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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하나쯤 갖고 싶은 ‘천천히 가는 시계’

벽시계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벽시계 안에는 일정하게 움직여야 할 초침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건전지가 다 닳았는지 6시부터 9시까지는 한 칸 올랐다 두 칸 내려가고, 다시 두 칸을 오르다가 기운이 달렸는지 다시 한 칸 미끄러지면서 보는 이의 애간장을 녹인다. 겨우 9시에 오른 초침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마지막 턱걸이 하나를 앞둔 사람처럼 안간힘을 다하며 마지막 용을 쓰더니 12시라고 쓰인 꼭대기에 올랐다.     시곗바늘이 어기적대며 정상에 오르는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이런 시계 하나쯤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가는 시계’ 말이다. 시곗바늘이 반 바퀴 도는 데 30초가 아니라 한 40~50초나 걸렸으니 이런 시계 하나만 있으면 시간을 넉넉히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정상에 오른 시곗바늘은 뭐가 그리 급한지 후다닥 내려가면서 결국은 60초에 맞춰 한 바퀴를 돌더니 분침을 한 칸 앞으로 돌려놓았다.     오르막길을 더디게 올라가서 내리막길을 만나면 쏜살같이 내려가는 시계처럼 세월도 끝에 가서는 급하게 꼬리를 감추고 사라진다. 온종일 하늘에 떠 있을 것만 같던 해도 때가 되면 지평선 너머로 뉘엿뉘엿하더니 한순간에 사라지고 땅거미가 찾아온다. 가는 길이 급하기는 달도 마찬가지다. 월초라고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면 어느새 월말이 되고 걸핏하면 달이 지나서야 달력을 넘기기 일쑤다. 한 시간 두 시간,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달음박질하듯 달아나는 시간을 좇다 보니 어느새 한 해가 저문다. 더는 시간을 붙들 힘도 없는데,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건전지를 바꿔 끼운 벽시계는 째깍째깍 제 갈 길만 갈 뿐이다.      어디 천천히 가는 시계는 없을까?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의 푸념을 들었는지 나태주 시인이 그런 시계를 하나 내놓았다. 시인이 노래한 천천히 가는 시계는 수탉의 긴 울음소리로 아침 먹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뻐꾸기의 잰 울음소리에 점심때가 지나고 있음을 느끼고, 부엉이의 더딘 울음소리에 저녁밥 지을 때가 되었음을 깨닫게 되는 새의 울음소리로만 돌아가는 시계다.     또, 나팔꽃이 피어서 날이 밝은 것을 알고, 연꽃이 피어서 해가 높이 뜬 것을 알고, 분꽃이 피어서 구름 낀 날에도 해가 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꽃의 향기로만 돌아가는 시계다. 시인은 새의 울음소리로만 돌아가고, 꽃의 향기로만 돌아가는 시계를 소개하면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고 시도 쓸 만큼 써보았으니 나도 인제는,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 하나쯤 내 몸속에 기르고 싶다’라고 노래했다.     ‘천천히 가는 시계’라는 제목의 이 시를 읽으며 우리도 그런 시계 하나쯤 우리 몸속에 기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길러야 하는 ‘천천히 가는 시계’는 사람을 향한 너그러움으로 나이 들었음을 알게 하고, 세상을 향한 이해와 사랑으로 어른이 되었음을 짐작하게 하고, 웬만한 고난쯤은 지금까지 쌓은 연륜으로 가볍게 넘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는 시계다. 또 한 해가 이렇게 옴나위없이 저물어간다. 빠른 세월을 탓하기 전에 이해와 사랑, 너그러움으로 움직이는 ‘천천히 가는 시계’ 하나쯤 우리 마음에 길러 보자. 가는 세월이야 붙잡을 수 없겠지만, 최소한 세월에 치여 살지는 않게 될 것이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이 아침에 시계 시계 하나쯤 나태주 시인 최소한 세월

2024-11-13

세월은 못 잡아도 '주름' '탄력'은 잡는다!

누구나 동안을 선호하지만 세월의 흐름에 의한 노화는 모두에게 찾아온다. 완벽히 피할 수야 없겠지만 관리만 잘해줘도 얼마든지 피부의 노화 속도를 지연시키거나 예방할 수 있다.     우리 몸에서 노화 방지를 위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섬유아세포다. 섬유형 세포를 뽑아내는 '섬유 공장'이라고 불리는 섬유아세포는 세포 하나하나를 가느다란 섬유로 부드럽게 에워 쌓다 다시 굵은 다발로 이루어 콜라겐 섬유가 된다. 이러한 섬유아세포는 우리 피부의 콜라겐을 관장하며 피부 콜라겐의 80% 이상을 만들어 내는데, 노화된 피부에는 섬유아세포가 위축돼 있고 노후된 섬유아세포 수 역시 증가한다. 즉, 노화로 인해 그물망같이 되어있는 섬유아세포가 일을 못 하게 되면 피부가 처지고 주름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기능성 화장품 대표주자 '셀리온'은 'E2F4' 라인을 통해 이 문제를 개선했다. 세포의 증식 및 성장 조절을 하며 E2F로 불리는 전사 인자에 E2F의 활성화를 극대화시키는 4종류 단백질을 접해 만든 것이 바로 E2F4이다. 여기에 세계 최초의 섬유아세포의 세포 증식 펩타이드로 개발된 'sh-Polypeptied 150'이란 성분을 듬뿍 넣어 섬유아세포 증식과 콜라겐 합성을 강력하게 촉진한다.     E2F4 라인은 완벽한 피부 탄력, 그리고 이로 인한 주름개선을 집중적으로 케어하는 제품이다. 피부 콜라겐을 꽉 채우고 스킨 매트리스의 치밀도를 끌어올려 속살부터 차오르는 탱탱함을 느낄 수 있다.     피부가 젊어지는 효과가 검증된 E2F4 앰플 + 세럼(50ml) + 크림(50ml) 세트는 현재 핫딜에서 50% 할인된 가격인 230달러에 구매가 가능하다. 단품 구입 시에도 동일한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   」 ▶상품 살펴보기:hotdeal.koreadaily.com   ▶문의:(213)368-2611핫딜 세월 주름

2024-05-29

[열린광장] 은퇴와 세월의 무게

‘일에는 은퇴, 삶에는 데뷔’라는 말이 있다. 은퇴를 결정한 후 갑자기 많아진 시간을 독서와 음악, 운동, 봉사, 여행, 그리고 스패니시 공부 등에 할당했다. 해가 저물기 전 하얀 뭉게구름을 붉게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처럼 아름답게 인생의 황혼을 장식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건강이 더 저물기 전에 약간 이른 은퇴를 결정한 이유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내과 의사로 살았던 내 삶에 어떤 새로운 신비와 희열의 세계가 다가올지 기대했다. 그러나 은퇴 후의 지난 1년을 돌아보면 별다른 진전이나 성과 없이 그냥 바쁘기만 했던 것 같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농담이 실감 날 정도다.     과거 대학 재학 시절 음악에 대한 열정만 갖고 의과대학 록밴드로 활동했었다. 당시 음악에 대한 기초는 부족했었다. 은퇴하고서 음악을 다시 시작하게 된 이유다. 음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연륜이 됐고 열심히  배우면 옛날보다 깊이 있고 음악다운  음악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진도와 성과는 더딜 뿐이었다. 음정, 음악을 담당하는 뇌세포가 세월의 흐름 속에 퇴화 내지 감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세월의 무게라는 것이리라.     이를 깨닫는 순간 모든 계획과 기대를 수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년 넘게 해온 의사의 일을 완전히 접고 지낸 1 년간 내게는 어딘가 모르게  한 구석이 비어 있는 것 같은 허전함이 있었다. 아쉬움일까?  과거의 추억과 회귀 본능의 느낌일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 했던  멕시코 의료 봉사를 다시 시작했다.  현지에 의료 진료실을  완공했고, LA에서는 친한 의사의 진료실에서 한 달에 며칠씩 진료를 담당하기로 했다.     입대 시절로  되돌아 가기에는 늦은  노병이 되어 버렸지만 의학의 맥은 유지하고 싶은 본능이 있었던 모양이다. 의료계에 입대한 지  40년이 된 지금은 최고령 병사가 되었다. 이젠 머리도 하얗게 변했고 거동도 민첩하지 못하지만 퇴역 대신 현역 병사로 남기로 했다. 나이가 들면  사소한 일도 소중히 아끼게 된다는 말을 되새기며 건강이 주어지는 한 멕시코와  LA에서의 진료를 계속할 것이다.     나의 주 업무는 ‘삶’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며 남은 시간을 사용하려 한다. 발전이나 성과에 대한 조바심 대신 세월의 무게에 맡기려 한다. 다만 배움은 멈추지 말고 활동도 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찬란한 저녁노을의 꿈을 향한 시작이라  생각하며 오늘도 한걸음, 한걸음 또박또박 걷는다.   최청원 / 내과의사열린광장 은퇴 세월 의료 진료실 음정 음악 음악 운동

2024-01-28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세월의 끝자락에서

’나는 떠난다. / 청동의(靑銅)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振幅)의 새가 되어 /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 하나의 소리가 되어. / 인종(忍從)은 끝이 났는가. / 청동의 벽에 / ‘역사’를 가두어 놓은 / 칠흑의 감방에서 / 나는 바람을 타고 /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 먹구름이 깔리면 /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 뇌성(雷聲)이 되어 /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박남수의 ‘종소리’     시인의 종소리는 청동의 벽에 갇혀 있다. 종소리는 벽을 뚫고 세상에 울음으로 퍼져 나간다.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으로, ‘하나의 소리’가 되어 세상을 진동시킨다. 역사 속에 갇혀 있었던 시간을 해방시키는, 꼭지 터지는 천둥 소리가 되어 자유를 찾아 푸르름이 되고 웃음이 되고 새가 된다.     유년의 종소리는 즐거웠다. 시작을 재촉하는 종소리도 끝을 알리는 종소리도 모두 좋았다. 선생님이 교무실 앞에 달린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색 종을 치며 “얘들아” 하고 부르면 하던 재미있는 놀이를 멈추고 동무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교실로 달려 갔다.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1984년 이화여대 음대 김메리교수가 유일하게 작사 작곡한 동요다. 유년의 종소리는 청명한 울림으로 시작과 멈춤을 알리며 생의 곳곳을 스며 든다. 시작과 끝은 아련한 반복으로 세월의 종을 울린다.   이젠 아무도 종을 쳐 주지 않는다. 언제 시작을 해야 하는지, 어디서 멈추어야 하는지, 어느 쯤에서 길고 긴 방황을 끝을 접어야 하는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 아득한 길 위에서 길을 찾으며 길을 잃고 길을 헤맨다. 또 다시 지난 해의 그 자리에 서있다. 달라지려고, 좀더 나아지려고 애를 썼지만 달라진 것 하나 없이 빈 손으로 바람 앞에 내가 서 있다.   작은 것들이 모여 무리를 이룬다. 태산도 원래는 평지였다. 하나 둘 모여 육지가 되고 바다가 되었다. 우주 기원의 가설인 빅뱅(Big Bang)에 의하면 태초에는 모든 에너지가 한 점에 모여 있었다. 물리학자 조르주 르메트르(George Lemaitre)는 ‘최초에 모든 것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불꽃놀이가 있었다. 그 후 폭발이 있었고 하늘이 연기로 가득 찼다’라고 주장한다. 찬란한 불꽃놀이와 엄청난 폭발, 앞이 안 보이는 혼돈 속에 탄생한 우주 속에 한 개의 점으로 인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사라지면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사는 우주의 주인공이다. 내가 없으면 그대 사랑도 허공을 맴돈다. 후회와 미련으로 지난 날을 닦달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세월의 끈을 푼다. 묶여 있던 것들을 떠나 보낸다. 그리움의 언덕에는 갈대가 서걱인다. 무겁고 힘든 것들의 매듭을 풀지 않으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세월의 끝자락은 흔들린다. 달력의 마지막 장은 펄럭인다. 유년의 일기장, 빛 바랜 추억 속 얼굴, 작별 담은 그대 편지, 소복 입은 어머니의 무명치마는 바람 앞에 서면 펄럭였다. 마음의 끈 다잡아도 그리움의 빈 칸을 눈물로 채웠던 날들이 바람개비로 허공을 맴돈다.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지치면 쉬어가면 된다. 슬픔은 삼키면 약이 된다. 고통은 용기가 되고 절망은 희망의 뿌리가 된다. 아픔은 진주처럼 영롱하고 그리움은 별이 된다.     끝날 때까지는 끝이 아니다. 잠시 멈추고 있을 뿐이다. 시행착오는 반복되고 세월이 연륜을 만든다. 인생 역전 드라마는 아직 방영되지 않았다. 누가 더 잘 사는지, 잘났는지 키 재기 하지 말고, 소중한 내 모습 그대로 세월의 끝자락에 내일의 꿈을 새긴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끝자락 세월 바람개비로 허공 우주 기원 천둥 소리

2023-12-26

[글마당] 남자 사람 친구

예전에 친구들과 함께 만나며 좋아하던 선배가 있었다. 그도 내가 싫지 않은지 개인적으로 연락하곤 했다.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어느 날, 모임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그에게 물었다.     “우리는 어떤 사인 가요?”   “친구 사이지.”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전에 데이트하다가 헤어진 여자가 다시 잘해보자고 연락해 온 적이 있었어. 나는 사귀다가 끝난 여자에게는 다시 연락하지 않아. 하지만 친구와는 헤어짐이 없는 거야.”   “혹시 우리가 친구로 지내다가 헤어지더라도 꼴사납게 끝내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와 어두워지는 길을 걸으며 ‘이 남자는 나를 좋아하지 않고 그냥 친구로만 생각하는구나!’ 왠지 모를 곤혹스러움에 구두코만 쳐다보며 조용히 걸었다. 뭔가 머릿속이 마무리되지 않은 채 버스정류장에서 손을 흔들고 그와 기약 없이 헤어졌다.     그렇게 헤어진 그가 30여 년 만에 뉴욕을 방문해서 나에게 전화했다.     “나 기억해” 귀에 익은 목소리다.   “아아~ 기억나요.”     “어떻게 내 목소리를 금방 알았어?”     “낮으면서도 달콤한 목소리가 매력적이라서. 하하. 반가워요. 어디예요?” 내가 묻자, 그가 대답했다.   “우리 만나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   “전화로 더 이야기할 수는 없나요?” 나는 그와 길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럴 일이 있어서. 만나서 이야기해 줄게.”   ‘한때 좋아했던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니! 그도 나를 잊지 못하고 살다가 연락했을까?’ 여름 안개 저편 먼 곳에서 아른거리던 그리운 사람이 갑자기 곁에 다가와 속삭이는 듯 기분이 들떴다.   카페에 들어서는 그가 싱거운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왔다. 물기 빠지기 시작하는 사과처럼 조금은 쪼그라든 모습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도 색이 바래고 비틀어지기 시작하는 사과 꼭지 같다. 그의 뒤로 여자가 주춤거리며 다소곳이 따랐다.     “내 와이프야.” 그가 와이프와 함께 오리라고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참한 인상의 여자가 다소곳이 인사했다. ‘이런 현모양처를 찾으시느라 나에게 ‘친구’를 강조했구나.     나는 그동안 뉴욕을 방문했던 그와 내가 알던 친구들 소식을 신이 나서 들려줬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내가 한 이야기를 통역하듯이 간간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게 아닌가!  이상해서 물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전화상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어.”   나는 그의 얼굴 가까이 몸을 들이밀며 높은 톤으로 또박또박 잘 들으라고 지껄여 댔다. 그는 고개만 끄덕일 뿐 말이 없다. 나는 저절로 맥이 풀리며 조용해졌다.     만나기 전 희망이 잠시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슬금슬금 빠져나가며 시계추가 멈춘 듯 그와의 시간이 뚝 멈췄다. 그는 나의 수다가 끊긴 분위기에 눌렸던지 시계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더니 싱거운 표정으로 웃으며 일어났다. ‘남녀 간의 친구 사이란 애인을 만나는 동안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가 애인과 헤어지면 들춰 보는 별 볼 일 없는 사이? 오랜 세월 구석에 처박혀둔 내가 잘 있나 확인하고 싶어 만나자고 했나?’ 만남과 헤어짐처럼 분홍빛으로 타오르던 노을이 어둠 속으로 차갑게 사라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씁쓸했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남자 친구 친구들 소식 남자 사람 세월 구석

2023-12-15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세월 따라 멍들어도 늘 푸른 나무로

나이 들면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가는 곳마다 불평 늘어놓고 파토 내는 사람, 나설 자리도 아닌데 앞장 서 고군분투 하는 사람, 혼자서 북치고 나팔 부는데 따르는 군중은 없는 사람. 반면에 낮아지고 작아 보이지만 가만히 있어도 작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사람, 자기 주장에 매몰되지 않고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나이 값 대신 연륜과 경험으로 격려하고 다독여주며 잘 익은 포도주처럼 달달하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한창시절에는 그런대로 잘 나가던 사람이 나이 들면서 해괴망측해져 과대망상에 빠져 설 자리 앉을 자리 구별 못할 지경에 이른 사람을 종종 본다. 근본적인 원인은 ‘젊을 때 한가락 했다’는 영웅심리의 뒷북치기로 과욕을 주체 못해 노욕에 이르게 된 까닭이다.   노욕(老慾)은 인간의 3대 욕구인 식욕, 물욕, 정욕보다 더 추하다고 말한다. 노욕은 자신이 서 있는 장소와 때, 분수를 모르는 탐욕에서 출발한다.   공자는 ‘논어 계씨편’에서 군자가 경계해야 할 세가지를 ‘젊을 때는 혈기가 안정을 못 찿으니 여색을 경계하고, 장성해서는 혈기가 왕성하니 싸움을 멀리하고, 늙으면 기가 쇠약함으로 탐욕을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한국사람은 감투쓰기를 엄청 좋아한다. 감투가 성공의 월계관이 되기는커녕 낙인으로 찍혀 불명예스럽게 퇴진하는 사람을 본다. 명칭이 유사한-혹은 같은 단체로 다른 이름인-단체장을 맡기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하던 분을 기억한다. 양쪽 다 지지하는 숫자 늘리려고 수십통의 이메일을 보냈는데, 자기편 만들려고 정성 들여 이메일 보낸 분은 말기암으로 투병 중이었고 결국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위대한 성취나 직함보다 떠나기 전 가족들과 좀더 편안하고 다정한 시간 보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노욕의 원천은 과거지향적인, 철 지난 영웅심리에서 출발하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을 회상하며, 맨손으로 파리 잡던 시절을 멧돼지 잡는 영웅전기로 둔갑시킨다.     젊은 시절 꽤나 괜찮던 사람이 현재 상황이 흡족하지 못할 경우, 횡설수설 돈키호테식 무용담으로 주변을 피곤하게 한다. 무너져내리는 자신의 존재감을 극복하지 못하면 노인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멈출 때와 돌아설 시간을 알면 사는 게 수월해진다.   ‘즐거웠던 그날을 돌이킬 수 있다면’라는 노래를 자주 즐겨 부르면 꼰대로 등록된다. ‘물레방아간 첫사랑’의 처녀는 이미 할머니가 됐다. 과거는 흘러갔다.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과거는 허공을 향해 부르짓는 메아리다. 잘난 체 있는 체 허세 부리지 말고 눈치 빠르게 커피값이라도 재빨리 계산하는 게 어른 대접 받는 묘수다. 현재에 충실하고, 자기 생각보다 경청하는 귀를 가지면 꼰대의 허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앙드레 지드는 ‘늙기는 쉬어도 아름답게 늙기는 어렵다’고 했다. 수양버들은 꺾이지 않고 산들바람에도 나부낀다. 두 팔 길게 늘어트리고 미소 지으며 손짓한다. 가을 잎이 바람에 흩날린다고, 휘영청 늘어진 가지 버리고 떠나가지 않는다.   아름드리 큰 고목나무 아래 삼만이 아재가 대나무를 엮어 만든 평상에 누워 수없이 반짝이는 별을 셌다. 별을 헤는 유년의 밤은 아름다웠다. 가마솥처럼 찌는 여름날엔 나물 캐서 돌아온 옥이언니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고목나무 아래 비스틈이 누운 광주리로 떨어졌다.   고목은 늙지 않는다. 오래 살고 있을 뿐이다. 기억하고 되새김 할 그리움이 많은 사람은 혼자 슬며시 웃는다. 기억의 바다에는 피라미, 송사리, 미꾸라지들이 줄지어 헤엄친다. 내일이 세상 끝이라 해도, 늘 푸른 나무로 사는 사람은 오늘 희망의 씨를 뿌린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세월 나무 고목나무 아래 아재가 대나무 횡설수설 돈키호테식

2023-10-25

"세월은 변해도 정신은 영원하리라"

     제 73회 6.25 전쟁 참전 상기대회가 열렸다. 23일 워싱턴 한인 커뮤니티 센터에서 열린 대회에는 150여명 한국전쟁 참전 유공자 가족 및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대한민국 6.25참전 유공자회 워싱턴지회 손경준 회장은 "8년 전에 475명이었던 워싱턴 지역 한인 참전 유공자 숫자는 5월말 현재 161명"이라고 밝혔다.    손 회장은 "남은 유공자 대부분은 90대로 너싱홈 등에서 30여명이 투병생활을 하고 있으며 각종 행사나 모임에 참여할 수 있는 유공자들은 30여명 정도 남았다"고 말했다.    손 회장은 "우리가 이런 상기대회에 참여할 날이 몇 년이나 더 남았겠냐"면서 "얼마 남지 않은 유공자들에 대한 한인 사회의 예우가 절실히 필요하다" 고 지적했다. "세월은 변해도 정신은 영원할 것이라는 점은 알아달라"고도 덧붙였다.    손경준 회장은 이 날 사단법인 우리민족교류협회(이영훈 총재)와 대한민국평화통일국민문화제 조직위원회(명예위원장 정의화)가 수여하는 한반도통일공헌대상 재외동포분야 상을 전달 받았다. 아울러 참전유공자회 장인규, 진기창 이사는 대한민국 참전 유공자회(손희원 회장) 표창장을 수여 받았다.     이날 참석한 내빈들 역시 격려사를 통해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위해, 두려움과 망설임 없이 목숨 걸었던 참전 유공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더욱 건강히, 오래 살아달라"고 당부했다.    격려사는 권세중 총영사, 무관부 이성진 해병대 대령, 재향군인회미동부지회 김인철 회장, 메릴랜드 행정법원 박충기 법원장, 워싱턴한인연합회 스티브 리 회장 등이 전했다.     끝으로 참석자들은  '6.25의 노래'와 '전우야 잘자라'를 합창했다. '전우야 잘 자라..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 만지니 떠 오른다.  내 가슴에 꽃 같이 별 같이...' 음향기기 사정으로 반주 없이 낮은 목소리로 부른 노병들의 합창은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묵직히 울렸다.   박세용 기자 spark.jdaily@gmail.com세월 정신 참전유공자회 장인규 25참전 유공자회 한국전쟁 참전

2023-06-26

[시] 조약돌 인생

우리 집의 애지중지 주먹만 한 조약돌   매끈하고 묵직한 사랑의 조약돌   레드우드 강에서 닳고 닳은 너를     검은색이 예뻐서 주어 왔지요         나는 너를 보면서   너의 장구한 세월을 느끼고     너의 역사를 보며   그래서 너와 나의 삶을 반추도 하지요         험한 돌산의 한 모퉁이었던 너는   몇백 년     몇 천 년을   뜨거운 햇볕과     모진 비바람에 시달리다가   돌산은 갈라져 바위가 되고   바위는 다시 갈라져   모난 돌이 되었을 텐데       모난 돌이 된 너는 어떻게   폭풍우와 비바람에 휩쓸리다가   거친 강물 속으로 밀려 들어와   저 자갈과 모래들에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을 시달렸기에   이토록 매끈한     조약돌이 되었는가       모난 돌이 정 맞듯   거친 돌이 더 시달리지   너는 시달리는 게 아프고 싫어서     둥글게 되었나   둥글게 살자고   둥글게 되었나       나도   너와같이   둥글게 살련다   모난 것은 교만이요   둥근 것은 겸손이라       너보다도 더 모났던 내가   너보다도 더 둥글게 되었는데   나는 장구한 세월 동안   햇볕도 필요 없고     비바람도 필요 없고   거친 강물에 시달릴 필요도 없이   한순간에   둥글게 되었단다       나는 단 한 번의 고난과 역경으로   이렇게도 둥글게     겸손의 조약돌로 되었단다   그러나   그 한 번의 고난과 역경은   너의 세월만큼이나   몹시도 쓰리고도 힘든 고통이었단다       이제 나는   나의 이 둥근 삶을   너와 같은 조약돌의 삶을   나의 영원을 위해   영원한 겸손을 위해 살리라 이창수 / 시인시 조약돌 인생 조약돌 인생 비바람도 필요 세월 동안

2023-05-11

[아름다운 우리말] 이른바 ‘어권’에 관한 문제

한국어 교재를 만들 때 범용이라는 제목으로 모든 언어권, 모든 목적의 학습자를 대상으로 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어교육에서는 학습자의 종류 혹은 분류에 따라 교재를 세밀하게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언어권을 나누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학습자의 모국어와 목표어를 대조하여 설명한다는 장점도 있고, 어휘나 문법의 설명을 학습자의 모국어로 하여 이해를 돕는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특히 학습자가 동일 언어권인 경우라면 학습자의 언어로 개발된 교재는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언어권과 문화권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문화의 설명에도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위의 장점들 때문에 ‘언어권’이라는 말의 사용과 이에 따른 교재의 개발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어권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학습자의 나라, 민족 등에서 차이가 있는 집단이 바로 언어권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같은 집단으로 취급받고 싶지 않은 집단인 경우도 있습니다. 교육의 역효과라는 말은 이럴 때 쓰이는 말입니다. 같이 묶이고 싶지 않은데 함께 묶어 놓아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같은 중국어권이라고 하지만 중국과 홍콩, 대만의 학습자는 서로 다르거나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때로는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문자의 사용에서도 전혀 다른 모습을 나타냅니다. 언어표현 역시 다른 것이 많습니다. 중국어로 설명하였다고 하여도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문화, 정치, 경제와 관련된 내용은 자칫하면 문제의 소지가 되기도 합니다.   러시아어권은 어떤가요? 이것도 매우 위험합니다. 러시아어권인 많은 나라는 소비에트 연합 시절에 억지로 러시아어를 사용하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긴 세월 러시아어를 사용하였기에 러시아어가 제1 언어나 공용어인 경우가 많습니다만, 러시아어에 대한 태도는 서로 다릅니다. 벨라루스와 조지아 등의 경우도 입장이 다릅니다. 중앙아시아의 많은 나라도 러시아어로 수업을 듣거나 러시아어로 된 교재를 사용하는 것에는 생각이 다릅니다. 우즈베키스탄 등의 나라에서는 점점 러시아어 자체를 못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전에 스페인어권 교재를 만들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스페인과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은 모두 스페인어권으로 묶이지만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경우에는 스페인과 많은 언어표현에서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같은 언어권이라고 말하는 것을 그들도 좋아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어권은 어떤가요? 과연 영어권이라는 말은 성립은 할까요? 우리는 영어권이라고 하면 미국을 생각하고, 조금 더 나아가면 영국을 생각하고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 등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어권에는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있습니다. 인도,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도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입니다. 영어권이라고 통칭하여 교재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요? 과연 공평할까요?   언어권은 범용의 범위를 줄인다는 점에서는 이점이 있지만 언어권 안에서의 차이점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언어가 같아도 서로에 대한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교재 속의 등장인물로는 적당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만났던 아랍어권 학습자를 가르치는 교수의 반응도 그러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언어권보다는 학습자의 범위를 좁게 하여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교재도 세밀하게 개발하여야 합니다. 영어권도 하나가 아닙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문제 스페인어권 교재 아랍어권 학습자 세월 러시아어

2023-04-30

[삶의 뜨락에서] 잃어버린 시간

아침에 눈을 떠 창밖에 펼쳐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가히 매일이 기적이라 할 수 있겠다. 언듯 보면 똑같은 모습으로 지루한 하루를 또 맞이하는구나 느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어느 때부터인지 시시각각으로 펼쳐지는 그 모습에서 지나온 세월(世月)을 반추한다.     오늘처럼 청명한 날에는 멀리 Met Life Stadium도 보이고 Teterboro Airport도 선명히 보이지만 안개가 짙게 낀 날에는 한 치 앞도 볼 수가 없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나면 학교 운동장에 모여드는 아이들도 보이고 줄줄이 서 있는 건물들이며  상점들이 하루를 열고 있다.     지나간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일까! 모든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생각이 들기에 오늘의 노년의 삶은 때로는 허무를, 때로는 의욕을 잃고 허우적거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요즈음 많이 든다.   지난 4월 초 월요일 아침 학교 운동장에 아이들이 하나도 안 보일 때 웬일일까? 놀라면서도 허전하던 그 마음… 생각하니 요즈음 spring break란 것을 떠올리며 혼자 웃었던 생각이 난다. 이처럼 나와는 아무 연관도 없는 아이들한테도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 것을 보며 나의 아이들 자라던 때를 떠올리다가 손자 손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나간 시간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삶은 이렇게 계속되는 것이구나 다짐을 했다.   내 집에서 멀지 않게 바라보이는 건물에는 ‘포부동’(soup Dumpling plus)이란  중국집이 있다. 무심(無心)히 쳐다볼 때는 몰랐는데 관심을 가지고 보니 일주일에 세 번 트럭이 물건을 놓고 가는데 그 시간이 되게 아침 11시경에 들리곤 한다. 그 모습을 창 너머로 바라보면서 내 마음은 어느새 몇십 년 전 내가 브루클린에서 살 때 늘 좋아하던 ‘아침 11시’경이 물밀 듯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시간은 분주한 아침을 남편과 아이들이 병원과 학교로 떠나고 내 마음이 쉼을 누리는 시간이었다.     나는 늘 ‘비발디의  4계’를 들으며 몇 시간 떨어져 사는 나의 친구와 수다를 떨곤 했다. 오랜 세월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실타래를 묶다가 지난 2007년 LA로 떠나고 말았다. 옛날 같지 않게 요즈음은 뜨막하게 지나는 사이가 되었는데 세월이 갈수록 그가 그립고 그 지나간 시간은 나에게 황금의 시간이었다. 가슴을 적신다.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의 쉼을 누리니 그와 지냈던 그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고 희망과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지난 3년 동안 우리들의 발목을 잡았던 팬데믹도 주춤해 있는 요즈음 지나간 시간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지금도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열심히 살고 싶다. 정순덕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시간 학교 운동장 세월 우리 spring break

2023-04-19

[이 아침에] 세월의 끄트머리에서

제일 두려운 건 늙는 것보다 사는 것이 시들해지는 것이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보다 오늘이 더 무료해지고, 내일은 지금보다 더 힘들고 지치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생의 의미를 찾아 목적을 향해 질주하던 청춘 시절은 배가 고파도 욕망이 불타올랐다. 장애물은 혼신을 다해 뛰어넘었고 사는 것이 힘들어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가난을 꼬리표로 달고 살아도 남루하지 않았으며 내일은 또 다른 시작이라서 달력의 새 장을 펼칠 때마다 가슴이 설렜다.       청춘의 하늘은 진홍의 물감을 코발트 빛 하늘에 풀며 노랑나비처럼 산들거렸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진초록의 물감으로 대지를 물들일 때면 젊음도 사랑도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꿈이었다. 오랜지색 물감이 수채화로 번지는 언덕에서 청실홍실로 익어가는 가을 들판을 바라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무엇을 바라며 누구를 위해 못다 한 사연 접으려고 세월의 끝자락에서 펄럭이고 있는가.     동그라미는 세발자전거 바퀴처럼 잘 달린다. 굴렁쇠도 방향을 바꾸며 굴리면 잘 나간다. 굴렁쇠는 너른 길 보다는 좁은 길이 더 좋다.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 굴리면 더 재미있다. 네모난 사각 통은 모서리가 걸림돌이 되지만 뒤집어엎을 용기만 있으면 장애물 경기처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무기력증은 피로, 수면장애, 우울증, 집중력 저하로 몸과 마음을 엿가락처럼 축 늘어지게 하고 살 맛을 떨어지게 한다.   종점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하면 돌아가는 버스를 놓친다. 종점에선 서둘러 막차라도 타고 되돌아오면 된다. 희망의 샘터에 물이 마르면 다른 곳에 우물을 파면 물이 솟아난다. 나만 외롭고 불행하다는 착각에 빠지면 주변을 돌아보라. 나보다 백배 천배 더 힘든 사람들이 실낱같은 희망 품고 매일을 살아간다.     끝은 위험하다. 절벽, 낭떠러지, 막다른 골목에서 마지막 편지 띄우고 싶을 땐 ‘나’를 위해 사랑과 우정으로 용기와 희망을 주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한여름 밤에 불태우던 욕망을 잠재워 주던 너, 절망의 늪에서 손 내밀어준 그대, 가을바람에 날려버린 못다 한 약속 지켜준 당신, 추억의 비눗방울 속에 동그랗게 새겨진 유년의 꿈이어도 좋겠다. 버티며 살 수 있는 온갖 희망이었음 좋겠다.     ‘나의 마음속에 조용히 내려앉아/ 세상 소식 전해준다/ 풀 먹인 연실에 내 마음 띄워 보내 저 멀리 외쳐본다 / 하늘 높이 날아라/ 내 맘마저 날아라/ 고운 꿈을 싣고 날아라/ 한 점이 되어라/ 한 점이 되어라/ 내 맘 속에 한 점이’ ?라이너스의 ‘연’ 중에서   튼튼한 실에 매달려도 연은 언제 바람에 몰려 추락할지 모른다. 나무에 걸리면 꼬리를 접는다. 연은 찢어지고 끊어져도 수리해 다시 쓸 수 있다. 연과 연결된 실을 감는 얼레만 튼튼하면 다시 만들어 하늘 높이 띄울 수 있다. 연 날리던 동무도 까르르 웃던 애들마저 떠난 마당에서 홀로 마음속 연을 띄운다.       영어 배울 때 가장 헷갈렸던 게 현재진행형과 미래진행형이다. 내일은 미래진행형이다. 오늘을 견디면 내일은 온다. 허전한 세월의 끄트머리를 참고 견디면 한 해가 저무는 것이 아니라 첫날 새날이 다가온다.   이기희 / Q7 Editions 대표·작가이 아침에 끄트머리 세월 굴렁쇠도 방향 오랜지색 물감 그대 가을바람

2022-12-30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세월의 끄트머리에서

제일 두려운 건 늙는 것보다 사는 것이 시들해지는 것이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보다 오늘이 더 무료해지고, 내일은 지금보다 더 힘들고 지치며 살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생의 의미를 찿아 목적을 향해 질주하던 청춘 시절은 배가 고파도 욕망이 불타올랐다. 장애물은 혼신을 다해 뛰어넘었고 사는 것이 힘들어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가난을 꼬리표로 달고 살아도 남루하지 않았으며 내일은 또 다른 시작이라서 달력의 새 장을 펼칠 때마다 가슴이 설레였다.       청춘의 하늘은 진홍의 물감을 코발트빛 하늘에 풀며 노랑나비처럼 산들거렸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진초록의 물감으로 대지를 물들일 때면 젊음도 사랑도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꿈이였다. 오렌지색 물감이 수채화로 번지는 언덕에서 청실홍실로 익어가는 가을 들판을 바라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무엇을 바라며 누구를 위해 못다한 사연 접으려고 세월의 끝자락에서 펄럭이고 있는가.     동그라미는 세발 자전거 바퀴처럼 잘 달린다. 굴렁쇠도 방향을 바꾸며 굴리면 잘 나간다. 굴렁쇠는 너른 길보다는 좁은 길이 더 좋다.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 굴리면 더 재미있다. 네모난 사각통은 모서리가 걸림돌이 되지만 뒤집어 엎을 용기만 있으면 장애물 경기처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무기력증은 피로, 수면장애, 우울증, 집중력 저하로 몸과 마음을 엿가락처럼 축 늘어지게 하고 살 맛을 떨어지게 한다.   종점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하면 돌아가는 버스를 놓친다. 종점에선 서둘러 막차라도 타고 되돌아 오면 된다. 희망의 샘터에 물이 마르면 다른 곳에 우물을 파면 물이 솟아난다. 나만 외롭고 불행하다는 착각에 빠지면 주변을 돌아보라. 나보다 백배 천배 더 힘든 사람들이 실낱 같은 희망 품고 매일을 살아간다.     끝은 위험하다. 절벽, 낭떠러지, 막다른 골목에서 마지막 편지 띄우고 싶을 땐 ‘나’를 위해 사랑과 우정으로 용기와 희망을 주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한여름 밤에 불태우던 욕망을 잠재워 주던 너, 절망의 늪에서 손 내밀어준 그대, 가을 바람에 날려버린 못다한 약속 지켜준 당신, 추억의 비누방울 속에 동그랗게 새겨진 유년의 꿈이여도 좋겠다. 버티며 살 수 있는 온갖 희망이였으면 좋겠다.     ‘나의 마음 속에 조용히 내려앉아/ 세상 소식 전해준다/ 풀 먹인 연실에 내 마음 띄워 보내 저 멀리 외쳐본다 / 하늘높이 날아라/ 내 맘마저 날아라/ 고운 꿈을 싣고 날아라/ 한 점이 되어라/ 한 점이 되어라/ 내 맘 속에 한 점이’ –라이너스의 ‘연’ 중에서   튼튼한 실에 매달려도 연은 언제 바람에 몰려 추락할 지 모른다. 나무에 걸리면 꼬리를 접는다. 연은 찢어지고 끊어져도 수리해 다시 쓸 수 있다. 연과 연결된 실을 감는 얼레만 튼튼하면 다시 만들어 하늘 높이 띄울 수 있다.     연 날리던 동무도 까르르 웃던 애들마저 떠난 마당에서 홀로 마음 속 연을 띄운다.       영어 배울 때 가장 헷갈렸던 게 현재진행형과 미래진행형이다. 내일은 미래진행형이다. 오늘을 견디면 내일은 온다. 허전한 세월의 끄트머리를 참고 견디면 한 해가 저무는 것이 아니라 새 해 새 날이 다가온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끄트머리 세월 굴렁쇠도 방향 코발트빛 하늘 오렌지색 물감

2022-12-27

[독자 마당] 잭팟의 꿈

이번엔 틀림없다니까? 정말….   송아지만 한 멧돼지가 내 가슴으로 냅다 뛰어든 지난밤 꿈을 떠올리며 들어선 동네에 있는 리커 스토어. 로토를 사서 밖으로 나오는 발걸음이 마치 당첨이라도 된 것처럼 나는 듯 가볍다.   나는 매주 월요일에는 메가 복권에 5달러를, 수요일에는 파워볼에 10달러를 투자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일주일이 행복하다. 한 번도 많은 금액에 당첨된 적은 없으나 ‘언제쯤일까?’ 잭팟 터질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즐거운 기다림을 계속하고 있다.   꿈도 가끔은 맞는다니까 이번에는 틀림 없을 거야. 그런데 잭팟에 당첨되면 그 많은 돈을 어떻게 하지? 우선 마누라 고물차부터 바꿔줘야겠다. 차종은 렉서스로 할까? 아니야, 그래도 벤츠쯤은 타고 다녀야 그동안 기죽고 살아온 세월, 마누라의 가슴을 활짝 펴줄 수 있지. 다음에는 어디에다 쓰지? 그래, 마누라 손가락에 있는 좁쌀만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바꿔줘야겠다. 결혼식 때 받아서는 45년을 끼고 있지 않은가. 크기는 1캐럿? 아니면 2캐럿짜리? 아니야, 3캐럿 정도는 돼야 어디 가서 자랑할 게 아닌가.   외출에서 돌아와 싱글벙글하는 나를 마누라가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돈벌이도 못 하는 영감이 무엇이 그리 좋아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다니냐며 한소리까지 한다.   마누라여, 옛글에 이르기를 ‘燕雀安知 鴻鵠之志乎(연작안지 홍곡지지호 :제비나 참새 따위가 구만리 장천을 나르는 기러기의 높은 뜻을 어찌 알 수 있으랴)’라 했다. 이 남편의 깊은 뜻을 그대는 몰라도 된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이라니까, 잿팟만 터지면 죽기 전에 멋지게 호강 한 번 시켜준다니까. 멧돼지가 내 가슴으로 뛰어드는 꿈까지 꿨는데….     슬그머니 이불 속으로 들어가 낮잠을 청하는 마음이 무지개를 타고 하늘을 간다. 이산하·노워크독자 마당 잭팟 마누라 손가락 마누라 고물차 세월 마누라

2022-12-13

[삶의 뜨락에서] 열두 번째의 세월

12월은 특별한 음악이 필요한 시간이다. 사방에서 흘러나오는 12월의 노래는 반짝이는 불꽃 등불이 가득한 세상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열한개의 세월 묶음을 뒤에 쌓아놓고 그 속에 달아 놓은 등불만큼 많은 이야기를 눈물과 웃음으로 버무려 담아낸다. 300여 백지 위에 남겨진 일기장은 꽃 피워낸 득의의 웃음과 넘어져 상처 입은 울음을 담는다. 빈손을 바라보는 씁쓸함과 한장의 지폐가 주는 안심과 잘 못 들어선 길에 섰던 낭패와 당신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받던 위로와 위협하는 세태의 눈길에 위축되던 용기와 드디어 열린 성문으로 안도하던 표정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고 나며 채워지고 있다. 그때 왜 그렇게 조급했고 불안했고 거만했고 기분 좋았고 미안했고 으쓱했고 작아졌었는지 이유조차 까마득한 지나간 시간의 박제된 사진첩으로 남는다. 지금은 남모를 표정으로 한 장씩 꺼내 보는 그때의 시간을 계산하는 영수증이 한 묶음이다. 열두 번째 세월 속에서 뜬금없이 스며 나오는 이야기들이 조급해지는 시간을 꾸며주고 있다.   종점을 향하는 전차의 종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시간이다. 종점의 풍경이 차창 밖에서 흔들리는 때이다. 길었던 여정을 어떤 모양이든 마무리 하며 등짐을 내려놓는 자세가 되어 뒤를 돌아본다. 길게 내쉬는 숨소리에는 그만 발걸음을 멈추고 쉴 수 있는 곳에 도달한 안도의 숨결이 묻어난다. 길고 긴 산행 끝에 어느 능선에 자리 잡은 대피소에 도달한 피곤하지만 험한 산길을 무사히 주파해 냈다는 자랑도 먼지 가득한 얼굴에 내려앉는다. 이제야 지나온 험한 길옆에서 시야 가득히 들어오던 아름다운 경치들이 살아난다. 발길을 격려하던 이름 모를 꽃들의 미소도 살아난다. 산새들의 노랫소리와 깨끗하게 흐르던 시냇물 가슴 속을 시원하게 하던 맑은 공기의 청량함이 신발 끈을 푸는 그 시간에 귀한 경험과 느낌으로 온몸을 감싼다. 흘렸던 땀방울을 새삼 대견하게 세어보며 안식에 든다.   등불을 높이 밝히고 싶은 시간 속에 있다. 낮시간 동안 무미건조한 색깔로 숨죽이던 거리가 밤시간이 찾아들면 오색 빛 화려한 장식들의 불빛으로 가득 찬다. 어두움이 길어지는 계절에 그 어둠을 몰아내고 싶은 마음들이 등불을 밝히고 거리에 놓아둔다. 알 수 없는 세계로 사라져가는 과거라는 시간과의 헤어짐을 장식한다. 어둠 속을 가는 발걸음을 밝혀주는 등불이 된다. 차가운 바람이 있어 헤어짐을 얼게 하고시려운 손과 추워하는 몸이 따뜻한 털옷과 폭신한 장갑을 서둘러 꺼내 들게 한다. 열두 번째 세월이 차가운 하늘 아래 놓여있음은 괜찮은 모양새다. 따뜻한 바람과 피어나는 예쁜 꽃과 노래하는 새들에 둘러싸여 잘 가라 인사하기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회색빛 하늘 아래 눈 쌓인 길 위에서 찬바람 맞으며 잘 가라 손 흔드는 정경이 어쩌면 헤어짐과 어울릴 듯 하다. 그 회색 하늘 아래 어둠 속에서 등불 하나 켜 들고 헤어짐의 표상으로 삼는 것이 열두 번째 세월 속에 걸맞은 행사로 보인다.   세상에 많은 이야기가 끝에 도달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화나 연극도 끝이라는 휘장을 내리면서 다음 이야기의 머리꼭지를 넌지시 남겨 놓고 돌아선다. 열두 번째 세월은 그런 특별함을 지니는 시간이다. 길었든지 혹은 짧았든지 허락되었던 세월을 끝맺음하면서 새로운 시간을 당신께 드린다며 낯선 문 앞에 세운다. 새로 열리는 길의 시작에 서 있는 기대와 희망이라는 문패를 달고 있는 대문의 빗장이 스르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끝과 시작이라는 묘한 공간이고 시간이다. 두 얼굴의 안내자를 만나는 기분이다. 열두개의 보름달을 기억하며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자신의 두손을 바라보는 시간에 조금은 경건해진다. 남은 시간을 세어보고 어찌 채워갈까 바빠지는 마음을 다둑이며 마무리의 손길이 나선다. 나무 그늘에 잠시 쉬어 앉은 나그네의 심정이 되어 이것저것 길손의 어깨 위에 매달려 있는 크고 작은 짐꾸러미를 정리하면 어느덧 어느 종착지에 서 있게 된다. 저쪽의 시작점이 다가오며 무표정으로 웃고 있다. 안성남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열두 세월 세월 묶음 낮시간 동안 회색빛 하늘

2022-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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