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열린 광장] ‘누죽걸산’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시니어들은 건강을 위해 많이 걷거나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집 건너편에 살던 70대 여성은 매일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걸었다. 그런데 한동안 볼 수가 없었다. 얼마 전 그녀의 남편을 만나 아내가 잘 있느냐고 물었다. 남편은 그녀가 2주 전 집에서 갑자기 쓰러져 병원 응급실로 간 후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며  울먹였다.     몸을 움직여야 한다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운동은 지루하기 때문이다. 차고에 있는 아령과 걷는 기계에 먼지만 쌓이고 있다.     운동을 재미있게 할 방법이 없을까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몇 년 전 사이프러스 커뮤니티 칼리지의 에어로빅댄스 클래스에 등록했던 기억이 났다 . 음악에 맞춰 젊은이들과 함께 동작을 하려니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 중도에 포기하긴 했지만.     그러나 한 가지는 배웠다. 음악에 맞춰 운동을 하면 훨씬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옛날에 듣던 CD 가운데 군대 행진곡을 찾았다. 약 45분 분량의 행진곡을 틀어 놓고 두 손을 들고 격식을 갖추지 않는 막춤을 췄다. 손에는 5파운드 아령을 들고, 발목에는 5파운드 모래주머니를 매달았다. 팔다리가 뻐근하고 아팠다. 가끔 아령과 모래주머니 없이 율동을 하면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니어들은 팔과 다리의 근육을 단련해야 걸을 수 있다.   비가 오는 날이나 수영을 가지 않는 날은 방에서 CD를 틀어 놓고 그 막춤을 춘다. 아내가 내 모습을 보더니 깔깔대고 웃었다. 아내도 웃고 나도 웃고. 웃으면 복이 온다고 하지 않는가.   노인들에게 가장 좋은 운동은 수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동내 수영장에서 이 행진곡을 틀어 놓고 물속에서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듯 물장구를 친다. 관절염으로 뻣뻣해진 손마디가 한결 부드러워진다. 관절염이 악화하면 컴퓨터 자판도 누르기 힘들어 글도 쓰지 못한다.   행진곡 소리가 수영장에 나온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줄 알았다. 웬걸, 어떤 이는 음악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춘다. 특히 ‘미 해병대 찬가’는 신나는 행진곡이다. 행진곡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부엌의 소금도 쳐야 맛이 난다’고 했듯 아무리 좋은 음악과 운동도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누군가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태어나 공짜를 좋아하고 게으르다고 말했다. 인간의 본성은 게으르다는 주장이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려면 게으름부터 극복해야 한다.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열린 광장 음악과 운동 행진곡 소리 동내 수영장

2024-04-10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사월의 시

이렇게 나이를 먹나 봅니다.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애틋해 보이는, 그래도 뒤돌아 가고 싶지 않은 지금이 좋은 건 왜인지 모르겠네요. 꽃샘추위로 싹들이 얼면 어쩌나. 괜히 쌓인 눈을 밀쳐냅니다. 작고 여린 것들에 눈길이 가는, 쓰러지고 밟히는 것들이 소중해지는 이렇게 나이를 먹나 봅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면 살포시 한쪽으로 기우는 갈대가 서러워 두 팔 벌려 서 있는 막무가내가 되어도 부끄럽지 않은 나이가 되었구나 여겨집니다. 소리 없이 찾아드는 연둣빛 언덕에 반해 걸어도 걸어도 발걸음을 돌릴 수 없어. 저린 무릎으로 잠시 앉았다 눈에 뜨인 냉이 푸른 싹, 달래 뾰족 내민 잎에 그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기도 합니다. 낙엽을 들추다 만난 보라색 패랭이꽃, 색색 숨 쉬는 꽃숨, 꿍꿍 뛰는 나의 심장 소리, 등이 따신 햇살에 앉아 느껴보는 봄날 오후입니다. 이렇게 느릿 나이를 먹나 봅니다.     사월의 시       한 움큼의 말을 뿌렸다 한동안 잊혀진 말은   씨가 되어 싹을 내었고 땅은 얼굴을 바꾸었다   이야기가 되어 자라나고   그 자리마다 채워지는   바람의 소리며 모로 눕는 햇살의 따가움 그대들의 눈물들이며 손짓하는 자유가 되었다   슬픔은 꽃으로 피어나고   바람으로 다가온 외로움 절망의 손짓은   푸른 잎으로 돌아와 사월 하늘에 가득하다     사월은 푸르러도 먹먹히 아파 붉어지는 시간 걸음마다 길이 되어 오는   그대들의 말은   십자가로 세워지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사월은 한없이 숙연해져 고개 들 수 없는 미안함 그대들 안으로 들어가는 사월은 망각 중 이거나, 기억해 내는 거울 이거나 사월은 기뻐도 슬픈 계절   높이든 빈 잔에   빨갛게 담겨지는   사월의 숨결, . . 부활의 십자가         나뭇가지 사이로 확 시야로 들어오는 모양이 있어 놀랐습니다. 잔가지가 만들어낸 하트모양이었어요. 가슴에 담아두었다가 다음날 그곳에 가서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루 만에 그 형체를 어디에서도 찿을 수 없었습니다. 각도와 높이 때문인가 하여 눈길을 여러 곳으로 움직여 보았지만 찿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연히 만나게 된 그게 뭐라고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나의 마음을 도닥여 주었습니다. “그래 가지에 꽃잎이 피고, 점점 무성해지면 가지만으로 만들어지던 형체는 영영 사라지고 말 거야. 어쩌면 영영 찾을 수 없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잠깐이나마 눈에 담기고 가슴에 품었던 따뜻했던 소회가 소중한 기억으로 남겨지겠지.”     Easter Sunday를 하루 앞둔 토요일. 암 투병을 하는 B장로의 모습이 아련해 봄꽃을 화병에 담아 찿아갔습니다. 계단을 내려올 힘이 없어 이층으로 올라가 누워있는 그를 만났습니다. 손을 잡아 내 무릎 위에 끌어당겨 기도해 주었습니다. “손이 뽀송하네?“ 묻는 말에 ”손이 부었어.” 하며 웃던 그 모습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많이 말랐지만 봄꽃만큼 귀했습니다. 무슨 말로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그와 나 사이의 깊은 손 잡음은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 삶을 마지막까지 인도하시는 그분의 손안에 있음을 알고 서로 안아주고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돌아오는 길. 차창으로 길게 펼쳐지는 가로수마다 영글어가는 꽃망울이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요즈음은 어디에 있어도 어느 곳을 걸어도 봄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눈이 녹고 겨우내 쌓였던 낙엽을 들추니 살아나는 생명, 푸른 싹들이 무성히 올라오고 있습니다. 나뭇가지 끝마다 뾰족한 잎들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황홀한 봄의 생기, 생명의 부활이 목전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슬퍼하지 말지니 그 슬픔으로 오히려 기뻐할지니 죽음의 계절을 참고 견디면 만물이 살아나는 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으니….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심장 소리 보라색 패랭이꽃 나뭇가지 사이

2024-04-01

[아름다운 우리말] 내 말에 귀 기울이게 하는 법

몇 년 전에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저에게 삶의 가치를 가르쳐 주시는 전헌 선생님과 걸은 적이 있습니다. 걷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입니다. 특히나 좋은 분과 걷는 것은 너무나도 행복한 일입니다. 그날은 그래서 더 행복했습니다. 걷는 동안 삶이 더 밝아지고, 행복한 스스로를 발견하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저 멀리서 음악이 들려왔습니다. 정확히는 두 군데에서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큰 스피커로 쿵쿵 울려대는 신나는 음악이었고, 다른 쪽은 합창단이 부르는 고요한 노래였습니다. 합창단의 노래가 방해를 받겠구나 하는 생각에 약간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저희의 발길은 합창단 쪽으로 향했습니다. 저희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합창단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합창 소리에 저마다 행복한 표정이었습니다.   반대쪽의 음악 소리가 커질수록 합창의 소리는 더 작아졌습니다. 실제로도 더 작게 부르는 듯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더 귀 기울이며 아주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그 합창 소리를 잊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은 어떤 노래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조용하게 노래 부르던 그 모습은 아마 잊히지 않을 듯합니다.   세상이 점점 거칠어집니다. 거친 세상의 증거는 말소리가 커지는 겁니다. 자신의 주장이 맞는다고 하며 더 크게 말합니다. 소리 높여 말한다는 표현에서 소리가 감정을 북돋는 느낌을 받습니다. 친구와 대화에서도 소리는 점점 커집니다. 심지어 가족 간의 대화에서도 목소리는 커집니다. 그러다 보니 싸우는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됩니다. 스스로는 싸우지 않았다고 하지만 어쩌면 벌써 우리의 마음속은 싸움이 일어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야기할 때 소리를 치는 것은 두 사람이 이미 멀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면 우리 사이에 대해서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인다는 표현을 씁니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다가간다는 의미입니다. 머리가 기울고, 어깨가 다가갑니다. 소리가 커지면 다가갈 리 없습니다. 거리를 두게 되죠. 당연히 귀 기울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소리가 작고 부드러워야 귀를 기울입니다. 저는 이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를 사람들이 잊고 산다고 봅니다. 자신의 주장을 소리 높여 이야기하고, 떠들어 대면 소음이 됩니다. 떠든다는 말도 소리가 ‘뜨고, 들려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라앉지 않은 겁니다. 차분하지 않은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수다는 떤다고 합니다. 이 말도 재미있습니다. 떠드는 것보다는 귀여운 느낌이 있습니다. 소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떨리고 있는 느낌입니다. 떨리는 것은 파동을 보입니다. 서로에게 감정이 전달되는 것이지요. 수다야말로 인간의 언어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수다가 곧 위로이기도 합니다. 같이 수다를 떨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요. 떠는 정도는 괜찮은데 떠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삼가야 할 겁니다.   내 말에 귀 기울이게 하는 비법은 소리를 작게 내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수록 나에게 다가올 겁니다. 두 사람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물론 내 말이 듣고 싶도록 내용을 충실히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기껏 들었는데 알맹이가 없으면 허무할 테니 말입니다. 오늘도 저는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는 세상을 꿈꿉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합창 소리 음악 소리 합창단 주변

2024-03-17

[이 아침에] 개 짖는 소리

몇 년 전 이사 온 옆집은 셰퍼드를 키운다. TV에서 마약 탐지견으로 일하는 저먼 셰퍼드를 떠올리며 좋은 품종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옆집에 이런 맹견이 있으니, 도둑이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기분도 좋았다. 순해 보이는 갈색 눈동자와 쫑긋 선 귀와 억센 근육을 가진 녀석은 허우대가 멀쩡하게 생겼고 주인 말에 잘 복종했다.     이런 첫인상은 이사 온 지 이틀 만에 부서졌다. 개는 모르는 사람이나 다른 개에 대한 방어 본능으로 짖는다고 들었다. 아직도 우리에게 털을 곤두세우고 송곳니를 드러내며 짖는 것을 보면, 단순한 경고나 방어 본능이 아닌 경계 대상으로 삼는 게 아닐지 싶다. 시끄럽고 소란한 개 짖는 소리를 옆집에 항의를 해봤지만 그때뿐이었다. 하긴 어떻게 시도 때도 없이 컹컹대는 것을 막을 수 있으랴.     목줄 없이 뒷마당을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지만, 산책하러 나가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이름은 있으나 50파운드가 넘는 대형견을 주인은 ‘도그’라고 부른다. 사이렌 소리가 나면 짙은 하울링을 하고, 가끔 하늘을 보고 짖는다. 날아가는 새가 심기를 건드렸는지, 아니면 울타리 너머의 세상을 배회하고 싶어선지도 모른다.     몇 사람이 훈련 시키려고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로 더 심하게 사람을 경계하는 녀석을 보면 ‘인빅터스(Invictus)’가 연상된다. 정복되지 않는 자들.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내 영혼의 선장이라는 윌리엄 E. 헨리의 시 ‘인빅터스’처럼 개는 좀처럼 길드는 것을 싫어했다. 오직 주인에게만 순종한다.     우리가 수영장 청소하는 날에 이웃집에서는 생일 파티를 하고 있었다. 양쪽 집에서 인기척과 물건 옮기는 소리와 말소리가 들리자, 흥분한 개가 두 집을 향해 짖다가 쉬다가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상한 울부짖음이 들렸다. 담장 철망 사이로 보니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한 녀석이 공중제비를 돌면서 내는 소리였다. 셰퍼드가 그렇게 높이 뛰는 것을 처음 봤다.   하루는 강아지 한 마리가 그 집 사이드 게이트 쪽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다. 우리 집까지 자기 영토라고 생각하는 녀석이 그걸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작은 철문을 사이에 두고 하나는 안에서 하나는 밖에서 으르렁댔다. 놀란 강아지 주인이 얼른 댕댕이를 안고 갔다. 분이 풀리지 않은 개는 주인이 나와 케이지에 가둬둘 때까지 계속 짖어댔다. 녀석은 케이지 안에서만 짖지 않았다.   친구와 전화하는데 녀석이 또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펜스 위에 앉아서 세수하는 고양이를 봤는지 정신없이 짖어댔다.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걸까?’라고 물었다. 친구 왈. ‘뭘 신경 쓰니, 개소리에’. 이리나 / 수필가이 아침에 소리 사이렌 소리 저먼 셰퍼드 방어 본능

2024-03-05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누가 내 목에 방울을 달았는가

쓰러지는 때가 다시 일어나는 시간이다. 마냥 자빠져 있을 수는 없다. 털고 일어나려고 너무 용쓰면 망친다. 그만 둘 때를 알면 시작 할 시간을 알게 된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도 바닥으로 내동댕이 치는 것도 나다.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것도 내 자신이다. 아무도 나를 절벽으로 내 몰지 않았다. 절벽 끝에 서서 미친 듯 사랑하고, 죽을 만큼 미워하고, 다시 사랑을 꿈꾸던 날들.     사랑이란 단어 속엔 비밀번호가 있다. 독약 같은 사랑의 말들은 세월이 가도 가슴에 못 자국을 남긴다. 총 맞은 것처럼 피투성이가 되어도 사랑은 피해갈 수 없는 집착이다. 심장에 구멍을 뚫고 사랑은 방울소리 울리며 목을 조른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두려워도 낭떠러지 끝에 서면 내려오면 된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는 홍만종이 지은 문학평론집 ‘순오지(旬五志)’(1687)에 ‘묘항현령(猫項懸鈴)’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순오지’에 의하면 쥐떼들이 모여서 고양이의 피해를 면하려면 무슨 신기한 방법이 없겠느냐고 상의했다. 쥐 한 마리가 “그건 간단한 일이야.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 놓으면 고양이가 오는 걸 알 수 있지”라고 한다. 뭇 쥐들은 “그것 참 좋은 생각이야” 하고 찬성했다. 그러자 늙은 쥐 한 마리가 “그 의견이 좋기는 하지만 누가 그 방울을 달지?”라고 묻는다. 쥐들이 서로서로 눈치만 보고 꽁무니를 뺀다는 설화다.     판본에 따르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방울을 집주인에게 보내어 고양이 목에 다는 데 성공했고 쥐들은 평화를 되찾았다는 내용도 있다.     문헌을 통해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구전 채록 자료는 찿기 어렵다. 설화 전파에서 문헌이 구전에 끼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어 비교문학적 연구 자료로써 가치가 크다.       외국에도 ‘이솝우화’ 이야기가 있다. ‘이솝 우화’는 고대 그리스에 살던 노예이자 이야기꾼이였던 이솝 아이소프스(Aesop, Aisopos)가 지은 우화모음집을 말한다.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Belling the cat)’는 이솝 우화의 페리 인덱스 613에 실려있는데 중세시대에 추가된 이야기로 알려진다.     우화(寓話)는 인격화한 동식물이나 기타 사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행동 속에 풍자와 교훈의 뜻을 담은 이야기다.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는 ‘행동보다 말이 쉽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의견을 내놓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목에 크고 작은 방울 하나씩 달고 산다. 아름답거나 보기 흉한, 매력적이거나 볼품 없는, 각자의 방울을 목에 걸고 살아간다. 그 방울은 빛나는 장식이 되기도 하고 발목을 잡는 덫이 되기도 한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다 해도 쥐는 온전히 위험을 피해갈 수 없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공이다. 그 누구를 위해서도 목에 방울을 달고 살아갈 필요가 없다   ‘아무도 없는 빈자리에도/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시공간 안에도/ 누군가는 있었다/ 보내주는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항상 누군가는 있었다/ 사랑의 방울을 달고/ 천사처럼 다가오는/ 시공간 안에는/ 달캉달캉 방울 소리가 난다 -김선희의 ‘누군가의 방울 소리’ 중에서   오늘은 내일에 비하면 이미 낡은 것이지만, 운명처럼 목에 걸린 방울을 벗을 용기가 있다면, 어제의 멍에 벗고 소중한 내일을 지킬 수 있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방울 방울 소리 이솝 우화 크리스마스 선물

2024-03-05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추억하기 그리고 꿈꾸기

1 열정이기도 하였고 집착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리움은 무어라고 말해도 다 맞고, 또 다 틀리다 말에도 온도가 있듯이 사람에게도 온도가 있다 그 온도에 따라 시들기도 하고 살아나기도 한다 길을 걷는 것이 때로 허망한 생각이 들 때 서로의 동선이 어긋나기 시작할 때 말의 온도나 사람의 온도는 마을 골목 끝까지 퍼지고 나는 그곳에 집 한 채 지으려 매일 잠을 설쳤다 쌓다가 허물어 내린 기억으로 다시 집을 지었다 발 뻗으면 닿을 만큼 불편한 집을 지었다 사람들은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살아갔다 살아가려면 삶의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혀를 차며, 목적은 다른 세계의 숨겨진 길이 되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뭐라든 겨울 문턱에서 집을 짓는다는 것 이미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이후에도 많은 것을 버려야 하기에 왜 그렇게 서둘러 갔냐고 묻고 싶었다 나는 무대를 등진 힘없는 관객일 뿐 버리고도 함께라는 대단한 의미는 찾지 못했다 호수는 언제나 잔잔한 물결로 다가오고 노을처럼 꺼져가던 불꽃이 타오르기도 하였다 그 불꽃 보듬으며 살아야 하는 이유 하늘이라도 끌어내려 파랗게 변해가는 새벽 지은이의 속삭임이 들릴 듯한 짙은 안개 밀물처럼 다가왔다 썰물처럼 사라지는 기억을 더듬으며 나는 그것으로 큰 창이 호수로 향한 작은 집을 짓는다 손이 아닌 머리로 발을 뻗을만한 집을 짓는다 집을 짓는 시간 내내 사람들은 잠들었고 별들은 내려다보고 있었다     2 집을 짓는 재료는 제일 단단한 것으로 부서지지도 또 낡아지지도 않는 기억이라는 무게를 사용하기로 한다 꿈이라는 가능한 큰 창문을, 날마다 열고 닫을 희망의 문을 또한 짓기로 한다 평안의 따뜻한 지붕을 얻었으면 좋겠고 내 몸같이 피어나기를 원했던 자유의 뒤란엔 철마다 꽃씨를 뿌리기로 한다 그러나 내게는 없어도 좋을만한 슬픔과 아픔의 순간 또한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싶다 떠난 곳을 뒤돌아보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하였고 꼭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지나간 후회도 있다 세상이 달라지는 줄도 모르고 이방인의 삶은 채 바퀴였다 쉼 없이 달려왔다 잠시 멈춰 선다 때로 동굴로 도망치기도 하고 뜬금없이 몰두하다 길을 잃을 때도 있었다 후회는 하지 않겠다 다만 시끄러운 시선을 떠나 얼마 남지 않은 추억하기 그리고 꿈꾸기 어느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나의 궤렌시아     3 나의 시간 속으로 들어와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던 소리, 귓전에 가까이 들린다 반가움에 한숨으로 달려갔다 수평선으로부터 발끝까지 이어지는 소리 자갈 위를 낮게 안으며 밀려온다 이내 모래가 소리의 끝을 잡고 따라 나간다 수백 광년의 빛으로 만들어내는 윤슬 시간의 개념이 사라진 미시간 호 수에 떠다니는 소리의 입자들 둥글고 가는, 깊고 높은 음들이 모여 넓은 호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가득하다 한 손을 높이 들고 다른 한 손으론 모든 악기 소리를 멈추게 한다 이어지는 피아노의 선율 건반 위를 춤추듯, 튀어 오르다 미끄러지는 10개의 손가락 숨이 멎는다 하늘의 소리 카덴차 긴 여행길에 맞이하는 나만의 시간에 빠져든다 언덕 가득 눈발이 옆으로 부는 바람에 춤추듯 날린다 흔들리던 나의 평형감각이 돌아왔다 별빛을 주워, 윤슬을 담아, 반짝이는 조약돌을 모아, 피아노의 맑고 청아한 하늘의 소리를 역어 집을 짓는다 호수를 향해 큰 창이 있는, 커피 팟이 딸린 작은 키친과, 좁은 계단을 오르면 퀼트 조각 이불을 덮은 침대가 있고, 누우면 밤 하늘 별들이 반짝이는, 팝콘 고소한 냄새가 가득한 작은 오두막을 짓는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추억 소리 카덴차 악기 소리 소리 자갈

2024-03-04

[아름다운 우리말] 소리를 내다

우리말 소리라는 단어는 참 재미있습니다. 소리는 자연의 소리부터 마음의 소리까지 다양합니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가벼워지고 위로가 됩니다. 물론 심한 소리는 소음이 되기도 하죠. 우리는 때로 소리를 듣기 위해서 바다에 가고, 산에 가고, 숲길을 걷습니다. 소리 없는 자연은 무척 어색하고 답답할 겁니다. 제가 대학 때 썼던 시의 제목이 ‘소리하는 바다’였음이 문득 떠올라 미소 짓습니다. 대학 1학년 때 바닷소리가 듣고 싶다고 1박 2일 가출을 했을 때 쓴 글이었습니다. 젊은 낭만입니다.   소리는 말과도 통합니다. 소리에 뜻이 더해지면 말이 됩니다. 말소리는 소리이면서 말인 셈입니다. 그런데 소리가 말이 되는 것은 좋지만, 말이 소리가 될 때는 문제가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주로 말이 아닌 말을 소리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단어가 헛소리입니다. 헛소리는 분명히 말이지만 말로 생각하지 않기에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잔소리, 큰소리, 흰소리도 거기에 속합니다. 우리말의 ‘말 같지 않은 소리’라는 표현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 표현입니다. ‘말 같은 소리,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하는 겁니다.   소리는 말에서 노래가 되기도 합니다. 노랫소리라는 말은 노래가 곧 소리임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제일 듣고 싶은 소리가 노랫소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옛 노래에 아예 판소리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소리가 노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소리꾼이라고 하였고, 노래를 부른다는 말 대신 소리를 한자리 한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사실 노래는 ‘놀다’에서 온 말로 유희에 더 초점이 맞추어진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리는 내 몸통을 악기로 하여 나오기에 가장 솔직하고, 맑은 내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내 몸통과 성대, 입과 코, 그리고 보이지 않는 부분, 머리끝에서까지 소리가 나옵니다. 소리에 우리는 내 감정을 담고, 내 떨림을 담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소리꾼이라고 하는 게 훨씬 정겹고, 딱 들어맞는다는 생각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이는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말을 하는 사람은 좋은 소리를 하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몸통이 내는 소리를 종종 죽여 놓고 삽니다. 소리를 죽인다고 하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소리는 곧 사람이기도 합니다. 말하고, 노래하는 소리의 사람입니다. 그런 소리를 죽이면 사람의 기운도 빠져나가는 듯합니다. 물론 소리 죽여 걸어야 하거나, 이야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부드럽고 다정한 소리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기운 없는 소리가 아니라 따뜻한 소리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소리를 크게 내어야 할 때도 많습니다. 그때조차 소리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 소리를 통한 기운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을 백번 되풀이하여 읽으면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 표현이 참 좋습니다. 모르면 되풀이하여 읽기를 권합니다. 여러 번 읽다 보면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뜻을 저절로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표현에서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바로 소리 내어 읽는다는 점입니다. 소리를 내어 읽어야 새로운 기운이 생겨나는 겁니다. 큰소리로 읽어야 뜻이 저절로 나타나는 겁니다.   저는 이번 학기에 대학교 1학년 글쓰기 수업을 합니다. 글쓰기 수업은 필연적으로 글 읽기와 연계가 됩니다. 대학생 수업이기에 눈으로 읽기를 예상하겠지만, 제 수업에서는 소리 내어 읽기를 같이 합니다. 학생들도 오랜만에 해보는 경험이랍니다. 소리 내어 책을 읽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합니다. 소리 내어 읽다 보면 뜻도 저 잘 알게 되고, 부수적으로는 기분도 좋아집니다. 이런 것을 언어화라고 합니다. 언어화는 내 속의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로 내보이는 것입니다. 내 사고를 뚜렷이 하기도 하고, 스트레스나 불안에서 빠져나오게 하기도 합니다. 소리를 내어 글을 읽어 보세요. 세상이 달라집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잔소리 큰소리 대신 소리

2024-03-03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스티그마

구릉 진 턱, 제 얼굴에도 있더라고요 / 세월 가며 깊어진 주름이어요 / 새날 오기를 기다리어요 / 눈뜨는 매일이 새날이어요 / 깊어진 골에 씨를 뿌리고 / 봄을 기다리려고요 / 꽃 필 날을 손꼽으면서요 // 더디기도 하지요 / 쓰러지기도 하겠죠 / 더러는 밟히기도 할 거예요 / 내려다보는 하늘, / 올려다보는 보는 눈길 / 피어나는 흔적이 보고 싶어요 // 여러 소리 어울리면 / 새로운 소리가 되는 줄 알았어요 / 밀려오는 파도처럼 한 소리로 오는 줄 알았어요 / 여러 소리가 하나가 되기 어려운 가 봐요 / 나뭇가지처럼 더 작은 가지로 자라 / 저마다의 목소리가 되는 걸 알았어요 // 구릉 진 턱에 바람이 불어요 / 깊어진 주름에도 파도가 와요 / 당신 손으로 턱을 만들고, 주름이 깊어갔어요 / 피려고, 덮으려 애를 쓰면 감춘 아픔이 서러워 / 녹아 내리는 골이 시려요 / 밤마다 잔가지처럼 뻗어간 사유 / 깊을수록 쩍쩍 갈라지는 몸 / 그래야 동쪽 하늘에 아침이 오곤 했어요 // 눈발이 세찰 땐 가지로 울고 / 타는 햇살엔 잎사귀를 말며 숨 쉬지 않았어요 / 하늘로 토해낸 붉게 물든 그리움은 / 내 안으로 그어낸 상처가 되어 밤이 저물었어요 / 두 팔로 안을 수 없는 큰 동그라미 / 강을 거슬러 올라 산란하는 연어 / 다른 시간을 본능처럼 낳고 있어요 / 동그라미 끝을 이어 마무리 못하고 / 잠들지 못하는 시간 가슴에 절이며 / 깊어진 주름을 쓰다듬어요     깊은 숨으로 열리는 아침을 맛있게 마신다. 하늘의 신비, 땅의 생명을 어우르며 오는 시간 아닌가. 입춘이 지나가는 아침 향기는 청명하고 맑았지만, 난 뒤를 돌아 지나가는 겨울을 보고 말았다. 별들의 수를 세며 이름을 기억했던 날들을 보았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옷가지와 그림도구를 챙겨 삼척으로 떠났었다. 이른 아침 정라진을 떠난 통통배는 울릉도를 향하고 있었다. 일행 4명은 천신만고 끝에 배에 오르고 언제라도 꺼질 것만 같은 엔진 소리를 들으며 기대와 두려움 속에 있었다.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 나뭇잎처럼 흔들리면서도 앞으로 나가는 배가 신기하기도 했다. 등이 검은 작은 고래가 한동안 배를 따라와 무료함을 덜어주기도 했다. 동해에 보석 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였던 윤슬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동해는 크고 막막했지만 신비롭고 자유로웠다. 사방이 물이었고 배와 그 안에 사람들은 존재도 없었다. 물에도 지탱해 주는 뼈가 있을까? 혹 뿌리가 있을까? 동해는 어린 나에게 존재의 의미를 알려주었다. 만질 수 없지만 형태로 존재케 하는 보이지 않는 엄청 큰 손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동네의 작은 호수,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마주한 집들이 보이는 지척의 그곳에서도 오랫동안 행복했었다. 그곳의 물결은 구불한 선이었고 때론 수많은 점들이었다.   나는 지금 미시간 호수를 바라보며 너른 바위에 앉아있다. 호수라기보다 바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다운타운 마천루에 접한 미시간호수가 아니라 Sheridan 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다 보면 갓길에 차를 세우고 다가갈 수 있는 미시간 호수. 가끔 동네 사람이 지나가다 들러 노을을 즐기는 그런 호숫가.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의 친구가 되기도 하는 미시간 호수. 파도를 바라보다 물결 속으로 빠져든다. 먼 곳에서 가까워질수록 형체는 크고 선명했다. 큰 삼각형 주변으로 작은 삼각 모양들이 춤추듯 촘촘히 채워져 밀려왔다. 깊은 물의 뿌리로부터 작고 투명한 포말이 몰려와 해변에 부딪혀 사라지곤 했다.    나무는 가지와 잎으로 말하기보단 뿌리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삶도 보이는 것보단 감춰진 것에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도 여전히 머리가 끄덕여진다. 파도 소리가 오케스트라 음악처럼 음색의 높낮이를 가지고 하늘소리로 마감하는 호수의 하루에도, 젊은날 동해의 윤슬 속에도, 너른 바위에 앉아있는 나에게도 보랏빛 흔적의 하루가 저물고 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미시간 호수 엔진 소리 호수 건너편

2024-02-26

[우리말 바루기] ‘슈림프’

‘shrimp(새우)’를 한글로 옮길 때의 표기법을 묻는 질문에 ‘쉬림프’로 답하는 이가 많다.  ‘쉬림프’로 적는 게 원음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표기가 현실음에 더 가까운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차피 영어에서는 자음 소리이고 우리말에선 모음과 결합하게 되므로 원어 발음과는 차이가 나게 된다. 영어 ‘sh’의 표기를 한글로 옮길 때 우리말의 발음 체계 아래 일관성 있게 적용되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어말의 [?]는 ‘시’로 적고 자음 앞의 [?]는 ‘슈’로, 모음 앞의 [?]는 뒤따르는 모음에 따라 ‘샤’ ‘섀’ ‘셔’ ‘셰’ ‘쇼’ ‘슈’ ‘시’로 적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shrimp’의 경우 [?]가 자음 앞에 왔으므로 ‘슈림프’로 표기하는 것이 바르다. ‘슈바이처’ ‘타슈켄트’ ‘카슈미르’ 등 영어가 아닌 다른 외국어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가 단어의 끝에 올 때는 ‘시’로 적어야 한다. 잉글리쉬(English)는 잉글리시, 대쉬(dash)는 대시, 피쉬(fish)는 피시, 플래쉬(flash)는 플래시가 바른 표기법이다.   모음 앞에선 [?]가 뒤의 모음과 합쳐진 소리로 구현된다. ‘샤’ ‘섀’ ‘셔’ ‘셰’ ‘쇼’ ‘슈’ ‘시’의 형태로 나타난다. 샤크(shark), 섀도(shadow), 패션(fashion), 셰익스피어(Shakespeare), 쇼핑(shopping), 슈팅(shooting), 멤버십(membership) 등으로 표기한다.우리말 바루기 슈림프 외래어 표기법 자음 소리 원어 발음

2024-02-20

LP 이어 VHS테이프도 뜬다

MZ세대(18~42세) 사이에서 아날로그 감성이 인기를 끌며 바이닐(LP)에 이어 VHS테이프가 화제다.   VHS테이프를 좋아하는 팬들인 ‘테이프헤드’가 비디오 테이프 부활을 견인하고 있다고 KTLA가 최근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버뱅크에 문을 연 VHS테이프 전문점 ‘비카인드비디오’에는 연일 쇼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매튜 르누아르 대표는 “많은 고객이 스트리밍에서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옛날 영화들을 찾아 가게를 방문한다”고 말했다.     VHS, DVD 및 블루레이 영화를 대여하거나 구매할 수 있는데 신작 DVD, 블루레이, 4K 블루레이는 2일 대여에 4달러, 일반 DVD, 블루레이, 4K 블루레이는 5일에 3달러다. 연체료는 영화당 하루에 1.25달러가 붙는다.     개인적으로 500개의 VHS테이프를 모았다는 한 고객은 “테이프를 플레이어에 넣을 때 나는 소리, 테이프를 만지는 촉감 등 모든 것이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고 매장을 찾는 이유를 밝혔다.   VHS테이프 시장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은 오프라인 스토어뿐만이 아니다. 이베이에서 아마추어 수집가들이 VHS테이프를 수만 달러에 거래하고 있다. 1985년의 ‘백 투 더 퓨처’의 VHS 사본이 7만5000달러에 경매됐다. 동일한 해에 만들어진 ‘구니스’의 사본은 5만 달러에 팔렸다. 이 외에도 월마트와 유명 옷 브랜드 어반아웃피터즈과 같은 대형 소매업체까지 VHS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정하은 기자 chung.haeun@koreadaily.com테이프 비디오테이프 부활 소리 테이프 vhs테이프 시장

2024-02-19

[이 아침에] 비 오는 날의 일기

겨울비가 내린다. 우산을 쓰고 산타아나 강둑을 걷는다. 빗방울 소리가 부드럽다. 비닐우산 위에 떨어지던 다급하고 신산한 소리가 아니다. 그새 꽤 멀리 오긴 온 모양이다.   빗줄기가 강해진다. 바람도 덩달아 날뛰기 시작한다. 오래전 산티아고 길을 걷던 날도 이렇게 비가 내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벌판, 진흙탕 길을 걷는데 한 발 옮겨놓기가 힘이 들었다. 비바람에 우장이 찢겨 나가고 신발은 물이 질컥거렸다. 춥고 배가 고팠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자전거를 메고 들고 흙탕길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길게 이어졌다. 쏟아지는 빗속을 한 발 한 발 말없이 걸어가는 인간의 행렬은 한 편의 장엄한 서사시였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저 고생을 하며 이 길을 걷고 있을까. 나는 또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가고 있는가.   살다 보면 비바람 치는 날을 만나기 마련이다. 어느 날 눈보라가 몰려오고 천둥 번개가 번쩍인다면 기회가 멀지 않았다는 신호일 수 있다. 날씨가 항상 좋으면 사막이 된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다.   어느새 어둑어둑하다.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선다. 눈썹부터 꼼꼼히 늙어가는 거울 속 내가 나를 바라보며 가만히 웃는다. 책장으로 둘러싸인 내 방에 들어와 의자에 앉는다. 네 평 남짓 작은 방이다. 새 책의 첫 장을 넘긴다. 내 세상이 한 뼘씩이라도 넓어져 가면 좋겠다.     밤이 깊어간다. 어둠은 세상을 낳는다. 새를 낳고 꽃을 낳고 나무를 기른다. 사람도 기른다. 깜깜한 밤, 자리에 누워 바람 부는 소리를 듣는다. 전기선을 울리며 지나는 날카로운 소리가 무섭다. 살점이라도 떼어갈 것 같다. 투두두둑 지붕을 쓸어가는 빗방울 소리가 울린다. 홈통을 내려오는 물소리를 들어보니 적잖이 오는 모양이다. 높은 곳은 저 비가 눈이 되어 내리겠다. 이 춥고 으스스한 시간, 뒷마당을 드나들던 토끼들은 옹기종기 제집에 나처럼 옹송거리며 숨어있겠지. 다리 밑 홈리스들은 이 밤을 어떻게 지낼까. 저녁이나 제대로 먹었을까.     태풍이 불어오는 모양이다. 우리들의 가슴도 태풍이 휩쓸어 갈 때가 있다. 예고도 없이 벼락이 치고 자락비가 쏟아지듯, 견딜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밤새도록 온몸을 흔들어 댈 때가 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두 번, 혹은 몇 번씩 겪어내야 하는 일이다.     슬픔에 섬처럼 잠겨버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더는 어쩔 수 없는 그때야 하느님을 찾는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그 분을 생각하면 나에게 평온이 깃든다. 전지전능하신 당신이 잘잘못을 판단하여 다 해결해 주겠다는데 내가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오늘 어떤 이로부터 들었던 말들을 생각해본다. 스치듯 지나며 그가 던진 한마디가 고맙고 눈물겹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고 죽인다. 말의 한계는 생각의 한계라 했다. 말은 품격을 가늠하는 잣대다. 나는 오늘 허툰 말로 누구에게 상처를 주지나 않았는지 곰곰 되뇌어본다.    오늘 읽었던 성서의 욥기 구절. ‘인생은 베틀의 북처럼 빠르다’ 는 말이 떠오른다.  정찬열 / 시인이 아침에 일기 빗방울 소리 오래전 산티아고 산타아나 강둑

2024-02-19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랑이 사랑답게, 심장의 소리에 갇혀

무엇이 우리를 사람답게 하는가. 건장한 육체와 아름다운 미모, 뛰어난 학식과 품성이 사람의 조건이라면 프리다 칼로의 사랑은 인간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지옥이다.     최초로 루브르 박물관에 입성한 중남미 여성작가 프라다 칼로(Frida Khalo, 1907-54)는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 멕시코 전통 문화를 결합한 원시적이고 화려한 화풍으로 잘 알려져 있다. 칼로는 파블로 피카소, 바실리 간단스키, 마르셀 뒤샹 등에게 인정받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1970년대 페미니스트의 우상으로 칭송 받는다.   여섯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나무다리 프리다’라는 놀림을 받았지만 칼로는 의사를 꿈꾸던 열 여덟의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남자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다 전차와 충돌해 버스 손잡이 철봉이 그녀의 몸을 관통해 복부를 뚫고 국부를 지나 허벅지에 구멍을 내는 대형사고를 당한다.   아홉 달 동안 기브스한 채 천장만 지켜보며 천장에 거울을 매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한다. 7번의 척추수술을 포함해 총 35번의 수술을 받으며 기적적으로 걷게 되지만 평생 하반신마비 장애를 안고 살게 된다. ‘꼬리를 내 주고 다리를 얻은 인어공주처럼’ 걸을 때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일생동안 심각한 사고를 두 번 당했다. 하나는 18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다. 두번째 사고는 디에고다. 두 사고를 비교하면 디에고가 더 끔찍했다.” 칼로의 말이다.   프라다 칼로는 멕시코가 낳은 미술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와 결혼했다. 디에고는 칼로의 연인이고 영원한 우상이다. 수 없는 여성들과 불륜을 저지르고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애정행각을 벌이지만 디에고에 대한 칼로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아기를 갖고 싶었지만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칼로는 네 번의 유산을 겪으며 미친듯이 그림에 몰두한다. 자신의 고통에서 탈출 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는지 모른다.   칼로의 작품세계는 ‘초현실주의’와 ‘멕시코’란 단어로 요약된다. 칼로는 많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143점의 회화 작품 중 55점이 자화상이다. ”나는 나 자신을 그린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도 자주 외롭고 또 무엇보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필생의 예술적 주제가 자기 자신이고, 스스로 뮤즈와 영감의 원천이 되는, 특별한 예술가와 모델의 삶을 살게 된다.   1944년 작 ‘부서진 기둥’은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는 칼로의 슬픔과 고뇌를 처절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황량하게 갈라진 대지를 배경으로 칼로는 여신상처럼 서 있다. 몸의 한 가운데를 도려낸 몸뚱아리 속을 받쳐주는 것은 그리스 신전의 기둥이다. 기둥은 금이 가서 쪼개져 있고 여인은 쇠 때로 몸을 동여 매고 서 있는데 온 몸에는 못이 박혀 있다. 여인의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은 화가도 관객도 멈출 수 없는 고뇌로 다가온다.     이 무렵 칼로는 건강이 악화돼 몸을 추스르기 위해 갖가지 재료로 만든 코르셋을 입어야 했다. “디에고, 당신의 두려움과 당신의 고뇌, 당신의 심장 소리에 내가 갇혔음을 느낍니다. 이 모든 광기를 요구한 것은 나였지만….“ 칼로의 고백이다.   사랑은 집착이다. 홀로 치르는 전쟁이다. 과녁을 향해 떠난 화살은 돌아오지 않는다. 떠나간 사랑은 피의 흔적으로 남아 창조의 불꽃을 태운다. 예술가는 고통과 고뇌, 생의 처절한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람이 사람답게, 사랑이 사랑답게, 지독한 평화의 끝, 지옥 같은 생을 승화시키는, 심장이 뛰는 소리가 생의 곳곳에서 바람결에 흔들린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랑 심장 심장 소리 거장 디에고 디에고 당신

2024-02-13

[문예마당] 사막에서, 튜바 소리

모래 산은 잘 갈아놓은 칼날처럼 날이 서 있다     한나절 그득한 하늘이 에워싸고 있는   꼭대기를 향해 걷는 힘든 걸음은   거친 숨을 잠시 멈추기 위해   불쑥불쑥 사방을 두리번거리게 한다     견고하리라 싶어 모서리를 밟고 서면   허망하게 푹 꺼져버린다   눈에 보이는 게 다는 아니라는   우리 인생의 한 단면인 것 같이     왜 이곳이, 죽음의 계곡이라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을까,   인생은 한 번 가면 되돌아올 수 없는 외길인데   왜 살인적 더위의 이곳을 지름길이라 선택했을까,     바람 부는 날   가쌍까상 메마른 모래 위에   비가 추적추적 내릴 때면     *튜바는 아.파.라, 아.파.라, 무명의 탈을 쓰고 소리를 지른다   제 아픔 서러움의 진물인지 아직도 아.파.라, 불어댈까,     한 움큼 모래알갱이를 쥐었다가 손을 편다   손가락 사이로 빠지는 모래는, 바람 따라   미라의 긴 머리채처럼 황금색 낙타 쌍봉을 향해   수시로 무늬와 형태를 바꾸며   이사 오고 이사 가고 흩어졌다가   시골 장터 무동을 어깨 위에 세우곤   덩더꿍 덩더꿍 풍물놀이 장단 맞추는   너, 나 그런 개념 없이 어울려 땅따먹기한다   그 속에 무슨 정이 있다고…아직까지 정이 있다며   공동체를 만들며 살아가는지     무한 허공   목이 마르다,     천근만근 무거운 두 다리   함부로 신발 속과 온몸에 박혀 있는 모래를   툭툭 털어내면서   자동차 안에 있는 페트병 생수를 찾아   꿀꺽꿀꺽 마신다       서녘 하늘에서 가슴 더운 노을이 하강하여   먼 산은 눈시울 붉어지도록 내려앉는다   너덜거리는,   기억 속의 잔여울이 여울지어   붉은 황금빛 모래 산은   어느새   검은 긴 천을 두르고 하나씩 잠자리에 든다   *금관악기 중 최저음역을 내는 악기 강양욱 / 시인시 사막 소리 서녘 하늘 풍물놀이 장단 황금색 낙타

2024-02-08

[우리말 바루기] ‘뒷심’을 발휘해 보자

어떤 일을 끝까지 견디어 내거나 끌고 나가는 힘을 ‘뒷심’이라고 한다. 혹 ‘뒷힘’이 맞지 않을까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힘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언뜻 생각하면 ‘뒷힘’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사전에서는 ‘심’을 ‘힘’의 강원도 방언이라고 정의해 놓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표준어는 서울말을 기본으로 삼기 때문에 서울말인 ‘힘’을 표준어로, ‘심’을 방언으로 규정해 놓았다. 그래서 ‘뒷심’ 또한 사투리라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힘’이 다른 단어와 결합해 합성어가 될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다른 낱말과 짝을 이룰 때 ‘힘’을 발음하기 힘든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뚝힘’ ‘밥힘’ ‘뱃힘’ ‘입힘’ ‘헛힘’을 한번 발음해 보면 알 수 있다. ‘힘’을 자연스럽게 소리 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들 단어는 소리 내기 쉬운 ‘심’이 붙은 ‘뚝심’ ‘밥심’ ‘뱃심’ ‘입심’ ‘헛심’을 표준어로 삼고 있다. ‘뒷힘’ 역시 ‘힘’을 발음하기 힘들어 ‘뒷심’이 표준어가 된 것이다.   ‘뒷심’은 “뒷심이 세다” “뒷심이 약하다” “뒷심이 좋다” 등처럼 쓰인다. ‘뒷심’은 남이 뒤에서 도와주는 힘을 뜻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뒷심이 든든하다” “누구 뒷심 믿고 삐딱하게 노느냐”가 이런 경우다.우리말 바루기 뒷심 발휘 누구 뒷심 소리 내기 이들 단어

2024-02-07

[음악으로 읽는 세상] 학살 현장의 피아노 소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는 독일군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집 안 곳곳에서 살육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다른 방에서는 한 독일군이 피아노를 치고 있다. 그가 연주하는 곡은 J S 바흐의 ‘영국 모음곡’ 제2번의 ‘전주곡’이다. 음악을 연주하는 독일군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다. 밖에서 벌어지는 광란의 살육과 자기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건조한 얼굴로 피아노를 친다. 이 음악에 맞추어 유대인이 하나둘 죽어나간다. 이들이 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은 처절하지만, 바흐의 음악은 무심하고 냉정하기만 하다. 서늘한 표정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는 독일군이 마치 저승사자처럼 보인다.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황폐하게 만드는 장면이 또 있을까.   바흐의 음악은 견고한 구성과 형식미를 자랑하는 장엄한 건축물과 같다. 마치 수학 문제를 풀듯 치밀한 계산에 의해 음을 구축해 나간다. 바흐의 건반음악 악보에는 셈 여림과 같은 다이내믹을 표시하는 기호가 없는데, 이는 당시 건반 악기인 하프시코드에 이런 기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흐의 건반 음악은 객관적이다. 그리고 이런 객관성이 후대에 무수한 주관이 개입할 여지를 주었다. 오늘날 바흐의 건반 음악은 다이내믹의 표현이 가능한 피아노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같은 곡이라도 건조하게 칠 수도 있고, 따뜻하게 칠 수도 있다.   독일군의 바흐 연주는 건조하기 그지없다. 바로크 시대 본연의 차가운 객관성을 보여준다. 일정한 음형의 연속과 반복으로 이루어진 음악. 바로 옆에서 수많은 사람이 잔인하게 학살당하는데, 바흐의 음악은 애절한 멜로디 하나 없이 형식과 구성의 논리로만 전개된다. 그 무심함이 처절한 비명보다 더 끔찍하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피아노 학살 피아노 소리 건반음악 악보 바흐 연주

2024-01-29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