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인물로 보는 복음서: 참 이스라엘 사람 나다나엘

목회칼럼 / 윤우식 목사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출신으로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빌립의 친구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바돌로메’를 ‘나다나엘’로 보기도 합니다. 나다나엘은 히브리어 ‘느다넬(נְתַנְאֵל)’에서 온 단어입니다. 뜻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라는 의미입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요한복음 1장46절) 예수님을 만난 빌립이 그 ‘메시야,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임을 전할 때에 나다나엘의 반응은 ‘어떻게 나사렛이라는 변방에서 선한 것이 나겠느냐’입니다. 여기에 선한 것은 ‘메시야, 그리스도’입니다. 나다나엘이 가지고 있는 이런 생각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진 그리스도에 대한 고정관념 중에 한 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올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주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당시 유대인들이 가진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그저 사람들 각자가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럴 것 같다는 주장들이었습니다. 이것을 진리처럼 붙잡았다는 겁니다. 근거가 없는 자신의 신념을 진리처럼 붙잡을 때, 이때부터 아주 위험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이 신념이 되고, 그것을 고집하기 시작하면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주 위험한 요소가 되어 버립니다.  
 
  지금 우리 자신은 신앙,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믿음이며, 왜 주일마다 교회에 나옵니까? 나름대로 뭔가 생각이 있으니까 여기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이유가 ‘나만의 생각’, ‘주장’이 아니라 ‘말씀’에 의한 바른 정의, 바른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는 나사렛 출신은 아니다’는 생각을 가진 나다나엘에게 빌립의 말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한 말은, ‘와보라’ 는 것이었습니다.  가서 확인을 하려면 내 고집을 접어야 합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고집을 포기해야 가서 확인하는 수고를 기꺼이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생각, 주관을 꺾습니다. 그리고 ‘빌립’의 말처럼 가서 찾기로 결단합니다. 이런 나다나엘의 모습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한복음 1장 47절) 예수님의 이 표현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출신입니다. 즉, 그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혈통적으로 확실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으로’라는 수식어를 그 앞에 붙이십니다. 여기에 ‘참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알레도스(ἀληθῶς)’로, ‘정말, 확실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확실한 이스라엘 사람’은 ‘혈통’을 따질 겁니다.  
 
  혈통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삶 가운데 있고, 그 말씀을 붙잡고 살며,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중요한 것은 예언된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갈망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혈통이 아니라 혈통으로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스라엘 밖의 소위 이방인들 중에도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일까요? 그것보다 말씀을 붙잡고,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바로 ‘재림의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언제 오실지 모르는 예수님을 기다리기에 항상 깨어서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내 고집, 내 주관에 사로잡혀서 마치 나는 완벽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참 이스라엘 사람’은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간사한 것’에 해당하는 단어가 ‘돌로스(δόλος)’라는 단어입니다. 뜻은 ‘속임, 교활함, 간교, 변절’입니다. 가만히 보면, 아주 나쁜 뜻은 다 들어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돌로스’라는 단어에 포함이 되어 있는 ‘속임, 교활함, 간교, 변절’을 보면 생각나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속임, 교활함’은 사탄이 가진 속성입니다. 자신의 고집과 주관을 꺾고 예수님께로 나다나엘이 오는 것은 ‘속임, 교활함’이 없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것은 이런 ‘속임, 교활함’을 가진 사람은 결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이런 ‘속임, 교활함’은 ‘신앙’에 아주 위험한 ‘장애요소’가 됩니다. 우리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깨닫지 못하게 한다는 겁니다. 도무지 포기하지 못하는 나만의 생각, 주관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깨지 못하면, 우리는 제대로 된 ‘복음’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하려면 반드시 내 속에 굳어져 있는 견고한 미움이라는 것을 깨어야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려고 한다면 내 속에 있는 ‘나만의 것’, ‘나의 주관’을 깨야 합니다. 그리고 ‘속임, 교활함’으로 나의 생각, 나의 판단을 옳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순결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그러기에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시대의 나다나엘과 같이 복음을 갈망하는 삶이 되길 소원합니다.

목회칼럼 / 윤우식 더비전교회 담임목사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