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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6·25 참전용사

미국 골프선수 채드 파이퍼는 이라크 전쟁 참전용사 출신이다. 2001년 9·11 테러에 충격을 받은 그는 입대를 결심하고, 2006년 이라크에 파병됐다. 이듬해 10월 그는 동료들과 순찰을 나갔다가 인생이 바뀐다. 순찰 중 적군을 조우한 파이퍼는 트럭 방향을 바꿨는데, 그때 급조폭발물(IED)을 들이받았다. 폭발로 트럭이 뒤집어지며 파이퍼는 정신을 잃었다. 왼쪽 다리는 더이상 쓸 수 없었다. 워싱턴DC의 군 병원으로 돌아와 오랜 시간 수술과 재활 치료를 받았다. 현재 그의 왼쪽 다리는 의족이 대신한다.   파이퍼는 미국에선 꽤 유명한 골프선수다. 지난 5월엔 미국 장애인 오픈에서 우승했다. 이 대회 두 번째 트로피다. 그가 골프선수로 빠르게 재기할 수 있었던 건 보훈부(VA)의 각종 지원 때문이다. 장애보상금, 연금, 취업지원, 주택자금대출 등 전방위적으로 지원한다. 제대군인은 연금으로만 올해 기준으로 연간 3만1714달러에서 소득을 뺀 금액을 받는다. 장애 정도에 따라 장애수당이 추가되고, 의족 등 보철구도 지원된다.   한국의 참전 노병들은 서글플 수밖에 없다. 부산의 80대 6·25전쟁 참전용사 A씨는 지난 4월부터 한 달 동안 마트에서 7차례에 걸쳐 참기름·젓갈 등 8만원 상당의 식료품을 훔친 혐의로 경찰에 잡혔다. A씨는 이가 안 좋아 미역국을 끓이려 했는데 참기름이 없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그가 받은 정부의 참전명예수당은 월 39만원이다. A씨에게 후원하겠다는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는 ‘훈훈한’ 뉴스도 나왔다.   국가보훈부는 6·25전쟁에 참전한 국군과 유엔군 용사를 위한 ‘수호자의 발걸음’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3일 밝혔다. 전투 중 입은 부상과 동상 등으로 발 모양이 변형돼 기성화가 맞지 않는 참전 유공자 300명에게 맞춤형 신발을 제작해주는 프로젝트다. 6·25 전쟁이 정전된 지 70년 됐다. 300명은 70년 동안 맞지도 않은 신발을 신었던 것일까. 왜 아직까지 치료받지 못했을까. 6·25전쟁 참전유공자 평균 연령이 91세라고 하는데 이제서야 제 발에 맞는 신발을 찾게 되는 것과 A씨의 생활고를 해결할 방법이 민간의 ‘온정’밖에 없다는 것이 마치 훈훈한 일처럼 다뤄지는 게 이상하다.분수대 참전용사 25전쟁 참전용사 25전쟁 참전유공자 장애보상금 취업지원

2023-07-05

[분수대] 챗GPT 시대의 교육

최근 핀란드와 관련해 나토(NATO) 가입 여부가 가장 뜨거운 이슈지만, 한국인에게 이 나라는 예전부터 ‘교육 강국’으로 통했다. 2000년 OECD가 처음 실시한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핀란드가 종합평가 1위를 차지하면서다. 3년 간격으로 시행하는 이 시험에서 핀란드는 2003년, 2006년 연속 종합 1위였다.   이후 강력한 사교육에 기반한 한국·싱가포르·중국 등에 밀려 핀란드 순위가 10위 정도로 뒤처졌지만, 세계인의 뇌리엔 공교육만으로 빼어난 성과를 이룬 핀란드가 ‘교육 천국’으로 각인됐다. 특히 과도한 경쟁과 사교육 열기로 종종 ‘압력밥솥’에 비유되는 우리 교육계엔 핀란드가 선망의 대상이다.   요사이 핀란드 교육이 다시 화제다. 지난해 불가리아의 ‘오픈 소사이어티 연구소’가 발표한 ‘미디어 리터러시(미디어를 통한 정보 취득 능력과 이해력) 지수’에서 핀란드가 5년 연속 1위에 올랐다. 이 지수는 유럽 41개국을 대상으로, 국가별 언론 신뢰도와 평가자의 읽기·과학·수학 능력 등을 종합해 산출한다.   이 지수가 높은 이들은 콘텐트 속에서 허위 정보를 걸러낼 수 있어 가짜뉴스에 함몰되지 않으며 팩트(fact)를 찾아내는 회복력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핀란드는 2013년부터 유치원과 학교는 물론 도서관 등에서 청·장년과 노년층에게도 미디어 속 ‘가짜 정보’ 식별법을 가르쳐왔다.   이는 챗GPT와 맞물려 주목받는다. 일각에선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새로운 콘텐트를 만들어내는 챗GPT가 지금의 소셜미디어를 대체할 가짜뉴스의 새 플랫폼이 될 거라 우려한다. 얼마 전 중국판 챗GPT 등장에, 대만이 “중국의 입장만을 대변할 테니, 대만판을 만들어 대응하겠다”고 했다. 챗GPT에 ‘의도된 데이터’만을 학습시켜 편향된 정보를 퍼뜨리는 스피커로 삼는 게 가능하단 얘기다.   한국은 챗GPT판 가짜뉴스에 대응할 준비가 됐을까. 2018년 PISA 결과, 읽은 내용 중 사실과 의견을 구별해낸 한국 학생은 25.6%였다. OECD 평균치의 절반 수준으로, 사실상 꼴찌다.   “나토 가입을 앞두고 러시아가 가짜뉴스를 대량 쏟아내지만, 우린 교육의 효과를 믿는다.” 핀란드 교육부 담당자의 말이다. 교육은 백년대계라는데, 이들의 선구안과 자신감이 어느 때보다 부럽다. 박형수 / 한국 국제부 기자분수대 교육 핀란드 교육부 사교육 열기 우리 교육계

2023-02-26

[분수대] 마일리지의 주인

동네 정육점에서 삼겹살 한 근을 사도 포인트를 쌓아준다. 또 와 달라는 사장님의 당근책이다. 이런 리워드 시스템이 전 산업에 걸친 마케팅 수단으로 자리 잡은 덴 항공 마일리지가 큰 역할을 했다. 1980년 미국 웨스턴항공은 로스앤젤레스~샌프란시스코 구간 승객에게 50달러 쿠폰을 줬다. 다시 타면 여기서 요금을 깎아줬는데 이듬해부터 전 세계 항공사가 따라 하기 시작했다.   최근 마일리지 제도 개편에 나선 대한항공이 뭇매를 맞고 있다. 공제 기준을 ‘지역’에서 ‘거리’로 바꾸는 게 핵심이다. 현재 동남아는 동일하게 편도 2만 마일리지를 공제하는데 앞으로는 다낭 1만7500, 발리 2만7500 식으로 차이를 두겠다는 것이다. 가까운 곳에 갈 땐 이득, 멀리 갈 땐 손해인 셈인데 대한항공은 다수 고객이 단거리 노선에서 마일리지를 쓰기 때문에 혜택이 커졌다고 설명한다.   모을 땐 신이 나도 마일리지 사용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일단 좌석이 없다. 마일리지 좌석은 전체의 5%밖에 안 된다. 뉴욕 같은 인기 취항지는 대략 1년 전부터 예약 전쟁이 벌어진다. 단거리가 좋아서 많이 쓰는 게 아니란 얘기다. 힘들게 구해도 세금은 따로 낸다. 뉴욕을 오간다면 7만 마일리지를 쓰고도 대략 50만원을 추가로 결제해야 한다.   사용처를 늘리겠다며 요금 일부를 마일리지로 내는 복합결제를 시행하고, 자체 몰도 확대했지만 불만은 여전하다. 그도 그럴 게 제주 호텔은 주말 최대 3만6000 마일리지를 공제한다. 미국행 편도 항공권 가치다. A380 모형 비행기는 8000, 500㎖ 생수 30병은 3000 마일리지다. 포인트를 열심히 모았는데 정육점 사장이 고기 살 때는 안 되고, 파채나 사 먹으라고 한다면 납득할 수 있을까.   회계상 마일리지는 부채인데 정작 항공사는 ‘보너스 항공권’이라 부른다. 뭔가 한참 잘못됐다. “진짜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무 장관의 압박은 그래서 일리가 있다. 대한항공은 경쟁사보다 마일리지 공제율은 낮고, 적립률은 높다고 항변한다. 억울하겠으나 기껏 모아도 제대로 쓸 수 없는 고객의 마음을 여전히 헤아리지 못하는 듯하다. 대한항공은 독보적인 국내 1위다. 아시아나항공과의 합병이 성사되면 당분간 경쟁자조차 없을 터다. 마일리지의 주인이 지금, 1등의 자격을 묻고 있다. 장원석 / 한국 증권부 기자분수대 마일리지 마일리지 좌석 회계상 마일리지 항공 마일리지

2023-02-22

[분수대] 메시

 월드컵 트로피를 거머쥔 리오넬 메시(35.사진)의 ‘축구 황제’ 대관식은 수십 년에 걸친 인간드라마 속 절정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메시가 가진 천부적 재능만큼이나, 그가 극복해온 역경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메시는 11살 때 성장호르몬 결핍증 진단을 받았다.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을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철강노동자와 파트타임 청소부로 일하던 그의 부모에게 월 100달러가 넘는 호르몬 주사 치료비는 벅찼다. 메시가 뛰던 유소년팀도 치료비 부담에 난색을 보였다.   이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팀이 FC바르셀로나였다. 약값을 대는 조건으로 2000년 그를 영입했다. 당시 메시의 재능에 매료된 구단 스카우터가 즉석에서 냅킨에 서명해 계약서를 꾸몄다. ‘냅킨 계약서’의 도박은 성공이었다. 꾸준한 치료로 170㎝까지 자란 메시는 2004년 1군에 데뷔해 17년간 뛰며 말 그대로 전설이 됐다.   국가대표팀 경력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네 번의 월드컵과 코파아메리카에서 번번이 우승을 놓치자, 극성팬들은 메시가 아르헨티나보다 바르셀로나를 더 사랑한다고 비난했다. 메시의 외할아버지조차 2014년 월드컵 직후 방송에서 “스페인에서 보여주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납득이 안 된다”고 할 정도였다. 2016년 코파아메리카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실축한 메시는 결국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다. 대통령을 비롯한 전 국민의 광적인 만류에 2개월 만에 은퇴를 번복하긴 했지만, ‘우승해야 한다’는 부담은 오히려 커졌다.   그런 메시에게 이번 월드컵은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다. 대표팀에는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자신을 보며 축구선수의 꿈을 키운 ‘메시 키즈’가 적지 않았다. 사우디 전의 충격적 패배로 출발도 나빴다. 그러나 메시는 동료들을 하나로 묶어 아르헨티나를 결승전까지 이끌었다.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월드컵 결승전이었다. 왜소한 몸에 질병을 앓던 가난한 소년에서 ‘축구의 신(神)’이 된 그를 향해 아르헨티나 국민은 “메시 만세”를 외치며 열광했다. 100%에 달하는 물가상승률, 40%에 이르는 빈곤율 등 경제난에 신음하는 그들에게 메시가 준 선물이 우리 대표팀이 그랬던 것처럼 ‘꺾이지 않는 마음’이길 바란다. 한영익 / 한국 정치에디터분수대 메시 리오넬 메시 메시 키즈 메시 만세

2022-12-21

[분수대] 빌드업 축구

빌드업(Build-up)을 직역하면 건축물 같은 무언가를 쌓아 올리는 것을 뜻한다. 축구에서는 다른 의미로 쓰인다. 우리 진영 최후방에서부터 팀동료에게 공을 정확히 연결하며 적진으로 나아가는 공격의 기초 단계를 뜻한다. 공을 침착하게 차근차근 전진시킨다는 점에서 원래 뜻과 비슷한 측면도 있다. 반면에 빌드업 과정 없이 공을 단순히 멀리 걷어내기만 하면 공 소유권을 지키기 어렵고, 경기를 주도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강팀들은 후방에서부터 치밀하게 빌드업을 해나가는 게 기본 전술이다. 빌드업 축구의 원조 격으로 불리는 스페인뿐만 아니라 브라질·독일 같은 전통적인 강팀 대다수가 안정적인 빌드업을 바탕으로 공격에 착수한다. 골키퍼들조차 수 미터 앞에서 상대 공격수의 압박을 받는 일촉즉발 상황에서 공을 걷어내지 않고 가까이 있는 동료를 찾아 정확하게 패스하는 식이다.   ‘빌드업 축구’가 정식 전술용어는 아니다. 빌드업이 현대축구 전술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파울루 벤투 감독을 한국으로 데려온 김판곤 말레이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전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감독 선임위원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공격 전개(빌드업)라는 표현이 어떻게 그 감독의 전술이라고 할 수 있겠나”라며 “빌드업 축구로 전술을 못 박는 건 감독의 철학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의 경기를 ‘빌드업 축구’라고 지칭하며 찬사를 보낸 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경기 내용 때문이다. 하프라인 아래에 진을 친 채 온몸을 던져 상대의 슛을 육탄방어하는 대신, 브라질·포르투갈·우루과이 같은 강팀을 만나서도 물러서지 않고 주도권 대결을 펼치는 모습은 특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6일 새벽 브라질과의 16강전에서 4대1로 크게 패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과정에 집중한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낸 국민이 적지 않았다. 결과 이상으로 과정에 주목하는 이들이 늘어났다는 의미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한 프로게이머 김혁규의 한 마디는 이번 월드컵 기간 부상을 딛고 싸운 한국 대표팀의 투혼을 상징하는 캐치프레이즈가 됐다. 과정을 향한, 빌드업을 향한 한국 축구의 진심이 꺾이지 않길 바란다. 한영익 / 한국 정치에디터분수대 빌드업 축구 빌드업 축구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감독 빌드업 과정

2022-12-07

[분수대] 음모론

음모론은 매혹적일 때가 많다. 사건의 원인·배경이 분명하지 않을 때, 배후에 ‘권력 또는 비밀단체’가 있다고 손짓해주기 때문이다. 음모론을 처음 접하면 겉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치지만, 속으로는 ‘혹시 또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9·11테러에 미국 정부가 개입했다거나,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장면이 세트장에서 연출됐다는 주장을 듣는다면 처음에는 누구나 귀가 솔깃해진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이 특정 지역의 인종을 몰살시키기 위해 고의로 에이즈를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이런 음모론은 보통 개연성에 근거해 가정과 비약이 덧대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건이 우연히 일어나는 게 아니라 배후와 목적이 있을 거라고 믿는 인간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사건의 배후로 정적을 지목할 때 음모론은 진영논리에 복무한다. 세월호 참사 때 일부 진보단체를 중심으로 퍼졌던 ‘인신공양설’, 천안함 피격 당시 퍼진 ‘좌초설’ ‘잠수함 충돌설’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탈진실(Post-truth) 시대와 맞물려 결국 정치를 종교화하는 데 일조했다. 진실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음모론이 “세상의 일을 자세히 알려고 할 때 그걸 방해하고자 하는 사람이 들이대는 지적인 욕설”(노엄 촘스키 MIT 명예교수) 이라고 비판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음모론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진실이 굳건해질 때도 있다. 천안함은 음모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법원 등으로부터 어뢰에 의한 폭침이라는 점을 여러 차례 공인받았다.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 같은 경우 처음에는 ‘정치공작 음모론’ 정도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2009~2012년 조직적인 여론조작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케이스다. 시간과 노력이 들어도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헛되지는 않다는 방증이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7일 ‘이태원참사는 마약과의 전쟁 때문’이라는 주장을 한 야당 의원을 향해 “직업적인 음모론자. 정치 장사를 한다”고 비판한 뒤 후폭풍이 거세다. 여당에서조차 “품격에 맞지 않는 행동”이라는 말이 나왔다. 한 장관이 음모론을 좀더 진지하게 대하길 바란다. 그게 음모론인지 진실인지 판단하는 건 한 장관이 아니라 국민이기 때문이다. 한영익 / 한국 정치에디터분수대 음모론 정치공작 음모론 국정원 여론조작 천안함 피격

2022-11-09

[분수대] 국가애도기간

2001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9·11테러 사흘 뒤인 9월 14일을 ‘애도의 날’로 정했다. 한국인을 포함한 희생자 2977명을 추모하기 위해서다. 전국 관공서·학교가 조기를 게양하고 오전 10시 사이렌을 울려 1분간 묵념했다. 이전에도 KAL기 폭파(1987), 삼풍백화점(1994)·성수대교(1995) 붕괴 등 수백명의 사상자를 낸 대형 사고가 있었지만 정부가 애도를 위한 날짜·기간을 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2010년 4월 천안함 피격 때 이명박 정부가 해군장 장례 기간(5일간)을 ‘국가애도기간’으로, 영결식 당일을 ‘국가애도의 날’로 명명했다. 기존 ‘국가장’ 때 장려해 온 전 국민적 추모 분위기를 불의의 군사 사건에 적용키로 결정한 것이다. 전·현직 대통령 등이 사망하면 현행법(국가장법 4조)상 최대 5일을 장례 기간으로 정해 추모한다. 다만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공직사회 기강 확립”을 지시했을 뿐, 별도의 애도기간을 선포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과거 사례가 제각각이다 보니 이번 이태원 핼러윈 참사 애도기간(10월 30일~11월 5일) 동안 적잖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뭘 해야 하고, 뭘하면 안되는지’를 궁금해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국가애도기간에 회식을 해도 되나”, “공연(예능)은 예정대로 하나”, “수학여행이 취소되는 건 아닌가” 등의 글이 올라온다. 국가애도기간 중 일반 시민의 활동 범위를 명문화해 규정한 법적 근거나 시행령은 없다. 천안함 때 정부가 부처·지자체·공공기관 등에 .검소한 복장 .근조(謹弔) 리본 패용 .행사 자제(불가피한 경우 간소화) .조기 게양을 지시했고, 현 정부도 비슷한 공문을 내려보냈다.   한켠에서는 이번 애도기간 설정을 두고 ‘7일이나 하는 게 맞나’, ‘군인 순직과는 성격이 다르다’ 등의 논쟁이 벌어지는 모습도 보인다. 130명이 희생된 지난 2015년 파리 테러 때 부인을 잃은 저널리스트 앙투안 레리가 테러범들에게 쓴 편지 구절을 소개한다. “우리는 최대한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짐으로써 당신(테러범)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당신이 바라는 증오 따위는 없다.”   공방과 증오가 아닌, 공감과 배려만이 비극을 진정으로 극복하는 열쇠다. 심새롬 / 한국 정치팀 기자분수대 국가애도기간 참사 애도기간 이번 애도기간 현직 대통령

2022-11-06

[분수대] 이태원동

이태원동은 예로부터 사람이 많이 다니던 곳이었다. 동 이름 자체가 조선시대 역원에서 유래했다. 먼 길을 가야 하는 파발과 관리에게 말을 빌려주는 곳은 역(驛), 잠자리와 밥을 제공하던 곳은 원(院)이라고 했다. 현 이태원동과 멀지 않은 서울 용산동 용산고 부지 인근에 이태원이란 이름의 원이 있었다.   조치원이나 인덕원·장호원처럼 교통의 요지마다 ‘원’으로 끝나는 지명이 남아있는데 모두 역원이 있던 자리였다. 이태원도 그랬다. 고려시대부터 수도와 중부·영남지역을 연결하는 첫 길목으로 교통 요충지 역할을 했다. 영남과 수도를 오가는 많은 사람과 물자가 모이던 지역이었다. (서울역사박물관 발간 『이태원 공간과 삶』)   그런 이태원에서 참사가 났다. 평소 휴일에도 수만 인파에 골목마다 길이 밀리던 곳이다. 게다가 코로나19 이후 마스크 없이 보내는 첫 핼러윈 데이 주말이었다. 10만 명 넘는 인파가 몰릴 것이란 예측이 있었다. 그러나 행사 주최자가 특정되지 않았던 탓에 제대로 된 통제는 이뤄지지 않았다. 인파가 넘치는 가운데 사고는 갑작스럽게 발생했다. 혼란은 참사로 이어졌다. 사고 직후 수많은 소방관·경찰관·의료진·시민 등의 분투가 있었지만 희생을 다 막을 순 없었다.   ‘왜 거기에 갔냐, 왜 그랬냐’는 한탄 섞인 목소리가 한켠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젊음은 죄가 없다. 외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경기장에서, 종교행사에서, 공연장에서. 그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참담한 무력감과 바닥없는 우울이 한국 사회 전체를 덮쳤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다시는 없었으면 했던 국가적 재난을 또 목도하게 됐다. 8년 전 경험했던 비탄과 고통이 다시 밀려들었고 일상은 쓸려나갔다.   이태원 참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많은 부상자가 지금도 생사를 오가고 있다. 현장에 있었던 생존자와 목격자, 그리고 유가족 등이 겪을 트라우마는 이제 시작이다. 이들에 대한 지원을 포함하는 사고 수습이 필요한 이유다. 참사 원인과 과정에 대한 철저하고 엄중한 조사도 뒤따라야 한다. 많은 생명이 무참하게 사그라지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말이다. 조현숙 / 경제정책팀 차장분수대 이태원동 이태원 참사 이태원 공간 세월호 참사

2022-11-02

[분수대] 과로노인

‘노인 자신이 하류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현역 시절과 똑같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죽기 직전까지 일해야 하는 사회가 기다리고 있다.’   후지타 다카노리(藤田孝典)가 쓴 책 『과로노인』의 한 대목이다. 노인 복지 전문가인 그는 2015년 발간한 『하류노인이 온다』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돈도, 기댈 사람도 없는 노인이 넘쳐나는 현실을 직시한 책으로 그해 일본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2016년 펴낸 『과로노인』은 후속편 격이다.   후지타는 이 책에서 일본 고령자 취업률이 다른 선진국보다 유독 높다며 ‘일할 의욕이 높아서’가 아니라 ‘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015년 통계를 근거로 들었다. 65세 이상 고령자 고용률이 프랑스·독일·영국은 한 자릿수인데, 일본은 20.1%라며 일본 고령자가 ‘과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진짜 과로하고 있는 건 한국 노인이다. 2015년에도 한국 65세 이상 고용률은 30.6%로 이미 일본보다 한참 위였다. 이후 한국 상황은 더 악화했다. 2015년 한국의 노인 고용률은 아이슬란드에 이어 2위였지만, 2020년 이후 아이슬란드를 제치고 1위 자리에 올랐다. 15% 안팎인 OECD 평균의 2배다. 최근 상황은 더 심각하다.   지난주 통계청이 발표한 ‘고용동향’ 보고서를 보면 지난달 65세 이상 고용률은 38%였다. 매번 최고 기록을 경신하는 중이다. OECD 1위를 지키고 있는 노인 빈곤율에 이어 노인 고용률까지, 한국은 과로노인 2관왕 국가다.   한국 노인이 유독 게을러서, 계획 없이 살아서가 아니다. 1970~90년대 한국이 고도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이전 세대의 성실성 때문이다. 낮은 임금을 받고도 질 높은 노동력을 제공하며 세계 최장의 근로 시간을 자랑했던 그들이다.   다시 『과로노인』으로 돌아가면 저자는 가족 부양을 원칙으로 하는 사회 통념과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복지제도가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대수술이 필요하지만 현 정부 역시 각종 연금·복지제도 개혁의 첫발도 떼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다. 과로청년이 과로중년이 되고 과로노인이 되는 수밖에. 조현숙 / 한국 경제정책팀 차장분수대 과로노인 노인 고용률 한국 노인 노인 빈곤율

2022-10-19

[분수대] 달러 패권

‘달러 패권’의 시작점엔 금이 있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진행되며 이전까지 거래수단인 금 외에 좀 더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화폐가 인기였다. 은행에 금을 맡기면 같은 가치의 화폐로 교환해줬다. 당시 세계 무역을 장악했던 영국의 화폐인 파운드가 기축통화(국제간 금융 거래의 기본 화폐)로 쓰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영국은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파운드 발행을 늘렸다. 화폐 가치는 떨어졌고 불안해진 사람들은 파운드를 금으로 바꿨다. 영국은 이를 감당할 만큼의 금이 없자 금본위제도(금과 화폐의 일정량을 등가관계로 유지)를 포기했다. 1944년 세계 주요 국은 당시 전 세계 금의 80%를 보유한 미국 화폐인 달러를 기축통화로 정했다.   1960년 베트남 전쟁이 시작됐다. 미국은 15년간 이어진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달러를 무한정 찍어냈고 결국 금도 바닥을 보였다. 1971년 미국도 금본위 제도를 포기했다. 달러는 더는 금으로 바꿀 수 있는 금태환이 아닌 종이돈(피아트 머니)일 뿐이었다. 1974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대신 석유수출대금을 달러로 받으라는 협정을 맺었다. 종이돈은 페트로 달러(오일 머니)가 됐고, 현재까지 세계 기축통화다.   최근 미국은 물가 안정을 이유로 기준 금리를 공격적으로 높이고 있다. 지난 6개월간 3%포인트 올렸다. 그런데 사실 금리 인상 외에 물가 안정을 위한 별 조치도 없어 보인다. 예컨대 중국을 겨냥한 높은 관세는 여전하다. 무역 장벽 축소는 뛰는 물가를 잡기 위한 강력한 조치로 꼽힌다. 에너지 대란을 겪고 있지만, 화석연료 산업을 배척하는 태도도 여전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미국은 추가 금리 인상을 예고하고 있다. 전 세계가 미국의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미 한화 가치는 역대 세 번째로 낮은 수준이다. 이로 인해 대출금리 인상, 소비 위축, 경기 침체 등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달러 패권의 부정적 효과가 지속한다면 결국 균열이 생기게 된다. 세계 무역 결제의 70%를 차지하는 달러 가치가 1%만 하락해도 각국의 자산 감소는 천문학적이다. 세계 경제가 혼란에 빠지면 결국 미국도 피해를 피할 수 없다. 포도 한 알 먹기 위해 포도밭 전체를 태우는 누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다. 최현주 / 한국 금융팀 기자분수대 패권 대출금리 인상 화폐 가치 세계 무역

2022-09-28

[분수대] 조용한 퇴사

오전 9시, 업무 시작. 내 프로젝트 범위 내에선 되도록 성실하되, 초과 업무나 돌발 상황엔 응하지 않는다. 오후 6시, 업무를 칼같이 종료함과 동시에 휴대전화를 끄고 e메일은 무시한다. 저녁은 동료나 상사가 아닌 가족·친구와 함께한다.   일은 충실히 하되, 완벽을 추구하진 않는다. 사표는 던지지 않았지만, 회사의 평가·경쟁과는 결별했다. 회사가 내게 제공한 것 이상을 되돌려줄 생각이 없으며, 조직에서 더 나은 지위·조건을 얻으려 애쓰지 않는다.   미국 MZ세대 사이에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 방식이다. 미국 뉴욕의 24살 엔지니어 자이어드 칸이 자신의 틱톡에 이 개념을 올린 뒤 널리 퍼졌다. 미국의 많은 젊은이가 “내가 꼭 이런 식으로 일하고 있다. 많은 일을 완벽히 하려다 크게 아픈 뒤, 이 방식을 택했다”라며 공감했다.   소셜미디어를 강타하고 있는 조용한 퇴사에 대해 일각에선 “저성과자들의 무책임한 행동”이라 비판한다. 조직 전체의 분위기를 흐리고, 동료의 불만을 야기하는 부적응 행위라며 “보상만을 위해 일하는 것은 불행하며, 업무를 즐기거나 몰입하지 못한 채 시간 낭비하는 건 슬픈 일”이라 동정하기도 한다.   뉴욕타임스 등 주요 외신은 “일이 삶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통념의 거부, 초과 근무를 할 것이란 ‘당연한’ 기대에 저항, ‘일을 사랑하라’는 허슬(hustle) 문화에 대한 반발”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의 시각은 좀 더 새롭다. “조용한 퇴사는 나쁜 직원이 아닌 나쁜 상사에 관한 문제”라고 짚었다. 직원들의 동기 부족은 관리자의 행동에 대한 반응이자, 신뢰할 수 없는 리더십의 결과라는 것이다. 조용한 퇴사를 감행한 직원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직원들은 자신의 에너지·창의성·시간·열정을 ‘자격이 있는 조직과 리더’에 주고 싶어한다는 사실부터 명심하라고 강조한다.   미국 얘기지만 가슴 한쪽이 뜨끔하다. 지난달 기록적 폭우 다음날 회사에 2분 늦어 시말서를 썼다는 사연, 새마을금고 출근 첫날부터 밥 짓고 수건 빨래했다는 여직원 얘기는 일부이긴 하지만 한국 직장의 여전한 현실이다. 미국도 한국도, MZ 탓 직원 탓 말고 리더의 자격부터 돌아볼 때다. 박형수 / 한국 국제팀 기자분수대 퇴사 여직원 얘기 초과 업무 업무 시작

2022-09-12

[분수대] 자폐 스펙트럼

 자폐 스펙트럼 장애(Autism Spectrum Disorder·ASD)는 신경 발달 장애의 한 종류다.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는 자폐, 부모와 의사소통은 가능한 고기능 자폐,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아스퍼거증후군 등 유사한 유형을 통틀어 일컫는다. ‘스펙트럼’이란 이름처럼 워낙 양상이 다양하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으면 지적 장애나 학습 장애도 나타나기 쉽다. 단, 특정 영역에 관한 기억력은 뛰어난 경우가 많다. 드물지만 특정 분야에서 천재적 재능이 나타나는 경우를 ‘서번트 증후군’이라 부른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와 비장애 사이,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지원할까』(마고북스)에 따르면 “임기응변적인 대인 관계가 서툴고, 자신의 관심과 방식 및 진행 속도를 유지하는 걸 가장 우선시하는 본능적 지향이 강한” 것이 자폐 스펙트럼의 전형적 특징이다. 이 책을 쓴 혼다 히데오 일본 자폐증협회 이사장은 장애 수준에는 이르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하면 인구의 10%가 자폐 스펙트럼에 해당한다고 추정한다. 나아가 저자 자신도 자폐 스펙트럼인이라고 고백한다.   채널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사진)’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주인공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변호사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회전문을 통과하는 것도 어려워한다. 재료가 훤히 보이는 김밥만 먹으며, 향고래의 특성에 집착한다. 다정한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지경이지만, 한번 읽은 법전은 잊어버리지 않는 천재적인 변호사로 맹활약한다.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판타지 같지만 현실 세계에서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일론 머스크도 테슬라 CEO가 대표적이다. 그는 지난해 미국 코미디 프로그램 SNL에 출연해 아스퍼거증후군이라고 고백했다. 자신이 가끔 이상한 말을 하거나 포스팅하는 건 뇌가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라면서다.   혼다 이사장은 자폐 스펙트럼인을 치료해야 할 환자가 아니라 ‘지원해야 할 소수파의 종족’으로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들을 대할 땐 먼저 경청하고, 명령이 아니라 제안을 해 합의를 이끌어내며, 구체적인 정보를 주고,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 신뢰를 심어주라고 권한다. 자폐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대할 때 필요한 자세 아닌가 싶다. 이경희 / 한국 이노베이션랩장분수대 스펙트럼 자폐 자폐 스펙트럼인 고기능 자폐 자폐 부모

2022-08-03

[분수대] 한·미 통화스와프

2008년 10월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간 갈등이 극에 달했다. 한·미 통화스와프 첫 체결 ‘축포’를 터뜨린 직후 일이다. 불만은 한은에서 먼저 터져 나왔다. 공식 발표일 하루 전에 기재부가 체결 사실을 흘리고 모든 공이 기재부에 있는 양 거짓 회견을 했다는 비판이었다.   기재부도 가만있지 않았다. 협상에 소극적이었던 한은이 막상 체결되고 나니 딴소리를 한다며 반박했다. 양측 수장을 겨냥한 원색적 비판, 책임자 경질론까지 물밑에서 오갔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위기 극복엔 부처 간 경계가 없다. 모두가 하나가 돼야 한다”며 공개 경고에 나설 정도였다.   ‘누구 공이냐’를 두고 양대 기관이 낯 뜨거운 다툼을 벌일 만큼 당시 한·미 통화스와프의 화력은 대단했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달러당 1500원 가까이로 추락했던 원화가치가 통화스와프 체결 이틀 만에 200원 넘게 수직 상승(환율 하락)했다. 필요하면 언제든 300억 달러까지 원화로 맞바꿔 인출할 수 있다는 협약의 효력은 컸다. 이름도 낯선 통화스와프가 한국인 머리에 각인된 건 그때다.   지난주 재닛 옐런 미국 재무부 장관이 한국을 방문했다. 외환시장이 불안한 만큼 한·미 통화스와프를 다시 추진해야 한다는 요구가 거셌다. 물론 옐런 장관은 통화스와프에 대한 직접적 언급 없이 한국을 떠났다. 예견된 일이다.   통화스와프에 대한 전권은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가 쥐고 있다. 재무부가 체결하라, 마라 할 처지가 아니다. 미 재무부 격인 기재부가 외환 제도·협력 정책도 총괄하는 한국과는 한참 다르다. 기재부 관계자는 난감한 처지를 한 문장으로 축약했다. “옐런 장관이 한·미 통화스와프를 체결하겠다고 발표하는 건 한은 총재도 아닌 추경호 부총리(기재부 장관)가 다음 달 기준금리를 올리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옐런 장관을 붙잡고 통화스와프를 체결해달라는 것 자체가 코미디란 얘기다. 14년 전 선배들이 했던 과잉 홍보의 대가를 지금 기재부가 치르고 있다. 통화스와프가 체결되면 시장에 좋겠지만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2008년에도 반짝 효과만 봤고 한국은 금융위기 폭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미 회담이 있을 때마다 통화스와프를 두고 변죽만 울리는 일이 더는 없었으면 한다. 조현숙 / 한국 경제정책팀 차장분수대 통화스와프 통화스와프 체결 기재부가 체결 기재부가 외환

2022-07-27

[분수대] 존영(尊影)

며칠간 ‘존영(尊影)’이라는 말이 뉴스에 오르내렸다. 지난 11일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 존영을 중앙당과 시·도당 사무실에 걸자”는 논의가 오간 게 계기다. 민주화 이후 태어난 한글 세대에게는 듣기조차 생소한 단어다. 존귀한(尊) 모습(影)이라는 의미로, 사전적 정의는 ‘남의 사진이나 화상 따위를 높여 이르는 말’(표준국어대사전)이다. 비슷한 말로 존조(尊照)가 있다.   무협지에서나 볼 법한 단어가 21세기 여당 회의에서 거론된 사연은 이렇다. 복수의 참석자들에 따르면 이날 한기호 사무총장이 최고위에 당무를 보고하면서 “지역 당원협의회와 시·도당 등에서 오래된 전직 대통령 존영 디자인 교체를 요구한다”는 민원을 전했다. 그러자 한쪽에서 “전직 대통령 사진을 거는데, 현직 대통령 사진은 어떻게 되나”라는 질문이 나왔다. “안 그래도 요청한 지역들에 윤 대통령 존영을 발송했다” “시·도당에서 거는데 중앙당에는 왜 안 거느냐는 말도 있다”는 식으로 논의가 흘러갔다.   국민의힘은 자유한국당 시절 홍준표 당시 대표 결정으로 이승만·박정희·김영삼 3인의 전직 대통령 사진을 당사에 걸었다. 더불어민주당 당사에는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이 있다. 이들은 모두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이다. 그래서 “영정도 아니고 왜 살아있는 현직 대통령 사진을 회의실에 거나. 기괴하다”라는 젊은 당직자와 보좌진 반응은 일리가 있다.   존영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풍기듯, 사진에 비현실적 권위를 부여해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발상 자체가 거부감을 준다. 스마트폰과 TV만 켜면 언제 어디서든 지도자 얼굴을 고화질로 볼 수 있는 시대에 사진 우상화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있는 일이다. 12일 홍콩 매체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올가을 당 총서기 3연임과 함께 ‘표준 초상화’를 준비 중이라고 보도했다. 북한에서는 6년 전 홍수 때 교사·학생 등 13명이 김일성·김정일 부자 초상화를 구하러 급류에 뛰어들었다가 사망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자유자재로 편집한 짤(사진)과 움짤(동영상)이 판치는 지금의 한국 정치에 존영 거론은 “시대착오적 발상”(조경태 의원)이 맞다. 역대 대통령 중 취임 초 최저 지지율을 기록 중인 윤 대통령이 때아닌 ‘사진 정치’ 논란을 겪는 것도 민망하다. 심새롬 / 정치팀 기자분수대 전직 대통령 현직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

2022-07-18

[분수대] 불행지수

미국 여론조사기업 갤럽은 매년 140여개 국, 15만 명을 조사해 ‘불행지수’를 발표한다. 구조화된 설문지 대신, 국가별로 면접관을 고용하고 교육한 뒤 전국으로 파견해 각계각층 사람들과 대면 인터뷰를 하는 방식이다. 엄청난 시간과 공이 들어간다.   갤럽은 불행을 슬픔·스트레스·분노·걱정 같은 정서적 괴로움에 육체적 고통을 더해 수치화한다. 조사 첫해인 2006년엔 24였던 불행지수는, 지난해 33으로 뛰어올랐다. 반면 만족감·즐거움·웃음·존중받음·배움 등의 총합인 ‘긍정적 경험 지수’는 같은 시기 68에서 69로, 단지 1이 늘었다.   짐 클리프턴 갤럽 대표는 지난달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 기고문에서, 불행의 증가 원인을 다섯 가지 추려냈다. 빈곤·외로움·고단함·불평등, 그리고 소셜미디어다. 그는 “세계의 기아 감소 추세는 멈췄고, 외로움의 해악은 하루에 담배 한 갑을 피우는 것과 같으며, 통계상 직장인은 실업자보다 부정적 감정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불평등과 소셜미디어의 공통점은 ‘비교’다.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비교로 이어진다. 소셜미디어는 비교를 일상화했다. 친구·이웃과의 비교도 벅찬데, 소셜미디어 속에선 전 세계인이 제 집안 깊숙한 곳까지 초대해 갖가지 자랑거리를 꺼내 놓는다.   ‘비교 불행’이라면 한국도 빠질 수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가 된 지 오래다. 알코올 관련 사망자는 2020년 5155명으로, 20년새 두 배가 됐다. 마약 사범도 빠르게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소셜미디어 대중화 등으로 ‘나는 남보다 못하다’는 상실감이 커진 탓”이라 진단했다.   불행지수를 낮추려면 비교를 멈춰야 할까. 조지 피터슨 토론토대 교수는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비교는 타인이 아닌, 자신과 하는 것”이라 조언한다. 비교를 멈추려 하지 말고 대상을 바꾸라는 얘기다.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한다. “라이벌·상사·자본주의 탓하지 말고, 책상 위부터 치우라”고 권한다. 하루 1분씩이라도 책상 한 쪽에 묵혀둔 서류더미 정리에 집중하란다. 또 삶을 장기적으로만 보지 말고, 5분 또는 1분 앞을 생각하라는 귀띔도 유용하다. 눈앞의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할 때, ‘어제의 나’와 비교해 덜 불행해진 오늘의 나를 만날 수 있다. 박형수 / 국제팀 기자분수대 불행지수 소셜미디어 대중화 여론조사기업 갤럽 갤럽 대표

2022-07-17

[분수대] 전쟁범죄

 전쟁범죄는 100년이 채 되지 않은 개념이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민간인·포로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게 핵심인데, 전쟁 포로의 대우에 대한 제3차 제네바협약은 1929년에야 채택됐다. 사실상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재판을 통해 전쟁범죄의 개념이 확립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전시 민간인 처우를 규정한 제4차 제네바협약도 전쟁 이후인 1949년에야 채택됐다.   한국인 사이에서도 전쟁범죄는 주로 2차 세계대전의 기억형으로 존재한다. 일본 정치인들이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논란을 일으킬 때 자주 거론된다. 전후 극동군사재판소는 ▶평화에 대한 죄(A급) ▶통례의 전쟁 범죄(B급) ▶비인도적 범죄(C급) 등으로 분류해 일제 전범을 단죄했다. 주로 전쟁을 기획하고 주도한 각료와 고위 군사 지휘관들이 A급 전범이 됐다.   현대에 전쟁범죄로 처벌받은 이들은 주로 제3세계 독재자가 많다. 1990년대 보스니아 전쟁에서 학살을 주도해 악명을 떨친 라도반 카라지치가 대표적이다. 2002년에는 집단 학살, 반인도적 범죄, 침략 범죄, 전쟁 범죄 등을 저지른 개인을 형사 처벌하기 위해 첫 상설 국제재판소인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만들어졌다.   서방에서는 전쟁 명분이 국내·외에서 전쟁범죄 논란을 일으켰다. 2003년 이라크전쟁 참전 진상을 조사해 2016년 공개된 영국의 ‘칠콧보고서’에는 “평화적 방법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전쟁에 뛰어들었다”는 내용이 담겼다. 참전 유족들은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전쟁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행동이 이뤄지진 않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명분의 취약성 외에 비인도적 행위로도 공분을 사고 있다. 키이우 외곽에서 발견된 민간인 시신(사진)이 현재까지 410구에 이른다고 한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여성을 집단 성폭행했다는 증언도 잇따르고 있다. 유엔 인권사무소는 어린이 292명을 포함 민간인 사상자가 3455명 발생한 것으로 최근 집계했다.   러시아 당국이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는 만큼, 시간이 걸리더라도 철저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 “(푸틴 대통령이) 전범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발언도 정치적 수사에 그치지 않길 바란다. 한영익 / 한국 정치에디터분수대 전쟁범죄 전쟁범죄 논란 전쟁범죄 혐의 전쟁 범죄

2022-04-10

[분수대] 안데르센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뉘하운(Nyhavn)에 간다. 뉘하운은 1673년 개통한 ‘새로운 항구’란 뜻의 운하다. 물길 양옆으로 들어선 알록달록한 건물이 동화 속 분위기를 자아낸다.   뉘하운에선 빨간 집, 노란 집을 찾기 바쁘다. 이곳에 덴마크가 낳은 세계적인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05~1875)이 살았던 집이 있어서다. 안데르센은 20번지, 67번지, 18번지를 옮겨 다니며 뉘하운에서 18년을 살았다. 뉘하운의 알록달록한 집들은 어두운 밤에 어부들이 손쉽게 자기 집을 찾기 위해서 칠했다고 한다.   1805년 덴마크 제3의 도시 오덴세(Odense)에서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난 안데르센. 코펜하겐에서 기차로 1시간 30분 떨어져 있는 오덴세 지명은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최고신 ‘오딘(Odin)’에서 유래했다. 그는 열네 살이던 1819년 연극배우의 꿈을 품고 처음 코펜하겐에 왔다. 1828년 코펜하겐대에 입학해 몇 편의 희곡과 소설을 쓰면서 작가적 재능을 드러냈다.   안데르센은 뉘하운 20번지에 살면서 서른 살이 된 1835년 첫 번째 동화집인 ‘어린이를 위한 동화’를 완성했다. 2년 뒤 발표한 ‘인어공주’를 시작으로 ‘미운 오리 새끼’ ‘벌거벗은 임금님’ ‘백조왕자’ ‘눈의 여왕’ ‘성냥팔이 소녀(1845년)’ 등 1872년까지 총 160여 편을 내놓았다.   뉘하운 다음으로 안데르센의 발자취를 좇는 곳은 코펜하겐 시청사다. 이곳에 안데르센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동상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공교롭다. 전 세계 놀이공원의 원조라고 불리는 티볼리 공원을 바라보고 있다. 티볼리 공원은 안데르센과의 친구였던 게오르그 카르스텐센이 1843년 왕가 소유의 정원을 개조해 만들었다. 월트 디즈니가 디즈니랜드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해 몇 차례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지난 21일(현지시각) ‘아동문학계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안데르센상을 한국의 이수지(사진) 작가(일러스트레이터 부문)가 수상했다. 1956년 제정된 상으로 2년마다 아동문학 발전에 공헌한 글·그림작가를 한 명씩 선정해 시상한다. 이 작가는 글 대신 최대한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을 추구한다. ‘글 없는 그림책’이다. 안데르센이 살았던 시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동화의 영역을 확장하는 그의 참신함이 놀랍다. 응원을 보낸다. 위문희 / 한국 사회2팀 기자분수대 안데르센 안데르센 동상 아동문학계 노벨문학상 세계 놀이공원

2022-03-27

[분수대] 공약

 공약(公約)의 사전적 의미는 공적인 약속이다. 대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시장 등을 선출할 때 후보자가 당선된 후 임기 내에 실행할 일을 국민에게 내세우는 약속을 뜻한다. 한국에서 공약은 공약(空約)이 된 지 오래다. 말 그대로 빈 약속, 헛된 약속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공약부터 그렇다. 역대 대통령의 공약이행률은 평균 30% 선이다. 후보 시절 국민에게 내세웠던 약속 3개 중 2개는 어겼다는 의미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에 따르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집권 4년 차 공약이행률은 41%, 이명박 전 대통령은 39%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39%), 고 노무현 전 대통령(43%), 고 김대중 전 대통령(18%)도 절반을 넘기지 못했다. 아직 임기가 남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행률은 공개 전이지만, 현 정부의 대선공약 체크사이트인 ‘문재인미터’는 17%로 본다. 주요 공약이었던 대통령 집무실 광화문 청사 이전, 고위 공직자 임용 기준 강화 등은 대표적인 파기 공약으로 꼽힌다. 대통령 집무실은 여전히 청와대고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임용 논란은 촛불 집회로 이어졌다.   제20대 대통령 선거는 0.73%라는 근소한 차이로 당선 여부가 갈릴 만큼 치열했다. 치열한 만큼 표심을 모으기 위해 남발한 공약도 적지 않을 테다. 윤석열 대통령(사진) 당선인의 주요 공약을 살펴보면 우선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 정부서울청사로 옮기겠다고 했다. 소상공인(자영업자) 330만 표를 위해 소상공인에게 최대 1000만원을 지원한다는 공약도 내세웠다. 여성가족부 폐지(양성평등가족부 신설), 250만 가구(수도권 150만) 공급 등도 있다. 모두 쉽지 않아 보이는 약속이다. 누군가에겐 당선을 위해 쏟아낸 공약일 수 있지만, 누군가는 오매불망 기다리는 약속일 수 있다. 각 공약 실행 여부에 대한 국민 개개인의 의견은 다르겠지만, 윤 당선인의 공약집 제목인 ‘공정과 상식으로 만들어가는 새로운 대한민국’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국민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약속 지키는 대통령’을 볼 수 있길 기대해본다. 최현주 / 한국 생활경제팀 기자분수대 공약 공약 실행 대통령 집무실 파기 공약

2022-03-16

[분수대] 온전한 역사

 독일 고슬라르(Goslar) 지역에는 ‘천 년의 채굴’ 역사를 간직한 람멜스베르크(Rammelsberg) 광산이 있다. 로마 시대부터 광산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은·구리·납·금 등이 났으며 문헌에서 확인되는 최초 채굴 기록은 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산은 1988년 천 년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고 폐광된 후 박물관으로 개조됐다. 1992년엔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오랜 역사만이 이곳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우크라이나인 등을 이곳에 강제동원했다. 천 년 중 극히 일부였지만, 전쟁의 광기와 폭력이 광산을 지배했던 셈이다. 독일은 이 역사를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올릴 때, 전체의 20%를 강제노동 역사를 설명하는 시설로 꾸몄다. 방문객은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생생히 담긴 인터뷰 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 1일 사도(佐渡) 광산(사진)을 세계유산으로 올려달라며 유네스코 사무국에 추천서를 냈다. 사도 광산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다수가 강제 동원된 역사의 현장이다. 일본판 람멜스베르크 광산인 셈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대상 기간을 에도 시대(1603∼1867년)로 한정해 일제강점기 역사를 쏙 빼고 사도 광산을 ‘자랑의 역사’로만 세계유산에 올리려고 한다.   가위질로 역사의 일부를 오려낼 수 있다는 일본의 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앞서 일본은 2015년 7월 군함도(端島) 등 강제징용 시설을 세계유산으로 올리면서 피해자를 기억하는 전시시설을 마련하겠다고 국제 사회에 약속했었다. 하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현장조사 후인 지난해 7월 ‘온전한 역사를 보여주는 내용이 없다. 희생자를 적절히 기리기 위한 전시물은 없다’며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온전한 역사(full history)’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등재 원칙이다. 밝은 면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면도 숨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명백한 증거와 증인이 있는 폭력과 가해의 역사는 더더욱 지워선 안 된다. 부끄러운 역사는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것이 온전한 역사에 가까워지는 길이다. 독일은 그리로 갔다. 일본은 반대로 가고 있다. 장주영 / 한국 사회에디터분수대 온전 역사 강제노동 역사 일제강점기 역사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2022-02-06

[분수대] 어른

 배우 오영수(78.사진)가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배우 윤여정(75)이 떠올랐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우린 깐부잖아”라는 대사를 남긴 오영수는 수상 소식이 전해진 직후 “내일 연극이 있다. 그 준비가 나에게 더 중요한 일”이라며 기자의 인터뷰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지난해 영화 ‘미나리’로 오스카상을 탄 윤여정은 평소처럼 좋아하는 화이트와인을 한 잔 가져달라고 한 뒤 기자간담회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배우 인생 최대의 전성기 앞에서도 평정심을 발휘했다.   한국 배우로는 최초로 미국 양대 시상식의 트로피를 거머쥔 주인공이 된 이들에게서 ‘어른’의 역할과 무게에 대해 생각해본다. 둘 다 일흔을 넘긴 나이다. 어른다운 어른, 닮고 싶은 어른이 없는 사회는 불행하다. 패션잡지 ‘보그’의 에디터 출신 김지수는 평균 나이 72세의 어른 16명을 인터뷰해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이란 책을 냈다. ‘그 많던 어른은 어디로 갔을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가 고민될 때 오롯이 자기 인생을 산 어른의 한마디는 성찰의 실마리를 안겨준다.   오영수와 윤여정은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상을 받았다. 오영수는 ‘오징어 게임’으로 명성을 얻은 뒤에도 한 예능에서 “우리 사회가 1등 아니면 안 될 것처럼 흘러갈 때가 있어요. 2등은 1등에게 졌지만 3등한테 이겼잖아요. 다 승자예요”라고 말했다. 윤여정은 오스카상 수상 직후 간담회에서 “나는 최고, 그런 거 싫다. 경쟁 싫어한다. 1등 되는 것 하지 말고 ‘최중’(最中)이 되면 안 되나”라고 말해 좌중을 웃음에 빠뜨렸다. 독창적이면서 인생을 제대로 산 발언이다. 1등이 아니어도, 최고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어른에게 2030세대는 열광한다.   지난해 여야 정치권에서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하기 전 3선 국회의원 출신 정치인과 저녁 자리를 가졌다. 그는 앞으로 여야에서 ‘두 어르신’의 행보를 주목하라고 했다. 두 사람 다 대선을 승리로 이끈 경험이 있어 킹메이커로 평가됐다. 당시엔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지금은 갸웃거리게 된다. 한 명은 결국 자당 후보와 결별했고, 다른 한명은 존재감이 안 느껴져서다. ‘상왕’ 노릇을 해서도 안 되지만, 원로 정객이 없어도 문제다. 정치판에서까지 어른다운 어른을 기대하는 건 너무 큰 욕심일까. 위문희 / 한국 사회2팀 기자분수대 어른 어른 16명 배우 윤여정 배우 오영수

202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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