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잠망경] 레드 헬리콥터의 친절

2024년 4월 9일 이륙한 ‘red helicopter’를 좀 화급하게 읽는다. 저자 한국인 2세 ‘James Rhee’는 수년 전 작고한 내 의대 5년 선배 이유찬 님의 아들이다. 올 52세.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를 하던 그는 매각 위기에 처한 흑인 여성들을 위한 의류산업체 ‘Ashley Stewart’를 기적적으로 구출하여 2013년부터 2022년에 걸쳐 성공적인 ‘CEO’로 금융계의 신선한 토픽으로 부상한다.   그 후 제임스는 자신이 5살 때 친구 아버지에게서 선물 받은 ‘red helicopter’의 기억을 되살려 미국의 자본주의에 ‘combination of kindness and math, 친절과 수학의 콤비네이션’ 철학을 유입하는 무브먼트의 창시자가 된다. 유명 대학과 금융기관에 소환되어 새로운 슬로건을 소신껏 피력한다. 맨해튼에서 2024년 4월 12일 개최된 ‘Korean American Family Service Center(KAFSC)’ 35회 기념 갈라에서 북투어를 열었다.   뉴욕 롱아일랜드 어린 시절. 엄마와 사별한 같은 또래 친구는 자식들 4명을 잘 보살피지 못하는 홀아버지로 인하여 도시락 없이 유치원에 온다. 제임스는 매일 자기 도시락을 그와 나누어 먹는다. 어느 날 그 친구 아버지가 조그만 장난감, 빨간 헬리콥터를 제임스에게 전해준다.   그는 영문도 모르면서 선물을 받고 나중에 그것이 고마움의 징표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장난감 헬리콥터가 어른이 된 그의 마음의 원동력이 되어 금융계에 수직으로 상승하는 효험을 발휘한다.   ‘kind, 친절한’이라는 말에 대하여 생각한다. 前 독일어로 가족이라는 뜻이었다. 영어의 ‘kindergarten, 유치원’은 스펠링 하나 바꾸지 않고 쓰는 현대 독일어로 ‘어린아이들 정원’이라는 의미다. 당신이 병원 입원 수속 시에 무심코 기재하는 ‘next of kin, 親族’의 ‘kin’도 가족을 뜻한다.   그러나 당신은 친절(親切)이라는 한자어를 잘 살펴보기를 바란다. ‘친할’ 親, ‘끊을’ 切. 친하게 절단하다니?   ‘친절’의 어원은 옛날 일본 막부시절, 각 城을 중심으로 성주들끼리 전쟁이 잦았던 시절로 돌아간다. 당시 사무라이들은 전쟁에 졌을 때 할복자살을 함으로써 패배의 책임을 지는 습관이 있었다 한다.   그때 죽음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하여 가까운 심복이나 동료가 칼로 순식간에 목을 치는 행위를 친절(親切)이라 불렀다. (강원신문 2012년 9월 29일) ‘일곱 七’, ‘칼 刀’. 친절에는 칼 일곱 개가 숨어있다.   제임스는 금전 위주의 비인간적 태도를 경계한다. 호의적인 마음가짐이 친절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상대의 마인드셋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리는 사람에게 가식적인 친절은 통하지 않는다. 날조된 친절은 위조지폐처럼 금방 들통이 나는 법이거늘. 늘 마음이 물질을 지배한다. ‘말로 천 냥 빚 갚는다’ 하지 않았던가.   정신치료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고 보아야 한다. 일부 정신분석가들은 인간적 차원에서, 솔직히 자신의 능력이 지닌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성격장애자는 애당초 정신치료를 맡지 않기를 격려하지만, 웬만큼 숙련된 치료사들은 환자들에게 호감 어린 친절을 보여주는 심성을 불철주야로 연마하고 있다.   제임스 리가 주창하는 호의와 친절과 기쁨에 각도를 맞추는 수많은 ‘CEO’들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정신상담사가 환자들에게 호의와 친절과 열정을 부단하게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헬리콥터 레드 math 친절 장난감 헬리콥터 kindergarten 유치원

2024-04-16

[잠망경] 왜 너 자신을 빼놓느냐

스티브는 전형적인 정신질환 증상이 전혀 없는 40대 중반의 백인이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고 변덕이 죽 끓듯 하면서 때로는 고집불통이고 걸핏하면 화를 낸다. 화가 치밀면 고함을 지르고 벽을 주먹으로 쾅쾅 때리는 버릇이 있다.   그는 수년 전에 저처럼 성미가 불같은 걸프렌드와 한동안 같이 살았다. 그들은 언쟁이 잦았다. 여자가 집을 나가고 그는 심한 상실감에 빠진다. 이윽고 상실감이 분노로 변하면서 모든 세상 사람을 원망하고 저주한다.   …스티브야, 너는 도대체가 왜 자기 자신은 제쳐놓고 남들에게만 신경을 쓰면서 그토록 불행한 삶을 사느냐. - 내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악의를 품고 나를 못살게 굴기 때문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러는 겁니다.   …자신은 남에게 실수로라도 못되게 군적이 없느냐. - 나는 되받아치기만 할 뿐이지 내 쪽에서 먼저 남을 해코지하는 법이 절대로 없습니다. …왜 그리도 사소한 일로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고 욕설까지 퍼붓는지. - 남들이 나를 그렇게 만듭니다. …살다 보면 어둡고 짜증스러운 기분이나 나쁜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을까. - 내 마음은 항상 좋은 생각들이 넘쳐흐르기 때문에 나쁜 생각이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범죄도 많이 저지른 스티브에게 나르시시즘적 ‘반사회적 성격장애’라는 진단명을 붙이면 어떨까. Psychopath? 잘 생각해보면, 상습적 거짓말쟁이와 많은 범죄경력으로 사회에 악을 끼치는 사람을 직설적으로 ‘사기꾼’, ‘범죄자’라 부르는 대신에 굳이 영어로 바꾸어서 ‘사이코패스’라 부르는 우리의 말 습관이 좀 이상한 데가 있지 않은가.   우리는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가슴에 품고 산다. 속마음이 100% 빛으로 충만하거나 100% 어두움으로 덮인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신의 마음 또한 인류를 구원하려는 의도와 어두운 악마와의 투쟁의식이 공존한다고 보는데. 차제에 나는 ‘light(빛)=good’, 그리고 ‘dark(어둠)=bad’라는 등식을 설정하는 양분법을 내세운다.   스티브는 자신의 내면적 어둠을 감당하고 소화하는 원숙한 성격이 아니다. 그는 과음 후 위 내용물을 토해내듯 자신의 ‘bad’를 토해낸다. 남들을 일종의 용기(容器)로 보는 것이랄지. 타인의 실용가치를 착취하거나 자신을 보호하는 용구로 사용한다. 자신의 가상적 청결을 위하여 남들을 불결한 존재로 부각한다. 나는 깨끗한 주체이고 남들은 더러운 ‘대상’이다. 한국 정치계에서는 이것을 ‘내로남불’이라 지칭하지.   ‘대상관계 이론, Object Relations Theory’를 나는 추구한다. 정신분석에서는 ‘다른 사람’을 ‘대상’이라 부른다. 우리의 마음은 늘 과거와 현재를 누비면서 남들과 연결돼 있다. 스티브를 무인도에 떨어뜨려 놓으면 그 개 같은 성질이 사그라질 것임이 분명하다. 뗑깡을 부릴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성질 더러운 사내놈은 군대에 갔다 오면 심성이 바로 잡힌다는 말이 있다. 영국에서 발표된 논문에서도 같은 결론을 내린다. (1980) 무인도와는 반대로 철통 같은 규율과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원칙이 안하무인격의 무질서를 바로잡아 준다는 이론이다. 약은 일시적 반창고 역할에서 그칠 뿐 성격장애를 고치지 못한다.   …스티브야, 남들이 널 못살게 구는 이유와 구실을 주지 않는 게 어떠냐. - 말이 쉽지, 어디 그게 가능합니까. 내게 이래라저래라 해야 아무 소용이 없어요. 날 치료하지 말고 내 주변인들을 치료하세요. …글쎄,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반사회적 성격장애 규율과 상명하복 대상관계 이론

2024-04-02

[잠망경] 떠버리 칼로스

폐쇄 병동에서그룹테러피를 하다 보면 혼자서만 떠들어대는 환자가 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칼로스가 매양 그 역할을 담당한다. 그의 별명은 ‘떠버리(loudmouth)’다.   횡설수설하는 그에게 다른 환자 왈, “너 말 좀 고만할 수 없냐. 침묵이 금이라는 걸 모르냐?”  내가 슬쩍 끼어든다. “야, 도대체 침묵이 금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이건 배려심 많은 사람이 조곤조곤 심금을 털어놓는 그런 세련된 그룹테러피가 결코 아니다. 잠시 내가 방심을 하는 순간에 군중을 지배하는 의식의 흐름은 도떼기시장처럼 엉망진창이 된다. 질서를 유지하는 내 그룹 리더십이 더없이 망가진다. 나는 언어의 교통순경이다.   금이 은보다 더 비쌉니다. - 은이 뭐가 나쁘길래. - 은도 괜찮습니다. 내가 얼른 꿰맞춘다. - 잘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얘기하면 말이 길어지지. 말이 길어지면 혼동이 생기고 오해를 불러일으킨단다. 우리는 혼동을 열나게 싫어하잖아. 그래서 침묵이 떠들어대는 것보다 좋다는 거다, 알겠느냐. - 그렇다면 말을 짧고 분명히 하면 됩니까.   언어의 교통순경이 초등학교 선생으로 변신한다. ‘Doctor’의 어원이 라틴어로 ‘가르치다’라는 뜻이었어. 우리말로도 의사의 ‘사’는 스승 師. 변호사의 ‘사’는 선비 士. ‘의사 선생님’은 저절로 나오지만 ‘변호사 선생님’은 입에 붙지 않지.   시인, 수필가, 소설가들에게 침묵이 금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자칫 작품활동을 중단하라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에. 화가에게 그림을 그리지 말라는 거나 다름없다. 변호사는 자꾸만 떠들어야 해. 뭐? 정치가들은?   그룹 세션 중에 끄덕끄덕 졸거나 허공을 응시하며 경미한 뇌사 증세를 보이는 환자들보다 칼로스에 인간적으로 정이 간다. 헤밍웨이 스타일로 말을 짧게 하면 되겠다는 환자에게 경외감이 솟는다.   찰스 슐츠가 그의 만화에 탄생시킨 찰리 브라운을 당신을 기억할 것이다. 항상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만 치는 금발의 슈로더를 흠모하는 수다쟁이 루시가 노점 정신상담소를 차린다. 1959년 시세로 한 건당 5센트. 루시도 칼로스처럼 말이 많다는 소문이다.   말 못하는 강아지 스누피가 루시를 찾아온다. 스누피는 말이 없다. 루시가 혼잣말로 뇌까린다. - “What can you do when the patient doesn’t say anything? - 환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는 어쩌나요?”   내가 루시에게 말한다. 말 못하는 아기에게 엄마가 자꾸 말을 해야 아기가 말하는 법을 배운단다. 언어 능력이 달리는 환자에게 의사가 연거푸 떠들어야 돼. 스누피에게 거듭거듭 애정 어린 말을 해주거라.   논리의 비약을 하면서 나 자신이 루시가 된다. 그리고 루시처럼 황당한 질문을 던진다. - 언변이 딸리는 신도가 신과의 의사소통을 어찌해야 하나요. 신의 리더십 스킬은 어떤가요. 신도 침묵이 금이라 생각하나요.   칼로스가 내게 이렇게 말할 것 같다. - 신과 소통하고 싶으면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세요. 기도를! - 칼로스야, 나도 스누피처럼 비언어적이란다. 언어의 ‘유아(infant)’상태야. ‘infant’는 라틴어로 말을 못한다는 뜻이었단다. 말을 못하는데 어떻게 기도하느냐. 말 잘하는 엄마가 말을 해야지, 아기가 어떻게 말을 하니.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떠버리 칼로스 떠버리 칼로스 루시도 칼로스 변호사 선생님

2024-03-20

[잠망경] 자극 과잉시대

하루에도 몇 번씩 병원 곳곳 확성기에서 정신과 응급상황을 외치는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숨 가쁘게 “코드 그린!” 소리친 후 병동 번호를 알린다. 평온한 목소리로 전해주면 안 될까. 하기야 그러면 아무도 급히 반응하지 않을지도 몰라.   꽃을 뜯어먹으려는 사슴이 앞뜰을 침범하는 순간 “어이!” 하며 곱게 의사를 전달하면 싹 무시당한다. “야!” 하고 고함을 질러야 후다닥 도망간다. 사슴도 정신병원 의사들도 경미한 자극에는 외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세상이다.   ‘sensory overload’, 하면 얼른 귀에 들어오는 말을 놓고 사전은 감각과부하(感覺過負荷)라 묵직하게 해설한다. 참 뻑적지근한 한자어다. 자극이 지나치면 금세 접수할 수 있지만 낮은 목소리는 신경계통에 등록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약물의 복용량도 마찬가지. 과량은 극심한 부작용을 일으키고 소량은 무효하다. 생물체는 사슴이건 사람이건 늘 예민한 상태를 넘나든다.   세포는 생존을 위하여 세포막으로 외부 물질을 차단한다. 우리 몸을 감싸고 보호하는 피부, 도둑의 접근을 사전에 방지하는 집의 담과 벽, 자외선을 막아내는 선글라스도 같은 이치. 또 있다. 심성이 비정상적으로 예민한 자폐증 환자의 심리적 폐쇄 상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선, 기타 등등, 예를 들자면 부지기수다.   외부자극은 그렇다고 치자. 내부자극은 어쩔 것인가. 아무리 잠을 청해도 말똥말똥한 정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저런 생각들은 어떤가. 환자들이 세션 도중에 고막을 울리는 환청 증세를 어떡하겠는가. 한 정당(政黨)을 밖에서 치고 들어오는 외부자극도 벅찬 실정에 내부적 갈등이 불철주야 일으키는 자극 과잉, 소위, 당의 내부가 ‘찢어지는’ 현상을 무슨 수로 대처할 것이냐.   2024년 3월 16일 오하이오주 한 국제공항 선거유세에 참석한 도널드 트럼프 왈, “내가 낙선되면 나라가 피바다(bloodbath)가 될 것이다”라 했다는 기사를 읽는다. ‘피바다’는 북한이 남한을 향해서 곧잘 쓰던 말이라서 귀에 익숙해진 아주 자극적인 표현이다.   ‘몹시 슬프고 분하여 나는 눈물’이라고 사전이 풀이하는 ‘피눈물’도 있다. 한국 엄마들은 아이를 키울 때 ‘피땀’을 흘려 키운다. 핏빛 노을! 갓난아기를 ‘핏덩어리’라 일컫는 말 습관. 아무래도 우리는 피를 좋아하는 족속인 것 같다.   오랜 세월 동안 문명의 혜택이 잉태해 놓은 부작용, 이를테면, 과속으로 질주하는 컴퓨터의 작동 장애, 도로공사 굴착기의 소음, 낙엽 치우는 장비가 뇌를 뒤흔드는 굉음, 앰뷸런스의 경적, 와이파이 접속이 불량한 스마트폰을 입에 대고 목청을 높이기, 등등, 과잉자극에 시달리다가 21세기 지구촌 인류의 중추신경에 굳은살이 박힌 것은 아닌지 몰라요.   ‘Chinese water torture’이라는 말이 있다. ‘이마에 물을 떨어뜨려 정신이 돌게 하는 고문’이라는 뜻. 그 유래에 대하여 위키피디아에 소상하게 나와 있다. 뉴욕주 웨스트체스터 카운티 오시닝(Ossining)의 ‘Sing Sing Prison’에서 1860년에 찍어 놓은 사진이 섬찟하다. 사람 이마에 차가운 물방울을 불규칙적으로 오래 떨어뜨려 환청, 망상, 현실감각 상실을 일으킨다는 기록이다.   이 그로테스크한 표현은 낙숫물이 돌을 뚫는다는 뜻의 사자성어, 수적천석(水滴穿石)과 연관을 맺고 있다. 돌은 뚫릴지언정 사람처럼 광기를 일으키지 않는다. 물방울 같은 경미한 자극에도 홀까닥 넋이 빠지는 호모사피엔스에게 달려드는 과잉자극의 끝은 어디인가.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과잉시대 자극 자극 과잉 사슴도 정신병원 정신과 응급상황

2024-03-19

[잠망경] 우리는 왜 굿모닝을 외치는가

이른 아침, 병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어느새 심리학 인턴으로 보이는 금발 여자가 옆에 서 있다. 나는 얼떨결에 ‘굿모닝’ 하며 소리친다. 그녀는 움찔하는 기색이다.   출근길은 험악한 날씨였다. 낯선 사람에게 하는 짧은 탄성, ‘Good morning!’은 상대에게 불특정적 호감을 전달하려는 예식이다. 웬만한 페북의 엄지척에 비하여 좀 무성의한 심리상태라 할 수 있다.   옥스퍼드 사전은 ‘good day’가 13세기 말, ‘good morning’이 15세기 중엽부터 쓰이기 시작했다고 기록한다. 불어 ‘bonjour’, 이탈리아어 ‘bonjourno’, 스페인어 ‘buenos dias’에서는 ‘아침’보다 ‘하루’가 압도적이다. ‘Have a good day!’는 백화점 점원이 계산을 다 마쳤을 때 손님에게 하는 말이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인사로 던지는 말 중에 ‘헬로’는 어떤가. 때는 바야흐로 1848년, 서부 시대 때 카우보이들이 시작한 ‘hello’는 ‘소리 지르다’라는 뜻의 ‘holler’와 말뿌리가 같다. ‘Give me a holler!’는 남부식 표현으로 전화를 걸어달라거나 소리쳐 알려달라는 뜻이다.   ‘hello’는 20세기 이후 ‘hi’로 그리고 요즘 부쩍 자주 쓰이는 ‘hey’로 변천하는 중이다. 가장 정중한 인사말은 누가 뭐래도 ‘헬로’다. 미국에 전화가 발명된 직후에 전화 교환수를 ‘hello girls’라 불렀지. 맞다 맞다. 얼굴을 모르는 상대방에게는 정중한 언사가 최선이다.   우리가 낯선 사람에게 호감을 전하고 싶어하는 심층 심리는 무엇인가. 구글에게 물어본다. ‘말’로 소리 내는 굿모닝 말고, ‘텍스트’로 SNS에서 곧잘 쓰이는 ‘Good morning!’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이를테면, 아침마다 SNS를 통하여 남자가 여자에게 굿모닝! 하며 텍스트를 보내는 행동을 대부분 여자는 이성 간의 관심 표시로 치부한다는 식이다. ‘polite expression of interest, 점잖은 관심 표시’라는 구절이 눈길을 끈다.   반대로 황당한 논리의 비약을 일으키는 소견도 서슴없이 나온다. 옛날에 할머니가 내 여동생들에게 “남자들은 다 개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가 굿모닝하고 소리쳤을 때 그 금발 여자가 움찔했던 것이 혹시 나를 개로 착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으하하.             아니지. 결코 아니다. 궂은 날씨에 평소보다 늦게 병원에 도착한 짜증스런 기분이 목소리에 묻어난 것이라는 추측이다. 나는 낯선 외국인으로서 그녀를 안심시켜 주기 위하여 별로 좋은 아침도 아닌 아침을 좋다고 했다. 내 호감 어린 빈말이 아니라 그녀의 불안감이 이슈였다.   우리는 어색한 분위기를 감추려고 ‘small talk(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화제의 본질을 떠나서 시시껄렁한 사설을 늘어놓는 ‘bullshit, 헛소리’도 한다. ‘small talk’가 잘못 빠지면 ‘bullshit’이 되는 법이려니. 요즈음 한국을 뒤흔드는 헛소리에 빼어난 정치인 몇몇이 떠오른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polite’는 ‘polished(윤이 나는, 세련된)’와 어원이 같다. 성품이 빤빤하고 유들유들하다는 뜻의 ‘빤질빤질하다’는 말에 근접하는 의미다. SNS의 여자들이 남자에게서 굿모닝 텍스트를 받고 일으키는 반응 중에서 “점잖은 개가 부뚜막에” 올라가는 환상과 내가 무척 좋아하던 옛날 할머니 모습이 겹쳐지는 순간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굿모닝 굿모닝 텍스트 good morning bullshit 헛소리

2024-03-05

[잠망경] 떠버리 칼로스

폐쇄 병동에서 그룹테러피를 하다 보면 혼자서만 떠들어대는 환자가 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칼로스가 매양 그 역할을 담당한다. 그의 별명은 ‘loudmouth, 떠버리’다.   횡설수설하는 그에게 다른 환자 왈, “너 말 좀 고만할 수 없냐. 침묵이 금이라는 걸 모르냐?” - 내가 슬쩍 끼어든다. “야, 도대체 침묵이 금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참, 영어 속담에 ‘Speech is silver, silence is golden’이라는 말이 있지.     이건 배려심 많은 사람이 조곤조곤 심금을 털어놓는 그런 세련된 그룹테러피가 결코 아니다. 잠시 내가 방심을 하는 순간에 군중을 지배하는 의식의 흐름은 도떼기시장처럼 엉망진창이 된다. 질서를 유지하는 내 그룹 리더십이 더없이 망가진다. 나는 언어의 교통순경이다.   금이 은보다 더 비쌉니다. - 은이 뭐가 나쁘길래. - 은도 괜찮습니다. 내가 얼른 꿰맞춘다. - 잘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얘기하면 말이 길어지지. 말이 길어지면 혼동이 생기고 오해를 불러일으킨단다. 우리는 혼동을 열나게 싫어하잖아. 그래서 침묵이 떠들어대는 것보다 좋다는 거다, 알겠느냐. - 그렇다면 말을 짧고 분명히 하면 됩니까.   언어의 교통순경이 초등학교 선생으로 변신한다. ‘Doctor’의 어원이 라틴어로 ‘가르치다’라는 뜻이었어. 우리말로도 의사의 ‘사’는 스승 師. 변호사의 ‘사’는 선비 士. ‘의사 선생님’은 저절로 나오지만 ‘변호사 선생님’은 입에 붙지 않지.   시인, 수필가, 소설가들에게 침묵이 금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자칫 작품활동을 중단하라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에. 화가에게 그림을 그리지 말라는 거나 다름없다. 변호사는 자꾸만 떠들어야 해. 뭐? 정치가들은?   그룹 세션 중에 끄덕끄덕 졸거나 허공을 응시하며 경미한 뇌사(腦死) 증세를 보이는 환자들보다 칼로스에게 인간적으로 정이 간다. 헤밍웨이 스타일로 말을 짧게 하면 되겠다는 환자에게 경의감이 솟는다.   찰스 슐츠(Charles Schulz: 1922~2000)가 그의 만화에 탄생시킨 찰리 브라운을 당신을 기억할 것이다. 항상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만 치는 금발의 슈로더를 흠모하는 수다쟁이 루시가 노점 정신상담소를 차린다. 1959년 시세로 한 건당 5센트. 루시도 칼로스처럼 말이 많다는 소문이다.   말 못하는 강아지 스누피가 루시를 찾아온다. 스누피는 말이 없다. 루시가 혼잣말로 뇌까린다. - “What can you do when the patient doesn‘t say anything? - 환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는 어쩌나요?”   내가 루시에게 말한다. 말 못하는 아기에게 엄마가 자꾸 말을 해야 아기가 말하는 법을 배운단다. 언어 능력이 달리는 환자에게 의사가 연거푸 떠들어야 돼. 스누피에게 거듭거듭 애정 어린 말을 해주거라.   논리의 비약을 하면서 내 자신이 루시가 된다. 그리고 루시처럼 황당한 질문을 던진다. - 언변이 딸리는 신도(信徒)가 신과의 의사소통을 어찌해야 하나요. 신의 리더십 스킬은 어떤가요. 신도 침묵이 금이라 생각하나요.   칼로스가 내게 이렇게 말할 것 같다. - 신과 소통하고 싶으면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세요. 기도를! - 칼로스야, 나도 스누피처럼 비언어적이란다. 언어의 ’유아, infant‘ 상태야. ’infant‘는 라틴어로 말을 못한다는 뜻이었단다. 말을 못하는데 어떻게 기도하느냐. 말 잘하는 엄마가 말을 해야지, 아기가 어떻게 말을 하니.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떠버리 칼로스 떠버리 칼로스 루시도 칼로스 loudmouth 떠버리

2024-02-20

[잠망경] 딴소리

사람들은 딴소리를 곧잘 한다. 시인들이 완곡한 표현을 시에 쓰는 것도 정치가들의 입장문도 딴소리의 원칙을 따른다. 우리는 모두 우아한 말을 하고 싶다. 언어를 사용하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특권이다.   사전은 딴소리를 ①주어진 상황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말 ②미리 정해진 것이나 본뜻에 어긋나는 말이라 엄격하게 풀이한다. 재미있다. 소리(sound)를 말(word)로 업그레이드시키는 사전의 자상한 마음가짐이.   대화 도중에 화제의 본질을 잠시 벗어나는 것을 애교로 볼 수도 있지만 내 환자들이 하는 딴소리는 ‘말’이 아닌 ‘소리’로 들리기가 쉽다. 북소리나 장구 소리처럼! 증인석에 버티고 앉아 자꾸 딴소리하면 판사가 법정모욕죄 선고를 내릴 수도 있다. 심한 딴소리는 내 환자들의 특권이다. 동문서답의 병적인 쾌감이다.   영어에는 딱히 ‘딴소리’라는 관용어가 없다. 화제를 바꾼다는 설명조의 문장이 있을 뿐, ‘Why are you changing the subject?’ 하는 식의 구질구질한 질문에는 ‘너 왜 딴소리야?’ 하는 우리말의 짧고 따끔한 맛이 없다. 서구인들은 동방예의지국 사람보다 어수선한 대화법에 익숙한 체질이 아닌가 싶지.   당신은 왜 딴소리를 하는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의도적인 수법이면서 남의 비판을 받고 싶지 않은 마음인가. ‘내로남불’이라는 자기 합리적 정신상태와 더불어, 나는 다 좋고 남들은 다 나쁘다는 유아적 사고방식. 사자성어의 권위의식에 탐닉하는 한국인들이 2020년에 만들어 낸 아시타비(我是他非)라는 신조어가 네이버 사전에 늠름하게 올라와 있다. 마치 무슨 염불 소리처럼 들리면서.   묻는 말에 제멋대로 응수하는 딴소리의 극심한 예로 ‘word salad’(말비빔, 워드 샐러드)가 있다. 생각의 혼란 때문에 말과 말의 파편들이 일관성 없이 튀어나오는 정신분열증의 보증마크 증상으로 손꼽힌다.   단어 하나하나가 분명하게 발음되는 말의 흐름은 청산유수처럼 시원시원하게 들리지만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가 오간다. 자신만만한 문장의 나열을 아무도 이해 못 한다. 같은 발음과 반복되는 운율 감이 은근히 기분 좋게 들릴 정도다. 병동환자가 리드미컬하게 단숨에 내뱉는 말이 이렇다. “내가 필요한 약은 ‘penis medicine’이야. 내가 받은 처방은 ‘snake medicine’, ‘poison medicine’이라니까.”   나르시시즘 성격장애자들이 도처에 즐비하다. 정치계가 그들의 유일한 서식처. 명실공히 딴소리의 명수인 그들은 두뇌 장애가 전혀 없는 어엿한 정상인들이다. 타인의 우월성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self-love(自己愛)’의 오만무도한 달인들!   나르시시스트는 지성적인 비판을 감당하는 능력이 갑남을녀에 비하여 심하게 결핍된 상태에서 남들을 깔보고 멸시하는 마음 씀씀이만 돈독할 뿐, 독이 오르면 과대망상과 피해망상적 발언도 난발하는 자애주의자다.   확답을 회피하는 정치가들이 딴소리에 열중한다. 지루한 간 보기 작업. 직언하면큰일 난다는 마음이지만 간간 과감한 발언을 터뜨리기도 한다. 사람의 생각은 영구성이 없다는 진실로서 남들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변덕의 미덕이 고맙기조차 해요.   딴소리의 끝이 허위진술과 슬그머니 맞닿는다. 딴소리와 가짜뉴스가 득세하는 세상에 정신질환자들에게 폐쇄 병동이 해답일 수 있듯, 거짓말 전문가들은 사회적 폐쇄공간인 감옥이 해결책이라는 생각에 잠긴다. 짓궂은 겨울 날씨처럼 조석으로 돌변하는 사람 마음의 일시적 은신처로서.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딴소리 poison medicine snake medicine penis medicine

2024-02-06

[잠망경] 심리치료

‘…상징의 의미를 아무리 건드려 보아도/ 상징은 다시 살아나지 않음을/ 뒤늦게 전해드립니다/ 상징은 상징끼리만/ 오래 내통해 왔음을/ 제가 어찌하겠습니까…’      ‘사고현장’ 이라는 내 시의 일부다.     나는 약물치료에 치중하는 정신과 의사를 ‘약사(druggist)’라 부른다. ‘druggist’라는 앵글로색슨어는 ‘pharmacist’라는 라틴어보다 소탈하게 들리지만, 길거리 마약도 ‘drug’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어감이 좋지 않다.   되도록 심리치료에 의존하는 정신과 의사를 ‘psychotherapist’라 한다. 약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체지만, 심리는 추상적인 컨셉이다. 약을 신봉하는 의사를 ‘유물론자(materialist)’, 심리치료를 추구하는 의사를 ‘유심론자(mentalist)’라 부르면서 유사시에 처방을 내리는 유심론자임을 나는 자처한다.     언어 감각이 뛰어날수록 심리치료가 유효하다. 전혀 그렇지 못하면 처방전을 쓴다. 어린이보다 교육수준이 높은 어른이 정신분석적 심리치료에 적합하다는 것.    심리치료에 몰두한다. 환자가 꿈 이야기를 하면 귀가 솔깃해서 턱을 어루만진다. 지난밤 꿈이 프로이트가 지적한 바로 그 ‘소원성취’의 좋은 본보기라는 사실을 깨닫고 뛸듯한 기쁨과 아픈 아쉬움이 교차하는 순간을 공유한다.  환자가 꿈의 상징성을 스스로 감지하고 자기 꿈을 해석한다. 상징의 범위는 개인적인,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이지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집단무의식’ 또한 간간 등장한다. 도무지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동창생이 밑도 끝도 없이 나타나거나 비를 피하여 캄캄한 굴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꿈들.   당신은 프로이트의 명언을 들먹인다. “때로 시가는 단지 시가일 뿐이다.” 그리고 ‘시가=남근의 상징’이라는 판박이 공식을 비판하려는 눈치다. 우리의 초롱초롱한 의식, 어렴풋한 잠재의식, 캄캄한 무의식, 무심코 내뱉는 언어 속에 복병처럼 숨어있는 상징의 내막, 영원불멸의 예술작품에 내재한 저 무수한 상징성을 부정할 수 없다고 나는 반박한다. 한두가지 예외 때문에 전반적 통계를 외면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러나 세상과 인간을 만질 수 있는 물체로 보는 유물론자들을 어찌 무마할 수 있을까.   1977년에 하버드 의대가 꿈에 대한 논문, ‘활성-합성 이론(Activation-synthesis Theory)’을 발표했다. 우리가 깊은 잠을 잘 때 뇌 속에서 활성화되는 전기현상을 대뇌피질이 인위적으로 해석해서 창조하는 합성체가 꿈이라는 것. 꿈은 꾸며낸 스토리라는 것.   2010년 위스콘신 의대가 ‘꿈꾸기와 뇌’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외친다. “결론적으로, 꿈의 의식은 깨어 있는 의식과 아주 비슷하면서, 의지, 자아 인식, 성찰, 숙고, 무드, 기억과 흥미진진한 차이점이 있지만, 각 개인의 꿈에는 많은 다양성이 있다.” 꿈=생시. 삶=꿈.   2014년 대학 동기 여럿이 하와이 여행을 간다. 화산의 지열이 수증기처럼 솟아오르는 마우이 섬에서 사진을 찍는다. 10년 전, 어제, 지금, 나는 꿈을 꾼다. 내일이라는 꿈을 꾸며낸다. 내 옛날 시 ‘사고현장’만큼이나 생생한 꿈을 연출한다. 하나의 상징으로 남기 위한 꿈을.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심리치료 정신분석적 심리치료 정신과 의사 위스콘신 의대

2024-01-31

[잠망경] 심리치료

…상징의 의미를 아무리 건드려 보아도/ 상징은 다시 살아나지 않음을/ 뒤늦게 전해드립니다/ 상징은 상징끼리만/ 오래 내통해 왔음을/ 제가 어찌하겠습니까… 2001년 본인 시(詩), 「사고현장」         나는 약물치료에 치중하는 정신과 의사를 ‘druggist, 약사’라 부른다. ‘druggist’라는 앵글로색슨어는 ‘pharmacist’라는 라틴어보다 소탈하게 들리지만, 길거리 마약도 ‘drug’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어감이 좋지 않다.   되도록이면 심리치료에 의존하는 정신과 의사를 ‘psychotherapist’라 한다. 약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체인 반면, 심리는 추상적인 컨셉이다. 약을 신봉하는 의사를 ‘유물론자, materialist’, 심리치료를 추구하는 의사를 ‘유심론자, mentalist’라 부르면서 유사시에 처방을 내리는 유심론자임을 나는 자처한다.     언어 감각이 뛰어날수록 심리치료가 유효하다. 전혀 그렇지 못하면 처방전을 쓴다. 언어가 미숙한 어린이보다 교육수준이 높은 어른이 정신분석적 심리치료에 적합하다는 것.   심리치료에 몰두한다. 환자가 꿈 이야기를 하면 귀가 솔깃해서 턱을 어루만진다. 지난밤 꿈이 프로이트가 지적한 바로 그 ‘소원성취, wish fulfillment’의 좋은 본보기라는 사실을 깨닫고 뛸듯한 기쁨과 아픈 아쉬움이 교차하는 순간을 공유한다.     환자가 꿈의 상징성을 스스로 감지하고 자기 꿈을 해석한다. 상징의 범위는 개인적인,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이지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집단무의식, collective unconsciousness’ 또한 간간 등장한다. 도무지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동창생이 밑도 끝도 없이 나타나거나 비를 피하여 캄캄한 굴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꿈들.   당신은 프로이트의 명언을 들먹인다. “때로 시가는 단지 시가일 뿐이다, Sometimes a cigar is just a cigar.” 그리고 ‘cigar=symbol of phallus, 시가=남근의 상징’이라는 판박이 공식을 비판하려는 눈치다.   우리의 초롱초롱한 의식, 어렴풋한 잠재의식, 캄캄한 무의식, 무심코 내뱉는 언어 속에 복병처럼 숨어있는 상징의 내막, 영원불멸의 예술작품에 내재된 저 무수한 상징성을 부정할 수 없다고 나는 반박한다. 한두가지 예외 때문에 전반적 통계를 외면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러나 세상과 인간을 만질 수 있는 물체로 보는 유물론자들을 어찌 무마할 수 있을까.   1977년에 하버드 의대가 꿈에 대한 논문, ‘Activation-synthesis Theory, 활성-합성 이론’을 발표한다. 우리가 깊은 잠을 잘 때 뇌 속에서 활성화되는 전기현상을 대뇌피질이 인위적으로 해석해서 창조하는 합성체가 꿈이라는 것. 꿈은 꾸며낸 스토리라는 것.   2010년 위스콘신 의대가 ‘꿈꾸기와 뇌’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외친다. - “결론적으로, 꿈의 의식은 깨어 있는 의식과 아주 비슷하면서, 의지, 자아인식, 성찰, 숙고, 무드, 기억과 흥미진진한 차이점이 있지만, 각 개인의 꿈에는 많은 다양성이 있다.”(본인 譯) 당신과 나의 ‘깨어 있는 의식’은 꿈이다. 꿈=생시. 삶=꿈.   2014년 대학 동기 여럿이 하와이 여행을 간다. 화산의 지열이 수증기처럼 솟아오르는 마우이(Maui) 섬에서 사진을 찍는다. 10년 전, 어제, 지금, 나는 꿈을 꾼다. 내일이라는 꿈을 꾸며낸다. 내 옛날 시 ‘사고현장’만큼이나 생생한 꿈을 연출한다. 하나의 상징으로 남기 위한 꿈을.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심리치료 정신분석적 심리치료 집단무의식 collective 정신과 의사

2024-01-23

[잠망경] 꼰대

초등학교 때 ‘김대곤’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별명이 ‘꼰대’였다. 놀리기 좋아하는 또래들이 ‘대곤’을 ‘곤대’라 거꾸로 부르다가 꼰대로 바꿔 불렀다.   꼰대가 어른이나 아버지를 뜻하는 것으로 알았던 나는 왜 그 말이 우스웠는지 잘 몰랐다. 마침 또 대곤이는 어딘지 어른스러운 데가 있는 아이였다. 같은 나이 친구를 꼰대라 불러대며 아버지를 연상하는 게 재미있었겠지.   네이버 사전은 ‘꼰대’를, “은어로 늙은이를 이르는 말”이라 풀이한다. ‘꼰대스럽다’는 형용사를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남을 가르치려 든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꼰대들은 훈장 기질이 농후한 노인네들이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믿는 사람들.   꼰대는 젊은이를 얕잡아본다. 때때로 깔보는 태도를 취한다. 연장자들이 연소자들을 대할 때 매양 그런 편이다. 당신은 이것을 강자가 약자를 도와주고 싶어하는 보호본능이라는 해석을 내리겠지. 그 대가로 강자는 약자의 존경을 받고 싶다. 어르신네에게서 인생을 배우는 나이 어린놈이 건방지게 굴면 좋지 않다고 꼰대는 믿는다. 굳게, 또는 고집불통으로.   아니다. 꼰대들만 나무랄 수는 없다. 애당초 젊은것들이 노인네들을 업신여기고 걸핏하면 핀잔을 주며 구박하지 않았던가. 자기들의 진로를 꼰대들이 방해한다며 투덜대지 않았던가. 선배가 후배 출셋길을 막는다면서! 하루빨리 은퇴하여 더는 내 앞에서 거치적거리지 말고 어디 다른 데 가서 후배양성이나 했으면 참 좋을 텐데, 하지 않았던가.   이런 묵시적 압박에 대항하려고 늙은이는 꼰대가 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젊었을 때는…” 하고 자신의 젊음을 회상하며 젊은이를 대적하는 것이다. 처절한 속마음으로. 당신은 구조조정이라는 행정방침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조기 은퇴를 한 중장년층 늙은이들의 사연도 숱하게 듣지 않았던가.   2019년 7월 21일자 영국 공영방송 BBC 웹사이트에 게재됐던 ‘Kkondae’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는다. 꼰대 이야기다. 기자 이름이 ‘SooZee Kim’. 아무래도 한인 2세 같다. 이런 구절에 공감이 간다. “In Korean, Kkondae loosely translates as ‘condescending older person’…” - “한국어로 꼰대는 대략 ‘거들먹거리는 연장자’로 해석된다…”   어머니 태생이 경상도라서 어릴 적에 경상도 토박이말을 자주 들었다. 갓난아기 내 조카를 귀여워하시면서 어머니는 “아이구, 우리 꼰데기!”라는 간투사를 쓰셨다. 내 귀에 꼰데기는 최상의 애칭이었다. 얼마 전 ‘꼰데기’가 ‘번데기’의 영남 방언임을 알았다. 그리고 ‘꼰대’는 번데기처럼 주름이 많은 늙은이라는 뜻에서 꼰데기라고 불리다가 꼰대가 됐다는 설도 인터넷에서 읽었다.   하나 더 있다. 일제강점기에 프랑스어로 백작을 칭하는 콩테(Comte)의 일본식 발음이 ‘콘테’였고, 이완용 같은 친일파들이 백작 등 작위를 받고 으스대며 자신을 콘테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꼰대의 어원으로 나는 ‘콩테’설보다 ‘꼰데기’설을 신봉할까 하는데. 노인네들은 번데기 같은 주름이 자글자글 생기면서 그들의 몸 또한 꼰데기처럼 작아진다. 심리적으로도 아이가 된다.   사실 노인네들이 사람을 졸졸 쫓아다니며 잘난 척 충고하고 잔소리하는 데는 좀 귀여운 구석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 별명이 꼰대였던 대곤이처럼. 천도복숭아만큼 포동포동하던, 어머니가 그토록 귀여워하시던, 그때 그 시절 내 조카, 꼰데기처럼.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중장년층 늙은이들 은어로 늙은이 나이 친구

2024-01-10

[잠망경] 꼰대

초등학교 때 ‘김대곤’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별명이 ‘꼰대’였다. 놀리기 좋아하는 또래들이 ‘대곤’을 ‘곤대’라 거꾸로 부르다가 꼰대로 바꿔 불렀던 것이다.   꼰대가 어른이나 아버지를 뜻하는 것으로 알았던 나는 왜 그 말이 우스웠는지 잘 몰랐다. 마침 또 대곤이는 어딘지 어른스러운 데가 있는 아이였다. 같은 나이 친구를 꼰대라 불러대며 아버지를 연상하는 게 재미있었겠지.   네이버 사전은 ‘꼰대’를, “은어로 늙은이를 이르는 말”이라 풀이한다. ‘꼰대스럽다’는 형용사를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남을 가르치는 데가 있다”고 해석한다. 꼰대들은 훈장 기질이 농후한 노인네들이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믿는 사람들.   꼰대는 젊은이를 얕잡아본다. 때때로 깔보는 태도를 취한다. 연장자들이 연소자들을 대할 때 매양 그런 편이다. 당신은 이것을 강자가 약자를 도와주고 싶어하는 보호본능이라는 해석을 내리겠지. 그 대가로 강자는 약자의 존경을 받고 싶다. 어르신네에게서 인생을 배우는 나이 어린놈이 건방지게 굴면 좋지 않다고 꼰대는 믿는다. 굳게, 또는 고집불통으로.   아니다. 꼰대들만 나무랄 수는 없다. 애당초 젊은것들이 노인네들을 업신여기고 걸핏하면 핀잔을 주며 구박하지 않았던가. 자기들의 진로를 꼰대들이 방해한다며 투덜대지 않았던가. 선배가 후배 출셋길을 막는다면서! 하루바삐 은퇴하여 더 이상 내 앞에서 거치적거리지 말고 어디 다른 데 가서 후배양성이나 했으면 참 좋을 텐데, 하지 않았던가.   이런 묵시적 압박에 대항하려고 늙은이는 꼰대가 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젊었을 때는…” 하고 자신의 젊음을 회상하며 젊은이를 대적하는 것이다. 처절한 속마음으로. 당신은 구조조정이라는 행정방침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조기 은퇴를 한 중장년층 늙은이들의 사연도 숱하게 듣지 않았던가.   2019년 7월 21일 자 영국 공영방송 BBC 온라인의 “Kkondae”라는 제목의 글을 읽는다. 꼰대 이야기다. 기자 이름이 ‘SooZee Kim’. 아무래도 한국인 2세 같다. 이런 구절에 공감이 간다. “In Korean, Kkondae loosely translates as ‘condescending older person’…” - “한국어로 꼰대는 대략 ‘거들먹거리는 연장자’로 해석된다…”   어머니 태생이 경상도라서 어릴 적에 경상도 토박이말을 자주 들었다. 갓난아기 내 조카를 귀여워하시면서 어머니는 “아이구, 우리 꼰데기!”라는 간투사를 쓰셨다. 내 귀에 꼰데기는 최상의 애칭이었다. 얼마 전 ‘꼰데기’가 ‘번데기’의 영남 방언임을 알았다. 그리고 ‘꼰대’는 번데기처럼 주름이 많은 늙은이라는 뜻에서 꼰데기라고 불리다가 꼰대가 됐다는 설도 인터넷에서 읽었다.   하나 더 있다. 일제강점기에 프랑스어로 백작을 칭하는 콩테(Comte)의 일본식 발음이 ‘콘테’였고, 이완용 같은 친일파들이 백작 등, 작위를 받고 으스대며 자신을 콘테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꼰대의 어원으로 나는 ‘콩테’설보다 ‘꼰데기’설을 신봉할까 하는데. 노인네들은 번데기 같은 주름이 자글자글 생기면서 그들의 몸 또한 꼰데기처럼 작아진다. 심리적으로도 아이가 된다.   사실 노인네들이 사람을 졸졸 쫓아다니며 잘난 척 충고하고 잔소리하는 데는 좀 귀여운 구석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 별명이 꼰대였던 대곤이처럼. 천도복숭아만큼 포동포동하던, 어머니가 그토록 귀여워하시던, 그때 그 시절 내 조카, 꼰데기처럼.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중장년층 늙은이들 은어로 늙은이 나이 친구

2024-01-09

[잠망경] 시니어 모멘트

노인네들은 겸손하다. 남의 도움을 받고 싶은 본능적 몸가짐이다. 애써 자세를 바로잡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등허리가 굽어지는 모습이 마치 무슨 용서라도 구하는 태도다. 노인네들은 공손하다.   그들은 많은 말을 하고 싶다. 같은 말을 앉은 자리에서 되풀이하거나 전에 했던 말을 하고 또 한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뜸을 들이며 쉼표 후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시간이 길어진다. ‘아, 그, 왜, 저’, 하는 간투사로언어 공간을 메꾸는 사이에 상대방이 몸을 꼰다.   나이를 먹을수록 옛날을 회고하는 것이다. ‘그때가 좋았어’, 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당신은 현재보다 과거가 좋았다는 속마음을 내비친다. 가난과 곤혹에 시달리던 시절을 회상하며 웃기도 하고 ‘개고생’ 하던 군대생활을 떠올리고 무릎을 치며 공감한다. 그때는 좋고 지금은 나쁘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비현실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두뇌활동은 과학적 객관을 인지하는 능력과 더불어, 니체가 지적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감성적 주관이 활개 치는 기능을 겸비한다. 이 두 작용을 조종하는 지렛대가 기억(memory)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메모리는 쇠퇴하는 법. 심하게는 치매에 이르지만 경미한 경우에 “아, 내가 깜빡했네,” 하며 상대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한다.   미국인들은 이런 경우를 ‘senior moment’라 부른다. 컴퓨터의 하드 드라이브가 오래되면 기능이 부실해지는 상황과 별로 다르지 않다. ‘senior’는 13세기 라틴어로 ‘old, 늙었다’라는 뜻이었다가 15세기에 ‘고위급’이라는 긍정적 의미로 변했다. 1938년에 ‘senior citizen’이라는 듣기 좋은 표현이 처음 나왔다는 기록이다.       우리가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달갑잖은 버릇은 스스로의 두뇌활동을 자극하는 습관일지도 몰라. 육체운동, 반복적으로 조깅하거나 헬스클럽에 가는 습관이 몸에 좋은 것처럼 두뇌 운동, 했던 말을 또 하거나 기억을 되살리는 습관이 두뇌건강에 좋다는 버젓한 이론일 수도 있어.   정적을 깨며 자기 생각을 소리내어 말하는 것이 진짜 두뇌 운동이다. 가만히 앉아서 상상으로 조깅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소리 없이 하는 생각 또한 말이 안 되지. 말이 많은 노인네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방방곡곡에서 두뇌 운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언어습관을 용허한다.   이들이 가진 것은 과거일 뿐이라는 극단적 생각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옛날의 멋진 추억이 엊그제 5박 6일 크루즈 관광 여행에서 성능 좋은 셀카 사진보다 훨씬 더 즐겁고 풍요롭다.   골수에 박힌 관습, 꼰대스러운 가치관 등등,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답다며 고개를 떨구는 ‘과거애착증’은 외로운 중독현상이다. 현재는 도통 이해하기 힘들고 미래는 전혀 예측하기 어려워서 과거에만 연연하는 우리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딱하다.   연말이 다가오는 세상이 소란스럽다. 시끌벅적한 2023년 12월 하순 맨해튼 거리. 종교적 축제라는 의미 외에 한해가 저무는 아쉬움을 행동으로 발산시키는 집단심리다. 몇몇 노인네들이 젊은 행인들에게 떠밀리듯 걸어간다.   당신과 나는 알고 있다. 해가 바뀔수록 우리의 남은 시간이 점점 적어진다는 사실을. 두려움을 제어하며 외로움을 달래려고 많은 관광객이 맨해튼에 엄청나게 모여든다. 구세군 벨을 딸랑거리며 모금자가 신명 나게 춤을 춘다. 군중에 섞여 거리의 소음을 공유하는 동안 우리는 모두 외로움을 망각하는 것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시니어 모멘트 시니어 모멘트 두뇌 운동 senior citizen

2023-12-26

[잠망경] 이상한 시추에이션

골동품상을 운영하며 혼자 사는 이혼녀가 말한다. “당신이 하는 어려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나를 깔보는 듯한 눈빛으로 잘난 척하는 태도도 기분 나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하니까 이런 응답이 나온다.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거든요. 외출 후 아파트에 돌아오면 꼬리를 흔들며 내게 뛰어옵니다. 이곳에 내가 도착할 때마다 그런 식으로 반겨줬으면 좋겠네요.”   그녀와 내 마음의 결이 맞지 않는 느낌이다. 반가워 꼬리 치는 강아지처럼 애정 있는 분위기를 내가 풍기지 못한 거다. 그런 멘탈 이미지에 그녀는 강한 애착심을 품고 있다.   존 보울비(JohnBowlby: 1907~1990)는 ‘애착이론, Attachment Theory’으로 정신상담 발전에 크게 공헌한 영국 정신분석가. 그는 생후 6개월부터 24개월 사이에 부모라는 ‘애착대상’을 ‘안전기지’로 삼아 아기가 엉금엉금 기거나 아장아장 걸어가며 주변을 탐색하고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형성되는 ‘애착관계’가 정서적 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이론을 주창한다. 대가족환경의 아기는 부모 외에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등등도 애착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프로이트는 아동심리의 발달단계를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로 구획하여 설명한다. 다분히 의사답고 해부학적인 발상이다. 내가 추구하는 ‘대상관계 이론’ 또한 보울비의애착이론처럼 아이와 부모가 이루는 대인관계에 역점을 두면서 이른바 ‘인맥’이 주요 관건이다.     메리 에인스워스(Mary Ainsworth: 1913~1999)는 미정신분석가로보울비의 이론을 계승하여 부모와 낯선 사람이 포함된 아이의 애착행동을 연구했다. 그녀는 ‘낯선 상황(Strange Situation)’이라는 표제로 모종의 실험절차를 고안한다. 그 연구 결과로 아동의 애착 스타일을 넷으로 구분한다. ①안정형(Secure) ②불안-회피 불안정형(Anxious-Avoidant Insecure) ③불안-저항 불안정형(Anxious-Resistant Insecure) ④혼돈형(Disorganized). - 우리는 모두 ①번을 소망한다. 가장 안 좋은 ④번을 피할 수가 있다면, 애석하지만 ②, ③번의 경우를 견뎌내야 한다.   지금 나는 한두 살 되는 아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애착의 형성과 붕괴 과정은 사람의 평생을 따라다니는 이상한 시추에이션이라는 명제를 들먹이고 싶은 거다.   성인이 된 후의 부모·형제 관계, 친구 관계, 애인 관계, 부부관계, 등등 모든 인간관계에 애착이 깔린 한 우리의 삶은 풍요롭다. 사전은 애착을 ‘몹시 사랑하거나 끌리어서 떨어지지 아니함. 또는 그런 마음’이라 풀이한다.   ‘attachment’의 동사형 ‘attach’는 11세기 고대 불어로 ‘체포하다’라는 뜻이었고 13세기 라틴어로 재산이나 땅을 법으로 몰수한다는 의미였다. 전인도 유럽어로 ‘말뚝’이라는 뜻. 사람을 체포해서 말뚝에 묶어 놓는 장면이 떠오른다. 어원학적으로 애착심은 심리적인 결속감의 처음과 끝이다. 당신이 이메일에 부착하는  첨부파일(attachment) 또한 메일 내용과 영원히 결부된다.   옛날 그 고물상 여주인은 나를 강아지에 비유한 세션 후 더는 나를 찾지 않았다. 최소한의 애착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을 상호책임으로 돌릴까 하다가 마음을 바꾼다. 애착은 사랑과 닮은 데가 있어서 한쪽만의 마음가짐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현세기에 있어서 대인관계는 쌍방통행인 것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시추에이션 애착이론 attachment 회피 불안정형 저항 불안정형

2023-12-12

[잠망경] 문 닫고 지내기

문이 있고 통로가 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잔디밭 돌길. 문이 반쯤 열려 있는 서재를 지나 반들거리는 복도가 부엌에 이른다. 문은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가는 칸막이를 상징한다. 문은 외부자극을 차단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오피스 문을 닫은 채 직장이나 연구실에서 열렬히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혼자 추구하는 작업에 심취하여 몰아(沒我)의 경지에 빠지는 과학자나 예술가들은 남과 소통하고 싶은 기색을 도통 보이지 않는다.   페이퍼 워크가 산더미로 쌓인 병원에서 컴퓨터를 두들기는 중 전화가 온다. 오래 소식이 없던 친구가 어떻게 지내냐 묻는다. 야, 나는 날이 가면 갈수록 ‘자폐증상, autistic symptom’이 도지는 것 같다, 하며 농담을 내뱉는다.   현대인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지낸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기다리며 마주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셀폰에 몰두하는 젊은 남녀를 무심코 지나친다. 앞에 앉아있는 애인보다 손에 움켜쥔 인터넷 상황에 정신이 팔린 남녀는 마치 말을 붙이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모종의 경계심을 품은 태도다. 이들은 상대를 향한 마음이 닫힌 상태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1908년, 스위스 정신과 의사 유진 블로일러(Eugen Bleuler: 1857~1939)‘schizophrenia, 정신분열증’과 함께 ‘autism, 자폐증’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그는 ‘autism’을 ‘현실에서 분리된, 현실과 동떨어진 정신상태라 설명한다.   현 미정신과협회 진단 매뉴얼에서는 자폐증이라는 독자적 병명 대신 ‘Autism Spectrum Disorder,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는 아리송한 명칭을 사용한다. ‘자폐증’이라는 질환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스펙트럼’만 있다는 이론이다.   남들과의 상호작용, 사회성 결핍, 또는 부적절한 언행 때문에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기가 힘든 스펙트럼 장애인. 유별난 제스처를 반복하거나 한정된 관심사가 비기능적일뿐더러, 자신의 내적 상황에 대응하는 강도가 유난스러운 경우가 많다. 그들은 아주 큰 소동은 일으키지 않는다. 다만, 남들과 난처한 상황에 곧잘 빠지면서 분열증 환자와는 달리 정신병원 안팎에서 불편한 대인관계를 그렁저렁 지탱할 뿐이다.   ‘autism’은 1912년부터 일반인들도 쓰기 시작한 일상어로서 ‘self, 자신’이라는 뜻의 고대 희랍어 ‘autos’에서 유래했다. ‘automobile, 자동차’와 같은 어원임은 물론이다. ‘autonomic nervous system, 자율신경계’ 할 때의 그 ‘auto’. 독자적, 독립적이라는 뉘앙스가 깃들여진다.     20세 후반 나이 백인 남자 환자와 대화를 나눈다. - 너는 왜 병원 정원에서 다른 여러 환자와 함께 바람을 쐬는 동안 직원 눈을 피하여 나무 위에 올라갔느냐? - 미국의 유럽을 향한 금융정책이 잘못됐습니다. - 그런 위험한 짓을 하면 안 된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하며 상대를 만족하게 하는 대답 대신 그는 묵묵부답이다. 소통의 차단 상태, 고집불통으로 일관하는 자폐증상, 독하게 이기적인 스탠스다.   자신이 하는 일, 주어진 사명,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기 위하여 번잡한 외부 자극을 차단하는 사람들 또한 독하게 이기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수도승들이 심심 계곡에숨어 참선하거나 도(道)를 닦았던 일도 같은 맥락이다. 살아있음에 몰두하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애쓰는 우리가 모두 자폐 스펙트럼 증상을 보이는 것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자폐증상 autistic autism 자폐증 스펙트럼 장애인

2023-11-28

[잠망경] 바람떡

옛날에 정신치료에 심취한 적이 있다. 남들을 대할 때 손에 땀이 나서 악수하기를 꺼리는 핸섬하고 스마트한 40대 중반 독신 로버트의 형은 동네에서 소문난 ‘미친놈’이다. 누이 셋은 왕년에 잘 나가던 시스터 보컬 그룹. 주야장천 형제자매 이야기만 하는 로버트.   로버트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필, feel’이 잡히지 않는다. 너는 어떤 사람이냐?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에 있어서 삶은 끊임없는 ‘가십, gossip’의 연속일 뿐 저 자신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로버트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주체(主體)의 부재는 한국인의 언어생활을 지배하는 주어(主語)의 부재와 비슷한 데가 있다. 자아(自我)의 부재 현상.   단군의 후손들 핏속에 흐르는 피해의식, 남의 시샘과 질투의 대상이 되는 불안감 때문에 문장에 주어가 없는 우리의 말 습관을 생각한다. 주어 없이 “사랑해!” 하면 자연스럽지만, “나는 너를 사랑해!” 하면 서툰 외국어 번역 같아서 무드 잡친다.   로버트의 무아(無我) 상태는 당신과 나의 디펜스 메커니즘인 무주어(無主語) 수법과 많이 다르다. 로버트가 처세술 결핍증에 시달린다면 우리는 처세술의 달인이다.   어린 시절 바람떡을 처음 먹던 기억이 난다. 반달 모양의 떡 ‘껍데기, skin’를 손으로 누르면 바람이 쉭~ 새던 바람떡. 사전은 바람떡을 ‘개피떡’의 지방어라 풀이한다. 개피떡의 어원은 갑피병(甲皮餠, 갑옷 갑, 가죽 피, 떡 병) 즉, 갑옷 같은 겉껍질의 떡이라는 한자어. 당신은 개피떡, 하면 뭐? 하겠지만, 바람떡이라는 순수 우리말은 귀에 쏙 들어올 것이야.   만두나 송편 속에 넣는 재료를 ‘소’라 한다. ‘오이소박이’ 할 때 그 ‘소’. 순수 우리말 ‘속’에서 유래한 말이다. 밴댕이 ‘소갈딱지’의 ‘소’. 정신치료사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람의 속마음, 할 때 바로 그 속!   우리의 성숙과정에서 가장 큰 관문은 자신의 마음이 결코 100% 고결하지 않을뿐더러 100% 저열하지도 않다는 성찰을 얻는 데 있다. 우리 마음이 청결과 불결의 종합체라는 것. 갑자기 로버트가 바람떡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소’는 달콤한 ‘앙꼬’일 수 있다는 상상 또한 잇달아 하면서.   정철(1536~1594)의 사미인곡(思美人曲)의 끝부분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1588) “扁鵲(편쟉)이열히 오나 이 병을 엇디하리. 어와 내 병이야 이 님의타시로다.” [명의가 열 명이 오더라도 이 병을 어찌하리. 아, 내 병은 님의 탓이다.]   그는 당시 정계에서 쫓겨난 자기 처지를 남 탓으로 돌리면서, 자기 탓은 1도 없다는 100% 어린애 같은 주장을 펼친다. 이별 당한 여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는 유려한 비유법으로 응석을 부리면서 자기의 고초(苦楚)를 임금님, 선조 탓이라 밀어붙인다.   정철의 ‘소’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 수법이 통할지도 몰라. 그러나 막상 그의 소를 파고들면 주벽이 심한 결점투성이의 한 미숙한 인간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40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간 작금의 한국에도 그런 정치인들이 부지기수라고 소리치고 싶을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상 남을 탓하는 가장 극적인 발언을 한 사람은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1905~1980)다. “Hell is other people, 지옥은 남이다.” 그의 희곡, ‘No exit, 출구 없는 방’에 나오는 명언이다. (1944) - 로버트에게 그랬듯이 나는 사르트르에게 묻는다. 사르트르야, 남들이 지옥이라면, 너 자신은 무엇이냐?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바람떡 시절 바람떡 갑피병 갑옷 순수 우리말

2023-11-14

[잠망경] 아하와 어허

같은 말을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백번 맞는 말이다. 말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다. 모음(母音) 탓이라는 생각에 잠긴다. 다 ‘에미 소리’ 탓이다.   “아, 그리운 고향!” 하며 탄식한다. “어, 그리운 고향!”이라 하지 않는다. 나도 너도 ‘아버지, 어머니’ 한다. ‘어버지, 아머니’ 하지 않지. ‘아’는 밝고 남성미 흐르는 적극적 어감이지만 ‘어’는 어둡고 부드럽고 여성적인 느낌을 풍긴다.   ‘나’, ‘너’는 ‘아’와 ‘어’ 직전에 콧소리(鼻音) ‘니은’이 들어간 순수 우리말. 나는 당당한 주관이고 너는 약간 어두운 내 자아의 연장선상에 있다. 너는 날뛰며 나서는 나를 다스리는 고충을 감수하는 내 어머니의 직책을 맡는다.   ‘aha!’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강하게 깨달았을 때 튀어나오는 영어 표현. 반면에, ‘uh-huh’는 상대를 수긍하는 소극적 의사표시다. ‘aha’는 목이 확 트인 소리지만, ‘uh-huh’는 성대(聲帶)가 좀 닫힌 채 나오는, 별로 내키지 않는 울림이다. 네이버 사전은 우리말 ‘어허’를 ‘조금 못마땅하거나 불안할 때 내는 소리’라 풀이한다.   금요일 오후 그룹테러피 세션. 정상과 비정상은 어떻게 다르냐? “정상이 아닌 것을 비정상이라 합니다.” 이것이 정상이다, 하는 규정은 누가 내리느냐? “의사가 내립니다.” 아니다. 의사가 아니라 의사가 속해 있는 사회가 내린다. 사회란 무엇이냐? 사회는, 에헴, 관습과 전통을 포함한 현시대의 대다수가 내리는 의견의 총체적인 결론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정의는 시대마다 달라진다. 정상과 비정상의 세부목록은 결코 의사나 신(神)이 미리 작성해 놓은 게 아니라니까.   12명 중 서너 명이 한꺼번에 “Aha!” 한다. 기대하지 못했던 반응. 나는 속으로 “어렵쇼!” 한다. ‘아’가 아닌 ‘어’로 터지는 간투사. 내 핏줄에 흐르는 순수 우리말, 어렵쇼. 나는 뾰족한 것에 찔렸을 때 “Ouch! 아우치!” 하지 않고 “아야!” 하는 편파적 이중언어자(二重言語者)다.   한글 이중모음(二重母音)에는 야, 여, 요, 예, 얘, 왜 등등 자그마치 11개가 있다 한다. 영어 발음으로 ‘y’ 소리, 또는 ‘이’ 발음이 섞여진 이중모음. ‘야~, 여보세요, 얘가 왜 이래~’에서처럼 어떤 정감을 풍기는 ‘y’ 소리. ‘yes!’ 할 때의 바로 그 ‘이’에 힘이 들어가는 소리!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은 출석을 부를 때 꼭 이름 끝에 ‘이’를 붙여서 부르셨다. ‘김창남’ 대신 ‘김창남이’, ‘서량’ 대신 ‘서량이’ 하실 때 왠지 친근감이 느껴졌다. ‘한오수’ 대신 ‘한오수이’ 하셨는데 문법적으로 틀렸지만 마냥 푸근하게 들렸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Charles’ 대신 ‘Charlie’, ‘Bill’ 대신 ‘Billy’, ‘Nick’도 ‘Nicky’라 부르는 사실을 지적한다. 애칭이다. ‘mommy’, ‘daddy’ 다 친근감이 넘친다. 그러나 아무도 ‘Jesus, 지저스’를 ‘Jesusy, 지저시’라 부르지 않아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벌을 받을지도 모르는 버르장머리 없는 농담을 해서 미안하다고 얼른 덧붙인다.   이 조심스러운 우스갯소리에 몇몇이 “하하하” 하며 웃는다. 병동으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혼자 크게 외친다. “Ah, yes! 아, 그렇지,” “Yes, indeedy-doody! 암, 그렇고말고!” ‘indeedy-doody’는 ‘indeedy’의 희언(戱言)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한글 이중모음 순수 우리말 영어 발음

2023-10-31

[잠망경] 베이컨을 좋아하세요?

‘배다’를 네이버 사전은 이렇게 풀이한다. ①스며들거나 스며 나오다, 버릇이 되어 익숙해지다. 냄새가 스며들어 오래도록 남아 있다. ②배 속에 아이나 새끼를 가지다, 물고기 따위의 배 속에 알이 들다. ③물건 사이가 비좁거나 촘촘하다, 생각이나 안목이 매우 좁다. ④배우다 (비표준어)     한자어로 ①을 습관 ②를 임신 ③을 치밀 ④를 학습으로 명사화해서 생각하면 얼른 이해가 간다. ‘배다’라는 순수 우리말은 의미심장한 말이다. 어원학적으로, ‘배우다’가 ‘배다’에서 유래했다는 학설이 유력해지는 순간이다.   생각해 보라. 배운다는 것이 어떤 정보를 입수한다는 단순한 의미보다 인생 경험, 철학적 명제의 깊은 이해처럼 시일과 반추의 기간을 필요로 한다는 엄청난 사실을. 그래서 인간은 긴 세월을 학교에 다니고 임산부처럼 일정 기간을 견디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임신 끝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듯 창조적인 결과가 터지는 것이 배움의 결실이다.     공자(孔子: BC 551~479) 제자들이 이룩한 논어(論語) 맨 첫 구절,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를 살펴본다. 영어로, ‘Isn’t it a pleasure to learn and practice what you learned?’로 싱겁게 번역한다.   이런 말을 미국인들에게 함부로 하면 건방지다는 인상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학구적 사고방식보다 실용적 생활습관을 선호하는 미국인들은 소위 ‘지식층, intelligentsia’을 크게 존경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은 더 심하다.   배움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면서 산다. 배우려는 마음과 호기심과 심리적 자세를 편애한다. 내게 있어서 언어는 특히 더 그렇다. 괴테(1749~1832) 왈,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자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He who knows no foreign languages knows nothing of his own.” 나 또한 정신과 의사 티를 내면서, “남에 대하여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전혀 배우지 못한다”고 말하겠다. 이때 ‘남’은 내 환자들도 포함한다.   병동 환자 그룹테러피를 하는 중 배움에 대하여 말한다. ‘learning’이 무엇이냐. 누가 “education이요!” 한다. 그럼 ‘education’은 뭐냐. “learning이요!”(?) 배움은 지금껏 몰랐던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이라 나는 설명한다. 그리고 “Knowledge is power,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을 누가 했는지 아느냐, 하고 묻는다.   모두 묵묵부답(默默不答)이다. 잘난 척하며 질문을 던졌지만 나도 얼른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우물우물 딴소리를 하다가 5분쯤 지나서 생각이 난다. 아, ‘Frances Bacon!’ ‘침묵은 바보들의 미덕이다, Silence is the virtue of the fools.’라는 명언 또한 남긴, 내가 되게 좋아하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1561~1626)   베이컨에 대하여 설명한다. 아무도 그가 셰익스피어와 동시대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나는 가끔 이렇게 쓸데없는 말을 환자들에게 하는 습관이 입에 뱄다. 습관 중에는 좋은 습관도 있고 나쁜 습관도 있는 법. 무슨 말이건 거침없이 하는 리처드가 일갈한다. “I like bacon!, 베이컨을 좋아해요!” 다른 환자가 곧바로 호응한다. “Bacon pizza is the best!, 베이컨 피자가 최고라고요!”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베이컨 베이컨 피자 실용적 생활습관 frances bacon

2023-10-17

[잠망경] 언어의 희롱

“대체로 언어는 진실을 감추는 도구다”라는 명언을 남긴 코미디언, 조지 칼린(1937~2008)의 ‘완곡한 표현에 대하여(On Euphemisms)’를 유튜브로 다시 본다.   전쟁 중 병사들이 겪는 신경 증상을 1차 세계대전 때 ‘전쟁 신경증(shell shock)’이라 했고, 월남전 후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그는 지적한다. 1920년대 초의 ‘신경증’이 반백 년 후 정신병으로 변한 것이다. 정부 지원 치료를 받기 위해서다.   장님을 ‘시각장애인(visually impaired)’으로, ‘지체장애인(physically handicapped)’을 ‘신체장애인(physically challenged)’으로 호칭을 바꾸는 사태에 대하여 그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소리친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컨디션을 바꾸어 부르면 컨디션이 바뀐다고 믿게 됩니다.”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고 말 바꿈 하면 망자(亡者)의 컨디션이 바뀐다는 심리상태다.    ‘말 바꾸기 운동’이 한국에서도 일어난다. 정신분열병을 조현병(調絃病)이라 부르면서 ‘분열’이라는 불쾌한 의미를 감추는 데 성공한다. 정신분열병을 의미하는 ‘schizophrenia’의 ‘schizo-’부분은 ‘찢어지다’라는 뜻으로 ‘가위(scissors)’와 말뿌리가 같다.   조현은 줄을 고르게 조절한다는 뜻. 줄을 조절한다는 의미가 마음 줄의 긴장도를 알맞게 하겠다는 뜻인지. 느슨하게. 아니라고?   편도선염, 대퇴골절, 대장암처럼 병변(病變)을 기술하는 진단명에서 멀리 가도 너무 멀리 갔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무엇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진술에 심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무엇인지를 조율하겠다는 치료 의도를 암시하는 진단을 내리는 것이 한국의 의학 수준인가.   반대로, 부드러운 표현이 강력한 표현으로 변하는 일이 정신과에서 터진다. 2023년 8, 9월에 걸쳐 월간 ‘Psychiatric Times’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에 대한 톱 기사가 표지를 덮었다. 주의가 산만한 것을 정신병으로 간주하다니.   미국에서 마약이 주성분인 ADHD 약이 동이 났다는 소식! 지난 20년에 걸쳐 꾸준히 상승하는 ADHD 과잉진단의 결과로 2023년 현재 약의 수요가 미국 제약회사의 공급 능력을 훌쩍 뛰어넘었다는 분석이다.   과잉진단의 가장 큰 요인은 제약회사의 약 선전에 부응하여 진단의 빈도가 높아진다는 것. 약이 먼저고 진단이 나중이라는 사연이며 의사들의 진단기준이 허술하다는 방증이다.   사회적인 압력도 큰 역할을 한다. 아이가 공부를 못하면 부모가 ADHD 자가진단을 내리고 의사에게 약 처방 압력을 넣는 것이다. 약은 코카인과 화학성분이 매우 비슷한 중독성 각성제다.   높지 않은 지능, 아동학대, 부모의 이혼 과정 같은 이유로 아이는 공부를 못하면서 마약 각성제를 먹는다. 그리고 약물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다른 아이들에게 성적이 뒤떨어지면 큰일 난다는 부모의 강박관념 때문에 제약회사들이 학술용어까지 써가면서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속으로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2023년 가을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언어 희롱 전쟁 신경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마약 각성제

2023-10-06

[잠망경] 언어의 희롱

“대체로 언어는 진실을 감추는 도구다.”라는 명언을 남긴 코미디언, 조지 칼린(George Carlin, 1937~2008)의 유튜브, ‘On Euphemisms, 완곡한 표현에 대하여’(1990)를 다시 본다.   전쟁 중 병사들이 겪는 신경 증상을 1차 세계대전 때 ‘shell shock, 전쟁 신경증’이라 했고, 월남전쟁 후에는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그는 지적한다. 1920년대 초의 ‘신경증’이 반백 년 후 정신병으로 변한 것이다. 정부 지원 치료를 받기 위하여.   ‘blind, 장님’을 ‘visually impaired, 시각장애자’로 ‘physically handicapped, 지체부자유자’를 ‘physically challenged, 신체장애인’로 미국이 장애인들의 호칭을 바꾸는 사태에 대하여 그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소리친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컨디션을 바꾸어 부르면 컨디션이 바뀐다고 믿게 됩니다.”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고 말 바꿈 하면 망자(亡者)의 컨디션이 바뀐다는 심리상태다.   ‘말 바꾸기 운동’이 한국에서도 일어난다.     정신분열병을 조현병(調絃病)이라 부르면서 ‘분열’이라는 불쾌한 의미를 감추는 데 성공한다‘schizophrenia’의 ‘schizo-’부분은 전인도 유럽어로 ‘찢어지다’라는 뜻으로 ‘scissors, 가위’와 말뿌리가 같다.   조현. 고를 調, 줄 絃. 줄을 고르게 조절한다는 뜻.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무대 왼쪽에서 걸어 나오기 전까지 현악기 주자들이 징~ 징~ 현을 조율하는 정황을 연상시킨다. 줄을 조절한다는 의미가 마음 줄의 긴장도를 알맞게 하겠다는 뜻인지. 느슨하게. 아니라고?   편도선염, 대퇴골절, 대장암처럼 병변(病變)을 기술하는 진단명에서 멀리 가도 너무 멀리 갔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무엇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진술에 심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무엇인지를 조율하겠다는 치료 의도를 암시하는 진단을 내리는 것이 한국의 의학 수준인가.   반대로, 부드러운 표현이 강력한 표현으로 변하는 일이 정신과에서 터진다. 2023년 8, 9월 양달에 걸쳐 월간 ‘Psychiatric Times’에서 ‘ADHD, 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에 대한 톱 기사가 표지를 덮었다. 주의가 산만한 것이 정신병으로 간주하다니.   미국에 마약이 주성분인 ADHD 약이 동이 났다는 소식! 지난 20년에 걸쳐 꾸준히 상승하는 ADHD 과잉진단의 결과로 2023년 현재 약의 수요가 전 미국에 산재한 제약회사의 공급 능력을 훌쩍 뛰어넘었다는 분석이다.   과잉진단의 가장 큰 요인은 제약회사의 약 선전에 부응하여 진단의 빈도가 높아진다는 것. 약이 먼저고 진단이 나중이라는 사연이며 의사들의 진단기준이 허술하다는 방증이다.   사회적인 압력도 큰 역할을 한다. 아이가 공부를 못하면 부모가 ADHD 자가진단을 내리고 의사에게 약 처방 압력을 넣는 것이다. 약은 코카인과 화학성분이 매우 비슷한 중독성 각성제!   높지 않은 지능지수, 아동학대, 부모의 이혼 과정 같은 이유로 아이는 공부를 못하면서 마약 각성제를 복용한다. 그리고 약물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다른 아이들에게 성적이 뒤떨어지면 큰일난다는 부모의 강박관념 때문에 제약회사들이 학술용어까지 써가면서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속으로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2023년 가을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언어 희롱 disorder 주의력결핍 마약 각성제 stress disorder

2023-10-03

[잠망경] 여자, 여인, 여성

한 주일 내내 궂었던 날씨를 뒤로하고 며칠을 청명한 하늘이 마음을 가라앉히는 2023년 9월 중순 뉴욕 가을 초입이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어린 시절 동요 가사가 떠오른다. “푸른 잎은 붉은 치마 갈아입고서~♪”부분에서 피식 웃는다. 어린 나이에 여자가 치마를 갈아입는 장면을 연상하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맞다. 방금 ‘여자’라 했다. 남자의 반대말로 쓰이는 여자. 군대 시절에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이라는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해변의 여인아~♪” 부분에서는 ‘여인’이라는 말이 아주 쿨하게 느껴졌다.   여인은 여자의 아어(雅語). 우아한 단어다. ‘해변의 여자야’, 하면 기분을 잡쳐버린다. 여자의 반대말은 남자지만, ‘여인’의 반대말로 ‘남인’이라고 하지는 않는 게 이상하다. 조선 시대의 사색당파 중 그 남인(南人)?   한국 소식에 50대 여성이, 그다음 날에는 70대 남성이, 어찌어찌 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연거푸 여성, 남성 하는 말투가 좀 이상하게 들린다. 영어로 여성, 남성은 ‘female sex, male sex’라는 쪼다 같은 직역이 가능하다. 여자, 남자로 쉽게 표현하면 될 것을 요즘엔 왜 ‘sex, 性’에 대한 뉘앙스를 풍기려 하는가. 억지스러운 우스갯말로, 이런 식이라면, 동네 목욕탕의 남탕, 여탕을 ‘남성탕’, ‘여성탕’이라 할 참인가.   여성은 집합명사다. 여자라는 개인들의 집합체를 통틀어서 여성이라 부르는 것이다. ‘여성운동’이라는 말은 있어도 ‘여자운동’이라는 말은 없다. ‘여성상위시대’라는 표현을 ‘여자상위시대’라 하면 어딘지 잡스럽게 들린다. 여성과 여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인류(人類)라는 집합명사와 사람이라는 단수명사를 혼동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당신은 ‘옆집 사람’을 ‘옆집 인류’라 부르겠는가.   한국인들은 왜 여자를 여성이라 부르고 싶어 하는가. 내 나라, 내 집, ‘my wife’라는 말 대신 우리 나라, 우리 집, 우리 와이프라 지칭하듯 단수(單數)보다는 복수(複數)의 장벽 뒤에 숨으려는 수줍은 마음에서인가. 일개 여자보다 여성이라는 거대한 무리를 송두리째 소유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남성심리의 발로인가.   성(性)은 섹스를 연상시킨다. ‘여성’은 더 심한 연상이다. ‘sex’의 어원은 14세기 말경 라틴어 ‘section, 과(課)’하고 말뿌리가 같고, 처음에 ‘자르다, 분류하다’는 뜻이었다가 16세기 초에 동물의 ‘암컷, 수컷의 특징’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dissect, 절개하다, 해부하다’, ‘sect, 종파(宗派)’ 같은 단어와 어원이 같다.   ‘sex’는 1906년에 성교(性交)라는 뜻으로 처음 쓰이기 시작했다는 기록이다. 영어도 우리말도 다른 성품, 이성(異性)과의 만남이 섹스다. 얼굴을 붉히거나 할 이유가 없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가 그렇게 냉담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얼마 전부터 야수파 또는 인상파로 알려진 프랑스 화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그림 중에서 한 여자를 화폭에 담은 것들만 주제로 삼아 시를 쓰고 있다. 예를 들면 시 제목을 “마티스 그림, ‘책 읽는 여자’에게”라 붙이고 한결같이 어찌어찌 하는 ‘여자에게’라 하며 지금껏 수십 편을 썼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모두 여자라는 말 대신 여성이라고 하는 세상에 ‘책 읽는 여성에게’ 하면 어떨까 하다가 기겁을 한다. 내 시를 여성이라는 집합 명사에게 증정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여자 여성 여자 남자 여성 남성 일개 여자

2023-09-19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