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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이중장부

서량 정신과 의사

서량 정신과 의사

우리는 이중장부의 삶을 산다. 하나는 내면세계(internal world), 다른 하나는 외부현실(external reality)을 기록한다. 전자를 ‘private life’, 후자를 ‘social life’라 부른다.
 
오래전 수련의 시절. 피부가 뽀얀 입원환자와의 대화가 떠오른다. 스무 살 좀 넘은 그녀는 자기가 당시 미국을 휩쓸던 영화 ‘Love Story’의 여주인공이라는 망상을 호소한다. 저를 영화 속 음대생 제니라 불러달라 요구한다. 세션마다 자신과 하버드 법대생 올리버와의 뜨거운 사랑을 상세하게 묘사하면서.
 
그녀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럽다. 지도교수는 그녀가 하는 말을 받아들이며 계속 듣기만 하라 한다. 나는 그의 충고를 실천에 옮기며 나도 모르게 환자가 정말 제니라고 착각한다.
 
어느 날 황망스럽게 그녀에게 물어본다. “제니야, 영화에서 제니는 결국 백혈병으로 죽었는데 너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 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니?” 제니가 답한다. “그건 영화일 뿐이죠. 당신같이 스마트한 의사가 어떻게 내가 하는 말을 그렇게 다 믿으세요?”
 
제니가 퇴원하는 날. 아직도 ‘러브 스토리’의 여주인공 시절을 생각하느냐고 물어본다. 자신이 제니라고 여전히 굳게 믿지만, 간간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며 그녀가 뽀얗게 웃는다. 저와 올리버와의 소중한 사랑 이야기를 경청해 줘서 눈물을 글썽이다시피 고맙다고 덧붙인다.
 
단 하나의 진실을 신봉하지 못한 채 서로 상반되는 논리를 펼치는 제니의 모순성에 대하여 나는 비판적 시선을 던진다. 일신교(一神敎)에 푹 젖은 사고방식으로는 다신교(多神敎)의 다양성을 십분 만끽하지 못하는 법. 동물왕국은 대상의 차별화를 전제로 하는 들판에 야생으로 서식한다.
 
2023년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 발표 논문을 읽는다. ‘Double Bookkeeping in Schizophrenia Spectrum Disorder’(정신분열 [조현병] 스펙트럼 장애의 이중장부). 반사회적 그림자가 스쳐 가는워딩으로 들리는 타이틀.
 
논문은 정신분열 스펙트럼 환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①이들은 망상, 환상 같은 정신증상을 일상과 동떨어진 체험으로 인식한다. ②그런 경험 때문에 남들과 세상에서 멀어진다. ③그런 대체현실(alternate reality)을 자신들이 처한 사회적 공유현실(shared reality)보다 더 심각한 진실로 받아드린다. ④그런 상황을 스스로 병(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⑤그런 자신들의 체험을 말로 표현하기를 매우 어려워한다.
 
논리와 합리만으로 현실을 해명할 수 없다. 공적(公的)인 현실은 형식일 뿐, 사적(私的)인 내막이 없는 현실은 부재한다. 내과에 비하여 정신과는 검사보다 이해가 앞장을 서는 분야다. 자연과학보다 인문과학에 가깝다.
 
정신질환은 교정(correction)보다 방향전환(reorientation)을 요구한다. 정신치료는 약물투여 또는 성급한 교정을 목표로 하는 객관(客觀)적 자세보다 주관(主觀)이 우세하다. 환자의 주관이 방향전환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의사와의 교감이 필수여건이다. 말이 쉽지, 하며 당신은 고개를 저을지 모르지.
 
우리는 사회적 관습과 교제를 기록하는 사회장부(社會帳簿)보다는 내적인 진실을 몰래 적어두는 내면장부(內面帳簿)에 목을 매며 지내다가 모종의 교감이 일어나는 상대에게 그 장부를 보여준다. 삶의 가장 속 깊은 진실을 인증받기 위한 그 옛날 제니의 이중장부가 그랬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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