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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경우

정치평론 유튜브를 보며 한국말 쓰임새를 배운다. ‘누구 같은 경우’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를테면, ‘홍길동은…’ 하는 대신에 ‘홍길동 같은 경우에는…’ 하는 표현을.
 
홍길동은 사람이 아니라 ‘경우’다. 홍길동이 유일무이하지 않고 홍길동 ‘같은’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암시다. 개별성은 없고 동질성만, 개인은 없고 단체만 존재한다는 사고방식, 소신 있고 개별적인 정치가는 없고 당에 충실한 당원(黨員)만 있다는 식이다.
 
우리 ‘DNA’에 면면히 흐르는 대인기피증의 소치일까. 상대의 ‘first name’을 부모가 자식 이름을 부르듯 불러대는 미국적 말 습관에 반하여 우리는 성명(姓名, full name) 뒤에 꼭 직함을 부친다. 이를테면,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대표. 이들은 무슨 경우인가.
 
성씨(姓氏, last name)만 부르는 습관은 미국도 한국도 마찬가지. 군대에서 홍길동 병장을 홍 병장, 한국 드라마 회사 회식 장면에서 술에 취해도 김과장님, 김비서, 한다. 이름보다 직함이 중요하다.
 
지경 境, 만날 遇, 경우(境遇)라는 한자어는 참으로 이상한 단어다. 경우는 경계선에서 만나는 일이다. 국경, 군사경계선에서 쌍방이 잔뜩 긴장해서 조우하는 정경이다.
 
‘경우가 바르다’라는 표현은 사태를 잘 파악해서 공과 사를 헤아리는 분별심이 있다는 뜻이다. 국립국어원 왈, “경우(境遇)가 바르다는 말은 틀리고, ‘경위(涇渭)가 바르다’가 맞는다”는 기록이 나를 매우 헷갈리게 한다. 중국의 경수강(涇水江) 물은 흐리고, 위수강(渭水江)의 물은 맑아 흐림과 맑음을 뚜렷이 구별된다는 데에서 유래한, ‘경위가 바르다’가 맞다는 설명이다. 여간한 중국애호가가 아니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두 개의 중국 강을 굳이 내세우는 어원학이다.  
 
‘경위’라는 말이 나왔으니 망정이지, 에헴, 차라리 범세계적 차원에서 ‘경위가 바르다’는 표현은 지구상의 경도(經度), 위도(緯度)에서 유래했다는 추리는 어떠냐.
 
‘경우’는 영어로 ‘case’라 옮기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다. ‘In case she doesn’t show up…, 만약 그녀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에는…’ ‘case’는 상자나 박스처럼 네모가 반듯하다는 의미에서 공식용어로도 자주 쓰인다. 환자를 토론할 때 더욱더 그렇다. ‘case presentation, case study, case report’, 같은 경우처럼.
 
‘case’는 전인도유럽어로 ‘추락’이라는 뜻이었다. 13세기 초고대 불어로 ‘상황, 말싸움, 재판’, 게다가 라틴어로는 ‘사고(accident), 멸망’이라는 뜻이었고 14세기 말에 법정용어로 ‘소송’, 의학용어로 ‘질병(disease)’이라는 의미도 파생됐다. 중언부언해서 당신에게 미안하지만, 지경 境, 만날 우 遇, 경우(境遇)는 군사경계선에서 발생하는 알력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다.
 
갈등이 있을 때 우리는 갈등 해소에 전력을 기울이려 한다. 문제 해결이초점인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문제 해결보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증오심이 사태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혹시 아닐까.
 
그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정황을 감추기 위하여, “너 나빠, 너를 안 좋아해, 네가 미워!” 하는 유치한 말이 저도 몰래 터지는 것이 두려워서 우리는 ‘당신 같은 경우에는…’ 그리고 ‘나 같은 경우는…’ 하며 안간힘을 쓰며 심리적 거리감을 유지하려, 발버둥이 아닌 ‘말버둥’을 치는 게 아닐까 하는데. 늘 경우가 바르다는 이유로 내가 존경하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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