을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만나기를 소원한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인연 동안 인연 윤동주 시인 발걸음 위로

2023-08-07

[문화산책] 내 마지막 종이책에게 위로를…

얼마 전에 새 책을 냈다. 오늘날의 미술이 당면하고 있는 다양한 근본 문제들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쓴 책이다. 제목은 ‘그림 그림자’.   내게는 의미가 있는 책이다. 책의 내용이 훌륭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이 마지막 책이라고 생각하고 냈기 때문에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종이책으로는 마지막 책이라는 제법 비장한 마음으로 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을 받아들고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조금 비감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정신 차려보니 사람들이 종이책을 안 읽는 세상이 되었다. 독자들이 우르르 e-북 동네로 몰려가더니, 조금 지나니 그것마저 귀찮다며 오디오북을 듣는다. 다른 일 하면서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이야기다.   눈부시게 발달하는 첨단통신기기 덕에 긴 글을 멀리하게 되더니, 드디어는 책 자체를 읽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독자가 아예 없어진 것이다. 급기야는 인공지능이 작품을 쓰는 세상이다. 작가가 필요 없어진 것이다.   물론 종이책이 아주 없어지지야 않겠지만, 끝끝내 살아남는 책은 아주 특별한 극히 일부의 책일 것이니, 나 같은 허름한 글쟁이에겐 해당 없는 희망 사항이다. 오랜 시간 낑낑대며 힘쓰고, 시간 들이고, 돈 써가며 책을 내봤자 읽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말짱 헛짓이다.   그러니 새로운 길을 찾을밖에 도리가 없다. 블로그, 유튜브, 카톡, SNS 등 방법은 많다고 한다. 그러니까, 디지털 세계로 이민을 가라는 말이다. 내용만 재미있고 좋으면 성공 보장이라는 친절한 조언도 뒤따른다. 하지만, 컴퓨터 까막눈인 내 처지에서는 그야말로 장님 문고리 더듬기이니 아득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막막하다. 자신이 안 서고, 답이 안 나온다.   “머릿속에 든 것을 그냥 가지고 가는 것은 죄악이다”라는 말씀을 믿고, 부지런히 쓰고 말하고 가르치느라 애써왔는데….   세월에 따라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는 일이 쉽지 않다. 나이 먹을수록 더 힘들어진다. 더구나 요즘처럼 빠르고 급격하게 달라지는 세상에서는….   나 같이 완고한 아날로그 꼰대가 현란한 디지털 문명에 적응하는 것은 어지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어려움투성이다. 가령, 가물거리는 눈을 부릅뜨고 휴대전화기의 조그마한 글자판을 잔뜩 노려보면서 손가락에 힘을 주어야 한 글자 한 글자 콕콕 찍어대고 있자면 짜증이 저절로 나고 서글퍼진다. 이건 도무지 선비가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그 앙증맞은 기계로 온갖 일을 척척 해내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존경스럽다. 그 작은 연장이 못 하는 일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기능을 가지고 있단다. 그리고 배우기도 너무너무 간단해서 어린아이들도 척척 한단다.   그래서 나도 열심히 배우려 애써본다. 하지만, 새 기술을 가까스로 익혀서 써먹어 볼까 하면, 어느새 새로운 기술이 등장해 있다. 가령, 이메일에 제법 익숙해졌다 싶은데, 이미 사람들은 모두 전화기로 몰려가 카톡이니 뭐니에 빠져버린 식이다. 정말 정신이 한 개도 없다. 기계의 노예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울 때도 잦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뒤꽁무니만 따라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쯤에서 나도 살길을 찾아야겠다. 내 방식은 아주 간단하다. 포기하는 것이다. 빠르고 편리한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포기하는 것도 능력이다.   이렇게 옛날 방식에 머물며, 변하는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상을 유식한 전문용어로 ‘문화 지체’라고 한단다. 낙오자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겠다.   어떻게 불리든 상관없다. 아날로그 지킴이를 자처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면 된다. 천천히 걷고, 가다가 지치면 쉬어가면 그만이다. 아날로그 세상에는 디지털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가치와 재미들이 가득하다.   그런 고마운 마음으로 내 마지막 종이책의 행복을 비는 바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종이책 위로 마지막 종이책 아날로그 지킴이 디지털 세계

2023-07-13

[문장으로 읽는 책] 네 눈동자 안의 지옥

“여기서 나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나가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거죠.” 그가 웃는다. “그러면 저들이 당신을 가능한 한 빠르게 치워버릴 거예요.”…나는 여기에 얼마나 더 있게 될까? 갑자기 숨통이 조여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물 밑에 갇혀 있고 수면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수면 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캐서린 조 『네 눈동자 안의 지옥』   ‘여기’란 정신병원이다. 아무 문제 없었다. 사랑하는 남편과 사랑하는 아이를 기다렸고, 사랑스런 아이가 태어났다. 백일잔치를 앞둔 어느 날 아이를 침대에서 안아 올리려는데 아들의 눈이 “악마의 눈으로 바뀌었다”. 호흡이 짧아지고 방안의 벽이 두꺼워졌다. 미친 듯 집에서 뛰어나왔다. 누군가 쫓는 것 같아 SNS 계정을 다 지웠다.   한국계 미국인인 작가가 출산 후 환청과 망상을 동반한 산후정신증에 시달린 기록을 책으로 옮겼다. 병원에서 한동안 작가는 자신이 출산한 사실도, 아이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출산은 축복이지만 모성이란 저절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산후우울증을 경험하는 여성도 적지 않다. 산후정신증에 대한 생생한 고백이자 모성신화를 예리하게 비트는 책으로, 가디언 등이 2020 ‘올해의 책’으로 꼽았다. 부제가 ‘모성과 광기에 대하여’다. 그에게 한국 여성은 어떤 존재일까. “한국의 해녀는 모두 여성이다.…이들이 파도를 헤치고 깊이 잠수해 들어가면서 심청을 떠올릴지 궁금하다. 나는 이들이 진주를 발견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눈물과 같은 진주, 바다 여왕의 선물.”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눈동자 지옥 한국 여성 모성과 광기 수면 위로

20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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