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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풀이처방] 노인 신부가 청년들에게 주는 인생 조언

첫째 조언, 자신이 인생의 실패자라고 생각하지 마라. 술이나 도박이나 약물에 취해 인간답지 못한 행위를 하거나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스스로 자기관리를 포기하게 되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들이 가진 가장 흔한 공통점은 부정적 생각이다. 생각을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습관이 된다. 좋은 생각이 습관이 되면 괜찮은데 부정적 생각이 습관이 되는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부정적인 생각은 우리 마음을 힘들게 한다. 벗어나려고 애를 써도 떨쳐낼 수 없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친다.   심리치료사 네비아 뮬란은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고 스스로 비난하는 것은 자신에게 두 번 벌을 주는 것과 같다고 한다. 상담소를 찾아오는 분 중에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자신 스스로에 대해 분노나 혐오감을 느끼는 분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이 세상에서 자기 존재를 없애고 싶다는 극언까지 한다. 자기 비난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현장 사례다.   또한 아무리 심각한 문제일지라도 잠을 설쳐가면서까지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부정적인 생각은 찰거머리 같아서 떨어지려고 하질 않는다. 그래서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불안증, 우울증은 더 심해지고 망상 단계에 이를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부정적인 생각은 오염수와도 같다. 다른 건강한 감정들까지도 망가뜨릴 위험이 크니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막아야 한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유명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미국의 전 대통령 링컨이다. 평생을 우울증에 시달린 그는 ‘자기가 무엇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 원하는 것만큼 행복해진다’라는 말을 남겼다.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새겨들을 만한 이야기다.   심리학자 로버트 오일러는 부정적인 생각을 줄이는 방법으로 고무 밴드를 이용했다. 팔목에 고무 밴드를 묶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튕겼고 그 덕분에 부정적 생각을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힌 청년들은 그 생각이 자신이 성장하길 원치 않는 내면의 방해자임을 인식하고, 그걸 뿌리치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 둘째 조언은 비관주의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은 크게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로 나뉜다. 비관주의자는 낙관주의자를 비웃는 경향이 강하다. 낙관주의자가 웃으면서 사는 모습을 보며 ‘철이 덜 들었다’는 둥 ‘현실을 모른다’는 둥 뒷말을 한다. 온갖 세상 걱정을 다 하면서 심각하게 사는 자신들이야말로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누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다 쓸데없다면서 딴지를 거는 취미로 사는 사람들이다. 비난은 책임감이 없는 사람들이 즐기는 중독성 행위로, 대개 무능력자들이 비난을 즐긴다.   비관주의자는 여러모로 골치 아픈 사람들이다. 비관주의자는 자신들이 현실적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비현실적이다. 이들은 엉뚱한 것에 집착해서 시간을 낭비하기 일쑤고, 주위 사람들의 의지마저 약화하는 짓을 하기에 시간이 가면서 사람들의 기피 대상이 되는 참담한 결말을 맞는다. 셋째 조언은 외부 대상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라는 것이다. 청년 중에는 점이나 사주풀이에 집착하거나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문제는 인생을 외부의 존재에게 의지하고 맡기게 되면 자신의 삶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인생을 내가 설계하고 내가 만들어가야 하는데, 사사건건 점을 보거나 교주에게 물어본다면 결국에는 파국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나를 의존하게 하는 외부 대상들은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스라이팅하고, 자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노예적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갈취한다. 따라서 절대로 경계하고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청년들은 생존능력을 길러야 한다. 심리학자 시버드는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관찰하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전장의 생존자들은 단순히 운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양면적 모습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평소 게으른 듯한데 일단 일을 시작하면 집중력을 발휘한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생활을 즐기지만 필요할 때는 아주 세심해진다. 평소 자기만 챙기는 듯하면서도 정작 어려운 일이 닥치면 주위 사람들을 먼저 챙긴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해서 속없다는 말을 듣지만, 큰일이 생겼을 때는 침착하게 상황 파악을 하고 냉정하게 문제를 풀어간다.   앞날이 창창하지만 당장 앞날이 눈에 보이지 않아서 불안해하는 청년들이 한 번쯤 생각해 볼 주제이다. 홍성남 /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속풀이처방 노인 신부 부정적 생각 인생 조언 노인 신부

2024-12-16

[삶의 뜨락에서] 세월 따라 변하는 생각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시간의 흐름에 거슬러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 우리의 몸이 우선 그러하다. 한동안 성장을 위해서 달려가던 육체는 이제 어느 시점을 지나면 성장을 멈추고 낡아가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노화로 통칭하는 이 과정이 언제 정확히 시작되는지 그리고 도대체 왜 시작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몸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주 천천히 망가지면서 여러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실 변화하는 것은 우리의 몸만이 아니다. 생각과 마음 정신 또한 예외가 아니다. 물론 아마도 생각건대 몸의 조건과 상태가 하락하기 시작하는 시점보다는 훨씬 늦은 때에 우리의 생각은 진화를 멈추고 망가지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어쩌면 육체와는 달리 정신은 끝없이 전진하고 전진할 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이를 조금 먹은, 그러니까 이제는 상당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일 수 있다.   정신도 퇴락한다. 한동안 굳건했던 저 푸르른 마음도 아주 천천히 밀도가 떨어지며 소멸을 향해 달려간다. 하강이건 상승이건 시간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생각 또한 변한다. 물론 이는 때로 바람직하기까지 하다. 망아지처럼 아무 곳으로나 뛰어다니던 옛 시절의 마음과 생각에 그대로 변함없이 머무른다면 그 또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궁금하다. 나이에 따라 우리의 생각은 어떻게 변하는가.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생각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가장 흔히 듣는 대답 중 하나는 경험의 양이 늘어가면서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더욱 포용하는 정신이 되고 더욱 허용하는 정신이 된다는 대답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 경험에 의하면 이는 생각보다 드문 예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대체 어떻게 변해 나가는가.   우리 손님 중에 나이 드신 분들은 젊었을 때 입은 옷이 해어져 새 옷을 사 입었으면 좋겠는데 다 낡아빠진 옷을 가지고 와서 수선을 부탁한다. 수선하는 비용이 새로 사는 옷보다 많은데도 고집을 피우며 고쳐달라고 한다. 이와 비슷한 옷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새 옷보다 이 옷을 고집한다. 왜라고 다그치듯 묻는다. 아주 부담 없이 편하고 입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란다. 몇 달 뒤에는 또 다른 곳이 찢어져 가지고 왔다. 아무 말 없이 고쳐준다. 한두 손님이 그런 수선을 원하지만 보통은 새로운 스타일 옷을 사 입는다. 고집통 손님들을 보면 유행이나 시대 흐름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만족에 큰 흥미를 느낀다.   나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신발이 떨어져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고치면 발이 편하고 쪼이는 느낌이 없어 좋을 것 같아 구두 수선집을 찾았다. 우리 가게 근처에는 오랫동안 구두 수선을 해온 사람이 있었는데 은퇴한 뒤로는 가게 문이 닫혔다. 다른 사람이 가게를 인수할까 기다렸는데 열지 않았다. 친구 가게 근처에 구두 수선하는 곳이 있다기에 부탁을 해서 고쳤는데 발이 편하고 익숙해서 너무 좋다. 새 신발보다 부드럽고 볼이 늘어나 아프지 않아 편하다. 사람의 생각하는 의도가 변해야 이것저것 입어도 보고 신어도 본다. 꼭 그것에만 집착해 있으면 변화가 없다. 그저 편하고 귀찮다는 생각이다. 음식도 자꾸 새로운 것을 맛봐야 다른 느낌을 느낄 수 있을 텐데 식당을 가도 먹었던 것에 눈도장이 먼저 가니 그 순간부터 맛있는 새로운 것을 찾아보면 어떨까. 그래도 메뉴판 들여다보고 또 봐도 새로운 음식보다 그전 맛에 길들어 먹었던 것으로 주문하게 된다. 머리에 저장해 있는 생각이 변하지 않고 움직일 줄 모른다. 양주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세월 생각 구두 수선집 마음 정신 한동안 성장

2024-12-03

[우리말 바루기] 그분, 이분, 저분

“아수라의 제왕, 그분은 누구인가?” “돈을 받은 자가 그분이 아니라 그분들이다.” ‘그분’은 ‘그 사람’을 높여 이르는 대명사다. 한 단어이므로 ‘그 분은’ ‘그 분이’ ‘그 분들’처럼 띄면 안 된다.   ‘이분’과 ‘저분’도 마찬가지다. 각각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높여 이르는 삼인칭 대명사로 붙이는 게 바르다. 접미사 ‘-들’이 결합한 형태인 ‘그분들’ ‘이분들’ ‘저분들’ 역시 붙여야 한다.   ‘몇분’ ‘어떤분’은 한 단어가 아니다. “몇 분이나 오셨습니까?” “밖에서 어떤 분이 찾으시네요”와 같이 띄어야 한다. 이때의 ‘분’은 사람을 높여 부르는 의존명사다. 꾸며 주는 말이 앞에 놓인다. 높이는 사람을 세는 단위일 때도 의존명사이므로 앞말과 띄어 쓴다. “참석자는 총 네 분입니다” “두 분이 이곳을 방문하셨어요”처럼 사용한다.   ‘환자’에 ‘분’을 붙여 높여 부를 때도 의존명사로 생각하고 띄는 경우가 많다. “환자 분들이 뭘 궁금해하시나요?”와 같이 띄면 안 된다. 이때의 ‘-분’은 사람을 나타내는 일부 명사 뒤에 붙어 앞말에 높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로 쓰였다. ‘환자분’ ‘친구분’ ‘남편분’ ‘산모분’처럼 앞의 명사에 붙인다. ‘분’은 명사 뒤에선 접사로 기능한다.   ‘분’이 의존명사일 때는 앞말과 띄고 접사일 때는 앞말에 붙이면 된다. ‘이분, 저분, 그분’의 경우는 하나의 단어이므로 항상 붙여 쓴다.우리말 바루기 이분 의존명사로 생각 삼인칭 대명사 이분 저분

2024-12-02

[잠망경] 오해

뒷마당 풀밭에 사슴 한 마리 서 있다. 그에게 살금살금 접근해서 정면으로 시선을 교환한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사슴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생후 몇 달 안 되는 손녀딸을 팔에 안는다. 그녀는 아주 차분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살핀다. 이 아이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토끼와 호랑이가 동화에서 말을 주고받는다. 동화작가는 의인화(擬人化) 기법으로 동물을 사람으로 둔갑시킨다. 말은 생각을 전제로 하는 법. 당신의 손짓 발짓, 웃거나 찌푸리는 얼굴, 짧은 탄성 같은 것들은 비언어(非言語)적인 도우미 역할을 할 뿐 세련된 ‘마스터 오브 세리머니’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   아이가 어른처럼 언어를 사용해서 생각한다는 설정을 성인화(成人化)라 한다. 나는 사슴도 손녀딸도 언어를 훌륭하게 구사하는 성인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들이 나와 같은 수준의 소통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에 마음껏 빠진다.   사슴이 이러저러한 생각을 했다는 둥, 손녀딸이 여차여차한 생각을 했다는 둥, 하며 내가 둘러댄다면 그건 이해가 아닌 오해다. 오해가 지나치면 곡해가 일어나지. 상대방 마음을 제멋대로 구부리고 비틀어대는 사태가 터진다.   만약에, 내가 사슴에게 “너는 내가 무슨 맛있는 음식이라도 줬으면, 하는 생각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구나”라고 말한다면? 손녀딸에게 “너는 할아버지가 많이 늙었네, 하는 측은한 생각에서 내 얼굴을 살피는구나”라고 말한다면? 그런다면, 나와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단순한 대답이 나온다. - 나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속 일을 말로 옮기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표현능력이 없으니까 상대방의 오해를 바로잡아주는 친절이나 정열 또한 있을 수 없다. 말을 할 줄 알아야 생각을 말할 수 있지. ‘말=생각’이다. 이 등식이 정교하지 않게 들리더라도 당신은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thought, 생각’은 ‘think, 생각하다’라는 동사의 과거형이면서 명사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서구인의 생각은 현재형이 아니라 이미 터진 일, 엎질러진 물 같은 거다. 그래서인지 ‘think’의 고대영어 ‘thinken’에는 생각한다는 뜻 외에 ‘remember, 기억하다’라는 뜻이 있었다. 우리말로도 ‘고향생각’, 하면 고향에 대한 ‘메모리’를 뜻한다. 참 오랜만에 영어와 우리말 어원이 같은 사고방식에서 오는 것을 찾아내서 기쁘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고대영어 ‘thinken’에는 또 상상하다, 배려하다, 의도하다, 소망하다, 느끼다 라는 뜻이 있었는데 우리말 ‘생각하다’에도 똑같은 뜻이 고스란히 포함돼 있다. 짧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상상-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배려-야, 남 생각도 좀 해라! ▶의도-나도 그럴 생각이야. ▶소망-생각 있어? ▶느낌-쓸쓸한 생각. (표준국어대사전)   사슴이며 손녀딸을 생각한다. 사슴은 비 내리는 늦가을 밤 어디에 숨어있는가. 어느새 발랄한 소녀가 되어서 간드러진 목청으로 노래를 기똥차게 잘 부르는 손녀딸은 어떤 마음으로 학교공부를 하며 지내는지.   그들이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상상한다. 틀린 상상, 틀린 생각을 무턱대고 한다. 무념무상의 늪에서 벗어나서 오해라도 해볼까 하는 마음이다. 백지 답안지보다 틀린 답을 써넣겠다는 속셈. 빵점보다 몇십 점이라도 받고 싶다. 그런 노력이 없는 삶은 호되게 재미없는 삶이라 생각한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오해 thought 생각 상대방 마음 우리말 어원

2024-11-26

[우리말 바루기] ‘생각지’? ‘생각치’?

글을 쓰면서 늘 헷갈리는 것이 ‘생각지/생각치’와 같은 경우다.  발음으로 구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읊어봐도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것은 ‘-하지’가 줄어들 때 ‘-지’가 되느냐 ‘-치’가 되느냐의 문제다. ‘-하지’ 앞이 유성음이냐, 무성음이냐를 따지면 된다. 목청이 떨려 울리는 소리가 유성음이고, 성대를 진동시키지 않고 내는 소리가 무성음이다.   ‘-하지’ 앞이 유성음(모음이나 ㄴ, ㄹ, ㅁ, ㅇ)일 때는 ‘ㅏ’만 떨어져 ‘ㅎ+지=치’가 된다. ‘흔치, 간단치, 만만치, 적절치, 가당치, 온당치’ 등이 이런 예다.   ‘-하지’ 앞이 무성음(ㄱ, ㅂ, ㅅ)일 때는 ‘-하지’가 줄어들 때 ‘하’ 전체가 떨어지고 ‘지’만 남는다. ‘넉넉지, 익숙지, 거북지, 답답지, 섭섭지, 떳떳지, 깨끗지’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현상은 ‘-하다’ ‘-하게’ ‘-하도록’ ‘-하건대’가 줄어들 때도 마찬가지다. ‘다정하다→다정타’ ‘간편하게→간편케’ ‘흔하다→흔타’ ‘이바지하도록→이바지토록’, ‘참석하기로→참석기로’ ‘생각하건대→생각건대’ 등으로 적어야 한다.   유성음 뒤에서는 자연스럽게 거센소리가 나므로 크게 헷갈리지 않는다. 무성음인 ‘ㄱ, ㅂ, ㅅ’ 뒤에선 거센소리가 아닌 ‘지’ ‘게’ ‘다’ ‘기’ 등으로 적는다고 생각하면 쉽다. 우리말 바루기 생각

2024-10-27

[문화산책] 미술의 다양한 기능

한국에 사는 내 친구는 출석하는 성당에 미술반을 만들어 열심히 지도하고 있다. 학생들은 거의 모두가 ‘할머니 병아리 화가’들인데 그림이라는 걸 난생 처음 그려보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어찌나 정성껏 가르치는지 인기가 대단한 모양이다. 지도하면서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우고 보람을 느낀다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재능기부인 셈인데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그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는 중에 “이왕이면 무작정 그리지 말고, 생각을 담아 그리도록 지도하면 더 좋지 않겠나?”라고 어줍잖은 훈수를 두었다. 그랬더니 곧바로 친구의 명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골치 아픈 생각하지 않고, 편안해지고 싶어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에게 무슨 생각을 하라고 권하겠나?”   과연 명답이다. 나의 좁은 생각을 꾸짖는 죽비 같은 명답이다. 우리의 삶에서 미술의 기능은 매우 다양하고, 모든 쓰임새가 다 소중하다. 어느 하나만 고집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미술사를 공부하고, 미술평론을 하는 이른바 전문가의 처지이므로, 화가들의 작품과 미술의 쓰임새를 이야기할 때, 예술성이나 작가의 세계관, 사회적 역할 등을 중심으로 언급한다. 그래서 미술을 업으로 하는 작가들에게 무작정 그리지 말고 생각을 하면서 그려야 하고, 보는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학생이나 취미 화가, 감상자들이 생각하는 미술의 기능은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실제로 많은 취미 화가들은 골치 아픈 세상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자기 내면에 잠자고 있는 또 하나의 자아와 대화를 나누고, 아름다움과 만나는 희열을 위해 그림 그리기에 몰두한다. 그래서, 그려진 작품보다 그리는 동안의 충만한 행복감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림에 몰두하는 동안에는 잡념 없이 순수하고 착해질 수 있다. 단순한 정신적 사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행위 자체를 행복으로 느낀다. 이것은 미술의 소중한 기능 중의 하나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림이 구원이 되기도 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죽을 병을 이겨내기도 하고, 그림을 통해서 정신적으로 이겨내기 어려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실제로 이런 예는 우리 주위에 너무도 많다. 미술치료 같은 치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술이 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또한 미술의 소중한 기능 중의 하나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림이 정신세계를 영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길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이들에게는 그림 그리기가 곧 도(道) 닦기인 셈이다. 실제로 많은 작가들이 이런 식으로 자기 예술세계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 밖에도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갖는 힘은 매우 다양하고 막강하다.   미술을 좋아하고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이들로부터 “현대미술은 너무 어렵고 골치 아프다. 미술작품을 이해하고 좋아하고 싶은데, 무슨 좋은 방법이 없나?”라는 질문을 받는 일이 더러 있다. 나의 대답은 늘 비슷하다. “자주 보세요. 자주 보면 보입니다. 그리고 직접 그림을 그려보세요. 그것이 가장 좋은 미술 감상법입니다.”   직접 그리면서 그림에 흠뻑 빠져보면, 다른 사람의 그림에도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작가와 공감하며 느끼는 동질감은 감동으로 이어진다.   그림 그리기를 통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고, 장점도 많다. 마음을 닦고, 정서적 정신적으로 풍성해지는 등 여러 면에서 권하고 싶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그림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많은 분이 그림 그리기를 취미로 삼아 즐기기 바라는 마음이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산책 미술 기능 취미 화가들 그림 그리기 세상 생각

2024-10-17

[잠망경] 버딘스키

환자들 간에 말다툼이 일어난다. 금세 주먹다짐이 터진다. 정치가들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난다. 그들의 말다툼은 주먹다짐 대신 막말 잔치로 돌변하기도 한다.   그룹테러피 세션에 나는 환자들의 인내심 부족과 미숙한 언변을 염두에 두면서 자유토론을 멀리하고 강연 형식을 취하려 애를 쓴다. 마치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교사라도 된듯한 기분이다.   남의 말을 가로막는 습관이 있는 환자가 눈을 크게 뜨고 앉아있다. 그는 내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재빨리 끼어들어 반대 의사를 표명하거나 주제와 관계없는 말을 꺼낸다. 다른 환자가 “Hey, Mr. Buttinksi!” 하며 그를 향하여 목소리를 높인다.   참 오랜만에 듣는 속어, ‘Buttinski’다. ‘butt in’에 도스토예프스키 또는 차이코프스키 같은 북유럽식 이름의 ‘스키’가 붙어서 만들어진 합성어. ‘butt in’은 1900년경부터 미국에서 쓰이기 시작한 슬랭으로서 ‘염치없이 끼어들다’라는 뜻. 그래서 ‘buttinski’는 그런 사람을 비아냥거리는 슬랭이다. 영한사전은 ‘참견하는 사람’이라고 싱겁게 풀이한다. 어떤가. 어원학(語源學)이 재미있지 않은가. 별로라고? 그래도 내 말을 막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기 바란다.   우리는 왜 남의 말을 막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대충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온다. ①남의 말을 끝까지 듣는 참을성이 부족해서 ②남의 말을 듣기가 싫어서 ③다른 사람의 관심을 자기에게 쏠리게 하기 위하여 (시선강탈 또는 관심강탈) ④자기 생각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 우월감 때문에 ⑤치열한 경쟁심에서   사람 마음이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버딘스키’들은 도대체 왜 남의 발언권을 강탈하는가. 왜 생도가 선생님의 말을 가로막고 선생님을 가르치려 하는가 말이다. 한 환자가 심드렁하게 말한다. 선생님이 떠드는 게 싫어서요. 선생님이 미워서요.   기본설정에 오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Something is wrong in our default setting!” - 오냐, 갈 데까지 가보자! ? 이건 학생이 교실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이다. 내 말을 잘 들어라.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지식과 깨달음은 스승에서 제자에게 전달되는 것이 자연과 인간의 도리다. 뭐, 어째? 마음에 들지 않는 스승을 제자들이 합심하여 ‘탄핵’시켜야겠다고?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도중에 너희들 몇몇이 노래를 중단시키겠다는 것. 그리고 음치에 가까운 버딘스키의 노래를 들으라는 말이지. 목사의 언변이나 태도가 탐탁지 않아서 설교 도중에 재빨리 끼어들어 목사에게 설교하겠다는 거지, 시방.   지금부터는 자유토론 시간이다, 라고 선포하자 한 환자가 말한다. “우리의 대화는 서로 경쟁하는 스포츠와 같아야 합니다.” - 내가 응답한다. “스포츠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다. 예컨대 권투선수는 절대로 링을 떠나면 안 된다. 상대를 발로 차도 안된다.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주먹다짐을 결코 복싱경기에 비교할 수 없다.”   ‘butt in’ 할 때의 ‘butt’은 라틴어의 ‘buttock, 엉덩이’의 줄임말이다. ‘butt’에는 ‘담배꽁초’라는 뜻이면서 ‘뭉툭한 부분’ 또는 ‘머리 부분’이라는 의미도 있지. 즉, 남의 언어 공간에 머리를 들이미는 행동이 ‘butt in’이다.   이 어원학에 의하면 ‘buttinski’가 머리를 들이미는 작자인지, 엉덩이를 들이미는 작자인지 그놈이 그놈이라는 혼동이 생긴다. 어쩌다 서구인들은 ‘머리=엉덩이’라는 생각으로 사는가. ‘스승=제자’라는 거지. 정말?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buttock 엉덩이 생각 우월감 butt in

2024-08-06

인물로 보는 복음서: 참 이스라엘 사람 나다나엘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출신으로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빌립의 친구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바돌로메’를 ‘나다나엘’로 보기도 합니다. 나다나엘은 히브리어 ‘느다넬(נְתַנְאֵל)’에서 온 단어입니다. 뜻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라는 의미입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요한복음 1장46절) 예수님을 만난 빌립이 그 ‘메시야,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임을 전할 때에 나다나엘의 반응은 ‘어떻게 나사렛이라는 변방에서 선한 것이 나겠느냐’입니다. 여기에 선한 것은 ‘메시야, 그리스도’입니다. 나다나엘이 가지고 있는 이런 생각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진 그리스도에 대한 고정관념 중에 한 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올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주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당시 유대인들이 가진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그저 사람들 각자가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럴 것 같다는 주장들이었습니다. 이것을 진리처럼 붙잡았다는 겁니다. 근거가 없는 자신의 신념을 진리처럼 붙잡을 때, 이때부터 아주 위험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이 신념이 되고, 그것을 고집하기 시작하면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주 위험한 요소가 되어 버립니다.       지금 우리 자신은 신앙,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믿음이며, 왜 주일마다 교회에 나옵니까? 나름대로 뭔가 생각이 있으니까 여기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이유가 ‘나만의 생각’, ‘주장’이 아니라 ‘말씀’에 의한 바른 정의, 바른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는 나사렛 출신은 아니다’는 생각을 가진 나다나엘에게 빌립의 말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한 말은, ‘와보라’ 는 것이었습니다.  가서 확인을 하려면 내 고집을 접어야 합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고집을 포기해야 가서 확인하는 수고를 기꺼이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생각, 주관을 꺾습니다. 그리고 ‘빌립’의 말처럼 가서 찾기로 결단합니다. 이런 나다나엘의 모습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한복음 1장 47절) 예수님의 이 표현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출신입니다. 즉, 그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혈통적으로 확실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으로’라는 수식어를 그 앞에 붙이십니다. 여기에 ‘참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알레도스(ἀληθῶς)’로, ‘정말, 확실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확실한 이스라엘 사람’은 ‘혈통’을 따질 겁니다.       혈통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삶 가운데 있고, 그 말씀을 붙잡고 살며,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중요한 것은 예언된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갈망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혈통이 아니라 혈통으로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스라엘 밖의 소위 이방인들 중에도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일까요? 그것보다 말씀을 붙잡고,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바로 ‘재림의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언제 오실지 모르는 예수님을 기다리기에 항상 깨어서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내 고집, 내 주관에 사로잡혀서 마치 나는 완벽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참 이스라엘 사람’은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간사한 것’에 해당하는 단어가 ‘돌로스(δόλος)’라는 단어입니다. 뜻은 ‘속임, 교활함, 간교, 변절’입니다. 가만히 보면, 아주 나쁜 뜻은 다 들어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돌로스’라는 단어에 포함이 되어 있는 ‘속임, 교활함, 간교, 변절’을 보면 생각나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속임, 교활함’은 사탄이 가진 속성입니다. 자신의 고집과 주관을 꺾고 예수님께로 나다나엘이 오는 것은 ‘속임, 교활함’이 없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것은 이런 ‘속임, 교활함’을 가진 사람은 결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이런 ‘속임, 교활함’은 ‘신앙’에 아주 위험한 ‘장애요소’가 됩니다. 우리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깨닫지 못하게 한다는 겁니다. 도무지 포기하지 못하는 나만의 생각, 주관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깨지 못하면, 우리는 제대로 된 ‘복음’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하려면 반드시 내 속에 굳어져 있는 견고한 미움이라는 것을 깨어야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려고 한다면 내 속에 있는 ‘나만의 것’, ‘나의 주관’을 깨야 합니다. 그리고 ‘속임, 교활함’으로 나의 생각, 나의 판단을 옳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순결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그러기에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시대의 나다나엘과 같이 복음을 갈망하는 삶이 되길 소원합니다. 목회칼럼 / 윤우식 더비전교회 담임목사이스라엘 복음서 생각 주관들 이스라엘 사람 속임 교활함

2024-08-02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는 수고하고 일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보수는 다른 사람이 받는다는 말이다. 재주는 어떤 일을 남달리 잘하는 타고난 소질이다. 곰은 훈련만 잘 시키면 재주를 부린다. 왕서방은 재주는 없지만 돈 버는 기술은 안다. 곰 쪽에서 보면 부당하기 그지없다.     타고난 소질과 천부적 재능에 열정과 노력이 합쳐질 경우 창의적이고 독보적인 능력이 빛을 발한다. 재능은 땅에 묻힌 보석이다. 옥의 원석은 돌조각이다. 장인의 손에 갈고 닦아서 세공을 거쳐 투명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보석이 된다.     인류 역사를 바꾼 세계 10대 천재 1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2위는 극작가 세익스피어, 3위는 대문호 괴테, 5위는 미켈란젤로로 꼽힌다. 다빈치는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 음악가, 공학자, 문학가, 해부학자, 지질학자, 천문학자, 식물학자, 역사가, 지리학자, 도시계획가, 집필가, 기술자, 요리사, 수학자, 의사 등 다방면에서 완벽하게 활약한 다중천재(Polymath)다.     1452년 이탈리아의 빈치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다빈치는 부친의 친구인 베로키오 공방에 견습생으로 일하게 된다. 베르키오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소장, 1515년)의 아래 귀퉁이에 천사들을 그렸는데 스승은 깜짝 놀란다. 어린 제자가 자신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린다는 사실에 붓을 꺾고 조각에만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작품을 보면 두 아기천사의 볼은 둥글고 질감이 살아있는데 예수와 요한의 얼굴은 평면적이고 침침하다.     ‘우리는 이따금씩 자연이 하늘의 기운을 퍼붓듯, 한 사람에게 엄청난 재능이 내리는 것을 본다. 이처럼 감당 못 할 초자연적인 은총이 한 사람에게 집중 되어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예술적 재능을 고루 갖게 되는 일이 없지 않다. (중략) 도저히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보기 어렵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이며 미술사가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가 극찬한 사람은 다빈치다.     다빈치는 37세부터 시작해 약 30년간 중단 없이 5천 쪽 분량의 육필 원고를 남겼다. 내용의 방대함과 깊이로 인해 해설 없이는 읽기 어렵지만 다빈치의 필사본은 불꽃 같은 창의력과 모든 분야에 대한 예술가의 열정을 담고 있다.     1994년 빌 게이츠는 36장짜리 코텍스 해머(Codex Hammer)라 불리는 필사본 노트 한 권을 340억 달러에 구입한다. 다빈치는 자신이 몰두한 개념을 간단한 스케치로 표현하고 깊이 사색하며 창의력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다빈치의 열렬한 팬인 빌 게이츠는 유명화가의 노트 한 권을 수집한 것이 아니라 16세기 낡은 노트에 담긴 다빈치 생각의 틀을 산 것이다.     빌 게이츠도 ‘노트광’으로 유명하다. 착상은 날파리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 버린다. 인스프레이션(Inspiration)이 도망가기 전 재빠르게 필기하는 것이 영감을 붙잡는 최선의 방법이다.     재주와 능력이 성공한 삶, 위대한 예술가를 만들지 않는다. 창의력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 만나는 새벽별로 반짝인다.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이나 꽃잎 송별도 기록으로 남기면 남은 자의 기억 속에 작은 흔적으로 남는다.     생의 파노라마를 영혼의 무늬로 새길 수 없다 해도 별이 지는 밤, 은하수를 건너 그대 가슴에 사랑은 민들레 홀씨로 퍼져나간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천재 천재 1위 다빈치 생각 천부적 재능

2024-07-23

[우리말 바루기] ‘털다’의 현실적인 생각

‘먼지떨이식 수사’를 ‘먼지떨기식 수사’라고 수정해 주었다. 그랬더니 반응이 떨떠름하다. “‘-기’라고 하는 건 알겠어. 그런데 ‘털’이 아니라 ‘떨’이라니….” 하긴 그렇다. “먼지 좀 털어”라고 하지 누가 “먼지 좀 떨어”라고 할까. 마찬가지로 “어깨의 눈 좀 털어”라고 하지 ‘떨어’라고 하지 않는다. “담뱃재를 함부로 털지 마” “운동화에 묻은 흙을 털었다”에서처럼 담뱃재도, 흙도 ‘털다’라고 하는 게 일상이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떨다’를 써야 맞는다.   붙어 있는 먼지를 떼어 내는 행위를 말할 땐 ‘떨다’를 쓰라고 이 사전은 안내한다. 이 사전에선 “먼지를 ‘떨다’” “담뱃재를 ‘떨다’”가 된다. 먼지는 옷을 흔들거나 쳐도 떨어져 나간다. 먼지를 떼어 내려고 옷을 흔들거나 치는 건 ‘털다’를 쓰라고 이 사전은 알린다. 먼지는 ‘떨다’, 옷은 ‘털다’로 구별하란다. 현실에선 먼지도, 옷도 다 ‘털다’인데 그런다.   금성출판사의 〈훈민정음국어사전〉은 ‘떨다’와 ‘털다’를 유의어, 비슷한 말이라고 알려 준다. ‘먼지를 떨다’도, ‘먼지를 털다’도 괜찮다고 한다. ‘먼지를 떨다’는 이전처럼 그대로 두고, 일상의 쓰임대로 ‘먼지를 털다’도 인정해 놓았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따라 ‘먼지떨기식 수사’라고 하는 건 비현실적이다. ‘먼지털기’라야 통한다. 사전이 바뀌어야 할 문제겠다. 우리말 바루기 생각 먼지떨기식 수사 먼지떨이식 수사

2024-07-22

[문예 마당] 여보, 왜 그랬어? 미안해, 고마워

  아내와 함께했던 31년, 사랑하고 정다웠던 날들보다 아파했던 날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2년 전 아내는 서둘러 갔다.   우리가 중매로 만났을 때, 그녀는 노처녀, 나는 아들이 둘이나 딸린 홀아비였다. 그녀는 LA 카운티병원의 면허 간호사였고, 나는 콜로라도에서 신문사를 운영하다 정리하고 LA로 와 판촉물 광고회사를 막 시작한 영세업자였다. 두말할 필요 없이 기운 운동장이었다. 그런데도 당시 나의 자존감이나 용맹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10여 년을 애들 데리고 혼자 살아온 홀아비와 장미꽃처럼 가시와 자존심이 세었던 노처녀의 결혼은 서로 간절했던 만큼 달콤했고 신혼은 아름다웠다.     내 사업은 기존 고객이 없기에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수입이 많은 아내가 마치 후원자처럼 버팀목이 되어 준 덕에 버텨나갔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자연스레 아내의 주도로 흘러갔다. 아내는 내게 필요한 옷이나 구두 등을 미리미리 사다 놓았다. 사이즈를 재거나 물어온 적도 없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나는 쇼핑이나 집안 대소사에 손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었다. 왕자가 된 기분도 잠깐씩 들었지만, 처음 겪는 일이라 낯설기도 했다.     아내는 나를 양육하듯 보살피며 다스렸고 함께 상의해야 할 집안일도 혼자 결정했다. 하다못해 마루를 새로 깔고 지붕을 수리하고 페인트칠을 하는 집수리 때도 내 의견은 무시되었다. 나는 매달 버는 돈에서 할당받은 액수를 내놓는 것도 벅찼지만, 아내의 수입이 정확히 얼마인지 집의 재정 상황은 어떤지 깜깜이였다. 그렇게 무시당할 때마다 왜 싸움을 안 했겠는가. 결혼에 또 실패해선 안 된다는 마치 하나님의 계명 같은 내 결심에 충실 하느라 설사 싸움이 벌어져도 일진일퇴의 부부싸움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게 고마워할 줄 모른다고 핀잔이었다. 나는 아내를 돌이킬 겸, 또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어 참회와 고마움의 마음을 담아 108배 절을 100일 동안 해보기도 했다.   아내는 아이를 원했지만 생기지 않아 우리는 한인 여아를 입양했다. 아이가 다섯 살 무렵부터 10여 년 동안 피아노에 발레, 재즈 댄스, 바이올린, 첼로, 수학 학원, 테니스 교습, 수영 등 학원과 교습소를 순례하듯 다녔다. 아내는 늘 ‘애 ㅇㅇ학원에 등록했으니 몇 시에 데려가고 몇 시에 데려오라’는 통보만 하는 식이었다.   아마 결혼생활 10년 차쯤부터였을까. 사업은 궤도에 올랐지만 나는 삶도 사업에도 재미를 느끼거나 동기부여 없이 우울의 못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주치의가 처방해준 약은 오히려 극단적인 생각마저 하게 했다. 의사는 세 번이나 다른 약을 처방했지만 약만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내 발로 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상담을 통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괴로움도 유발된다는 사실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정한 뜻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상담사의 권유로 이혼을 결심하고 변호사를 찾았다. 그러나 아내의 사과와 8가지 약속을 받고 이혼소송을 취하했지만 그 후 몇 년이 지나도록 아내는 한 가지도 바뀌는 게 없었다. 그렇게 소송과 취하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나는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짐에 가서 라켓볼을 치거나 근육운동을 하고 사우나로 마무리하면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 나는 명상에 심취했고, 명상과 트래킹을 위해 한국은 물론 미얀마나 네팔 등을 찾기도 했다. 그런 여행을 다녀오면 더 고요하고 안정감을 느꼈다.     아내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완고하고 완벽주의적인 삶의 태도 때문이었는지 두 번의 암 수술 등으로 고생하다 70세도 못 넘기고 먼저 갔다. 장례식 후 화장을 해 유골은 뒤뜰 비탈진 정원에 뿌렸다. 그리고 정원에 아내 이름을 따 ‘Kyung’s Garden'이라는 푯말을 세웠다.     모든 죽음이 다 그렇겠지만, 삶의 짐을 다 내려놓고 떠났다면 미움도 용서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종종 아내의 죽음이 실감 나지 않는다. 아내 생각이 나면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정원 푯말을 보곤 했다. “여보 왜 그랬어? …미안해. …고마워.’ 그녀가 가고 나서도 내가 가장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변방인 취급을 받은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묻곤 했다. 왜 그랬느냐고. 그러면서도 아내에게 잘 해주질 못해 미안했다. 아내가 남긴 연금 등이 생각보다 많은 것에도 놀랐다.     지난해 한국에 갔다 고향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헤어진 후 길을 걷다 ‘사주 궁합’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저, 늘그막에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두 사람 걸 다 봐야 하니까 4만 원요." 숨진 아내의 생년월일과 내 것을 주었다.     "이 여자분은 어려운 고비를 여러 번 넘겼는데 남자였으면 좋았을 만큼 대장감 사주예요. 이분 사업하시나요? 사람들을 거느리는…."   나는 밖으로 뛰쳐나와 호텔로 향하다가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미스리가 이렇게 싱겁게 풀리다니…, 진작 알았더라면 접어주고 살지 않았을까? 나는 ‘여보, 왜 그랬어?’를 마침내 내려놓았다.  김윤기 / 수필가문예 마당 미안 수필 아내 생각 아내 이름 정원 푯말

2024-07-11

처음부터 나만의 스토리 생각하고 시작해야

특별활동(Extracurricula)은 학생 개인적 성장과 혜택을 제공함과 동시에 대학 합격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대학 입시기준은 더 이상 GPA나 시험 점수와 같은 학업적 성취도에만 비중을 두지 않는다.   주변 커뮤니티와의 교류, 성장 발자취와 이력 등을 통해 대학이 지향하는 목표에 충분히 유의미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인재인지를 평가한다. 다시 말해 대학은 지원자가 대학 캠퍼스 생활과 커리큘럼 발전에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짜인 커리큘럼 밖에서 독립적인 학습동기, 포부, 자질이 있는지, 그리고 그 학습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확인한다.   ▶특별활동이란   정규 교육과정 외에 추가로 이루어지는 활동을 특별활동이라고 한다. 특별활동은 나의 헌신, 사회적 기술 또는 주도성을 요구하고 나의 우선순위 분배와 시간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능력이 강조될 때 입시에서 더 큰 가치를 지니게 된다.   대표적으로 학교 클럽, 디베이트, 스포츠, 오케스트라 활동 등을 떠올리지만, 특별활동은 매우 광범위하게 정의된다. 개인적인 취미활동 또는 아르바이트도 전체적인 입시 맥락에서 나의 배경에 따라 깊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여름방학 대학 수업 이수, 인턴십, 각종 경시대회 준비 및 해외 유학 등도 포함될 수 있다.   대학 입학사정관(특히 명문대)은 학교 밖에서 지원자가 얼마나 주도적, 그리고 계획적으로 관심분야를 개발하는지 판단하기 위해 특별활동들의 연속성과 깊이를 눈여겨본다. 독립적으로 자신만의 기회를 만들어 내는 잠재능력까지도 보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지원하고자 하는 전공과 연결이 되며 깊이 있는 특별활동 이력을 쌓아 나만의 고유한 ‘hook’이 있는 스토리가 어떻게 만들어질지를 염두에 두고 특별활동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 지원서에 서술하게 될 특별활동들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대입 계획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자기 중심적 활동이고 하나는 주변 커뮤니티가 중심적 활동이다.   목표 대학 입학사정 기준과 희망 전공에 따라 두 가지 유형의 특별활동을 균형 있게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먼저 알아두자.   ▶자기중심·커뮤니티 중심 활동   레주메와 입시 스토리를 지원 대학에 맞도록 구상하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균형 잡힌 업적들과 자신만의 해석을 녹인 인사이트가 필요하다.   자기중심적 특별활동은 한 분야 안에서 심층 있고 동급생들에 비해 더 난이도가 높은 기술 또는 교과과정을 이수 및 취득해 나의 학문적 발전에 중심을 두는 활동들을 가리킨다.   반면, 커뮤니티 중심적 특별활동은 창의적으로 자신의 재능과 자원을 활용해 나의 성장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여러 커뮤니티의 발전과 문제점들을 개선하는 것에 중심을 두는 활동을 가리킨다.   앞서 서술했듯이, 두 가지 유형의 활동들을 나의 배경과 목표에 맞도록 균형 있게 이루어내는 것이 핵심이며 한쪽으로만 치우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조기 계획이 필요하다.   특별활동의 선택은 중요하다. 이상적으로는 많은 사람이 가지 않은 활동을 발굴해 수행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 볼 것을 조언한다. 명문 대학들은 지원자가 실제 생활에 적용 가능한 기술과 이론들을 배우고 개인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의도한 전공 분야를 뛰어넘길 기대한다. 내 주변에 변화를 만들었는지, 실패한 경험으로부터 발전을 했는지, 자신의 컴포트 존(Comfort Zone)을 벗어났는지, 또는 지역사회 봉사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을 보여주었는지 등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예를 들어, 화학을 전공하고 싶다면 화학 클럽에 가입 또는 창설을 하고, 로컬 대학에서 화학 과목을 추가로 수강하고, 연구소에서 봉사 또는 인턴 활동을 한다면 내 개인적인 학업적 역량을 보여줄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재능을 미래에 어떻게 활용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모습도 비추어줄 수 있으므로 명문 대학에서 원하는 인재상으로 효과적으로 어필할 수 있다.   명문대에서 법학 예비 과정(Pre-Law Track)을 밟고 싶다면 법률 리서치 프로젝트와 글쓰기, 법률 사무소나 법률 클리닉에서 인턴십을 통해 특화된 특별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때 필요한 준비성과 동기를 부여하는 실무 기술과 경험을 쌓는 활동으로 나만의 특별활동 레주메를 구상하는 방법이 또 다른 예이다.   많은 것을 성취해야 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특별활동은 다각적 입시 과정에서 강력한 원서와 명문대가 요구하는 인상적인 프로필을 개발하는 데 필수이다. 실제로 아이비리그를 포함한 일부 명문 대학에서는 특별활동과 리더십 경험이 GPA 및 SAT 점수와 같은 다른 주요 입학 기준과 동일한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더불어 대부분 우수 학교의 입학사정관은 내가 처한 환경에서 필수적인 활동(아르바이트 또는 부모님을 대신해 가사 도움)을 성실히 이행하는 학생의 가치를 존중하는 경향도 있음을 참고하자.   명문대를 포함한 많은 대학들은 지원자가 한 가지 열정에만 한정되거나 학업적 심화에만 관심을 두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예를 들어, 과학에 깊은 관심이 있는 동시에 영화 제작 및 감상을 좋아한다면 각본, 연출, 국제 영화 경연대회, 환경 과학 기금 마련을 위한 나만의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구상해 볼 수 있다. ‘나’라는 사람을 입체적으로 포장할 수 있는 활동 또한 큰 가치가 있는 활동으로 대학은 평가한다.     대학 입학사정관은 지원자가 이룬 특별활동을 의미 있는 개인적 성장과 전문 능력 구축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특별활동을 결정할 때 의사 결정에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지침을 소개한다.   ◇지속성=테마 간의 연결고리가 없는 여러 가지 활동들을 산발적으로 시작하고 쉽게 그만두는 대신, 한 가지 유형의 활동을 고수하도록 하자.   ◇열정=단순히 대학 진학을 위해 특별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추구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관심도에 따른 결과물을 토대로 나의 동기, 포부 또는 캐릭터가 반영되고 드러나기 때문이다.   ◇리더십 및 주도성=활동과 커뮤니티 내에서 리더의 자질을 계발하자. 다른 리더, 공동 리더 및 구성원들과 함께 일하는 참여자로서 능동적으로 활동을 하도록 하자.   ▶문의:(323)413-2977, www.iantedu.com 그레이스 김 대표원장 / 아이앤트 에듀케이션스토리 생각 특별활동 이력 대학 입학사정관 대학 입시기준

2024-05-21

[이 아침에]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다

학기가 끝나 간다. 이제 2주 남았다. 학기는 끝나가는데, 그림이 늘었다는 생각보다는 자꾸 “아, 나는 그림 그리는 재능은 없는 모양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모범학생이다. 수업에 빠진 적도 없고, 과제물이 늦은 적도 없다. 배운 대로, 담당 교수의 가르침대로 스케치를 하고,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도 학기가 끝나가는 요즘 그림이 늘었다는 느낌보다는 이것이 나의 한계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첫 번째 그림에서는 만점을 받았는데, 두 번째 그림에서는 C를 받았고, 이번에 제출한 그림도 기대에 못 미칠 것 같다. 며칠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몇 가지 문제점을 찾아냈다. 소재에 창의력이 없다. 교수가 정해준 틀에서 그림을 그릴 때는 모두가 비슷하게 그리기 때문에 별 차이가 없다. 이때는 테크닉에 따라 작품의 질이 달라진다. 소재를 자유로이 선택해서 그릴 때, 나는 일단 그리기 쉬운 것을 찾는다. 소재가 독창적이지 못하다. 잘 그리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과제물을 마친 다음 주 수업은 학생들이 그려 온 그림을 모두 벽에 걸어 놓고 평가/토론하는 시간이다. 좋은 점, 부족한 점, 개선할 점 등을 이야기한다. 다소 그리기 힘든 소재, 독특한 소재를 선택해 그린 학생들의 작품은 할 이야기가 많다. 이렇게 저렇게 고치면 좋겠다는 다양한 의견들도 많이 나온다.     내가 그린 그림을 두고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 모양이다. 별말이 없다. 구상이나 색상에 크게 무리가 없고, 보면 그냥 그렇고 그런 그림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고치면 좋겠다는 의견도 별로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별로 재미없는 그림이라는 의미다.     그림 공부를 하기 전에는 모르던 일인데, 좋은 그림이란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림이 아닌가 싶다. 그림에 빠져들어 이곳저곳을 눈으로 찾아다니며 보고 그곳에서 이야기를 찾아내느라 오래 보게 된다. 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같은 사람이라도 다음날에는 다른 이야기를 건네오는 그림이 좋은 그림이다.     그럼 왜 나는 그런 그림을 그리지 못할까. 아마도 그동안 살아온 삶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31년을 공직사회에 몸담고 있었다. 상하, 좌우로 조직이 있고, 각자 정해진 역할이 뚜렷한 구조였다. 내가 살았던 사회가, 시절이 그러했다. 남자와 여자의 역할, 부모와 자식의 역할이 있는 정서였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하고, 어른은 어른스러워야 하며, 노인은 나잇값을 해야 하는 시절을 살았다.     내가 듣는 미술 클래스의 학생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연령 차이도 많이 나지만, 배경도 다르다. 이란인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를 둔 여학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를 가진 남학생, 70년대 자유로운 캠퍼스 생활을 누렸을 듯한 시니어, 자유로운 영혼의 여학생 등 모두 다른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다. 자연스럽게 그들이 그리는 그림에는 그런 배경과 정서가 묻어난다.     학기 마지막 과제물은 소재를 기억 속에서 찾아 그리는 것이다. 소재를 쉽게 알아볼 수 없도록 추상화풍으로 그려야 한다. 며칠째 생각을 거듭하지만 자꾸만 사실화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다.  고동운 / 전 가주 공무원이 아침에 요즘 그림 여학생 주의력결핍 며칠째 생각

2024-05-20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연습을 하면 자신의 결정이 돼 실행 의지 커져

스마트폰, 게임, SNS 등 한번 시작했다 하면 멈추지 못하고 해야 할 일은 뒷전으로 미루다가 못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는 걸까 사뭇 궁금하다. 도대체 잘하고 싶은 생각은 있는지, 해야 한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는지, 언제쯤 자신을 이기고 해야 할 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이루어 낼 것인지 지켜보기에 답답할 때가 많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도 열심히 그리고 잘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안 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생각이 감정을 지배하려면     “게임이 하고 싶다” “친구와 놀고 싶다” 이런 욕구와 감정반응을 일으키는 곳은 변연계와 편도체다. 이렇게 욕구와 감정이 계속해서 활발히 일어나면 자제를 하지 못하고 게임이나 소셜미디어 등 오락에 마냥 빠져 있게 된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의 눈 뒷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전두엽이 고맙게도 이를 제어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전두엽은 의사결정, 가치판단 혹은 감정을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온라인으로 30분 동안 휴식을 취하며 유튜브를 보기로 계획을 했는데 보던 내용이 너무 재미있어 중단하기 싫어 지고 더 보고 싶어진다. 이렇듯 변연계에서 어떤 감정이 발생할 때 그것을 따를 수도 있고, 아니면 전 전두엽이 ‘아니야 충분히 휴식을 취했어’라고 제동을 걸어 휴식을 멈추고 계획한 대로 일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동안 감정이 이끄는 대로 결정을 했던 사람들은 그것에 이성적 판단으로 제동을 걸어주는 전두엽의 발달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제어를 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 “충분히 휴식을 했어"라고 생각을 말로 표현하면 감정이 생각으로 정리가 되며 스스로 의지를 가진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게 된다.     ▶훈련이 필요하다   이런 훈련을 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해오던 게임을 제어할 방법이 없어져 문제발생과 갈등이 계속된다. 다이어트를 하고싶다면 "오늘 필요한 영양은 충분히 섭취했으니 이제 그만 먹어도 좋아"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자리를 뜬다.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면 "충분한 휴식을 취했으니 나의 발전을 위해 공부를 하자"라고 스스로 말하고 책상에 앉는다. 운동을 하고 싶다면 "충분히 일을 했으니 나의 건강을 챙길 차례야"라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책을 읽고 싶다면 "내 마음의 양식이 필요해. 영양을 섭취하자"고 책을 펼쳐 든다. 게임을 그만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면 "누가 봐도 충분히 놀았네. 이제 해야 할 일을 하자" 하고 일어나라.     ▶이루고 싶다는 욕구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패나 대가를 지불하는 일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그런 도전이 자신을 더 설레게 한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오히려 시작하기 어렵다. 그보다는 일단 한번 해보자고 생각하자. 목표를 지나치게 높게 잡으면 시작하기 두려워진다. 가벼운 시도부터 하는 것이 좋고, 중간에 빠진다고 하더라도 놓치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작은 성취들이 싸이면 대단한 성공이 아니더라도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며 더 많은 것들을 이루고 싶다는 욕구도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 도전이 나 혼자에게만 좋은 것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거나, 함께 기뻐하고 축하할 수 있는 일이 될 때 도전하는 과정이 기쁘고 행복할 수 있다.     ▶스스로 결정에 몰입도가 올라간다   모두들 경험을 해 보았겠지만 공부하려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엄마가 공부하라고 말을 하면 화가 나고 도리어 공부가 하기 싫어지게 된다. 이럴 때 스스로 상황과 감정을 돌아보고 생각을 돌이켜 정리할 수 있도록 대화를 유도해 보자.  아직 조금 더 놀고 싶은지, 얼마를 더 놀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지 생각을 정리하고 의지를 발동할 수 있는 훈련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초등학교 시기에는 규칙과 바른 습관을 잡는 것, 무엇이 더 중요한지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만일 초등학교 때 이런 정서와 습관, 그리고 생각하는 훈련이 잘 잡혀 있게 된다면 중학교 기간에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에게 맞는 공부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고 고등학교 기간에는 늘어나는 학습량에 맞춰 공부를 지속할 수 있는 끈기가 형성될 수 있다.     ▶문의:(323)938-0300   www.a1collegeprep.com 새라 박 원장 / A1칼리지프렙생각 표현 실행 의지 의사결정 가치판단 공부 방법

2024-05-19

[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생각지도 못한 비용들

지출을 줄이는 것이 무조건 유리할까? 가진 돈이 절대적으로 적다면 하는 수 없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따져봐야 한다.     먼저 ‘거래비용’이다. 은행에서 1,000불을 한꺼번에 찾으면 과소비를 할까 봐 한번에 100불씩 열 번을 찾는다. 이럴 경우에는 은행에 열 번을 가야만 한다. 시간도 열 배가 들고 기름값도 열 배가 든다.     큰 지출을 아끼느라 값싼 중고차를 산다. 생각지도 못한 고장으로 시간과 수리비용이 든다. 고장이 잦으면 자동차는 정비소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질 수도 있다. 택시비나 렌트비도 생각해야 한다. 때로는 초기비용을 늘림으로써 ‘거래비용’을 줄일 수도 있다.   신혼부부에게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큰 집을 사라고 조언한다. 아이들이 아직 어린 경우는 특히 그렇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금방 자란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집은 계속 좁아진다. 집을 사면 최소한 5년 이상 살아야 한다. 이사 비용도 그렇고, 사고 팔 때 들어가는 비용도 엄청나다. 새 집을 알아보는 일도, 사는 집을 내놓는 일도, 융자를 새로 얻는 일도,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가 않다. 거래비용을 따져봐야 하는 이유다.       수입을 늘리는 것은 무조건 유리할까? 한 푼이 아쉽다면 벌어야 한다. 하지만, 때로 나쁜 수입은 좋은 수입을 방해한다. 빌 게이츠나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들은 ‘길에 떨어진 100불을 줍는 것이 오히려 손해’라는 말이 있다. 이런 사람들의 시간당 수입을 계산해 보면 1초에 100불이 훨씬 넘는다. 이 사람들은 길에 떨어진 100불을 줍기 위해 1초를 사용하는 것보다, 그 시간을 자신의 회사나 투자를 위해 집중하는 것이 훨씬 이익일 수 있다. ‘기회비용’이다.     기회비용은 어떤 일을 하는 대신에 다른 일을 못하게 되어 잃는 손해를 의미한다. 내가 지금 이 고객 때문에 다른 고객을 잃을 수 있다면, 잃는 고객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수익이 기회비용이다. 지금 내가 쓰는 시간, 지금 내가 쓰는 돈, 지금 내가 유지하는 관계 때문에, 다른 소중한 것들을 얻을 수가 없다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이 기회비용이다.     온라인으로 집에서 부업을 할 사람들을 모집한단다. 간단한 일만 하면, 내 이름으로 된 가상계좌에 돈을 넣어준단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돈이 늘어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온라인 계좌에 있는 내 돈을 찾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돈을 찾으려면 수수료를 보내야 한단다. 수수료를 보내도 돈을 찾을 수가 없다. 천만원 단위로만 출금이 가능하단다. 천만원을 채우기 위해 내 돈을 추가로 송금한다.     하지만 여전히 돈을 찾을 수가 없다. 이미 보낸 돈이 아까워 더 많은 돈을 보낸다. 계속 보내도 출금을 할 수 없다. 요즘 온라인에서 흥행하는 신종사기수법이다. ‘매몰 비용’에 대한 미련을 자극하는 수법이다. 이미 내 주머니에서 나간 ‘매몰 비용’이 아까워 사람들은 계속 더 큰 돈을 보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가상계좌는 사라지고 업체도 함께 사라진다.   카드를 사용하면 마일리지를 준다. 몇천불을 쓰면 몇만마일을 받을 수 있다. 마일리지를 돈으로 환산하면 몇십불 또는 몇백불이다. 카드회사와 여행업체들은 자신들이 얻는 수익에 비해 아주 작은 마일리지를 준다. 하지만 수만마일이나, 수십만 마일은 마치 내 돈을 쓰고 상당히 큰 이익을 얻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돈으로 돌려주는 캐쉬백도 있다. 캐쉬백이 쌓이는 재미에 필요하지도 않은 소비를 늘린다. 과소비를 부추기는 ‘현혹비용’이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생각 비용 시간당 수입 매몰 비용 이사 비용

2024-05-16

[디지털 세상 읽기] 싸움톡의 기술

스마트폰이 가져다준 편리함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사람들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게 카카오톡과 같은 메신저 앱이다. 메신저는 필요하면 전화처럼 동기화(실시간) 소통이 가능하고, 원하지 않을 경우 이메일처럼 비동기화 소통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런데 그 이점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를 말다툼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문자로 싸운다고 해서 영어로 ‘펙스팅(fight+texting)’이라 부르는 이런 소통법은 미국의 영부인 질 바이든이 남편을 떠나지 않는 경호원들이 듣지 않게 싸우는 방법으로 사용한다고 해서 유명해졌다.   싸움이 좋은 건 아니지만, 갈등을 풀어야 할 때 말로 다투는 것보다 오히려 낫다는 주장도 있다. 당장 답을 해야 하는 대면 대화와 달리, 원하지 않을 경우 답을 늦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감정이 가라앉기도 한다는 것이다. 특히 말로 생각을 밝히는 데 익숙하지 않은 성격이라면 자기 생각을 정리해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도 있다. 면전에서는 자존심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메신저에서는 뜻을 굽히기도 한다.   하지만 메신저로 싸우는 게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사람이 말로 의사소통을 할 때는 문장만으로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게 아니다. 상대방은 말하는 사람의 음성의 크기, 얼굴 표정, 바디 랭귀지를 통해 의미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는데, 문자에는 그런 요소들이 모두 빠지기 때문에 쉽게 오해를 부른다. 가령 “네”라고 짧게 대답한다면 흔쾌한 대답일 수도 있지만, 기분이 상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네” “네네” “넵” “넹” 등의 다양한 표현을 개발하고, 이모지를 함께 넣어서 전달하는 이유가 그거다. 중요한 건 대면 대화와 메신저의 장단점을 잘 이해하고 적절하게 활용해서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다. 박상현 / 오터레터 발행인디지털 세상 읽기 기술 비동기화 소통 대면 대화 자기 생각

2024-05-08

[열린광장] “사랑해, 내친구 게일”

“게일!, 게일!”     부르짖는 내 목소리에 그녀는 눈을 떠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결국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그녀는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내 일생에서 가장 귀한 친구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게일을 선택할 것이다. 게일은 나의 친구이자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와의 만남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던 특별한 것이었다. 그녀와 나는 신앙이 같다는 이유로 대화가 통해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게일은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걱정하는 나의 말을 들어주었고, 함께 기도하며 위로해 주던 친구였다.     병세가 위중해진 아버지를 뵙기 위해 한국 방문을 계획할 때였다. 그녀는 기도 중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국에 가라고 했다면서, 동행을 제안했다. 물론 본인의 여행 경비는 본인이 부담하겠다면서….     솔직히 처음에는 흑인인 그녀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다는 것에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너의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러 가는 것”이라는 게일의 말에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아버지께 연락을 했더니 “나야 와주면 고맙지”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그렇게 우리는 함께 한국에 갔다. 그녀는 폐암으로 고생하던 아버지가 기침 때문에 잠을 못 자고 아파할 때마다 아버지 방으로 가 환부에 손을 얹고 정성으로 기도했다. 아버지도 게일을 무척 좋아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그녀가 신은 양말에 구멍이 난 것을 보셨는지 새 양말도 꺼내 주시고 손도 잡아주시며 무척 예뻐하셨다. 그녀의 사랑에 감동하신 아버지는 그녀를 통해 주님을 영접하셨다.   하지만 한 달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게일과 나는 함께 한국을 다녀온 후 더 가까워져 그녀가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는 등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다.   어느 날 낯선 번호의 전화를 받았다. 게일의 이름을 대면서 빨리 병원으로 와 달라는 전화였다. 나는 남편과 함께 그녀가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갔다. 게일이 심장마비로 쓰러진 것이었다.     그녀는 혼수상태였음에도 내 목소리를 듣고는 눈을 떠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마지막 인사 한마디 나눠보지 못하고 게일은 삼 일 만에 하늘나라로 이사를 했다. 그녀가 고혈압과 당뇨로 고생하는 것을 알고 알았지만 심장병까지 앓고 있는 것은 몰랐다. 그녀가 떠난 후 그녀의 아들과 병원 동료들 몇 명이 함께 그녀의 유품 정리를 도와주다 발견한 병원 진료 카드를 보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다. 그녀가 사용했던 침대는 누가 버린 낡은 소파 쿠션 3개를 붙여놓은 것이었다. 옷장에도 내가 선물로 준 옷 몇 벌과 유니폼 몇 개가 전부였다.  그녀는 번 돈을 본인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대신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과 홈리스들을 위해 모두 사용했다.  홈리스들에게 음식도 만들어 주고 재봉도 가르쳐 주는 등 본인이 소유한 물질과 시간을 모두 어려운 이웃들과 나눴다. 그녀는 봉사하는 삶을 직접 실천으로 보여준 성경에 나오는 ‘도르가’와 같은 귀한 여인이었다.   아들 외에는 유가족이 없는 그녀를 위해 근무하던 병원에서 조촐하게 장례식을 치렀다. 동료들과 함께 그녀를 추모했다. 게일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려 추모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나는 소중한 가족 한 사람을 잃은 것 같은 슬픔과, 항상 남을 먼저 배려하며 선행과 나눔을 실천했던 그녀의 아름다운 삶을 이야기했다. 그녀가 베풀었던 선행을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성경 다니엘서 12:3 절을 천천히 읽어주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그녀에게 전해 주고 싶었던 마지막 인사였고 소원이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 주셨던 천사였다. 나는 그녀가 천국에서 나의 아버지와 반가운 재회를 나누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때때로 인생의 어려운 순간을 지날 때, 또 마음이 힘들고 울적할 때면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그녀를 불러본다. 그녀가 언제나 그랬듯이 다정하게 웃으며, 또다시 나에게 말한다. “앨리스, 너는 참 바보 같아(Alice, you are so silly….)”     사랑해, 그리고 보고 싶다, 잊지 못할 나의 영원한 친구 게일.    ━       앨리스 박은 정신과 병원 은퇴 간호사로 은퇴했다. LA폭동 당시 한인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통역 등 봉사 활동을 했으며, 아태가정상담소에서도 활동했다. LA폭동 42주년을 맞아 절친한 흑인 친구였던 게일을 추모하며 쓴 글이다.    앨리스 박 / 은퇴 간호사열린광장 사랑 친구 내친구 게일 게일 생각 정신과 병원

2024-04-28

[문화산책] 말 잘하기와 경청의 힘

시끄럽기 짝이 없던 선거가 끝났으니, 이제 쓰레기처럼 더러운 막말과 욕설도 자취를 감추고 고운 말의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   누구나 말 잘하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말을 잘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이냐는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흔히 미사여구를 현란하게 구사하며, 막힘 없이 재미있게 청산유수로 말하는 달변을 말 잘한다고 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견해는 사뭇 다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매끄러운 말솜씨가 아니라, 말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어눌하더라도 진정성이 있어야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생기는 법이다. 실제로, 말을 하면서 더듬거리거나 머뭇거리고 말을 끊는 등의 어수룩한 빈틈이 있는 편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고, 기억도 잘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이다. 거짓말처럼 무서운 살상 무기도 없다. 지금 우리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거짓말, 몹쓸 말, 험상궂은 언어를 걷어내기만 해도 세상이 훨씬 평화롭고 조용해질 것이다. 어디 거짓말뿐이랴, 허언, 빈말, 말 바꾸기, 말 돌리기, 임기응변, 막말, 욕설, 험담, 비방, 중상모략, 악마처럼 떠도는 유령의 언어들, 무자비한 무기로 바뀌는 말들….   지금 우리 현실에서 거짓말을 가장 잘하고 많이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출세한 사람들, 많이 배운 사람들, 익명의 누리꾼들, 특히 정치가들이다. 말싸움, 거친 말, 험한 말, 가시 돋친 말, 말도 안 되는 말, 선량한 동료 시민들 청력 테스트 등으로 날밤을 지새운다. 일부 언론은 그걸 앵무새처럼 받아 적는다.   이분들의 입을 정화할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까? 발칙한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눈부시게 발달한 첨단과학을 활용해서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자는 제안이다. 간단하게 요점을 설명하자면, 거짓말이나 몹쓸 말을 들으면 즉시 달려가서 귀싸대기를 통쾌하게 후려치는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어서, 국회를 비롯해서 방송국이나 신문사처럼 말 많은 곳에 배치하는 것이다. 귀싸대기를 후려치고 나서는 각설이 품바타령을 한바탕 시원하게 불러제끼면 얼마나 속 시원할까?   제법 그럴싸한 생각인 것 같기는 한데, 실현 가능성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워낙 거짓말이 넘쳐나는 세상이니 여기저기서 귀싸대기 후려치는 소리에, 얻어맞고 내지르는 비명으로 온 세상이 더 시끄러워질 것 같다.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뾰족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교과서 같은 이야기를 속절없이 되풀이할 수밖에 없으니 참 답답하다. 제발 말싸움 그만하고 대화하시라, 마음에도 없는 말 마구 하지 말고 진심을 말하시라, 제발 남의 말을 경청하시라… 같은 속절없고 허망한 부탁의 말씀들….   그중에서도 가장 간곡한 부탁은 ‘경청’이다. 실제로, 많은 경우 경청이 최고의 웅변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침묵은 금이라는 속담도 있고, 말로써 말 많으니 말을 말까 하노라 라는 명언도 있다. 묵언 수행의 의미도 무겁다.   철학자 한병철은 서사를 회복시키는 ‘경청의 힘’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미하엘 엔데의 ‘모모’를 예로 든다. “소설에서 주인공 모모는 상대방의 말을 사려 깊게 들어줌으로써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이끈다. 이를 통해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고 심지어 사랑받는다는 느낌까지 받게 한다. 오로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 서사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회복된 서사는 아픔을 치유한다.”   삼사일언(三思一言)도 좋은 처방이 될 것이다. 말하기 전에 세 번 생각하라는 이 말씀만 잘 지켜도 세상은 한결 평화로워질 것으로 믿는다. 세 번이 어려우면, 단 한 번이라도 말하기 전에 깊이 생각을 하시라, 그러면….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경청 막말과 욕설도 생각 하나 각설이 품바타령

2024-04-25

[문예 마당] 4·19혁명과 어머니

이 우울은 언제부터 스며들었을까. 바닷바람에 소리 없이 흘러가는 산안개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나와 함께 한 지 꽤 오래되었다. 산안개처럼 가기도 하고, 때로는 갔다가 다시 오기도 한다. 6·25 전쟁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4월을 돌고 돌아 우리 형제들을 치마폭에 안으셨던 어머니 생각에 우울한가 보다. 아니, 어쩌면 이십여 년 전, 오피스 근방 길거리에서 살다가 우리 집으로 입양되어 살았던 두 마리 고양이와 친구도, 배필도 없이 그리피스 공원에서 십여 년을 맴돌던 외톨이 산사자 P-22의 외롭고 아팠던 삶과 죽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사람도 죽는데, 마음 쓰지 말거라’ 하실 것이다.     숱한 일을 겪으셨던 어머니는 4월이 되면 다시 이생을 방문하신다. 나는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던 데모가 정권을 뒤엎을 수 있었던 ‘4·19 혁명’의 정치적 관념과 멀리 있었다. 그저 쫓기는 흑백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이들을 뒤쫓는 경찰들, 희뿌연 최루탄 연기가 기억 속에 멈추어 있을 뿐이다. 범벅의 카오스 가운데 엄마가 있고, 엄마는 엄마의 특수했던 그 날의 동선(動線)과 함께 되돌아온다.   엄마의 동선은 이랬다. ‘4·19 혁명’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지 두어 달이 지났을 때 터졌다. 정치인들의 부패를 규탄하는 데모가 혁명 이전부터 거의 매일 광화문을 중심으로 있었는데, 밥상머리에서 주워듣던 신문보도에 의하면 데모는 나날이 격앙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꽤 많은 초, 중고교 캠퍼스가 사대문 안에, 주로 광화문을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 중에는 큰 조카와 내가 각각 다른 여자 중학교에, 작은 오빠는 근처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산재한 학교들과 학생들에게 경계를 이루지 않는 매운 최루탄 연기는 아비규환의 전쟁 아닌 전쟁터를 넓히고 있었다. 계엄령 선포로 학생들은 즉시 퇴교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날, 엄마는 나를 데리러 오지 않으시고 조카의 학교로 향하셨다고 한다. 6·25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조카는 자기 엄마와 분가해서 다른 곳에 살고 있었다. 그 애는 나보다 한 학년이 위였다. 나는 혼자 걸어서 집에 갔다.     그랬던 4월은 내 기억에 회색과 검은색으로 희미하게 채색되어 남아있다. TS 엘리엇(1888-1965)은 ‘황무지’라는 무려 434행으로 구성된 시에서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시작한다. 이 부분은 인기가 많다. 시 ‘황무지’는 나에게는 철학 논문 같기도 하다. 그의 개인적 삶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나에게는 난해하고 지루한 글이다. 엘리엇도 4월에 전사한 친구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을 시로 쓴 것이었고, 죽음이라는 자연의 섭리가 끝이 아니라 부활의 시작이라는 희망을 준다. 어디 4월만 잔인하랴. 어디 죽음만 있으랴.   뮤지컬 ‘캣츠’로 많은 이에게 친근한 엘리엇은 미국 출생이었지만 영국에 귀화했다. 하버드 대학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았고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도 재학한 적이 있었다. 그에게 영국은 편안한 곳이었나 보다. 시, 희곡, 소설 등 다작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던 그는 평론가이며 출판가이기도 했다. 그의 시 ‘황무지’의 서두가, 월트 휘트먼과 제프리 차우서의 시와 많이 닮았다는 혹평도 있다. 그 외에도 기독교, 인도 철학, 로마나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내용으로 짜깁기도 많이 했다고 알려져 있다.     ‘4·19 학생운동’ 계엄령이 선포되고, 서울 안에 있는 모든 학교가 강제로 폐교되었을 때, 나를 뒷 전으로 하셨던 어머니, 쌔~애 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서둘러 조카를 찾아 그 애의 학교로 향하셨던 어머니가 카오스의 광화문 광장 중심에 있는 나를 염두에 두지 않으셨을 리는 없다. 그저 내가 우선순위가 아니었을 뿐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10년이 지났던 그때에도 조카의 아버지를 잃어서 생겼던, 아물기를 거절하고 있던 생채기가 세상을 향해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어제는 칼라바사스에 있는 킹 질렛 커뮤니티 파크 센터에서 하는 소품 전시회에 들렸다. 소박하고 유명세에 관심이 없는 화가들의 작품은 평화로웠다. 전시 센터에서 P-22의 얼굴이 새겨진 9″x 12″x 0.5″ 크기의 우드버닝(pyrography) 작품을 발견했다. 녀석의 약간은 두려우면서도 강렬했던 눈빛이 좀 온순하게 표현되기는 했어도, 마음에 들었다. 녀석은 P-22라는 이름표를 달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사람도 죽는데, 마음 쓰지 말거라’ 하시던 어머니도 P-22를 아끼실 것 같다.   류 모니카 / 수필가문예 마당 어머니 혁명 어머니 생각 여자 중학교 혁명 이전

2024-04-25

[우리말 바루기] ‘애시당초’는 없는 말

“애시당초 금연은 안 될 일이었어” “끼니를 거르고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애시당초 무리였다.”     위에서처럼 일의 맨 처음을 나타낼 때 ‘애시당초’라는 말을 쓴다. ‘애시’와 ‘당초’가 만나 ‘애시당초’가 된 것이라 여기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이 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애시’는 ‘애초’의 사투리이므로 ‘애초’라는 말을 써야 한다. ‘애시당초’ 역시 ‘애당초’가 맞는 말이다.   ‘애당초’는 ‘애시’와 ‘당초’가 아닌 접두사 ‘애-’와 ‘당초’가 만나 이루어진 단어다. ‘당초(當初)’는 일이 생기기 시작한 처음을 나타내는 말로 “일이 당초의 생각과는 다르게 풀렸다” “그의 본심이 어디 있는지는 당초부터 알 만한 것이었다” 등처럼 쓰인다. 이 ‘당초’에 ‘맨 처음’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애-’가 붙어 ‘애당초’가 됐다. 즉 접사 ‘애-’를 붙여 ‘당초’의 뜻을 한 번 더 강조한 말이 ‘애당초’다.   ‘애당초’는 “그 일은 애당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끝까지 해낼 각오가 없으면 애당초 시작하지 마라” 등과 같이 사용된다. 줄여 ‘애초’로도 쓸 수 있다.     비슷한 말로 ‘애저녁’이 있다. 그러나 ‘애저녁’도 ‘애시당초’와 마찬가지로 표준어가 아니므로 ‘애당초’로 표기해야 한다.우리말 바루기 생각 자체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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