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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오해

서량 정신과 의사

서량 정신과 의사

뒷마당 풀밭에 사슴 한 마리 서 있다. 그에게 살금살금 접근해서 정면으로 시선을 교환한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사슴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생후 몇 달 안 되는 손녀딸을 팔에 안는다. 그녀는 아주 차분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살핀다. 이 아이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토끼와 호랑이가 동화에서 말을 주고받는다. 동화작가는 의인화(擬人化) 기법으로 동물을 사람으로 둔갑시킨다. 말은 생각을 전제로 하는 법. 당신의 손짓 발짓, 웃거나 찌푸리는 얼굴, 짧은 탄성 같은 것들은 비언어(非言語)적인 도우미 역할을 할 뿐 세련된 ‘마스터 오브 세리머니’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
 
아이가 어른처럼 언어를 사용해서 생각한다는 설정을 성인화(成人化)라 한다. 나는 사슴도 손녀딸도 언어를 훌륭하게 구사하는 성인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들이 나와 같은 수준의 소통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에 마음껏 빠진다.
 
사슴이 이러저러한 생각을 했다는 둥, 손녀딸이 여차여차한 생각을 했다는 둥, 하며 내가 둘러댄다면 그건 이해가 아닌 오해다. 오해가 지나치면 곡해가 일어나지. 상대방 마음을 제멋대로 구부리고 비틀어대는 사태가 터진다.
 
만약에, 내가 사슴에게 “너는 내가 무슨 맛있는 음식이라도 줬으면, 하는 생각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구나”라고 말한다면? 손녀딸에게 “너는 할아버지가 많이 늙었네, 하는 측은한 생각에서 내 얼굴을 살피는구나”라고 말한다면? 그런다면, 나와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단순한 대답이 나온다. - 나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속 일을 말로 옮기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표현능력이 없으니까 상대방의 오해를 바로잡아주는 친절이나 정열 또한 있을 수 없다. 말을 할 줄 알아야 생각을 말할 수 있지. ‘말=생각’이다. 이 등식이 정교하지 않게 들리더라도 당신은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thought, 생각’은 ‘think, 생각하다’라는 동사의 과거형이면서 명사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서구인의 생각은 현재형이 아니라 이미 터진 일, 엎질러진 물 같은 거다. 그래서인지 ‘think’의 고대영어 ‘thinken’에는 생각한다는 뜻 외에 ‘remember, 기억하다’라는 뜻이 있었다. 우리말로도 ‘고향생각’, 하면 고향에 대한 ‘메모리’를 뜻한다. 참 오랜만에 영어와 우리말 어원이 같은 사고방식에서 오는 것을 찾아내서 기쁘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고대영어 ‘thinken’에는 또 상상하다, 배려하다, 의도하다, 소망하다, 느끼다 라는 뜻이 있었는데 우리말 ‘생각하다’에도 똑같은 뜻이 고스란히 포함돼 있다. 짧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상상-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배려-야, 남 생각도 좀 해라! ▶의도-나도 그럴 생각이야. ▶소망-생각 있어? ▶느낌-쓸쓸한 생각. (표준국어대사전)
 
사슴이며 손녀딸을 생각한다. 사슴은 비 내리는 늦가을 밤 어디에 숨어있는가. 어느새 발랄한 소녀가 되어서 간드러진 목청으로 노래를 기똥차게 잘 부르는 손녀딸은 어떤 마음으로 학교공부를 하며 지내는지.
 
그들이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상상한다. 틀린 상상, 틀린 생각을 무턱대고 한다. 무념무상의 늪에서 벗어나서 오해라도 해볼까 하는 마음이다. 백지 답안지보다 틀린 답을 써넣겠다는 속셈. 빵점보다 몇십 점이라도 받고 싶다. 그런 노력이 없는 삶은 호되게 재미없는 삶이라 생각한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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