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 마당] 한국, 실버타운으로 떠나며…
수필
스물아홉에 캐나다에 이민 해 10년, 그 후 미국에서 40년, 오랜 북아메리카에서의 삶을 접고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려 한다. 인생극 3막, 파이날 챕터를 고국에서 마무리하고 싶었다.
50년 살아온 터전을 옮기는 일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2년 전 아내를 잃은 게 큰 몫을 차지했다. 아들 둘은 다 가정을 꾸렸고 막내딸도 혼인 날짜를 잡는 일만 남았다. 혼자 집에 덩그러니 남아 때때로 아내가 나타날 것 같은, 그래도 좋을 것 같다는 착각을 하면서 고독이랄지 외로움을 실감하곤 했다. 처음엔 두렵고 낯설었지만 이것도 익숙해졌는지 나는 어느덧 홀로 있음을 즐기고 있었다. 우울할 필요도, 후회할 일도 없었다. 서자 막대기 휘둘러봐도 걸칠 게 없다. 오히려 일요일 법회에서 108대 참회문을 봉독할 때면 짜증이 났다. ‘지금껏 살면서 충분히 후회도 많이 했는데 뭘 또 108가지씩이나 참회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난해 가을 한국 방문 길에 강원도 동해시의 실버타운에서 일주일간 체험 숙박을 했다. 실버타운 5층 방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동쪽으로 난 넓은 창문으로 짙푸른 동해가 파노라마로 펼쳐졌고, 새소리를 들으며 숲속을 25분쯤 걸어 내려가면 망상 해수욕장 모래사장에 이른다. 풀러튼 캐슬우드 트레일에서처럼 매일 맨발로 젖은 모래를 밟으며 걸었다. 철석이는 파도 소리에 갈매기들은 울음소리를 내며 내 머리 위로 날아갔다. 가끔 스치는 바닷바람은 지난 것들은 다 잊고 지금 여기, 내가 서 있는 곳에 깨어 머무르라고 나를 흔들었다.
실버타운의 세 끼 식사는 매일 생일 잔칫상 같았다. 늘 색다른 반찬에 생선이나 고기 등 단백질이 많이 함유된 음식도 빠지지 않았다. 점심 후에는 운동실에서 운동하고 저녁엔 노래방에서 어울려 목청을 높였다. 약천온천수 목욕탕엔 사우나가 다섯 종류나 있었다. 평소 일광욕이나 사우나가 체온을 높여 땀으로 몸의 독소를 빼주고 엔도르핀이나 세레토닌, 도파민 같은 70여 가지의 좋은 호르몬은 많이 생성한다고 믿고 실행해온 터라 행운이다 싶었다. 과일이나 인삼을 햇빛에 말리거나 수증기에 찌면 당분이나 영양분의 수치가 높아지는 원리와 같다.
나는 이런 시설과 숲길, 바다 등의 환경이 맘에 들어 바로 정했다. 그뿐만 아니라 스키장이 가까이 있어 겨울 스포츠를 즐길 수 있어 좋을 것 같았다. 또 속초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65번 동해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처럼 부산스럽고 복잡하지도 않았다. 차만 있으면 설악산이나 오대산 월정사, 무릉계곡, 울릉도행 여객선이 있는 묵호항 등 청정지역을 쏘다닐 수 있을 것 아닌가?
서울이나 수원 등 복잡한 도심의 고급스러운 고층 타워의 실버타운은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풀러튼에서 LA에만 가도 번잡함이 싫었는데 노후생활에 대도시가 웬 말이냐는 느낌이 있어서였다. 사무실에 이듬해 12월쯤 들어오겠다며 대기자 명단에 올렸다. 집을 정리하고 미국을 떠나는 데에는 1년여의 시간은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풀러튼으로 돌아와 집 안과 밖에 직접 페인트를 하고 욕조도 바꾸고 정원에는 꽃을 사다 심었다. 2월에 마음과 주변 정리가 끝나자 실버타운의 맛있었던 식사와 숲길, 바다의 파도 소리, 모래밭 맨발 걷기 등이 그리워졌고 예약한 12월까지 기다릴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나는 3월에 집을 내놓으며 실버타운에 전화했다. 집을 내놨는데 7월 초순이면 다 정리하고 갈 수 있으니 몇 달을 당겨달라고 했더니 보름 후에 준비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제 여기를 정리하는 일만 남게 되었다.
이사를 가는 것이 아니기에 모든 살림살이를 정리해야 했는데 가구는 물론이고 책, 오디오 시스템, CD, LP 음반 등은 처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녀들과 주위에 나눠주고도 남은 것들은 2주에 걸쳐 거라지세일을 했다. 어디서 그렇게 물건들이 꾸역꾸역 나오는지, 치우면서도 계속 놀래야만 했다.
사진과 앨범, 비디오 영상 같은 마음속의 짐들도 오래전에 버리고 태워 없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난 과거가 없는 사람인 셈이다. 아들 둘과 딸, 8명의 손주도 벌써 내려놓았다. 평소 집착 없이 서로 독립적 삶을 살자고 실행해온 터라 자식이나 손주들이 눈에 밟혀서 전전긍긍하는 일 없이 자유스러웠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지난 주말, 가족 15명이 모인 송별 파티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은행에 집 판 돈이 들어있고 3남매 앞으로 리빙트러스트를 해놓았지만 아빠 빨리 죽기를 기도하지 마라, 나 그거 다 쓰고 죽을 거다.”
여기서 반 백 년을 살다 보니 이제 미국생활이 별 불편 없이 익숙해졌다. 이민 중반쯤엔 자리가 잡혀서 그랬는지 정치적 성향도 진보에서 보수로 바뀌었고, 영어는 손짓 발짓을 면하고 불편 없이 구사하게 되었다. 군대에서 군 생활 알만해지자 제대한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지금 미국생활을 병장으로 만기제대하는 기분이다. 이민 올 때 낯선 땅, 서툰 영어, 다른 문화에 대한 불안과 기회의 나라라는 기대가 범벅이었던 때에 비하면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가는 역이민은 내게 달콤한 회귀의 설렘이 있다.
미국을 떠나는 지금 미련이나 후회도 없다. 오늘 아침에, 살던 집에 가 앞뒤 정원의 꽃과 과일나무에 물을 주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이제 살던 집과 거리, 도시가 생각나기도 하겠지만 어쩌겠나 이제 그리워하지 말아야지, 지나간 꿈이었던 것을….
김윤기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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