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망경] Hungry, Angry, Lonely, Tired
Alcoholics Anonymous(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 모임 슬로건에 심도 깊은 컨셉이 많이 있다. ‘Forgive and forget, 용서하고 잊어라’, ‘Let go and let God, 놓아버리고 신에게 맡겨라’ 하는 금언들이 그렇다.슬로건은 운율 감으로 호소력을 높인다. 금주(禁酒)가 걱정되는 경고, ‘Hungry, Angry, Lonely, Tired’가 있는데 약자로 ‘H.A.L.T’라 한다. 군대용어로 잘 쓰이는 ‘halt’는 ‘hold’와 같은 말뿌리로 ‘멈추다’라는 뜻.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잠시 생각해보라는 의미가 숨어있다.
허기지고, 화가 나고, 외롭고, 고달픈 것은 별로 권장할 만한 정황이 아니다. 허기와 고달픔은 육체적 증상뿐만 아니라 정신상태까지 포함한다. 배가 고플 때는 뭘 먹으면 되지만 정신적 공허감은 호락호락 해결되지 않는다. 육체노동에서 오는 단순한 피로감은 잠을 푹 자면 사라지지만 불철주야지속하는 정신적 고달픔은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왜 화를 내고 분노하는가? 실망과 좌절감이 분노의 씨앗이 된다. 좌절감은 부정적 감정을 마음에 담아서 삭히거나 소화하는 조용한 심리상태인 반면에, 오랫동안 참아왔던 울분이 자기도 모르게 화산처럼 폭발하는 경우가 많다. 분노는 맨날 분풀이 대상을 찾아다닌다.
발길로 걷어차는 쓰레기통, 쾅 닫는 문, 그리고 친구, 배우자, 정신과 의사, 상담사가 분노의 타겟이 된다. 분노하기보다 실망과 좌절을 소화할 줄 아는 사람이 더 성숙한 사람이라는 금과옥조를 늘상 상기하며 사는 소시민적인 우리가 아닌가.
무슨 이유에서건 속을 썩이다 보면 마음이 어두워지는 법.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어두운 마음, 우울한 기분을 가다듬고 대처하는 일에 몰두하려 한다. 자신과의 맞짱 뜨기 끝에 너무 힘이 달리면 남의 조언과 응원을 찾는다.
쓸쓸함, 외로움, 고독은 어떤가. 조금씩 다른 뉘앙스를 품고 있는 낱말들. 그중 쓸쓸하다는 표현이 가장 진솔하고 감성적으로 전해진다. 외로움이라는 묘사도 만만치가 않다. 고독이 제일 고차원적이라 할 수 있겠지. 어떤 감춰진 힘이 느껴질 정도로.
외로움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옛날 히트곡 ‘Are You Lonesome Tonight’의 애련한 무드가 묻어나지만 고독이라 하면 항일독립투쟁의 강인한 힘이 떠오른다.
고독은 정신집중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병동에서 환자와 대화할 때 응급상황 통보가 확성기를 크게 울리면 대화는 순식간에 단절된다. 나는 절대로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지 못한다. 정신집중은 고독한 시간을 필수로 한다.
고독(孤獨)의 ‘홀로 獨’은 犬(개 견)자와 蜀(애벌레 촉)자가 합쳐진 이상한 모양새의 형성문자다. 한자 사전은 “개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지만, 의미가 명확히 전달되지는 않는다.”고 투덜댄다. 나는, 에헴, 개와 애벌레는 서로 상관없는 독립개체라는 우스꽝스러운 의미가 바닥에 깔렸다고 우겨볼까 하는데. 개와 애벌레는 본질적으로 서로에게서 자유로운 존재들이다.
“삶은 고통이다”라는 명언으로 당신과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 쇼펜하우어가 이런 말을 했다. - 사람은 혼자 있는 동안만큼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고독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유를 사랑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혼자 있을 때만 진정으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본인 譯, ‘The World as Will and Ideas’: 1818)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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