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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인생길과 경전

한국에서 주된 불교 종단은 조계종이며 선종을 기반으로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간화선을 선법으로 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출가 전에 좌선에 관심을 가졌는데 20대에 필자 생각으로는 화두를 들고 좌선을 하는 것이 더 적극적이며 이가 깨달음의 지름길인 것 같았습니다. 따라서 좌선할 때 한동안 화두를 들고 선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지 노력보다 안정이 잘 안 되었고, 선에 집중도 또한 떨어졌습니다. 어느 날 원불교 경전을 읽고 저의 선법을 바꾸었고 그 후 좌선이 잘 되었습니다. 다음은 필자가 읽은 경전 구절입니다.   간화선은 사람을 따라 임시방편은 될지언정 일반적으로 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니, 만일 화두(話頭)만 오래  계속하면 기운이 올라 병을 얻기가 쉽고 또한 화두에 근본적으로 의심이 걸리지 않는 사람은 선에 취미를 잘 얻지 못 하나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좌선하는 시간과 의두 연마하는 시간을 각각 정하고, 선을 할 때는 선을 하고 연구를 할 때는 연구를 하여 정과 혜를 쌍전시키나니, 이처럼 하면 공적(空寂)에 빠지지도 아니하고 분별에 떨어지지도 아니하여 능히 동정 없는 진여성(眞如性)을 체득할 수 있느니라.(원불교 정전)   대종사 선원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근래에 선종 각파에서 선의 방법을 가지고 서로 시비를 말하고 있으나, 나는 그 가운데 단전주(丹田住)법을 취하여 수양하는 시간에는 온전히 수양만 하고 화두 연마는 적당한 기회에 가끔 한 번씩 하라 하노니, 의두 깨치는 방법이 침울한 생각으로 오래 생각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명랑한 정신으로 기틀을 따라 연마하는 것이 그 힘이 도리어 더 우월한 까닭이니라.” (원불교 대종경 수행품 14)   경전이 마음공부의 방향을 가르쳐주기에 많은 불교 종단에 있어서 처음 출가한 승려들은 본격적으로 선방에서 참선 공부를 하기 전 최소한 몇 년 경전공부를 해야 합니다.     중국에 현장 스님(AD 602~664)은 10대 초에 출가하여 경전공부와 수행에 매진했습니다. 경전공부를 하면서 중국어로 번역된 불교 경전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종종 있었습니다. 실제 부처님께서 무슨 말씀을 정확히 하셨는지를 알기 위해 원전 즉 팔리어와 산스크리트로 된 불교 경전을 공부하고자 현장 스님은 29세에 중국을 떠나 인도로 향합니다. 걸어서 가는 여정이었고 고비사막을 지나고,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으로 가서 히말라야 산맥을 지나야 하는 참으로 길고 길 여정입니다. 당나라 수도 장안을 떠나 불교 수행과 연구의 요람인 인도 나란다 사원에 도착하는 데 6년이 걸렸습니다. 이곳에서 팔리어, 산스크리트로 된 부처님 경전을 5년간 공부하고, 다시 많은 불경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7년이 다시 소요되었습니다. 당시 한국, 중국 등에서 이러한 순례 여행을 떠난 스님들이 많았습니다. 태반의 순례자들은 여행 도중 사망했습니다. 신라 시대 한국에서 인도로 순례 간 혜초스님은 고비사막을 헤매다가 사람들의 뼈가 바람이 불어서 모래에 드러나면 이 길은 아마 과거 순례객이 걸어온 길이라고 생각하고 그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고 합니다. 다음은 인도로 가는 순례길에서 혜초스님이 지은 시의 일부입니다. “다람쥐와 새들도 살기 어려워 하는 히말라야 산, 난 지금 이길을 걷고 있구나.”   박물관에서 양피지로 된 두꺼운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성경을 사기도 힘들었고 아주 비쌌을 것입니다. 태반의 사람들이 글도 읽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경전을 구할 수도 있고 경전을 쉽게 읽을 수 읽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좋은 시대에 태어나서 살고 있습니다.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들이여! 시대가 비록 천만 번 순환하나 이 같은 기회 만나기가 어렵거늘 그대들은 다행히 만났으며, 허다한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드물거늘 그대들은 다행히 이 기회를 알아서 처음 회상의 창립조가 되었나니, 그대들은 오늘에 있어서 아직 증명하지 못할 나의 말일지라도 허무하다 생각하지 말고, 모든 지도에 의하여 차차 지내가면 멀지 않은 장래에 가히 그 실지를 보게 되리라.”(수행 15)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인생길 경전 원불교 경전 부처님 경전 원불교 창시자

2024-03-14

[삶과 믿음] 경전을 왜 읽어야 하나

1983년 민간인 269명을 태운 KAL 여객기가 미국 JFK 공항을 출발해서 한국으로 오는 도중 조종사의 실수로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비행기가 소련 상공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소련 전투기가 미사일을 발사해서 민간인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이 한순간에 일어났습니다. 조종사의 실수가 이 같은 참사를 초래한 것입니다. 문제의 근본은 비행기가 가야 할 경로를 이탈한 데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은 여러 난관과 고통을 겪기 마련인데,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고통의 주된 원인은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한자로 도(道)라 표현하는데, ‘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제불제성의 가르침은 우리를 행복과 자유로 가는 길(Way)을 제시한 것입니다. 우리가 익숙하지 못한 곳을 운전해 갈 때 내비게이터가 있어 길을 잘 가르쳐 줍니다. 인생길에서 최선의 길을 우리가 모를 때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을까요?   불보살들의 가르침이 담겨있는 ‘경전’이 바로 이 길을 제시합니다. “성인이 나시기 전에는 도(道)가 천지에 있고, 성인이 나신 후에는 도가 성인에게 있고, 성인이 가신 후에는 도가 경전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주문하면 날로 된 고기와 채소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져서 적당히 잘 익혀서 나옵니다. 경전은 진리 자체를 담고 있지만, 경전이란 우리가 현실생활에서 그 진리를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진 교과서입니다. 경전은 우리 인생을 풍족하고 자유롭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는 인생 안내서입니다.   원불교 정전에 ‘경전’은 다음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경전은 우리의 지정 교서와 참고 경전 등을 이름이니, 이는 공부인으로 하여금 그 공부하는 방향로를 알게 하기 위함이요.” 경전은 “공부하는 방향로를 알게 하기 위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목적지에 가기 위해 운전을 열심히 하는 것도 주요하지만 방향을 모르면 열심히 운전하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원불교 초창기에 좌선과 명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정진하는 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좌선하면 잡념이 차차 사라지고 우리 몸에서 수기가 올라오고 화기가 내려가서 몸과 마음이 상쾌하게 되는데 그는 수승 화강을 조급히 바라다가 도리어 두통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공부하는 길을 잘 알지 못하는 연고라, 무릇 원만한 공부법은 동과 정 두 사이에 공부를 여의지 아니하여 동할 때는 모든 경계를 보아 취사하는 주의심을 주로 하여 삼대력을 아울러 얻어 나가고, 정할 때는 수양과 연구를 주로 하여 삼대력을 아울러 얻어 나가는 것이니, 이 길을 알아 행하는 사람은 공부에 별 괴로움을 느끼지 아니하고 바람 없는 큰 바다의 물과 같이 한가롭고 넉넉할 것이요, 수승 화강도 그 마음의 안정을 따라 자연히 될 것이나 이 길을 알지 못하면 공연한 병을 얻어서 평생의 고초를 받기 쉽나니 이에 크게 주의할지니라.” (원불교 대종경수행품 40)   많은 수행인들이 열심히 공부하지만 종종 그 ‘방향로’를 몰라서 고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인생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그‘길’을 모르기에 많은 사람이고통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 공부 길을 잡았나?” 자주 물어보셨다 합니다. 수행에 있어서나 혹은 인생의 어떤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서나 정확한 길, 최선의 길을 아는 것이 주요합니다.   “수행 없는 이해는 공허하고, 이해에 바탕을 두지 않는 수행은 장애를 초래한다.” 어떤 선지식의 말씀입니다. 종일 지도만 들어본다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며, 지도 없이 모르는 길을 무작정 운전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삼가 너희는 너 생각을 믿지 마라.” 하셨습니다. 특히 초보 수행자일수록 경전을 가까이하며 공부길, 인생길을 자주 점검받아야 합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경전 참고 경전 원불교 대종경수행품 부처님 말씀

2023-12-14

[신복룡의 신 영웅전] 유마힐 거사의 작은 방

경기도 광릉 봉선사(奉先寺)의 큰 스님인 월운(月雲) 조실(祖室)께서 최근 입적하셨다. 『팔만대장경』 번역을 끝내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던 그분 앞에 꿇어앉아 천주교 신자인 내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배우던 40년 전의 인연이 생각났다. 이렇게 한 시대가 가는구나 싶어 마음이 처연하다.   큰 절 중에서도 참선하고(禪院), 불법을 가르치고(講院), 계율을 가르치는(律院) 시설을 갖추면 총림(叢林)이라 부른다. 국내엔 해인사·송광사·통도사·수덕사·백양사·동화사·쌍계사·범어사 이렇게 여덟 곳이 있다. 그곳의 가장 높은 어른을 방장(方丈)이라 부른다.   불교사에서 방장 칭호를 처음 들은 분은 부처님의 제자인 유마힐(維摩詰) 거사인데, 그는 평신도였지 스님이 아니었다. 불가에서는 『화엄경(華嚴經)』처럼 부처님의 말씀만을 ‘경’(經)이라 부르고, 제자들이 지은 것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처럼 ‘론’(論)이라 부른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이 아닌 글 중에 경이라 높여 부르는 것은 딱 두 권인데, 유마힐의 『유마경(維摩經)』과 육조(六祖) 혜능(惠能)의 『법보단경(法寶壇經)』이다.   유마힐 거사는 불제자보다 뛰어나 당대부터 지금까지 교파를 초월해 존경받는다. 그의 말씀에 따르면 평생해야 할 일은 베풀고(布施), 참으며, 정진하고, 수행하고, 지혜를 배우는 여섯 가지, 즉 육바라밀(六波羅密)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색·파계·분노·나태·번뇌·무지의 여섯 가지, 즉 육폐(六蔽)다.   유마힐 거사가 세상을 떠날 때 살던 방이 사방(四方) 여섯 자(尺, 6척=1.8m)였다. 한 모서리의 길이가 사람 키와 같은 한 길(丈)이어서 그때부터 고승의 청빈함을 뜻하는 용어로 방장(方丈)이라 했다. 종교를 가릴 것 없이 요즘 대형 교당과 호화로운 성직자의 삶을 보노라면 유마힐 거사의 믿음을 입에 담기도 부끄럽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복룡의 신 영웅전 유마힐 거사 유마힐 거사가 부처님 말씀 경기도 광릉

2023-07-09

[수필] 아내가 없어졌다

몇 달 전에 갑자기 아내가 없어졌다. 그녀의 침대는 그 후로 죽 비어있다. 은퇴했으니 일을 나가진 않았을 테고, 외출했나? 곧 돌아올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아내가 쓰던 달력은 아직 종착역도 아닌데 3월에 고장이 난 듯 멈춰 서있다. 옷장의 옷들, 신발장의 구두들은 눈 한번 뜨지 않고 그대로다. 응접실의 세간도 그렇고 부엌에 가면 그녀가 꾸려놓았을지 모를 반찬이 아직도 냉장고에 있을 듯하다. 아내가 가꾸던 앞뜰과 뒷마당 잔디밭 끝의 나지막한 비탈 위로 화초와 꽃들은 속없이 활짝 웃는 듯 피어나고 있다.     오랜 병고에 시달리던 아내가 몇 달 전에 하늘나란지 어딘가로 떠났다. 죽기 2주 전, 응급실에 들어갈 때, 늘 그랬듯이 하루 이틀 응급처치 후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     간호사였던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꿰뚫고 있어서 상태가 안 좋을 때면 응급실에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무리 다그쳐도 스스로 가늠하고 여부를 결정했다. 그러나 이번엔 그게 아니었다. 응급실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한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대신 중환자실로 옮겨졌던 거였다. 몇 차례 수술할 때를 제외하곤 중환자실은 처음이었다. 저혈압 상태가 심각하다고 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아내는 직장암 수술에다 소장이 꼬여서 했던 수술 자리와 방사선치료의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을 견디지 못해 비명을 질러댔다. 진통 효과가 떨어질 때마다 의료진은 모르핀 주사로 아내 몸뚱어리의 단단한 고통을 흐트러트리고 멈추게 했다. 그녀의 통증은 내 것처럼 받아들이기에 너무 힘들어 의료진에게 제발 통증만은 없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었다.     모르핀 진통제의 함량은 날마다 점점 높아갔고 코에 끼웠던 산소 호스가 얼굴을 덮어쓰듯 큰 산소마스크로 바뀌면서 아내의 몰골과 의식은 현존하는 세상과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아내는 거역할 수 없는 강물의 물살에 밀려 가물가물 세상과 멀어지는 것 같았다. 차디찬 손을 잡아보지만 떠내려가는 그녀의 온기를 되찾을 수 없었다.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아니면 최소한 잘 있으라는 작별의 인사 한마디도 못 하고 있었다.     마지막 숨을 거칠고 힘겹게 쉴 때 내 마음에 담아 준비해뒀던 ‘내가 당신한테 잘못한 게 너무 많아, 미안해. 용서해주고 다 내려놓고 가벼이…’, 그리고 (티벳사자의서)에서, 또는 많은 임사 체험자들의 증언대로 ‘어디선가 황홀한 빛이 나타나면 두려워하지 말고 그 빛을 따라 들어가’라는 말을 건네주지 못했다. 길 떠나는 아내에게 끝내 노잣돈 한 푼 못 주고 낯선 먼 길을 빈손으로 보내는 것 같았다. 거칠게 쉬던 숨이 잦아들다가 멈춰버리자 결국 그게 그녀의 세상과의 마지막이었다. 태어나 꽃피고 아름답고 슬펐던 삶이라는 한바탕 꿈이 깨어지는 찰나였다. 또한 삶의 괴로움과 병고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의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아내가 남은 식구들과 작별하는 마지막이 어떻게 이렇게 엉성하고 간단하고 허무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과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은 창세기에서 왜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사라질 거라고 귀띔이라도 안 해주었나?     밀려오는 통탄, 내 아내에게 준 많은 잘못과 상처들을 용서받지 못한 회한 등 엄청난 무게의 슬픔이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고 또 밀려왔다.     나는 희미한 온기가 남은 아내의 벌어진 눈과 입을 꼬옥 눌러 죽음을 닫았다. 신의 사랑이라던가 무슨 계시나 은총 같은 공허한 약속들도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하게 아내의 죽음에 함께 가둬버렸다. 지금까지 내가 긴가민가하면서 알고 있거나 추구했던 삶의 의미나 죽음에 관한 신관, 종교나 철학적 사고는 무용이었다. 내가 알지만, 내 반쪽이었던 아내의 삶은 허무맹랑할 정도로 무의미했다. 세상 만물에 대한 의미도 내가 어떻게 부여하느냐에 달렸을 뿐 어떤 고정된 절대적 가치는 없는 것처럼. 그러니 아내가 살아온 삶과 남겨진 추억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부질없고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녀의 예순아홉 생애는 죽음 앞에서 백 살을 산 사람이 있다고 한들 매한가지 아닌가.   나는 장례식 없이 가족만 모여서 조용한 이별식을 한 후에 화장하기로 장례회사와 계약했다. 평소 조문객 불러 모아 치르는 장례식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장례식은 죽은 자와는 상관없이 산 자들 위주로 치러졌고 별로 아름답지도 않은 시신을 진열하고 장례식장 입구에서는 부조금을 접수하는 방식을 나는 혐오해 왔던 터였다. 그리고는 그 접수된 부조금으로 장례비 계산하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아내와 평소에 그런 죽음 후의 절차를 상의한 적도 없으니 그 사항은 공란이었기에 나 혼자 내린 결정의 이유이고 배경이었다. 그러나 곧 내 결정을 수정해야 했다. 자식들과 처가 형제들이 반대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장례 일정을 잡고 장례회사와 연계된 작은 교회를 정했다.     장례식은 교회에서 불교식으로 치렀다. 시작할 때 나는 조문객에게 일러뒀다. 기독교 신자로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랐으나 이제부터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따르겠다며 몇 년 전 불교에 입문했으므로 불교식으로 진행하게 되었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내겐 예수와 석가모니 부처와의 경계가 없노라고 덧붙였다. 장례식을 끝내고 화장한 유골함을 영정 사진, 꽃과 함께 집안 응접실에 봉안해 모셨다. 산소에 갈 필요가 없어 좋았다. 때때로 사진을 보고 ‘왜 그랬어?’ ‘미안해’ ‘고마워’라고 말을 건네곤 한다. 요즘엔 ‘왜 그랬어?’는 원망 투라서 뺐다. 딸내미도 제 아들 생일에 유니버설 스튜디오 다녀왔다고 엄마에게 보고를 했다.     석가모니 부처가 말했잖은가, 생겨난 것은 모두 사라진다고. 이제 시간은 비밀처럼 흘러 후회되는 아픔도 그리움도 조금씩 옅어져 간다. 아내가 없어졌듯이 그리움도 차차 없어지겠지. 김윤기 / 수필가수필 아내 아내 몸뚱어리 장례식장 입구 석가모니 부처님

2022-09-22

[시조가 있는 아침]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무명씨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섰거라   너 가는 데 물어보자 손으로 흰 구름 가리키고   말 아니코 간다   -청구영언 진본   그리운 탈속의 경지     작가를 알 수 없는 이 시조는 문맥을 초월한 즉흥적 직관적 세계와 만나게 한다. 즉 다리 위에 중이 가니까 물 아래 그림자가 지는 게 아니라, 물 아래에 그림자가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고 표현하고 있다. 논리적으로는 모순 어법이지만 자연을 앞세우고 인간을 뒤로 세운 것이다.   저 스님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물어보아도 말 아니하고 손으로 흰 구름을 가리키니 그야말로 탈속의 경지라고 하겠다. 이 스님은 혹시 안거(安居)에 들 수행처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안거는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생긴 것인데, 인도에서는 우기(雨期)에 땅속의 작은 동물들이 기어 나오기 때문에 길을 걸어 다니다 보면 그것들을 밟아 죽일 염려가 있고 또 각종 질병이 나도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제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우기의 3개월은 다니는 것을 중지하도록 설하신 것이 안거의 시작이다.     우리나라는 혹서기와 혹한기가 있는 나라여서 음력 4월 보름부터 7월 보름까지를 하안거, 시월 보름부터 정월 보름까지를 동안거로 해서 스님들이 산문 출입을 자제하고 수행에 정진하는 기간으로 삼고 있다. 유자효 / 한국시인협회장시조가 있는 아침 그림자 무명씨 아래 그림자 정월 보름 석가모니 부처님

2022-05-18

[동화] 누나를 만나고 온 날

“누나는 여전히 맑은 눈동자와 엄한 입매를 하고 있습니다 얼굴에 핀 검버섯도 아름답네요 청색이 날 정도로 까맣던 머리는 겨울 눈처럼 백발이 되었습니다”   누나를 만나러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북쪽을 향해 달리는 차창 너머 짙은 푸른 하늘이 하얀 뭉게구름을 몰고 빨리도 지나갑니다. 겨울이 문턱을 넘어오려다가 주춤해 버린, 늦은 가을날 오후였지요. 누나는 3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 뵈러 온 것이었어요. 투병 중이었던 매부를 돌보느라 그간 누나는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매부는 올해 봄에 소천했습니다.     45년 전, 그러니까 내가 13살 때, 미네소타주에 있는 어느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던 누나는 지금껏 미국에 살고 있어요. 국군의 날이나 현충일에 매년 아버지를 만나러 한국을 다녀가곤 했지요. 아버지 묫자리는 현충원에 있습니다. 현충원에 있는 아버지 묘소는 빈 무덤이라고 누나가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누나는 매년 현충원을 방문하려 귀국하곤 합니다. 아버지는 6·25 전쟁 때 전사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유해는 찾지 못했다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 석 자가 단정하게 새겨져 있는 돌비석만이 아버지가 한때 이 세상에 계셨다는 것을 말해 줄 뿐입니다. 아버지의 영은 두 딸과 내가 입양되기 전까지 외아들이었던 형을 바라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당신이 만난 적이 없는 당신의 막내아들인 나를 쳐다보시면서, ‘잘 왔다’ 하시리라 믿습니다. 지금은 엄마도, 형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요. 나는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어요. 아버지가 전사하셨을 때, 누나는 세 살이었다고 합니다. 스물 몇 살 새파란 나이에 과부가 되어 가장의 임무를 도맡게 된 엄마는 생계를 꾸려가는 것이 무척 힘들었대요. 살림이 옹색한 가운데에도 틈을 내어 보육원에서 봉사하시곤 했대요. 봉사하시던 보육원에서 엄마와 나는 만난 것이랍니다. 나는 겨우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던 나이였다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15년 정도가 지난 후였다고 해요.     나는 전사하신 아버지의 가정으로 입양되어 아버지의 성씨를 받았어요. 나는 유복자가 아니고, 유복 입양아이예요. 나를 업어 데리고 갔던 엄마… 퀴퀴한 땀내가 배인 엄마의 적삼, 그 가슴에 안겨 잠들곤 했던 나는, 지금도 엄마 냄새를 맡을 수 있어요. 엄마의 냄새는 끝없는 평화를 약속하는 것이었어요.     누나는 절에서 민박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올해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누나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절에는 제명을 채우고 간, 얼굴에 주름을 달고 살 수 있었던 이들의 흔적이 있어서, 누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했습니다.     넓고 넓은 현충원 뜰의 침묵이 무겁게 누나를 누르고, 즐비하게 줄지어 서 있는 새하얀 화강암 비석들이 누나의 뼛속까지 시리게 한다고 했습니다. 돌 비석에 새겨져 있는 이름 석 자는 젊음을 하늘에 토해내고, 돌 비석의 가슴은 그들의 신음을 끌어안고 있다 했어요. 젊은 그들, 돌 비석 주인들의 얼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누나를 만나기로 한 대웅전 앞에 누나는 없었어요. 대웅전의 어둠과 정적에 익숙해지고 나니, 부처님상에서 떨어져 있는 한구석에 눈을 감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누나가 보였어요. 누나는 불교 신자들이 하는 참선을 하는 것 같았어요. 누나의 종교로 말하자면 묵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네요.   “누나, 부처님한테 기도한 거야? 하느님한테 혼나려고?”   “하느님은 그렇게 옹졸하지 않아. 어디서나 당신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거든.”   왜소했던 누나는 50여년 전 나를 업어 길러주던 때보다 더 작아 보였어요. 나를 등에 태웠던 좁았던 어깨는 더 좁아졌고요. 어떤 때는 나를 등에 업고 수강하러 가던 누나입니다. 맑은 눈과 진실한 입매를 가졌던 누나. 내가 6척의 청년기를 지나, 흰머리가 성성하게 된 지금, 누나는 여전히 맑은 눈동자와 엄한 입매를 하고 있습니다. 누나의 얼굴에 핀 검버섯도 아름답네요. 청색이 날 정도로 까맣던 머리카락이 새까만 기와지붕에 녹지 않고 덮여 있는 겨울 눈처럼 백발이 되어있네요.   가난한 살림, 엄마가 가장이 된 집에, 나를 데리고 오셔서 입적시키셨던 엄마는 배짱이 컸거나 바보 같은 신념으로 사셨던가 봐요. ‘하느님은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게 한다’라는 것이 엄마의 인생 철학이었다고 합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만나지 못한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당신의 성(姓)을 주셨고 아버지의 이름은 엄마만큼이나 나에게 튼튼한 성채가 되었어요. 두 누나와 형은 자주 편찮으셨던 엄마 대신 나를 돌보아 주었어요.   “누나, 누나는 비 오는 날이면 나를 업고 왜 산에 갔어?”   “그랬지. 산에 가곤 했지.”   “누나, 학교는 빼 먹고 간 것이었어?”   “응. 당연히….”   “누나, 낙제를 어떻게 면했어?”   “겨우, 겨우. 그래서 너를 업고 학교 간 적도 여러 번 있었지.”   “강의시간에 등에 업혀 들어온 나하고, 누나를 보고, 누나 친구들이나 교수님이 뭐라 하지 않았어?”   누나는 이어서 내가 모르던 옛날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엄마가 아파 누워계셔서 나를 돌보실 수 없는 날에 비까지 오면, 누나는 나를 업고 학교 가는 대신, 산에 지렁이를 잡으러 갔다고 말입니다.     “그랬구나. 그런데, 누나, 왜 지렁이를 잡으러 다녔어?”   “비가 적당히 오면, 지렁이들이 땅에서 기어 나와. 엄마한테 고깃국을 끓여드려야 하는데 고기 살 돈이 없었거든. 지렁이에는 단백질이 많다고 해서.”   “누나, 그럼 우리가 먹던 국이 지렁이 국이었어?”   누나를 만나고 온 날 밤 꿈속에서, 지렁이가 소고기로 변하는 국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전월화(류 모니카) / 수필가동화 누나 누나 학교 누나 부처님 누나 친구들

2022-03-31

[독자 마당] 슬픔의 무게

슬픔에도 무게가 있을까. 사람이 살면서 겪는 고통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이 가족을 잃는 슬픔일 것이다. 오랜 지인이 외아들을 잃었다. 훌륭한 안과의사로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을 찾아 종합검사를 했는데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아들은 곧바로 입원해 치료에 들어갔지만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가족들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슬픔을 덜어 줄 수 있을까. 정말로 난감했다. 슬픔도 나누면 이겨나갈 수 있으려만… 그러기에는 슬픔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궁리 끝에 옛 이야기가 생각났다. 석가세존이 기원정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3대 독자를 잃은 한 미망인이 삶의 의욕을 잃고 부처님을 찾아가 울면서 자신의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부처는 지금 마을로 내려가 사람이 죽지 않은 일곱 집을 찾아 쌀 한 움큼씩 얻어 오면 슬픔을 견딜 수 있는 방책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여자는 부처님 말씀대로 마을로 내려가 온종일 돌아다녀 봤지만 어느 한 집도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을 찾지 못했다.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 부처에게 전후 사정을 말했다.     부처님은 누구나 한 번은 반드시 죽는다고 하면서 그 여자 스스로 체험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인생은 탄생과 죽음이 반복되는 윤회의 삶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모두 한 번은 죽는다. 다만 조금 일찍 또는 조금 늦게 죽는 차이일 뿐이다. 죽음에는 차례가 없다. 그럼에도 아깝게 일찍 죽는 것과 천수를 다하는 차이에 따라 슬픔의 무게도 크게 달라지는가 보다.  이산하·노워크독자 마당 슬픔 무게 부처님 말씀 정신적 공황상태 급성 백혈병

2022-03-18

[아름다운 우리말] 선생은 먼저 하는 사람

 선생(先生)이라는 말은 먼저 태어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하루라도 먼저 나온 사람은 선생의 자격이 있습니다. 물론 선생이 생물학적인 먼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먼저 배운 사람도 선생이 될 수 있고, 먼저 겪은 사람도 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세상에는 선생이 될 사람이 참 많습니다. 내게 선생이 될 사람도 많고, 내가 선생이 될 경우도 많습니다. 선생은 누군가의 앞에 서면 선생입니다.     선생의 생(生)은 생명이라는 뜻도 있고, 사람의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산다는 말은 살아간다는 말이고 살아가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일 겁니다. 살다와 사람이라는 단어가 비슷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우리말 ‘사람’의 어원을 ‘살다’에서 찾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는 게 삶입니다. 선생은 먼저 하는 사람입니다. 먼저 배웠기에 선생 노릇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학생(學生)은 선생에게 배우는 사람입니다. 나중이기에 열심히 배워야겠지요. 중생이라는 말도 사람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생’의 발음이 바뀌면 사람에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중생(衆生)이라는 말이 변하여 짐승이 된 겁니다.   선생의 정의를 다시 반복하여 말하면 먼저 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먼저 하는 사람일까요? 기본적으로는 공부를 미리 하여야 할 겁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학생의 궁금증을 미리 경험해야 하고, 학생의 질문을 예상하여야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내가 배운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내용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봐야 합니다. 선생 일이 쉽다면 그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 속담에 선생의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그랬을 겁니다. 왜일까요? 모든 애를 썼기에 어떤 영양도 남지 않았을 겁니다. 선생도 참 힘든 직업입니다.   그런데 선생이 먼저 해야 할 것은 공부만이 아닙니다. 학생이 겪어야 할 힘든 일은 최대한 먼저 해 보아야 합니다. 직접 할 수 없다면 간접적으로라도 경험해 봐야겠지요. 수많은 독서가 필요한 이유일 겁니다. 앞선 이들이 남긴 책을 통해서 더 많은 간접 경험을 해야 학생의 고통 앞에서 공감할 수 있겠지요. 선생의 중요한 능력 중 하나는 공감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학생은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선생이 해야 할 일 중 아마도 제일 어려운 일은 학생에게 뒷모습을 보이는 일일 겁니다. 뒷모습이 부끄럽지 않게 길을 만들며 사는 사람이 선생입니다. 선생은 그런 의미에서 앞서 걷는 사람입니다. 물론 항상 올바로 살 수는 없겠죠. 허나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세만은 잃지 않아야 합니다. 선생의 뒷모습은 당당해야 합니다. 처진 어깨여서는 안 됩니다. 내 발걸음을 따라오는 학생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처님, 공자님, 예수님을 모두 선생님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스승도 모두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대통령이나 총리라는 말보다 선생님이라는 말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합니다.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럴 겁니다. 직위가 중요한 세상이 아니라 가치가 중요한 세상이라면 말입니다. ‘선생’이라는 말은 직위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 역시 선생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선생입니다. 오늘도 다른 이도 먼저 할 일을 생각합니다. 오늘도 조금 더 빠르게 몸을 움직이고, 좀 더 바르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책을 읽고, 길을 걷고, 산을 오르고, 사람을 만납니다. 가치 있는 하루를 사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선생의 일은 힘들지만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선생 선생 노릇 간접 경험 부처님 공자님

2021-11-14

부처님 오신 날 행사 풍성

'깨달음의 빛,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의 길을 걷고자 연등에 불 밝힙니다.' 불기 2555년 부처님 오신 날(10일)을 맞아 뉴욕·뉴저지 한인 불교계가 8일 일제히 봉축법요식을 열고 이 땅에 부처님의 법이 널리 퍼지기를 기원했다. 각 사찰은 이날 오전 11시 봉축법요식을 봉행하고 이어 사찰 어린이, 청장년 등이 펼치는 농악놀이, 태평무, 달타령 등 다채로운 축하행사를 열어 아기 부처가 이 땅에 오신 뜻을 되새겼다. 올해는 유난히 제등행렬이 많이 열렸다. 해가 질 무렵 오후 7시가 되자 뉴욕불광선원. 한마음선원 뉴욕지원, 뉴저지 원적사 신도들은 연등에 불 밝히고 사찰 주변을 돌며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지혜의 빛이 온 누리에 퍼져 나가기를 서원했다. 맨해튼 일대에선 뉴욕불교국제봉축위원회(ICCBB)가 마련한 제등행렬이 펼쳐졌다. 올해 23회째를 맞은 이 행사는 오후 6시30분 유니온스퀘어파크를 출발해 6애브뉴를 따라 26스트릿을 돌아 23스트릿 메디슨파크까지 연등의 물결이 이어졌다. 뉴욕불교사원연합회 회장 휘광(뉴욕불광선원) 스님은 이날 봉축사를 통해 "우리는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믿어야 한다"며 "우리 중생들은 자신을 훌륭하며 가장 의미 있는 존재로 생각하고 또 그런 존재로 스스로의 불성을 깨우쳐만 한다"고 말했다. 휘광 스님은 또 "유래 없는 경제위기와 최악의 자연재해 속에 처해 있다"며 "하지만 지금의 어려운 상황과 모습으로 미래를 구속 짖지 말고 긍정적 사고와 위대한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채워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광선원에서 열린 봉축식에서는 조계종 총무원장이 보내 온 봉축사를 부주지 혜민 스님이 대독했다. 이 자리에는 또 뉴욕한국문화원 이우성 원장, 컬럼비아대 불교학과 천팽 유 교수 등이 참석해 축하했다. 올해는 한인 불교계가 해마다 열어 온 연합봉축법회를 올해 열지 않았다. 대신 오는 16일부터 21일까지 UN에서 17개 나라가 합동으로 여는 봉축행사에 참여한다. 정상교 기자

2011-05-08

"온누리에 부처님의 자비를…"

불기 2555년 ‘부처님 오신 날’ 워싱턴 일원 사찰 봉축대법회      불기 2555년 석가탄신일(음력 4월 초8일, 5월 10일)을 맞아 오는 8일(일) 워싱턴 일원 각 사찰에서 봉축기념 대법회가 열린다.  미 워싱턴 불교사원연합회(봉축위원장 김경암 스님)는 이날 오전 11시부터 밤 12시까지 사원연합회 각 사찰에서 봉축 법요식을 갖는다고 밝혔다.  소속 사찰은 대한불교조계종 워싱턴 법주사(허관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메릴랜드 원등사(법해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워싱턴 한마음 선원(혜양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아란야사(해인 스님), 워싱턴 정토회(법륜 스님), 대한불교태고종 메릴랜드 보현사(아난 스님), 대한불교진각종 법광심인당(인덕 정사), 대한불교조계종 무량사(향산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워싱턴 보림사(김경암 스님) 등이다.  김경암 스님은 “부처님 오신날을 기념해 한인 동포사회의 평안과 미국의 안녕, 그리고 경제가 회복되길 기원한다. 남북 평화통일을 향해 한인사회가 서로 화합하고 발전해 나가길 기원한다”면서 “각 불자들은 부처님의 광명과 자비, 지혜를 온 세상에 밝히는 의미에서 각 사찰에서 등을 밝혀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문의: 703-352-0380, 301-570-8040  유승림 기자

2011-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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