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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주삿바늘과 아메리칸 치즈

내가 전 병원의 ‘lunch coverage’를 맡는 날, 점심시간 끝 무렵. ‘Code Green’, 위기상황을 알리는 확성기에서 명시하는 장소가 3층 식당이다. 어느 병동 환자가 무슨 일을 터뜨렸을까.   나이가 스물 안짝으로 뵈면서 좀 뚱뚱한 여자환자가 식당 앞 복도 벽에 등을 대고 바닥에 다리를 뻗은 채 ‘L-shaped’, 니은(ㄴ)자로 앉아있다. 병동직원 서넛이 그녀를 둘러싸고 무언지 큰 목소리로 설득하고 있는 상황. 환자는 눈을 아래로 깐 채 딴생각을 하고 있는 기색.   무슨 일입니까? 글쎄, 식사를 끝내고 다들 병동으로 돌아갔는데 이 환자 혼자서만 벽에 기대앉아 한마디 말도 없이 꼼짝달싹하지 않고 있는 거예요. 얘는 평소에 남들과 의사소통을 곧잘 하는 편입니까? 암, 그렇고 말고요.   이름이 뭐니? 도로시.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 보거라. 음, 치즈 샌드위치요. 금방 점심을 먹지 않았니? 그런데도 또 그게 먹고 싶어요. 직원에게 물어본다. 혹시 지금 식당에 치즈 샌드위치가 있습니까? 오늘 메뉴에 없었으니까 없을 겁니다. 얘는 늘 뭘 달라고 하는 버릇이 있어요. 우리가 오냐오냐, 하니까 다른 환자들도 따라 합니다.   주위에 다른 환자들은 없고 ‘Code Green’에 응수한 병원 직원들이 열 명이 넘는다. 환자는 얼른 자기의 소망이 이뤄지지 않을 것을 예감하고 복도 바닥에 드러눕는다. 간호사가 ‘주사’ 오더를 내려달라고 속삭이자마자 환자가 소리친다. 주사를 놔주세요. 나는 주사 맞기를 좋아해요.   도로시는 잠시 후 주사를 맞지 않고 물약을 마신다. 그리고 고분고분하게 병동으로 귀환한다. 몇 살이냐? 19살이요. 이마와 뺨에 여드름이 무성한 그녀가 기억에 남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이내 대망의 치즈 샌드위치가 병동에 도착한다. 그녀가 빵의 겉 부분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는 도중 빵 두 쪽 사이에서 샛노란 치즈가 노출된다. 아, 저 사각형의 치즈. 오늘 새벽 내가 부엌 냉장고에서 꺼내 서서 먹던 바로 그 아메리칸 치즈.   대부분의 사람은 주사 맞기를 싫어한다. 더구나 왁자지껄한 가운데 여럿이 지켜보는 ‘Code Green’ 현장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우두커니 서서 날카로운 주삿바늘이 엉덩이에 꽂히는 상황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도로시야, 너는 왜 주사 맞기를 좋아하느냐? 주삿바늘이 따끔해서 좋아요.   ‘injection, 주사’의 동사형 ‘inject, 주사를 놓다’는 어원학적으로 ‘안으로 던지다’라는 뜻. ‘~ject’로 끝나는 말로 ‘project, 투사하다’는 앞으로 던진다는 뜻. ‘reject, 거절하다’는 뒤로 던진다는 뜻. 이렇듯 ‘ject’는 기하학적이면서 다이나믹한 말이다. ‘deject, 낙담시키다’의 아래로 던진다는 뜻도 흥미롭다. 낙망이 희망의 반대말일까.   도로시는 치즈 샌드위치를 깡그리 먹어치운다. 병동직원들이 너에게 또 스페셜 트리트먼트를 해줬구나. 기분이 어떠냐? 좋아요. 그런데 그들이 왜 너에게 그러기를 꺼려하는지 알고 있니? 몰라요. 다른 환자들이 너를 질투하면 알게 모르게 큰 혼란이 일어난단다. 그녀는 뽀로퉁해서 나를 한참 째려본다.   다음 날 아침 그녀의 담당 의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다. 그는 내게 고맙다고 말한 후 도로시가 자주 ‘Code Green’을 일으킨다고 투덜댄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렇게 덧붙인다. 그녀는 ‘IQ’가 약간 낮은 편이에요. 70 좀 아래랍니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아메리칸 치즈 아메리칸 치즈 치즈 샌드위치 병동 환자

2024-12-10

[잠망경] 오해

뒷마당 풀밭에 사슴 한 마리 서 있다. 그에게 살금살금 접근해서 정면으로 시선을 교환한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사슴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생후 몇 달 안 되는 손녀딸을 팔에 안는다. 그녀는 아주 차분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살핀다. 이 아이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토끼와 호랑이가 동화에서 말을 주고받는다. 동화작가는 의인화(擬人化) 기법으로 동물을 사람으로 둔갑시킨다. 말은 생각을 전제로 하는 법. 당신의 손짓 발짓, 웃거나 찌푸리는 얼굴, 짧은 탄성 같은 것들은 비언어(非言語)적인 도우미 역할을 할 뿐 세련된 ‘마스터 오브 세리머니’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   아이가 어른처럼 언어를 사용해서 생각한다는 설정을 성인화(成人化)라 한다. 나는 사슴도 손녀딸도 언어를 훌륭하게 구사하는 성인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들이 나와 같은 수준의 소통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에 마음껏 빠진다.   사슴이 이러저러한 생각을 했다는 둥, 손녀딸이 여차여차한 생각을 했다는 둥, 하며 내가 둘러댄다면 그건 이해가 아닌 오해다. 오해가 지나치면 곡해가 일어나지. 상대방 마음을 제멋대로 구부리고 비틀어대는 사태가 터진다.   만약에, 내가 사슴에게 “너는 내가 무슨 맛있는 음식이라도 줬으면, 하는 생각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구나”라고 말한다면? 손녀딸에게 “너는 할아버지가 많이 늙었네, 하는 측은한 생각에서 내 얼굴을 살피는구나”라고 말한다면? 그런다면, 나와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단순한 대답이 나온다. - 나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속 일을 말로 옮기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표현능력이 없으니까 상대방의 오해를 바로잡아주는 친절이나 정열 또한 있을 수 없다. 말을 할 줄 알아야 생각을 말할 수 있지. ‘말=생각’이다. 이 등식이 정교하지 않게 들리더라도 당신은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thought, 생각’은 ‘think, 생각하다’라는 동사의 과거형이면서 명사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서구인의 생각은 현재형이 아니라 이미 터진 일, 엎질러진 물 같은 거다. 그래서인지 ‘think’의 고대영어 ‘thinken’에는 생각한다는 뜻 외에 ‘remember, 기억하다’라는 뜻이 있었다. 우리말로도 ‘고향생각’, 하면 고향에 대한 ‘메모리’를 뜻한다. 참 오랜만에 영어와 우리말 어원이 같은 사고방식에서 오는 것을 찾아내서 기쁘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고대영어 ‘thinken’에는 또 상상하다, 배려하다, 의도하다, 소망하다, 느끼다 라는 뜻이 있었는데 우리말 ‘생각하다’에도 똑같은 뜻이 고스란히 포함돼 있다. 짧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상상-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배려-야, 남 생각도 좀 해라! ▶의도-나도 그럴 생각이야. ▶소망-생각 있어? ▶느낌-쓸쓸한 생각. (표준국어대사전)   사슴이며 손녀딸을 생각한다. 사슴은 비 내리는 늦가을 밤 어디에 숨어있는가. 어느새 발랄한 소녀가 되어서 간드러진 목청으로 노래를 기똥차게 잘 부르는 손녀딸은 어떤 마음으로 학교공부를 하며 지내는지.   그들이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상상한다. 틀린 상상, 틀린 생각을 무턱대고 한다. 무념무상의 늪에서 벗어나서 오해라도 해볼까 하는 마음이다. 백지 답안지보다 틀린 답을 써넣겠다는 속셈. 빵점보다 몇십 점이라도 받고 싶다. 그런 노력이 없는 삶은 호되게 재미없는 삶이라 생각한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오해 thought 생각 상대방 마음 우리말 어원

2024-11-26

[잠망경] Hungry, Angry, Lonely, Tired

Alcoholics Anonymous(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 모임 슬로건에 심도 깊은 컨셉이 많이 있다. ‘Forgive and forget, 용서하고 잊어라’, ‘Let go and let God, 놓아버리고 신에게 맡겨라’ 하는 금언들이 그렇다.   슬로건은 운율 감으로 호소력을 높인다. 금주(禁酒)가 걱정되는 경고, ‘Hungry, Angry, Lonely, Tired’가 있는데 약자로 ‘H.A.L.T’라 한다. 군대용어로 잘 쓰이는 ‘halt’는 ‘hold’와 같은 말뿌리로 ‘멈추다’라는 뜻.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잠시 생각해보라는 의미가 숨어있다.   허기지고, 화가 나고, 외롭고, 고달픈 것은 별로 권장할 만한 정황이 아니다. 허기와 고달픔은 육체적 증상뿐만 아니라 정신상태까지 포함한다. 배가 고플 때는 뭘 먹으면 되지만 정신적 공허감은 호락호락 해결되지 않는다. 육체노동에서 오는 단순한 피로감은 잠을 푹 자면 사라지지만 불철주야지속하는 정신적 고달픔은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왜 화를 내고 분노하는가? 실망과 좌절감이 분노의 씨앗이 된다. 좌절감은 부정적 감정을 마음에 담아서 삭히거나 소화하는 조용한 심리상태인 반면에, 오랫동안 참아왔던 울분이 자기도 모르게 화산처럼 폭발하는 경우가 많다. 분노는 맨날 분풀이 대상을 찾아다닌다.   발길로 걷어차는 쓰레기통, 쾅 닫는 문, 그리고 친구, 배우자, 정신과 의사, 상담사가 분노의 타겟이 된다. 분노하기보다 실망과 좌절을 소화할 줄 아는 사람이 더 성숙한 사람이라는 금과옥조를 늘상 상기하며 사는 소시민적인 우리가 아닌가.   무슨 이유에서건 속을 썩이다 보면 마음이 어두워지는 법.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어두운 마음, 우울한 기분을 가다듬고 대처하는 일에 몰두하려 한다. 자신과의 맞짱 뜨기 끝에 너무 힘이 달리면 남의 조언과 응원을 찾는다.   쓸쓸함, 외로움, 고독은 어떤가. 조금씩 다른 뉘앙스를 품고 있는 낱말들. 그중 쓸쓸하다는 표현이 가장 진솔하고 감성적으로 전해진다. 외로움이라는 묘사도 만만치가 않다. 고독이 제일 고차원적이라 할 수 있겠지. 어떤 감춰진 힘이 느껴질 정도로.   외로움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옛날 히트곡 ‘Are You Lonesome Tonight’의 애련한 무드가 묻어나지만 고독이라 하면 항일독립투쟁의 강인한 힘이 떠오른다.   고독은 정신집중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병동에서 환자와 대화할 때 응급상황 통보가 확성기를 크게 울리면 대화는 순식간에 단절된다. 나는 절대로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지 못한다. 정신집중은 고독한 시간을 필수로 한다.   고독(孤獨)의 ‘홀로 獨’은 犬(개 견)자와 蜀(애벌레 촉)자가 합쳐진 이상한 모양새의 형성문자다. 한자 사전은 “개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지만, 의미가 명확히 전달되지는 않는다.”고 투덜댄다. 나는, 에헴, 개와 애벌레는 서로 상관없는 독립개체라는 우스꽝스러운 의미가 바닥에 깔렸다고 우겨볼까 하는데. 개와 애벌레는 본질적으로 서로에게서 자유로운 존재들이다.   “삶은 고통이다”라는 명언으로 당신과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 쇼펜하우어가 이런 말을 했다. - 사람은 혼자 있는 동안만큼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고독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유를 사랑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혼자 있을 때만 진정으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본인 譯, ‘The World as Will and Ideas’: 1818)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hungry angry hungry angry 외로움 고독 정신적 공허감

2024-11-12

[잠망경] 똥꿈

신라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가 ‘오줌 꿈’을 꾼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나온다. 보희가 산 위에서 배설한 오줌이 서라벌 땅을 적시는 꿈이다. 동생 문희는 비단 치마 한 벌을 언니에게 건네주고 그 길몽(吉夢)을 산다. 문희는 오빠 김유신의 계략으로 선덕여왕 왕실의 고위급 인사 김춘추와 여차여차하여 정을 맺는다.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그와 혼인하여 7세기 중반에 왕비가 된 문희는 언니의 꿈을 매입하고 팔자를 고친 셈이다.   그룹 세션. 간밤에 똥을 만지는 꿈을 꿨다고 한 환자가 밑도 끝도 없이 불쾌한 표정으로 말한다. 꿈은 속뜻과 겉뜻이 반대일 경우가 많다고 했지. 우리의 무의식은 겉과 속이 반대일 때가 많다니까. 한국의 민속신앙에서 ‘똥꿈’은 재운(財運)을 예고하는 꿈이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똥꿈을 꾼 다음 날에 복권을 사는 사람이 왕왕 있다고 나는 말한다.   영화에서 좋아하는 남자에게 속마음과 정반대로 행동하는 여자를 곧잘 본다. 이것을 정신과에서 ‘반동형성(反動形成, reaction formation)’이라 한다. 꿈에서는 ‘더러움=깨끗함, 불쾌함=유쾌함’이다.   푸짐한 배변(排便) 후 흔쾌한 기분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손들어보라고 하니 그룹 전원이 손을 든다. 그것 봐라. 똥은 냄새가 역겹고 보기에 흉할 뿐, 속이 후련하게 뒤를 본 다음에는 기분이 무진장 좋지 않으냐. 복권에 당첨돼서 이게 웬 떡이냐, 하는 기쁨과 아주 비슷하지 않겠느냐.   프로이트 또한 똥과 돈의 연관성을 다룬 적이 있다. (1900, 1905, 1908) 그는 아동이 ‘배변 교육(toilet training)’ 동안 똥을 생산해서 부모에게 ‘처음으로 주는 선물(first gift)’을 체험한 후 무의식적으로 똥과 물질적 재산이나 소유물 사이의 연관성을 배우게 된다고 가르친다.   똥은 손, 발, 배, 등, 해, 달, 물, 불, 꿈처럼 딱 한 글자로 된 순수 우리말. 누구든 ‘똥꿈’이라 하면 얼른 알아듣지만 ‘대변몽(大便夢)’이라는 한자어는 아예 사전에 없다.   똥꿈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대만, 태국, 인도의 민속신앙에서 길몽으로 손꼽힌다. 농경사회에서 똥은 비료로 쓰여 ‘똥=재물’이라는 인식이 생겼다는 학설이 그럴듯하다. 삼국유사의 보희가 꿈에서 배설한 강물 같은 오줌발이 서라벌 벌판의 농작물을 위한 비료가 되는 길몽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신은 영국, 독일, 프랑스의 민속 전통에서도 똥꿈이 행운과 재운으로 알려진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어디나 농경사회였나.   1954년부터 쓰이기 시작한 ‘shitload’라는 비속어가 있는데 ‘똥 무더기 분량’이라는 직역이 가능하지만, ‘분량이 많다’는 의미다. Merriam-Webster 사전에 두 개의 짧은 예문이 이렇게 나와 있다. “You‘re in a shitload of trouble.(넌 엄청난 곤경에 빠졌어)” “They have shitloads of money.(걔들은 돈이 엄청 많아)”   어떠냐. 똥 무더기 분량이라는 표현이 ’곤경‘과 ’돈‘에 똑같이 쓰이지 않았느냐. 곤경=돈? 곤경이건 돈이건 엄청난 것은 도대체가 좋지 않다고? 글쎄다. 관리만 잘한다면 엄청난 돈은 괜찮을 것 같은데.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곤경이건 돈이건 반동형성 reaction 속마음과 정반대

2024-11-11

[잠망경] 똥꿈

신라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가 ‘오줌 꿈’을 꾼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나온다. 보희가 산 위에서 배설한 오줌이 엄청난 분량으로 서라벌 땅을 적시는 꿈이다. 동생 문희는 비단 치마 한 벌을 언니에게 건네주고 그 길몽(吉夢)을 산다.   문희는 오빠 김유신의 계략으로 선덕여왕 왕실의 고위급 인사 김춘추와 여차여차하여 정을 맺는다.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그와 혼인하여 7세기 중반에 왕비가 된 문희는 언니의 꿈을 매입하고 팔자를 고친 셈이다.   그룹 세션. 간밤에 똥을 만지는 꿈을 꿨다고 한 환자가 밑도 끝도 없이 불쾌한 표정으로 말한다. 꿈은 속뜻과 겉뜻이 반대일 경우가 많다고 했지. 우리의 무의식은 겉과 속이 반대일 때가 많다니까. 한국의 민속신앙에서 ‘똥꿈’은 재운(財運)을 예고하는 꿈이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똥꿈을 꾼 다음 날에 복권을 사는 사람이 왕왕 있다고 나는 말한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속마음과 정반대로 행동하는 여자를 영화에서 곧잘 본다. 이것을 정신과에서 반동형성(反動形成, reaction formation)이라 한다. 꿈에서는 ‘더러움=깨끗함, 불쾌함=유쾌함’이다. 예지몽(豫知夢) 차원에서 어떤 기쁘기 짝이 없는 해프닝을 예감하며 자다가 똥꿈을 꾼다는 논리의 반동이 너끈히 성립된다.   너희들 중 푸짐한 배변(排便)이 있은 후의 흔쾌한 기분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손들어보라. 그룹 전원이 100% 일제히 손을 든다.   그것 봐라. 똥은 냄새가 참 역겹고 보기에 흉할 뿐, 속이 후련하게 뒤를 본 다음에는 기분이 무진장 좋지 않느냐. 복권에 당선돼서 이게 웬 떡이냐, 하는 기쁨과 많이 비슷하지 않겠느냐.   프로이트 또한 똥과 돈의 연관성을 다룬 적이 있다. (1900, 1905, 1908) 그는 아동 성격 발육과정의 항문기에 이루어지는 ‘배변 교육, toilet training’ 동안 아이가 똥을 생산해서 부모에게 “처음으로 주는 선물(first gift)”을 체험한 후 무의식적으로 똥과 물질적 재산이나 소유물 사이의 연관성을 배우게 된다고 가르친다.   똥은 손, 발, 배, 등, 해, 달, 물, 불, 꿈처럼 딱 한 글자로 된 순수 우리말. 누구든 ‘똥꿈’이라 하면 얼른 알아듣지만 ‘대변몽, 大便夢’이라는 한자어는 아예 사전에 없다.   똥꿈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대만, 태국, 인도의 민속신앙에서 길몽으로 손꼽힌다. 농경사회에서 똥이 비료로 쓰임으로써 농작물의 풍요를 가져왔기 때문에 ‘똥=재물’이라는 인식이 생겼다는 학설이 그럴듯하다. 삼국유사의 보희가 꿈에 배설한 강물 같은 오줌발이 서라벌 벌판의 농작물을 위한 비료가 되는 길몽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신은 영국, 독일, 프랑스의 민속 전통에서도 똥꿈이 행운과 재운으로 알려진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어디나 농경사회였나.   1954년부터 쓰이기 시작한 ‘shitload’라는 비속어가 있는데 ‘똥 무더기 분량’이라는 직역이 가능하지만, ‘분량이 많다’는 의미다. Merriam-Webster 사전에 두 개의 짧은 예문이 이렇게 나와 있다. “You’re in a shitload of trouble.” - “넌 엄청난 곤경에 빠졌어.” “They have shitloads of money.” - “걔들은 돈이 엄청 많아.”   어떠냐. 똥무더기 분량이라는 표현이 ‘곤경’과 ‘돈’에 똑같이 쓰이지 않았느냐. 곤경=돈? 곤경이건 돈이건 엄청난 것은 도대체가 좋지 않다고? 글쎄다. 관리만 잘한다면 엄청난 돈은 괜찮을 것 같은데.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반동형성 reaction 곤경이건 돈이건 속마음과 정반대

2024-10-29

[잠망경] 혼동

어릴 적에 혼동과 혼돈의 뜻이 곧잘 헷갈렸다. 서로 발음이 비슷해서 그랬던 것 같다. 지금도 좀 그렇다.   네이버 사전은 ‘혼동(섞을 混, 같은 同)’을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뒤섞어서 보거나 생각함’, 그리고 ‘혼돈(섞을 혼, 막힐 沌)’을 ‘마구 뒤섞여 있어 갈피를 잡을 수 없음’이라 풀이한다. 영어로 혼동은 ‘confusion’. 혼돈은 ‘chaos’. 이 두 말은 발음이 서로 생판 다르기 때문에 뜻이 섞갈리지 않는다.   요컨대 혼동과 혼돈은 뒤섞거나 뒤섞이는 것이 문제다. 불고기, 상추, 고추장 등등을 숟가락으로 뒤섞어 비벼 먹는 비빔밥은 별로 열띤 토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을 비빔밥 먹는 식으로 하는 사람은 생각이 부실하다는 말을 듣는다.   오늘 그룹 세션 타이틀은 ‘confusion, 혼동’이라고 하니까 다니엘이 다짜고짜 ‘Confucious! 공자!’라 소리친다. 말의 발음이 비슷해서 그러는구나! 하고 친절한 해석을 내리며 공자에 대하여 아는 걸 말해보라고 격려한다. 그는 공자가 오래전 일본사람이라고 말한다. 공자가 청각적 혼동이라면 공자를 일본인 취급하는 것은 시각적 혼동이 아닐까.   난생처음 미국에 와서 미국인들 얼굴이 비슷하게 보여 헷갈리던 기억이 새롭다. 우리는 유사한 것들을 한통속으로 취급하는 경향에 시달린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도 얼핏 보기에 자라의 딱딱하고 거무튀튀한 등딱지가 시커먼 가마솥 뚜껑과 닮았기 때문이다. 아들이 네 살 때 비행장에서 내 남동생을 나로 착각했던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정신과에서 자주 거론되는 ‘transference, 전이, 轉移’ 현상은 쉽게 말해서 어릴 적 경험했던 감정이 지금의 나를 지배하는 정황이다. 당신과 나는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며 산다. 현재 속에 과거라는 유령이 늘 숨어있는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confusion’에는 고대 불어로 ‘혼동’은 물론 ‘장애, 부끄러움’이라는 뜻도 있었고 당시 라틴어의 ‘섞다, 혼합하다’라는 뜻을 직수입한 말이었다 한다. 피동사형으로 써서 ‘confused, 어리둥절해 하는, 혼란스러워하는’, 하면 난처한 상황, 즉 쪽팔리는 시추에이션이 연출된다.   ‘chaos’는 완전히 다른 사연을 지닌 말로서, 14세기경 희랍어와 라틴어에서 ‘심연, 또는 광활한 공허, 공백’을 뜻했다. 16세기에 이르러 ‘엉망진창의 혼동’이라는 뜻도 생겨났다 한다. 구약 창세기에, “창조가 시작되는 혼동스럽고 형체가 없는 우주의 기본 상태” (1530년 출간 영어 버전)에 나오는 어마어마한 말이기도 하다. 1977년에 수학에 대두한 혼돈설(混沌說, Chaos Theory)이 있다. 나는 상세한 내막을 모르면서도 이 학설을 생각하면 은근히 마음이 설렌다.   우리는 ‘이것은 저것이다’, ‘A=B’라는 수학 공식을 내세운다. ‘A’라는 독립개체가 ‘B’와 동일하다니. 아무리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부부일심동체(夫婦一心同體), 하는 중국식 사고방식이 만연하는 우리의 성향이라지만. 아무리 눈앞에 의미심장한 사람이 출현하는 순간에 바운더리 의식이 귀신처럼 사라지는 우리의 기질이라지만.   ‘군사부3체’, ‘부부2심2체’라고 21세기식으로 말하고 싶은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절체절명의 위기 감각에서 ‘A=B=C=…’ 하는 공식을 내세우는 사이에 어느덧 세상이 알파벳 수프로 파도치는 거대한 혼돈의 바다가 되는 사태를 두려워하면서.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혼동 혼동과 혼돈 confusion 혼동 시각적 혼동

2024-10-15

[잠망경] 경우

정치평론 유튜브를 보며 한국말 쓰임새를 배운다. ‘누구 같은 경우’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를테면, ‘홍길동은…’ 하는 대신에 ‘홍길동 같은 경우에는…’ 하는 표현을.   홍길동은 사람이 아니라 ‘경우’다. 홍길동이 유일무이하지 않고 홍길동 ‘같은’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암시다. 개별성은 없고 동질성만, 개인은 없고 단체만 존재한다는 사고방식, 소신 있고 개별적인 정치가는 없고 당에 충실한 당원(黨員)만 있다는 식이다.   우리 ‘DNA’에 면면히 흐르는 대인기피증의 소치일까. 상대의 ‘first name’을 부모가 자식 이름을 부르듯 불러대는 미국적 말 습관에 반하여 우리는 성명(姓名, full name) 뒤에 꼭 직함을 부친다. 이를테면,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대표. 이들은 무슨 경우인가.   성씨(姓氏, last name)만 부르는 습관은 미국도 한국도 마찬가지. 군대에서 홍길동 병장을 홍 병장, 한국 드라마 회사 회식 장면에서 술에 취해도 김과장님, 김비서, 한다. 이름보다 직함이 중요하다.   지경 境, 만날 遇, 경우(境遇)라는 한자어는 참으로 이상한 단어다. 경우는 경계선에서 만나는 일이다. 국경, 군사경계선에서 쌍방이 잔뜩 긴장해서 조우하는 정경이다.   ‘경우가 바르다’라는 표현은 사태를 잘 파악해서 공과 사를 헤아리는 분별심이 있다는 뜻이다. 국립국어원 왈, “경우(境遇)가 바르다는 말은 틀리고, ‘경위(涇渭)가 바르다’가 맞는다”는 기록이 나를 매우 헷갈리게 한다. 중국의 경수강(涇水江) 물은 흐리고, 위수강(渭水江)의 물은 맑아 흐림과 맑음을 뚜렷이 구별된다는 데에서 유래한, ‘경위가 바르다’가 맞다는 설명이다. 여간한 중국애호가가 아니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두 개의 중국 강을 굳이 내세우는 어원학이다.     ‘경위’라는 말이 나왔으니 망정이지, 에헴, 차라리 범세계적 차원에서 ‘경위가 바르다’는 표현은 지구상의 경도(經度), 위도(緯度)에서 유래했다는 추리는 어떠냐.   ‘경우’는 영어로 ‘case’라 옮기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다. ‘In case she doesn’t show up…, 만약 그녀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에는…’ ‘case’는 상자나 박스처럼 네모가 반듯하다는 의미에서 공식용어로도 자주 쓰인다. 환자를 토론할 때 더욱더 그렇다. ‘case presentation, case study, case report’, 같은 경우처럼.   ‘case’는 전인도유럽어로 ‘추락’이라는 뜻이었다. 13세기 초고대 불어로 ‘상황, 말싸움, 재판’, 게다가 라틴어로는 ‘사고(accident), 멸망’이라는 뜻이었고 14세기 말에 법정용어로 ‘소송’, 의학용어로 ‘질병(disease)’이라는 의미도 파생됐다. 중언부언해서 당신에게 미안하지만, 지경 境, 만날 우 遇, 경우(境遇)는 군사경계선에서 발생하는 알력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다.   갈등이 있을 때 우리는 갈등 해소에 전력을 기울이려 한다. 문제 해결이초점인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문제 해결보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증오심이 사태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혹시 아닐까.   그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정황을 감추기 위하여, “너 나빠, 너를 안 좋아해, 네가 미워!” 하는 유치한 말이 저도 몰래 터지는 것이 두려워서 우리는 ‘당신 같은 경우에는…’ 그리고 ‘나 같은 경우는…’ 하며 안간힘을 쓰며 심리적 거리감을 유지하려, 발버둥이 아닌 ‘말버둥’을 치는 게 아닐까 하는데. 늘 경우가 바르다는 이유로 내가 존경하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홍길동 병장 국경 군사경계선 한국말 쓰임새

2024-10-01

[잠망경] 익숙하다니

익숙하다는 말이 한자어인 줄 알았다. 아니다. ‘익熟’은 순수 우리말과 한자의 혼성어다. (熟: 익을 숙)   ‘익다’는 열매, 씨가 여물거나, 고기, 채소, 곡식 따위의 날 것이 뜨거운 열을 받아 그 성질과 맛이 달라지거나, 김치, 술, 장 따위가 맛이 든다는 뜻이라 사전은 풀이한다. ‘익숙’은 해변가, 처갓집처럼 같은 뜻을 두 번씩이나 반복하는 낱말이다.   ‘익다’에는 ‘자주 경험하여 서투르지 않다’, ‘여러 번 겪어 설지 않다’는 뜻이 있다. 충분히 익지 않은 상태를 ‘설익다’라 하고 낯설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낯이 익숙하지 않다는 의미. ‘설다’도 순수 우리말로서 ‘익다’의 반대말. ‘설날’은 새로운 해의 첫날이 낯설은 날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위키백과는 해명한다. 설날은 설익은 날. 해묵은 날이 아닌 새날이다.   성숙과 숙성은 전혀 다른 말이다. 성숙은 ‘생물의 발육이 완전히 이루어짐, 몸과 마음이 자라서 어른스럽게 됨’. 숙성은 ‘충분히 이루어짐, 효소나 미생물의 작용에 의하여 발효된 것이 잘 익음’.   성숙한 여자 몸이라면 맞고 숙성한 여자 몸은 틀리다. 여자 몸과 발효된 김치는 생판 다른 차원이지. 성숙은 현재진행형 뉘앙스를 풍기지만 숙성, 하면 이제부터 내리막길이라는 냄새를 풍긴다. 갓김치가 신김치로 변할 때 일어나는 감각적 변동이나 다름없다.   미 영화 등급분류에 나오는 ‘Rated-R’은 우리의 ‘청소년관람불가’에 해당한다. ‘Mature Audience only’라는 용어도 같은 뜻으로 쓰인다. (성숙한 관람객) 청소년보호법에 따라서 19세 이하는 영화관람을 하지 말라는, 소위 19禁이다.   19살 미만은 성인이 아니라는 사연이다. 성인물(成人物, 포르노 영화)은 공로훈장이 아니라 부끄러운 비밀인 것을.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은 주야장천 미성년(未成年)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사람취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1985년부터 1992년까지 7년에 걸쳐 방영됐던 ‘Growing Pains’이라는 미TV 시트콤이 떠오른다. 정신과 의사가 중심이 되어 그의 네 자녀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아픔과 갈등을 다룬 드라마 시리즈다. 끝 시즌쯤 당시 16살의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떠돌이 소년으로 등장하여 그들 가정에 머무는 대목이 나온다. 정신과 의사가 자신의 자식뿐만 아니라 신원이 불확실한 불량배마저 품어주며 힘든 성숙의 계단을 밟아가는 영혼들을 알아주고 거들어주는 테마가 인상적이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의 ‘톰 소여의 모험(The Adventures of Tom Sawyer: 1876)’을 생각한다. 톰 소여는 미국적 모험정신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엄격한 집안 규율이 싫어서 해적이 되기를 꿈꾸며 친구 허클베리 핀과 잭슨 섬으로 가출하는 12살 나이 미성년자 톰 소여.   해적이 되는 꿈을 접은 채 귀가하는 도중 그들이 익사한 줄로 알고 동네 사람들이 치르는 자신들의 장례식을 훔쳐보는 톰과 허클베리. 말썽꾸러기 자신들을 품위 있고 매력 있는 사람으로 목사가 칭송하는 장면에서 그들은 가슴 뻐근한 감명을 받는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어떤 성인(成人)도 자신과 미성년자들을 위한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성인은 다만 허울 좋은 호칭일 뿐. 미완성 상태가 개선의 여지를 촉구하는 동력이 되는 사실을 나는 굳게 믿는다. 기성체제에 맞서는 미숙함에서 많은 깨달음을 스스로 터득하는 톰 소여의 모험심을 닮고 싶은 소망이 불쑥 솟는다. 당신은 어떤가.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성인물 포르노 나이 미성년자 성숙과 숙성

2024-09-17

[잠망경] 욕

사이버스페이스를 드나드는 지구촌 사람들이 욕을 하는 성향에 대한 통계를 읽는다.     뉴욕포스트는 미국 내에서가장 욕을 자주 하는 사람들이 뉴요커가 아니라며 실망스러운 기색을 보인다. 1등은커녕 17등으로 밀린 뉴욕 시티. 영화에서 자주 보는, 말끝마다 욕을 쏟아대는 맨해튼 거리의 풍경은 터무니없는 과장이라는 판명이다.   2024년 8월에 1000명의 온라인 트위터 메시지를 대상으로 한 집계를 따르면 미국에서 욕을 제일 잘하는 도시는 메릴랜드주의 볼티모어라는 것. 볼티모어는 선원들이 많이 사는 항구다. 뱃사람들은 워낙 바다에 대한 공포심에서 욕을 잘한다는 글을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네이버 사전은 욕(辱)이라는 한자어를 이렇게 풀이한다. ①남의 인격을 무시하는 모욕적인 말. 남을 저주하는 말. ②아랫사람의 잘못을 꾸짖음. ③부끄럽고 치욕적이고 불명예스러운 일. ④‘수고’를 속되게 이르는 말. 영어의 욕은 ①에 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②, ③, ④는 별로 없다.   辱은 둘 이상의 한자를 합하여 뜻이 합성된 낱말, 즉 회의문자(會意文字). 辱자는 별 辰자와 마디 寸자가 합쳐진 모양새. 갑골문자에 ‘농기구’를 손에 든 모습이라 풀이한다. 辱은 농기구를 쓰면서 흙 묻은 손이 더러워진다는 뜻에서 생겨난 말이란다. ④의 주제는 단연 ‘더러움’이다.   병동환자 중에서 욕을 제일 자주 하는 스티브는 모욕과 저주에 능숙하다.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을뿐더러 이민 와서 열심히 일하는 직원에게 본국에 돌아가라 명한다.     병동직원들도 인간인지라 덩달아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싶어하는 눈치가 엿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 욕설은 환자들의 특권이기도 한 것을. 얼떨결에 환자와 맞섰다가 환자에게 내부적인 고발(?)을 당한 후 합당한 처벌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간적 차원에 국한된 욕이 더 호소력이 강하다. 가장 강력한 욕은 성적(性的)인 발언이다. 치부(恥部) 디파트먼트를타깃으로 삼는 치사한 심보. 생식기를 떠나 소화기에 말단 부분에도 초점을 맞춘다. 미국인들에게 ‘shit’는 욕도 아니다. 직장 동료가, “Ah, shit!” 하면 “아이구, 참!”하는 가벼운 좌절감의 표시로 나는 받아들인다. 물론 격렬하게 욕을 할 때도 이 말이 어김없이 쓰이기도 하지만.   욕쟁이 스티브는 남에게 모욕과 저주의 세례를 실컷 퍼부은 후 표정이 개운하다. 슬퍼서 심하게 울고 난 사람의 평온함이 엿보인다. 푸짐한 배설작용 후에 찾아오는 푸근한 마인드셋. 오물을 듬뿍 뒤집어쓴 직원은 마음이 편치 않다.   2023년 6월 플로리다의 오를란도 메디컬 뉴스 기사를 읽는다.     매사추세츠 대학에서 주장한 욕의 혜택(benefit)에 대한 논문이다. 욕을 하는 사람은 욕을 안 하는 사람보다 정직하다는 점. 당신이 쉽사리 동의하지 않겠지만, 욕이 심리적 고통을 완화시킨다는 점. 그리고, 딱딱한 이론에만 급급하는 좌뇌(左腦) 기능에 비하여 욕을 할 때는 창조력을 고무시키는 우뇌(右腦)가 자극을 받는다는 부분이 눈길을 끈다.   어릴 적 한밤중 집에 도둑이 들어 은수저를 훔친 후 부엌 바닥에 똥을 푸짐하게 누고 갔던 일이 있었다. 잡히면 큰일 난다는 공포심에서 말 대신 몸으로 욕을 했던 것이다. 무서워서 욕을 하는 정신상태.   역병과 불운에 대항하려고 부모가 옛날에 아들을 개똥이라고 불렀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자식을 개똥이라고 부를 때마다 부모들은 안도감을 느끼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개똥이의 어린 시절이 애꿎이 욕을 본 것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모욕과 저주 메릴랜드주의 볼티모어 인종차별적 발언

2024-09-03

[잠망경] 과거애착증

우리는 왜 어둡고 괴로운 과거에 매달리는가. 당신은 숱한 과거의 기억 중 어찌 그리도 아프고 슬픈 과거에 집착하는가. 따스하고 아늑한 공간에서 활짝 웃으며 ‘Happy Birthday to You~♪’ 하며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입을 모아 노래하던 즐거운 메모리 등등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인가.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케네디 공항에 항공기가 안전하게 착륙하는 일상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그러나 어느 날 비행기가 추락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서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는 뉴스는 모든 사람의 관심이 일제히 쏠리지요. 나는 허전한 생일파티 등등보다 잘못하면 나의 안전이 손상될지도 모른다는 시나리오에 조마조마해집니다.   자기보존본능은 모든 생물체의 생존을 위한 기본여건이다. 까마득한 옛날 우리의 조상 원시인들이 사자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초긴장 상태로 살았던 것이나 현시대의 우리가 기계문명의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고 비행기 추락사고 따위 소식에 바짝 긴장하는 것도 다 본능적인 위기감각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둡거나 괴롭거나 아프고 슬픈 과거지사에 매달린다. 그런 어두운 기억을 한껏 애정한다.   어릴 적 부모에게서 학대를 받으며 받은 사람이 어른이 돼서도 학대를 주고받는이성관계를 거듭한다. 급기야 나라는 개인적 차원을 떠나서 전 인류가 집단적으로 나쁜 과거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 History repeats itself. (칼 마르크스, 독일 공산주의자가 했던 말)   개인적, 집단적 역사뿐만 아니다. 우주의 운행, 태양계의 혹성들, 지구의 공전, 약속처럼 찾아오는 4계절, 우리의 말버릇, 정신상태, 성격과 대인관계 같은 모든 것이 어김없이 되풀이된다.   어두운 역사의 반복현상에 반하여 진화론은 어떤가. 모든 것을 신의 섭리에 맡기는 사고방식을 잠시 접어두고, 개인이 획득한 지식, 기술, 타인을 향한 호불호(好不好) 같은 것들이 대물림하면서까지 진화가 지속한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는지.   우리의 머나먼 조상 원숭이들이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꼬리 길이가 조금씩 짧아졌다는 이론이다. 이제는 아주 없어진 채 그 흔적만 우리의 점잖은 엉치뼈에 남아있다는 진화론적 역사를 상기한다. 모든 생명체의 진화과정도 반복의 소산인 것을.   피아노나 기타를 배우는 일에도 마찬가지 원칙이 적용된다. 매일매일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여 조금씩 조금씩 손놀림이 익숙해지며 미세 근육의 진화과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영어 속담은 ‘Practice makes perfect’, 훈련이 완벽을 이룬다, 자꾸 연습하다 보면 아주 잘하게 된다, 하지 않았는가.   공산주의자 칼 마르크스의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에 ‘톰 소여의 모험’으로 미국문화를 경축한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의 명언을 인용함으로써 그의 미숙한 발언을 비판한다. - History doesn’t repeat itself, but it often rhymes. -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가끔 운율을 맞춘다.   우리는 과거를 잊지 못해 아픔에 시달리는 횟수를 반복할 때마다 조금씩 과거에서 벗어나는 진화과정을 밟는다. 꾸준히, 아주 꾸준하게, 종종 상서로운 돌연변이 현상이 일어나는 우리의 삶은 주제와 변주의 흥미로운 연속이다. 주제 멜로디와 화음 진행이 숨어있는 변주곡이 잘 연주되는 인생이다. 우리의 삶은 소나타 형식의 감명적인 음악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과거애착증 진화론적 역사 history repeats 비행기 추락사고

2024-08-20

[잠망경] 버딘스키

환자들 간에 말다툼이 일어난다. 금세 주먹다짐이 터진다. 정치가들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난다. 그들의 말다툼은 주먹다짐 대신 막말 잔치로 돌변하기도 한다.   그룹테러피 세션에 나는 환자들의 인내심 부족과 미숙한 언변을 염두에 두면서 자유토론을 멀리하고 강연 형식을 취하려 애를 쓴다. 마치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교사라도 된듯한 기분이다.   남의 말을 가로막는 습관이 있는 환자가 눈을 크게 뜨고 앉아있다. 그는 내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재빨리 끼어들어 반대 의사를 표명하거나 주제와 관계없는 말을 꺼낸다. 다른 환자가 “Hey, Mr. Buttinksi!” 하며 그를 향하여 목소리를 높인다.   참 오랜만에 듣는 속어, ‘Buttinski’다. ‘butt in’에 도스토예프스키 또는 차이코프스키 같은 북유럽식 이름의 ‘스키’가 붙어서 만들어진 합성어. ‘butt in’은 1900년경부터 미국에서 쓰이기 시작한 슬랭으로서 ‘염치없이 끼어들다’라는 뜻. 그래서 ‘buttinski’는 그런 사람을 비아냥거리는 슬랭이다. 영한사전은 ‘참견하는 사람’이라고 싱겁게 풀이한다. 어떤가. 어원학(語源學)이 재미있지 않은가. 별로라고? 그래도 내 말을 막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기 바란다.   우리는 왜 남의 말을 막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대충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온다. ①남의 말을 끝까지 듣는 참을성이 부족해서 ②남의 말을 듣기가 싫어서 ③다른 사람의 관심을 자기에게 쏠리게 하기 위하여 (시선강탈 또는 관심강탈) ④자기 생각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 우월감 때문에 ⑤치열한 경쟁심에서   사람 마음이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버딘스키’들은 도대체 왜 남의 발언권을 강탈하는가. 왜 생도가 선생님의 말을 가로막고 선생님을 가르치려 하는가 말이다. 한 환자가 심드렁하게 말한다. 선생님이 떠드는 게 싫어서요. 선생님이 미워서요.   기본설정에 오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Something is wrong in our default setting!” - 오냐, 갈 데까지 가보자! ? 이건 학생이 교실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이다. 내 말을 잘 들어라.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지식과 깨달음은 스승에서 제자에게 전달되는 것이 자연과 인간의 도리다. 뭐, 어째? 마음에 들지 않는 스승을 제자들이 합심하여 ‘탄핵’시켜야겠다고?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도중에 너희들 몇몇이 노래를 중단시키겠다는 것. 그리고 음치에 가까운 버딘스키의 노래를 들으라는 말이지. 목사의 언변이나 태도가 탐탁지 않아서 설교 도중에 재빨리 끼어들어 목사에게 설교하겠다는 거지, 시방.   지금부터는 자유토론 시간이다, 라고 선포하자 한 환자가 말한다. “우리의 대화는 서로 경쟁하는 스포츠와 같아야 합니다.” - 내가 응답한다. “스포츠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다. 예컨대 권투선수는 절대로 링을 떠나면 안 된다. 상대를 발로 차도 안된다.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주먹다짐을 결코 복싱경기에 비교할 수 없다.”   ‘butt in’ 할 때의 ‘butt’은 라틴어의 ‘buttock, 엉덩이’의 줄임말이다. ‘butt’에는 ‘담배꽁초’라는 뜻이면서 ‘뭉툭한 부분’ 또는 ‘머리 부분’이라는 의미도 있지. 즉, 남의 언어 공간에 머리를 들이미는 행동이 ‘butt in’이다.   이 어원학에 의하면 ‘buttinski’가 머리를 들이미는 작자인지, 엉덩이를 들이미는 작자인지 그놈이 그놈이라는 혼동이 생긴다. 어쩌다 서구인들은 ‘머리=엉덩이’라는 생각으로 사는가. ‘스승=제자’라는 거지. 정말?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buttock 엉덩이 생각 우월감 butt in

2024-08-06

[잠망경] 왜 소리를 지르는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전 병원에 ‘Code Green’이 확성기로 울린다. 환자도 병동직원도 코드그린이 자기네 병동이 아니기를 바라며 귀를 쫑긋 세운다.   코드그린은 정신과적 위기상황을 알리는 응급 시그널이다. 인근 직원들이 급히 서둘러 해당 병동으로 운집한다. 환자가 직원을 때린 경우에도 화급하게 터지는 코드그린.     교통신호등 ‘green’은 직진 또는 우회전을 해도 좋다는 마음 편해지는 신호인 반면에 ‘red’는 차를 정지하라는 위험신호다. 나는 가끔 위기상황을 ‘Code Red’라 해야 하지 않나, 하는 한심한 생각을 하며 현장으로 뛰어간다.   관료적인 단어선택은 늘 부드러움을 우선으로 삼지만, 사실 코드그린에 반응하는 모든 직원 마음은 불안하기만 하다. 확성기가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것만으로 모자라는 듯 아나운서 자신 또한 힘껏 소리를 칠 때가 많다.   어릴 적 아버지와 새벽녘 뒷산 약수터에 가면 어김없이 야호! 하며 소리치던 어르신네가 떠오른다. 귀청이 떠나가라 울리는 코드그린만큼 우렁찬 소리! 왜 저 사람은 소리를 지르냐고 아버지에게 물어본다. 약수를 마신 후 기분이 좋아서라는 것. 대중탕 냉탕에 들어가 엄숙하게 앉아서 “동창이 밝았느냐~~♪” 하며 판소리 치듯 노래하던 동네 시니어 시티즌과 마찬가지 이유다.   우리가 공포영화의 무서운 장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지르는 것도 강한 감정을 우아하게 컨트롤하지 못해서 얼떨결에 나오는 소리다. 나도 당신도 평생을 떨치지 못하는 동물 왕국에 성행하는 감성(感性)의 약점이다.   ‘Bonding, 유대감 형성’에도 큰 소리가 도움이 된다. 더 자세하게는, ‘re-bonding, 유대감 재형성’이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본 장면, 아파트에 강아지를 오래 혼자 있게 한 후 주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재회하는 순간의 감격이 떠오른다. 강아지가 항의를 제출하듯 큰 소리로 컹컹 짖어대고 끙끙 신음하며 주인에게 덤벼드는 모습이 애절하다.   아야! 하며 소리치는 순간은 본능적 현상이다. 예견된 고통이 아닌 부지부식간 나오는 소리. 좌절감에서 저절로 끙, 하며 터지는 신음도 마찬가지다.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인간 또한 감성 혹은 감각에 휘둘리는 강아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말에 소리치다, 외치다, 고함치다, 부르짖다, 아우성치다, 비명을 지르다, 환호성을 올리다 같이 큰 소리를 잘게 분류하듯이 영어에도 ‘yell, shout, clamor, exclaim, scream, roar’ 등등이 있다. 이들은 뉘앙스가 조금씩 다른 말로서, 표현 속에 숨어있는 감정 상태가 잘 구별되지 않고 같게 느껴지기 일쑤다.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를 때와 기뻐서 내지르는 탄성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아이들도 강아지도 얼른 알아차린다. 그중 미국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소리는 ‘scream’인데, 북구와 고대영어에서 기원한 날카롭고 새된 목소리를 의미했다. 우리 토박이말 ‘새되다’는 ‘목소리가 높고 날카롭다’는 뜻. 앙칼진 음성을 연상시키는 ‘scream’이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쓰인다.   우리 속어에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말이 있지. 서부영화에서 동네 사람들이 한밤중에 보안관실 앞에 횃불을 들고 몰려들어 범인을 당장 (불법으로) 교수형에 처하라고 소리치며 떠들어댈 때 용감하고 머리 좋은 보안관이 하늘을 향해 땅! 총을 쏘면 세상이 조용해지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보통 크기, 고운 말로 통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군중심리의 단면을.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소리 사실 코드그린 bonding 유대감 직원 마음

2024-07-23

[잠망경] 지구 들어 올리기

“내가 설 수 있는 단단한 자리와 지렛대를 주면 나는 지구를 움직일 수 있다, Give me a firm place to stand and a lever and I can move the Earth.”라고 말한 아르키메데스를 생각한다.   ‘내게 조용한 장소와 시간을 주면 나는 성격장애자를 치료할 수 있다’고 병동직원에게 나는 속삭인다. 건방지거나 건성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단,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와 나의 시간은 둘 다 충분히 길어야 한다는 점이 이슈다.   부모님 삼년상이 우리의 오랜 유교식 전통이지만 현대에는 전혀 지켜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일정 기간을 약정해 놓은 사회적 통념에는 정신과적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식이 부모를 잃은 트라우마의 심리적 아픔이 어느 정도 사라지는데 그 정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아동심리 발육의 타임라인은 많이다르지만 어른들이 어떤 큰 트라우마에서 회복하는 기간이 평균 3년 정도라는 통설이다. 시집살이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하는 속언도 있지 않은가.   3년이라는 모범답안이 정신치료에도 적용된다. 정신과 의사 또한 3년 동안 벙어리, 귀머거리가 되는 수가 많다. 한 사람의 손상과 결핍을 파악하는 충분한 이해력이 생기는 기간도, 환자가 완전 타인인 상담자에게 익숙해지는 시기도 그 정도 걸린다는 사연이다. 통계에 의하면 20세기 초반 프로이트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보람찬 정신분석을 받는 기간도 평균 3년 내지 5년이다.   정신분석의 목표는 우울증, 성격장애 같은 고통과 갈등의 완화, 자기 성찰, 대인관계의 개선, 어렵거나 힘든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정신적 자세 등등을 손꼽는다. 정신분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겸손하고 세속적인 소망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현실을 바꾸기 위하여 우선 자신을 바꿔야 한다는 각성과 지혜가 있는 사람들이다.   지구라도 움직일 수 있는 막강한 물리적 힘이 지렛대와 버팀목을 필요로 한다면, 한 사람의 됨됨이를 변화시키는 기본설정은 충분한 시간과 조용한 환경이다. 조용한 환경은 비교적 평온한 심리상태를 동반한다. 차분한 마음을 독려해주는 기법을 터득한 슬기로운 정신상담사를 만난 사람들은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병동환자들에게 정신분석을 시술하지 못하는 여건이라는 말이 백번 맞는 말이다. 그들은 대부분 그럴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옛날에 동료 수련의가 함부로 정신분석학적 발언을 남발했다가 환자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를 몇 번 보았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 듯싶지.   환자가 뇌까린다. “I’m doing my time here. - 나는 여기서 형(刑)을 살고 있습니다.” 그에게 부드러운 언성으로 응수한다. “여기서 더 좋은 사람이 되는 연습을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사람이 약간 달라져서 퇴원하는 겁니다.”   나는 연이어 말한다. “좋은 기타 연주자가 되고 싶다 했잖아요. 자주자주(time after time) 악기를 연습해야 하듯 마음 씀씀이를 연거푸 연습해야 좋은 사람이 됩니다. 거듭거듭 해서요. (Time and time again). 이 의미심장한 대화에 시간(time)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들어간다.   속이 더부룩할 때 활명수 한 병으로 뱃속이 금세 개운해진다. 육체적 증상은 앉은 자리에서 눈 녹듯 사라지기도 하지만, 사람 성격의 성장 과정은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기만성(大器晩成)! 큰 그릇일수록 더욱더 그렇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지구 정신분석학적 발언 정신과 의사 일정 기간

2024-07-09

[잠망경]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그룹테러피를 시작하면서 투덜대듯 말한다. 내가 시시때때로 혼자 궁금해하는 의문점이 하나 있다. 그룹에 우울증에 관하여 말하면 그룹멤버들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분노에 대하여 언급하면 노기를 띤다. 평화에 대하여 말하면 장내 분위기가 고요하다.   그룹을 시작할 때 내가 내세우는 우울증, 분노, 평화 따위는 하나의 화제(話題, 얘깃거리, 토픽)일 뿐인데 이것은 참 이상하지 않는가.   범죄를 화제로 삼으면 그룹멤버들이 범죄자가 되고 신을 언급하면 멤버들이 모두 신이 된다는 말인가. 그룹 리더가 최면술사인가. “그룹=그룹 토픽 자체”? 민중의 리더 역할을 하는 정치가는 최면술사인가.   언론을 ‘medium’의 복수, ‘media, 미디어, 매체’라 한다. 옷 안쪽에 찍혀 있는 ‘medium’이라는 표시는 옷의 크기가 중간 정도라는 뜻이다. ‘medium’에는 영매(靈媒), 무당이라는 의미도 있다.   매체(媒體), 영매(靈媒), 매파(媒婆) 같은 말에 나오는 ‘중매 媒’라는 한자어를 살펴보시라. ‘여자 女’와 ‘아무 某’가 이루는 합성어다. 중매는 ‘아무+여자’, 즉 여자라면 아무나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으로 당신은 작은 탄성을 지를 것이다.   TV, 라디오 방송, 신문, 유튜브 같은 언론 미디어가 영매 역할을 함으로써 대중을 홀리고 리드하는 사태를 상상한다. 그런 매체를 나 또한 구독하고 애독하고 시청하며 흠뻑 빠져 홀려 있는 상태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의 ‘큰 바위 얼굴’이 떠오른다. 주인공 ‘어니스트’가 평생을 바라보며 기다리며 흠모하다가 결국 자기 자신의 얼굴이 큰 바위 얼굴로 변모한다는 스토리. 이런 메커니즘을 정신분석에서 동일시(同一視, identification)라 부른다. 자신이 다른 사람이나 어떤 대상과 같다고 보는 멘탈메커니즘이다.   맹자 어머니가 맹자를 훌륭히 키우기 위하여 이사를 세 번 했다는 스토리에서 우리는 환경의 영향에 대하여 배운다. 순간적인 타인의 생각도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다. 감수성이 예민한 상태 혹은 자극의 종류에 따라 강하게 발생한다. 정신상담을 받다가 정신상담사의 언어습관과 사고방식을 닮아가는 현상도 너새니얼 호손의 어니스트처럼 ‘동일시’ 메커니즘이다. 내가 당신을 보는 순간 나는 당신이 된다.   대학 시절에 신동집(申瞳集: 1924~2003)의 시 ‘오렌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당신도 기억하겠지만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네 번째 행을 주목한다. 근 반백 년을 정신과를 하며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다가 내가 읽는 타인의 마음이 내 마음 또한 잘 읽는다는 사실을 두고두고 체험한다. 시인은 이 구절을 나중에 다시 한번 되풀이한다. -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똬리를 틀고 있다./ (후략)…”   그룹 리더와 멤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리더가 어떤 정서를 화제로 삼는 순간에 그 정서는 즉각 제조되어 감수성이 강한 멤버들에게 즉시 전달된다. 리더가 시치미를 뚝 떼고 침묵한다면? 그래도 그의 마음 상태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내 말을 믿어다오. 내가 위험한 상태일 때 오렌지도 위험한 상태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상태 마음 상태 그룹 리더 그룹 토픽

2024-06-25

[잠망경] 피자와 막대기

병동의 규칙을 언급하면 묵묵부답. 그러나 피자를 화제로 삼으면 모두의 표정이 환해지는 금요일 오후 그룹 세션이다. 우리는 왜 규칙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피자라면 금세 기분이 좋아지는가.   피자 냄새와 맛이 연상되는 순간 후각과 미각이 합쳐져서 감각적 본능을 강하게 자극하는 것이다. 리처드가 묻는다. 한국인들도 피자를 좋아합니까. 토핑으로 무엇을 얹어 먹습니까.   ‘pizza’는 ‘피쩌’라 발음하면 어쩐지 공격적으로 들린다. 경음을 피하고 ‘피자’, ‘자장면’이라 하면 맥없이 부드러운 기분이다. ‘noodle, 국수’, ‘chop suey, 잡채’ 같은 발음도 다분히 여성적이다.   납작한 빵을 뜻하는 히브리어 ‘pita’와 그리스어 ‘petta’는 ‘pizza’와 말뿌리가 같다. ‘피쩌’는 전인도유럽어의 쪼가리(bit) 또는 깨물다(bite)에서 유래했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그래서 ‘pizza’, 하면 은연중 공격적으로 들리는 게 아닐지 몰라.   병동규칙으로 화제를 되돌린다. 운전할 때 속도제한 규칙을 무시하면 어찌 되느냐. 교통사고가 일어납니다. 차선을 지키지 않고 깜박이도 켜지 않고 함부로 질주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샤워를 하고, 남의 방에 몰래 들어가지 말고, 기타 등등 병동규칙, ‘rule’을 잘 지켜야 한다.   ‘rule, 규칙’이라는 명사는 ‘regular, 규칙적인’이라는 형용사와 어원이 같다. 12세기경 고대 불어로 질서, 그리고 라틴어에서 ‘straight stick, 곧은 막대기’라는 뜻의 명사로 쓰였다. 이 컨셉을 현대언어로 풀어쓰면 ‘직설(直說)’에 해당한다.   ‘rule’은 동사로 ‘규칙을 강요하다’라는 의미였고 15세기에 들어서서 남들을 지휘, 지배한다는 뜻으로 변천했다. 심포니 지휘자가 춤추듯 휘두르는 지휘봉도 곧은 막대기다. 오케스트라 멤버들이 연주하는 소리의 강약과 호흡을 통솔하는 센스가 있는 지휘자가 바람직하지. 이 비유는 음악 외에 일국의 정치에도 적용된다. 전 국민을 지휘하는 통치자의 고민(苦悶)이 느껴진다. 쓸 苦. 답답할 悶.   환자를 다루는 능력과 기술이 미흡한 직원들이 고민하는 광경을 곧잘 목격한다. 나를 위시하여 완벽한 병동직원이 되는 것은 완벽한 통치자가 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다. 환자도 직원도 하나같이 고생하는 나날이 겹치기도 한다.   고민뿐만 아니라 고생(苦生)의 ‘고’ 또한 ‘쓸 苦’. 피자처럼 미각(味覺)적인 표현이다. 직역하면 ‘bitter life’인데 그런 말은 없고 ‘hard life’라는 관용어가 있다. 딱딱한 인생은 촉각(觸覺)의 차원이다. 우리는 인생을 맛보고 서구인들은 인생을 만진다는 차이점이 좀 재미있다. ‘재미’ 또한 자미(滋味)가 변한 미각적 발상이다.   한국 피자에 관심이 많은 ‘리차드’도 재미있는 이름이다. 원래 ‘Richard’는 ‘rich+hard’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였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rich’는 부유하다는 뜻 외에 강하다는 의미도 있다. 리차드는 세차고 딱딱하게 경직된 폭군처럼 강한 지배자라는 뜻으로 통했던 것이다.   ‘Richard’의 애칭은 ‘Dick.’ 소문자로 쓰면 일반명사가 되는데 ‘dick’은 음경이라는 품위 있는 말의 비속어로 쓰인다. 슬랭으로 ‘He is a dick’이라 하면 우리말로 ‘걔는 싸가지 없는 놈이야’라고 훌륭하게 번역할 수 있겠다. 어쩌다 참, ‘강력한 지배자’가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모욕적인 표현으로 변했는지, 어원학의 재미가 보통 재미가 아니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막대기 피자 한국 피자 rule 규칙 심포니 지휘자

2024-06-11

[잠망경] 네고

‘네고’는 참 이상한 말이다. ‘negotiation’의 처음 두 음절만 남기고 나머지는 싹 삭제된 콩글리시다. 미국인들이 ‘deal’이라는 일상어를 쓰는 데 반하여 우리는 굳이 라틴어에서 유래한 유식한 단어를 쓴다.   ‘니고시에이션’이라 발음하는 이 어려운 말을 사전은 ‘협상, 교섭, 절충, 협의’ 따위의 한자어로 육중하게 풀이한다. 물건값을 깎으려고 흥정하는 장면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가 없다. 클린네고, 케이블네고, 先네고, 네고王 같은 잡탕 어휘가 언어학자들을 골치 아프게 한다.     남들과 마음을 절충하는 과정을 그룹테러피의 주제로 삼는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심리적인 ‘deal’, 딜, 거래(去來)를 해야한다는 야무진 의견이 나온다. 나는 그 말에 집중한다. 거래는 갈 去, 올 來, 가고 온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금전 거래’가 머릿속에 얼핏 떠오른다.   상거래(商去來)만 거래가 아니다. 사전에는 ‘주고받음, 사고팖’ 외에도 ‘친분관계를 이루기 위하여 오고 감’이라 나와 있다. 서로 낯이 선 타인들 사이에 친분이 오고 가는 신기한 현상은 둘 앞에 가로 놓인 강을 건너는 튼튼한 다리의 쌍방통행을 전제로 한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와 딜이 깨지는 경우는 일방통행이 이유일 때가 많다.   당신과 내가 무심코 나누는 대화의 바닥에 네고 의식이 깔린다. 더 나아가서, 비언어적 의사소통에도 모종의 딜이 숨어있다. 동물들, 이를테면 두 강아지 사이에 순식간에 네고가 일어나는 것이다. 심지어 벽에 못을 박을 때조차 못, 장도리, 그리고 못을 때리는 힘 사이에 적절한 네고가 이루어져야 한다니까.   ‘deal’은 전인도유럽어에서 유래한 고대영어로 ‘나누다, 분배하다’라는 뜻이었다. 카지노 딜러가 노름꾼 앞으로 카드를 척척 나눠주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가. 이 짤막한 말은 당신이 믿기 힘들겠지만 14세기에 성교한다는 뜻으로도 쓰였다가 15세기에 들어서서 누구를 ‘대한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됐다.   우리는 누구나 남을 대한다. 대면(對面), 대화(對話), 또는 대결(對決)하면서. 1960년도 중반에 시작하여 일상어가 된 ‘big deal’은 우리말로도 그냥 ‘빅딜’이라 하지.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대인(對人)관계가 좋아야 빅딜이 자주 일어나듯이 사람이 먼저고 돈이 나중이다.   그룹테러피에서 좀 힘이 들 때가 있다. 유물론에서 유심론으로 화제 분위기를 바꾸려는 시도 때문이다. 어느새 나는 부득이 물건값을 깎는 차원을 벗어나서 사람이 사람과 소통하는 심리적 과정에 대하여 말한다. 그룹멤버들의 반응이 줄어들고 나는 무슨 강연을 하는 기분이 든다.   ‘negotiation, 네고’의 첫소리 ‘neg’는 ‘아니’라는 뜻. ‘negative’의 첫소리와 같다. (neg=not) 이 말은 전인도유럽어에서 ‘쉽지 않다, 한가롭지 않다’는 의미였단다. 세상 어떤 비즈니스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쉽거나 한가로울까나.   왜 네고라는 말을 끄집어냈나 하는 질문이 생긴다. 하다못해 ‘compromise, 타협’이라는 영국식 컨셉도 있지 않은가. 나중에 슬쩍 그 이유가 떠오른다. 한국말에 자주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타협’은 어딘지 꼰대스러운 데가 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의 유물론적 사고방식과 한국식 도전의식에 걸맞는 태도가 아닌 것 같다. 시대정신과 단어선택 사이에 네고가 가능하냐고 자신에게 물어본다.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네고 negotiation 네고 선네고 네고왕 네고 의식

2024-05-28

[잠망경] 꿈속의 대화

환자 열 대여섯을 앉혀 놓고 담론을 펼친다. 오늘은 ‘agitation, 동요(動搖)’에 대하여 얘기할까 하는데, 이 어려운 라틴어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아느냐. 이탈리아계 젊은이가 자신 있게 말한다. ‘acid indigestion, 위산과다’에서 왔습니다.   1980년대 뉴욕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 ‘agita’라는 슬랭을 쓰기 시작했다. 산(acid)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acido’의 사투리. 1990년 중반쯤 정신적 동요까지 포함해서 누구나 알아듣는 슬랭이 됐다 한다. 그러나 ‘agita’와 ‘agitation’는 스펠링이며 발음이 비슷하다는 데서 그치고 만다. ‘agitation’는 워낙 ‘흔들림’이라는 뜻이었단다.   ‘agitation’의 뜻은 현대어에서 크게 셋으로 나뉜다. ①정신적으로 불안하거나 흥분한 상태 ②정치적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행동 ③액체를 섞어서 심하게 흔드는 행동.   일단 ‘agitation’을 동요라고 했지만  요동(搖動) 혹은 요동질이라 번역하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병동에서 환자와 직원이 겪는 요동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①육체적 요동 - 다른 환자나 직원을 때리거나, 이물질을 삼키거나, 팔목에 상처를 내고 벽에 머리를 부딪치는 자해행위, 기물파손 등 소란을 일으키는 경우.   ②언어적 요동 - 질문이 있다며 손을 든 후 질문은 하지 않고 일장연설을 하는 행동. 그만하라고 종용하면 금방 끝내겠다 해 놓고 그러지 않는 작태. 다른 환자는 또 다른 수법을 쓴다. 기차 화통(火筒)을 삶아 먹었는지 견딜 수 없이 큰 목소리로 영화, ‘스타 워즈, 별들의 전쟁’에 나오는 짧은 대사를 주절댄다. 결과? 물리적 고통이 아닌 감각적 고통.   ③두뇌적 요동 -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 두뇌가 부글부글 작동하는 상태. 직접 남을 괴롭히지는 않는다. 이 부류에 속하는 환자는 왕성한 환상과 환각 상태를 애써 감추면서 겉으로는 시치미를 뚝 떼고 처신하려 노력한다. 이들의 특징은 남들 앞에서 독백을 가끔 혹은 자주 하는 데 있다. 여차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와 심한 논쟁이 터지기도 한다.     ③은 ‘Internal world, 내면세계’와 ‘external reality, 외부현실’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 큰 이유라고 해석한다. 꿈속에서 누구와 격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잠꼬대하는 것이 좋은 예라고 덧붙인다.   그룹테라피가 끝난 후 내게 두뇌적 요동현상이 일어난다. 우리의 모든 대화가 꿈속의 대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닐까. 나는 내 내면세계를 서술하는 독백을 삼가는 데 익숙할 뿐, 다른 사람 앞에서 잠꼬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꿈속 대화 두뇌적 요동현상 agitation 동요 육체적 요동

2024-05-20

[잠망경] 꿈속의 대화

나와 크게 다름없어 보이는 환자 열 대여섯을 앉혀 놓고 담론을 펼친다. 오늘은 ‘agitation, 동요(動搖)’에 대하여 얘기할까 하는데, 이 어려운 라틴어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아느냐. 이태리 태생 젊은이가 자신 있게 말한다. ‘acid indigestion, 위산과다’에서 왔습니다.   1980년대 뉴욕 이태리 이민자들이 ‘agita’라는 슬랭을 쓰기 시작했다. 산(acid)을 뜻하는 이태리어 ‘acido’의 사투리. 1990년 중반쯤 정신적 동요까지 포함해서 누구나 알아듣는 슬랭이 됐다 한다. 그러나 ‘agita’와 ‘agitation’는 스펠링이며 발음이 비슷하다는 데서 그치고 만다. ‘agitation’는 워낙 ‘흔들림’이라는 뜻이었단다.   ‘agitation’의 뜻은 현대어에서 크게 셋으로 나뉜다. ①정신적으로 불안하거나 흥분한 상태 ②정치적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행동(예: 유튜브로 느끼는 요즘 한국 정치 판국) ③액체를 섞어서 심하게 흔드는 행동(예: 바텐더가 손님 앞에서 폼나게 과시하는 칵테일 셰이킹).   일단 ‘agitation’을 동요(動搖)라 처음에 옮겼지만 요동(搖動) 혹은 요동질이라 번역하면 어떨까 싶은데. 아니면 눈 감고 아웅 하는 식으로, ‘지x’이라 할까나. 어쨌거나 위에 열거한 ①②는 올데갈데없이 ‘지엑스’스럽지만③은 절대 그렇지 않다.   병동에서 환자와 직원이 한결같이 겪는 요동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①육체적 요동 - 다른 환자나 직원을 애매한 이유로 때리거나, 못이나 배터리 같은 이물질을 삼키거나, 모종의 수법으로 팔목에 상처를 내는, 또는 벽에 머리를 쾅쾅 부딪치는 자해행위, 몸을 날려 ‘exit’ 사인, CCTV 카메라를 떼어내거나 공중전화를 부수는 기물파손 등등 육체를 사용해서 물리적 소란을 일으키는 경우.   ②언어적 요동 - 아침 조회 시간에 질문이 있다며 손을 든 후 질문은 하지 않고 일장연설을 하는 행동. 모두 고만하라고 거듭거듭 종용하면 금방 끝내겠다 해 놓고 그러지 않는 작태. 다른 환자는 또 다른 수법을 쓴다. 옛날 우리 슬랭으로, 기차 화통(火筒)을 삶아 먹었는지견딜 수 없이 큰 목소리로 영화, ‘Star Wars, 별들의 전쟁’에 나오는 짧은 대사를 주절대는 본때를 보여준다. 결과? 물리적 고통이 아닌 감각적 고통.   ③두뇌적 요동 -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 두뇌가 부글부글 작동하는 상태. ①②처럼 직접적으로 남들을 괴롭히지는 않는다. 이 부류에 속하는 환자는 왕성한 환상과 환각 상태를 애써 감추면서 겉으로는 시치미를 뚝 떼고 처신하려 노력한다. 이들의 특징은 남들 앞에서 독백을 가끔 혹은 자주 하는 데 있다. 여차직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와 심한 논쟁이 터지기도 한다. 관광객티를 내며 맨해튼에 가보시라. 당신은 혼잣말을 크게 뇌까리며 걸어가는 노숙자를 여럿 만날 것이다.   ③을 좀 공들여 설명한다. ‘Internal world, 내면세계’와 ‘external reality, 외부현실’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 큰 이유라고 해석한다. 꿈속에서 누구와 격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잠꼬대하는 것이 좋은 예라고 덧붙인다.   그룹테러피가 끝난 후 내게 두뇌적 요동현상이 일어난다. 우리의 모든 대화가 꿈속의 대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닐까. 나는 남에게 내 내면세계를 서술하는 독백을 삼가는 데 익숙할 뿐, 다른 사람 앞에서 잠꼬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꿈속 대화 두뇌적 요동현상 agitation 동요 육체적 요동

2024-05-14

[잠망경] 환자와 함께 놀기

스무 살 초반, 백인 청년 피터는 완전 트러블 메이커다.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거나 당나귀식 발길질을 해서 큰 구멍을 낸다. 직원을 때리고 손톱으로 팔을 긁어 자해를 하기도 한다.   피터는 공격성이 강하고 충동심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기질을 타고났다. 사회는 성품이 유별난 아이에게 정신과 병명을 부여한다. 아이가 저지르는 비행(非行)을 약으로 고치려 하거나 심리치료사에게 떠맡긴다. 21세기 부모들은 자기네들 할 일이 벅차고 바빠서 자식들에게 신경을 쓸 시간이 없는 것이다.   자기가 뗑깡을 부리면 병동직원들이 쩔쩔매는 상황을 대놓고 즐기는 피터는 솔직히 좀 악질이다. 나는 곧잘 그의 아버지 역할을 맡는다.   정신과 의사는 자신의 개성을 감추지 않으면서 편안한 자세로 환자를 대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쩔쩔매서는 안 된다. 자식에게 쩔쩔매는 부모는 진정한 의미에서 부모가 아니다.   엊그제 넷플릭스에서 앤터니 홉킨스가 열연한, ‘The Last Session of Freud (프로이트의 마지막 세션)’를 보았다. 유신론자(환자)와 무신론자(프로이트)의 논쟁이 치열하다. 예나 지금이나 프로이트, 도스토옙스키, 니체 같은 인문학적 천재를 나는 몸서리치게 좋아한다.   프로이트의 6남매 중 막내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 1885~1982)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정신분석학, 특히 아동 정신분석에 크게 공헌했다. 1939년 9월 23일, 수술을 34번 받은 구강암의 통증을 안락사로 마감하는 아버지 곁을 끝까지 굳게 지킨다. 아버지를 닮아서 끈질기고 현학적인 안나 프로이트!   아버지가 죽은 후 안나 프로이트는 아동 정신분석 분야에 두각을 나타낸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 1882~1960)과 극심한 대립각을 세웠다. 영국의 정신분석계는 이내 프로이트파, 클라인파, 중도파로 갈라진다. 클라인은 ‘Object Relations Theory, 대상관계 이론’의 창시자로 군림했다. 나 또한 평생을 대상관계 이론을 추구해 왔다.     멜라니 클라인은 6세 미만 어린아이를 상대로 ‘play therapy, 놀이치료’에 심취했다. 성인들의 몰두하는 ‘자유연상’을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장면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반면에, 안나 프로이트는 ‘놀이치료’를 통하여 어린아이의 내면세계에 발을 디밀어서 그들을 교육적 차원으로 유도하려 했다. 이때 놀이치료의 숨은 목적은 현실적응을 위한 ‘참교육’이다.   쏜살같이 일어나는 아이들의 생물학적, 사회학적 차원의 성숙과정에서 엄마와 아버지는 아들, 딸과 얼마만큼 같이 놀아주는가. 명문대학에 입학하는 열망으로 일찌감치 영재교육에 임하는 학교 선생님들은 얼마만큼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가. ‘play’는 ‘playful’ 한 무드, 즉 좀 까부는 듯 밝은 기분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 억지로 노는 것은 노동에 지나지 않는다.   환자에게 훈시하는 직원을 본다. 설교다. 환자들은 대항한다. 그들 사이에 투쟁의식이 싹튼다. 이 전투에서 늘 환자가 이긴다. 환자는 어떻게 해서라도 직원을 이길 궁리를 풀타임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원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피터와 나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언어에 대한 민감성. 둘째로는 그로테스크한 유머 감각을 발휘하면서 시시때때로 까분다는 점. 게다가 나는 남에게 훈시하고 설교하는 것을 몹시 꺼리는 체질이다. 이런 면에서 피터는 억세게 운이 좋은 놈이다. 요즘 거의 매일 피터와 함께 놀면서 지내는 기분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환자 프로이트파 클라인파 프로이트 도스토옙스키 멜라니 클라인

2024-04-30

[잠망경] 레드 헬리콥터의 친절

2024년 4월 9일 이륙한 ‘red helicopter’를 좀 화급하게 읽는다. 저자 한국인 2세 ‘James Rhee’는 수년 전 작고한 내 의대 5년 선배 이유찬 님의 아들이다. 올 52세.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를 하던 그는 매각 위기에 처한 흑인 여성들을 위한 의류산업체 ‘Ashley Stewart’를 기적적으로 구출하여 2013년부터 2022년에 걸쳐 성공적인 ‘CEO’로 금융계의 신선한 토픽으로 부상한다.   그 후 제임스는 자신이 5살 때 친구 아버지에게서 선물 받은 ‘red helicopter’의 기억을 되살려 미국의 자본주의에 ‘combination of kindness and math, 친절과 수학의 콤비네이션’ 철학을 유입하는 무브먼트의 창시자가 된다. 유명 대학과 금융기관에 소환되어 새로운 슬로건을 소신껏 피력한다. 맨해튼에서 2024년 4월 12일 개최된 ‘Korean American Family Service Center(KAFSC)’ 35회 기념 갈라에서 북투어를 열었다.   뉴욕 롱아일랜드 어린 시절. 엄마와 사별한 같은 또래 친구는 자식들 4명을 잘 보살피지 못하는 홀아버지로 인하여 도시락 없이 유치원에 온다. 제임스는 매일 자기 도시락을 그와 나누어 먹는다. 어느 날 그 친구 아버지가 조그만 장난감, 빨간 헬리콥터를 제임스에게 전해준다.   그는 영문도 모르면서 선물을 받고 나중에 그것이 고마움의 징표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장난감 헬리콥터가 어른이 된 그의 마음의 원동력이 되어 금융계에 수직으로 상승하는 효험을 발휘한다.   ‘kind, 친절한’이라는 말에 대하여 생각한다. 前 독일어로 가족이라는 뜻이었다. 영어의 ‘kindergarten, 유치원’은 스펠링 하나 바꾸지 않고 쓰는 현대 독일어로 ‘어린아이들 정원’이라는 의미다. 당신이 병원 입원 수속 시에 무심코 기재하는 ‘next of kin, 親族’의 ‘kin’도 가족을 뜻한다.   그러나 당신은 친절(親切)이라는 한자어를 잘 살펴보기를 바란다. ‘친할’ 親, ‘끊을’ 切. 친하게 절단하다니?   ‘친절’의 어원은 옛날 일본 막부시절, 각 城을 중심으로 성주들끼리 전쟁이 잦았던 시절로 돌아간다. 당시 사무라이들은 전쟁에 졌을 때 할복자살을 함으로써 패배의 책임을 지는 습관이 있었다 한다.   그때 죽음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하여 가까운 심복이나 동료가 칼로 순식간에 목을 치는 행위를 친절(親切)이라 불렀다. (강원신문 2012년 9월 29일) ‘일곱 七’, ‘칼 刀’. 친절에는 칼 일곱 개가 숨어있다.   제임스는 금전 위주의 비인간적 태도를 경계한다. 호의적인 마음가짐이 친절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상대의 마인드셋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리는 사람에게 가식적인 친절은 통하지 않는다. 날조된 친절은 위조지폐처럼 금방 들통이 나는 법이거늘. 늘 마음이 물질을 지배한다. ‘말로 천 냥 빚 갚는다’ 하지 않았던가.   정신치료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고 보아야 한다. 일부 정신분석가들은 인간적 차원에서, 솔직히 자신의 능력이 지닌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성격장애자는 애당초 정신치료를 맡지 않기를 격려하지만, 웬만큼 숙련된 치료사들은 환자들에게 호감 어린 친절을 보여주는 심성을 불철주야로 연마하고 있다.   제임스 리가 주창하는 호의와 친절과 기쁨에 각도를 맞추는 수많은 ‘CEO’들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정신상담사가 환자들에게 호의와 친절과 열정을 부단하게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헬리콥터 레드 math 친절 장난감 헬리콥터 kindergarten 유치원

202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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